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 종교를 보는 새로운 시각, 심층종교에 대한 두 종교학자의 대담
오강남.성해영 지음 / 북성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오강남 교수의 <종교, 심층을 보다>를 읽었다. 예상 외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지만 왠지 부족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그 책이 종교인, 철학자, 영성가 등에 대한 것이지 종교를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심층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가 많이 부족했는데 그 갈증을 이 책이 꽤 많이 채워주었다. 지난 책처럼 그 내용을 아직 제대로 소화를 하지 못해 정리와 숙고 등이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수박 겉핥기 같은 수준이라고 해도 나의 종교관을 새롭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각 종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다보니 표층종교를 신봉하는 교인처럼 표면에 머문 수준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는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지만.

제목에서 종교와 깨달음을 같은 선상에 놓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개인적으로 믿음만 강요하고, 문자로 기록된 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쉬움이 많았다. 그들이 이것을 피하기 위해 상징이나 다른 의미로 풀어내는 것을 보았을 때도 억지스러움이 넘쳐났다. 이것을 지적하다 보면 역시 감정적 대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가장 중요한 본질을 많이 놓쳤다. 이것은 “한국 종교 왜 이러나?”라는 한탄과도 이어진다. 오강남 교수가 <종교, 심층을 보다>에서도 이 대목을 인용했는데 그것은 한국 종교의 한계를 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더 든다. 그 방법이 표층종교에서 심층종교로의 심화다.

이 대담집은 종교학자 두 사람의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성해영 교수는 오강남 교수의 제자였다가 이제는 같은 교수가 되었다. 이 두 교수의 대담은 이 두 사람의 인식이 어디에서 일치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담은 크게 세 장으로 나눈다. 1장은 심층종교란 무엇인가?, 2장은 심층종교는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3장은 깨달음의 종교는 어떤 모습인가? 이다. 특히 1장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체험이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궁극적으로 ‘체험’이라는 점이다.”(31쪽)라고 할 정도다. 이때 체험은 깨달음 체험을 말한다. 이것에 뿌리를 둔 종교를 간결하게 표현해서 심층종교라고 간단히 정의한다.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의 차이를 깨달음 체험으로 간략하게 표현하면 조금 난해하다. 문자주의, 근본주의, 원리주의 등을 표층종교의 대표로 말하면서 이들을 지닌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심층종교의 심화가 왜 필요한지. 그 과정에 만나게 되는 깨달음이 어떤 의미인지 말한다. 이것을 동,서양의 종교를 비교하면서 풀어내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기발한 발상이라는 생각을 들기도 하지만 아! 그렇게 이해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체험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인 신비주의를 말하는데 이것이 비밀주의와 혼용하여 사용되면서 개념의 오해가 생겼다고 한다. 이 부분은 좀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내 속에서도 이 오해가 아직 완전히 씻겨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2장은 어떻게 보면 심층종교의 실천편이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핵심 단어만 말하면 신비주의와 깨달음과 명상이다. 명상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해서 깨달음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불교의 화두선과 많이 닮은 부분이 있다. 이것은 두 교수도 동의하는 바이기도 하다. 특히 경전이 써진 시대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자주의를 지적할 때 나의 과거가 많이 부끄러웠다. 특히 다독으로 책 권수만 늘려온 시간들이 주변에 지식의 껍질만 산더미처럼 쌓은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단숨에 이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앞으로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3장 깨달음 종교가 어떤 모습일까? 물을 때 사실 그 미래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첫째 이유는 역시 현실 종교가 지닌 부작용과 긴 세월을 지나면서 쌓아온 힘 때문이고, 그 다음은 심층종교가 지닌 매력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인간이 지닌 한계와 욕망이 그것을 모두 담기에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특히 큰 깨달음을 얻은 인물들보다 이미지에 의해 쉽게 소비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심층종교의 저변이 점점 더 확대된다면 이런 부정적인 걱정이 사라질 것이다. 뭐 순식간에 모두 바뀌기는 힘들겠지만 올바른 종교에 대한 교육이 늘어나고, 종교 간의 대립이 사라진다면 그 속도는 더 빨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저 읽은 책에서 신비주의와 체험을 통한 깨달음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했을 때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이 있다. 그것은 부흥회와 방언이다. 방언이 “성령 받음의 특징이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다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150쪽)이라고 말하고 “부흥회에서는 보통 방언이라고 하면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자신만 이야기한다”(150쪽)고 했을 때 왜 사도 바울이 방언을 자제하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신비한 체험이라도 그것이 이성과 영성의 올바른 결합이 아닐 경우 제대로 된 체험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종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깊이 있는 이해를 할 수 없거나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거나 오해했던 부분들이 상당히 많아 아쉬움도 크다. 하지만 이 책들이 나의 종교관을 좀더 분명하게 정립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닌 시작이란 것과 표층종교를 넘어 심층종교로 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종교학에 대한 갈증이 더 생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베할라 - 누가 이 아이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앤디 멀리건 지음, 하정임 옮김 / 다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만 보았을 때 베할라가 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 책을 읽자마자 쓰레기 마을임을 알게 되었지만 이곳이 어디인지는 몰랐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베할라가 히브리어로 두려움, 재앙이라는 뜻만 나온다. 저자 약력을 읽으니 필리핀 마닐라에 거주하면서 방문한 곳이란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보고 중남미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어떤 선입견이 작용했는지 잘 모르겠다. 쓰레기 산이나 마을을 동남아와 중남미 모두에서 봤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며칠 전 읽은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도 쓰레기 마을인 것을 생각하면 묘한 인연이다. 한국의 과거와 필리핀의 현재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렸다. 

소설은 재미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각 장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밝힌다. 이 방식을 통해 독자는 한 사람의 시각이 아닌 다양한 직업과 연령과 사람들을 통해 그곳과 상황을 보게 된다. 물론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은 변함이 없다. 변함없이 이어지는 것은 쓰레기 하치장에 사는 라파엘 페르난데즈가 발견한 작은 가죽 가방에서 시작한 모험이다. 처음에 그와 친구 가르도가 이 가방을 발견했을 때 관심을 가진 것은 지갑 속에 든 1,100페소다. 지갑의 주인은 호세 안젤리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것들이다. 열쇠와 시내 지도.

쓰레기에서 나온 재활용품으로 그날그날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에게 지갑 속 돈은 엄청난 금액이다. 열쇠와 지도는 상대적으로 의미없는 물건이다. 그런데 다음 날 경찰이 찾아와서 잃어버린 가방을 찾는다. 만약 이 가방을 가져오면 베할라 각 집에 1천 페소를 지급하고, 가져온 자에게는 만 페소를 주겠다고 한다. 당연히 가방을 가진 라파엘이 손을 들어야 하는데 그냥 말없이 서있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은 늦어지면 사례금이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때 그의 고모가 나서 라파엘이 뭘 찾았다고 말한다. 경찰이 묻는다. 신발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이 짧은 대화가 경찰과 라파엘의 대결 구도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된다.

착하게 살아라는 말을 참으로 많이 한다. 그런데 착하게 살면 과연 복이 올까? 라파엘이 경찰들의 질문에 바로 그 가방을 내주었다면 어땠을까? 베할라 주민들이 때 아닌 횡재를 했을지 모르지만 라파엘, 가르도, 래트 등 세 소년의 스릴 넘치고 활기차면서 멋진 모험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왜 이런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이들의 모험이 보여주는 가치 등을 말이다. 아!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이 모든 활약과 승리가 단순히 그들만의 노력은 아니다. 그 중간중간에 신부님과 수녀님의 도움이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경찰의 압력과 폭력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모든 의문을 파헤치고 진실을 밝히려는 그들의 용기와 열정과 노력과 재치다.

기본 줄거리는 스릴러 방식이다. 가방을 발견하고, 그것을 찾으려는 경찰이 나타난다.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하고, 가방 속 물건들을 둘러싸고 쫓고 쫓긴다. 이 과정에 물건이 가진 중대한 비밀을 밝힌다. 또 암호를 등장시켜 호기심을 불러온다. 이 과정들만 보아도 충분히 흥미로운데 정치와 경제와 사회 현상을 적절하게 녹여내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곳에 만나게 되는 부패한 정치와 사회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픈 현실이다. 진실과 정의가 사라진 곳에서 희망을 외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준다. 하지만 이 세 소년이 보여주는 모험과 활약은 용기 가득한 순수함으로 그 모든 것을 날려버린다. 그들이 선택한 해결 방법은 부패하고 타락하고 욕심 많은 어른들과 완전히 다르다. 희망의 메시지란 단어에 동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칠 수 있겠니]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칠 수 있겠니?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미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지는 것이자 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에 최소한 한두 번은 어떤 일에 물건에 사람에게 미치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이 경험이 그렇게 길지는 않다. 물론 마니아의 세계로 가면 긴 세월 동안 미친 듯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미친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친 것과 조금 다르다. 가끔 그 경계가 희미한 경우도 있지만. 소설 속 두 주인공은 과연 미쳤을까? 묻는다. 그럼 읽는 동안 나는?

작은 이빨로 이야기의 문을 연다. 무슨 의미일까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는 진과 진이라는 연인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성만 다르고 이름이 같은 두 연인. 그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연인이 생길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얼마일까? 뭔가 특별한 인연 같다. 하지만 이 특별한 인연은 산산조각난다. 바로 그 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서. 진은 유진의 스케치에서 그 섬 여자 아이의 누드화를 보고 임신한 여자 아이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본다. 그때 그녀는 자신에게 묻는다. 죽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는 여자 아이를 찌른다. 여자 아이는 비명을 지른다. 그 후 흔들린다. 진과 집과 그 아이와 땅이.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같다. 

그 섬에서 드라이버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야나가 등장한다. 그는 개 한 마리를 친 적이 있다. 개 그림자의 환영 때문에 다시 온 곳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진이다. 이 만남이 단순한 우연일까? 그녀는 이야나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고, 이야나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재미난 것은 역시 친구 만이다. 그 섬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만의 삶을 통해 그 섬 생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만은 자신이 가진 매력을 팔아서 생활했고, 그 매력이 사라졌을 때 만난 엄마의 존재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한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본능에 충실한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솔직함과 두려움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현실이 아닌 과거 속에 살아가는 두 남녀와 대비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본능은 무얼까? 성욕일까? 진과 이야나의 만남과 동행은 처음에는 필요에 의해서다. 이야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진은 자신이 찾는 유진의 환영을 쫓기 위해서. 이 만남이 이어지고 우연한 사고인지 의도인지 모를 여권 분실 이야기는 하나의 일을 바라다보는데 사람의 경험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만을 통해 알게 된 힐러의 이야기는 이 두 남녀가 갇힌 기억의 지옥을 벗어날 하나의 주문 같다. 진은 7년 전 일어난 살인의 기억이고, 이야나는 그가 사랑했던 여자 수니에 대한 집착이다. “기억해야만 할 것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지우게 될 겁니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장치 중 하나가 지진과 쓰나미다. 7년 전 사건 속에 일어난 지진과 현재 밀려온 쓰나미는 삶의 전복이자 회생이다. 과거보다 현재의 쓰나미가 더 처참한데 그 현장을 작가는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그 섬을 자주 다녀왔고, 그 섬에서 시체가 불타는 것을 본 경험에서 비롯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예전에 동남아 여행을 갔을 때 2~3년이 지났는데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놀란 적이 있다. 아직도 치워지지 않았다는 것과 그 처참함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것에 동시에 놀랐다. 그 당시에는 치워지지 않은 것이 게으름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경제력과 그 충격 때문이 아닐까 하고 바뀌었다. 물론 그 국민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뿐이었다.’라고 몇 번이나 외친다. 진과 진의 결합은 이제 과거 시재로 변했다. 진이 사라진 유진을 찾아 7년 동안 몇 번이나 그 섬에 왔지만 그녀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고 멈춰 있다. 이것은 기억의 지옥이 만들어낸 환상이자 고통이다. 정체된 시간은 그녀의 삶을 강하게 지배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것들이 그녀를 과거 속에 묶어둔 것이다. 이때 나타난 이야나와 쓰나미는 그녀의 정체된 삶을 뒤흔든다. 그녀가 그에게 말한 “돌아올께요”는 그녀를 떠난 유진을 잊게 만들고, 기억의 지옥을 마주하면서 극복하게 만든다. 쓰나미가 만든 참혹하고 극한 상황이 그들을 현실 속에서 연결시킨다. 시간은 다시 흐르고 그들의 관계도 앞으로 나아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토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말해 조정래의 작품 중 읽은 것이 몇 편 되지 않는다. <태백산맥>과 <대장경>과 다른 단편집 한 권을 제외하면 없다. 그가 출간한 수많은 책을 생각하면 상당히 적은 편수다. 단순히 권수로 따지면 적지 않지만 그 당시 나의 취향은 조정래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대하장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적지 않은 대하장편을 읽었지만 그것은 학창시절 때뿐이었다. 그래서 <아리랑>이나 <한강>을 사놓고 그냥 묵혀두고 있다. 그의 이름이 한창 알려지고 연재소설이 출간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대장경>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 이 작가 더 읽고 싶다는 마음은 크게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책이 보이면 사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는 읽겠지 하는 생각과 그의 이름 때문이다. 그러던 중 새롭게 장편으로 개작된 <황토>는 적은 분량으로 시선을 끌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시대의 비극 속에서 각각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된 점례다. 그녀의 삶속에는 그 시대를 산 여자의 비극이 담겨 있다. 일제, 해방, 6.25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그렇게 길지 않다. 10년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와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은 그녀를 평온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그리고 각각 다른 남자에게서 얻은 3남매의 사연은 그 누구도 욕할 수 없는 민족의 비극이자 시대가 지닌 한계다. 읽고 있으면 어떻게 저런 일이 생길까 의문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혹은 최선이었음을 알게 된다. 

시작은 그녀의 셋째 아들 동익이 조난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다. 이 사고를 통해 그녀의 삶 중 일부가 드러난다. 바로 동익이 혼혈이라는 것과 첫째 태순이가 막내를 욕하고 엄마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태순이가 동익이를 욕할 때면 그 모자를 함께 붙이는데 한 가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나? 하는 것이다. 그가 바로 일제 시대 주재소 주임 야마다가 알량한 권력으로 자신의 엄마를 범해서 낳은 또 다른 혼혈임을 말이다. 아마 점례는 이 사실을 끝까지 숨겼을 것이다. 외모에서 동익이처럼 이국적이지 않기에 숨기기 쉬웠을 것이고, 그 사실을 까발려 아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왜 그녀의 삶이 이렇게 되었는지 시대의 비극 속에 하나씩 풀려나온다. 그 시발점은 아버지가 일본인 과수원 주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고, 이 기원은 주인이 아내를 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는 남편이 강간당하려는 아내를 구해내고 폭력을 행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텐데 그 시대에 일본인은 법 테두리 밖에 존재했다. 그 전후 사정에 대한 파악 없이 점례 아버지가 끌려가서 치도곤을 당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여기에 불행이 더해진 것은 점례가 예쁘고, 이것을 일본 주임이 본 것이다. 이 다음 수순은 이제는 진부한 듯한 진행으로 이어진다. 주임의 총애는 남에게 권력으로 비치고, 그녀에게 아부하고 부탁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녀의 집안은 조그마한 여유를 누린다. 이것은 다시 그녀가 미군 장교의 첩이 되었을 때 되풀이된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아이 낳은 것을 속이고 독립투사의 아들이었던 박항구와 결혼했던 때다. 그녀의 몸에 남은 흔적의 의미도 모르고, 그녀의 장점을 보고, 그녀가 낳은 아이를 사랑했던 그 남자.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고, 전세가 역전되는 순간 점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짐이자 화가 된다. 결코 길지 않는 시간 동안 여자의 행복을 누리게 만들었고, 현재 그녀를 가장 잘 도와주는 딸 세연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지만 현실은 냉혹하고 잔인하다. 그가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위해 행동한 것들이 그의 가족에게 강한 여파를 미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여기서 다시 그녀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그녀의 미모다. 

그녀의 미모는 남자들의 시선을 끈다. 전후 복잡한 삶 속에서 원초적 본능이 더없이 강할 때는 더하다. 만약 그녀가 영악하고 이기적이었다면 더 많은 부와 삶의 여유를 누렸을 테지만 시대의 강한 바람 속에 그냥 흘러 다니는 힘없는 여인이다. 힘없다고 그녀가 삶을 포기할 정도로 무기력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돌봐야 할 아이들이 있기에 결코 무너질 수 없다. 이 때문에 그녀의 선택은 우리 어머니의 힘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쓰러져도 다시 바로 서는 그 힘 말이다. 하지만 그녀도 자식들 앞에서는 무력하다. 그녀가 유언처럼 자신의 인생을 하나씩 적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력감을 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긍정하기 위한 노력이다. 미래의 희망이다. 개인적으로 장편으로 개작되었다지만 분량을 더 늘려서 3남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었으면 한다. 그들과 함께 여자 점례 이야기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교, 심층을 보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적으로 종교의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좋은 일을 하는 종교인들도 보지만 언론이나 주변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쁜 면을 부각시켜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인 종교관이 결코 좋게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종교의 긍정적인 면이나 위대한 부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편협한 종교인들의 말과 행동은 나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보고 생각하고 느끼게 만든다. 결코 그것이 종교의 모든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던 중 이 책 저자에 대한 글을 읽고 목차를 보면서 나 자신의 종교관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결론부터 말하면 능력부족으로 제목처럼 심층을 보지는 못했다. 

“종교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이 문장은 어릴 때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믿음이란 것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성의 영역이란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알게 되었다. 특히 학창시절 종교를 두고 논쟁을 벌일 때면 늘 서로의 주장이 겉돌고는 했다. 이것은 둘 다 다른 곳을 보면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과학과 이성 등을 무기로 경전을 해석한 나와 이 모든 것을 역사이자 사실로 아니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상대와의 대화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흔히 하는 말로 종교와 정치는 이야기하면 답이 없다는 말처럼. 하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종교관 차이도 있지만 이해의 폭과 깊이의 차이가 더 크게 작용했다. 이것을 알게 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다. 이것에 대한 대담집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가 이미 나와 있는데 나중에 읽을 예정이다. 이 둘의 차이에서 시작하여 심층 종교의 신비주의로 나간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우면서 종교의 발전에 필요한 단계로 저자는 말한다. 이 용어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도를 높인 후 저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에서 시작하여 현대 한국의 두 철학자로 이어지는 긴 종교 여행을 떠난다. 많은 인물들이 낯익지만 낯선 이름도 적지 않다. 편협한 교육과 특정 종교인의 세계로 나아간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렇지만 이 낯설음이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준 것은 사실이다.

다루어지는 종교인의 숫자만 단순히 보아도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다. 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어떤 기준에서 이런 분배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정말 낯선 종교의 선각자를 제외하면 그리스도교 선각자 중에서도 낯선 인물이 곳곳에 보인다. 비종교인이거나 그 종교에 관심이 없다면 전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인이 적은 것을 아쉬워한다. 하지만 아쉬움을 넘어가면 나 자신이 잘 몰랐던 종교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이자 가치는 이런 인물들에게 있지 않나 생각한다. 각 종교 선각자들의 주장이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해설과 더불어 말이다.

한국 종교의 한탄과 걱정에서 시작한 이 책이 다른 영성가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깨달음은 우리의 나아갈 바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 영성가, 선각자 모두가 한 시대나 종교 그 자체를 모두 바꿀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깨달음과 실천이 가슴과 머리에 많은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신문 연재라는 특성 때문에 가끔 중복되는 내용이 나오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이 하나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다만 나의 지식과 깨달음이 부족하여 그 진수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소화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의 분발이 필요한 부분이다.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리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동아시아의 사상가들, 인도의 영성가들, 불교, 한국 등에 대한 핵심 정보다. 각 개별로 들어갔을 때 이 종교들이 어떤 내용인지 핵심을 집어주지만 결국 개인의 노력과 깨달음이 핵심이다. 늘 마찬가지지만 좋은 책들은 새로운 책들을 읽게 만든다. 비록 나 자신이 종교는 없지만 그들이 깨달은 세계의 한 조각이나마 얻기 위해 책을 읽고 명상에 잠기고 느끼고 경험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식의 확대가 아닌 지혜의 깊이를 더 많이 얻고, 마음속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가기 위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