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잠 재의 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0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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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로 시리즈 번외편이다. 대부분 번외편처럼 이 소설도 시리즈 중에 등장하는 사람 중 한 명이 주인공이다. 놀랍게도 그 주인공이 무라젠이다. 미로 시리즈에서 어떻게 보면 미로보다 더한 존재감을 보여준 그 말이다. 무라젠이 등장한다는 사실도 흥미로운데 이 이야기엔 미로도 깜짝 출연한다. 비록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는 정도지만. 그리고 현재가 아닌 과거로 돌아가서 무라젠이 왜, 어떻게 야쿠자 조사 탐정이 되었는지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품어져 나오는 무라젠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이 번외편을 시리즈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로.

때는 도쿄올림픽을 1년 앞둔 1963년 9월. 그 당시 무라젠은 일본에서 지금은 사라진 직업 '특종꾼' 시절이었다. 사실 이 특종꾼과 특종을 터트리는 르포라이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주간지에서 일하면서 기사를 썼다. 9월 5일 저녁 8시 좋아하지 않던 지하철을 타고 가던 무라젠 근처에서 폭탄이 터진다. 일본 범죄사의 대표적 미해결 사건인 소카 지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특종꾼답게 금방 소카 지로 사건을 떠올리지만 현장에 도착한 형사 이치카와에 의해 현장에서 쫓겨난다. 이 사건을 <주간 담론> 데스크에 보고를 하는데 손님과 상담중이라고 한다. 사진반을 보내라고 요청한 후 잡지사로 돌아간다. 낯선 자동차가 잡지사 앞에 서있다. 야쿠자 같은 남자들이 데스크의 안내를 받고 나온다. 그리고 무라젠을 특종꾼으로 이끈 도야마 군단의 현재와 미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 길지 않는 상황과 장면 속에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건의 핵심을 작가는 담아내었다. 비록 읽으면서 깨닫지 못하지만.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된다. 하나는 소카 지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조카를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데리고 온 다키 살인 사건이다. 큰 흐름은 소카 지로 사건이 차지하고 그 사이사이의 공간을 메우면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다키의 사건이다. 특히 다키의 사건은 무라젠이 용의자로 의심을 받는다. 이 때문에 그가 야쿠자 조직에게 도움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쏠리는 의심을 풀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데 이 과정에서 무라젠의 매력과 능력을 마음껏 품어낸다. 야쿠자 데이의 “당신은 행동력과 두뇌 모두 완벽하게 균형이 잡혔어요.”(332쪽)란 말은 그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했다. 

무라젠이 시리즈 첫 권에서 미로에게 “중요한 건 이상하다고 느끼는 감성과 왜인가를 생각할 줄 아는 상상력이야.”라고 말했는데 이 한 편으로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의 이면을 상상력으로 밝혀내는 그의 능력은 낱낱이 조각난 단서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복원할 정도로 뛰어나다. 거기에 그는 한때 권투를 했고 남자로서의 어느 정도 무력도 갖춰 미로의 유일한 약점을 지울 수 있다. 그리고 미로가 가진 행동력과 두뇌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알려준다. 가끔 미로가 의뢰한 사건 조사 중 벽에 부딪혔을 때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경험과 능력 때문이다.

미스터리 작가에게 미해결 사건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런 점에서 소카 지로 사건에 대한 작가의 해답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 시대의 자료를 가지고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정리하고, 분석하면서 풀어내는 가정은 시간이 지났기에 가능한 추리다. 이해 당사자들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사라졌기에 더 분명하게 그 사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이란 공간이기에 이런 대담한 추리가 용납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에 매력적인 주인공 한 명을 넣는다면 금상첨화인 것은 당연하다. 

단순히 미해결 소카 지로 사건과 살인 사건만 다루었다면 흥미로웠을지 모르지만 풍성함이나 인간적인 매력은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 시대의 풍경을 정확하게 그려내면서 무라젠 주변 사람들을 같이 보여주었기에 이야기는 풍성해지고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특히 시대의 풍경은 현재와 상당히 다른데 이것을 생각하면서 읽게 되면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 친구 고토와 짝사랑 사나에와의 관계는 청년 무라젠의 진짜 모습을 보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미로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도 즐겁지만 무라젠의 새로운 이야기도 나왔으면 좋겠다. 이제 미로 시리즈 마지막 한 권만 남았는데 이때 만날 무라젠은 분명히 기존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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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강의
왕리췬 지음, 홍순도.홍광훈 옮김 / 김영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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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상당히 좋아하는 내가 <사기>라는 역사서에 관심을 가진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수필을 읽으면서 이 책 속에 나온 <사기> 예찬을 보고 관심을 가졌다. 사실 그 당시도 호기심 정도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 수많은 책 속에서 <사기>의 위대함을 만나게 되면서 언젠가 한 번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30권의 방대한 사서인 것도 제대로 모르고 말이다. 번역서를 제대로 읽는다 해도 수많은 주석이 붙을 것이고, 방대한 등장인물과 관계는 읽는 동안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던 중 중국CCTV <백가강단>에서 저자가 방송한 것을 묶은 이 책을 발견했다. 상당히 반가웠다. 그리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연대순과 인물 편을 섞었다. 한무제의 연대를 따라 흐르는 사이사이에 그에게 총애나 미움을 받은 인물들을 집어넣었다. 이 구성을 통해 시대의 흐름과 그 시대 인물들과 한무제의 관계를 잘 알 수 있었다. 600쪽이 넘는 분량임에도 그렇게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은 것은 바로 이런 구성과 원전이 가진 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저자의 박학다식한 지식과 명쾌하고 흥미로운 해석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저자가 <사기>를 해석하는 과정에 다른 사서를 같이 다룬 것은 시대와 인물을 좀더 입체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인데 많은 부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사기>에 대한 엄청난 칭찬으로 문을 연 후 경제의 열 째 아들이었던 그가 어떻게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구중궁궐의 암투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치열하다. 저자는 이 과정을 하나씩 분석하며 설명하는데 단순히 그의 노력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여자들의 도움이 지대했음을 알려준다. 그의 어머니는 당연하고 장모와 황궁의 여자들도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즉위에 도움을 준다. 이 과정은 얼마나 많은 인내력과 간절한 욕망과 함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지 보여준다. 결국 그는 16세에 즉위해 70세에 세상을 떠나는데 무려 54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청나라 강희제를 제외하면 최대라고 한다. 조선 시대 영조 대왕이 52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것보다 2년이 더 길다. 

긴 시간을 황제로 있다 보니 수많은 일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황제로 올랐지만 권력은 외척 등이 가지고 있었고 그는 그냥 황제였을 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권모술수를 하나씩 배우고 알게 되면서 그 누구보다 강한 황제가 된다. 이 제위 기간 동안 수많은 승상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한 동안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로 여겨지기도 했다. 승상이란 지위를 생각하면 엄청난 것인데 이것을 거부하는 인물이 나올 정도인 것을 보면 그의 독재 정치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이 독재 정치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가 산 시대와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있었던 한나라의 역사를 보게 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그가 흘리게 한 엄청난 피의 바다는 제외하고.

그의 제임 기간 동안 흉노와의 전쟁은 빼놓을 수 없는 논쟁이자 사실이다. 무려 44년 동안 흉노와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전쟁을 통해 실크로드의 일부가 개설되고, 영역이 확장된 부분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아직 개국 초기임을 생각하면 국력의 소모가 너무 심하다. 거기에 한나라 건국과 함께 문제로 존재했던 제후들은 반드시 정리가 필요했다.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 중 유씨 황족들이 보이는 것은 그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과 그가 보여준 독재에 대한 반발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 과정을 통해 그의 황권은 더욱 강력해지고 새로운 인물들과 정치 개혁이 이루어졌다.

역사가들은 그의 독재정치를 진시황과 비교를 많이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한 명은 나라를 패망의 길로 가게 만들고, 다른 한 명은 대제국의 기틀을 만든다. 이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십분 잘 살려고, 외척을 정리하는데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바로 잡는데 지체함이 없었다. 물론 그의 장기인 인재 등용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단순히 기록만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담아내어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와 암투와 인물들과 욕망들은 말할 것도 없다. <사기>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이 매혹적인 강의 속에서 눈길을 찌푸리게 하는 내용이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중국이다. 한무제 때 현대 중국 판도의 기본 틀이 짜졌다고 말하고 사마천이 <사기>에서 [흉노열전]을 쓴 것이 중국의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흉노열전]을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로 만듦으로써 현재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기치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흉노와의 전쟁을 ‘중국민족 간 내부의 비극’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연장하면 고구려도 역시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변하게 된다. <사기>가 지닌 매력을 단숨에 확 깎아내리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앞에 나온 그의 해석을 다시 한 번 더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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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종의 요리책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김수진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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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넘어서는 악마적 매혹! 이라고. 글쎄. 이 말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워낙 <향수>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책이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비슷한 점을 꼽는다면 더 강렬한 장면으로 채워진 요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부분은 분명히 <향수>를 넘어섰다. 정말 무시무시하고 잔혹하다. 하지만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화려한 요리법과 감정이입을 차단한 묘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면 나 자신 속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도 <향수>와 비교한 책에 대해 좋은 평을 하지 않았다. <향수>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주제가 다른데 억지로 붙인 듯한 광고 문구 때문에 거부반응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책도 역시 앞부분에 그런 거부반응이 있었다. 제목과 첫 장면에서 풍기는 강렬함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랬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향수>와 완전히 다른 전개방식이었다. 뭐 한 인간의 집착과 삶을 다룬다는 부분에서 어느 정도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 소설은 오히려 이 자극적인 제목 뒤에 감춰진 아르헨티나 현대사가 더 눈길을 끈다. 

플레이보이의 평에 ‘한 가문의 잔혹사’라는 문구가 보인다. 그렇다. 이 소설은 한 가문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어떻게 요리사가 되고, 레시피를 만들고, 갑자기 죽는지 보여준다. 한 세대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다루는데 이 집안의 역사 속에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같이 녹였다. 동시에 이탈리아의 이민사도 같이. 사실 아르헨티나 역사에 대한 정보를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이 소설이 풀어내는 중요한 장치들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거의 궁극의 요리비법서처럼 다루어지는 <남부 해안지역 요리책>과 음식들이 침을 삼키면서 빠져들게 만든다. 

세사르 롬브로소가 처음으로 인육 맛을 보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바로 이 아기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고 이 가족의 과거사가 연대별로 펼쳐진다. 이 과거사가 거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읽으면서 언제 세사르가 보여줄 끔찍한 요리가 나올지 기대(?)하게 된다. 이런 기다림의 시간 속에 펼쳐지는 한 가문의 역사는 처음 예상한 것과 너무 달라 쉽게 빠져들지 못한 부분도 많다. 하나의 긴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고 빠르게 변하면서 흐름을 끊기 때문이다. 아마 책에 대한 접근방법이 잘못된 탓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너무 식인주의에 관심을 둔 것이다. 뭐 첫 장면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음식에 대한 나의 식탐을 생각하면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수많은 요리들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다양하고 화려한 요리들은 침을 계속 삼키게 만들고 언제 먹어보지 하는 상상을 끊임없이 하게 한다. 아주 가끔은 이런 화려한 묘사와 달리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도 있을 것이라는 아주 현실적인 생각도 끼어든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 상상은 금방 제압당하고 침을 흘린다. 처음 만났던 인육에 대한 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그리고는 예전에 보았던 영화나 소설 속 인육 요리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식인주의의 인문학적 정보도 동시에 지나갔다. 이런 정보들은 너무나도 간결하고 무덤덤한 묘사와 서술 속에 사라졌다. 앞으로 또 어떤 살인과 요리가 만들어질까 호기심을 불러오면서.

옮긴이의 글에서 “인류의 역사가 결국 ‘식인주의’의 반복에 불과하다”(277쪽)를 읽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음식으로서의 식인이 아닌 역사 속 장면들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얼마나 잔혹한 일들이 많았는지, 상상 그 이상의 일들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 또 소설 속 아르헨티나 근현대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게 되면 조금 생각이 바뀔 것이다. 아니면 아우슈비츠나 731부대의 생체실험과 그 부산물들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생각해보라. 그리고 작가는 “당시 아르헨티나는 온통 인육 맛을 본 약탈자들이 우글거리는 정글과도 같아서”(169쪽)라는 문장을 써 단순히 엽기, 잔혹, 미스터리를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님을 환기시킨다. 갑자기 아르헨티나 역사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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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9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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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노 미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사라진 AV 여배우 잇시키 리나를 쫓는 미로의 활약을 그렸다. 전편에 이어서 이번에도 미로의 활약은 힘겨우면서도 반짝인다. 그녀는 우리가 흔히 영화나 탐정소설에서 만나는 탐정과 다르다. 액션은 전혀 펼치지 못하고, 순간적인 직관으로 모든 것을 단숨에 파악하지도 못한다. 그녀는 야쿠자의 협박에 겁을 먹고, 남자의 힘 앞에 무기력하다. 이런 그녀지만 장점이 두 가지 있다. 그 첫째는 끈기고, 그 다음은 상상력이다. 끈기는 포기하지 않고 사건을 계속해서 파헤치는 것이고, 상상력은 사건의 이면을 파악하고 추리해서 진실을 파악하는 힘이다. 

AV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시절이 있다. 아주 순진했던 그 시절 이 장르를 만나면서 정말 많이 놀랐다. 포르노와는 다른 세상이었다. 어떻게 해서 하드코어라는 것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보고난 후 사실인지 궁금했다. 아마 스너프 필름이 진짜일까 아닐까 하는 의문 이상으로 호기심을 품었던 시절과 비슷했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이 소설의 첫 장면이 일반적인 AV에서 갑자기 강간으로 변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이 비디오를 본 페미니스트 와타나베 후사에가 AV 여배우를 찾아 강간한 남자들과 제작사를 고소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왜 직접 하지 않냐고? 그것은 강간이 친고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오랫동안 일한 다와다 변호사 소개로 그녀가 왔고, 미로는 정가보다 저렴하게 그 사건을 맞는다. 이제 그녀는 한국에서 수많은 본좌들을 만들어낸 성인비디오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던 시절 정보는 인맥을 통할 수밖에 없다. 그 첫 인맥은 이제 은퇴한 탐정 아버지 무라노 젠조다. 아버지를 통해 비디오 가게를 하는 아오타를 만나고, 기초적인 정보를 얻는다. 여기에 동성애자이자 옆집 남자인 도모베 아키히코가 유명한 게이와 함께 의논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등장한다. 이 의논을 통해 미국 영화에서 보게 되는 동성애자 친구를 그녀는 가지게 된다. 그녀는 그가 남자친구가 되었으면 하지만.

사라진 AV 여배우 리나를 찾아주면 되는 간단한 의뢰지만 와타나베가 제작사를 한 번 뒤흔든 뒤라 쉽지 않다. 그녀가 제작사를 찾아갔을 때 반응은 거부감으로 가득하다. 정보는 더 숨겨지고, 그녀의 흔적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혹시 그녀가 출연한 다른 성인 비디오가 있는지 조사를 하지만 시중에 유통된 것은 없다. 단서를 찾기 위해 비디오를 자세히 본다. 눈에 들어오는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이 단서가 쉽게 그녀에게 다가갈 정보를 바로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 단서를 통해 추리하고 새로운 조사를 해야 한다. 여기서 그녀의 장점들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탐정 미로가 AV 세계를 하나씩 파헤치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굉장히 현실적이다. 우리가 이런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여자들이라면 뻔하다고 할 때 그녀는 기획사를 통해 자기발로 찾아오는 여자나 직접 제작한 비디오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며 상상이상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다시 미로와 야시로의 묘한 관계로 이어지면서 본능과 삶의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 하나의 사건이 직선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관계를 만들고 복잡하게 엮이기 시작한다. 물론 이 복잡한 관계 속에는 모든 사건을 단숨에 해결할 진실이 숨겨져 있다. 

전작과 비교해 이번 작품은 힘이 조금 달린다. 낯선 세계를 파헤치면서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과 야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마지막 장면들이 강한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 반전처럼 펼쳐지는 이야기에 아마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뒤틀린 인간의 욕망과 가진 것을 잃는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무지라고나 할까? 아니면 그것에 대한 이성의 반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이 시리즈의 외전 <물의 잠 재의 꿈>과 시리즈 마지막인 <다크>가 나를 기다린다는 것은 제목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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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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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첫 장편소설이다. 늘 단편소설만 썼던 그녀가 장편을 내놓았다. 그녀의 단편에 대한 호평들을 기억하던 나에게 이 장편은 어떤 느낌일지 참 궁금했다. 혹시 조금 무겁게 진행되는 것은 아닐까?, 지루하거나 더딘 진행은 아닐까? 걱정도 했다. 이런 걱정들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정신없이 읽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가슴 먹먹해 하면서.

가장 늙은 자식. 그렇다. 화자이자 주인공 아름이는 조로증에 걸린 아이다. 현재 나이는 그의 부모가 그를 가진 열일곱 살이다. 그의 외모는 부모나 주변의 누구보다 늙었다. 보통 사람보다 10배는 빠른 노화가 진행되면서 온갖 병들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오랫동안 살 줄 몰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노화는 빠르다. 특이한 병으로 인한 빠른 노화는 가난한 부모들을 경제적으로 더 힘들게 만든다. 잠깐 드러나는 그들의 삶을 보면 주변 사람들과 연락이 끊어질 정도다. 하지만 이 어린 부모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름이를 키우고 돌보고 사랑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 과정과 그것들에 대한 아름이의 보답과 사랑을 담은 것이다.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이 어린 두 부부가 어떻게 아름이를 낳았고,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어떤지 보여준다. 열일곱에 소위 말하는 사고를 친 두 학생의 이야기는 아름이의 낱말카드가 바람에 날려 하늘에서 뒤섞이며 운명처럼 엮어낸 듯하다. 보통이라면 낙태를 떠올렸을 텐데 어린 두 학생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엮이면서 낳는 쪽으로 바뀐다. 그 나이에 창창한 미래도 포기하고 말이다. 전혀 부모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그들 이야기는 미숙하고 치기마저 넘쳐난다. 하지만 그 풋풋함이 읽는 내내 유쾌했고 그들이 처한 현실을 무겁지 않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2부는 가족이 처한 현실 때문에 받아들인 방송 출연을 통해 그들이 겪은 아픔과 기쁨과 사랑을 엮었다. 인터뷰를 통해 드러나는 그들의 이야기는 먹먹하다. 대박을 예상하고, 조로증이 걸린 아이도 성욕이 있을까 의문을 품는 방송작가와 피디의 대화는 우리가 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인지를 알려준다. 물론 이 가족의 사랑과 아픔과 고통을 가슴으로 조금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그 찐한 감정의 울림을 제대로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비록 그 조금 때문에 부모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냈다고 해도 말이다.

아름이의 첫사랑을 담은 것이 3부다. 이 감정은 방송작가의 호기심에 대한 답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두근두근한 감정의 흐름과 교류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늙은 소년의 청춘이다. 직접 만나지 못하고 메일을 통해 진행되는 이 만남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두 소년소녀가 처한 현실 때문에 절박하고 애잔해 보인다. 불치병에 걸렸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사랑이 가득하지만 말이다. 메일을 통해 드러나는 아름이의 감정은 첫사랑에 빠진 십대의 그것과 똑같고, 그의 노화와 더불어 깊어지고 무거워졌던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게 만든다. 

사실이 드러나고 병의 빠른 진행으로 이제 거의 마지막에 도달한 순간을 기록한 것이 4부다. 첫사랑을 통해 밖으로 드러낸 10대의 모습이 이어지고, 하루하루 말라가는 그를 통해 눈시울 적시게 만든다. 억지 장면이나 묘사가 아닌 짧지만 간결한 문장과 상황을 통해서 그것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유쾌함을 내려놓지 않음으로써 감정 속에 빠져 헤매지 않게 한다. 하지만 가슴 저 바닥에 깔린 먹먹함은 긴 여운을 남긴다. 이어서 나오는 아름이가 부모에게 남긴 이야기는 어린 두 부모의 만남을 전혀 다른 문체로 풀어내면서 그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사랑받았는지, 사랑하는지 보여준다.

조로증으로 인해 급격하게 늙어감에 따라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삶의 길을 걸은 그에게 이 늙음은 “텅 빈 노화”(53쪽)였다. 또래 친구 하나 없고,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그가 아무리 책을 읽으면서 비어 있는 시간을 채우려 해도 결코 채울 수 없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책의 문장 속에서 이 텅 빈 삶을 채울 것을 찾는다 해도 결코 채워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방송 출연과 사람들의 댓글과 사연과 응원 등이 그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만들고 그 공간을 채우게 만든다. 누구나 겪는 첫사랑과 십대의 투정은 노화와 상관없이 빛나고 그 짧지만 강렬한 경험은 노화를 뛰어넘어 십대 아름이를 마주하게 한다. 이 소설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성장을 담았다고 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의 다음 장편이 두근두근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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