동물농장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지 오웰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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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 제목을 모두 알 것이다.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도 꼭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동물농장>이란 고전이 학창시절 늘 추천도서 혹은 필독서로 올라왔고, 때로는 반공교육을 위한 하나의 교재로 이용되기도 했다. 나 자신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아마 초반부를 잠시 훑어본 것이 전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 그 당시 읽었다고 해도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읽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그만큼 이 소설은 낯익고 많은 상징과 비유와 은유로 가득하다.

많은 고전들처럼 <동물농장>도 참으로 많은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모든 판본을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정확한 비교를 하기 힘들지만 비채 판은 상당히 많은 주석을 달아놓았다. 처음에 이 주석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되었다. 이런 정치 우화 소설의 경우 주석자의 의도에 따라 작가의 원래 의도가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주석이 이야기의 흐름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방해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고민을 하다 주석을 하나씩 읽기 시작했고 나의 지식 한도 내에서 그 해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주석들이 결코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원작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의미를 충실히 따르고자 한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용은 너무나도 잘 알려줘 있다. 구 소비에트연방 초창기를 우화적으로 다루었다. 레닌의 분신인 듯한 돼지 메이저 영감의 꿈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희망을 동물농장의 동물들이 받아들이고, 협동하여 농장주를 몰아낸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바로 떠오른다. 이어서 나폴레온과 스노볼이라 불리는 두 돼지가 등장한다. 각각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분신이다. 이 둘의 권력투쟁과 함께 소비에트연방의 초창기 인민들의 삶이 그대로 농장 속에서 재현된다. 그들이 외치는 구호와 삶의 변화는 역사 속에서 이미 실컷 본 소비에트나 북한의 모습을 너무나도 닮아 있다. 동물농장으로 바꾸었다고 해도 원래 목적은 밖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주석에 대한 고민도 함께 사라지기 시작한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고 이 소설의 뒤편에 나오는 해설에서 충실히 소개되었을 테니 그 의도나 의미 등은 생략하겠다. 다만 읽으면서 어릴 때 본 만화 영화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영화는 반공영화 <똘이 장군>이다. 정확한 내용이야 기억할 수 없지만 이 영화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동물농장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돼지들 때문이다. <똘이 장군>이란 만화 영화 속에서도 공산주의자는 모두 돼지 혹은 늑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캐릭터가 돼지가 지닌 욕심과 잡식성 탓으로 여겼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 소설에서 빌렸는지 깨달았다. 억지로 그런 만화를 만들어야 했던 당시 감독과 연출부의 창조성이 표절 아닌 듯한 표절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 가지 고백한다면 어릴 때 이 영화를 보고 정말 공산당은 모두 그렇게 생긴 줄 알았고, 이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조금 긴 중편 소설 정도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한 시대를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눈은 활자를 쫓지만 머릿속은 그 이야기를 분석하고 해석하기 바쁘다. 그 시대 상황을 알면 알수록 많은 재미를 발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학창시절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이 있어 대충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정도의 난해함과 비유로 가득하다. 그 이상 알게 되면 더 좋겠지만 그 정도만 알아도 충분히 왜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을 적으로 규정하고 투쟁하던 동물농장에서 인간들과 함께 축배를 드는 돼지들을 보면서 다른 동물들이 느낀 감정을 담고 있는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어느 것이 돼지 얼굴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얼굴인지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었다.”(188쪽)는 문장은 원래의 의도가 변질되고 왜곡된 현실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다. 모두를 위한다는 혁명이 소수를 위한 것으로 변할 때 썩은 내가 나고, 다시 혁명의 싹은 피기 시작한다. 이것은 또 자본주의가 점점 사회를 양극화 시키는 요즘 세대의 현실이자 미래 모습이다.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고 나머지는 그들의 손발이 되는 현실. 이런 현실이 자신들의 노력 부족 때문이라고 세뇌하는 현실. 사유재산은 신성해서 누구도 손 델 수 없다는 믿음을 강요하는 현실, 악법도 법이라고 강요하며 법치주의란 화려한 거짓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현실들 말이다. 이 책에 담긴 상징이나 비유 등을 해석하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현실의 우리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은 더 큰 즐거움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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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주식회사 - 질병과 비만 빈곤 뒤에 숨은 식품산업의 비밀
에릭 슐로서 외 지음, 박은영 옮김, 허남혁 해설 / 따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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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모두 읽은 후 다시 책을 보니 접어놓은 곳이 상당히 많다. 최근 나의 책읽기는 귀차니즘 때문에 접는 곳도 밑줄 치는 곳도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곳을 접었다는 것은 이성과 감성에 와 닿는 내용이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다. 그 대부분은 낯선 사실들인데 미국의 판박이가 되어가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할 때 섬뜩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먹을 것과 삶의 질을 넘어 생존으로까지 인식이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읽은 몇 권의 책에서 얻은 지식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영화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로버트 케너 감독의 개인적인 제작 후기와 <패스트푸드의 제국>의 저자 에릭 슐로서와의 인터뷰를 포함한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현재 미국의 흐름을 대강이나마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소위 야채모독법으로 불리는 식품비방금지법의 무서운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권력을 가진 식품회사가 어떻게 일반 대중을 효과적으로 겁주면서 식품에 대한 진실을 원천봉쇄 하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담배회사의 권력을 줄였던 과거를 생각하며 우리의 노력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는다.

2부는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유기농과 식품과학과 식품과 기후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자본과 식량이 어떻게 맺어져 있는지 보여준다. 특히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다름 아닌 비즈니스다.”(111쪽)란 문장을 읽으면서 불과 며칠 전 읽은 박범신의 신작 <비즈니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유기농이 우리의 건강한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고, 유기농이 식품을 넘어 생존이라고 말한 대목에선 오랫동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품과학이란 소재로 넘어가게 되면 유전자조작이나 개조 같은 현실을 만나게 된다. 이 주제는 책 속에서 약간 상반된 의견이 나온다. 지구촌 기아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라는 피터 프링글의 주장은 이 식품이 지닌 위험성을 지적한 유기농소비자연합과 로니 커민스의 글에서 충돌이 발생한다. 피터가 “오늘날 유전자변형 반대자들의 두려움을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크다.”(135쪽)고 말한 반면에 커민스 등은 “유전공학 생산물들은 사람의 건강에 유독하며 위험을 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 상태다.”(149쪽)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사례를 나열하는데 이런 프랑켄푸드의 위험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식량부족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척박한 땅에서 제대로 수확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물론 여기엔 몬샌토 같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에 대한 견제와 필요한 사람들 손에 쥐어주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것을 역설하고 있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식품이 옥수수다. 한때 바이오디젤로 불리며 석유의 대체에너지로 인식되었던 식품이다. 이 옥수수가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와 기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다른 책에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 책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자료를 보여주면서 에탄올 사기극을 파헤친다. 특히 “25갤런 들이의 SUV 차량 연료통을 채우기 위해 소요되는 곡물이면 한 사람이 1년 내내 먹을 약식이 된다.”(172쪽)는 지적에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에 이 연료가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부족과 기아에 미치는 문제만 생각했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단순한 사실이 세계화와 식량의 무기화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관련 단체와 언론이 만들어낸 허구를 직시하게 만든다.

값싼 식품 이야기로 넘어가면 법의 약점을 꼭 파고든 혹은 계획한 사실을 알게 된다. 수많은 하청업체를 통해 최상층부의 책임문제를 교묘하게 벗어난 것이다. 이것은 다시 한국의 수직적 하층구조를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들의 책임을 밑으로 전가시키는 방식 말이다. 그리고 “상품은 자유롭게 무역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닫힌 국경의 땅, 미국에서는 국경을 통과할 때 이미 거기서부터 자기 권리가 무엇인지를 점검할 수 있다.”(239쪽)는 문장에서 자유무역이란 용어가 지닌 허구성과 자기기만을 보게 된다. 이 문제들은 자본과 식량의 장으로 넘어가면서 요약 정리되는데 어두운 현실에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 없다. “2007년 한 해에만 인도에서 2만 5000명의 농부들이 자살을 했다.”(273쪽)는 예는 자본의 무자비한 자기증식과 파괴를 살짝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우리의 농민들이 예전에 보여주었던 분신 등의 극단적 저항행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 3부에선 우리가 이것에 저항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준다. 먼저 <잡식동물의 딜레마>로 식품 등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던 마이클 폴란의 텃밭 가꾸기다. 이 조그마한 행동이 지구온난화와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간결하게 보여준다. “큰 문제 대부분은 우리가 하는 매일매일의 작은 선택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그 외의 것들도 필요와 욕구, 기호라고 하는 이름 아래 만들어진다.”(302쪽)는 문장은 삶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영화 <불편한 진실>에서 고어가 전구 교체가 답이라고 말한 대목에 대한 답이자 인식의 시발점이다.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하나의 식품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수로 갈라지는 경향이 있기에 쉽지 않다. “궁극적으로 식품의 안전성은 개인의 선택과 양심의 문제라는 것이다.”(327쪽)에서 알 수 있듯이 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풀어야 하는 주관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다시 식품 영양에 대한 이야기로 가면 다시 고민하게 되는데 고대부터 전해져오는 생활습관의 원칙을 그대로 재현한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고,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고, 현미 같은 도정하지 않은 곡물을 먹는 것 같은 습관 말이다. 이것은 다시 어린이 영양 개선과 개인에서 시작하여 지역공동체의 건강으로 문제인식이 옮겨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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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 대유행으로 가는 어떤 계산법
배영익 지음 / 스크린셀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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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의학 서적인줄 알았다. 전염병이란 제목에 대유행으로 가는 계산법이란 부제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짙은 푸른 바탕의 표지가 이런 착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런데 자주 가는 카페의 책소개와 출판사 이름을 보면서 나의 착각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이런 착각을 바로 잡는 것만으로 덥석 잡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괴바이러스란 소재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려나갈지 호기심을 자극했고, 재미를 추구한다는 작가의 말이 주저함을 날려버렸다. 

북태평양 러시아 베링해에서 명태를 잡으려는 원양어선 문양호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유빙과의 충돌, 냉동고의 파괴, 회항 등을 짧게 다룬 후 바로 문양호의 침몰을 말한다. 이 급작스런 전개 후 한 남자의 죽음이 나온다. 이 죽음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기 전에 소설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는 윤규진 박사가 등장한다. 그의 등장이 전면으로 부각되기 전에 한 남자의 죽음으로 인해 소집된 질병관리본부에서 외부 전문가 회의가 소집된다. 죽은 남자의 혈액에서 발견된 바이러스가 특이한 모양을 보여주고, 전염병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모양은 달을 닮았다고 문바이러스, 약칭으로 M바이러스로 불린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전체 구성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문양호 출신 어기영의 탈출과 그를 쫓는 질병관리본부의 대결을 그려낸 1부와 새로운 감염원의 등장과 함께 대유행으로 가는 길목에 선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2부다. 1부는 어기영이란 감염자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전염시키고, 이를 알게 된 센터가 그를 뒤쫓는다. 이 과정에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집중력을 방해한다. 한 명의 주인공을 내세워 그를 중심으로 빠르게 이야기를 풀어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긴박해지는 상황이 이어지고 새로운 변종이 등장한다. 거기에 항체에 대한 강한 욕망이 뒤섞여 전개되면서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속도감과 함께 읽는 내내 영화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만들었다.

1부가 긴박감과 긴장감을 고조시킨다면 2부는 점영병이 퍼짐에 따라 생기는 사람들의 모습과 확산을 통해 공포감을 고조시킨다. 변종의 등장은 백신 제조를 무력하게 만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로 이어진다. 전염된 사람들의 죽음을 강하게 부각시켜 1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도 감염된다. 이 때문에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염병의 무서움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한 책은 참 드물다. 특히 감염된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심리상태와 상호인식은 종말론적 분위기와 더불어 <나는 전설이다>를 자연스럽게 떠올려준다.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집중하는 순간 단숨에 읽게 만든다. 이 소설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나쁘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 2편으로 나누어 다른 분위기의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만큼 1부와 2부의 분위기는 다르다. 1부가 의학스릴러와 액션을 중심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2부는 묵시론적 공포를 다룬 영화가 어울릴 것 같다. 이럴 경우 주인공이나 그의 활약에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물론 내용의 변경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한 편으로 만든다면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재미를 제대로 담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낯선 의학용어와 전문용어가 내용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지만 영화 속에선 이 부분을 간략하게 다루고 상황과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동에 더 공을 들여야 할 것 같다.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의 갈등 묘사가 약하고, 매력적인 인물이 없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너무 쉽게 이성을 빼앗아가는 장면은 현실적일 수는 있지만 읽는 독자들의 이성엔 의문 부호를 하나 달아준다. 그리고 관료들의 행정 절차나 반응이 낙관적이거나 수동적이다. 이 부분은 아예 과장되게 가거나 아니면 더 적극적으로 만들어 공포를 강하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한국은 신종플루 때문에 전국민이 공포에 휩싸였다. 사실 나의 경우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 전염성이나 위험도가 과장되어 표현되었다는 인식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다르다. 그들은 언론을 통해 과장되게 나오는 소식에 과도하게 반응했다. 목적에 의한 언론플레이란 소문도 있었지만 텔레비전을 통해 본 현실은 너무 가깝다. 이성적으로 이해하지만 감성적으론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이 소설이 어느 정도 신종플루 같은 사태를 감안했는지 모르지만 만약 정말로 소설 속 바이러스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엔 콧방귀를 날리겠지만 곧 공포에 몸을 떨며 자기방어를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들 중 한 명이 될지 모른다. 개인은 이성적이지만 집단으로 가면 감성적으로 변하는 현실을 너무나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만 예외라고 하기엔 월드컵에서 본 나의 모습이 너무 생생하다. 한 권의 의학 스릴러가 그 재미를 넘어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영화로 꼭 만들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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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1-02-0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 가득한 서평 잘 읽었습니다.
 
파괴의 천사
키스 도나휴 지음, 임옥희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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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스톨른 차일드>를 재미있게 읽었기에 많은 기대를 했다. 이번 소설에 대한 호평 중 ‘<해리 포터>보다 신비롭고, <스톨른 차일드>보다 매력적이다’는 문구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전작의 잔영이 아직도 남아있는 상태였기에 이런 표현은 더 강하게 다가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절반만 맞는 표현이다. 아니 신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풍성한 볼거리와 멋지고 쾌활한 캐릭터를 원한다면 아니다. 하지만 풍부한 여운과 해석을 즐긴다면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이 소설은 어떤 것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취향에 따라 많은 변화를 준다.

추운 날 한 소녀가 만약 당신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즉흥적으로 집안으로 들인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어떨까? 아마 빨리 아이가 다른 곳으로 가기를 바랄 것이다. 이 소설 속 마거릿은 소녀를 집안으로 받아들이고, 이때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아이의 이름을 묻지만 아이가 노리엘이라고 말하기 전에 미리 짐작한 이름 노라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아이의 이름은 노라가 된다. 홀로 추운 겨울을 뚫고 나타난 소녀는 사라진 딸 때문에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던 마거릿의 집으로 온다. 이 소녀의 등장은 단순한 출현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삶에 새로운 희망의 바람을 몰고 왔다.

노라가 중심에 있지만 그녀의 주변은 마거릿과 숀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랑하는 딸이 가출을 한 후 남편마저 죽고, 외롭게 홀로 살아가는 마거릿. 아버지가 떠난 후 엄마와 함께 살면서 아빠를 그리워하는 숀. 남편이 떠난 후 홀로 아이를 키우며 힘들어하고 외로워하는 숀의 엄마. 그 외 삶 속에서 믿음과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스스로 천사라고 말하는 노라를 통해 이들의 현재를 이야기한다. 그 현재는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나의 현재와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소설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노라의 등장과 함께 1985년 1월 현재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두 번째는 마거릿의 딸 에리카가 가출한 후 방황하는 시간인 1975년 10월의 여정을 보여준다. 마지막은 다시 1985년 2월 이후 구원받는 사람들의 삶을 그려낸다. 현재에서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단순한 구성이지만 이 속에서 시대의 변화, 철학, 가치관, 21세기 현재를 보고 느끼게 된다. 그것은 이미 과거 이야기이지만 현재에도 유효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의 흐름은 노라의 존재를 돌아보게 만들고, 희망이 어떤 힘을 지니는지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 소설에서 끝까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이 둘 있다. 그들은 바로 노라와 그녀를 주시하는 한 신사다. 노라를 천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존재로 볼 것인가는 읽는 내내 의문의 대상이었다. 이런 의문을 계속해서 품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그녀 주변에 맴도는 신사의 정체다. 어떻게 보면 앞에 나온 이 둘의 관계가 뒤로 가면서 흐지부지되는 듯한 느낌도 상당히 많다. 이것이 의도적인 연출인지 아니면 어떻게 결론을 내릴지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한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이들의 정체는 희망과 믿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분명히 이번 작품은 전작보다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 읽은 후 하루가 지난 지금 읽을 때 느끼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한 몇 가지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의문의 대상이었던 두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숀과 마거릿이 산 삶과 에리카가 가출 후 지나온 여정이 대부분이다. 흔히 예수가 현세에 재림해도 다시 그를 십자가에 매달 것이란 표현이 난무하는 요즘 노라의 존재는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제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것과 상관없이 지치고 외로운 그 시간 그 곳에 나에게 따뜻한 온기와 희망의 씨앗을 뿌려줄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그 혹은 그녀는 천사가 분명하다. 그리고 희망의 씨앗을 싹틔우고 키우는 사람은 바로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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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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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박범신의 소설을 읽었다. 90년대 그의 소설을 몇 권 읽었지만 나의 관심사는 다른 사람이었다. 특히 이청준과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빠져 있던 나에게 그의 소설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평론가들의 평마저 그렇게 좋게 나오지 않았다. 거기에 그 당시 취향 탓에 그의 많은 책이 독서 목록에서 빠졌고, 그 이후 머릿속에선 왜곡된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 이런 이미지가 조금씩 바뀌게 된 것은 최근에 나온 <은교> 때문이다. 아직 읽지 않았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평을 보니 노작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손에 넣은 <비즈니스>는 한국과 중국 동시연재라는 호재와 더불어 새롭게 그를 인식하는 계기를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 기대는 적중했다.

비즈니스. 이 영어 단어를 사용하면 뭔가 고급스러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사업이란 단어 대신 비즈니스를 입에 달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 단어 하나가 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 덕에 사람들은 더욱 이 단어를 애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비즈니스보다 한 단어를 더 붙인 비즈니스맨이란 단어가 더 많이 사용된다. 자꾸 듣다보니 나 자신도 모르게 자주 이 단어를 말한다. 영어가 일상대화에서 더 늘어나고 있는데 가끔 깜짝 놀란다. 한글을 잃어가는 나 자신이 보여서 그렇다. 단순히 영어를 사용해서 문제가 아니라 나의 정체성이 흐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정체성. 한 사람을 알려주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내가 나로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는 나로 있기가 쉽지 않다. 나는 가만히 있고자 하지만 주변에서 너무 흔든다. 아무리 뿌리를 깊숙이 박고 바람을 마주한다지만 그들은 그 뿌리가 뽑힐 때까지 바람을 불고 흔든다. 그러니 어느 나무가 뿌리 뽑히지 않겠는가. 이 소설 속에선 화자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녀는 조용히 살고자 했지만 남편의 실패와 아들의 교육이 그녀를 매춘녀로 만들었다. 남편의 실패가 생존 속으로 그녀를 내몰 수는 있다. 하지만 아들이 외고 가기를 바라며 몸을 판다니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이 슬픈 악순환은 그녀와 아들의 관계를 멀리하게 만들고 삶을 더욱 고달프게 만든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왜 그런 짓까지 하느냐고. 사실 나도 그 혹자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과 공포와 원망 속에서 살아야 한다. 자신이 해주지 않아 자식이 처질 경우 그 원망을 감당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눈과 지탄을 정면에서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은 끝없이 그녀를 흔들어댄다. 이 때문에 그 혹자에서 잠시 벗어날 때도 많다. 그들이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자신들처럼 하층민으로 살지 않는 것이다. 아직도 그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믿고 있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 어느 정도가 문제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매춘을 비즈니스로 포장하는 것은 양심과 불안을 숨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 속에 숨겨진 욕망을 이 단어 하나로 가리려는 것이다. 몇 가지 사업 원칙을 세워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삶이 언제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던가. 자기합리화와 삶의 피곤함이 쌓여 있던 그녀가 한순간 무너지고, 잊고 있던 감성과 감정을 되살리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대도 타잔과의 만남과 그의 아들과의 교류는 그녀가 주변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 만남이 정상적이지 않아 숨겨질 수밖에 없으니 더욱 그렇다. 

분량이 그렇게 많은 소설은 아니다. 단숨에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씩 복기를 하면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 거리를 만나게 된다. 자본의 폭력성, 가족이란 무엇인가, 아이들의 교육 문제, 섹스 등으로 대변되는 큰 줄기 외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그래서 주리의 그 뻔한 결말을 마주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삶의 이면을 생각하게 된다. 또 타잔으로 불리는 한 도둑에 열광하는 시민들과 그에게 도둑맞은 물품을 숨기기 바쁜 부자들을 간단하게 대비시켜 우리 사회의 양극단을 보여준다. 이것은 한 도시 속에 자리 잡은 구도시와 신도시의 삶이기도 하다. 자본의 욕망에 자신을 팔아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자기 이익만을 위해 달려가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사랑, 가족, 우정, 환경, 미래 등과 같은 단어는 자본이란 한 단어에 무릎을 꿇었다. 이 소설 속에선 그 단어가 바로 비즈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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