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읽은 온다 리쿠의 소설이다. 온다 리쿠는 작품에 따라 개인적인 호불호가 나뉜다. 처음 만났던 <밤의 피크닉>의 기억이 지금도 강하게 남았는데 <삼월은 붉은 구렁>은 단편 속에서도 호불호가 나누어졌다. 그 후 몇 편은 아주 좋아하고, 몇 편은 취향을 탔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녀의 신간은 눈길을 주게 만든다. 좋았던 작품이 나빴던 아니 취향에 맞지 않았던 작품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번 소설은 어떨까? 물론 좋았다.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소설이 있는데 아직 읽지 않았다. 바로 잭 피니의 <바디 스내처>다. 외계 에어리언이 지구 침략을 위해 한 마을 사람들의 신체를 강탈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뤘다고 한다. 원작을 읽지 않았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본 것 같다. 이런 간단한 지식만 가지고 있어도 사실 책을 읽는 데는 지장 없다. 오히려 선입견을 배제할 수 있으니 더 좋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점 진도가 나가면서 밝혀지는 사건의 전모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밖으로 드러난 사실들 속에 숨겨진 기억과 진실은 왜 이 작품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1위에 올랐는지 보여준다.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은 모두 네 명이다. 여자들의 사랑을 받는 쓰카자키 다몬, 그의 선생이었던 교이치로, 교이치로의 딸 에이코, 마지막으로 신문사 지부장 다카야스 노리히사다. 이들이 처음부터 연결된 것은 아니다. 가상의 도시 야나쿠라에서 벌어진 수상한 실종 사건을 고리로 이어진 것이다. 수상한 실종 사건은 며칠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세 명의 노인들에 대한 것이다. 이들은 갑자기 사라졌고 납치의 흔적도 없으며 사라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나타났다. 더 이상한 것은 그들이 실종되었던 기간 동안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단순한 미스터리 실종 사건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실종자와의 인터뷰와 교이치로가 기르는 고양이 하쿠우가 물고 온 정밀한 인체 복제물이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다. 인터뷰 도중에 들리는 이상한 소리가 어떤 존재가 그 장소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부채질하고, 복제물이 정밀함을 넘어 기이하게 줄어들고 사라지는 모습에서 이 모든 사건 뒤에 뭔가 거대한 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암시를 준다. 여기에 등장하는 <바디 스내처> 이야기는 단순한 미스터리 장르를 넘어 다른 장르로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과 분위기는 그것이 사실로 밝혀진다.

SF와 미스터리의 단순한 결합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도둑맞은’이란 단어의 반복에서 다른 기억과 실체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 좀더 복잡해진다. 등장하는 각 인물들의 과거가 엮이고 하나씩 풀려나면서 밝혀지는 관계와 사실은 사건의 진행과 더불어 더 깊은 곳으로 독자를 이끌고 들어간다. 기억이란 단어가 과거 속으로 끌고 들어가면서 보여주는 기억들은 우리가 흔히 기억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과연 그 기억들이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것일까? 아니 모두 진짜일까? 하고 물을 때 자신에게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마을 사람들이 ‘도둑맞은’ 것을 예상한 그들이 자신들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의문을 품는 순간 다시 읽는 독자에게 ‘그럼 당신은?’하고 묻게 된다.

물의 도시 야나쿠라라는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했다. 읽는 내내 MB의 대운하가 떠올랐고, 도시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상상했다. 그냥 가볍게 읽어도 되지만 이런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은 역시 최근 정치 현실이나 내가 알고 있는 물의 도시 풍경 이미지가 부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다양하고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그만 두자. 하지만 물의 도시가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 가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도둑맞은’ 사람들과 하나라는 일체감은 괜히 다른 곳으로 생각이 뻗어가게 한다. 우리의 교육이 이미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읽는 동안보다 모두 읽은 지금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아련한 추억의 그림자가 가슴 한 곳에 드리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아스포라의 눈 - 서경식 에세이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서경식 씨의 책을 두 번째 읽는다. 처음 읽은 책이 <나의 서양음악 순례>다. 이 책을 통해 그냥 이름만 기억하고 있던 그를 어느 정도 윤곽을 잡게 되었다. 이번 책은 그에 대한 좀더 세밀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에 마일리지로 사놓은 다른 책들도 기억 속에서 새록새록 솟아났다. 나의 독서 취향 상 단숨에 그의 다른 책을 읽지는 않겠지만 머릿속 한 곳에 그의 책들이 자리를 잡고 똬리를 틀고 앉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너무 쉽게 보아 넘기고 당연하게 여러 가지 현실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발전을 보여줄 것 같다.

이번 책은 머리말에서부터 나의 이성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국민’이라는 걸 의심해본 적 없는 독자에게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다른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6쪽)이다. 한 번도 대한민국 국민이란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고, 이 국민이란 관점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나에게 최근에 이런 글들은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내가 이중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상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면서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산산조각난다. 

여기 실린 칼럼은 <한겨레>에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과거 4년간 한국, 일본, 세계의 사상 등을 응시하며 쓴 글이다. 모두 네 꼭지로 나누었는데 칼럼 순서가 아닌 분야별로 묶어놓았다. 첫 꼭지가 기억의 싸움을 다루는데 특히 이제 곧 다가올 5월과 6월이 기억의 계절이라는 대목에서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은 평화와 인간성을 위한 싸움이다.”(46쪽)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 쉽게 잊어버림으로써 파시즘이나 독재자 등이 다시 기승을 부린다는 의미다. 이번 총선을 볼 때 정의도 윤리도 이익을 위해서라면 너무 쉽게 무너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일본의 ‘집단적 죄’와 ‘국민적 책임’을 구분한 내용을 곱씹어볼만하다. 

두 번째는 재일조선인으로 사는 문제다. 한국과 일본에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존재인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이것을 예전에 집시라고 불렀던 로마들에 대한 프랑스의 대처를 나치의 그것과 연결한 부분에서 우리 속에도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다시 팔레스타인 문제로 이어지면 홀로코스트 산업이란 용어를 자연스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재일조선인의 북송사업이 일본 정부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역사적인 기만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놀아났는지, 그것이 현재와 미래와 과거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보여준다.

세 번째 꼭지에서는 시대를 통찰하는 예술의 힘을 다룬다. 이전에 읽은 저자의 다른 책이 간간히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특히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의 차이에 대한 고찰 부분은 용어가 우리 인식의 한계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베네수엘라의 기적으로 불리는 국가적 음악교육 시스템이다. 우리도 최근에는 사교육으로 악기 하나는 배우게 만들고 있지만 국가적인 지원이나 예술로의 발전을 위한 시스템이 아니란 점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뭐 한국에서는 음악이나 미술 교육이 하나의 스펙 정도에 불과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마지막은 젊음과 그 뒤안길에 대해 다룬다. 병원에서 가족들이 간병하는 것을 당연시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와 일본의 현실을 비교한 부분은 핵가족 사회로 변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간병인이 점점 상식화되어 가는 현실에서 병원이라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전문가 집단에게 환자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가족에게 그 부담을 지우면서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3년 간병에 열녀, 호부 없다는 옛말을 생각하면 사회적 분담에 대한 논의가 더욱 더 진행되어야 한다. 물론 이런 시스템에 전적으로 의지해 전혀 그 가족을 찾아오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렇게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한국인’이기에 ‘국민’이기에 잊고 있거나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꼭 집어서 보여준다. 이것은 저자의 말처럼 디아스포라로 살아온 그의 인생 역정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고, 역사와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의 우경화에 대한 낙관적 인식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그의 통찰은 가슴 깊이 담아둬야 한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우경화가 우리와 다를 것이라는 역사학자의 인식은 기억하고 증언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과 충돌한다. 이 칼럼 모음집을 통해 다르게 세상을 보는 눈 하나를 더 가지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한 노인의 불륜 이야기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제목처럼 오래오래 지속된 사랑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이것에 대한 판단은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 개인적인 의견은 후자다. 엄숙한 도덕과 윤리의 잣대에서 본다면 이 둘의 만남은 분명히 불륜이다. 하지만 그들이 불륜에 빠져 자신들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것이 단순한 열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작가가 독자 앞에 풀어놓은 이야기가 충분히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둘의 사랑이 결혼이란 제도 속에서 지속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분명히 재미라는 측면에서 많이 떨어졌겠지만.

가브리엘은 뛰어난 원예가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선조들은 유명하고 탁월한 바람둥이들이었다. 어린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를 닮지 않고자 노력했다. 평온한 원예가의 삶을 살아가면서 가정에 비교적 충실한 삶을 살고자 했다. 하지만 유전적인 원인 때문인지 아니면 운명처럼 그를 강타한 한 만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두 아이의 엄마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 사랑의 시작은 그가 즐겨 찾던 식물원의 아주 짧은 마주침과 접촉을 통해 구체적으로 일어난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이끌려 그는 그녀를 찾아다닌다.

엘리자베트. 그녀는 프랑스 무역 외교전문가다. 두 아이의 엄마다. 그녀를 묘사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여왕이다. 여왕의 운명을 타고난 그녀는 남자에게 휘둘리는 성격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룬 가정을 포기할 정도로 이성을 잃은 것도 아니다. 그녀 속에 있는 법도는 사랑에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가브리엘이다. 그녀의 남편이다. 아이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은 그녀의 불륜에 대해 알지 못한다. 정신없이 바쁘고 힘찬 그녀의 삶이 이어지면서 그들 삶에 일어난 아주 큰 비밀을 깨닫지 못한다. 이 긴 소설 속 아주 짧은 부분에서 가브리엘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흔들리는 그녀를 보여주지만.

가브리엘이 그녀를 찾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한다. 두 아이들을 통해 그녀와 연결되길 바라지만 쉽지 않다. 프랑스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열정적인 사랑에 처음 빠진 그가 도움의 손길을 바라며 마지막으로 손을 내민 곳이 바로 평소 연결되지 않고자 했던 아버지다. 아버지의 두 연인과 함께 그의 길고 오래오래 지속된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에 무관심했던 그에게 아버지와 두 연인은 여자와 사랑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한다. 물론 그는 그녀가 아르헨티나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편 전략은 아이들을 통해 그녀와 연결되는 것이고, 그의 노력과 정성은 결국 결실을 맺는다.

단순한 사랑만을 다루었다면 조금 지루했을지 모른다. 작가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속에 문학과 예술과 원예 등에 대해 끝없이 널어놓는다. 미세한 감정의 흐름을 타고 흘러나오는 문학에 대한 열정은 새로운 아이를 낳게 만들고, 대문호를 기대한다. 두 사람 주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성 강한 모습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특히 안젤리나에서 차를 마시며 벌어지는 조그만 에피소드는 아버지의 두 연인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또 가브리엘이 어떤 사랑을 나누는지 잘 알려준다. 만약 튈릴리 공원 앞의 그 카페라면 그 풍경은 정말 볼만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곳의 쇼콜라 쇼가 그렇게 단 것도 이런 일들을 유발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기억이 정확하다면 처음 만나는 작가다. 하지만 6백여 쪽에 달하는 내용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 나가는 필력을 보면서 다른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결코 무시무시한 이야기나 긴장감 가득한 상황을 연출하지 않는데도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그려내면서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들은 일상의 풍경과 더불어 이루어지고, 그 감정은 가슴 속에 조용히 파고든다. 세부적인 이야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겠지만 작가가 보여준 오래오래된 연인의 사랑과 열정은 내가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강하게 다가올 것 같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도 이런 사랑을 앞으로 나눌 수 있기를 읽는 내내 바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헨리 치나스키 3부작 중 첫 장편이다. 이보다 먼저 번역 출간된 <팩토텀>은 아직 읽지 않았다. 사실 <팩토텀>에 대한 호불호 평을 읽고 주저했다. 왠지 쉽게 읽힐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여파는 이 소설을 선택할 때도 있었다.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개성 강한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에서 살짝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자마자 사라졌다. 평범하고 쉬운 문장과 일상적인 삶을 날것 그대로 보여줘 오히려 쉬웠다. 윤리와 도덕에 대한 잣대를 내 속에서 치워버린 순간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된 그의 삶들이 가볍게 지나갔다.

제목대로 치나스키가 근무하는 곳은 우체국이다. 이 우체국의 시스템을 보는 순간 의문으로 가득 찼다. 정규직과 임시직의 차이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처음 그가 배달부 임시직으로 일할 때 우연히 배달간 집 여자와 섹스할 기회를 잡았을 때 이 차이는 너무 쉽게 사라졌다. 물론 이것은 순간의 쾌락에 의한 환상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가 배달하면서 만나게 되는 상황들 중 일부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와서 배 부근까지 잠기는 물을 뚫고 배달하는 그의 모습은 소설 속에서 보여준 행동과 비교해서 너무 낯설다. 술과 여자에 빠져 사는 그가 이런 책임감을 보여준다는 것에 이질감을 느낀 것이다.

이런 이질감은 작가의 약력에 나온 ‘잦은 지각과 결근으로 마침 해고 직전이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물론 여기에는 술과 여자와 도박이 한몫했다. 그의 삶에 이것을 빼면 뭐가 있나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반복하고 계속된다. 이 와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원했다가 떨어져 나간 우편물 분류 사무직원에 당당히 붙은 사실은 의외다. 많은 것을 외워야 하고 책임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 나온 내용만 가지고 본다면 해고 직전까지 갔던 것은 그가 관리직과 타협하거나 아부하지 않은 탓이 더 큰 것 같다. 이 소설에 숨겨진 일들을 충분하게 감안하지 않을 때 더 그런 느낌이 든다.

술은 늘 그의 곁에서 매일 몸속으로 이동했고, 여자는 자주 바뀌었다. 이런 일상을 생각하면 근태가 얼마나 엉망이었을까 짐작이 된다. 하지만 일에 들어가서 보여준 태도는 그렇게 근태가 엄청 나쁜 것 같지 않다. 해설에도 나오지만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에 의한 기계적인 도입이 만들어낸 폐해가 더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늦게 마치는 것도 잘못이지만 빨리 끝내고 쉬는 것도 잘못이라는 관리직의 말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우편물 분류 작업 분량을 기계적으로 대입하지만 관심 있는 여직원에게는 관대한 관리직을 볼 때 이중 잣대와 편견과 선입견이 얼마나 그 시대에 팽배했는지 알게 된다. 

간결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한 문장은 그의 행동과 더불어 살짝 부러웠다. 나의 일상에 비교해서 너무 자극적인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12년이라면 다르다. 자극적인 것처럼 보이는 일상들이 긴 시간 속에서 가끔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고정된 자리에 앉아 오른팔만 사용해서 살찌고 근육통을 가졌던 사실을 생각하면 실제 우체국에서의 삶은 끔찍함 그 자체다. 뭐 시가를 피우다 우편물을 몇 개 태운 것 같은 재미난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 또한 다음에 벌어진 대책을 비웃으며 멋진 유머로 마무리한다. 이 같은 블랙유머는 간결하고 반복적인 삶에 활력과 재미를 불어넣어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하기 힘든 평가가 안티히어로라는 것이다. 안티히어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치나스키의 삶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작가의 다른 작품 중 한 편을 영화로 만든 <술고래>를 지루하게 봤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 이런 주인공의 행동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느낌이다. 나의 성장 때문인지, 아니면 작가가 보여준 삶에 어떤 동질감을 찾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작품 속에 다루어진 그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일상은 또 다른 일상의 반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훗날 나의 삶도 이렇게 간결하게 표현한다면 얼마나 많은 굴곡이 있을까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 네스뵈의 두 번째 번역 작품이다. 첫 작품이 시리즈와 상관없는 <헤드헌터>였다. 이 소설은 요 네스뵈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인식시켜주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각인시켰다. 그리고 이번 작품은 해리 홀레 시리즈 중 일곱 번째 작품이다. 아홉 편까지 나온 것 중에서 뒤편이라는 사실이 조금 불만이지만 최고 인기작이라고 한다. 불만은 당연히 순서대로 보지 못함으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사소한 문제다. 특히 해리의 파트너가 죽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시리즈 앞 권을 읽을 때 조그만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나의 저질 기억력을 생각하면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지만. 

제목대로 눈사람이 중요한 장치다. 한국에서 눈사람을 만들거나 보기가 쉽지 않지만 텔레비전 등을 통해 너무나도 낯익은 것이 바로 눈사람이다. 처음 제목과 몇몇 사람들의 서평을 읽으면서 눈사람 속에 시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시체를 숨길 정도로 평범한 연쇄 살인범이 아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눈사람이 나오면 왠지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그것이 비록 아이들이 만든 눈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긴장감을 불러오게 만드는 설정이 나를 책 속에 몰입하게 만든다. 엄청나게 잔혹한 장면들이 나오지 않는다하여도 말이다. 

소설 앞부분은 과거의 불륜 장면을 보여준다. 현재 시간 속 라디오 방송에서 바다표범의 짝짓기 습관에 대해 말한다. 부자의 유전적 혈연관계에 대해 노르웨이의 통계 수치를 보여준다. 거의 20% 정도가 실제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에 다른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 수치다. 그래서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때도 그렇지만 이 통계 수치를 본 후 왜 우리들이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와 닮은 곳을 그렇게 찾으려고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 속에서 이런 장면들은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리즈다보니 해리 홀레라는 주인공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중간 중간 나오는 과거 이력을 보면 완벽한 형사가 아니다. 한때 할리우드에서 유행했던 알코올중독에 걸렸지만 범인을 잡아내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던 형사들과 닮은 점이 많다. 물론 할리우드가 보여주는 유머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사건에 집중하고 사건들의 연관관계를 추리하고 진실에 한발씩 다가가는 형사다. 그 과정에 당연히 실수도 한다. 어쩔 수 없는 실수다. 그가 초인적인 셜록 홈즈 같은 명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의 경찰들은 이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진짜 범인에게 다가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설정이 그에게 더 쉽게 감정이입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 놀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노르웨이에 연쇄살인범이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적지 않은 수의 연쇄살인범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놀랄 일이다. 그렇다면 앞에 나온 시리즈는 어떤 사건을 다룰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단지 하나의 살인만 저지른 범인을 열심히 쫓는 것일까? 자연스런 의문이다. 이것은 나중에 이 시리즈가 출간되면 확인할 것이니 넘어가자. 하지만 해리 홀레가 FBI에서 연쇄살인범에 대한 연수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 책 중간 중간에 계속 나온다. 아마 사람들이 배운 것을 사용하려는 심리가 있다는 것과 해리가 연쇄살인범의 가능성을 내비친 것에 대한 장치일 것이다. 단 한 번도 연쇄살인범이 없었던 나라에서 정확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그가 이 주장을 펼쳤을 때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다. 이런 일련의 장치들이 읽고 찾는 재미를 준다.

사실 연쇄살인범을 찾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의심한 그가 범인이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첫 장면이 보여준 것 때문에 점점 사라졌다. 물론 이것은 나의 운이 작용한 것도 있다. 지금까지 읽은 추리소설 덕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범인을 쫓는 형사들은 내가 가진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들 앞에 드러난 증거와 단서만을 가지고 범인을 쫓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 사람이 범인일 것이다’, ‘이 놈은 아니다’ 같은 추리를 한다. 물론 일본 추리 소설에서 자주 보는 단서와 증거를 뒤섞고 충격적 반전을 펼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면 다른 범인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 소설 전체가 보여주는 재미가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캐릭터와 이야기와 관계들이 만들어 내는 재미와 설정이 사라졌을 것이다. 뭐 이 모든 것을 잘 버무린 작가도 가끔 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