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미트리오스의 가면 열린책들 세계문학 248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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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서 한 번 들어본 듯한 이름이지만 낯설다. 동서문화사 판 <디미트리오스의 관>은 조금 더 낯익다. 제목과 작가 이름이 쉽게 연결되지 않는 것은 수많은 작품들에서 흔하지만 이렇게 많은 수상을 한 작가를 몰랐다니 놀랍다. 인터넷서점 검색을 하니 딱 두 권만 보인다. 이런 작가이니 내가 모를 수밖에. 한국의 장르문학 번역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현대 스파이 소설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작가의 작품이 딱 한 권 번역되었다니 말이다. 이번 기회에 더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개인적 바람은 뒤로 하고 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스파이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화자는 래티머란 추리소설가다. 원래 그는 정치경제학 교수였는데 추리소설이 성공하면서 전업작가가 되었다. 이스탄불에 와서 하키 대령이란 인물을 만난다. 그는 추리소설을 쓸 시간이 없어 자신의 아이디어를 래티머에게 제공하려고 한다. 그런데 래티머의 시선을 끈 것은 그의 초보적인 트릭 등이 아니라 디미트리오스란 인물이다. 하키 대령에게서 이 인물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이 정보를 가지고 디미트리오스가 살았고, 문제가 있었던 장소를 방문해 그와 그가 관련된 사건 정보를 수집한다. 소설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스파이의 과거를 뒤쫓는 소설이다. 결코 스파이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소설이 아니다. 작가가 정보를 확인하고 추적하는 과정은 그 시대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터키와 그리스의 갈등, 발칸 반도의 공산화, 각 국가의 이익을 위해 활약하는 스파이들의 정보전 등이 중심에 놓여 있다. 만약 이 시대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면 횡간에 숨겨진 더 많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작가가 이 시대를 어떻게 보고 해석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아는 것은 터키와 그리스의 전쟁 밖에 없다. 이 두 나라가 얼마나 잔혹한 행동을 했는지만 알고 있다. 바로 이 시대에 디미트리오스가 살인자로 이름을 올린다. 그의 수많은 인생 역정 중 첫 발자국이 바로 이때다.

 

디미트리오스의 삶을 들여다보면 악의로 가득하다. 유대인의 돈을 훔치기 위해 살인을 하고, 정치암살범이 되고, 스파이로 활약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마약을 팔면서 자신의 동료를 고발하고, 인신매매업도 했다. 이 과정에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협박하고, 구걸하는 등 필요한 모든 행동을 다 한다. 마지막에는 신분세탁을 한 후 국제금융기관의 이사까지 된다. 이런 과정을 뒤쫓는데 단순히 인물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습도 같이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에 속도감은 조금 떨어진다. 스파이소설이 가지는 긴박감이나 스릴감은 감소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아는 만큼 재미를 더 누릴 수 있게 만들었다.

 

솔직히 터키에서 발견된 디미트리오스의 정체는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그럼 다른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래티머가 각 도시를 돌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디미트리오스를 두려워하고, 그의 죽음에 안도한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 인물이 바로 래티머가 파리에 오면 50만 프랑을 주겠다고 제안한 피터스 씨다. 그와의 만남은 디미트리오스의 실체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만든다. 그리고 이 인물이 보여주는 이중성과 악의 기록은 결코 그도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인물들 사이에 놓인 래티머가 보여주는 행동과 실수와 우연은 후반부에 긴장감을 불어넣어준다. 마지막 장면에 대한 역자의 해석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시간 나면 서로 다른 판본의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는 재미도 누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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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피안
하오징팡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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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의 시선을 끈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중국 SF 작품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SF 문학상 휴고상을 수상한 것이다. 류츠신이 <삼체>로 휴고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동양 작가에게도 SF문학상의 문이 열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또 다른 중국 작가가 받을 줄은 몰랐다. 이런 중국 SF 작품이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때는 중국 SF하면 그냥 무시했던 부끄러운 시절도 있었다. 물론 좋은 번역가를 만났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문학에서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결국 관심은 작가와 작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 단편집의 목록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휴고상을 받은 <접는 도시>가 실려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여섯 편 중에 그 제목은 없다. 조금 아쉽다. 그리고 이 단편집에서 다루고 있는 공통적인 주제가 하나 있다. 바로 인공지능이다. 마지막에 실린 <인간의 섬>에 가면 인간의 탐욕과 결합한 인공지능의 미래가 펼쳐진다. 이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삶에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포기한다. 뇌에 칩을 심어 제우스라는 슈퍼 인공지능에게 항상 최선의 판단을 맡겨버린다. 이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120년 전 우주로 나간 탐사대원들이다. 당연히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고, 최선 혹은 최고 효율이 가진 문제가 드러난다. 마지막 마무리가 낭만적인 부분이 있지만 자신의 선택이라고 착각하면서 인터넷 검색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우리의 삶이 잘 표현되어 있다.

 

첫 작품 <당신은 어디에 있지>는 인공지능을 가진 분신으로 펀딩을 받으려는 런이의 하루를 보여준다. 그의 분신은 사용자의 가장 좋은 점만 취합해 상대방에게 답한다. 인간 감정이 지닌 복잡성과 이중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해 지속적인 성공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점을 마지막에 표출했을 때 해결책이 나오지만 이것을 구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학습을 잘 보여주는 단편이 바로 <건곤과 알렉>이다.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다른 영역으로 바꾼다. 인간의 목표 의식과 자유의지를 배우게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그 끝에 이르면 <인간의 섬>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영생 병원>은 <사랑의 문제>와 더불어 미스터리 형식으로 진행된다. <영생 병원>의 미스터리는 어렵지 않다. 중간에 단서를 뚝 던져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했던 어머니가 건강하게 돌아온 후 일어나는 사태와 숨겨진 현실이 다양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인간 복제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그를 내세워 병원을 무너트리려고 한다. 그가 정치적 도구로 바뀌는 순간이다. 어머니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건강한 어머니의 존재는 진짜 어머니인지 그 의미를 묻는데 인간 존재의 근원을 돌아보게 한다. <공각기동대> 속 전뇌를 생각하면 답이 쉬울 듯한데 아직 현실이 그 미래를 따라오지 못하는 괴리는 어쩔 수 없다.

 

<사랑의 문제>는 한 가족과 그 가족을 돌보는 인공지능 가사도우미 천다의 이야기다. 아내가 죽은 후 집을 돌보기 위해 천다를 데려온 아버지가 창에 꿰인 후 이야기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천다와 두 남매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떻게 보면 <라쇼몽>의 SF 작품 같다. 가족의 불화와 알력 속에 천다가 보여주는 최첨단 치료와 대응은 지극히 이성적이지만 상황을 개선시키지는 못한다. 여기에 인공지능의 이권을 둘러싼 문제가 엮이면서 상황은 복잡해진다. 재밌는 것은 배심원의 구성이다. 이 재판의 경우 인간과 인공지능의 배분이 1대1이지만 다른 경우라면 1대 11인 경우가 많다. 인공지능이 더 발전하면 사라질 직업 중 하나가 변호사라고 하는데 이것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에 진실이 드러나고 사후처리가 나타날 때 씁쓸함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전차 안 인간>은 <건곤과 알렉>과 더불어 아주 짧은 단편이다. 보통의 소설이 안드로이드인지 확인하는 문제를 다루는데 이 작품은 인간인지를 확인한다. 로봇3원칙과 역튜링 테스트를 이용한 단편인데 먼 훗날 이 문제가 한 번 이상은 전쟁에서 문제가 될 것 같다. 인간 공격이 가능해진 인공지능들이 과연 상대방만 공격할까? 다시 <인간의 섬>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간을 죽이는 결정을 내리게 되는 슈퍼인공지능 제우스의 선택으로. 전체적으로 예상한 것보다 가독성이 좋다. 인공지능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한국 SF작가들의 작품들이 더 많이 더 좋은 번역으로 좋은 결과를 맺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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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귓속말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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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승우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 나의 독서법과 거리가 조금 있는 작가고, 취향도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이승우를 강하게 인식하는 순간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한 영화평론가의 추천작으로 <생의 이면>이 올라왔을 때고, 나머지 한 번은 최근 로쟈의 현대 한국문학에 대한 글 속에서였다. 그때부터 책장에 몇 년째 꽂혀 있는 <생의 이면>이 눈에 들어왔다. 읽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작품이었다. 언제 시간 나면 읽어야지 생각하는 수많은 책 중 한 권이다. 그런데 문학에세이가 나왔다. 분량도 많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섣부른 추측을 했다. 선택은 이렇게 되었다. 이 선택은 정말 착각이었다.

 

에세이와 적은 분량은 보통 때라면 하루면 충분하다. 하지만 이승우의 글은 그렇게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다듬고 다듬은 문장들이, 꼬인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차이를 보여주는 글들이다. 그러니 대충 읽으면 그 내용을 완전히 오독하거나 ‘뭐 이런 비슷한 말장난 같은 글을 썼는가’ 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솔직히 고백 하나하면 나 자신도 이 에세이를 완전히 집중해서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집중력이 깨어져 단어만 따라간 곳도 적지 않다. 그래도 읽으면서 그 의미를 곱씹고,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색다른 재미를 누린 부분도 많다.

 

읽으면서 해외문학과 한국문학에 대한 감상문이란 느낌을 받은 부분이 많다. 외국 작가야 모두 유명한 작가들이지만 한국 작가 중 조금 낯선 이름도 있었다. 최근 나의 독서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생긴 문제이긴 하다. 상대적으로 많이 다루어진 작가가 카프카인 것은 그의 글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궁금해지고,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이청준의 소설을 읽고 앞으로 나아갔다는 부분은 나의 기억 속 이청준과 이승우의 문장과 내용을 생각하면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평론가들이 연구할 부분이 아닐까.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가 같은 작가였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비판하는 글을 보고 살짝 반감이 생겼다. 물론 그 당시에도 이 둘은 같은 인물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경지는 어떤 것인지.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재미를 발견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가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산 책을 읽고 재미없다고 외쳤던 순간과 지금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오에 겐바부로의 책 중 한 권이 SF로 분류되어 있어 기대하고 읽었는데 크게 실망했던 순간도 있었다. 아마 이런 경험들이 이 에세이를 읽는데 도움을 준 것 같다. 천천히 그 문장을 들여다보고 말장난 같은 글 속에서 미세한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가 지닌 의미를 깨닫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책을 더 읽을 테냐고 묻는다면 일단은 ‘다음에’라고 답하고 싶다. 아직은 좀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좋기 때문이다.

 

“독자의 처지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는 것, 그것이 문자 텍스트의 숙명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내가 상당수의 작품들 힘들게 읽은 이유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시간, 장소, 기분, 분위기, 나이, 의자의 경도 등이 미세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지 않는가. 늦은 밤 책을 많이 읽는 나에게 이런 체력적 환경적 요인들은 그 작품을 이해하는데 미세하거나 거대한 차이를 만든다. 여기에 나의 경험도 무시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오에 겐자부로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특정 장르에 익숙해진 독법도 이런 차이를 크게 만든다. 이렇게 이 책은 나의 사유를 확장시킨다.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작가. 그의 에세이는 철학적이고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종교의 인용은 기독교의 글들이지만 내용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소설쓰기, 실존, 소설의 고유성 등이다. 에세이 후반으로 가면 독자, 세계화, 소설가 등을 이야기한다. 노벨문학상도 하나의 문학상이란 그의 평가에 공감하면서 하나의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런 식으로 쓸 수도 있다는 사실에 새로운 시선 하나를 배운다. 나의 의지와 조직의 지시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언젠가 그의 소설들을 읽고 젊은 시절 내가 놓친 재미를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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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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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의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초기 단편들을 연대순으로 실은 작품집이다. 이때 말하는 연대순은 발표가 아니라 창작한 순서다. 마지막 작품 일러두기에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다. 처음 이 단편집을 선택할 때 집에 고이 모셔두고 있는 단편집 <새>의 작품들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목차를 보니 다행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이 작가의 작품을 두 번째 읽는다. 첫 번째는 당연히 <레베카>다. 오래전 영화로 보고 소설을 다시 읽었는데 취향을 조금 타는 작품이었다. 히치콕의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고 할까. 단편은 어떤 느낌일까? 이 호기심에, 작가의 명성에 선택했다.

 

작가가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에 걸쳐 쓴 열세 편의 초기 걸작 단편을 모아 낸 선집이라고 한다. 이미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대프니 듀 모리에> 세계문학단편선을 내놓았는데 뭐지? 하는 느낌도 있었다. 오늘 목차를 찾아보니 이 작품집에 <새>가 실려 있다. 당연히 내 머릿속은 히치콕의 영화가 먼저 떠오른다. 영화 이미지와 단편의 이미지를 비교하고 싶은 작은 욕망이 꿈틀거린다고 할까. 개인적으로 현대문학의 세계문학단편선을 재밌고 읽었고 좋아하기에 언젠가 다른 출판사 <새>와 비교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물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초기작이라 섬세하지 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뭐지? 하는 느낌과 함께 강한 인상을 남기고, 어떤 작품에서는 가볍게 웃게 만든다. 형식도 장르도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편지>는 제목대로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욕망에 불타는 남자가 그 욕망을 채운 후 일어나는 일을 간결한 편지 등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형식도 심리적 표현도 멋지다. <주말>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행복한 연인이 난파되면서 마주하는 현실은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성격 차이>의 부부가 보여주는 심리 묘사에 대한 결혼 전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차갑고 냉혹한 현실을 극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표제작 <인형>은 섬뜩하다. 우연히 바닷가에서 발견한 수첩의 기록이란 설정으로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내용은 해설의 섹스돌과 관련 있다. 화자를 매혹시킨 그녀 리베카의 키스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기괴하다. 첫 발표작인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는 위선적인 신부 이야기다. 계급과 신분상승의 욕망을 뒤섞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결말과 신부의 심리 묘사가 인상적이다. 이것은 첫 작품 <동풍>에서도 그랬다. 거칠고 황당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 읽으면서 에스키모인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피카딜리>는 하층민 여성의 추락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기꾼 남자에게 빠진 그녀가 잘못된 선택과 그 후의 삶이 여운을 남긴다. 이 단편은 <메이지>의 일상과 이어진다. 자신의 현실과 동떨어진 결혼식을 응원하는 매춘부의 모습이 씁쓸하다. 욕망에 불탄 24살 신랑의 황당한 첫날밤 도전기가 황당하고 놀랍도록 웃음을 짓게 하는 <절망>은 마지막 문장에서 빵 터진다. <해피밸리>의 사랑스러운 연인들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오래가는 아픔은 없다>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스스로 속이고 왜곡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 탁월한 심리 묘사는 읽으면서 감탄하게 만든다.

 

<집고양이>는 한 남자를 둘러싼 두 여성의 긴장과 엇갈린 갈등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생각과 다른 두 어른의 반응은 은밀하거나 노골적이다. 은밀한 것은 남자의 유혹이고, 노골적인 것은 엄마의 감정이다. 마지막 작품인 <인생의 훼방꾼>은 지나온 자신의 삶을 들려주는 방식이다. 제목과 화자의 이미지가 겹치지 않는데 내가 잘못 읽은 것일까? 전체적으로 열세 편의 단편들은 놀라운 심리 묘사와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통찰력을 보여줬다는 사실에 놀란다. 다른 단편들에도 다시 한 번 더 관심이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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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 책과 독서, 인류의 끝없는 갈망과 독서 편력의 서사시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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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토 망구엘의 책을 몇 권 읽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가장 편안하게 읽었다. 이전 책보다 좀더 여유롭게 읽은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게 된 사연도, 그를 통해 배우게 된 내용도 이전까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정보를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자신의 경험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가장 중심에 놓여 읽는 것은 제목처럼 ‘독서의 역사’다. 구술과 기록에 대한 부분은 얼마 전 읽었던 테드 창의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다. 책과 독서에 대한 나의 지식을 다시 돌아보고,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뭐 많은 것을 그냥 놓치기도 했지만.

 

책이란 것이 지금의 형태로 나오게 된 과정도 나온다. 이 책이 나올 당시만 해도 지금 같은 전자책은 없었다. 시디롬에 담은 책이나 인터넷으로 텍스트를 읽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읽기 위해서는 쓰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 앞에는 문자가 있어야 한다. 가볍게 쐐기문자와 그림 등에 대해 말한다. 문자의 탄생으로 이야기를 넘기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쉬운 대목이다. 쓴다는 것은 그 대상이 있어야 한다. 파피루스, 양피지, 목판, 석판, 진흙 조각 등의 이야기는 새롭지 않지만 나의 지식에서 조금 더 들어갔다. 양피지가 파피루스보다 저렴했다니 예상외다.

 

이 책 이전에는 서양에서도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책 내용에 더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눈으로 읽다가 쉽게 그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입으로 혹은 속으로 문자들을 읽는다. 과거에 눈으로 읽는 행위가 특별했다는 것과 이런 독서 행위가 상대적으로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소리 내어 책을 읽던 시절이나 책 읽기가 힘든 사람에게 누군가가 대신 책을 읽어주는 것은 당연하다. 망구엘이 보르헤스에게 해준 책 읽어주기가 떠오른다. 과거 이런 시절의 책 형태는 현재와 많이 달랐다. 자료 그림 등을 보면 몇 명이 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금속활자가 만들어낸 출판 혁명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지만 필사자들의 아름다운 서체를 흉내 내려고 했다는 부분에서 서체를 다시 떠올린다.

 

독서가로서의 작가와 번역가가 이야기에서 나의 시선을 끄는 대목들이 나온다. 릴케의 번역 이야기는 번역이 왜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지 잘 보여준다. 직역과 의역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있지 않은가. 또 예전에 여성에게 글자를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과 독서가인 여성들이 쓴 글에 대한 부분은 최근으로 넘어오면 노예들에게 글자를 가르쳐주지 않은 역사와 이어진다. 성경을 통해 글자를 배우는 노예들의 노력과 열정은 나태해진 나를 질타하는 듯하다. 책 읽기 금지는 금서 이야기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 유명한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나치의 분서 외에도 많이 있어왔다.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19세기 말 미국에서 일어난 금서 이야기다. 예전에 금서에 대해 읽었던 부분이 살짝 생각난다.

 

이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겠지만 예전에는 책을 읽기 위해 책을 훔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 있었다. 읽고 돌려준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단순히 소유욕이나 판매를 위해 훔친다면 어떨까?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 도서관에서 고가의 책을 훔친 인물 이야기는 또 다른 변주가 가능하다. 미술관의 작품처럼 말이다. 책벌레 이미지는 언제부터인가 하나로 굳어져 왔다. 나 자신도 적지 않게 읽지만 책벌레 이미지는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이 이미지가 한 독서가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데 살짝 가슴 아프다. 왜 얼간이 이미지가 되었는지 그 연원을 찾아가는 것도 재밌을 갔기는 하다.

 

마지막 장에서 독서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수십 년 전에도 나왔다. 하지만 출판되는 책 숫자는 더 늘어났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읽는 다는 행위에서 문맹률을 다루지 않은 부분은 아쉽다. 문자를 안다는 것이 특권이었던 시절이 있었고, 근대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글자를 몰랐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독서 행위가 한정된 일이었다는 대목은 있다. 이 독서가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말하는 대목도. 읽지 못하기에 책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고, 그림으로 좀더 알기 쉽게 만들었던 역사도 있었다. 어쩌면 나의 이런 지적이 그의 풍부한 지식과 섬세하고 매혹적인 글에 대한 질투인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망구엘의 책들을 한 권씩 읽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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