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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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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미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지는 것이자 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에 최소한 한두 번은 어떤 일에 물건에 사람에게 미치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이 경험이 그렇게 길지는 않다. 물론 마니아의 세계로 가면 긴 세월 동안 미친 듯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미친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친 것과 조금 다르다. 가끔 그 경계가 희미한 경우도 있지만. 소설 속 두 주인공은 과연 미쳤을까? 묻는다. 그럼 읽는 동안 나는?

작은 이빨로 이야기의 문을 연다. 무슨 의미일까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는 진과 진이라는 연인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성만 다르고 이름이 같은 두 연인. 그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연인이 생길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얼마일까? 뭔가 특별한 인연 같다. 하지만 이 특별한 인연은 산산조각난다. 바로 그 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서. 진은 유진의 스케치에서 그 섬 여자 아이의 누드화를 보고 임신한 여자 아이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본다. 그때 그녀는 자신에게 묻는다. 죽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는 여자 아이를 찌른다. 여자 아이는 비명을 지른다. 그 후 흔들린다. 진과 집과 그 아이와 땅이.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같다. 

그 섬에서 드라이버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야나가 등장한다. 그는 개 한 마리를 친 적이 있다. 개 그림자의 환영 때문에 다시 온 곳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진이다. 이 만남이 단순한 우연일까? 그녀는 이야나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고, 이야나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재미난 것은 역시 친구 만이다. 그 섬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만의 삶을 통해 그 섬 생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만은 자신이 가진 매력을 팔아서 생활했고, 그 매력이 사라졌을 때 만난 엄마의 존재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한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본능에 충실한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솔직함과 두려움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현실이 아닌 과거 속에 살아가는 두 남녀와 대비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본능은 무얼까? 성욕일까? 진과 이야나의 만남과 동행은 처음에는 필요에 의해서다. 이야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진은 자신이 찾는 유진의 환영을 쫓기 위해서. 이 만남이 이어지고 우연한 사고인지 의도인지 모를 여권 분실 이야기는 하나의 일을 바라다보는데 사람의 경험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만을 통해 알게 된 힐러의 이야기는 이 두 남녀가 갇힌 기억의 지옥을 벗어날 하나의 주문 같다. 진은 7년 전 일어난 살인의 기억이고, 이야나는 그가 사랑했던 여자 수니에 대한 집착이다. “기억해야만 할 것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지우게 될 겁니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장치 중 하나가 지진과 쓰나미다. 7년 전 사건 속에 일어난 지진과 현재 밀려온 쓰나미는 삶의 전복이자 회생이다. 과거보다 현재의 쓰나미가 더 처참한데 그 현장을 작가는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그 섬을 자주 다녀왔고, 그 섬에서 시체가 불타는 것을 본 경험에서 비롯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예전에 동남아 여행을 갔을 때 2~3년이 지났는데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놀란 적이 있다. 아직도 치워지지 않았다는 것과 그 처참함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것에 동시에 놀랐다. 그 당시에는 치워지지 않은 것이 게으름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경제력과 그 충격 때문이 아닐까 하고 바뀌었다. 물론 그 국민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뿐이었다.’라고 몇 번이나 외친다. 진과 진의 결합은 이제 과거 시재로 변했다. 진이 사라진 유진을 찾아 7년 동안 몇 번이나 그 섬에 왔지만 그녀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고 멈춰 있다. 이것은 기억의 지옥이 만들어낸 환상이자 고통이다. 정체된 시간은 그녀의 삶을 강하게 지배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것들이 그녀를 과거 속에 묶어둔 것이다. 이때 나타난 이야나와 쓰나미는 그녀의 정체된 삶을 뒤흔든다. 그녀가 그에게 말한 “돌아올께요”는 그녀를 떠난 유진을 잊게 만들고, 기억의 지옥을 마주하면서 극복하게 만든다. 쓰나미가 만든 참혹하고 극한 상황이 그들을 현실 속에서 연결시킨다. 시간은 다시 흐르고 그들의 관계도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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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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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조정래의 작품 중 읽은 것이 몇 편 되지 않는다. <태백산맥>과 <대장경>과 다른 단편집 한 권을 제외하면 없다. 그가 출간한 수많은 책을 생각하면 상당히 적은 편수다. 단순히 권수로 따지면 적지 않지만 그 당시 나의 취향은 조정래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대하장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적지 않은 대하장편을 읽었지만 그것은 학창시절 때뿐이었다. 그래서 <아리랑>이나 <한강>을 사놓고 그냥 묵혀두고 있다. 그의 이름이 한창 알려지고 연재소설이 출간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대장경>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 이 작가 더 읽고 싶다는 마음은 크게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책이 보이면 사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는 읽겠지 하는 생각과 그의 이름 때문이다. 그러던 중 새롭게 장편으로 개작된 <황토>는 적은 분량으로 시선을 끌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시대의 비극 속에서 각각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된 점례다. 그녀의 삶속에는 그 시대를 산 여자의 비극이 담겨 있다. 일제, 해방, 6.25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그렇게 길지 않다. 10년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와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은 그녀를 평온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그리고 각각 다른 남자에게서 얻은 3남매의 사연은 그 누구도 욕할 수 없는 민족의 비극이자 시대가 지닌 한계다. 읽고 있으면 어떻게 저런 일이 생길까 의문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혹은 최선이었음을 알게 된다. 

시작은 그녀의 셋째 아들 동익이 조난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다. 이 사고를 통해 그녀의 삶 중 일부가 드러난다. 바로 동익이 혼혈이라는 것과 첫째 태순이가 막내를 욕하고 엄마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태순이가 동익이를 욕할 때면 그 모자를 함께 붙이는데 한 가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나? 하는 것이다. 그가 바로 일제 시대 주재소 주임 야마다가 알량한 권력으로 자신의 엄마를 범해서 낳은 또 다른 혼혈임을 말이다. 아마 점례는 이 사실을 끝까지 숨겼을 것이다. 외모에서 동익이처럼 이국적이지 않기에 숨기기 쉬웠을 것이고, 그 사실을 까발려 아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왜 그녀의 삶이 이렇게 되었는지 시대의 비극 속에 하나씩 풀려나온다. 그 시발점은 아버지가 일본인 과수원 주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고, 이 기원은 주인이 아내를 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는 남편이 강간당하려는 아내를 구해내고 폭력을 행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텐데 그 시대에 일본인은 법 테두리 밖에 존재했다. 그 전후 사정에 대한 파악 없이 점례 아버지가 끌려가서 치도곤을 당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여기에 불행이 더해진 것은 점례가 예쁘고, 이것을 일본 주임이 본 것이다. 이 다음 수순은 이제는 진부한 듯한 진행으로 이어진다. 주임의 총애는 남에게 권력으로 비치고, 그녀에게 아부하고 부탁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녀의 집안은 조그마한 여유를 누린다. 이것은 다시 그녀가 미군 장교의 첩이 되었을 때 되풀이된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아이 낳은 것을 속이고 독립투사의 아들이었던 박항구와 결혼했던 때다. 그녀의 몸에 남은 흔적의 의미도 모르고, 그녀의 장점을 보고, 그녀가 낳은 아이를 사랑했던 그 남자.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고, 전세가 역전되는 순간 점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짐이자 화가 된다. 결코 길지 않는 시간 동안 여자의 행복을 누리게 만들었고, 현재 그녀를 가장 잘 도와주는 딸 세연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지만 현실은 냉혹하고 잔인하다. 그가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위해 행동한 것들이 그의 가족에게 강한 여파를 미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여기서 다시 그녀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그녀의 미모다. 

그녀의 미모는 남자들의 시선을 끈다. 전후 복잡한 삶 속에서 원초적 본능이 더없이 강할 때는 더하다. 만약 그녀가 영악하고 이기적이었다면 더 많은 부와 삶의 여유를 누렸을 테지만 시대의 강한 바람 속에 그냥 흘러 다니는 힘없는 여인이다. 힘없다고 그녀가 삶을 포기할 정도로 무기력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돌봐야 할 아이들이 있기에 결코 무너질 수 없다. 이 때문에 그녀의 선택은 우리 어머니의 힘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쓰러져도 다시 바로 서는 그 힘 말이다. 하지만 그녀도 자식들 앞에서는 무력하다. 그녀가 유언처럼 자신의 인생을 하나씩 적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력감을 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긍정하기 위한 노력이다. 미래의 희망이다. 개인적으로 장편으로 개작되었다지만 분량을 더 늘려서 3남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었으면 한다. 그들과 함께 여자 점례 이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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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심층을 보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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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종교의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좋은 일을 하는 종교인들도 보지만 언론이나 주변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쁜 면을 부각시켜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인 종교관이 결코 좋게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종교의 긍정적인 면이나 위대한 부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편협한 종교인들의 말과 행동은 나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보고 생각하고 느끼게 만든다. 결코 그것이 종교의 모든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던 중 이 책 저자에 대한 글을 읽고 목차를 보면서 나 자신의 종교관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결론부터 말하면 능력부족으로 제목처럼 심층을 보지는 못했다. 

“종교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이 문장은 어릴 때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믿음이란 것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성의 영역이란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알게 되었다. 특히 학창시절 종교를 두고 논쟁을 벌일 때면 늘 서로의 주장이 겉돌고는 했다. 이것은 둘 다 다른 곳을 보면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과학과 이성 등을 무기로 경전을 해석한 나와 이 모든 것을 역사이자 사실로 아니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상대와의 대화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흔히 하는 말로 종교와 정치는 이야기하면 답이 없다는 말처럼. 하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종교관 차이도 있지만 이해의 폭과 깊이의 차이가 더 크게 작용했다. 이것을 알게 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다. 이것에 대한 대담집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가 이미 나와 있는데 나중에 읽을 예정이다. 이 둘의 차이에서 시작하여 심층 종교의 신비주의로 나간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우면서 종교의 발전에 필요한 단계로 저자는 말한다. 이 용어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도를 높인 후 저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에서 시작하여 현대 한국의 두 철학자로 이어지는 긴 종교 여행을 떠난다. 많은 인물들이 낯익지만 낯선 이름도 적지 않다. 편협한 교육과 특정 종교인의 세계로 나아간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렇지만 이 낯설음이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준 것은 사실이다.

다루어지는 종교인의 숫자만 단순히 보아도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다. 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어떤 기준에서 이런 분배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정말 낯선 종교의 선각자를 제외하면 그리스도교 선각자 중에서도 낯선 인물이 곳곳에 보인다. 비종교인이거나 그 종교에 관심이 없다면 전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인이 적은 것을 아쉬워한다. 하지만 아쉬움을 넘어가면 나 자신이 잘 몰랐던 종교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이자 가치는 이런 인물들에게 있지 않나 생각한다. 각 종교 선각자들의 주장이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해설과 더불어 말이다.

한국 종교의 한탄과 걱정에서 시작한 이 책이 다른 영성가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깨달음은 우리의 나아갈 바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 영성가, 선각자 모두가 한 시대나 종교 그 자체를 모두 바꿀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깨달음과 실천이 가슴과 머리에 많은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신문 연재라는 특성 때문에 가끔 중복되는 내용이 나오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이 하나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다만 나의 지식과 깨달음이 부족하여 그 진수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소화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의 분발이 필요한 부분이다.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리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동아시아의 사상가들, 인도의 영성가들, 불교, 한국 등에 대한 핵심 정보다. 각 개별로 들어갔을 때 이 종교들이 어떤 내용인지 핵심을 집어주지만 결국 개인의 노력과 깨달음이 핵심이다. 늘 마찬가지지만 좋은 책들은 새로운 책들을 읽게 만든다. 비록 나 자신이 종교는 없지만 그들이 깨달은 세계의 한 조각이나마 얻기 위해 책을 읽고 명상에 잠기고 느끼고 경험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식의 확대가 아닌 지혜의 깊이를 더 많이 얻고, 마음속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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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게임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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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부 3년생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이 소설에서 말하는 콜드 게임이 야구 용어(called game)가 아닐까 미리 짐작했다. 그런데 다 읽고 난 후 맞는지 원제목을 확인하니 다른 콜드 게임(cold game)이다. 야구에서 콜드 게임은 운동경기에서 일몰, 폭우, 분쟁 등의 이유로 심판이 경기종료를 선언하는 것이고, 소설 제목인 콜드 게임은 부정직한 카드 또는 주사위 게임이란 의미다. 하지만 다른 의미의 두 용어가 한글의 똑같은 발음 속에서 겹쳐 보이는 것은 역시 고등학교 야구 선수가 주인공이고, 그들이 지닌 한계 때문일 것이다.

우리와는 조금 다르게 일본의 3학년들은 여름이 끝나면 운동부에서 은퇴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가을부터는 2학년들이 주축이 되는 모양이다. 뭐 정확한 것은 팀 내부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본 만화나 드라마나 소설에서 자주 만나는 3학년 대부분이 그렇다. 고시엔을 꿈꾸며 야구에 열정을 태우던 와타나베 미츠야도 지역 예선 탈락으로 야구부를 은퇴한다.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그에게 중학교 단짝이었던 료타에게서 연락이 온다. 아주 급하게 만날 일이 있다고. 평소 이런 메일을 보내지 않는 료타의 성격을 생각하면 낯설다. 하지만 이 만남이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원인과 진행을 알리는 시발점이 된다.

청춘 미스터리라고 분류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왕따다. 왕따라는 사회문제가 늘 다루어지고 있지만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많은 작가들이 이 소재로 소설을 썼다. 다른 서평에서도 말했듯이 나의 과거가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미츠야의 행동과 비슷하거나 가해자였기에 너무 쉽게 잊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늘 그렇지만 당하는 사람에게 이 문제는 결코 쉽게 잊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 왕따가 더 길고 더 잔인하고 더 폭력적이고 더 무신경할수록 강하게 오랫동안 몸속에 기억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평생 두려움과 아픔과 공포로 남기도 한다.

처음 미츠야가 료타를 만났을 때 그 당시 반 친구들의 사건들은 그냥 귀찮은 일 중 하나였다. 그 당시 왕따의 대상이었던 토로요시, 본명 히로요시 다케시 이야기가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히로키의 쇄골 골절 사건이나 칸노 아오이의 과거사 전단지 사건과 시노부에게 온 협박 메일 등이 있지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료타의 부탁이니 주변 친구에게 혹시 비슷한 사건이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 당시 반 친구들 주변에 이상한 사건들이 많이 생긴다. 토로요시가 복수하기 위해 돌아온 것 같은 분위기다. 이때만 해도 이 둘은 학창시절 있었던 왕따에 대한 단순하고 조금 위협적인 보복 정도로 생각했다. 이 둘과 함께 기타중학 방위대를 구성했던 시미즈가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왕따 당하던 소년이 복수한다는 내용인데 누구의 시점이냐에 따라 독자의 감정이입이 달라진다. 만약 토로요시의 시점에서 차근차근 복수를 준비한다면 통쾌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최고 가해자 료타의 친구이자 당시 방관자였던 미츠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 시점의 변화는 대단히 큰 차이를 보여준다. 비록 미츠야가 한때 왕따의 대상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가 어느 정도 왕따 학생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해도 적극적으로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도 왕따 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방관자로 남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많은 것을 시사한다. 왕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부모 모임에서 한 어머니가 왕따 당하는 학생이 문제라고 말했다가 그 모임에서 왕따 당했다는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또 4년 전 가해자였던 친구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웃는 장면은 이 문제가 두 입장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곳곳에 함정을 파놓고 독자가 착각하게 만든다. 범인이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하면 다른 사건을 만들어 시선을 돌려놓는다. 좋다. 이 소설에서 누가 범인인지 중요하지 않기에 그렇다. 물론 이 과정이 빠지면 너무 무거운 소설이 된다. 그래서 미츠야를 중심으로 뭉친 학생들을 등장시켜 탐정놀이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작가는 토로요시가 어떤 집단 괴롭힘을 당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현재 그때와 비슷한 공격을 받게함으로써 문제의 심각성을 약하게 만든다. 하지만 복수의 광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이 직접 해결하려는 의도도 역시 찬성할 만하지 않다. 그 이유는 경찰을 통하면 그들이 과거 히로요시에게 가한 왕따 문제가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과거의 왕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청춘미스터리라는 말처럼 젊음이 곳곳에 넘쳐난다. 학생들의 두려움, 진로문제, 과거의 서열, 치기, 만용 등. 기타중학 방위대는 확신을 가지고 히로요시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의 복수를 막으려는 노력한다. 이 노력은 공권력을 불신하는 불량학생의 단순한 마음도 있지만 역시 자신들의 과거사 때문이다. 문제를 예상외로 쉽게 풀 수 있는데 고등학생들을 전면에 내세운 것 역시 그들의 용기와 만용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마지막에 의지하는 것이 경찰이라는 것은 현실적 대안이 없다는 것도 있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뭐 소설 속 료타의 말처럼 그들이 진지하게 상대해줄 때 이야기지만. 속도감 있게 왕따 문제를 재미있게 의미심장하게 녹여내었다. 마지막 반전은 조금 아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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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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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읽은 최인호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최초 전작 장편소설이었는데 이 작품 <낯익은 세상>도 생애 최초 전작 장편소설이다. 두 거장이 처음으로 전작 장편을 썼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비슷한 제목으로 책을 내놓았다는 것이 더 신기하다. ‘낯익은’이란 단어는 똑같지만 두 거장이 현재 바라다보는 곳은 다르다. 최인호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자기 내면으로 파고들어갔다면 황석영은 낯익은 세상의 과거 속으로 들어갔다. 이 두 노장의 시도를 정확하게 가름하기 쉽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반갑고 즐거운 일이란 것이다.

낯익은 세상에서 다루어지는 시공간은 1980년대 초 난지도다. 시간은 딱부리 최정호의 아버지가 삼청교육대로 잡혀간 사실로, 장소는 쓰레기 매립지라는 것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작가가 이 시공간을 배경으로 쓰게 된 데는 작가의 말에서 “모든 것을 쓸어버린 뒤의 폐허에 남아 있는 연민을 위한 것”이란 것으로 알 수 있다. 노년 문학을 본격적으로 펼치면서 치열한 전위를 멀리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몇 년 전 갑자기 이명박을 칭찬하고 함께 했던 그가 떠오른 것은 왜 일까? 

그 옛날 가장 앞에서 낮은 곳에서 세상을 함께 보던 그다. 이번 소설도 그런 곳에서 시작한다. 꽃섬이란 예쁜 이름 뒤에는 쓰레기 매립지라는 결코 아름답지 못한 장소가 숨겨져 있다. 이제는 난지도라는 이름보다 하늘정원이니 발전소 등으로 바뀌어 예전의 더러운 모습이 사라졌지만 희미한 기억 속에 그곳이 아직도 뚜렷하게 생각난다. 그리고 얼마 전 동남아나 인도나 중남미 국가의 쓰레기 산을 본 것이 같이 떠올랐다. 그때 나의 반응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떻게 저런 데서 살 수 있지’ 하고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빼빼 마른 가족들의 처참한 생활을 보고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꼈는데 이 책을 읽자마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2~30년 전 서울 난지도에서 그와 별다른 차이 없는 삶을 산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빠르게 발전하고 변하는 한국 현실에서 아름답지 못한 과거가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지워져 있었다. 이것을 보면 그 옛날 민주투사로 불렸던 사람들의 변심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 생각도 동조할 생각도 없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가계를 책임지고 있던 가장이 사라지면 남은 가족들의 삶은 힘들어진다. 먹고 살기 위해 은밀한 유혹이 담긴 것을 알지만 이사를 한다. 그래서 딱부리와 엄마가 가게 된 곳이 꽃섬이다. 이 모자를 데리고 간 인물의 얼굴에 검은 반점이 크게 있는데 이 때문에 딱부리는 그를 아수라라고 부른다. 마징가Z에 나오는 악당이다. 그는 꽃섬 매립지에서 쓰레기차가 들어오면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차지할 권리를 가진 반장이다. 지금이야 아파트 등에서 분리수거를 잘 해서 쉽게 실어갈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분리수거가 없던 때다. 그러니 잘만 건지면 먹고 재활용할 것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어디서 오는 쓰레기냐에 따라 권리금이나 하루벌이가 달라진다. 당연히 최고는 미군부대고, 부자 동네일수록 높다.

이런 환경 속에서 딱부리는 아수라반장의 아들 땜통과 친해진다. 약간 어눌해 보이지만 그가 데리고 다니면서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딱부리는 한 수 접어준다. 낯선 환경에서 땜통이 보여준 풍경과 만남이 아이의 상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특이 빼빼엄마와의 만남은 더욱 그렇다. 빼빼엄마는 이 소설 다른 사람들처럼 본명으로 불리지 않는다. 늙은 치와와 빼빼를 키우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데 신기가 살짝 있다. 어떻게 보면 미친 것이지만 그녀의 몸은 귀신이 잠시 들어왔다가 머물다 간다. 여기에 예전에 꽃섬에 살았던 귀신 가족을 등장시켜 쓰레기 섬 그 이전의 아름다웠던 꽃섬을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파괴하고 잊고 있던 세계와 현실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지금은 점점 사라지고 파괴되고 있지만.

80년대 도시 하층민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말한다. 빼빼엄마가 꽃섬에 큰 불이 난 후 못쓰는 물건들을 소중하게 감춰두고 쓰레기장 물건들은 버리면서 하는 말이 강하게 와 닿는다. “저것들은 사람들이 정을 준 게 아니잖아!”(225쪽) 아무리 좋고 깨끗한 것이라도 사람들의 정이 담겨 있지 않은 물건은 그냥 쓰레기일 뿐이다. 이것은 그 쓰임새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과도 연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너무 나간 것이고, 점점 각박해지고 매정해지는 소비적인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문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분명히 낯익은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각자의 욕망은 점점 더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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