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빛 - 검은 그림자의 전설 안개 3부작 1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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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폰의 소설이란 것만으로 관심이 간다. 먼저 번역된 <바람의 그림자>를 보고 감탄했다. 극찬을 하는 흔한 광구 문구를 믿지 않았는데 이 소설은 예외였다.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읽은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그 책은 나의 추천목록에 올라갔고, 새롭게 나올 책을 기다렸다. 그러다 나온 신작 <천사의 게임>은 예상외로 평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쉽게 손이 나가지 않았다. 뭐 나중에 읽을 것이 확실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의 3부작 중 첫 번째 소설이 출간되었다. 짧은 한 권이다. 집중을 위해 빈 하루를 선택하여 읽기 시작했다.

<바람의 그림자>에서 독백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이번엔 편지다. 이레네에게 보낸 편지 속엔 과거를 떠올려주는 단어와 문장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문을 연 후 이레네 가족의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아버지가 죽은 후 빛에 쪼달리고, 생계는 막막해진다. 잘 살 때 친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등을 돌린다. 한 지인 르콩트 씨의 도움으로 조그마한 집에 살게 된다. 그러다 르콩트 씨가 아주 좋은 조건의 일을 소개한다. 크래븐무어라는 곳에서 한 장난감 발명가 집을 관리할 가정부 일이다. 독채를 내어주고 급여도 상당한 일이다. 이렇게 그들은 힘겨운 파리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새롭게 도착한 곳은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좋은 곳이다. 발명가 라자루스는 친절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약속한다. 이제 그들의 고생이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도착한 조그마한 마을은 앞집 사람이 재채기를 하면 금방 소문이 날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크래븐무어에서 일하는 한나는 이레네와 비슷한 나이고 수다쟁이다. 그녀를 통해 마을 소식을 듣고, 그 마을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레나는 이스마엘이라는 한 청년을 만나고 호감을 가진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이야기는 평화롭고 로맨스로 가득한 소설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등대의 전설과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크래븐무어가 다음에 뭔가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전해준다.

이 소설에서 그림자로 불리는 존재는 초현실적이다. 이런 설정이 단순히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것으로 처음에 생각했다. 라자루스가 만드는 장난감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알 수 없지만 과거 수준을 생각하면 허점이 많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등대가 있는 곳에서 발견된 알마 말티스의 일기와 한나의 죽음이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스멀스멀 피어나는 어두운 힘은 이제 소벨 가족에게 더욱 다가오고, 환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물리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에 대한 단서는 일기와 라자루스의 이야기 속에 담겨있다. 

세계적인 대 히트작 <바람의 그림자>를 먼저 본 탓에 전작에 비해 힘이 조금 딸린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선 비슷한 점이 곳곳에 드러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 어른이 아니라 소년 소녀란 점도 비슷하다. 그들이 공포 속에서 정신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모습은 보면 볼수록 대단하다. 로맨스 소설에서 스릴러로 변하고 마지막에 판타지 같은 결말로 이어진다. 약간 당혹스러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반전과 설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전체적인 이야기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다른 작품들도 출간될 예정이라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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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대한 백과사전 - 눈보라 속에 남겨진 이상한 연애노트
사라 에밀리 미아노 지음, 권경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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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눈에 대한 백과사전이다. 그런데 진짜 백과서전이 아니고 그런 형식을 가진 소설이다. 하나의 일관된 소재나 주제를 찾는다면 말할 것도 없이 눈이다. 구성은 사전처럼 알파벳 A부터 시작한다. 첫 단어는 ANGEL(천사)이다. 이 이야기 마지막에 <약속>을 보라는 글이 있는데 처음엔 그 의미를 몰랐다. 영화나 소설을 지칭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책을 읽어 나가면서 이 소설 속 다른 단어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이 소설은 눈과 관련된 단어와 이야기로 진행되지만 다른 단어들과 연관성을 가진다. 물론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독자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 

눈에 대한 소설이다 보니 눈에 대한 이야기가 끝없이 나온다. 그런데 중간에 페티시즘에 대한 글이 있다. 구두와 모피에 대한 글이다. 이에 작가는 교묘하게 이 두 물건이 눈과 관련된 추위와 관계있다고 말하면서 의뭉스럽게 넘어간다.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이렇게 이 소설은 직접적으로 눈을 다루지 않지만 눈과 관련된 사람과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하나가 독립된 이야기인 듯하지만 어느 순간 앞에 나온 사람이 다시 등장하여 혹시 전체적인 흐름 속에 관련성을 찾게 만들기도 한다. 

알파벳순으로 진행되지만 눈에 대한 과학적 정의, 고전에서 발췌한 이야기, 역사 이야기 등이 등장하여 하나의 큰 흐름을 이어간다. 개인적으로 그 흐름의 중심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했다. 모스와 버터플라이일까? 아니면 후기처럼 다루어진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을까? 고민을 한다. 프롤로그로 돌아가 교통사고가 지닌 의미를 생각하고, 편집자 노트를 다시 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인용문, 일화, 정의, 시 등이 나에게 다가와 가슴 한 곳을 두드리는 경우도 많았다. 사전 같은 구성이지만 잘 읽히고, 재미난 부분도 가끔 만난다. 하지만 역시 나의 독법 속에서 그 재미를 온전히 누리기는 힘들다.

작가의 독창적인 구성과 상상력에 많은 점수를 주었다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연애소설이라고 하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그 느낌을 깨닫지 못한다. 작가의 실명을 교묘하게 등장시켜 사실과 허구를 교차시키는데 이 또한 낯선 구성 때문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줄거리를 요약하려는 시도는 이미 포기한지 오래다. 단어에서 시작한 이야기나 인용이나 정의를 읽고 내가 그 순간 느낀 것을 가슴에 담아둔다. 하지만 나른하고 따스한 온기에 그 감정들은 녹아버린다. 아직 내 수준이 이 소설을 제대로 받아들이기에 무리인 모양이다. 언젠가 다시 읽게 되면 지금 놓친 부분을 찾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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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없는 나는?
기욤 뮈소 지음, 허지은 옮김 / 밝은세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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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떤 것일까? 1995년 그해 여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첫사랑이다. 보통의 첫사랑이 아닌 위대한 첫사랑이다. 하지만 남자는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고,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 남아야했다. 그 당시는 이메일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다. 국제전화와 편지로 사랑을 속삭이지만 현실의 벽은 연락의 간격을 뜸하게 만들 뿐이다. 사랑의 불안에 휩싸인 남자 마르탱이 열심히 아르바이트 등을 해서 돈을 모은다. 그 목적은 그녀 가브리엘을 뉴욕에서 만나기 위해서다. 그들을 처음 이어준 편지처럼 이번에도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비행기표를 동봉해서 말이다. 뉴욕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하지만 오지 않는다. 이렇게 이들은 헤어진다.

13년의 시간이 흐른 후 마르탱은 경찰이 되어 유명한 명화 도둑을 잡으려고 한다. 그 도둑은 아키볼드다. 수많은 명화를 훔쳤지만 한 번도 잡힌 적이 없다. 마르탱은 그의 기록을 조사하던 중 화가의 기일에 맞춰 훔친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오르세 미술관으로 침투하는 그를 발견한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그런데 그는 어떤 도움도 요청하지 않는다. 그가 고흐의 자화상을 훔쳐 달아나자 그를 뒤쫓는다. 다리 위에서 그를 체포하려고 한다. 아키볼드는 그림을 강으로 던진다. 그림이냐 도둑이냐를 선택하라는 신호다.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강으로 몸을 던지고 도둑은 유유히 사라진다. 하지만 그 그림은 진품이 아니다. 도둑에게 속은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마르탱은 OCBC(프랑스 문화재 밀거래 단속국)에서 좌천된다. 하지만 아키볼드에 대한 집념은 광기처럼 치닫는다. 그가 아키볼드를 조사하고 뒤좇는 것처럼 아키볼드 또한 그를 조사하고 파헤친다. 그가 대단한 형사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오르세 미술관 사건 전부터 그를 조사했다. 그것은 그가 바로 그의 딸 가브리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두 남자는 한 여자를 통해 이어지고, 무대는 파리에서 캘리포니아로 옮겨간다. 그리고 두 남자의 숙명적이고 치명적인 대결과 함께 사랑의 위대한 힘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이번 작품 또한 전작처럼 속도감이 대단하다. 영화 같은 장면들이 이어지고, 사랑은 두 남녀 사이에서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다. 초반에 설정을 보면 좀더 복잡한 구성이 될 것 같은데도 뒤로 가면 관계는 간단해지고 주요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에 더 집중한다. 이런 집중이 속도감을 더 높인다. 하지만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가가 깔아놓은 설정과 전개들이 왠지 과장되고 중복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전작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마르탱에 많은 중점을 두고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가브리엘의 느낌이 약하다. 사랑이 이기적인 부분이 강하다고 하지만 그녀가 요구하는 것들이 너무 이기적이고 운명적이다. 

도둑과 경찰의 대결에서 왜 13년 전 그녀가 오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으로 넘어가는 순간 사랑은 자신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하루의 기다림으로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마르탱이나 왜 다시 자신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가브리엘을 보면서 그런 느낌은 더 강해진다. 이 불화가 화해로 이어지는 것은 그 사랑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이겠지만 배신으로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설정은 너무나도 과장되고 기적적이다. 그리고 마지막 기적을 위한 설정은 너무 심하다. 13년 전 일을 위한 좋은 변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키볼드를 생각하면 너무 갑작스럽고 충동적이다. 

변함없는 속도감, 영화 같은 장면들의 연속 등 작가의 특기가 그대로 살아있다. 과거의 비밀과 경찰과 도둑의 대결 구도는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맛보게 한다. 하지만 이런 구성들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첫사랑이자 언제나 마지막 사랑 말이다. 이 사랑을 위해서 현실 문제나 장애요소는 간단하게 생략된다. 왠지 모르게 작가가 자신의 틀 속에 갇혀 비슷한 형식과 이야기를 그대로 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직 읽지 않는 초기작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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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부는 사나이 - 제15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기홍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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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에 서양 동화 속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이야기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닌가 생각한다. 전설을 통해 만들어진 동화 속 이야기를 판타지로 해석한 소설도 있고, 현대적 의미로 새롭게 쓴 글도 있다. 왜 이 이야기가 이렇게 작가들의 관심을 끌까 의문을 가진 적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한 작가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들고 나왔다. 그는 환상과 현실을 교차시키면서 한 대학생의 사랑과 성장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처음 소개 글에서 설정을 보았을 때부터 시선을 끌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실행될 것을 두려워한 한 중학생이 있다. 그 두려움은 실재적이었다. 충동에 휩싸여 누구나 위험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일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이런 그가 밀레니엄을 맞이했을 때 허탈함은 대단했을 것이다. 자신을 충동으로 내몰았던 심장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도 시들해졌다.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은 조용하게 흘러갔다. 이때부터 그는 귀마개를 가지고 다녔다. 하루 종일 귀마개를 한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머니 속의 귀마개를 만졌을 뿐인데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현상이 생긴다. 소리 없는 기억이 그를 채우기 시작한다. 

소리 없는 기억을 가진 그에게 피리 부는 사나이 이야기는 묘하게 다가온다. 첫 사랑인 수연의 이야기 속에서 나타난다. 처음엔 그냥 수연의 기이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이야기는 점점 커진다. 처음엔 풋풋한 새내기 대학생활을 다루고, 소문의 무서움과 무거움을 나타낸다. 술에 취해 함께 잔(정말 잠만 잔) 정현과의 일은 같은 학생들의 질투와 오해로 뒤틀린 학창생활을 하게 만든다. 이 때문인지 그는 같은 하숙생이자 동급생인 우진과 연상의 여자이자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수연과의 관계에 더 집착한다. 이 둘과의 관계는 학창시절 어쩌면 가장 찬란하고 멋진 경험일 수 있다. 다른 사건들만 없다면 말이다.

삶 속에 자주 발생하는 엇갈린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시에 현실 속에서 수없이 발생하는 테러와 실종이 그 사이사이를 채운다. 처음 그 시절에 발생했던 수많은 실종들을 단순히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소품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사실들을 작가는 뒤로 가면서 하나의 전설과 연결시키면서 새로운 설정으로 만든다. 그 전설이 바로 피리 부는 사나이다. 그의 피리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은 그 신묘한 연주에 매혹되고 자신도 모르는 끌림에 빠진다. 이 끌림은 실종과 테러라는 현실로 이어진다. 왜 이런 테러가 발생하게 되었는지 알려주는데 그 답이 해석자에 따라 갈릴 수 있다. 전설을 현실 속 부조리와 부패 속에 부활시킨 것이다. 

흡입력이 좋은 소설이다. 나의 이야기 속에서 만나게 되는 친구들과 사람들은 흥미롭고 풋풋하고 그립다. 평범하지 않은 그들이지만 젊음 속에 뭉치고, 아파하고, 그리워하고, 성장한다. 중반 이후 갑작스런 비약처럼 보이는 피리 부는 사나이와 테러의 연관성은 당혹스럽지만 자연스럽게 넘어가진다. 처음에 소리를 잃은 그와 매혹적인 피리 소리가 이어지고 겹쳐지면서 현실의 상황들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책 마지막에 와서 그에게 일어나는 일상의 지겨운 반복은 삶의 무거움과 그리움을 덜어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언젠가 만나게 될 신세계는 어쩌면 성장통 끝에 그 앞에 펼쳐질 현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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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완벽한 하루
채민 글.그림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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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자주 읽지는 않는다. 한때 시집을 몇 권 열심히 읽은 적이 있지만 함축적인 글들과 그 이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힘들었다. 어쩌면 학교 교육을 통해 시를 접했기에 해석과 상징에 너무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시는 나에게 어려운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어느 날 문득 한 권의 시집에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는 시구를 발견하고, 다시 시로 돌아온다. 삶의 깊이와 폭이 넓어지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늘어난 덕분이다. 그러다 시를 바탕으로 그린 만화가 있다는 소개 글을 보았다. 옳거니. 무릎을 친다. 좋아하는 만화와 어려운 시의 만남이라면 시에 대한 이해를 높여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빠르지 않은 서른이란 나이에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어떤 일에도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녀가 이 작업에 빠진 것이다. 그녀의 작업 방식은 이야기를 만들어놓고 그 이야기에 어울리는 시를 찾고, 다시 그 시에서 소스를 얻어 구슬을 꿰듯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만화를 보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읽고, 시구를 음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앞에 나오는 시를 다시 몇 번이고 읽게 된다. 작가가 해석한 시와 내가 이해하는 시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다. 이렇게 접점을 찾으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찾지 못하면 다시 시를 읽게 된다. 내가 놓친 부분이나 제대로 읽지 않은 부분이 있나 하고 말이다.

모두 다섯 파트, 아홉 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 파트에 두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 이야기 속 인물들은 짧은 순간 만나거나 대화를 나눈다. 첫 파트에서 이 부분을 보았을 때 혹시 연작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음 파트에서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한 파트 속에 둘을 묶은 것이다. 그런데 각 파트 속 인물들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어둡고 힘겹고 지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늘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냥 스쳐지나간 사람들이다. 작가가 낮은 곳에서 세심하게 관찰하고 느낀 부분들이 그들을 통해 하나의 그림 이야기로 나타난다. 

아홉 편의 시 중 내가 읽었던 것은 거의 없다. 이전에 좋아했던 시인 한 명과 너무 유명해서 읽었던 시인 두셋을 제외하면 대부분 낯설다. 최근에 그 이름을 알고 읽어야지 생각한 시인도 몇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그들의 시를 통해, 만화가의 눈과 마음을 통해 본 삶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건조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고, 그리워하고, 잘못된 삶을 살고, 가볍게 잊은 듯하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민하고,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마지막 순간 미련을 품지만 이미 늦었다. 

아홉 이야기는 금방 넘어간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그들의 삶은 오랫동안 남는다. 그녀와 그 속에서 나의 삶 한 자락을 발견하고, 비루한 나를 돌아본다.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삶의 무거움 속에서도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 그 위대한 힘에 놀란다. 정작 자살을 결심한 사람의 미련이 좋아하던 커피 한 잔이란 소박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한다. 이 만화의 매력은 바로 느끼고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를 몰라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작가가 보여주는 이야기 속에서 내가 뭔가를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시 시를 펼쳐들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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