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올레는 어디인가 - 길.사람.자연.역사에서 찾다
서승범 지음 / 자연과생태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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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올레라는 단어는 꼭 가보고 걸어봐야 할 곳으로 다가왔다. 원래 올레는 거릿길에서 대문까지의,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이란 뜻의 제주 말이다. 그런데 제주 올레길이 생기면서 그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제주올레 19코스는 기존 제주 관광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빼어난 자연 풍경과 걷기의 만남으로 도시의 일상에 찌든 사람들의 탈출구가 된 것이다. 서울에서라면 걷기가 죽기보다 싫은 사람들이 비싼 비행기 값과 경비와 시간을 내어 이 올레를 걷는다. 다녀와서는 그 길에 대한 칭찬을 길게 널어놓는다. 그러니 올레란 단어에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올레가 아니다. 첫 이야기가 제주올레 16코스라고 해도 말이다.

표지에 ‘길, 사람, 자연, 역사에서 찾다’란 단어가 보인다. 이것은 이 에세이가 묶인 주제들이기도 하다. 모두 네 꼭지, 스물넷 이야기로 엮여있다. 이렇게 분류를 했지만 결국 사람이야기다. 그와 그가 길에서 만난 사람, 풍경, 단상, 감상 등이 그가 여행 곳을 중심으로 풀려나온다. 이 과정이 깊은 사고를 그쳐 나오는데 많은 부분에서 공감대가 형성된다. 그것은 아마 그가 경험했던 것을 나도 겪고 싶고, 그가 본 풍경과 삶을 나도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다녀온 곳 중 몇 곳은 그냥 무심코 지나간 곳이 있는데 이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가득하다.

이 책에서 제주올레에 대한 정보나 새로운 관광정보를 기대했다면 빨리 덮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다녀온 곳에 대한 평이 결코 일상적인 여행안내서와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길, 사람, 자연, 역사란 큰 틀과 인연과 단상을 이야기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행지 정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간단한 여행지 팁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곳에 가기 위해, 새로운 감상을 설명하기 위해 있을 뿐이다. 특히 관심 있는 맛집 추천에 인색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나오는 맛집 정보가 무척 반갑다.

개인적으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 어지간한 거리는 걷는다. 하지만 점점 걷는 거리가 짧아지고 있다. 살짝 남 탓도 하지만 결국 게으름과 피곤함이란 핑계 때문이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목적지에 가장 빨리 가기 위한 발걸음도 있지만 문득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풍경과 사람을 볼 기회도 생긴다는 의미다. 그가 찾아간 곳 대부분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움직인 것을 보면 이 여행이 의도하는 바가 잘 드러난다. 관광이 아닌 여행, 단순히 보고 오는 것이 아닌 그곳에서 사람과 역사를 생각하는 것이 여기에 실려 있다. 

참으로 많은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특히 육아의 기준에 눈길이 간다. 그가 세운 육아의 기준은 ‘주지 않는다’다. “안아주지 않고 안고, 먹여주지 않고 함께 먹고, 놀아주지 않고 함께 놀고, 재워주지 않고 함께 자는 것.”(77쪽) 영어의 'give and take'란 표현이 떠올랐다. ‘준다’란 것에 ‘받는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는 지적은 머리를 강하게 울린다. 흔히 하는 말로 베푼다고 하거나 선심 쓰는 듯한 일에 제동을 건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이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사물에 대한 깊은 관찰과 통찰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곱씹을 필요가 있는 육아의 기준이다.

‘나의 올레는 어디인가’에 대한 답이 이 책이다. 앞으로 그가 가야할 올레도 많이 남아 있다. 갔던 곳을 다시 가보고 싶다는 글들이 책 속 가득한데 충분히 공감한다. 시간이나 환경의 변화에 의해 풍경이나 인상이나 감상 등이 변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도 나의 올레는 어디인가 묻게 된다. 어딜까? 어릴 적 뛰어놀던 곳들은 이제 차들 때문에 감히 아이들을 밖으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 시절의 기억보다 현재의 기억과 추억이 더 희미해지고 있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짓눌리고 있는 것이다. 끝없이 그 생활을 반성하지만 실천은 멀기만 하다. 또 핑계로 현실을 말한다. 지금이라도 나의 올레를 하나씩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아직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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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빌라 연애소동
미우라 시온 지음, 김주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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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 여섯 개가 딸린 2층 목조건물이 고구레빌라다. 이 조그만 빌라에는 몇 명 살지도 않는다. 주인인 고구레 영감을 제외하면 3명이 살고 있다. 이 소설은 바로 이 조그만 빌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과 관계를 맺은 일곱 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황당하고 변태적인 모습이 보이지만 조금만 더 가까이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사랑과 고통과 행복 등이 느껴진다. 

의 첫 장면은 조금 황당하다. 일요일 늦은 오후 애인 아키오와 방에서 뒹굴거리며 어디 나갈까 대화를 하는데 주인집 개 존이 짖고 초인종이 울린다.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마유가 나간다. 3년 전 갑자기 사라진 전 애인 세토 나미키가 싱글거리며 서있다. 그녀 너머 겨우 하반신을 가린 아키오에게 오빠라고 부르면서 넉살좋게 방으로 들어온다. 한눈에 오빠 동생 사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는데도. 이 기묘한 상황과 어색한 관계는 한동안 지속된다. 이 시간 동안 마유의 심리를 차분하면서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풀어낸 이야기다. 과거의 추억과 사랑과 기억과 아픔, 현재의 감정, 이 뒤섞인 감정 속에 풀려나오는 현실. 

<심신>은 광고 문구에 넣은 노인의 섹스 문제를 다룬다. 고구레 영감이 왜 허름한 빌라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섹스에 대한 열망도. 그것은 얼마 전에 죽은 친구 고토와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병실에 입원한 고토가 잠시 외출하여 아내에게 섹스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거절 받은 것을 듣고부터다. 성실하게 살아온 그에게 갑자기 섹스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일어나는 조그만 해프닝과 열망은 우리가 잊고 있는 노년의 사랑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얼마 전 뉴스에서 본 노인의 섹스 문제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기둥에 난 돌기>는 어느 날 미네의 눈에 들어왔다. 이 돌기를 다른 사람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남자 성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환상을 같이 보는 한 남자가 있다. 야쿠자 분위기가 나는 마에다다. 이 환상을 통해 둘은 이어진다. 그리고 애견 미용사인 미네를 통해 고구레빌라가 이어진다. 그 매개체는 존이다. 미네와 야쿠자 보스인 듯한 마에다의 조금은 풋풋한 연애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둘이 보는 환상의 원인에 도달했을 때 터져 나오는 아픈 과거는 가슴 아리고 아프지만 결코 무겁지만은 않다. 

<검은 음료수>는 마유가 일하는 꽃집 주인 사에키 씨 이야기다. 갑자기 남편이 탄 커피 맛이 이상하다. 비릿한 흙탕물 맛이다. 남편은 늦은 밤에 아내가 잘 때 나가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들어온다. 분명히 외도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남편 주변의 여자들이 용의자가 된다. 마유도 그 중 한 명이다. 이렇게 작가는 그녀를 통해 불안과 걱정이 주변에 어떻게 퍼지는지, 그녀와 남편의 과거 이야기를 자연스레 풀어낸다. 이 이야기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주변 관계들을 자연스럽게 들려준다.

<구멍>은 한 변태 간자키의 훔쳐보기 이야기다. 그 훔쳐보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것의 즐거움과 감정 전이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가 구멍을 통해 훔쳐보는 대상은 아래층 여대생 미쓰코다. 3명의 남자와 동시에 연애를 한다. 독신남인 그가 보기에 그녀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훔쳐보기와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감정의 변화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이 시점의 변화는 이전과 다른 고구레빌라의 풍경을 보여준다. 화자를 변화시킴으로써 한 개인이 전혀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는 간자키의 훔쳐보기 대상인 미쓰코 이야기다. 그녀의 현재는 간자키가 본 그대로다. 하지만 과거로 넘어가면 결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나온다. 문란했던 여고생시절, 대학시절. 이 생활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들려준다. 그리고 친구가 갑자기 아기를 맡기면서 일어나는 감정의 흐름은 이 단편의 핵심이다. 그녀의 현실과 미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 이 아픔과 상실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일지 모른다. 훔쳐보기를 통해 그녀의 현재를 가장 잘 아는 간자키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비록 그의 위로가 새로운 미래를 보여준다고 해도 말이다.

마지막 <거짓말의 맛>은 마유의 전 남친 나미키 이야기다. 사랑했던 마유를 스토킹하는 그를 보여준다. 호기 있게 그녀를 떠났지만 그 주변을 맴돈다. 이때 한 여자가 나타난다. 니지코 씨다. 그녀는 음식의 맛으로 거짓말을 판별할 수 있다. 그녀의 존재는 가끔 꽃집을 통해 드러난다. 나미키를 만난 것도 바로 그곳이다. 거짓말의 맛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해준 음식은 먹지 못하는 그녀의 사연과 나미키의 과거와 현재가 흘러나온다. 이벤트처럼 벌어지는 조그만 해프닝과 고구레빌라와의 인연은 읽는 재미를 준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고구레빌라 이야기는 없다는 느낌을 준다. 더 읽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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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음악 순례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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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이란 이름을 언제부터 인식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예전에 읽은 재일동포 역사학자로 착각하고 있었다. 서경식 선생의 책을 몇 권 사놓고도 그렇다. 아마 이름 착각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분의 역사책은 상당히 유익하고 재미있었다. 인터넷으로 강력 추천을 하기에 주저없이 선택했던 책이다.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습관 탓에 잊고 있었다. 그러다 재일동포에 서경식 선생의 또 다른 책을 추천한 글을 읽고 이름을 살짝 기억했다. 잘못된 기억이다. 그런데 전화위복이 되었다. 좋은 작가 한 분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집에 있는 책을 찾아 읽어야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서양 음악 참 어렵다. 고등학교 때로 기억하는데 클래식을 좀 알고 싶어 오전에 방송하는 FM클래식을 켜놓고 공부한 적이 있다. 작가가 한국에 와서 들었다는 그 채널일 것이다. 일요일 오전 노곤한 상태에서 들었던 그 음악들은 좋은 수면제였다. 제목도 잘 기억나지 않고 연주자도 작곡가도 기억나지 않는 그 음악들을 아주 열심히 들었다. 그 후로도 몇 년을 들었고, 유명한 지휘자나 작곡가의 음반을 사기도 했다. 그래도 변함없이 몇 곡의 이름만 겨우 기억한다. 뭐 이런 무식한 음악 듣기는 그 후에 재즈나 메탈로 옮겨가기도 했다. 

문화 웹진 ‘나비’에 총 66차례 33회분을 연재한 것을 책으로 내었다. 이전에 비슷한 제목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낸 적이 있다. 아직 읽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관심이 생겼다. 서양음악과 서양미술은 지금도 나에게 완전히 문을 열지 않고 있다. 아마 저자가 수없이 듣고도 몰랐던 말러의 음악이 끌라우디오 압바도가 지휘하는 루쩨른 축제에서 문이 열렸던 것을 생각하면 언젠가 열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보고 듣고 느껴야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수많은 작가들의 멋진 문학적 표현을 느끼게 될지 모르겠다. 

책의 전개 방식은 기억과 추억과 서양음악을 같이 융합시킨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음악에 대한 추억과 기억과 사실을 풀어낸다. 이 기억이 1회분으로 끝나는 경우는 드물다. 2010 잘츠부르크음악제의 경우는 6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거장 고 윤이상 선생의 경우는 4회고, 2010년 말과 2011년 초에 빈에서 보낸 것을 연재한 횟수는 6회다. 이렇게 횟수에 제한 없이 자유롭게 서양음악을 자신의 감성으로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쓴다. 그가 느낀 감정이 솔직할수록 고개를 끄덕이는 횟수가 늘어난다. 표현이 세밀해지고 문학적으로 변하면 부러움이 늘어난다. 앞에서 말한 서양음악의 문이 아직 나에게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한 권으로 서양음악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욕심이 살짝 있었다. 음악에 대한 정보가 가득한 책으로 생각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첫 회분을 읽으면서 단숨에 깨졌다. 서양음악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음악과 관련된 수많은 단상들이 하나의 주제로 꿰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서양음악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깨달음까지 다루면서 아직도 부족한 부분을 말할 때 공부가 평생해야 할 것임을 간접적으로 말한다. 이것은 그의 동반자이자 음악교사인 F가 한 음악가의 음악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고 했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보수적인 관객들의 음악 해석이다. 그에게 신선했던 그 작업이 그들에겐 장난처럼 유치해보였던 모양이다. 이것이 과거로 흘러가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이야기에 이르면 아련하고 가슴시린 아픔으로 변한다. 그에게 음악은 행복도 즐거움도 아닌 과거의 악몽이기 때문이다. 음악가에 대한 평가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면 한 편의 책을 두고 다투었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열정이 있고 이해의 깊이가 있기에 가득한 일이다. 뭐 나의 경우는 그냥 멋도 모르고 싸운 것이지만.

이 책을 다 읽은 후 뮤지컬을 보러갔다. 뮤지컬이 끝난 후 사람들이 앙코르를 외치고 즐겁게 놀았다. 막이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 장면을 보고 이 책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외국에서는 여운을 즐기고자 빠르게 빠져나가지 않는데 한국에서는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에도 불구하고 바로 나가더라는 대목이다. 우리의 관람문화가 잘못된 것일까? 영화도 자막이 올라오자마자 빠져나간다. 왜 일까? 또 고 윤이상 선생의 이야기를 다룰 때는 예전에 읽은 윤정모 씨의 작품 <나비의 꿈>이 떠올랐다. 그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과 저자와의 만남이 엮이면서 색다른 감상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솔직히 고백하면 이 책에 나오는 서양음악 중 기억에 남는 제목이 거의 없다. 나의 한계다. 무지다. 하지만 몇 년 전 <노다메 칸타빌레>란 일드를 통해 서양음악의 즐거움과 재미를 누렸듯이 언젠가 서양음악이 한 발 더 다가오는 날이 자주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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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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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을 처음 만난 것은 <그대의 차가운 손>이었다. 그 당시는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을 때다. 한때 너무 즐겨 읽었지만 여성작가들의 사변적으로 흘러가는 소설에 질렸던 때다. 몇몇 작가의 작품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왠지 손이 잘 나가지 않았다. 그 책을 선택한 것도 우연이다. 사실 큰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순간 몰입하였고 단숨에 읽었다. 또 다른 장편 <검은 사슴>에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단편집 <여수의 사랑>은 너무 무거워 읽기 힘들었다. 이런 시간들을 하나씩 거치면서 한강이 한승원의 딸이란 정보보다 작가 한강으로 강하게 자리 잡았다. 

길지 않은 장편이다. 채 200쪽이 되지 않는다. 이전의 장편처럼 술술 읽힌다. 작가 소개 사진도 이전과 달리 밝은 웃음으로 가득하다. 이런 자그만 변화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펼친 책 첫 문장이 의문을 불러온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고대 북구의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이다. 보르헤스가 자신의 묘비명으로 써달라고 한 문장이다. 한 연구자는 그 문장을 보르헤스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 말했다. 작가는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고 썼다. 어느 것이 정답일까? 알 수 없다. 이 소설에는 작가의 해석을 염두에 둬야한다.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말을 잃었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조금씩 눈을 잃고 있다. 교차 서술 방식으로 이 두 사람의 현재와 과거를 말한다. 미래에 함께 만날 것이란 예측은 너무 간단하다. 이 둘이 만나는 곳은 희랍어 시간이다. 그녀는 학생이고, 그는 선생이다. 이미 사어가 된 희랍어를 통해 이 두 사람은 만났다. 학생과 선생으로.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그 어떠한 감정도 없었고, 상대방이 지닌 아픔과 장애도 몰랐다. 어쩌면 오해가 더 많다. 평범하지 않은 두 남녀의 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홀리는 일과 비슷하다”(45쪽)고 깨닫고 말했다. 그때 궁금한 것 하나가 떠올랐다. 그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 결혼이 사랑에 의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과거는 상실로 가득하다. 열일곱에 처음 말을 잃고 이혼 후에는 아들의 양육권을 빼앗겼다. 물론 중간에 다시 말을 되찾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말의 상실은 그녀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귀신에 홀린 듯한 사랑을 경험한 남자의 실명은 유전이다. 그의 사랑도 실패했다. 빛도 점점 잃어간다. 이런 그가 그녀에게서 발견한 것이 있다. 어린 시절 경험을 이야기하는 도중에 나온 ‘두려운 데가 있고, 어딘가 지독한 데가 있는 침묵’이다. 여자가 섬세하게 남자의 얼굴에서 눈물을 발견한 것과 비슷하다.

언어와 빛. 이 둘을 잃어가는 두 남녀의 이야기는 가슴 속으로 잔잔히 파고든다. 그들이 느끼는 고독의 깊이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더 짙어진다. 남자가 안경을 깨트리고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하나의 사고는 이 둘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준다. 그리고 그 남자의 입을 통해 언어가 쏟아져 나온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와 말을 할 수 없는 남자의 대화는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여자가 남자의 손에 글을 쓰기 전에는. 그 한계도 분명하다. 보지 못하니 장황하게 쓸 수 없다. 간단한 단어만 쓸 뿐이다. 이 부조화와 불안 속에 둘의 접촉이 일어난다. 그들이 교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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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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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한때는 하루에 세 편의 시를 읽자고 마음먹고 며칠 동안 실천한 적이 있다. 끝내 시집 한 권을 마치지 못했다. 다른 재미있는 소설이 많은데 하면서 미루어뒀다. 사실 일반 독자에 비해 읽은 시가 적은 것은 아니다. 학창시절 박노해와 김남주의 민중시에 충격을 받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카프 시집과 김수영의 시집을 구해 읽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버스 안에서 열심히 읽었다. 가장 좋아했던 기형도의 시집도 멋모르고 읽었다. 외국의 번역시집도 몇 권 구해 읽었다. 하지만 이 시집들이 나에게 시로 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 즐거움과 재미를 완전히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시 읽기의 즐거움과 재미는 계속 바라고 바라는 바다. 작년 초에 읽은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에서 시와 철학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를 잠시 맛보았지만 어느새 잊고 있었다. 그러다 만난 이 책은 사실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철학과 시의 결합이 주는 즐거움과 재미를 기억하고 있지만 과연 작년 같은 재미를 누릴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저자 김용규의 <다니>라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없었다면 포기했을 것이다. 이 두 철학자가 어떻게 보면 비슷한 내용으로 한 권의 책을 낸 것이다. 강신주가 시인 한 명과 철학자 한 명을 연결했다면 김용규는 한 철학을 바탕으로 시를 이해하도록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철학자는 하이데거다. 수많은 시인과 시가 인용되는데 가장 중요한 시인 한 명을 꼽으라면 김수영이다. 그를 가리켜 해방 후 최고의 시인이라고 칭하는 학자들을 자주 만났다. 그래서 그의 시집을 구해 읽었었다. 그런데 왜? 라는 의문부호를 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가 나의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에게 시는 학교 교육에 의해 재단된 것 외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박노해와 김남주의 시가 머릿속을 강타한 것이 바로 너무나도 쉽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 있구나 하고. 늘 시 이야기를 할 때면 학교에서 배운 것들에 대한 나쁜 기억만 난다. 그때 시의 매력을 제대로 배웠다면 아마 집에 소설보다 시집이 더 많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영화가 별로 재미없었다. 국어 선생하는 친구는 재미있었다고 하는데 나에겐 그 어떤 느낌도 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의 처음이 바로 이 영화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메타포에 대한 것. 상당히 재미있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한 편의 소설처럼 읽었다. 이 분위기는 조금 더 진행되었다. 시 속에 담긴 철학을 뽑아내고,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시를 펼칠 때 아! 하고 감탄도 했다. 거기까지다. 더 깊은 곳으로 나의 사유가 감성이 다가가지 못했다. 한계다. 시를 철학을 통해 쉽게 풀어낼 때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철학자의 단어로 바뀌는 순간 헤맨다. 철학의 벽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나를 넘겨주지 않는 것이다. 아쉽다.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함을 느낀다.

모두 아홉 장이다. 시란 무엇인가로 시작하여 시인이란 누구인가로 마무리한다. 메타포에서 시작하여 사랑을 말하는데 계속 고개를 끄덕인다. 공감대가 형성된다. 읽었던 시, 몰랐던 시, 아무 느낌 없는 시, 새롭게 다가온 시 등이 저자의 손길에 의해 다른 의미를 띄고 다가온다. 비교적 쉽게 풀어낸 시에 대한 철학들은 잠시 이해하게 만든다. 거기까지다. 철학 용어와 철학에 대해 훈련받지 않는 내가 단숨에 시와 철학의 세계를 연결시킬 수는 없다. 단순히 따라 읽기 그 이상은 아니다. 또 후반으로 갈수록 하이데거의 철학을 기반으로 시를 풀어내었기에 그 철학에 대한 이해 부족도 무시할 수 없다. 비록 이 책이 대중을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아직 시는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는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아주 가끔 시집이나 시를 읽는다. 만약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면 이 시 읽기를 통해 바로 잡힐 것이다. 학창시절처럼 시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눈으로 시를 보라는 기획 의도는 충분히 공감한다. 어느 대목까지는 함께 발을 맞춰나갔다. 아직은 거기까지다. 파편화된 시어들을 제대로 받아들여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하는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시와 철학. 이 둘은 앞으로 새롭게 평생 공부해야할 동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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