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지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로맨스 소설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띠지를 본 다음에야 오래 전 재밌게 읽었던 작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때도 김혜나가 로맨스 소설을 썼나? 하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정유정의 추천과 이전에 읽었던 기억들이 책으로 손을 내밀게 했다. 그리고 더 성숙해진 작가의 이야기를 만났다. 처음에는 약간의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밀도 있는 문장과 낯선 이국의 삶 속에서 발견한 일상이 눈에 들어오면서 빠져들었다. 요가 수련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작가도 요가를 수련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작가의 말에서 요가와 글쓰기에 대한 이약기를 들을 수 있었다.


차문디 언덕. 인도 마이소르에 있는 곳이다. 한참 여행 서적을 읽고, 여행 팟캐스터를 들었을 때 스치듯 이 이름을 들었을지 모르지만 낯선 지명이다. 다른 소설인가에서 요가 수련을 위해 인도 어딘가로 와서 생활하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이 도시에 오는 이유도 대부분이 요가를 수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요가를 하지 않는 나에게 용어나 자세 등은 너무 낯설다. 방송이나 인터넷 짤로 돌아다니는 요가 자세 외에는 아는 것이 없으니 당연하다. 경치로 유명한 차문디 언덕이라고 하지만 좋은 풍경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인도는 여자 혼자 다니기 쉽지 않은 곳이다. 소설 곳곳에 두려움과 성추행에 대해 나온다. 그때 느낀 감정들은 억울하고 분하고 격렬하다.


이야기는 두 개로 진행된다. 하나는 메이의 마이소르 일상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과거사다. 폰트와 굵기를 달리 해서 구분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는 충격이다. 세상에 그런 아버지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를 돌아봤다. 가난한 일상, 아버지의 사랑이 없는 유년기 등은 그녀 삶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고모에 대한 기억은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모의 자살, 그 후 고모부와 두 딸이 행복한 표정으로 함께 찍은 사진 등이 자신의 가족과 이어지면서 큰 충격을 준다.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 사랑의 결핍은 폭식으로 이어진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는 육체에 큰 상처를 남긴 채 숨었다. 그러다 다시 그 허기가 깨어나 그녀의 삶을 뒤흔든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요한은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하다. 약해도 너무 약하다.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상당히 부유했던 집안이 요한의 수술과 병원비로 상당히 사라졌다고 한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신자이고, 그곳에서 둘은 만났다. 얼마나 허약한 체력인가 하면 혼자 욕실에서 샤워할 때 수증기가 가득 차면 헉헉거린다. 그래도 사랑은 나눌 힘은 있는 모양이다. 둘이 처음 영화관에 갔을 때 계단에서 주저하는 그를 엎고 올라가는 장면은 너무나도 인상적이다. 처음 밖에서 만날 때 그가 내뱉은 평범한 말 ‘거기 있어요. 내가 갈게요.’ 란 말이 왜 그녀에게 그렇게 강한 울림을 주었는지는 어릴 때 마을버스 사연을 읽고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요한과 헤어진 후 마이소르에 요가 수련을 하러 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도피다. 그녀가 자신의 과거사를 내뱉는 대상은 처음 도착한 호텔의 숙박을 도와준 케이다. 읽다 보면 케이와 진한 사랑을 나눈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만난 시간은 15일 정도다. 육체적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다. 단지 필요한 순간 그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삶을 뒤흔들었다. 유부남에, 1년의 반을 여행으로 보내는 그다. 사랑의 밀어를 나눌 정도도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한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 나가지 못하는 요가의 진도 등이 밖으로 드러난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안타까움과 아픔을 느낀다.


삶에서 깨달음은 잠깐 왔다 간다. 그 깨달음을 붙잡고, 파고들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힘들다. 마지막에 메이가 차문디 언덕을 걷고 기어서 올라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믿지 못했고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이다. 자신의 곁에서 울고 있는 신이다. 고모의 자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도 얻는다. 그 결과 중 일부가 그녀의 과거사다. 자신의 삶을 순서에 상관없이 적고 적는다. 이것으로 그녀의 허기와 폭식과 아픔이 해소되었을까? 모른다. 어쩌면 일부는 해소되었을 것이다. 삶은 그 순간을 넘어가면 또 다른 언덕이 나타나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 사족처럼 하나 덧붙이자면 케이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한 여행작가가 떠올랐는데 작가의 말에 그 이름이 나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퍼펙트 와이프
JP 덜레이니 지음, 강경이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8월
평점 :
절판


JP 딜레이니의 소설은 처음 읽는다. 먼저 출간된 다른 책들의 표지를 보면 상당히 낯익다. 이 소설에 끌린 이유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모티브로 사랑하는 아내를 기계 몸으로 되살린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이었다. SF 장르에서 가끔 본 설정이다. 인공지능과 딥러닝을 이용해 아내를 되살린다는 설정은 아주 현대적이다. 미래적으로 푼다면 공각기동대의 ‘전뇌’ 같은 방식이 되겠지만 이 소설은 그런 장르 소설이 아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SF소설이 아니라 심리 스릴러라고 분명히 말한다. 실제 소설을 읽으면 기술적인 문제나 SF적 요소가 의도적으로 많이 생략되어 있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사라진 애비게일을 둘러싼 미스터리다.


팀. 애비의 남편이다. 실리콘밸리의 대단한 기술자이자 사업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대목은 애비가 깨어난 순간부터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현재가 아닌 과거 이야기를 풀어낸 부분이다. 소설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이야기가 진행된다. 애비를 당신으로 부르면서 로봇의 몸으로 깨어난 그녀를 따라가는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팀과 애비가 만난 후 그들을 옆에서 본 사람들의 시선이다. 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은 로봇인 애비의 시점이지만 팀에 대해 가장 잘 알려주는 부분은 팀 회사 내부 사람들의 시선이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개발자인지, 얼마나 엄청난 폭군인지, 그가 휘두른 권력이 어떤 식으로 문제를 일으키는지 말이다. 그리고 팀이 얼마나 애비에게 빠졌는지도 알려준다.


로봇의 몸으로 깨어난 애비가 마주한 몇 가지 사실들은 놀랍다. 가장 큰 것은 애비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남편 팀의 살인으로 간주하고 재판을 진행했지만 패소한다. 이 정보를 우연히 알게 되는데 그 과정이 우습다. 애비의 외모를 가지고 밖으로 나간 그녀를 보고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로봇이란 것을 증명한 후 풀려나지만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 애비의 기억 등을 이용해 애비를 닮은 로봇을 만든 것이 법적 문제가 된다. 다른 하나는 그녀가 실종된 해변가 저택에서 남편과 자폐 아들의 교사가 섹스를 나누는 장면을 보는 것이다. 남편의 의도가 담겨 있는데 그의 설명과 대응 방식이 너무 당당하고 당연한 듯하다. 아내를 너무나도 그리워해서 로봇으로 되살렸다는 것과 너무 다른 행동이다.


이 소설에서 인공지능과 바둑기사 이세돌의 대결을 몇 번 말한다. 로봇 애비의 딥러닝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다. 작가는 이 애비 봇에게 감정도 부여하는데 이것은 현재 과학으로 구현하기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다. 이런 기술적인 부분은 넘어가도 큰 문제가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작가는 이 기술들을 하나의 도구와 설정으로 이용하고 있지 과학적 사실에 중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지만 애비 봇이 안고 있는 수많은 가능성과 법적 문제들까지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다. 애비 봇이 태어나 애비의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고, 인터뷰하는 것을 본 애비의 부모와 형제들은 데이터 삭제를 요청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애비의 실종을 둘러싼 미스터리에 더 집중한다.


애비 봇이 집안을 뒤지면서 발견한 아이패드와 이전 핸드폰은 이 실종에 대한 단서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정체가 외부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인간과 닮은 모습이기에 작은 위장만 해도 사람들은 그녀가 로봇이란 사실을 모른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느끼는 감정과 기억들이 딥러닝을 통해 자발적인 판단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통찰력을 가진 애비 봇에게 팀이 털어놓는 사실 하나는 애비의 실종에 또 다른 단서가 된다. 사람의 기억을 가진 로봇이 과연 그 사람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은 많은 SF 장르에서 다루었다. 작가는 이 부분은 직접 다루지 않지만 마지막에 살짝 하나 풀어놓는다. 두 시점이 하나로 모이는 그 순간에.


실리콘밸리에 대한 환상을 상당히 많이 깨트린다. 폭압적인 오너의 행위, 성차별, 비인간적 폭언 등이 난무한다. 이것을 덮는 비밀유지 합의는 미국 소설 등에서 자주 본 장면이다. 물론 모든 기업들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 상황을 극단적으로 이용해 상황을 악화시킨다. 여기에 자폐가 있는 아들 대니를 등장시켜 다른 문제를 만든다. 이 부분은 실제 작가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어떤 학교의 모습은 아주 잔혹하다. 애비 봇이 단서를 하나씩 얻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문자를 보내면서 머릿속에 새로운 의심의 씨앗이 자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맞이한다. 피그말리온 이야기의 현대판 후일담은 서늘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데바 - 삶 죽음 그리고 꿈에 관한 열 가지 기담
이스안 지음 / 토이필북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낯선 작가다. 이 작가의 다른 단편집 <기요틴>의 표지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살짝 궁금했는데 그냥 넘어갔다. 이후 잊고 있었는데 ‘삶과 죽음 그리고 꿈에 관한 열 가지 기담’이란 부제가 눈에 들어왔다. 선택했다. 기담의 경우 즐겨 읽는 장르는 아니지만 상당히 꾸준히 읽는 장르다. 그리고 이 단편집은 기담을 넘어 공포를 강하게 품어내는 단편도 있다. 전체적으로 가독성이 상당히 좋다. 술술 넘어간다. 하지만 완성도란 측면에서 보면 조금 부족하다. 작가가 의도한 바대로 흘러간 것도 있지만 읽다 보면 반전이 눈에 쉽게 들어온다. 형식적으로 다양한 실험을 담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버릇>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실제 경험을 담고 있다고 한다. 작가의 의도대로 소설을 읽었는데 그렇게 강렬한 인상은 받지 못했다. 화자가 먹기 싫은 우유를 책상 속에 숨기는 버릇을 보면서 나의 버릇을 생각해봤다. <죄악>은 매정하게 이별을 고한 남친이 느끼는 죄책감과 공포를 점진적으로 잘 표현한다. 뻔한 상황이나 장면도 눈에 자주 들어오지만 그가 느낀 죄책감 묘사가 눈길을 끈다. 비겁한 변명과 정면에서 마주보고 그 상대를 대우하지 않은 그는 반작용을 제대로 받는다. 역시 뻔한 결말이지만 그의 심리 묘사가 재밌다.


<악몽 그리고 악몽>은 정신과 의사가 내 준 약을 먹고 매일 악몽을 꾸는 남자 이야기다. 그가 꾸는 수많은 악몽이 그렇게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잠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그 원인에 대해서 알려주는데 진짜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상상력이 만들어낸 멋진 설정이다. <고향>은 잔잔하고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이게 왜 기담이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마지막 장면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잊고 있던 과거가 현실을 만나 펼치는 서늘함이 생각보다 많다. 잠시 어린 시절을 뛰어놀던 그곳이 떠오른다.


표제작 <카데바>는 읽기 전까지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몰랐다. 해부용 시체를 뜻하는 의학 용어인데 시체에 매혹된 남성의 광기가 강하게 머릿속에 파고든다. 서늘한 감정보다 엽기적인 감정이 먼저 다가온다. <별장괴담회>의 마지막 문장과 사진은 소설보다 가공된 에세이 느낌이 더 강하다. 사실의 변형이 작가의 상상력과 만나 한 편의 단편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가의 오싹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화라고 하는데 이 표현을 순진하게 그대로 믿기엔 나의 의심이 너무 많다.


<포식>은 트라우마가 빚어낸 상황이 강렬하다. 현실에 대한 반발이 생각의 흐름을 왜곡한다. 고양이가 가지고 있다는 아홉 개의 목숨과 잔혹한 사실이 머릿속에서 참혹한 이미지를 만든다. 역시 예정된 결말고 이어지는데 알고 있다고 그 서늘함이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네 명의 여자가 살고 있다>는 지독한 삶의 반복과 재생을 네 명의 여자 사연으로 담담하게 풀어낸다. 공포보다 이 불행한 그들의 과거가 어딘가에서 본 듯한 이야기와 엮인다. 그들의 고백을 하나씩 풀어낸 마지막 장면은 가슴 아프다. 그들이 그들의 삶에서 반복을 끊어낸 방식은 정말 최악의 방법이다.


<연애상담>은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과 신문기사를 이용해 구성한 단편이다. 한 여성의 연애 사연을 올리면서 마지막에 한 방 크게 펀치를 휘두른다. 보통 단편에서 사용하는 마무리에서 한 발 더 내딛는다. <유서. m4a>는 자살한 딸이 남긴 mp3 파일을 듣는 엄마의 감정을 비현실과 엮어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만든다. 홀로 남은 엄마가 느낀 깊은 절망과 슬픔이 가슴에 와 닿는다. 왠지 <네 명의 여자가 살고 있다>와 다른 평행 우주 속 한 장면인 것 같다. 전체적으로 뛰어난 가독성을 보여주지만 낯익은 이야기들이 많다. 아쉬움과 다른 작품에 대한 기대를 동시에 가지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것도 없다 - 카르멘 라포렛 탄생 100주년 기념판
카르멘 라포렛 지음, 김수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6년에 나온 <나다>의 개정판이다. 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판으로 새롭게 나왔는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추천 글과 함께 역자의 작품해설이 덧붙여져 있다. 이 책을 처음 선택할 때 바르가스 요사의 추천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인적으로 아는 작가의 추천에 상당히 약하다. 장르문학으로 넘어가면 너무 넘쳐 문제지만 그래도 이런 추천글을 보면 눈길이 간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 이후의 삶을 그려내었다고 해서 더 관심이 갔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유명한 고전들도 있지 않은가. 내전 당시 모습을 보여준 작품들에 비해 그 이후 삶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에 살고 있기에 한국전쟁 이후 삶을 다룬 소설에 익숙하기에 그들의 삶도 그렇게 낯설지는 않지만.


읽으면서 몇몇 대목에서는 6.25 이후 서울 풍경을 다룬 소설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낯선 나라의 도시라면 그 이미지를 그대로 대입할 수 없다.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는 비슷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전후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은 거리의 풍경과 그곳에 머물며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드레아의 시선이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일까? 대학생이란 신분 때문일까? 그녀가 외할머니 집에서 겪게 되는 일들이 그렇게까지 최악으로, 힘든 삶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살 곳이 있고, 어떻게든 음식을 조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횡간을 읽는데 무딘 탓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의 여자가 늦은 밤 외할머니집에 온다. 기차의 연착으로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그녀의 도착을 반겨주는 사람은 할머니가 유일하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외삼촌들이 있지만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바로셀로나에 온 이유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서다. 어쩌면 작은 로망이 있었는지도. 숙소가 해결된다는 것은 생활비의 엄청난 절약이다. 하지만 그녀가 살게 된 그 집은 혼란과 가정 폭력과 광기로 가득하다. 안드레아는 그 대상이 아닌 관찰자로 그 집에 머물면서 그 장면들을 하나씩 보고, 각자의 비밀들을 하나씩 알게 된다. 이 소설의 재미 중 하나는 이런 비밀들이 엮이고 꼬인 관계 속에서 드러날 때다.


처음 도착한 그녀를 가장 억압한 인물을 이모다. 그녀의 연금을 대신 수령하고, 끊임없이 잔소리한다. 그러다 내전 당시 있었던 이야기 하나가 그녀의 과거와 엮이면서 슬며시 비밀을 드러낸다. 슬픈 사랑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는 돈을 모아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애잔하다. 이모가 집을 떠나면서 그 방을 차지 했지만 그녀의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연금을 탄 후 억눌렸던 욕망이 튀어나온다. 무절제한 소비로 이어진다. 돈은 금방 떨어지고 배를 곪는다. 그녀가 이런 생활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대학 동창 에나에게 있다. 그녀의 집에서 받은 대접에 대한 대가로 에나의 엄마에게 장미를 선물하기 때문이다. 허세 중 하나는 이모처럼 한 달에 한 번 집 근처 구걸자에게 돈을 주는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알 수 없고 폭력적인 것은 집안에서 일어난다. 후안 삼촌과 외숙모, 로만 삼촌 사이에 일어나는 폭력과 욕설과 미묘한 감정들이 뒤섞여 나타난다. 어떻게 외숙모가 후안 삼촌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알려주는데 이 과정 속에는 또 하나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이 드러났을 때 이 기묘한 관계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낯선 장면 하나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그것은 후안 삼촌이 외숙모에게 가하는 가정 폭력이다. 아니 이 폭력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후안 삼촌이 자신의 폭력을 후회하고 미안해하는 것을 외숙모가 받아들이면서 그 행위를 반복하게 되는 상황이다. 이런 폭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많이 보지 않았던가.


로만 삼촌은 뛰어난 연주자다. 그의 음악에 매혹되는 장면이 몇 번이나 나온다. 하지만 그 실력을 그는 갈고 닦지 않는다. 그의 음악과 매력에 매혹된 여자들이 있지만 그는 정착하지 못한다. 뒤늦게 감정을 내뱉고 감정을 폭발시킨다. 이렇게 두 형제가 자라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엄마가 그런 행위를 어릴 때부터 용인한 것도 있다. 마지막에 다른 이모들이 와서 한 이야기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 전에 고백한 것도 있다. 관찰자로 그들의 삶을 엿보았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란 감정을 키우려고 했던 그 순간 마주한 현실은 거대한 아픔이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과거 이야기가 하나 흘러나온다.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이야기다. 이것도 로만 삼촌과 관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치하난의 우물
장용민 지음 / 재담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맨스와 스릴러가 어우러진 소설이라고 해서 혹시 로맨스에 더 중심을 둔 소설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다. 이 걱정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특유의 빠른 전개와 개성 강한 캐릭터에 빠지면서 잊었다. <귀신나방>이나 <궁극의 아이>가 음모론에 기대 황당한 듯한 상상력을 극대화했다면 이번 작품은 하나의 전설을 기반으로 짧지만 강렬한 며칠을 풀어놓았다. 읽는 내내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영화로 만들면 누가 이 역할을 하면 좋을까 상상했다. 작가가 영화감독을 꿈꾸고,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그의 소설이 얼마나 영화적 상상력을 구현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는지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읽은 소설들은 모두 영상으로 옮긴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은 10년만에 한국에 온 태경이 누리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면서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누리는 낙원동을 돌면서 빈 병을 모아 고물상에 넘기는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스무 살 노숙자다. 미혼모였던 어머니에게 버려진 것을 한 할머니가 거두어 키웠다. 할머니마저도 5년 전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누리는 밝게 웃으며 리어카를 끌고 빈 병을 모은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무서울 수도 있다. 그의 미성숙을 속이는 고물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노인을 도와주면서 부치하난의 우물이란 전설을 듣는다. 할머니가 바란 것이 반쪽을 찾아 행복하게 사는 것인데 이 전설이 그의 가슴에 와 닿았다.


태경은 불행한 삶을 살았다. 양아버지가 겁탈하고, 엄마는 그 사실을 묵인했다. 지옥을 탈출하기 위해 양아버지 눈을 찔러 달아나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또 다른 지옥이 그녀를 창녀로 만들었다. 이런 그녀에게 하나의 희망이 있다. 지상낙원처럼 보이는 남태평양 휴양지에 가는 것이다. 창녀를 그만 두고 달아나 하는 일이 소매치기다. 자신의 미모와 날랜 손놀림으로 그 희망을 부풀리지만 종로 등을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동네에 발이 묶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이전 포주에게 잡힌다. 그녀가 다시 끌려간 곳은 마약 거래를 축하하는 자리다. 그곳에서 여신의 눈물이란 45캐럿 다이아몬드를 본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다이아몬드를 훔친 후부터다.


부치하난의 우물이란 전설은 사막과 물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간결하게 이 사랑 전설을 풀어놓는다. 사막 어디에서나 물을 찾아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부족과 사람의 인육을 먹고 사람의 뼈로 갑옷과 무기를 만드는 부족이 나와 더 전설처럼 들리게 한다. 이 전설은 비극이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누리는 자신이 부치하난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날린 종이비행기에 실린 목걸이를 한 태경을 올라라고 생각한다. 다섯 살 지능을 가진 누리는 이성보다 감정에 기댄 말을 더 잘 한다.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드러난다. “사랑은 심장을 주는 거야.”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화로 만들면 좋을 소설이다. 속도감, 캐릭터, 전설, 진한 사랑 등이 모두 담겨 있다. 하지만 장용민 특유의 과장된 감정이나 장면은 조금 아쉽다. 밑바닥 인생의 다양한 삶을 파편처럼 보여주지만 그것이 풍경처럼 다가올 뿐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사람의 감정을 이성으로 재단하려는 나쁜 습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거대한 음모론에 빠져 황당한 설정으로 넘어가는 것보다 이 소설이 더 맞다. 아직 읽지 않은 장용민의 소설 몇 권이 집에 있는데 한 권씩 도전해 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이 작가 정말 운명을 좋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