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
러셀 베이커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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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당히 편협한 독서 취향을 지녔다. 자서전이라고 읽은 몇 권은 대부분이 자기 성공담을 다룬 것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성공담이 신나고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그들을 보여주기보다 한편의 시간 때우기 소설로 다가왔다. 대필 작가들이 쓴 글이나 깊이 있는 이야기가 빠진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선택이 나빴거나 그 당시 다른 읽을거리가 없었던 탓도 있다. 아주 정말 가끔 읽는 평전에서도 이런 경향이 보일 때가 있지만 말이다. 

러셀 베이커 자서전을 선택한 것은 한 독자의 “자서전이란 이런 것”이란 글 때문이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이런 종류의 책을 좀처럼 읽지 않던 나에게 이 문장은 강한 호기심을 불러왔다. 1982년 퓰리처상 평전/자서전 부분을 수상했다는 이력은 기존의 편견과 선입견을 깨트리기에 충분했다. 낯선 작가의 글이다 보니 혹시 지루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펼쳐 읽으면서 어린 시절의 러셀 베이커에게 빨려 들어간 것이다. 

처음 저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읽으면서 맹모삼천지교나 한국 엄마들이 떠올랐다. 자식을 성공과 공부를 위해 정성과 노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들을 위해 생활비를 쪼개 최고의 선물을 하는 그녀를 보면서 우리의 어머니들이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이런 어머니에 대한 그의 기억과 추억은 냉정하면서도 사실적이다. 미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너무 현실적이라 오히려 지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고부간의 갈등, 생활고, 연애, 자식의 성장과 성공 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다시 최근 최인호 씨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고 추억한 글들을 연상시켜주었다. 이 둘의 공통점이라면 아버지가 빨리 죽어 어머니가 힘겹게 아이들을 키웠다는 것과 작가가 된 것이다. 

시간적으로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20대 중반까지 다룬다. 자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만 그의 과거를 좇아가다보면 그 시대의 사회 모습을 만날 수밖에 없다. 특히 공황기에 그들의 겪은 고통과 힘겨운 상황은 그 시대가 어떠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불과 백 년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현재와 달라 굉장히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의 풍요는 찾아볼 수조차 없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1차 대전을 비롯한 전쟁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이것은 현재 미국인들이 외국에서 벌어진 전쟁을 보는 시선과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여기엔 현재의 우리도 그런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지만 말이다.

가난은 한 가족이 함께 살지 못하게 만들고, 한 곳에 계속해서 머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이 할머니 곁을 떠나게 만들고, 외삼촌에게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그곳마저 떠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사는 친한 친구와 헤어지게 만들지만 그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깨닫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경제적 상황적 악화가 그들이 혐오하는 삶 속으로 밀어 넣지만 역시 어머니는 자식에게 최선을 다한다. 비록 그 시대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시대적 한계는 러셀과 동생 도리스의 행동과 성격을 대비해도 금방 드러난다. 적극성이나 사업 수단이 더 뛰어난 도리스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직업 선택에 제한이 생기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솔직함이다. 물론 이것을 검증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가 겪은 실패와 불안과 두려움 등은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든다. 적극성을 키우려고 아들을 신문팔이로 만들거나 좋은 성적을 위해 옆에 붙어 공부를 시키거나 좋은 친구를 만나라고 하는 행동들이 우리의 것과 너무 비슷하다. 신문팔이의 경우는 조금 별개지만. 이것은 아마 적극성 외에 경제적인 이유도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부모의 미래가 아이들의 과거”란 말은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문장이다. 이것은 앞부분에 나오는데 어릴 때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성장이란 제목처럼 그가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그 속에서 그가 보여주는 유치하고 비열한 행동들은 아이들이 단순히 과거의 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소년의 성장기로도 읽을 수 있지만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빠르게 읽으면서 한 편의 재미난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것들이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양한 주제들과 역사로 이어지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정말 멋진 자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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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달
얀 코스틴 바그너 지음, 유혜자 옮김 / 들녘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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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작가다. 처녀작인 <야간여행>의 평이 좋아서 이 작품을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화려한 광고 문구는 역시 이번에도 나를 혹하게 만들었다. 유럽 언론이 극찬한 21세기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라니 얼마나 대단한가. 결론만 말한다면 과연 그 정도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이것은 나의 취향과도 관계있다. 하지만 추리소설로 읽지 않고 두 남자의 심리를 그린 소설로 읽는다면 또 다르다. 그들이 느낀 상실감과 두려움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킴모 요엔타가 아내 산나의 죽음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녀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란 생각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의 추억과 아픔을 껴안고 살아간다. 그녀의 죽음이 확정된 순간에도 킴모는 예상했던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이 거대한 상실감은 그의 삶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미래이기에 그 충격은 더 커다. 이렇게 킴모의 상실감과 방랑과 혼돈을 섬세하게 보여주면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킴모의 심리와 행적을 따라가는 도중에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베사 레무스. 한 가정집에 피아노 조율을 한 후 열쇠를 들고 나온다. 밤이 된 후 그 집을 찾아가 오야란타 부인을 베개로 질식시켜 죽인다. 첫 살인이다. 이 살인은 그에게 이전에 가지지 못했던 자신감을 가져다준다. 동시에 이것은 두려움에 의해 벌어진 살인이다. 살인으로 그는 자신감을 가지지만 두려움은 곧 되살아난다. 이제 자신도 제어하기 힘든 상태로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연쇄살인범들이 반복 살인을 하면서 결국 잡히는 것을 생각하면 그 결말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 하지만 이 결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킴모는 형사다. 아내의 죽음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그가 다시 현장에 복귀한 것은 아내의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해서다. 충격적인 죽음으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에게 맡겨진 일이 바로 오야란타 부인 살인사건이다. 이 부인의 남편을 만났을 때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이것은 다시 뒤에 가서 반장과 연결된다. 이런 상실감과 사랑과 두려움은 이 소설에서 가장 깊게 다루는 주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스호스텔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 연쇄살인사건이다. 하지만 서장에겐 국회의원 살인미수사건이 더 비중 있는 사건이다. 제3의 피해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들은 별개의 사건으로 취급한다. 킴모 형사를 제외하고 말이다.

만약 이 소설에서 에르큘 포아로나 셜록 홈즈나 CSI 같은 인물을 기대했다면 빨리 포기하는 것이 좋다. 영미 형사소설처럼 액션과 총격전을 기대했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화려한 수사기법으로 범인을 찾아내지도 않고, 미친 듯이 범인을 쫓는 열혈형사도, 범인이 남긴 단서나 살인방식을 보고 범인상을 추론하는 프로파일러도 없다. 다만 아내를 잃고 그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려는 형사와 가정사 때문에 역시 고민하는 형사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두려움과 자신감이란 두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 범인이 등장한다. 

이렇게 적고 보면 상당히 지루하거나 심심한 이야기인데 생각 이상으로 가독성이 좋다. 그들의 심리를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상실과 두려움은 호기심을 불러온다. 화려함이 사라진 자리를 섬세하고 깊이 있는 심리묘사가 자리 잡았다.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상실과 두려움을 말이다. 그래서 이 감정들이 어느 순간은 피상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긴박함은 없지만 간결한 문장과 내면으로 파고드는 심리묘사와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빠르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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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의 복음
톰 에겔란 지음, 손화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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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권의 기독교 팩션이 나왔다. 그 무엇보다 표지가 인상적이다. 처음엔 동일한 제목의 다른 소설과 착각했다. 하지만 책 소개를 읽으면서 다른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작가 소개를 보니 <요한 기사단의 황금상자>란 팩션이 우리나라에 출간된 적이 있다.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인데 관심이 생긴다. 북유럽 지적 독자들 사이에 루시퍼 신드롬을 일으킨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루시퍼에 대해 단순한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는 나에게 많은 정보를 주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야기는 두 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2009년 현재 시간 흐름을 따라가는 비외른 벨토와 1970년 지오반니 노빌레 교수다. 근 40년의 시간 차이가 있는데 이 둘을 이어주는 것이 있다. 바로 루시퍼 복음이다. 이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의 부탁으로 이 복음서를 얻게 되는데 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위험한 상황에 말려들어간다. 벨토는 이 복음서를 전해준 사람과 같이 연구하기로 한 사람이 살해되고, 노빌레 교수는 딸이 납치당한다. 살인과 납치라는 두 소재를 바탕으로 루시퍼 복음에 대한 이야기는 시작한다.

처음은 기독교 팩션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흘러간다. 우연히 자료를 얻고, 이 자료를 빼앗으려는 단체가 등장하고,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달아나면서 그 자료를 조사하는 그 방식 말이다. 이것은 벨토의 시간 속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그 사이사이에 드러나는 루시퍼와 사탄과 지옥에 대한 지식과 해석은 학문적 영역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이 가진 사탄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중세교회에서 만든 것이라고 할 때 놀라게 된다. 다른 팩션에서 워낙 강한 내용을 보여줘 조금 무덤덤한 부분도 있지만 작가는 이런 식으로 기존 기독교의 믿음을 하나씩 바로 잡는다. 교회가 권위를 세우고 권력을 잡기 위해 어떤 식으로 현재 속에서 과거를 바꿨는지 보여준다. 

사실 이 소설에서 기대한 것은 두 가지다. 루시퍼의 복음을 둘러싼 신학적 역사적 해석과 이 문서를 둘러싼 스릴러다. 첫 번째 기대는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종교학과 고고학, 천문학과 지리학, 세계 각 문화의 종말론을 적절하게 섞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시대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다른 해석의 길을 열어놓았다. 하지만 마지막 결론 부분을 읽으면서 아쉬움을 느꼈다. 이전에 <오메가 스크롤>이나 그레이엄 헨콕의 책에서 본 내용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또 이것이 스릴러로 읽기를 원하는 독자에게 <다빈치 코드>가 마지막에 준 허무감을 떠올려주지 않을까 의문이다.

스릴러라는 부분만 떼어놓고 본다면 이 소설은 낙제다. 일단 긴장감이 거의 없다. 제례 살인이 끔찍한 장면을 연출하고, 주인공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만들지만 쫓기는 자의 긴장감이 살아있지 못하다. 특히 루시퍼의 복음을 두고 벌어지는 두 조직의 대결이 너무 한 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운 것이나 한쪽의 손을 너무 쉽게 든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 벨토의 모험이나 활약이 이야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지 못하고 너무 무력하다. 즉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 다닌다는 의미다. 또 하나 작가가 반전을 노리고 깔아놓은 정체도 중간에 너무 쉽게 드러난다. 다른 인물이기를 살짝 기대했는데 반전은 없었다.

좀더 새롭고 강한 충격을 기대한 나에게 이 소설은 조금 미흡하다. 아마 다른 책에서 이와 비슷한 결론을 먼저 본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다빈치 코드>처럼 빠른 전개와 강한 모험을 원했는데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분의 이까지는 정말 흥미로웠다. 적들의 강력한 공격과 반전을 기대했는데 벨토가 가담한 조직의 힘이 너무 거대하다. 오락적인 힘이 조금 떨어지지만 기독교 팩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매력있다. 가독성 있는 문장과 이야기는 책을 빠르게 몰입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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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이야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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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SF 걸작선들을 읽으면서 인간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거대해질 수 있는지 보았다. 그 거대함과 기발함과 환상들은 그후 읽은 작품들을 평범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읽으면서 기발하고 독창적이라고 칭찬할 때 이미 더 큰 것을 본 나에게 그냥 평범하게 다가왔다. 재미는 있지만 엄청난 작가로 평가받는 것에 반감이 생긴 것이다. 이번 작품도 혹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가는 거대함이나 독창적임을 강조하기보다 기묘함으로 다가왔다. 서문부터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환상, 기담으로 예상하지 못한 재미를 준다. 사실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난해하고 지루한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모두 열네 편이 실려 있다. 서문도 하나의 이야기로 본다면 열다섯 편이다. 각 단편이 길지 않는데 그 짧은 이야기 속에 담긴 놀랍고 기묘한 이야기는 사람을 책 속으로 쉽게 끌어당긴다. <밀감>이 첫 예상과 다르게 이어지면서 기괴함을 넘어 섬뜩함을 전해주고, <아르헨티나 주교>에서도 역시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이어진다. 어느 날 거리와 상관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의 심리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지금은 모두 죽어버린 몇 작가에 대하여>에선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설명들이 정말로 그런 책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자아낸다.

<착각의 나라(야푸족은 어떻게 말하는가)>는 논리와 수학의 정밀함을 추구하는 우리 삶을 비틀어 비판하고, 자연에 대한 인류의 재앙을 역설적으로 다룬 <기름 바다>는 인간의 욕망을 터무니없는 희망에 비유하고 다시 그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뒤섞인 사랑>은 정해진 일정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한 남자의 양심이 환상과 결부되어 빚어내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유럽과 기타 지역의 음악 비평 몇 편>은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생기고, 곧바로 만약 가능하다면 어떤 음악일까 하는 호기심을 자아낸다. 

어쩌면 가장 읽기 편하면서 익숙한 이야기가 <살인청부업자의 추억>이다. 제목 그대로 살인청부업자의 추억을 하나씩 다룬다. 그의 직업관과 양심과 욕망이 간결한 이야기 속에서 청부대상들의 욕망과 뒤섞이면서 풀려나오는데 재미있다. <수첩>은 남의 것이 커 보이는 한 남자가 유명한 작가의 수첩에서 아이디어를 훔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데 마지막 반전이 웃음과 씁쓸함을 준다. <기상천외한 피에르 굴드>는 한 편의 콩트를 읽는 것 같다. 그 간략함 속에 담긴 유머와 해학은 순간순간 웃게 만든다. 

알에 그림을 그린다는 특이한 인물보다 그가 마지막에 그린 알의 비밀과 의문이 더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 <희귀조>다. 과연 그 알의 정체는 무얼까? 혹시 박혁거세처럼 그 속에 위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멋대로 상상해본다. <영원한 술판>은 술꾼들이 외치는 즈벡에 대한 비밀을 파헤친 소설이다. 만약 이런 술이 실제 존재한다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무서운 무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과 나도 과연 마시게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마지막 표제작 <육식 이야기>는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지만 마니아의 광기와 한 통의 편지가 알려주는 사실들이 뒤섞여 낯익은 결말로 인도한다. 

가끔 유럽 환상소설을 읽을 때 지루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은 아니다. 피에르 굴드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정체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지 의문이 생긴다. 기묘함 속에 블랙유머와 깊은 사색이 담겨 있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야기에 맞춰 변하는 문장은 지루함을 들어내고, 많지 않는 분량은 쉽게 집중하게 만든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있다고 하는데 그 책은 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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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연금술
캐럴 맥클리어리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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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작가를 주인공으로 한 팩션들이 많이 나온다. 당장 생각나는 인물만 해도 단테, 프로이트, 오스카 와일드, 마키아벨리 등이 있다. 이런 유명인은 금방 알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넬리 블라이는 조금 낯설다. 그런데 이 여자의 행적을 보니 대단하다. 19세기 후반임을 생각하면 현대 여성 이상의 대활약을 보여준다. 물론 시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 활약만으로 충분히 멋지고 매력 있다. 그녀의 대담함과 모험심과 시대 여성이 지닌 한계는 그래서 이야기 속에 더 빠져들게 한다.

넬리가 조금 덜 유명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다른 유명 인물들이 있다. 이제는 우유 상표로 더 유명한 루이 파스퇴르, 모든 환상 모험 소설가들이 존경한다는 쥘 베른, 파란만장한 삶과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 등이 그들이다. 작가는 이들을 19세기 만국박람회가 열렸던 파리를 배경으로 엮었다. 물론 이들을 하나로 모이게 하는 인물은 넬리 블라이다. 그녀의 직업은 신문 <월드>의 기자이고, 신문사의 주인은 지금은 상으로 더 유명한 퓰리처다.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신문기자가 되었고, 먼 파리까지 와서 살인자를 좇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작가는 작가나 과학자 외에 또 한 명의 실존인물을 등장시킨다. 그의 별명은 잭 더 리퍼다. 그는 19세기 런던 매춘부 연쇄살인자다. 그에 대한 영화도 이미 나와 있고, 수많은 상상력과 추리의 결과 외과의사 출신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자를 작가는 상상력으로 재구성했다. 그리고 왜 그녀가 그를 좇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이 그 정체를 몰랐던 살인마 잭 더 리퍼를 넬리는 대양을 건너서 쫓는다. 그 시대 사람들이 여자를 단순히 남자의 부속물 존재로 생각하던 시기에 말이다.

이야기는 매혹적이면서도 답답한 부분이 있다. 매혹적인 것은 역시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해서 그 시대와 역사를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것이다. 그들이 시대를 뛰어넘는 활약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넬리를 통해 그들의 실제 같은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에 그 시대에 이미 돌연변이 같은 인물인 넬리 블라이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변할 시대의 미래 모습을 살짝 드러낸다. 그녀의 저작물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녀를 평가해야할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소설 속 기록만 보아도 충분히 뛰어나고 용감한 기자다. 시대물의 여주인공으로 멋진 여성이 등장했다.

답답한 부분은 이런 그녀에 대한 주변 남자들의 평가와 그 시대가 지닌 여성의 한계다. 탁월한 그녀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진 선입견과 편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여자 주인공이 남자보다 더한 액션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은데 그녀는 연약한 여성 그 자체다. 이런 점은 어떤 면에서 고증에 충실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쥘 베른이나 오스카 와일드 등도 홈즈 같이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지 않아 아쉬움을 준다. 다르게 본다면 굉장히 현실적인 인물 묘사다. 파리의 풍경은 가끔 만나게 되는 화려한 영상으로 포장한 모습에서 과장된 포장을 벗겨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도마뱀처럼 자신의 꼬리를 짜르고 달아난 연쇄살인범을 쫓는 것이 기본 줄거리다. 그 과정에 만나게 되는 인물들과 상황들은 역사의 충실한 고증이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자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중간에 살인마와 무정부주의자를 연결한 부분에선 그녀의 역사 인식을 알 수 있다. 솔직히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나 자신이 그 시대 역사를 제대로 몰라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앞으로 공부해야 할 부분이 또 하나 나왔다. 그리고 과학과 역사, 미스터리의 가장 매혹적인 만남이란 광고 문구에 고개를 끄덕인다. 살짝 ‘가장 매혹적인’이란 수식어에 갸웃거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새로운 모험과 도전 이야기가 기다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음 이야기엔 또 어떤 유명인이 나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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