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미궁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나의 나쁜 기억력은 이 작가의 작품에 대한 분석을 할 정도가 아니다. 운 좋게 모든 번역 소설을 읽었지만 특징을 하나로 풀어낼 정도의 능력도 없다. 일반인이 탐정으로 등장한다는 것도 다른 사람이 말해줘서 알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아는 게 있다. 그것은 재미있고,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할 작가란 것이다. 일정 부분 아쉬운 점이 있고, 약간은 과장된 살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고, 너무 도식적인 결말이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밀실 살인, 한밤의 연쇄살인, 환상 등을 전작에서 재미있게 다루었다면 이번엔 수족관이다. 한밤에 홀로 수족관의 수온을 확인하던 가타야마가 죽는다. 사인은 과로에 의한 돌연사. 이렇게 한 인물의 죽음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리고는 3년 후로 넘어가 하루 동안 벌어진 사건을 다룬다. 그것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우연히 발견된 핸드폰을 통해서다. 이 핸드폰을 관장에게 전달할 것을 요구한다. 전달된 의문의 핸드폰에 메일이 온다. ‘도쿄만의 오염이 심하군요’란 문장이다. 이것은 하네다 국제환경 수족관의 J1 수조를 암시한다. 직원들이 달려간다. 그곳에서 알코올이 담긴 병을 발견한다. 큰 위험은 없지만 조그마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문자가 올 때마다 수조들에선 문제가 될 수 있는 이물질들이 발견된다. 

하나의 핸드폰 메일에서 시작했지만 그 속엔 많은 것을 암시하고, 의문을 품고 있다. 백만 엔이란 많지 않은 금액을 요구한 것도 그렇고, 협박범이 설치한 도구들이 수족관에 치명적인 피해를 끼칠 정도가 아니란 것도 그렇다. 메일을 보낸 후 직원들이 금방 그 도구를 발견할 수 있게 한 것도 의문이다. 그리고 이 날은 이 수족관이 회생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가타야마의 3주년 기일이다. 왜 이 날을 선택했을까? 첫 장면에서 벌어진 죽음이 혹시 누군가의 트릭에 의한 살인일까? 부제처럼 나온 수족관의 비밀 프로젝트 때문에 벌어진 음모가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뭉게뭉게 피워나면서 사건은 진행된다. 

시간 순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조사하고 이야기하는 역할은 수족관 직원 고가가 맡았다. 그의 역할은 홈즈 시리즈에서 본다면 왓슨이다. 홈즈 역할은 그의 친구이자 외부인인 후카자와다. 이 콤비는 처음엔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후카자와가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단순히 선배의 기일을 찾아온 인물에서 바뀌어 탐정 역을 맡은 것이다. 사건이 계속 진행되고, 마침내 수족관의 오시마 계장이 죽은 채 발견되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협박사건에서 살인사건으로.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죽음을 경찰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들이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보통의 소설이라면 여기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데 말이다.

한정된 공간인 수족관과 수족관을 열어놓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다. 재미있게 읽히지만 긴박감이나 긴장감을 강하게 주지는 못한다. 사건 자체가 위험하거나 강력한 범죄의 분위기를 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읽은 지금 영화로 만든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협박 메일 후 실제 수조에서 발견되는 이물질을 더 위험물질로 바꾸고, 시간제한을 두면서 긴장감을 높이는 방향으로 약간 손본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그리고 멋지게 편집하고 결말을 다르게 한다면 재미있는 스릴러물이 될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작품이다. 소품으로 나쁘지 않지만 그 이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수족관이란 공간이 주는 매력이 살아있지만 역시 결말은 아쉬움을 많이 준다. 섬세하면서도 치밀하게 준비된 협박이 중반에 쉽게 예측이 가능해진 것도 그렇지만 가장 아쉬운 것은 역시 결말이다. 과연 현실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강하게 부각되지 못한 것도 역시 아쉽다. 고가가 무력한 존재처럼 나오면서 상대적으로 후카자와가 부각되지만 갑작스런 부분이 많다. 하지만 비밀 프로젝트는 멋지다. 만약 실제로 실현된 곳이 있다면 한 번 가보고 싶다. 전작들에 비해 아쉬움이 많다. 다음 작품은 어떨까? 여전히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첫 문장이 시간과 장소와 하나의 사건을 말하면서 시작한다. 하나의 다리가 무너져 여행객 다섯 명이 추락해 죽은 사건이다. 시간은 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장소는 페루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로 불리던 것이 무너졌다는 사실보다 다섯 명의 여행객에 관심을 둔 사람은 그들보다 먼저 다리를 건넌 주니퍼 수사다. 그가 왜 이 사건에 관심을 두었을까? 그것은 그 사건 속에 숨겨져 있는 신의 의지를 밝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희생자들 관련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그 기록을 한 곳에 묶어 책으로 내었다. 

교회는 이 책을 이단으로 몰아붙인다. 책과 그는 불탔지만 한 권은 도서관에 남았다. 작가는 이 책을 발견한 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무척 두터운 책의 내용을 줄이고, 자신의 의견을 삽입한 것처럼 꾸며서 말이다. 형식적으로 본다면 요즘 나오는 르포문학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이런 저런 생각을 뒤로 하고 책 속으로 들어가면 다섯 명의 희생자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 명 한 명 별개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지역적 시대적 특성에 의해 그들을 연결하는 줄이 계속 이어진다.

다섯 명의 희생자는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 그녀의 하녀 페피타, 피오 아저씨, 하이메라는 어린아이, 에스테반 등이다.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과 페피타를 하나의 장으로 묶고, 피오 아저씨와 하이메를 하나로 묶었다. 에스테반은 별도처럼 나오지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작가는 왜 이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였는가를 이야기하기보다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아픔과 괴로움과 그리움과 사랑을 다루면서 이 다리에 오기까지를 말이다. 덕분에 운명이니 우연이니 하는 단어 대신 삶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200 여쪽에 불과한 소설이지만 매력적인 인물로 가득하다. 스페인 문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의 사연은 불쌍하지만 강한 사랑이 느껴진다. 하녀 페피타가 본 마님의 모습이 너무 처량하고 불쌍하지만 그녀 또한 고아로 힘겹게 자란 아이다. 이 둘이 수녀원을 다녀온 후 다짐하는 장면과 그 다음에 벌어진 사건은 아이러니하다. 피오 아저씨는 최고의 배우인 카밀라 페리콜의 선생이자 아버지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카밀라가 성공하자 나태해지고 통속적으로 변하면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인물이 카밀라의 아들 하이메다. 이 두 노소가 함께 가게 된 사연도 결코 평범하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에스테반은 쌍둥이 형제가 바로 카밀라에 대한 강한 사랑을 품고 있고, 열병을 앓고, 우연히 다친 사고로 죽는다. 이 죽음 후 그는 방황한다. 이 방황을 마치고 새로운 삶을 선택한다. 그런데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다 추락한다. 

이 다섯 명은 묘하게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픔을 이겨내고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 출발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는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잔혹한 미래가 펼쳐진 것이다. 이 죽음에서 주니퍼 수사가 아무리 신의 의지를 발견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신의 의지를 수학적으로만 증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녀가 마지막에 “그 다섯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은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을 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212쪽)에서 말한 대목과 상당히 다르다. 그렇다. 이 소설은 다섯 여행객의 죽음을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시간 7일 모중석 스릴러 클럽 25
짐 브라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요즘 많이 방송된다. 연출과 대본과 편집에 의해 어느 정도 각색이 되겠지만 점점 강도가 강해진다. 아직 우리나라의 경우 완전한 상업화가 덜 되어 조금 강도가 약한 부분이 있지만 가끔 케이블에서 방송하는 리얼리티 방송을 보면 놀랄 때가 많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나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순간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프로그램은 강도가 강할수록 시청자의 눈을 끈다. 나의 이성보다 감성이 더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용을 이 소설은 아주 잘 포착하고 표현했다.

<24시간 7일>은 한 케이블 방송사가 기획한 프로그램 이름이다. 이 프로그램은 바사 섬에 628개의 무인 카메라를 설치하여 12명의 출연자를 24시간 감시한다. 동시에 각 개인별 임무가 주어지고 시청자의 투표로 탈락자를 결정한다. 우승자에겐 2백만 불과 평생 원하던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각각의 출연자는 돈과 명예와 개인의 바람을 가지고 이 방송에 출연한다. 그런데 방송 첫 날 사고가 발생한다. 12명의 출연자를 제외한 모든 스텝들이 죽는 것이다. 그것도 강력하게 설계된 에볼라 바이러스에 의해 거의 동시에 말이다. 이제 방송은 정말 생존을 위한 것으로 변한다. 이 모든 사건의 주재자 컨트롤에 의해서 말이다.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당연히 출연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 방송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응과 접근이다. 출연자 중 여주인공은 다나 커스틴이다. 그녀는 학창시절 한때의 사랑으로 임신한 후 소위 말하는 인생이 꼬인 경우다. 거기에 태어난 딸은 근육퇴행위축증을 앓고 있다. 그녀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길 원했던 것은 바로 2백만 불이란 거액도 있겠지만 평생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녀의 바람은 딸 제나를 이 병에 대해 신약을 개발하고 임상 실험하는 스위스로 보내는 것이다. 그녀는 최종심사에서 탈락했다. 그런데 출연예정자 중 한 명이 아파 대타로 방송에 참여한다. 지옥 같은 7일 간의 생존 게임에 그렇게 마지막으로 참여한다.

섬 밖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터커 손이다. 그는 보도기자가 되길 원하는 사진기자다. 죽었다고 알려진 폭탄 테러범을 찾아갔다가 오히려 죽을 뻔한 인물이다. 노조에게 경고까지 받지만 행운이 찾아온다. 사랑했던 여자의 아버지로부터 온 한 통의 전화다. 그가 바로 이 사고로 생긴 정부 태스코포스에 참여한 셔먼 로릭 박사다. 그의 전문분야는 테러범과 인질상황이다. 컨트롤이 원하는 것을 역이용할 목적으로 그가 선택한 인물이 바로 터커다. 그런데 이 선택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든다. 그것은 터커가 지닌 능력과 상황들 때문이다.

작가는 프로그램과 함께 설정에 많은 공을 들였다. 고립된 섬과 정해진 시간에 발병하는 바이러스 병을 설정하여 그들을 구출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했다. 너무나도 강력하게 설계된 바이러스는 거의 정확한 시간에 감염자를 죽음으로 내몬다.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 때문에 소설 속에선 강력한 조연 역할을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방송 카메라들이다. 처음엔 그들의 24시간을 촬영하여 편집본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인터넷으로 24시간 생중계가 가능하다. 628개의 카메라와 참여자들 목에 걸린 개별 목걸이 카메라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생활이 모두 노출된 것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중계되고, 그들을 본 시청자는 투표로 탈락자를 결정한다. 

투표는 간접적인 참여방식이지만 이 소설에선 가장 강력한 간접 살인 수단이다. 투표를 세밀하고 분석적으로 그려내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 자신들이 살리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혹은 죽이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그들은 쉴 새 없이 번호를 누른다. 이성이 사라지고 감성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은 다시 방송사가 이 사건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가 다시 이 프로그램 하이라이트를 그대로 방송하면서 벌어진 해프닝에서 잘 드러난다. 이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시위자들이 그 시간엔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터커가 잠시 고민한 것과 연결된다. 네트워크가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막대한 수익을 얻어도 되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매체들은 대형 사건, 사고로부터 수익을 얻는다. 우린 이미 관음증 환자이자 중독자들인 것이다.

엄청난 속도감으로 읽히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지닌 위험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조금 현실과 맞지 않는 설정이 눈에 들어오지만 사건 전개에 필요한 것들이다. 누가 최후의 생존자가 될 것인가와 컨트롤의 정체가 누군지가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불러온다. 뭐 생존자야 정해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존이 얼마나 험한 과정을 겪을지,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이런 과정을 작가는 아주 세밀하게 구성하였고, 현재와 미래의 리얼리티 방송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지극히 할리우드 방식이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녁놀 천사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정말 오랜만에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읽었다. 지금의 누구처럼 한동안 아사다 지로의 모든 소설이 번역될 정도로 인기 있을 때가 있었다. 아마 그때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웃고, 때로는 눈시울을 붉히고, 어떤 순간은 뭔가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하나 변함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재미였다. 빠르게 읽혔다. 너무 읽다보니 어색한 혹은 과장된 설정이 나왔다. 그럴 때 읽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끝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가독성이 좋고 재미있는 작가다.

이번 단편집은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가 태어난 시기와 상황을 비교해보면 더 알기 싶다. 그렇지만 담고 있는 감성이나 재미는 이전과 별 다른 차이가 없다. 가슴 속에 오랫동안 묵었다가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리움과 사랑과 삶의 한 순간은 정말 일품이다. 그런 점에서 표제작 <저녁놀 천사>의 마지막 장면은 중늙은이의 허세 속에 가려져 있던 속내와 감정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해내었다. 그리고 분코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 왜? 에 대한 답을 구하기보다 자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한다. 알 수 없는 과거보다 추억과 기억 속의 그녀가 더 소중하고, 그녀에 대한 감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우동집 주인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차표>는 할아버지 위층에 세 들어 살던 한 남녀의 이별 속에 성장하는 소년의 모습을 그렸다. 이혼한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와 히로시는 같이 살고 있다. 히로시의 엄마는 재혼을 했고, 그녀와 이어주는 연결로 차표 한 장이 있다. 이 차표는 엄마가 립스틱으로 전화번호를 써준 것이다. 아직 어린 그에게 이 차표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오고, 언제나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한다. 하지만 현실은 학교와 집 주변만 겉돌게 된다. 이때 다가온 야치요 아줌마는 엄마 대신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그리고 여탕에서 만난 반친구 치카코는 동경 올림픽 뒤에 가려진 사람들과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특별한 하루>는 언제일까?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특별한 하루는 꽤 있었다. 하지만 오늘 정년퇴직하는 직장인이라면 어떨까? 분량 면에서 이 단편집에서 가장 길다. 장편으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중간중간 나오는 회상과 기억들이 너무 풍부하고, 그의 삶이 그 시대 직장인의 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초일류 인생이란 범위가 아주 좁게 설정되어 있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선택의 갈림길이 있는 것이다.”(103쪽)란 문장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멋진 표현이고 사실이다. 이런 삶속에서 보내는 그가 바라는 것은 특별한 하루로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마지막 반전이 놀랍지만 그 여운은 찰나를 넘어 한 순간으로, 하나의 삶으로 이어진다.

<호박>은 시골 한 구석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한 남자 아라이와 이제 퇴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형사 요네다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아내와 헤어졌다. 아라이의 아내는 죽었고, 요네다는 이혼했다. 이 둘의 과거를 다루기보다 현재를 말한다. 과거는 현재 속에서 잠시 스쳐지나간다. 물론 현재가 과거의 축적이고, 현재의 그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작가는 이 둘의 만남을 통해 하나의 감정을 토해낸다. 그 매개체로 호박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소재일 뿐이고, 자신들의 삶이 중심에 있다. 진행 중으로 이야기는 끝났는데 다양한 결말이 예측 가능한 열린 구조라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은 사랑 이야기다. 가난해 학교 장학금을 받는 두 학생 이야기다. 학교에서 그냥 장학금만 주면 될 것을 훈시와 잔소리로 밝히고 싶지 않은 가정사를 들춰낸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 가정사가 거짓이란 것이다. 물론 사실도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오자와와 기요타는 이어졌다. 이 연결이 언던 위의 하얀 집 소녀에 의해 깨어지기 전까지 말이다. 작가는 너무나도 다른 두 학생을 등장시키고, 부잣집 딸의 환상과 알 수 없는 의도로 이를 돕는 여자를 중간에 등장시켜 두 삶을 엇갈리게 만든다. 이 엇갈림이 현재로 이어지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실은 안타까움과 분노를 강하게 느끼게 만든다.

이 단편집 중에 자전적이라는 느낌을 가장 많이 주는 작품이 <나무바다의 사람>이다. 자위대 통신병으로 산 속에 훈련을 갔다가 짧은 순간 경험한 것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현재와 과거의 나를 비교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소설가로 성공한 그의 삶을 되짚어 보는 작업이자 또 다른 삶의 전환점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이 바라던 바를 성취한 그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노력을 생각하고, 현실의 삶 속에 그냥 안주한 나를 나란히 놓아본다. 그리고 방을 둘러본다. 비슷하지만 다른 두 방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드룸
크리스 무니 지음, 이미정 옮김 / 리버스맵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첫 장면부터 액션으로 시작한다. 특수기동대의 다비 맥코믹은 마약 카르텔을 위해 돈세탁을 한 플린을 잡기 위해 출동한다. 그는 인질을 붙잡고 있다. 다비는 카르텔로부터 그를 보호해주겠다고 외친다. 하지만 공포에 사로잡힌 그가 그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다비는 플린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멋지게 막아낸다. 그런데 이 장면은 가상의 상황을 연출한 훈련이다. 특수기동대의 힘들고 과격한 훈련을 통해 다비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사전 설정이기도 하다. 

다비는 경찰청 실험실의 반장이다. 그녀가 훈련을 마쳤을 때 그녀의 고향 마을인 벨햄의 마샬 가 주택침입사건 발생 소식이 들어온다. 부엌 의자에 묶인 채로 엄마와 아들이 발견되었고, 엄마는 죽었다. 현장은 유혈이 낭자하다. 현장에 도착한 그녀가 가장 먼저 듣는 이야기는 자신을 둘러싼 남성 경찰들의 음담패설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영화로 만들 때 케이트 베켄세일이 이 역할을 맡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미난 한 컷이 나올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의 모습은 이런 조그마한 일들을 잊게 만들 정도다. 

현장에서 발견된 단서를 좇아 집 뒤로 가는데 핸드폰 소리가 들린다. 집안의 피를 생각하면 다른 시체가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들린 것이다. 핸드폰을 찾아가는데 총알이 날아온다. 섬광탄이 터지고 의문의 사나이들은 시체 등을 끌고 사라진다. 힘겹게 그들을 좇아가지만 놓치고 만다. 그녀도 현장의 경찰들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 사건 후 피해자의 아들이 그녀의 아버지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녀의 아버지는 빅 레드로 불렸던 경찰이다. 하지만 순찰 중 총을 맞고 과다출혈로 뇌사상태에 빠졌고, 결국 죽었다. 그녀는 피해자 소년을 만나러 병원으로 달려간다.

소년은 엄마가 죽는 모습을 보았다. 소년은 극도의 불안감과 불신감에 휩싸여 있다. 오직 죽은 그녀의 아버지 빅 레드와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 빅 레드의 딸임을 증명하면서 소년과 이야기를 시작한다. 죽은 엄마와 어떻게 살았는지, 그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의 본명이 무엇인지 등을 말한다. 그리고 더 큰 비밀을 말하려는 순간 연방수사관이 소년을 데리고 가려고 나타난다. 그녀가 그를 몰아내고 다시 소년과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소년을 총을 꺼내어 자살을 시도한다. 얼마나 많은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 의문이 생긴다. 이 사건은 이렇게 많은 의문과 액션으로 강하게 시작한다.

다비가 이야기의 한 축을 형성한다면 다른 쪽에선 5년 전 남편을 잃은 제이미 루소가 등장한다. 그녀는 전직 경찰이고, 소년처럼 남편과 아이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녀 자신도 총을 맞았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다. 복수를 꿈꾸며 살아가던 그녀가 자신에게 총을 쏜 남자를 발견하고 미행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다 소년과 엄마가 묶인 것을 보고, 집으로 돌격하여 범인들 중 한 명을 죽인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년의 엄마를 구하지는 못한다. 범인 중 한 명을 납치해 다른 동료들의 정체를 밝히려고 하지만 그는 죽는다. 그의 핸드폰을 통해 다른 단서를 따라간다. 그녀는 예상하지 못한 살인을 하는데 이것을 통해 다비가 과거 속 사건의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만든다. 한 마을을 통째로 지배하고, 군림하고, 공포로 침묵하게 만들었던 인물들에게 말이다.

다비는 CSI 시리즈의 반장들 같은 인물이다. 그들처럼 감식반 반장이고, 그들 이상으로 뛰어난 육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자 제임스 본드란 말을 들을 정도다. 그녀의 활약은 치밀한 조사나 추리에 힘입은 것보다 액션에서 더 빛을 발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인정사정 볼 것 없는 대활약과 액션은 그래서 더 강한 인상을 준다. 멋진 여성 주인공이 한 명 더 등장한 것이다. 시리즈로 나와도 좋을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설정한 상황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거침없는 살인과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마을 속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엔 더욱 그렇다. 영화 속 장면을 연상시키는 상황이나 모습이 많이 나온다. 의도적으로 영화를 의식한 것이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감독을 만나면 재미있고 멋진 영화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소설의 완성도에서 조금 부족하다. 소설 앞부분에 공포의 대상을 죽인 것은 좋았지만 이어서 등장하는 배후세력이나 부패세력이 너무 도식적이기 때문이다. 심리적 긴장감을 불러올 장치가 거의 없는 것과 너무 거침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잘 읽히고 통쾌하고 재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