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드 노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말랑말랑한 소설이다. 거기에 풋풋한 사랑 이야기와 미스터리가 살짝 곁들여져 있다. 교대 2학년이자 4차원 소녀로 불리는 가에의 꿈과 희망과 사랑이 잘 녹아 있다. 이야기는 가에의 시간으로 흘러가면서 그 사이에 그녀가 발견한 노트를 통해 이부키 선생의 삶이 살짝 드러나는 방식이다. 대학생을 통해 장래를 고민하게 만들고, 어느 날 다가온 사랑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이 모든 행동과 심리 속에 깔려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과 이해다. 그리고 열정.

이부키 선생의 일기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 일기를 통해 그녀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조금은 알게 된다. 그리고 가에의 현실로 돌아온다. 첫 장면은 가에가 사는 맨션을 올려다보는 한 남자다. 그 남자의 외모와 분위기가 꽤 괜찮게 느껴진다. 혹시 창문에 있는 화분을 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밖을 보는데 바람의 장난으로 브래지어의 컵 일부가 보인다. 이 순간 그 남자는 음탕한 변태로 바뀐다. 무엇을 보는냐에 따라 로맨티스트와 변태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조그만 만남과 시선은 이 소설에서 가장 먼저 나왔고 가장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이런 얼핏 지나가는 듯한 장면을 통해 아주 중요한 인연의 시작을 알린다.

가에는 문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 소설이 지닌 매력 중 하나가 만년필인데 그녀가 근무하는 곳에서 만년필을 판다. 그냥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한정판으로 제작해서 팔기도 한다. 실제 나 자신이 만년필을 사용한 것이 중학생 때가 마지막이다. 그 당시 만년필을 사용하는 것이 조금은 유행이었기에 그렇게 비싸지 않은 것을 하나 샀다. 꽤 오랫동안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중고등학생이 만년필로 공부하기에는 조금 번거롭다. 그 후 나의 필기구는 볼펜과 샤프였는데 이것은 대부분 학생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다보면 만년필이 지닌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한 번 사용해봤기에 더욱 그렇다. 엄청 비싸다는 것과 거의 필기를 할 일이 없다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 열망이 조금 가라앉는다. 

갑자기 만년필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는데 그것은 만년필이 가에의 사랑을 엮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이시토비 류사쿠, 26살의 일러스트레이터다. 가에도 처음부터 만년필을 팔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문구점이 만년필 이벤트를 펼치면서 그녀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이때 새로운 그림 도구를 찾아서 그가 나타났다. 만년필로 처음 그린 것이 고양이인데 보통 사람들이 글자를 쓰는 것과 조금 다르다. 처음엔 그냥 만년필 한 자루 팔아야지 하는 마음이 강했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마음이 그에게 머문다. 반대로 그녀에게 달려드는 남자도 한 명 있다. 그는 미국 유학 간 친구 하나의 남친 가시마 씨다. 

보통의 연애소설이라면 삼각관계를 만들고 밀고 당기면서 애정을 꼬아갈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다. 친구의 남자친구는 관심이 대상이 아니다. 그 남자도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드라마의 열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현실적인 설정이다. 이런 관계 속에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고 걱정하는 그녀에게 우연히 발견했지만 그냥 놓아두었던 이부키 선생의 노트는 삶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녀의 일기를 통해 이부키 선생의 교사 생활과 사랑을 엿보게 된다. 

교사 이부키는 정말 보고 있으면 대단하다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열린 마음, 철저한 준비, 끊임없는 노력과 애정 등이 잘 녹아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나의 나쁜 마음 때문이다. 이 교사도 20년 정도 지나면 그냥 보통의 교사처럼 월급쟁이의 일상으로 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진짜 그렇게 된다고 해도 일기 속에 나와 있는 교사로서의 삶은 박수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가에가 장래 진로를 교사로 정하게 되었지만.

한 여자로서 이부키는 그냥 평범하다. 연애 문제에 있어서는 교사 때보다 소극적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를 두고 다른 여자와 경쟁해야할 때는 더욱 더.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가에의 상황과 비슷하게 풀어내면서 두 여자의 사랑을 한발씩 나가게 만든다. 먼저 한 발을 내딛는 것은 이부키다. 그녀의 용기와 열정에 감동받은 가에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두 여자를 내세워 그 속에 담겨 있는 강한 열정과 사랑을 하나씩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잔잔하지만 강한 여운을 남기면서 이끌고 나간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담담한 것이 아닌가 걱정할 정도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한때 읽고 싶었던 미스터리 소설의 작가다. 선이 굵은 작품을 쓴다면 평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 소설은 정말 정반대의 문장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잔잔한 속에 담아놓았다가 마지막에 풀어놓는 미스터리다. 이 반전을 미스터리로 보아도 전혀 지장이 없을 것 같다. 작가의 돌아가신 큰누나의 유품을 바탕으로 썼다고 하지만 그 재미와 유머와 열정은 오롯이 작가의 공이다. 그리고 4차원 소녀 가에의 사랑을 응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난 유령들 펠릭스 캐스터 3
마이크 캐리 지음, 김양희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펠릭스 캐스터 시리즈 3권이다. 저자 소개글을 보면 총 6권으로 마무리될 모양이다. 현재 5권까지 출간되었고, 올해 중에 마지막 권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아마도 내년 말 정도면 마지막 이야기가 번역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해본다. 책 표지가 무지개 색으로 나온다고 한 것을 생각하면 7권으로 끝내주었으면 하지만 작가가 이런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 제목을 보고 유령들이 되살아나 더욱 혼란스러운 세상을 그려내면서 더 큰 규모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도 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작가의 치밀한 구성과 전개를 생각하면 조금은 터무니없는 상상이다.

동료 퇴마사 존 기팅스의 장례식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엄숙해야 할 장례식에 한 변호사가 끼어들면서 조그만 소동이 발생한다. 그것은 기팅스가 죽기 전에 화장해달고 유언했다는 것이다. 존의 아내 칼라는 말년의 그가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었기에 그것은 고인의 올바른 의도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일단 장례식이 마무리되지만 캐스터가 그 집을 찾아갔을 때 폴터가이스트가 된 존을 마주하게 된다. 퇴마술로 그를 잠재우지만 그가 자살하기 전에 한 이상한 행동에 의문을 가진다. 칼라는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화장에 대해서는 펠릭스에게 위임한다. 

잰 헌터라는 여자가 의뢰인으로 찾아온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강간 살인 혐의로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모든 상황이나 정황 증거가 남편이 범인임을 가르키는데 한 통의 전화가 이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든다. 그것은 40년 전에 죽은 여자가 실질적인 범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증거로 사체에 남겨진 상처가 40년 전 미국의 연쇄살인자였던 미리엄의 독특한 표식이었다는 것이다. 그후 벌어진 몇 건의 살인사건도 이와 비슷한 상처를 남겨놓았는데 모두 미리엄이 죽은 후 저지른 범죄라고 주장한다. 일반 미스터리 소설이라면 누군가의 모방범죄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소설은 그것이 가능한 판타지 소설이다. 바로 여기서 새로운 가능성과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냥 평범한 자살사건 같았던 것이 복잡하게 엮이기 시작하는 것은 존이 남긴 유물 속에 나온 메모 때문이다. 변호사를 만나 화장에 동의하고 진행하지만 왠지 모를 찜찜함이 남아 있다. 여기에 잰의 의뢰 속에 조그만 허점이 보인다. 잰의 남편 더그가 희생자 바너드와 성관계를 맺었고, 몸에 정액을 남겨놓아 같이 있었다는 상황 증거를 만들지만 가장 중요한 살인무기 장도리가 사라진 것이다. 그가 온몸에 피를 묻히고 거리를 방황하다 잡혔을 때도 그것은 없었다. 또 살인이 있던 시간에 그 방에 두 사람 외에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는 청소부의 증언도 있다. 가장 쉬운 것은 빙의에 의한 살인인데 소명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반가운 인물이 엮여 있다. 그 중 한 명은 전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형사 콜드우드고, 다른 한 명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몽마 줄리엣이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 두 사건이 각각 이야기의 축으로 작용하는 와중에 전편에 나온 악마주의 무리가 그를 공격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죽을 수 있을 정도다. 틴휘슬로 뛰어난 퇴마 실력을 보여주는 그지만 육체적인 능력은 사실 조금 평범하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적들 중에 루가루나 악마 계열도 있는데 제대로 준비하지 않거나 조금만 방심해도 그들에 의해 한조각한조각 찢어질 수 있다. 물론 이런 적들과의 싸움이 긴장감과 흥미로움과 즐거움을 많이 주지만 말이다. 이 시리즈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적들과의 싸움과 기존 등장인물의 재활용과 새로운 적의 등장으로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점이다. 

판타지의 외피를 입은 추리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영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미국까지 간다. 바너드 살인사건에 미리엄이 연관되어 있기에 단순한 책 속 이야기에만 의존해서는 그 실체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생각은 맞았다. 미리엄이 자란 마을을 방문하고, 그곳 신문기자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동생과의 만남이다. 이 만남을 통해 미스터리의 한 부분을 벗겨내게 된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앞으로 자주 캐스터가 해외로 나가는 것은 아닐까 기대하는 것이다.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캐스터가 점점 더 많은 고생을 한다는 것이다. 줄리엣의 비중도 점점 많아지는데 개인적으로 반가운 일이다. 600쪽이 넘는 분량 속에 다양한 인물들을 전편부터 이어서 풀어내는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로 전체적인 틀을 짜는 그의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그냥 스쳐지나가도 될 부분이 혹시 다음 이야기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게 한다.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만나는 지점에서 의문이 하나씩 풀리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의문과 비밀이 숨겨져 있다. 중간중간 보여주는 액션으로 지루함을 들어낸다면 유령이나 악마의 등장은 또 어떤 존재가 등장할까 기대하게 만든다. 여기에 미스터리 구조로 이야기를 이끌고 풀어내는데 언제나 힘겹게 사건을 해결하는 하드보일드 방식으로 재미를 더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8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내 기억 속에 누군가를 왕따로 만든 적은 없다. 하지만 이 기억은 나만의 것이다. 혹시 누군가가 학창시절 나를 비롯한 누군가에게 왕따를 당했다면 나의 기억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학창시절 한때의 오락거리였을 왕따가 그 대상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었을 텐데 가해자들은 그냥 한때의 지나가는 바람처럼 잊고 만다. 아니면 가끔 그 당시 자신들의 행동을 그냥 단순한 장난 정도로 치부한다. 이런 입장이 왕따 문제를 왜곡하고 축소한다. 그리고 이 왕따 당하는 학생을 대하는 교사와 주변 학생들의 태도도 딱 그 정도에 머물고 있다. 이 소설 속에도 나오듯이 왕따로 괴로워하던 학생이 자살한 이유를 잘 모르는 것처럼 대응하던 교사들과 반 친구들의 반응에서 알 수 있다. 

왕따를 당해보지 않은 나에게 왕따 문제는 개인이 극복해야할 문제였다. 이런 입장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이 십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 같다. 아마 그 당시는 나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시발점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단련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던 시기였다. 하지만 왕따 관련 소설과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왕따로 괴로워하는 학생과 그 부모를 대하는 교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폐쇄적인 학교가 얼마나 이기적인 공간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왕따를 결국 피해자가 풀어야 하는 문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따 당하는 학생의 나약함과 용기 없음을 질타하는 그들의 말에서 그 어떤 기대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이런 교사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실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듣고 상담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교사 이야기를 들은 적도 많기 때문이다. 

왕따 이야기를 길게 먼저 쓴 것은 이 소설이 왕따 당하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사팔뜨기 눈을 가진 ‘나’는 정말 악질적인 왕따를 당한다. 단순한 따돌림이나 조그마한 구타 정도가 아니라 화장실 물을 마시고, 분필을 먹고, 배구공을 쓰고 축구공처럼 맞는 등의 악질적인 놀이 대상이 된다. 이렇게 당하는 것을 보면 먼저 왜 바보처럼 당하고만 사냐? 고 묻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개인의 노력으로 풀릴 수 있다면 세상에는 왕따로 고민하고 자살하는 학생들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미련하고 바보 같은 이들의 행동을 욕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용기도 대단하다. 가장 쉬운 도망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지마가 왕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왕따 당하는 소년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해진다. ‘우리는 같은 편이야.’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니노미야 패거리의 장난은 아닌 것 같다. 편지는 계속 전달되고, 이것을 은근히 기다리게 된다. 5월 어느 날 편지에는 만나고 싶다는 말이 적혀있다. 누군지 궁금하다. 시간을 맞춰 나간다. 그곳에서 그는 역시 반 여학생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고지마를 만난다. 이렇게 반에서 왕따를 당하는 두 소년소녀가 만났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가 당하는 왕따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 누구도 제대로 들어준 적이 없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이 둘의 진솔하고 푸른 우정은 왕따의 괴로움도 잊게 만들 정도다. 하나의 새로운 변화가 오기 전까지는.

열네 살의 ‘나’와 고지마는 아직은 불안정한 시기에 살고 있다. 화자가 친구들의 악질적인 장난에 코뼈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으면서 이 불안과 공포는 점점 커진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고지마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을 정도다. 잠도 제대로 오지 않고 학교 수업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이때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니노미야 패거리 중에서도 조금 특이한 모모세와의 대화는 강자의 이기주의적 궤변으로 가득하지만 왕따 문제를 어쩌면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모르겠다. 특히 모모세가 사시 때문에 왕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화자가 느낀 감정은 정말 복잡하다. 열네 살 소년이 그 궤변을 이해하는 것이 무리인 것처럼 말이다.

조그만 틈이 언제나 큰 벽과 거리를 만든다. ‘나’의 무응답이 고지마로 하여금 더욱 자신을 학대하는 쪽으로 몰고 간다. 불쌍한 아빠를 위해 씻지 않았기에 왕따를 당했는데 이제는 먹는 것마저 줄이고 있다. 자신을 학대하고 이런 자신의 감정을 화자가 이해주길 바란다. 이 둘의 사이가 더욱 벌어지는 것은 나의 사시에 대한 입장 차이다. 고지마는 사시가 그를 규정해주는 것이기에 그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집착한다. 단 하나 있는 친구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고민하는 화자의 내면은 복잡하다. 이런 고민 중에 발생하는 사건 하나는 이야기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이 파국을 통해 모든 사태의 진실이 밖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나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왕따 문제는 해결되었나 하고.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런던 대로
켄 브루언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빌리 와일더 감독의 기념비적인 고전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1950년 작)를 모티브로 새롭게 각색하여 소설로 만들었다. 예전에 한창 영화를 볼 때 이 영화를 구해 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비디오를 구하지 못해 안타까워했는데 어느 날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하지만 이때도 나의 나쁜 버릇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손에 비디오가 들어오자 앞부분만 조금 보다가 그만 둔 것이다. 소장용으로 고이 모셔둔 채로 말이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비디오도 고장이나 볼 수도 없지만.

이 소설도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해설을 보니 원작과 상당히 다르다고 한다. 당연히 <선셋 대로>와도 다른 부분이 많다. 시대의 변화와 작가의 취향과 특색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은 모양이다. 하지만 기본 골격은 오마주란 표현을 사용할 정도니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예전에 본 <선셋 대로>의 도입부와 이 소설의 도입부는 상당히 다르다. 그 차이가 앞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많은 변화의 시발점으로 작용한다. 원작 영화에 대한 흐릿한 기억과 비교해도 너무 다르다. 읽으면서 원작 영화보다 예전에 본 영국 누아르 영화가 더 많이 떠오를 정도로 말이다.

미첼이 교도소에서 출소하면서 시작한다. 폭행죄로 그는 감옥에 3년 있었다. 그런데 출소하는 날 거리의 부랑자에게 거침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시한폭탄 같은 느낌을 준다. 노숙자 조에게 잡지를 한 권 사고 녹턴이 소개한 집으로 들어간다. 멋진 아파트다. 좋은 옷과 책들이 가득하다. 대부업을 하는 녹턴이 빚 대신 압수한 집이다. 불법과 폭력의 냄새가 풀풀 난다. 녹턴은 미첼에게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한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도와준다. 이 일 때문에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고, 난폭하고 끔찍하고 잔인한 암흑가의 삶이 조금씩 드러난다. 

녹턴의 일을 돕는 것이 불법이라면 그가 은퇴한 여배우 릴리언 저택에서 잡역부로 일하게 된 것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평온한 잡역부로 그냥 놓아두기에는 그가 지닌 능력이 범상하지 않다. 그리고 얼마 후 노숙자 조가 폭행을 당해 죽는다. 이 일은 그의 감정을 건드린다. 시에서 해주는 화장 대신 자비를 들여 매장을 하고 시간이 나면 묘지를 방문한다. 조에 대한 그의 감정은 여동생 브라이어니를 제외하면 가장 친밀한 것이다. 가족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미첼의 감정을 풀어내는 창구 역할을 맡는다.

처음에 이 책을 들고 읽기 전만 해도 상당히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상당히 머리가 복잡하고 감정이 엉망진창으로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결하고 힘 있는 문장과 개성 강한 캐릭터 덕분에 쉽게 몰입했고 빠르게 읽었다. 거침없는 표현과 행동은 간결한 문장과 만나 캐릭터를 더 부각시킨다. 잘 기억나지 않는 영화와 비교하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은 날아가고 미첼에게 집중한다. 상황이 빠르게 변하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행동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는다. 상황과 분위기가 계속해서 긴장감을 주기 때문에 다음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소설 속에 나오는 수많은 추리소설과 음악들은 낯설음과 반가움을 교차하게 만든다. 제대로 목록이 만들어지고 번역된 것 중 읽지 않는 책이 있다면 읽어 보고 싶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서 강렬함을 품어내는 미첼에 결코 지지 않는 존재가 있다. 그는 바로 릴리언 저택의 집사 조던이다. 처음엔 그냥 조금 깐깐한 보통의 집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미첼 주변에 사건이 발생하면 할수록 이 집사가 보여주는 행동과 능력이 돋보인다. 어느 순간에는 오히려 미첼이 평범해보일 정도다. 그가 있기에 핏빛 오마주가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미첼과 관련된 이야기 속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미첼을 둘러싼 여자들이다. 여동생 브라이어니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고 좀도둑질에 능숙하다. 그의 유일한 혈육이자 약점이다. 그와 정사를 나누는 두 여자 릴리언과 애슬링은 성욕과 사랑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그가 지닌 윤리관을 그대로 대변한다. 이 소설은 이런 관계들을 간결한 문장과 하드보일드 문체로 거침없이 표현하고 보여준다. 잔혹한 핏빛 묘사에 거부감이 없다면 광기와도 같은 그들의 행동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주가족 미끄럼대에 오르다
기노시타 한타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악몽 시리즈 2편으로 나를 사로잡은 작가다. 첫 작품 <악몽의 엘리베이터>는 연극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악몽의 관람차>는 정말 멋진 구성과 재미로 이 작가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이런 기억을 가지고 읽은 이번 작품은 처음부터 조금 황당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 황당함은 의도적인 것이지만 3류 포르노 소설의 그것과 너무 닮아 있어 놀랍다. 이어서 하나씩 나오는 비밀과 설정과 전개는 그 황당함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놀랍고 신기하고 황당한 전개와 용기다. 그런데 이런 황당함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순간 과연 어디까지 갈지 기대하게 된다.

소설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은 붕괴 직전의 오노다 가족들이 가족여행을 가던 중 탄 차가 사고 나는 순간까지의 이야기고, 다음은 그 후 그 가족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사고 장면에서 시작하여 각자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오노다 가의 가정교사를 하는 한나에게로 금방 넘어간다. 한나는 혼혈에 멋진 몸매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학생인 열일곱 살 아유무가 요구한다고 그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한 번의 관계는 협박 등으로 두 번으로 이어지고 일상으로 변하는 지경까지 도달한다. 이때 아유무가 황당한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가 여대생에게 실연을 당했는데 위로차 가족여행을 간다는 것이다. 엥! 그것도 엄마가 주도해서 말이다. 도대체 이 가족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황당함 그 자체다.

아버지 겐키, 어머니 치사토, 누나 유비코, 아유무, 한나까지 다섯 명이 한 차를 타고 여행을 간다. 목적지는 일본에서 제일 긴 미끄럼대가 있는 곳이다. 이 여행을 가는 도중에 이 집안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여럿 등장한다. 치사토의 위선적인 행동과 유비코의 놀라운 살의와 함께 돌출되는 행동까지. 모녀 사이에 맺어진 협정을 통해 이 여행의 목적이 드러날 때 황당함은 섬뜩함으로 변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섬뜩함을 지워버리고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분위기를 바꾼다. 그가 바로 유비코의 세 번째 남편 구루마다 마사오다. 그의 등장은 유비코에 의해 의도된 것이지만 사고는 그의 과도한 열정에서 비롯한다. 그도 오노다 가족 이상의 폭주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족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평범이란 단어를 적용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밖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숨겨진 의도가 곳곳에 깔려 있고, 그 의도와 행동은 일반적인 예상을 초월한다. 또 작가의 특기인 무의미하게 등장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설정은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단순한 우연처럼 보였던 만남이 의도된 것이고, 그 의도는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조금 억지스러운 설정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애초부터 폭주가족이란 설정을 하면서 막장 가족의 진수를 보여줄 작정을 한 듯하다. 그리고 실제 이것을 이야기 속에 구현하면서 마지막까지 황당함을 뛰어넘는 웃음을 준다. 

앞부분에 나오는 이 막장 가족의 속내가 불편했다면 뒤에 나오는 폭주 가족애는 예상하지 못한 감정이다. 무책임하고 난봉꾼인 아버지 겐키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뭉치는 모습은 공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일지도 모르지만 가족 구성원들 가슴 한 곳에 잠재되어 있던 감정을 끌어내놓은 것이다. 구루마다와 유비코의 일탈과 폭주하는 관계는 소설 후반부의 재미를 책임지는데 순수한 집착이 폭력으로 발전할 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잘 그려낸다. 거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과 이야기는 역시 황당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는 변하지 않는다. 이 폭주가족의 황당한 속내와 행동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사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생략한다. 읽게 되면 이해할 것이다. 악몽 시리즈가 3부작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머지 한 편은 언제 나오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