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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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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전에 출간된 적이 있는 책이다. 검색하면 나오는 책 중 아마 제대로 번역된 것은 <조롱>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두 책을 비교 검토한 것은 아니다. 다만 분량만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이전 번역본에 오류가 많을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것은 가끔 좋은 작품들이 길다는 이유만으로 축약 편집되어 나온 것을 본 적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특히 헌책방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절판본을 찾았다고 좋아했는데 이런 경험을 하면 금방 손을 내리게 된다. 물론 잠시 고민은 하지만. 그리고 사실 몇 년 전 <조롱>을 구해놓았다. 언제나처럼 책 더미 속에 파묻혀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옛 책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혹시 이 책을 읽고 작가의 다른 책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다른 번역본을 맛보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소설을 원한다면 아쉽지만 여기서 멈춰야한다. 다른 제목의 책들은 이 책의 다른 버전 번역이다. 작가의 유일한 출간작임을 알고도 솔깃한 것은 혹시 유작이 아닐까 하는 마음 탓일 것이다.

옮긴이도 말했듯이 쉽게 가늠하기 힘든 소설이다. 이 괴팍한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할지 고민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야기가 옆으로 빠지고, 풍성한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혼잡한 진행과 캐릭터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취향에 딱 맞는 사람이라면 열심히 문장과 상황과 인물들을 음미하면서 웃고 즐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처럼 보통 사람은 단숨에 혹은 몰입된 상태로 읽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며칠 들고 다니면서 조금씩 읽었고 거대한 흐름 속 일부에서만 계속 놀았다. 사실 이런 점은 굉장히 아쉽다. 읽고 난 후 전체의 흐름을 요약하거나 복기할 때 너무 쪼개져서 제대로 그 재미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550쪽이란 분량은 많은 편이 아니다. 어떤 책은 한 자리에 앉아서도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하지만 어떤 책은 100쪽을 읽는데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은 그 정도는 아니다. 다만 지속적인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더딘 책읽기가 되었다. 이런 느린 책읽기가 작품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이어지고 공감하고 충분히 즐길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책읽기 경험이 될 것이다. 그런데 각 매체의 현란하고 멋지고 놀랄만큼 대단한 격찬을 감안하면 읽으면서 계속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디가 그렇게 코미디 걸작이자 배꼽 빠지고 눈물 나게 만드는가 하고 말이다. 

왜 이렇게 격찬을 받은 소설에 몰입하지 못하고 있을까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물었다. 그 답은 서른 살 만년 백수 이그네이셔스 J. 라일리다. 읽으면서 좀처럼 이 인물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거대한 몸집에 괴팍한 행동에 독설을 마구 내품는 주인공에게 말이다. 또 여기에 가세하게 되는 그의 어머니와 그를 처음 연행하려고 했던 경찰 맨큐소 등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감성적으로 다가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논리와 이성으로 다가간 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예전에도 너무 과장된 인물들이 나와서 펼치는 코미디를 보면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전에 나온 책 제목이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롱>인데 어쩌면 이그네이셔스의 말과 행동에 딱 맞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바보들의 연합 혹은 결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마지막으로 가게 되면 복잡하고 혼란스런 상황들이 하나로 정리된다. 이 부분은 읽기 편하다. 그리고 은근히 뉴올리언스를 떠난 그가 다음 목적지에서 어떤 활극을 펼칠지 살짝 기대하게 만든다. 작가의 죽음으로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말이다. 이제 겨우 이 캐릭터에 익숙해졌는데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내용을 요약하거나 캐릭터를 분석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경험이나 취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전에 앤 라이스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뉴올리언스의 이미지가 이번 소설로 인해 많이 변했다는 것이다. 도시의 숨겨진 다른 쪽을 본 느낌이랄까. 언제 시간이 되면 이전에 출간된 <조롱>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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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비가
쑤퉁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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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흔히 슬픔과 나쁜 일은 홀로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화씨 집안 20여년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딱 그대로다. 좋은 일은 보이지 않고 나쁜 일만 계속 생긴다. 나쁜 일이 가난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겠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더 가혹한 것은 사실이다. 이 소설 속 화자인 화진더우는 그런 점에서 이 가혹한 현실을 죽은 후에도 그대로 지켜보는 아픔을 겪는다. 귀신이 되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영화나 다른 소설에서처럼 그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그냥 지켜보는 것밖에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화씨 집안 비극의 시작은 화진더우의 아내 펑황이 자살하면서부터다. 평소처럼 출근한 그녀가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 어떤 유서도 이유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이 자살 소식에 화진더우는 이성을 잃고 공장에 불을 지른다. 하나의 슬픔이 다른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첫 장면이 재판 장면인 것은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이자 이 집안의 비극에 너무 감정 이입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그 덕분에 조금은 더 냉정하게 이 집안의 비극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귀신이 된 화진더우가 안타까움과 후회하는 마음에서 자기 집에 머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한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자신과 가족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살아 재판 받을 때도 후회가 되었지만 죽은 후에도 그 후회는 멈춰지지 않는다. 어쩌면 20여년을 참죽나무길에 머물게 되는 것이 이런 잘못된 행동에 대한 처벌인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그냥 무력하게 쳐다만 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자 슬픔인지 절실하게 드러나는 상황에서 말이다. 귀신이기에 더 쉽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슬픔이다. 유일한 아들 두호의 엇나간 삶이나 사랑스러웠던 둘째 딸 신란의 임신중절 수술이나 다른 딸들의 슬픈 일까지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알면 더 병이 되는 그런 상황에 그가 놓인 것이다.

분명히 이 소설은 화씨 집안의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 비극에 동조하기보다 관찰자의 위치를 그대로 유지한다. 화진더우를 통해 감정의 기복이나 절망에 찬 목소리를 내지만 그것은 현실의 벽에서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중국의 삶을 보게 된다. 점점 자본주의화가 되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낭비와 과소비를 말이다. 이런 시대의 변화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화진더우의 누이동생이자 아이들의 엄마 역할을 하는 고모다. 

이 소설에서 화진더우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고모다. 오빠와 올케가 모두 죽은 상태에서 네 딸과 아들 하나를 키워야하기 때문이다. 큰 딸들이 돈을 벌어올 때도 그녀는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그녀들이 어릴 때는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고 입고 싶은 것을 입지 않고 힘들게 키웠다. 집안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두후는 그녀가 온갖 정성을 다해 키웠다. 식은 밥을 먹고 있으면 따뜻한 밥을 해주고, 늦게 들어오면 찾으러 나갈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하지만 그는 엇나가고 버릇없고 자기중심적인 게이가 되었다. 그의 변화와 우유부단함과 용기 없음은 또 다른 슬픈 일로 이어지게 된다. 거기에 고모가 계획한 몇 가지 일들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고, 그 비극은 집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 그 가족을 위해 모든 희생을 했는데도 말이다. 

늙어죽을 때 그 사람의 삶이 제대로 평가를 받는다거나 전화위복이란 말이 이 집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행복한 결말조차도 말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자살한 부모와 사고로 죽은 딸과 온갖 나쁜 일만 가득한 집안에는 특히 그렇다. 대부분의 현실이 바로 이런 삶의 연속이다. 언론이나 영화에서 성공한 삶이나 행복한 노후를 즐기는 사람이 나오지만 조금만 눈을 우리 곁으로 돌이면 비극과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한 집안들이 가득하다. 화진더우가 마지막에 누이의 죽음을 보면서 옛날로 돌아가면 삶이 완전히 바뀔 것처럼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의심이 먼저 드는 것도 바로 이런 현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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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지대
쑤퉁 지음, 송하진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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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쑤퉁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는 말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한 소년이 성장하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데 뛰어난 작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면 어떨까? 하지만 이런 기대는 책을 계속해서 읽으면서 하나씩 사라졌다. 도대체 책 속 누가 쑤퉁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자의 후기를 통해 작가 학창시절 모범생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럼 왜 자전적이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역자의 말처럼 “하나하나의 독립된 캐릭터를 통해 자신이 이미 실현한 혹은 미처 실현하지 못한 이상을 펼쳐 보이기를 원했던 것 같다”(401쪽)는 설명에 만족해야 할까? 이 판단은 각자가 해야 할 것 같다.

성북지대의 상징은 세 개의 큰 굴뚝이다. 화학공장에서 내뿜는 연기와 오수가 그 시절에는 성장과 일자리의 상징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매연과 환경오염의 주범이다. 환경소설이라면 이 화학공장이 주 무대이겠지만 실제 주 무대는 참죽나무길이다. 그리고 이 골목에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처음에는 리수예가 나와 그의 아들 다성이 성장소설의 주인공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물론 그도 주연 중의 한 명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 소설은 한두 명이 이야기를 이끌어가지 않는다. 제목처럼 성북지대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특히 참죽나무길 사람들.

쑤퉁에 대한 소개글을 보면 ‘섬세한 묘사를 통하여 소시민들의 일상과 기댈 곳 없는 약자들의 삶을 해학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현실에 대한 비판 정신과 사회성을 겸비하고 있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특히 개인적으로 수퉁의 장편을 읽을 때 느끼는 것은 해학과 현실이라는 단어다. 그의 소설에서 만나는 비극들은 결코 감정이입을 통해 풀려나오지 않는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정도에 멈춰있다. 그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는 해학은 이 비극들을 무난하게 넘어가게 하고 몰입하게 만든다. 등장인물들이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주변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사람이란 점에서 현실임을 느끼게 한다. 

성장소설이라고 하지만 과연 누가 성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특히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네 명의 악동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이 넷은 모두 불량학생으로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 이후 삶도 성북지대 최고의 사나이라는 환상에 목을 매는 다성이나 가장 먼저 사회에 나가 유부녀와 바람이 난 쉬더나 좀도둑질이 습관처럼 몸에 밴 쩔룩이나 한순간의 충동으로 강간하고 감옥에 가게 되는 홍치 등을 보면 변함이 없다. 흔히 고난이나 아픔을 겪은 후 한 단계 높아진다는 전형적인 성장소설의 형식이 이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장소설이 될지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성북지대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소설로 보면 다르다. 네 악동이 중심에 놓여있지만 그들과 연관된 부모나 주변사람들이 그 시대의 삶을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층 소시민의 삶이 어떤 것인지, 하나의 강간사건을 둘러싸고 두 이해관계가 어떻게 충돌하는지, 그 이해관계가 어떤 식으로 변질되는지, 악다구니와 무관심으로 점철된 듯한 가족들의 삶이 어떻게 하나로 이어지고 얼마나 끈적한지 작가는 섬세하면서도 해학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이런 삶의 모습들이 그물망처럼 엮여 있다. 이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야기가 재미를 준다.

가난과 힘겨운 삶은 아이들을 빨리 늙게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보면 늙은 척할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이 괴리감은 그들의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우연, 허세, 욕망, 일탈, 충동 등이 빚어내는 삶의 다양한 파편들은 그래서 아슬아슬하다. 또 그 시대의 불안정한 사회 모습은 예상하지 못한 극단적인 사건을 만든다.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다 비슷할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그 욕망이 극단으로 표출되는 곳의 삶은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소설 처음과 마지막을 나오는 솽마오표 자명종은 한 가족의 아픔을 너무나도 강렬하게 느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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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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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가 공터에 서 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는 오지 않는다. ‘나’는 차 트렁크를 열고 들어간다. 그 속에 눕고 이야기는 과거로 흘러간다. 여기서 ‘나’는 화자인 온두고, 그는 성명이 ‘이름’이다. 첫 이야기는 이 둘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그 만남은 우연으로 가장된 필연이다. 온두는 남자의 핸드폰 벨소리에 평화를 방해받고, 남자가 그 땅 주인이라는 말에 안락한 보금자리를 잃을 것 같은 불안을 느낀다. 뭔가 충돌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지만 서로의 필요에 의해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지한다. 그리고 두 남녀의 과거 속으로 한 발씩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

트렁커는 차 트렁크에서 자는 사람을 말한다. 먼저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왜 멀쩡한 집을 나두고 차 트렁크에서 잘까 생각했다. 뭐 세상에 괴팍한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그런 모양이다 하고 대충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 둘의 만남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하나씩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되었다. 그들이 트렁크에서 자는 이유가 그곳이 좋아서가 아니라 잘 수밖에 없었다는 부분은 아픔을 던져준다. 이 소설은 그 아픔과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을 담아내는 과정을 결코 무겁지 않게 풀어낸다.

온두. 따뜻한 콩이란 의미다. 그녀는 유모차 판매원이다. 판매능력은 대단하다. 전국의 아기 엄마가 그녀에게 와서 살 정도다. 그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유모차에 대한 애정이다. 이 애정은 유모차에 대한 모든 것으로 관심이 확대되고, 그것을 공부한 덕분이다. 하지만 그녀는 상냥한 판매원이 아니다. 고객에게 굽실거리지 않는다. 대접받기를 원하는 고객이라면 그녀는 최악이지만 아기 때문에 고생하는 엄마에겐 최상의 판매원이다. 이 차이가 그녀를 힘든 순간으로 몰아가지만 요즘 아기 엄마들의 고충과 현실을 살짝 보여준다. 그리고 왜 그녀가 이렇게 유모차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조금씩 그 이유를 보여준다.

온두의 평온한 삶에 불쑥 치고 들어온 남자의 이름은 ‘름’이다. 성은 이 씨다. 붙이면 이름이다. 이 이름을 갖게 된 것에는 조금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원래는 이룸으로 지으려고 했는데 말이다. 이름도 상당히 특이하지만 그의 과거는 더 특이하다. 아니 특이한 것을 넘어 섬뜩하다. 처음 온두를 만났을 때 기억을 잃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보드게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효자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과거 이야기가 하나씩 나오고 너무나도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상처가 들춰지면서 그런 감정은 퇴색되었다. 왜 그가 트렁커가 되었는지 점점 공감하게 되었다.

두 트렁커의 이야기는 현재를 바탕으로 하지만 과거 속에서 미로를 헤매는 듯하다. 특히 온두의 경우는 과거의 기억이 사라졌다. 아니 다른 자아를 이용해 과거를 윤색한다. 그녀가 가진 기억들도 단편적으로 흘러나오는데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더 깊숙한 곳에 진짜 어둠이 숨겨져 있다. 그녀가 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나 라고 되새길 때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가 말이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복지나 양극화나 육아 문제 등이 살짝 밖으로 드러난다. 

빠르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재미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두 트렁커의 이야기는 너무 무겁다. 우리가 흔히 뉴스를 보면서 어떻게 저런 일을 했을까 혹은 얼마나 힘들면 저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일들이 나온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기억하고 싶지 않는 일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되살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을 경쾌하고 과장된 표현들을 통해 재미있게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힘들지만 정면에서 마주할 것을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역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뒤끝은 즐겁고 따뜻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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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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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워야 진리를 창조할 수 있다는 작가의 해석은 나에게 큰 충격이다. 여태 나에게 많은 의문을 주고 숙고의 대상이었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장이 새롭고 놀라운 모습으로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 놀라운 글을 서문에 적어놓고 저자는 가장 중요한 개념인 소통(疏通)이라는 개념을 말한다. 그리고 타자라는 것과 초월적 가치에 대한 비평을 가하며 지금까지 내가 알던 장자에 대한 생각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을 두 번째로 읽는다. 지난 번 열하일기를 읽고 그 해석과 새로운 모습에 즐거워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즐겁고 재미있었다. 아니 재미있었다기보다 새로운 모습을 접하면서 인식의 지평이 좀더 넓어졌다고 해야겠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노장철학이라는 표현에서 두 철학자를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데 작가는 이 두 사상가가 완전히 다름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국가주의자로써의 노자와 아나키즘의 장자로 구분한 것이다. 첫 서두에 이미 저자가 이번 책을 아나키즘적으로 해석하겠다고 하였는데 보는 내내 그 영향을 직접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소통과 더불어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차이다. 차이는 타자와 나의 사이와 인식과 삶의 문제로 발전하는데 그 해석을 보고 있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더불어 노자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강해지고 장자에 대한 다른 저자들의 해석도 보고 싶게 만든다. 기존에 알고 있던 수많은 의미와 해석 등이 무너지고 새롭게 이해되고 깨닫게 되는 부분들이 많은데 나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 한계를 알게 되지만 다른 저자들의 해석에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고, 노자와 장자에 대한 공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적인 바탕에서 쓴 글이라 곳곳에 그 흔적이 넘쳐나고 그 반동으로 왜 사람들이 노자와 장자를 묶어 평가하였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아나키즘이 지닌 모습이 노자의 철학과 완전히 다르다고 저자는 평하고 나 자신도 동의하지만 유교적 전통에서 상대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두 철학이 어쩌면 유사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꿈에 대한 장자의 글들은 더욱 이런 생각을 강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보면 후대의 오류나 철학적 해석에 의해 만들어진 부분도 있다. 노장철학으로 묶는 것에 대한 반대와 차이를 저자는 보론에 보여주니 이를 참조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리라이팅 클래식에서 자주 접하는 철학자가 있다. 그는 들뢰즈다. 그의 개념을 이번에도 저자는 장자의 철학을 해석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한다. 노자나 장자 등과 같이 나에겐 잘 알지 못하는 철학자인 들뢰즈를 접할 때마다 항상 이 철학자의 책을 한 번 읽어야지 생각하지만 쉽게 손이 가질 않는다. 저자는 들뢰즈의 이론에서 노자와 장자의 차이를 말하는데 그 해석을 보면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가진 두 철학자를 발견하게 된다. 수직적 철학과 수평적 철학으로 말이다. 그리고 장자 철학에서 핵심인 타자와의 소통은 그 해석을 볼 때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날려버리게 되고 허무주의 등으로 알려진 장자의 실천주의와 아나키즘적 면모를 발견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나의 머릿속은 회오리치고 있다. 소통이라는 개념과 타자라는 개념과 아나키즘 등등의 수많은 해석과 초월적 존재인 수많은 감정과 정의 등이 책 서문에서 저자가 만한 우리가 흔히 진리라고 말하는 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선입견에 휩싸이게 하는지 느끼게 한다. ‘잊어라! 그리고 연결하라!’는 문장에서 알게 되듯이 막힌 것을 터 버리고 새롭게 연결하라는 소통의 의미를 되새기며 기존 개념과 의미에 막히기보다 새롭게 이해하고 깨달아야겠다. 쉽지 않은 책이지만 이제 조금은 장자에 대한 윤곽을 잡게 되었다. 하지만 앞으로 갈 길은 더욱 멀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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