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와 본질
올더스 헉슬리 지음, 유지훈 옮김 / 해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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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을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십 수 년 전 너무나도 유명한 <멋진 신세계> 이후 처음이다. 그 사이에 다른 책을 한두 권 정도 더 산 것 같은데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헉슬리의 소설은 그렇게 쉽지 않다. 이번에는 더 그렇다. 얇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책소개를 먼저 읽은 탓에 나도 모르게 몇 가지 이미지가 고정되었다. 여기에 소설도 탤리스와 각본으로 나누어져 있어 일반적인 소설 읽기 방식으로는 접근하기가 어렵다. 각본은 탤리스가 쓴 영화 각본을 의미한다.

 

간디가 암살당한 날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와 밥은 대본을 실은 차가 달리다가 흘린 대본 하나를 줍는다. 이 대본이 바로 탤리스가 쓴 각본이다. 둘은 이 각본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 탤리스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죽었다. 그의 몇 가지 정보를 얻는다. 여기서 이야기가 더 진행될 것 같았는데 각본으로 넘어간다. 탤리스가 쓴 각본을 그대로 실는다는 말로 탤리스는 끝난다. 이 부분을 읽고 조금 당황스러웠다. 더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각본은 제목 그대로 영화 각본이다. 은밀하게 따지면 영화 시나리오와는 다르다. 그래서 더 집중해야 한다.

 

원숭이와 아인슈타인이 나올 때만 해도 나의 머릿속에는 <혹성탈출>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원숭이와 3차 대전이란 단어가 결합하면서 가장 낯익은 영화가 생각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설정이 아니다. 이 원숭이들을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이면 3차 대전을 유발한 인류의 본모습이 된다. 실제 이야기도 3차 대전 이후 방사능에 오염된 미래를 다룬다. 흔하게 보는 미래의 풍경이 아니다. 감마선에 노출된 사람들은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고, 문명은 퇴보했다. 이 시대의 권력을 쥔 대주교는 기존의 신앙을 부정하고 벨리알을 숭배한다. 미래의 지금을 벨리알이 의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류의 종말을 예언한다. 이런 세계에 한 식물학자가 잡혀온다.

 

풀 박사는 일행과 함께 조사하기 위해 왔다가 납치된다. 그가 사는 곳은 아직 신이 존재한다. 그런 그가 감마선에 의해, 벨리알에 의해 뒤바뀐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와 함께 온 일행 중에는 그의 엄마가 결혼하길 바라는 여자도 있다. 그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잡혀 온 곳에서 룰라라는 소녀에게 빠진다. 이곳은 일 년에 며칠 동안만 성교가 허락되는 곳이다. 이런 식으로 바뀐 것은 인간의 생존 방식이 변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아기에게 문제가 있으면 바로 죽인다. 엄마의 머리는 대머리로 만들어 사람들의 놀림이 된다. 여자는 죄악의 원인인 곳이다. 종말을 향해 인류가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다. 종교가 지닌 폐단의 극단적인 모습 중 하나를 제대로 보여준다.

 

풀 박사와 룰라의 관계는 이 뒤틀린 세계에 한 줄기 문명의 빛을 내비친다. 인간의 특성이 소멸한 곳에서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돌연변이 기형의 사람들이 계속 태어나는 세상이지만 그들이 인간인 것은 변함이 없다. 이것을 풀 박사는 제대로 본다. 물론 난교의 밤에 욕망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한다. 악마의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신만 정신을 차린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용사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식물학자일 뿐이다. 인류에게 잠깐의 실수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그려내었는데 그렇게 낯설지 않다. 다른 영화나 소설에서 봤기 때문일 것이다. 각본 속 연출들이 시각적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핵과 종말이 던지는 공포는 충분히 전달된다. 하지만 제대로 마무리가 된 느낌은 조금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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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보쟁글스
올리비에 부르도 지음, 이승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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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보쟁글스’는 니나 시몬의 노래 제목이자 미국 탭댄스 빌 로빈슨의 애칭이다. 이 노래는 화자의 부모님이 함께 춤을 출 때면 언제나 흘러나오는 노래다. 이 가족에게 춤은 즐거움, 기쁨, 행복, 신남 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기 전에는 이 독특하고 낯선 가족에게 좀처럼 몰입할 수 없었다. 평범하지 않기에 평범하게 살아온 내가 그 행동들이 이상하게만 다가왔다. 그러다 유치한 말장난이 기발한 단어 조합으로 다가왔고, 부모님의 사랑이 예전에 보았던 영화나 소설들을 떠올리며 비교하게 만들었다. 제목만 놓고 본다면 <광란의 사랑>이 가장 비슷한데 이들의 사랑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소설은 아버지의 일기와 화자의 회상이 교차하면서 진행한다. 한 소년이 자라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는 좀처럼 공교육에 적응하지 못한다. 시계도 숫자가 나오는 전자시계만 볼 수 있고, 시침 등이 있는 시계는 보지 못한다. 그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이런 사실은 교사와 충돌하게 된다. 이것은 소년을 세계 최연소 조기 퇴직자로 만든다. 틀에 박힌 교육을 견디지 못하는 소년과 그 가족에게는 아주 신난 일이다. 덕분에 소년의 시간은 많이 남아돌고, 부모와 함께 스페인의 별장으로 휴가를 언제나 떠날 수 있게 된다.

 

엄마와 아빠의 첫 만남을 설명한 글을 보면서 아주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 순간만 놓고 본다면 서로 농담을 하면서 장난을 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엄마에게는 진심이었다. 그녀가 사는 세상에서는 사랑하는 남편이 자신의 곁에 없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슬픈 일이다. 그래서 남편이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자 일을 그만두었다. 이후 이들의 삶은 행복과 즐거운 놀이로 변해 있었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잠시나마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자신들의 세상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세금납부 고지서를 놓친다. 세금과 가산세가 엄청나게 불었다. 결국 집 하나를 팔아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엄마가 보여준 행동이다. 자신이 만든 세상과 환상 속에서 사는 그녀에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들의 기록들을 불태운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읽으면서 아빠가 분명히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삶은 이미 아내에게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녀의 행동에 장단을 맞춘다. 일시적인 행동이 아니다. 첫 만남 이후 최후의 순간까지 이것은 계속된다. 이런 사랑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이런 이상한 가족에게도 친구는 있다. 쓰레기라고 불리는 국회의원이다. 가족과 함께 긴 휴가도 가고, 술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더부살이 아가씨로 불리는 커다란 두루미도 있다. 엄마가 책을 읽으면서 쓰다듬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두루미가 함께 산다 것 자체도 특이하다. 이 다섯이 이 길지 않은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이다.

 

경쾌하고 가볍다. 잘 읽힌다. 유쾌한 가족의 행동을 보면 즐겁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무거워진다. 엄마가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탈출한 후 은신한 스페인 성에서 보여준 이상증상이 이렇게 느끼게 만든다. 아빠가 보여준 정성과 사랑은 비현실적이다. 터무니없는 일 같다. 엄마의 현실 인식 부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빠의 모습이 놀랍다. 그런데 부럽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주고 헌신하는 사랑이라니 얼마나 대단한가. 마지막 문장에서 아빠가 엄마에게 한 맹세는 한국에서는 흔한 거짓말 중 하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아니다. 진심이다. 무거워졌던 마음이 이 문장 하나로 다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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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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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능파란 단어를 보고 공공장소에서 읽기에 조금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극적인 성애 묘사를 연상한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애인과 결혼했다는 문구가 이런 쪽의 상상을 더 부채질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관능적인 장면은 보이지 않고, 엄마의 애인과 결혼한 것도 남편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는 말이 청혼이었다. 이 말을 듣고 그녀가 한 것은 엄마를 찾아간 것이다. 결혼해도 되는지 묻기 위해. 엄마는 찬성한다. 이 놀라운 상황이 왠지 모르게 이상하게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오봉에 앗케시 마을의 스즈란긴자에서 한 여자가 분신을 하면서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세쓰코다. 세무사와 엄마 집을 방문한 후 집에 둔 것이 있다고 말하고 갔는데 불이 났다. 완전히 타 신원 파악을 세무사와 몇 가지 단서로 했다. 세쓰코가 맞다. 몇 개월 후 남편 기이치로도 죽었다. 이 둘의 장례식을 주관한 것은 세무사 사와키다. 기이치로의 호텔 로얄을 담당하고, 한때는 세쓰코의 고용주이자 애인이었다. 물론 결혼 후에도 둘은 가끔 만나 몸을 섞는다. 이런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면서 기이치로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부터 일어난 사건과 일상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처음에는 에로틱한 뭔가가 나올 것이란 예상을 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서 뒤틀린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세쓰코의 일상도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 아니고, 그녀가 참가한 단가 모임의 미치코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고, 암을 앓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세쓰코의 일상은 강하게 소용돌이친다. 남편의 딸 고즈에를 찾고, 러브호텔을 직원에게 넘기려고 한다. 남편을 열렬하게 사랑했다면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바람을 피는 그녀가 할 행동은 분명 아니다. 이 이상함이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데 마지막에 한 방 크게 터트린다.

 

약간 평범하고 밋밋한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 즈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바로 단가 모임 동기인 미치코이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다. 아니 그녀의 딸 마유미를 세쓰코에게 맡겼다. 아이의 팔에는 꼬집힌 흔적이 있다. 분명히 아동 학대다. 마유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지 않고 고즈에에게 맡긴다. 돈을 조금 주고. 어린 아이를 돌보는 단순한 일처럼 보이는데 뒤에 벌어지는 엄청난 사건과 이어지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무섭다. 보여지는 표정과 감정 뒤에 숨겨진 진실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다. 서늘한 느낌이 가슴 한 곳으로 파고든다.

 

유리 갈대는 세쓰코가 지은 단가집의 제목이자 단가의 제목이다. 그녀가 몇 번이나 자신의 단가를 인용해서 말한다.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 그녀의 삶속에는 무엇이 흐를까? 이 허무와 공허함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미치코와 함께 한 행동과 그 반응은 이것을 더욱 공고화시킨다.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간 후 예상한 반전이 나올 때까지는 더욱 더. 하지만 그 이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결국 알아채는 사람은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 사와키 세무사 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사와키는 탐정 같은 역할도 하고, 경영컨설팅도 하고, 한 여인의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그의 강한 책임감은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한다. 그의 마지막 외침은 가슴에 강하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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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야의 여름
트리베니언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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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베니언의 소설 중 번역된 것이 몇 권 되지 않는다. 운 좋게도 모두 읽었다. 처음 읽은 것이 예전에 장원에서 나온 <니콜라이>였다. 이때는 트리베니언이 누군지도 몰랐다. 굉장히 특이한 킬러가 나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이 재번역되어 새롭게 나올 예정이란 소식을 들었다. 원래의 제목을 그대로 단 채로. 그 다음 소설은 헌책방에서 구한 <메인스트리트>였다.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우연히 들고 읽었는데 완전히 매혹되었다.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책은 비채에서 <메인>으로 다시 나왔다. 그리고 <아이거 빙벽>이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도 그 재미가 그렇게 줄지 않았다. 이때부터 트리베이언이란 이름이 완전히 내 몸속에 자리를 잡았다.

 

앞에서 말한 세 권의 소설은 각각 분위기가 다르다. 킬러, 경찰 등 직업이 다르지만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 작가의 이름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읽었다면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이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다. 그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은 사실 <카티야의 여름>이다. 이 책의 앞부분은 너무 정적이고, 움직임이 없어 과연 트리베니언의 소설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사건은 언제 일어나고, 이 조용한 마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한 남자가 24년 전에 있었던 첫사랑의 추억을 간단하게 담은 소설로 착각할 정도다.

 

구성은 간단하다. 24년 만에 바스크 지방의 고향으로 돌아온 화자가 24년 전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 한 여자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카티야다. 본명은 다른 것인데 자신을 카티야라고 부른다. 때는 1914년 아직 1차 대전 전이다. 장 마르크 몽장 박사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한다. 이 당시는 아주 비쌌던 자전거를 타고 쌍둥이 동생의 부상 때문에 병원을 찾아왔다. 동생의 이름은 폴 트레빌이다. 둘은 성별만 다르지 외모는 아주 닮았다. 폴의 부상은 둘의 자전거 경주에서 비롯했다고 하는데 각자의 의견에 따라 원인이 달라진다. 이 만남과 상황 속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트레빌 가족은 파리에서 왔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곳은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살리다. 이 마을은 몇 가지 소문 때문에 환자들이 찾아온다. 그로 박사와 함께 의사로서의 생애를 이어가는데 그의 전공 분야는 사실 정신의학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정신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의 정의감과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은 간단한 현실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진다. 즉 쫓겨난 것이다. 고학으로 힘든 의대를 마쳤고, 학창 시절 자신이 바스크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했다. 태생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다. 여기에 아직 그의 순진함과 순수함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쟁도 일어나기 전이었다.

 

카티야의 등장과 트레빌 가족과의 만남은 의사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젊은 여자에게 빠지는 것도 흔한 일이다. 쌍둥이라는 것이 조금 특이할 수 있지만 상황만 놓고 보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카티야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미녀라기보다 매력이 넘치는 여성이다. 해부학과 프로이트의 책을 읽는 특이한 여성이다. 폴은 몽장의 등장을 반가워하지 않고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 사실 이 반응이 나올 때만 해도, 왜 그들이 살리에 왔는지에 대한 소문을 그로 박사에게 듣기 전까지만 해도 마지막 반전 같은 장면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아니 나의 상상력은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몽장은 순수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작은 마을은 금방 소문을 퍼나른다. 이 소문을 그에게 전하는 역할은 하는 인물은 그로 박사다. 이 소문 때문에 폴은 마을을 떠나려고 한다. 카티야가 몽장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폴의 반응은 더 적대적이다. 몽장이 들은 소문을 말하면 더욱 화를 낸다. 약간 평범한 로맨스 소설 같은 분위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폴이 한다. 정신병이 있는 것 같은 아버지는 학문 연구에 정신이 없다. 암흑 시대에 대한 관심이 깊고, 풍부한 역사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역동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바스크 지방 축제를 가게 되는 것도 아버지 때문이다.

 

정적인 상황과 한 남자의 순애보 같은 이야기 전개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트리베니언의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마지막 40여쪽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이 혼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차분하게 문장 하나 하나에 집중하고, 작가에 이전에 깔아놓은 설정 몇 가지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그 윤곽이 보였다. 왜 이 작품을 스릴러라고 하는지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이전 작품들에 비해 약간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이 순간만은 아니었다. 한동안 이 마지막 장면은 강한 인상과 더불어 긴 여운을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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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옳은 일이니까요 - 박태식 신부가 읽어주는 영화와 인권
박태식 지음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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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화를 미친 듯이 본 시기가 있다. 영화관에서 보고, 집에 오면 비디오를 빌려 봤다. 나중에는 인터넷으로 다운 받아서 열심히 봤다. 인터넷 있기 이전에는 영화 잡지를 보고, 비디오로 나오지 않은 영화는 어떻게든지 구해서 보려고 했다. 지금이냐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쉽게 찾아서 볼 수 있지만 그때는 불법 비디오나 희귀본이 된 비디오테이프를 찾아야했다. 힘겹게 찾아 본 영화가 나의 취향이나 이해를 완전히 넘어선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래도 계속 찾아봤다. 이런 습관은 불과 몇 년 전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다 나의 손에서 영화가 조금씩 멀어지고, 완전히 책으로 넘어왔다.

 

박태식 신부, 잘 모른다. 내가 영화를 볼 때 이 이름은 거의 없었다. 내가 아는 평론가들은 이제 고인이 되거나 너무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가끔 영화에 관련된 인터뷰를 보다 보면 아는 얼굴들이 보인다. 그의 초창기 모습을 기억하기에 왠지 어색하다.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나의 취미나 기억이 이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아주 가끔 보는 영화도 거의 오락영화만 본다. 사회문제를 다루거나 조금 어려운 영화는 거의 보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는 영화 흥행이나 할리우드 상황 등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제는 찾아보지 않는다. 극장에 어떤 영화가 하는지도 잘 모른다. 이런 상황이니 이 책의 저자를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 책에 실린 46편의 영화 중 본 것은 딱 3편이다. 이전 같으면 최소한 반은 봤을 텐데 말이다. 비교적 2~3년 안에 상영된 영화다 보니 본 영화가 더 없다. 몇 편은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영화 프로그램이나 포탈 사이트 연예란에서 본 적이 있다. 처참한 숫자다. 올해 영화를 몇 편이나 봤는지 생각해보니 딱 1편이다. 바로 스타워즈 7편. 이전 같으면 이 책에 나오는 영화들을 열심히 찾아서 한 편씩 보면서 저자의 글과 나의 감상을 비교했겠지만 이제는 그런 열정이 많이 사라졌다. 좋은 영화를 구해놓고 그냥 묵혀두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이 책은 아주 조용히 옛 열정에 불을 당긴다. 모두 볼 수는 없지만 극찬한 몇 편은 메모해 두었다가 한 편씩 보고 싶다.

 

영화와 인권. 어떻게 보면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보기 힘든 것이 인권이 아닌가 생각한다. 열정 페이를 이용한 영화제작이 아직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저자는 인권의 범위를 아주 넓게 잡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을 넘어 사랑의 상처, 치매로 스러져가는 노인의 애절한 삶, 친구를 배신하는 것까지. 그래서 몇 편은 나의 이해를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영화에서 감독의 의도를 발견하라고 했는데 영화를 보지 않은 탓에 이것을 파악하기가 더욱 어렵다. 아니면 나의 인권에 대한 범위가 아주 좁거나.

 

모두 4부로 나누어져 있다. 지금, 여기, 우리, 나. 지금과 나의 장에 실린 영화들에는 공감을 하지만 여기와 우리에 실린 영화 몇 편은 솔직히 왜 인권에 담았는지 의문이다. 나의 한계다. 저자가 영화에 대해 풀어 쓴 글도 상당히 재밌다. 대부분이 두 편을 같이 다루는데 비슷한 부분과 차이를 나열할 때 한때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의 방식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귀찮고 능력이 많이 부족해서 포기했지만 이런 종류의 글을 보면 먼저 눈길이 간다. 그리고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에 조용히 눈길을 준다. 그가 말하는 감상 포인트와 칭찬 등은 영화를 한동안 멀리했던 나에게 낯선 부분이 많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많은 참고가 된다.

 

1~2년 전에 갑자기 시간이 나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려고 검색했다. 상영은 하는데 도저히 볼 수 없는 시간에만 상영했다. 멀티플렉스로 바뀐 후 영화의 순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영화의 다양성을 말할 때 늘 나오는 지적이다. 엄청나게 흥행을 한 작품도 한 달이 지나면 극장에서 보기가 힘들다. 이런 상황이니 내가 그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보고 싶은 영화는 많다. 이 책에도 많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전 같으면 모두 보려고 했을 것이다. 최소한 반 이상은 봤을 것이다. 현실은 이렇지 않다. 대부분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한 평론가를 알게 되고, 영화에 대한 이해를 높인 것은 큰 성과이자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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