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 케이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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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7년 일본 호러소설대상 단편상을 수상한 <코>를 비롯한 세 편이 실려 있다. 작가의 이력을 보면 <침저어>로 제53회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했고, 2009년에는 <열대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상을 수상했다. 몇 년 사이에 이름난 상을 여럿 받았다. 가끔 일본에서 이런 작가가 등장하는데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경이의 신인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코>를 읽고 난 후 어느 정도 동의한다. 기발한 상상력과 서술트릭이 지닌 재미와 잔잔히 파고드는 서늘함이 함께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폭락>은 한 개인의 가치를 주식처럼 표현하고 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자신의 과거를 간호사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 흘러나오는 이야기 구조는 정말 기발하고 멋진 비유다. 현재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한 인간의 가치를 그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것은 주가처럼 순간적으로 변한다. 우량주는 점점 그 가치가 높아지고, 부실하거나 불량한 관계를 가진 사람은 그 가치가 점점 떨어진다. 엘리트가 사회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약간은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마지막에 드러나는 진실과 끔찍한 현실은 상업주의와 비인권의 극치를 보여준다.

<수난>은 한 공간에 갇힌 한 남자 이야기다. 한 파견회사의 계약이 끝난 후 다음 회사로 가기 전 회식을 한다. 그런데 술에서 깨어나니 이상한 곳에서 수갑을 찬 채 묶여 있다. 왜,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를 묶어두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런 알 수 없는 현실에 한 소녀가 나타난다. 물과 견과류만 그에게 남겨두고 떠난다. 어떤 말도 없다. 편지만 가끔 남긴다. 그가 바라는 것은 경찰에게 연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신고도 없다. 이런 나날이 이어지는 과정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이것은 조그만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한국의 호러단편이나 영화 <쏘우>가 떠올랐다. 왜일까? 개인적으로 세 단편 중 가장 흥미가 떨어진다. 

표제작 <코>는 멋진 단편이다. 텐구와 돼지 두 종족으로 나누어진 어떤 가상 국가를 다룬다. 권력을 가진 쪽은 돼지다. 텐구로 찍히면 불리한 일들이 너무 많다. 격리, 수용되고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종족 구분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나치의 유대정책이 떠올랐다.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의 잔혹한 행동과 사람의 부산물들로 만들어진 다양한 도구들도. 단순히 이 구도로만 갔다면 좀 잔혹했을지 모르지만 멋진 반전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유독 냄새에 민감한 형사를 끼워넣어서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여준다. 분명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은 바로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다. 객관성이 사라진 공간에 주관들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현실은 무척 놀랍다. 훌륭한 서술트릭이자 반전이다. 그리고 곳곳에 드러나는 사실들과 비판은 씁쓸한 맛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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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초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양억관 옮김 / 이상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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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쓰모토 세이초를 검색하니 인터넷 서점에 몇 권 올라와 있지 않다. 동서문학에서 낸 추리문학을 제외하면 태동에서 낸 <검은 화집>과 북스피어의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중,하>가 눈길을 끈다. 그의 이름을 생각하면 너무 적다. <검은 화집>은 벌써 절판이다. 물론 그의 시대는 지금이 아니다. 그의 영향 아래 성장한 다른 작가들 시대다. 그의 걸작 단편 컬렉션을 낸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 요코야마 히데오 등의 시대다. 하지만 헌책방을 돌다보면 그의 소설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모리무라 세이치의 소설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그의 시대가 아니지만 그의 명작은 지금도 출간되고 있고, 읽히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 모리무라 세이치와 마쓰모토 세이초를 혼동한다. 왜 두 거장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제대로 읽은 적이 없거나 이름에 약한 나의 성격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정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품의 성격도 있지 않나 짐작해본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두 거장임을 생각하면 조금 부끄러운 일이다. <인간의 증명>을 예전에 읽었지만 큰 감명을 받지 못한 것이나 세이초의 다른 작품을 읽을 때 마무리에서 아쉬움을 느낀 것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마 앞으로 한 동안은 그렇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제로의 초점> 사실 많은 기대를 했다. 작가의 명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중반에 범인의 윤곽과 이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범인을 맞추는 것에 초점을 둔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분명히 아쉬운 작품이다. 하지만 그 사건의 이면을 생각하고, 왜 이렇게 내가 빠르게 범인을 맞추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면 조금 다르다. 그리고 빠르게 읽히는 내용과 전개는 상당히 몰입하게 만든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시대를 감안하면 다른 매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물론 이것은 개인의 취향이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시대 배경은 1957년 겨울이다. 스물여섯 살의 이타네 데이코는 가을에 선 본 남자 우하라 겐이치와 결혼한다.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이다. 나이 차이가 적지 않고 선을 본 후 얼마 되지 않아 둘은 결혼한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이상하고 낯선 장면이지만 그 시대는 그랬다. 우하라는 광고대행사 가나자와 지점에서 근무한다. 결혼하면 도쿄 본사에서 근무할 예정이다. 그런데 우하라가 업무인수인계를 위해 혼다와 함께 가나자와에 간 후 돌아오지 않고 실종된다. 이제 겨우 신혼 한 달만에 말이다. 이 소설은 그의 실종을 둘러싼 의문과 이어지는 살인사건을 뒤쫓는 아내 데이코의 조사 기록이기도 하다.

그 시대의 추리소설이 어떠했는지 잘 모르지만 경찰이나 탐정이 아닌 일반 사람이 탐정 역할을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한때 신문기자가 탐정 역할을 주로 맡은 적이 있지만 경찰이 상당히 배제된 경우는 흔치 않다. 그리고 사건 피해자의 아내가 사건을 뒤쫓는 경우는 정말 드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추어 탐정이라기보다 실종자의 아내로서의 절박함이나 의문이 더 강한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녀의 탐정 역할은 파편적인 정보의 조합을 통해 드러난다. 남편의 과거 행적과 피해자의 이상한 행동이 단서다. 그 단서를 쫓아가면 필연적으로 그 시대의 아픔을 만나게 된다. 그 아픔은 시대가 만들었고,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태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범인과 동기는 사실 쉽게 중간에 드러난다. 이렇게 간파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사이에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소설들을 몇 권 읽었기 때문이다. 내가 중간에 범인을 쉽게 맞추는 대부분의 경우가 바로 비슷한 구성이나 전개를 가진 소설을 이전에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뭐 대부분은 읽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신기하게 생각하는 경우지만. 그리고 중간 중간 드러나는 시대의 풍경과 삶은 상당히 낯설다. 현재의 일본과 너무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살인사건을 제외한다면 한 편의 시대소설로 읽어도 되지 않을까 라고 할 정도다. 마지막 장면이 주는 여운은 이것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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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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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대를 말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장르 소설을 제외하고 그렇게 열정적으로 읽은 외국작가는 그가 처음이었다. 몇몇 유명작가의 작품이나 세계문학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는 완전히 달랐다. 그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사실 쉽지 않다. 그 당시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한 그의 소설을 두고 통신에서 오고 간 대화들은 나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당연히 모든 소설을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소설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했는데도 아주 재미있게 읽은 것이다. 문체와 이야기가 기존 소설과 완전히 달랐다. 오죽하면 그 당시 한국 작가들이 그의 문체를 흉내낸다고 했겠는가. 

잡문집이란 제목대로 온갖 글들이 다 실려 있다. 모두 열 꼭지로 나눌 수 있다. 서문 해설 등, 인사말 메시지, 음악, 그의 르포집 <언더그라운드>, 번역, 인물, 눈으로 보는 것 마음으로 생각한 것, 문답들, 짧은 픽션, 소설 쓰기 등이다. 이 잡다한 듯한 글들을 통해 바라보는 하루키는 한 소설가에서 한 명의 음악애호가이자 번역가이자 인터뷰어이자 생활인이다. 정말 하루키를 알고 싶다면 이보다 더 좋은 안내서가 없을 것 같다. 물론 에세이 등을 통해 그의 일상이 드러나지만 이 책처럼 다양한 분야를 함께 다루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하루키 팬에게는 멋진 안내서이기도 하다.

수많은 글 중에서 역시 눈길이 가는 것은 음악과 번역과 인물에 대한 부분이다. 그의 재즈에 대한 사랑과 깊은 이해는 이미 정평이 나있지만 이 글들을 읽으면서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얼마나 열심히 듣고 공부했는지 글을 통해 충분히 전해졌다. 그가 쓴 음악 에세이를 아직 읽지 않았는데 오히려 다행이란 느낌이 든다. 이 글들이 행복한 책 읽기에 대한 기대를 부풀려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글들을 통해 깊이와 넓이를 보여줬고, 마음으로 그 음악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줬다. 그의 글쓰기가 음악과 관련 있다는 부분에서는 살짝 아주 많이 부러웠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작가가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레이먼드 챈들러다. 이 둘이 그의 문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이 둘의 작품을 해설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아직 느껴보지 못한 재미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또 그가 번역가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과 창작 작업이 번역 작업과 밀접하게 호응하고 있다는 대목에서는 다시 한 번 하루키 문체를 생각하게 된다. 아마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번역서를 다시 읽거나 원서를 읽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루키의 영향이다. 영어도 못하는 내가 원서 욕심을 내다니 정말 대단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엄청난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그가 풀어낸 재즈나 록은 반드시 들어봐야 할 것 같고, 읽고 칭찬한 작가의 소설 등은 꼭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아마 그가 느낀 즐거움과 재미의 반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몇 차례 시도는 할 것 같다. 뭐 책 읽으면서 당장 예전에 받아둔 재즈 음반을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살짝 놓아두었던 재즈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는 기회가 되었다고 해야 하나. 몇몇 소설가에 대한 그의 평가는 사놓고 고이 모셔만 두고 있는 작품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일깨운다. 뭐 이런 경우는 다른 소설가들의 글 속에서도 자주 만나지만.

읽으면서 참 많은 부분에 공감하고 새롭게 하루키를 보게 되었다. 그가 벌써 소설가가 된지 삼십년이 되었다는 사실에서는 나도 그만큼 나이 먹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사실 최근 몇 작품은 왠지 옛날 같은 재미를 누리지 못했다. 긴 작품일 때 특히 그렇다. 오히려 짧은 글이 더 좋은데 이것은 예전과 정반대다. 많은 소설을 읽게 되고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그렇게 된 모양이다. 오래전에 누군가가 하루키의 진짜 재미와 매력은 짧은 단편이나 에세이에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된다. 요즘 특히 그렇다. 이 책이 지닌 매력 중 하나는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설이다. 뭐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즐겁고 재미있는 것은 분명하다. 덕분에 다시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강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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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 우연히 데이브 거니 시리즈 1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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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거니 시리즈 1권이다. 시리즈라고 하니 현재까지 엄청 많이 나온 것 같지만 이제 2권까지 나왔다. 그리고 이 책이 작가의 처녀작이다. 달랑 2권의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한 수많은 작가와 매체의 극찬은 시선을 끌기 충분하다. 가끔 이런 극찬이 책읽기의 어려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다르다. 트릭이 신선하고 엄청난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 캐릭터와 구성과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힘이 대단하다.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한 장면은 이 소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너무 짧아 그냥 스쳐지나갔는데 중반 이후 이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이 장면이 지닌 의미와 연결된 과거를 알게 된 것은 거의 끝 무렵이다. 이후 이어지는 장면은 뉴욕의 전직 형사였던 거니의 사진예술 작업 장면이다. 그가 하는 작업은 연쇄살인범의 얼굴을 통해 그들이 지닌 악의와 냉철함 등을 표현하는 것이다. ‘살인자들의 초상 - 그들을 체포한 형사 作(작)’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가 기획될 정도로 강한 인상을 주는 작업이다. 은퇴한 그의 하루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런 약간 평온한 일상에 변화가 온다. 대학 친구였던 마크 멜러리가 그에게 한 사건에 대한 조언을 구한 것이다. 그것은 3주 전에 온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편지 내용에는 원제처럼 숫자 하나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1과 1000사이의 숫자다. 마크가 생각한 숫자는 658이다. 그런데 편지 속에는 그 답이 적혀있다. 어떻게 이 숫자를 맞췄지? 의문이 생긴다. 이런 초현실적인 상황이 이후에도 발생한다. 그에게 이 편지를 보낸 범인이 또 다른 숫자 놀이를 통해 그 답을 맞춘 것이다. 사실 이때 이 트릭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이런 트릭이 가능한가 생각했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 그 트릭을. 

두루뭉실한 시와 함께 한 편지와 더불어 X. 아리브디스의 사서함으로 289.87달러를 현금이나 수표로 보내라고 한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면 될 텐데 마크에게는 남모를 과거가 하나 있다. 현재 그의 직업은 수련원 원장이다. 책도 몇 권 내었다. 하지만 과거에 그는 알코올 중독이었고 여행 중 알코올에 취해 아내의 죽음을 놓친 적이 있다. 이 편지가 그의 아픈 과거를 떠올린 것이다. 그 사건으로 현재의 그로 완전히 변했지만 그 기억은 변함없이 그를 따라 다닌다. 성공하고 부유한 수련원 원장에 아름다운 새 아내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이어지는 수수께끼 같고 의문으로 가득한 편지와 전화는 그를 불안으로 몰아간다. 거니가 경찰에게 신고하라고 했지만 가진 것을 잃기 원하지 않았던 그에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그는 살해당한다. 이 살인사건으로 은퇴했던 그가 현장에 다시 나가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참고인에 진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경력을 알고 있던 검사가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일종의 컨설턴트다. 이때부터 경찰 자료를 얻게 되고, 사건의 유사성을 뒤쫓게 된다. 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고 연락이 오고, 그 현장을 다녀온다. 처음에는 다른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파헤치자 같은 범인임이 드러난다. 연쇄살인범이 등장했다.

독특하고 기발한 트릭에 기대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전체적인 매력은 데이브 거니에게 있다. 은퇴했지만 그가 하는 현재 작업이 전 직업과 관계를 맺고 있고, 그의 냉철하고 몰입이 강한 성격과 생활은 평온한 일상을 거부한다. 아내와 함께 은퇴한 생활을 즐기기에 그는 아직 젊다. 겨우 마흔일곱이다. 이전에 그가 거둔 대단한 성공을 생각하면 놀랄 일이다. 그런데 은퇴 후 아내와 알콩달콩한 일상을 즐기지도 못하고 있다. 거기에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흔적은 그를 계속 따라붙는다. 아들 카일과의 불편함도 여전하다. 이런 불완전한 그의 삶이 한 축을 이룬다.

거니의 삶이 한 축이라면 살인사건은 또 다른 핵심 이야기다. 누가, 왜? 이런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을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트릭은 단순하지만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범인이 계속해서 살인을 하고 실수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어지는 연쇄살인에도 그렇다. 범인 흔들기를 하는 수밖에 없다. 역시 편지다. 이런 범인과 경찰의 대결과 긴장 관계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이어진다. 경찰 내부의 갈등과 뛰어나고 열성적인 형사도 나온다. 하지만 범인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하나씩 발견되는 시체를 통해 정확하게 계획된 연출이 드러난다. 강적이다. 정말 잘 짠 구성이다. 

거니의 캐럭터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그의 아내 매들린이다. 풍부한 지성과 직관을 통해 중요한 순간에 그에게 영감을 준다. 거니와의 불안정한 결혼 생활은 또 다른 긴장감을 조성한다. 범인상을 만들기 위해 파편적인 사건의 단서들을 하나로 꿰어나가는 거니에게 매를린은 영감의 원천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열혈형사 같은 잭 하드윅이 등장하여 약간은 평면적인 이야기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조금 등장 분량이 적다는 느낌이 들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살짝 팁 하나. 숫자를 생각해라. 단순하게. 통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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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올레는 어디인가 - 길.사람.자연.역사에서 찾다
서승범 지음 / 자연과생태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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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올레라는 단어는 꼭 가보고 걸어봐야 할 곳으로 다가왔다. 원래 올레는 거릿길에서 대문까지의,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이란 뜻의 제주 말이다. 그런데 제주 올레길이 생기면서 그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제주올레 19코스는 기존 제주 관광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빼어난 자연 풍경과 걷기의 만남으로 도시의 일상에 찌든 사람들의 탈출구가 된 것이다. 서울에서라면 걷기가 죽기보다 싫은 사람들이 비싼 비행기 값과 경비와 시간을 내어 이 올레를 걷는다. 다녀와서는 그 길에 대한 칭찬을 길게 널어놓는다. 그러니 올레란 단어에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올레가 아니다. 첫 이야기가 제주올레 16코스라고 해도 말이다.

표지에 ‘길, 사람, 자연, 역사에서 찾다’란 단어가 보인다. 이것은 이 에세이가 묶인 주제들이기도 하다. 모두 네 꼭지, 스물넷 이야기로 엮여있다. 이렇게 분류를 했지만 결국 사람이야기다. 그와 그가 길에서 만난 사람, 풍경, 단상, 감상 등이 그가 여행 곳을 중심으로 풀려나온다. 이 과정이 깊은 사고를 그쳐 나오는데 많은 부분에서 공감대가 형성된다. 그것은 아마 그가 경험했던 것을 나도 겪고 싶고, 그가 본 풍경과 삶을 나도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다녀온 곳 중 몇 곳은 그냥 무심코 지나간 곳이 있는데 이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가득하다.

이 책에서 제주올레에 대한 정보나 새로운 관광정보를 기대했다면 빨리 덮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다녀온 곳에 대한 평이 결코 일상적인 여행안내서와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길, 사람, 자연, 역사란 큰 틀과 인연과 단상을 이야기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행지 정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간단한 여행지 팁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곳에 가기 위해, 새로운 감상을 설명하기 위해 있을 뿐이다. 특히 관심 있는 맛집 추천에 인색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나오는 맛집 정보가 무척 반갑다.

개인적으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 어지간한 거리는 걷는다. 하지만 점점 걷는 거리가 짧아지고 있다. 살짝 남 탓도 하지만 결국 게으름과 피곤함이란 핑계 때문이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목적지에 가장 빨리 가기 위한 발걸음도 있지만 문득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풍경과 사람을 볼 기회도 생긴다는 의미다. 그가 찾아간 곳 대부분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움직인 것을 보면 이 여행이 의도하는 바가 잘 드러난다. 관광이 아닌 여행, 단순히 보고 오는 것이 아닌 그곳에서 사람과 역사를 생각하는 것이 여기에 실려 있다. 

참으로 많은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특히 육아의 기준에 눈길이 간다. 그가 세운 육아의 기준은 ‘주지 않는다’다. “안아주지 않고 안고, 먹여주지 않고 함께 먹고, 놀아주지 않고 함께 놀고, 재워주지 않고 함께 자는 것.”(77쪽) 영어의 'give and take'란 표현이 떠올랐다. ‘준다’란 것에 ‘받는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는 지적은 머리를 강하게 울린다. 흔히 하는 말로 베푼다고 하거나 선심 쓰는 듯한 일에 제동을 건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이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사물에 대한 깊은 관찰과 통찰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곱씹을 필요가 있는 육아의 기준이다.

‘나의 올레는 어디인가’에 대한 답이 이 책이다. 앞으로 그가 가야할 올레도 많이 남아 있다. 갔던 곳을 다시 가보고 싶다는 글들이 책 속 가득한데 충분히 공감한다. 시간이나 환경의 변화에 의해 풍경이나 인상이나 감상 등이 변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도 나의 올레는 어디인가 묻게 된다. 어딜까? 어릴 적 뛰어놀던 곳들은 이제 차들 때문에 감히 아이들을 밖으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 시절의 기억보다 현재의 기억과 추억이 더 희미해지고 있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짓눌리고 있는 것이다. 끝없이 그 생활을 반성하지만 실천은 멀기만 하다. 또 핑계로 현실을 말한다. 지금이라도 나의 올레를 하나씩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아직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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