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365일 1
블란카 리핀스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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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긴 남자의 반쪽 사진이 실린 표지가 참 인상적이다. 제목만 놓고 보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다. 2020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넷플릭스 영화 원작 소설이란 문구는 굉장히 인상적이다. 나 자신이 넷플릭스를 보지 않는다고 해도 이 플랫폼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다. 간단한 소개에 의하면 호텔에서 일하며 성공가도를 달리다 휴식이 필요해 시칠리아에 갔다가 마피아 가문의 젊은 보스 마시모에게 붙잡혀 365일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라고 한다. 약간 뻔한 듯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은 설정이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첫 등장한 마시모의 폭력적인 성 생활을 내세워 뭐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뛰어넘는 초대형 블록버스터 로맨스란 문구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 중 일부는 노골적인 묘사와 표현들로 나를 놀라게 했다. 한 인용에 따르면 “한마디로. 여성을 위한 책이다“라고 했는데 이 문장을 앞의 소설에서 들은 적이 있다. 실제 많은 여성들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사서 읽고 집 책장에 꽂아둔 것으로 알고 있다. 회사 여직원도 산 것을 봤다. 그런데 남자 직원이 이 영화를 보고 온 후 욕하는 것도 봤다. 전혀 야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영화도 소설도 읽지 않은 나에게 단편적인 정보 밖에 없어 각각 다른 성의 감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190센티미터의 큰 키에 잘 생긴 외모를 가졌고, 마피아 가문의 수장이다 보니 자신의 재산들이 시칠리아 곳곳에 놓여 있고, 원하는 것을 사는 데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마시모를 남자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화자이자 여주인공인 라우라는 바르샤바 호텔에서 일하다 거구의 남자 친구와 사귀지만 성 생활에 불만이 많아 자위로 그 열정을 삭혔다. 마시모는 죽을 뻔한 경험을 했는데 이때 한 여성에 대한 환상을 본다. 그 실체가 라우라다. 실물은 본 후 그녀를 납치한다. 365일 동안 자신과 머무르게 되면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만약 달아나면 그녀의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그녀의 남친이 다른 여자와 섹스하는 사진도 보여준다. 어쩔 수 없이 머물 수밖에 없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작은 밀땅과 자극적인 성 이야기와 지극히 럭셔리 물건에 대한 소비로 가득 채워져 있다. 아름다운 로맨스는 자극적인 섹스로 바뀌고, 서로 탐닉하는 일이 벌어진다. 욕망에 솔직하지만 현실을 완전히 부정할 정도는 아니다. 육체적 끌림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는데 한 편의 야설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흔한 신데렐라 이야기이지만 욕망을 적나라하게 다루고, 명품에 대한 적극적인 소비를 보여주면서 여성들의 대리만족을 시키는 듯하다. 특히 자위하는 장면과 성교 장면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역겨울 수 있는 상황이 나온다. 비현실적인 과정 때문이다. 한국 로맨스가 보여주는 빙빙 돌아가는 과정을 가감하게 삭제한 후 직진하는 방식을 취한다. 어쩌면 이런 장면들이 통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읽으면서 왜? 라는 물음을 여러 번 던졌다. 어떤 장면들이, 어떤 매력이 이 소설을 이렇게 뜨게 만들고 영화로 만들어져 큰 흥행에 성공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남자라서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여성들의 심리 속에 이런 환상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과 별개로 이야기는 간결하고 잘 읽힌다. 이것도 하나의 매력이다. 시리즈 다음 편이 올해 중에 나온다고 하는데 읽어야할지 잠시 고민해본다. 분명히 이번 로맨스는 내가 재밌게 읽었던 로맨스와는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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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로의 여행 열린책들 세계문학 270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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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도 되지 않아 에릭 앰블러의 소설이 또 나왔다. 반가운 일이다. 전작에 나온 인물이 이번에도 나오는데 그것은 이야기의 시작이 이스탄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인물은 하키 대령이다. 괜히 반갑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히치콕의 영화들이 스쳐 지나갔다. 스토리만 놓고 보면 간단한데 곳곳에서 긴장감을 불어넣어준다. 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이동하는 과정에 계속 사건이 생기는 구성인데 예상보다 훨씬 가독성이 좋다.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의 주인공이 소설가였다면 이번에는 무기 제조회사의 기술자다. 터키 전함에 영국제 대포를 설치하기 위해 터키에 출장 왔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가 이스탄불을 떠나기 전날 밤에 시작한다.


르 조케 카바레에서 에이전트 코페이킨과 함께 여흥을 즐긴다. 매력적인 무용수들이 나오고, 그를 유혹한다. 다음 날 11시 기차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는 특별히 바람을 필 마음이 없다. 작은 즐거움을 누린 후 호텔 방으로 들어가는데 세 발의 총성이 울린다. 그 중 한 발이 그의 손등을 스쳐 지나갔다. 그도 놀랐고, 호텔 측도 놀랐다. 누가 그를 죽이려고 했을까? 단순한 강도일까? 호텔 측은 경찰에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레이엄도 경찰에 알려 출발이 지연되길 바라지 않는다. 코페이킨에게 연락한다. 그가 와서 그를 정보국 하키 대령에게 데리고 간다, 용의자 사진을 보여주는데 그 중 한 명이 카바레에서 한 여자가 그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고 말한 인물이다. 하키 대령은 기차 대신 배를 타라고 말한다. 그의 안전을 생각한 생각해서 추천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노선을 변경하면 적이 그를 놓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이런 소설에서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야기가 끝났을 테니까. 화물선의 작은 선실에 머물면서 많지 않은 승객들과 어울린다. 그 중 한 명이 카바레에서 만난 적이 있는 매력적인 무용수 조제트다. 남편 호세와 함께 파리로 가는 중이다. 이 여자가 계속해서 그를 유혹한다. 그녀의 매력은 공포에 질린 그레이엄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빠질 정도는 아니다. 그의 도덕심과 일탈에 대한 욕구가 교차하는 와중에 다른 승객들과 함께 어울린다. 얇은 벽 너머의 옆방 부부는 늘 티격태격하고, 터키인 담배 무역상은 조금씩 그와 친해진다. 모두가 꺼리는 독일 고고학자와도 그레이엄은 거리를 두지 않는다. 평범한 여행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상한 인물들이 한 명씩 눈에 들어온다.


평범한 여행처럼 보였던 것이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다. 그것은 한 기착점에서 한 인물이 배에 타면서부터다. 가장 유력한 암살자였던 인물이다. 강력한 싸구려 장미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데 그레이엄은 공포 속으로 빠진다. 코페이킨이 이스탄불을 떠나기 전에 준 총을 찾아내 잠시 마음의 안정을 찾지만 어느 순간 그 총이 사라진다. 방에서는 장미 향수 냄새가 난다. 조제트와의 작은 밀땅도 이젠 중요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배후인물로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배에서 그를 죽이면 될 텐데 그들은 자신의 안전도 도모해야 한다. 그리고 달콤한 속임수 말을 내뱉는다. 눈에 보이는 거짓말이지만 완전히 거부할 수 없다. 이때 또 다른 인물이 그의 도우미로 나타난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마무리 지을 지 궁금해진다.


화려한 액션도, 치밀한 구성도, 엄청난 반전도 펼쳐지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이야기 구조 속에 몇몇 예상 외 상황을 만들고, 등장인물들을 의심하게 만들면서 계속 빠져들게 한다. 아직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이라 이스탄불, 제노바, 파리 등으로 이어지는 일정은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무자비하게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경찰을 귀찮아 하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 않다면 배에서 그를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있다. 그레이엄이 특별한 기술자가 아닌데 왜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부분이다. 하키 대령의 설명만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없다. 만약 그가 터키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면 이해가 더 쉬울 텐데 말이다. 몇 주의 시간이 중요한 차이를 만들 정도일까? 이런 의문과 별개로 그레이엄이 느끼는 공포와 반격은 재미 있다. 그가 느끼는 심리적 공포와 조제트와의 아슬아슬한 로맨스는 아주 멋지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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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리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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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기존의 뱀파이어 소설과 궤를 달리한다. 나에게 뱀파이어 소설하면 앤 라이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물론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예외다.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에 한때 빠져서 정신없이 읽은 적이 있다. 장황하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주는 재미는 대단했다. 그런데 옥타비아 버틀러의 흡혈귀는 기존의 뱀파이어와 종이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스스로 ‘이나’라고 부르고, 인간들과 함께 산다. 그들에게 물린다고 해서 뱀파이어로 변신하지 않는다. 다만 이나에게 물리면 강한 쾌락을 느끼고, 그들의 힘에 조정되는 문제가 있다. 작가는 이나와 인간들의 관계를 공생이라고 표현한다. 이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공생인이라 부르고, 상대방이 죽을 때 큰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이나와 공생인들은 무리를 이루고 산다.


쇼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허기를 느낀다. 무엇인가가 나타나자 잡아먹는다.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피와 고기를 먹고 재생한다. 해를 보면 피부가 상한다. 밤에 동굴에서 나와 먹을 것을 사냥한다. 자신이 누군지, 불탄 집의 정체도 모른다. 그러다 도로를 걷다가 한 남자에게 발견되어 그의 차를 탄다. 그의 피를 마신다. 죽을 정도는 아니다. 그는 쇼리의 첫 번째 공생인이 되는 라이트다. 쇼리의 피부는 검고, 키는 150센티미터 정도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그녀는 라이트의 집으로 간다. 기억을 상실한 쇼리가 다시 세상을 만난다. 아직 자신이 정체와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피에 대한 갈증은 주변 사람들을 몰래 찾아가 마시면서 해결한다.


자신이 발견된 곳에서 기억을 더듬어 불탄 집을 찾아낸다. 그곳에서 다양한 냄새를 맡는다. 그녀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안다. 나중에 그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다. 아버지와의 만남은 짧게 이루어진다. 과거의 기억을 잃은 그녀에게 이나의 문화나 능력 등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몇 가지 간단한 정보를 얻지만 충분하지 않다. 다만 이나에게는 공생인들이 필요하다는 사실만 안다. 단 한 명의 공생인으로는 그들의 허기를 채울 수 없다. 성별에 상관없이 다수의 공생인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야기 진행되다 보면 이 공생인들이 결혼하는 경우도 나온다. 재밌는 설정은 이나들이 영생을 살지 못하고, 기본의 흡혈귀처럼 햇볕에 약하다는 것이다. 낮에는 우리가 밤에 졸리는 것처럼 그들도 잠에 든다. 이것이 그들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에게 좋은 먹이감이 된다.


쇼리가 다시 아버지의 집에 갔을 때 집은 불타고 아버지와 형제들은 죽었다. 아버지와 형제의 공생인이 각각 한 명씩 살아 남았다. 그들이 살아남은 것은 그 당시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다른 이나에게 중독된 이들이 다른 이나와 공생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쇼리의 독은 강력해 이들이 쇼리의 공생인이 된다. 쉰세 살의 뱀파이어이지만 과거의 기억이 없다 보니 모든 것이 낯설다. 그녀는 공생인의 도움을 받아 다른 이나를 찾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나들이 잠들어 있는 낮 시간에 낯선 무리들의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쇼리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고, 햇볕에도 어느 정도 저항이 가능하다. 인간과 이나의 경합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녀의 아버지가 이미 알려주었다.


작가는 화려한 액션이나 무시무시한 장면을 연출하기 보다 이나와 인간의 유전적 결합을 통해 태어난 쇼리의 존재를 두고. 인종 차별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많은 이나들이 생각하기에 쇼리의 햇볕 저항력은 큰 축복이 분명하지만 아닌 이나들도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이런 사실들이 눈에 들어오고, 이것을 두로 벌어지는 논쟁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떤 대목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나들은 성인이 되면 동성끼리 살아야 한다. 이성의 존재는 너무 강력한 유혹이라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여러 명이 함께 살아야 하는 문제도 있다. 이 소설에서 첫 공생인 라이트가 남성 공생인이 또 생기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문화의 문제라는 사실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작가의 작품 중에서 흔치 않은 독립 작품이다. 미국의 유명세에 비해 한국에 번역된 작품의 수가 너무 적다. 운 좋게도 이 작품까지 출간된 모든 작품을 읽었다. 어떤 작품들은 나의 이해를 넘어섰지만 가독성은 변함없이 좋고,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늘 매혹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와일드 시드>를 포함하고 있는 패터니스트 시리즈가 계속 나왔으면 하는데 과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만약 작가가 이른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이번 작품도 시리즈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나라는 뱀파이어 종족이 너무나도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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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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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동안 오토 질버만의 심리 변화와 행동에 답답함을 느꼈다. 이 답답함은 그 시대의 진행 과정을 알고 있기에 더 심한 부분이 있다. 물론 이런 생각들은 결과론에서 본 시각이다. 나치의 위세가 강해지고, 그 지지자들이 언젠가 폭주할 것이란 낌새를 알았다고 해서 자신들이 독일인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이 자신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조국을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자신의 자산을 헐값이라도 넘겨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지만 그 위험이 코앞에 와서야 깨닫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이다. 약삭빠른 일부는 위기의 유대인을 위협해 그 자산을 아주 헐값에 사들인다. 이 소설에서 핀들러가 대표적이다. 재미있는 점은 나치 추종자가 질버만의 집에 찾아와서 그를 유대인으로 오인하고 폭행하는 것이다.


오토 질버만의 외모는 아리아인을 닮았다. 이름은 유대인이라고 한다. 사실 한국에 살고 있는 내가 이름만 가지고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다른 모양이다. 질버만은 자신의 이름을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그의 외모만 보고 아리아인이라고 착각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이 추악하고 참혹한 인종차별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핀들러와의 대화에서 외모와 종족 가지고 나눈 대화는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질버만이 기차에서 만난 유대인은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 외모를 가져 위협을 받지 않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질버만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이런 모습들도 답답함을 가중시킨다.


1938년 11월 9일 밤 나치와 그 추종자들은 유대인 상점 등을 파괴하고 약탈한다. 유대인들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고 있는 시기다. 아직 아우슈비츠의 그 참혹한 상황이 나타나지 않았고,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곳곳에서는 이미 유대인에 대한 격리와 폭행이 저질러지고 있었다. 질버만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냉대를 받는다.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여권에는 유대인을 의미하는 J가 찍혀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답답함을 느낀 것 중 하나는 왜 그가 여권을 위조해서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가 가진 거액을 생각하면 가장 쉬운 방법일 텐데 말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장르 소설에 너무 익숙해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한 여성이 말한 것을 보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아내는 아리아인이고, 처남은 나치 당원이다. 만약 남편과 매제가 유대인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이들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나중에 질버만이 떠돌이 여행에 지쳐 처남을 찾아가 전화했을 때 받은 반응은 아는 유대인 함부르거를 만났을 때 그대로 재현된다. 언제나 자신만을 생각한다고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는다. 사실 유대인들이 함께 다니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지만 유대인 외모를 가진 함부르거 입장에서는 아리아인의 외모를 가진 질버만이 보호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인간의 존엄이나 가치가 얼마나 무력한지 보여준다. 이것은 앞부분에 그의 전우이자 친구였던 베커가 회사 지분이라고 하면서 거액의 현금을 전달한 것을 생각하면 누가 더 착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베커가 도박에 중독되었고, 당원이고, 이 위기 상황을 어느 정도 이용하지만 양심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에 머물 수도, 호텔이나 숙소에서 살 수도 없는 질버만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떠돈다. 이 여행은 즐거움이 아니라 공포로 인한 도피다. 거액의 현금을 계속 들고 다니는데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 나중에 이 돈은 사라진다. 벨기에로 밀입국하려고 시도하다 이 돈 가방 때문에 귀환 조치된다. 돈으로 경찰을 매수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의 절망은 더 깊어진다. 나치의 광기가 독일을 뒤덮을 때도 아직 선한 사람들은 남아 있었다. 그를 벨기에로 넘겨준 남자도, 기차에서 만나 독일 여성도, 그가 광기에 휩싸여 경찰서의 경감도 그런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는 무일푼이 되었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유대인 목수와 달리 자신의 자산에 집착하고 낡은 도덕관과 공포에 휩싸여 자멸한다. 답답함 속에 긴 여운을 느끼고, 그 시절의 분위기를 잘 느끼게 한다. 제목에서 느끼는 낭만이 완전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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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의 천재들 - 전 세계 1억 명의 마니아를 탄생시킨 스튜디오 지브리의 성공 비결
스즈키 도시오 지음, 이선희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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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지브리. 늘 가슴 떨리는 이름이다. 이제는 영화를 잘 보지 않지만 한때는 지브리란 이름만으로 선택에 주저함이 없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란 이름은 나의 어린 시절 최고 작품들과 함께 하고 있다. 얼마 전 우연히 케이블에서 방영하는 <이웃집 토토로>를 아이와 함께 보는데 왠지 모를 울컥함을 느꼈다. 생각보다 아이가 집중해서 보길래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기억을 좀 더 과거로 돌리면 일본 문화가 불법이었던 시절로 올라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상영되었지만 자막이 없던 그 시절까지. 불법으로 복사한 비디오 테이프를 보던 그 시절로, 그보다 조금 더 올라가 <미래소년 코난>으로. 이 책은 그 시절부터 스튜디오 지브리의 설립과 그 이후 만든 영화에 대한 프로듀스의 기억 등을 담고 있다. 지브리 작품을 통해 본 지브리의 철학과 역사다.


지브리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원령공주>로 번역된 <모노노케 히메>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들은 극장에 늘 걸렸고, 토토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미래 소년 코난>이나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떠오르는 것처럼 누군가는 미야자키 하야오나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을 한 편 정도는 봤을 것이다. 너무 오만한 주장일까! 물론 <미래소년 코난>이나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만든 작품들이 아니다. 그리고 지브리의 영어 철자(gibli)를 발음하면 기블리가 된다는 것은 재밌는 작은 에피소드 중 하나다.


이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거장이 되었지만 처음 그들이 극장용 영화를 만들 때는 자금 조달과 배급 등이 쉽지 않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들기 위해 도박으로 돈을 잃어주었다거나 원작이 되는 만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다. <천공의 성 라퓨타>를 만들면서 스튜디오 지브리가 발족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가끔 유명한 영화 때문에 그 작품이나 회사 등을 알게 될 때 이런 사실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연보를 외우지 않는 한 이런 실수는 자주 일어날 것 같다. 그리고 지브리를 대표하는 캐릭터인 토토로의 탄생 비화는 어딘가에서 얼핏 본 듯하지만 재밌다. 두 편 동시 상영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지만 말이다.


내 기억 속 지브리 최고의 영화들은 아마도 <귀를 기울이면>까지다. 불법으로 수입한 영상을 비디오 테이프로 보면서 좋아했던 그 시절의 추억 때문이다. <붉은 돼지>는 무자막으로 봤는데 솔직히 몇 개의 장면을 제외하면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뭐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나의 취향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모노노케 히메>부터인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마지막 작품이다. <게드전기> 제작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몇 가지 이야기들은 지금도 생각나는데 그때 나왔던 이야기의 반론이 여기에 잘 나온다. 물론 <게드전기>가 르 귄의 <어시스 연대기>를 원작으로 했다는 사실은 지금 제대로 인식했다. 이 작품의 제작 이야기를 읽다보면 빨리 르 귄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데 하는 조급증이 생긴다.


지브리의 만화 제작에 대한 재밌는 뒷이야기로 이 책을 읽었는데 서점의 분류는 경제경영 쪽이다. 실제 이 제작 과정을 읽다 보면 두 천재 감독과 함께 영화를 만들고, 홍보를 하고, 스튜디오 지브리를 이끌고 나간 사람이 저자임을 알게 된다. 훌륭하고 좋은 프로듀스가 좋은 작품을 탄생시킬 가능성이 높다. 지브리의 작업방식대로 영화를 만들면 한 달에 5분 정도의 영화를 만든다는 이야기는 장편 하나 만드는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계산할 수 있다. <추억의 마니> 같은 작품이 120억엔이 넘는 매출을 일으켰지만 손익을 맞추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지브리의 영화가 얼마나 많은 제작비를 사용하는지 알려준다. 저자가 이 스튜디오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영화를 흥행시키기 위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감안해야 하는 부분이다.


지브리를 거쳐간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우뚝 솟은 인물들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다. 이 두 천재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만들고, 키워온 것은 저자인 스즈키 도시오다. 그가 미야라고 부르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만들었던 영화들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 이외에 그 유명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힘을 보탠 애니메이터들이 나온다. 읽다 보면 추억이 방울방울 솟아나고, 그들의 열정과 노력에 박수를 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스즈키의 뛰어난 감각도 넣어야 한다. 지브리의 영화를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이 책은 아주 멋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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