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5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나온 하라 료의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일본 하드보일드 작가 중 최고로 꼽는다. 이번에도 탐정 사와자키와 함께 돌아왔다. 일본 출간연도를 보면 2004년인 것 같은데 한국 출간은 정말 많이 늦었다. 이미 다른 작품들도 출간되었는데 언제 번역되어 나올지는 모르겠다. 뭐 기다리는 입장에서 번역되어 나와준다면 그것으로 감사할 일이지만. 이번에도 전작들처럼 견고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마지막에 반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 소설은 조금 힘이 약한 느낌이다. 나의 취향이 바뀐 탓일까? 아니면 이 작품 앞에 읽었던 작품이 너무 강한 인상을 준 탓일까?

 

언제나처럼 그의 사무실은 건조해보인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젊은 여성이 있다. 그녀는 이부키 게이코다. 실제는 와타나베를 기다렸다. 그녀의 아버지가 은행 총격 사건으로 자수를 했는데 이전부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와타나베를 찾아가라고 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도망을 다니다 죽었다. 그녀와 함께 아버지가 자수한 신주쿠경찰서로 차를 타고 간다. 그녀를 내려준 후 이런저런 상황을 보다 잠시 주차를 한 후 기다린다. 그의 감각을 자극하는 이상 기류 탓이다. 그때 이부키 게이코의 아버지를 데리고 경찰들이 나온다. 사건이 시작한다.

 

탐정이란 직업 때문일까? 이상해 보이는 상황을 잘 인식한다. 수상한 사륜구동차 한 대가 주차한 것을 보고, 그 차가 수송차를 뒤따를 때 그도 달린다. 그리고 두 번의 총소리. 사와자키의 충돌. 그 차량은 달아나고 사와자키는 쫓는다. 오래된 차량으로 그 차를 계속 뒤좇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놓친다. 경찰서에 돌아와 신고를 한다. 경찰 수송차에 있었던 피격 내용도 듣는다. 이부키는 어깨에 총을 맞았고, 호위하던 경찰이 머리에 총을 맞아 생사를 알 수 없다. 그는 상황을 설명하는데 경찰은 불만이 많다. 그의 차가 충돌하지 않았다면 젊은 경찰이 맞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물론 사와자키는 이에 반응하지 않는다. 두 대의 불확실한 차량 번호를 알려주고 떠난다.

 

연말의 시간은 그렇게 지나가고 새해가 되었다. 사와자키는 형사에게 알려준 불확실한 두 대의 차량 번호 중 하나를 좇는다. 휴가를 떠난 철공소를 찾아왔다. 앞집에 들어가 정탐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집에는 히키코모리 아들이 있다. 이 또한 사와자키에게는 걸림돌이 아니다. 주저없이 들어가 질문을 던지고, 그 집을 감시한다. 차 한 대가 떠나고, 그 집을 지키던 남자도 담배를 사러 나간다. 빈집이다. 히키코모리에게 늦으면 신고하라고 말한 후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은행 총격 사고의 주범과 납치된 고령의 노인을 발견한다. 실제 범인은 자수하려다 차를 잘못 타 납치되었고, 이 납치 때문에 매형이 자수했다. 구십이 세의 노인은 왜 납치되었을까? 여기서 이야기는 꼬이기 시작한다.

 

기억이 희미한 전작들처럼 이야기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부분만 건드린다. 별개의 두 사건이 하나로 엮일 때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사건 당사자들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지만 이 둘 모두 엮인 사와자키에게는 이 둘의 관계가 눈에 들어온다. 이부키의 자수가 단순히 야쿠자 내부의 문제만이라면 간단하겠지만 하나의 의문과 섞이면 다른 사건으로 변한다. 여기에 구십이 세의 노인이 가진 이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의 과거는 정치계의 추문을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알려지면 거대한 스캔들이 되고, 유력 정치가가 한 번에 실각할 수도 있다. 당연히 노인의 납치는 그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 중 하나가 언론에 알려지고, 이것을 막기 위해 돈이 모이고, 그들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전달책으로 사와자키가 고용된다.

 

아주 피곤한 상태였지만 간결한 문체와 사와자키의 매력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숨겨둔 하나의 정보가 새로운 단서가 되고, 언제나처럼 그의 탐정사무소는 여러 사람들이 들락거리면서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공간으로 변한다. 복잡하게 얽힌 사연들은 입이 무거운 사와자키를 통해 하나씩 풀리고, 그 범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움직인다. 그 와중에 사와자키에게 빚을 지는 인물이 생기고, 이 인연은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반전은 늘 그렇듯이 남은 분량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조금은 예상했지만 그 이상의 반전이 항상 있다. 시대의 변화가 조금씩 담기고,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언제 다음 작품이 나올지 벌써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저갱
반시연 지음 / 인디페이퍼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생각하지 못한 작품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대 이상이다. 소개글에서 노남용이란 희대의 살인마에 집중했는데 이것은 반만 맞다. 노남용이 목표인 것은 맞지만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내용들이 더 흥미롭다. 어떤 대목은 너무 잔혹해서 상상력의 일부를 차단하고 싶기도 했지만 작가는 장르의 특성을 끝까지 몰고 간다. 치밀한 복선과 반전은 마지막까지 깔끔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 틀어지기는 했지만 그것도 작품 속에 잘 녹여내었다. 세밀한 묘사와 잘 짠 구성은 책을 덮고 난 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연히 작가의 다른 작품에 관심이 생겼다.

 

이야기는 세 남자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싸움꾼, 사냥꾼, 파수꾼 등이다. 싸움꾼은 그냥 평범한 30대 남자였다. 복국 식당에서 야간 근무하는 직원이다. 어느 날 한 남자의 침입으로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던 능력을 깨닫는다. 폭력이다. 상대를 때릴 때 그 느낌과 감촉을 즐긴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사람을 때리지는 않는다. 나쁜 짓을 한 사람만 그 대상이다. 물론 그 결과는 살인이다. 자기 안에 내재된 폭력성과 힘은 그를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몬다. 그때 한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나 그에게 스카우트를 제의한다.

 

사냥꾼. 그는 회사 소속의 전문가다. 40대로 직급은 차장이다. 일이 들어오면 그만의 기술로 상대를 공포로 몰고 간다. 도입부에 나오는 한 직장인의 사연은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가 하는 것은 고문과 ‘네 죄를 말해’라는 물음뿐이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대상은 평생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저지르는 일은 분명 불법이다. 그렇지만 그 대상들이 저지른 일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그는 한 인물에 집착한다. 바로 희대의 살인마 노남용이다. 그만의 특별한 기술로는 노남용을 공포에 빠트릴 수 없다. 몇 년을 면회하면서 그는 그의 약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자유를 잃는 것이다. 차장은 그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파수꾼. 그의 비중은 적다. 입이 아주 거친 어린 소년과 함께 다닌다. 자살 희망자를 찾아가서 그 소원을 들어준다. 그가 만든 약품은 이미 인터넷에서 유명하다. 그가 만든 사이트에 사연을 올리면 파수꾼이 찾아온다. 그 사연 몇 가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하게 만든다. 작가는 이 세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독자의 시선을 살짝 가린다. 이 세 명이 어떤 관계고, 어떻게 만날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 일어났을 때 앞에 깔아둔 복선과 단어 몇 가지가 머릿속에 떠올른다. 내가 마지막에 책을 덮으면서 감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노남용을 처리한다는 설명에서 예상한 것들 대부분이 빗나갔다. 노남용이 저지른 악행은 엄청나지만 작가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악행과 악의를 더 집중해서 다룬다. 괴물을 처리하기 위해 자신도 괴물이 되어야 하는 현실과 감정을 극도로 절제해야 하는 상황은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 회사란 곳도 특별하다. 인간 세상의 특별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그들이 고액을 받고 행동하는 일들은 불법이고, 정상적인 이성을 가지고는 할 수 없다. 한 대리가 잠수를 탄 것도 그 때문이다. 합법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이 회사는 해낸다.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조직이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는 사건 사고를 보면 이성 한 곳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볍게 읽으려고 했다. 노남용을 죽이려는 싸움꾼과 그를 감옥으로 보내려는 사냥꾼의 이야기는 교차하면서 긴장감을 높였다. 섬뜩하고 잔인한 장면들이 이어지고, 이 상황에 무감각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보면서 가벼운 마음을 사라졌다. 그 대신 관계와 상황에 눈길이 갔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상황이, 차장이 가진 스트레스가, 사냥꾼이 벌이는 행동들이 조용히 머릿속에 자라를 잡았다. 몇 장면은 다시 읽고 그 복선과 상황 설명을 되집어야 하겠지만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근래 보기 드물게 완성도가 높은 한국 스릴러가 나왔다. 이 작품도 시리즈로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 주변에는 나쁜 놈들이 너무 많지 않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
박해로 지음 / 네오픽션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형 오컬트 스릴러다. 무속신앙을 바탕으로 공포를 자아내고, 형사물로 그 후반부를 채웠다. 이성을 내세워 하나하나 따지면 이런 종류의 소설은 아주 비이성적이고 재미가 없다. 사실 중반까지 읽으면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서 조금 거부감이 생겼다. 그 죽음이 연쇄살인마에 의한 직접적인 살인이 아니라 우연과 다른 존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사 종환이 수사를 하고, 윤식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존재의 정체가 호기심을 자아내고,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궁금했다.

 

윤식은 아주 짠돌이다. 국민학생 선생인데 다른 선생들의 경조사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다른 선생의 장례식장에 나타난 것이다. 이상하고 어색하다. 그런데 이 장례식장에 온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새어머니 정금옥을 죽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네 번 장례식에 가서, 주문을 외우고, 부적 등의 물건을 태워야 한다. 이야기가 시작할 때는 두 번째 장례식장이었다. 그리고 윤식의 상황과 왜 이런 극단의 상황을 만들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이런 저주의식을 알려준 것은 예쁜 여선생 이영희다. 적산법사란 존재를 통해 그는 정금옥을 죽이려고 저주를 펼친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저주의 주문을 외웠기 때문일까? 윤식은 점점 창백해진다. 그의 저주가 늘어날수록 정금옥의 몸 상태도 나빠진다. 상갓집이 늘어나야 그의 주문이 빨리 완성될 수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죽는다. 멧돼지를 피하려고 하다가 죽고, 차에 갑자기 거리 안내판이 떨어져 죽는다. 이런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윤식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선생의 아들이 감옥에서 죽는다. 그 이전에 윤식이 이영희 선생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산 집에서 귀신같은 존재가 나타난다. 이제 죽음은 윤식의 주변을 하나씩 채워나간다. 그만큼 윤식의 심리 상태는 빠르게 붕괴된다.

 

마지막 주문을 외운 후 2부는 윤식의 절친이자 형사인 종환이 주인공이다. 뭐 아주 탁월한 수사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조금만 노력하고, 공권력을 행사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윤식이 어떻게 가상의 마을로 오게 되었는지, 정금옥과 어떤 악연을 맺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동시에 정금옥의 정체도 같이 밝힌다. 형사물에 오컬트가 뒤섞여 있는데 1부의 강한 무속이 공포를 만든다면 2부는 진실을 하나씩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는 윤식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 강하게 깔려 있다. 이야기들도 현재보다 과거의 분량이 더 많다. 개인적으로 재밌고 흥미롭게 본 부분은 바로 이 2부다.

 

80년대는 3저 현상으로 한국은 아주 경제가 좋을 때였다. 민주화 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져 외견상으로 민주주의가 많이 정착한 듯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데모가 항상 일어나고, 새로운 열망이 샘솟는 시기였다. 작가는 이 시기의 풍경과 문화 등을 집어넣어 과거의 추억을 불러온다. 개인적으로 낯익은 이름과 제품명이 나와 반가웠다. 하지만 몇 가지 용어와 상황들이 나의 기억과 어긋난다. 시대표적으로 시의원이다. 이영희의 아버지가 시의원이라고 했는데 그 당시에 시의회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종환이 전화번호부로 개인정보를 찾으면서 미래의 변화를 말하는 부분은 그 당시에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세밀한 부분에서 작은 부분들이 나의 시선을 잡아끈다.

 

작가는 김동리의 <을화>와 외국 오컬트 소설 <오멘>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을화>는 기억나지 않고, <오멘>은 악마숭배를 다루는 작품으로 몇 년 전에 읽고는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1부의 분위기로 계속 분위기가 이어졌다면 이 소설에 대한 반응도 별로로 그쳤을 것이다. 읽으면서 구성에 대한 불만도 있었는데 다른 분위기로 나눈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 하는 말로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은 자신도 같은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 소설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다른 반전이 일어나면서 그것이 많이 반감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다음 편을 예고하는 떡밥처럼 다가온다. 거대한 악과 싸우는 사람들의 끝없는 대결이 나올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 이덕무 청언소품
정민 지음 / 열림원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0년에 나왔던 책의 개정판이다. 구판 절판이었는데 새롭게 서문을 달고 나왔다. 최근 정민의 책 신간보다 개정판이 한 권씩 나오고 있다. 덕분에 그를 늦게 안 나는 새로운 느낌으로 읽게 된다. 그의 고문에 대한 해석을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선인의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이번에는 간서치 이덕무의 청언소품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실제 이덕무의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66편 전부와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일부(163)편을 우리말로 옮기고 자신의 해설을 덧붙여 엮은 글이다. 한문에 약한 사람에게 이런 책들은 선인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간서치로 먼저 다가온 이덕무를 알게 된 것은 <책만 보는 바보>란 책이었다. 앞부분을 재밌게 읽다가 다른 일로 책을 놓고는 아직까지 완독하지 못하고 있다. 가끔 이런 책들이 있는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덕무를 떠올리면 정조 시대의 수많은 문인들을 떼놓을 수 없다. 실학의 시기에 이름을 알린 수많은 유학자들이 있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간서치로 알려진 그는 어느 순간 머릿속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알려진 것은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이지 그의 글은 아니었다. 이 책을 통해 그의 글을 처음으로 진득하게 만났다.

 

매미와 귤의 맑고 깨끗함을 사랑하여 ‘선귤당’이란 당호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호가 많다고 하는데 자신의 삶을 대변하는 하나의 방법인 듯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은 책이란 <이목구심서>는 그 유명한 연암 박지원도 여러 번 빌렸다고 한다. 이 책들은 풍경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과 옛사람의 향기로운 삶이 조화를 이루고, 이덕무의 해박한 독서와 지적 편력, 사물에 대한 투철한 관심을 담고 있다. 읽으면서 어떤 대목을 보고는 자기계발서가 아닌가 하는 부분도 있고, 또 어떤 대목은 실학자다운 관점이 보인다. 하지만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역시 ‘간서치’이다.

 

나도 책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이덕무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가 잡기로 치부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보니 그가 주장하는 독서와는 사뭇 다르다. 그가 경계한 책 쌓아두기를 아주 많이 하고 있고, 열심히 집중해서 읽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주로 흥미위주의 장르소설을 좋아하다보니 사고의 깊이를 더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바른 자세는 이미 거북목이라 변명할 거리가 아니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경우는 바쁘다는 핑계를 댄다. 배 부른 것보다 빈 배로 책을 읽을 때 더 좋은 소리와 집중을 한다는 대목에서는 공감한다. 부른 배는 바르지 않은 자세와 나태함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런 글들은 가끔 그 시대의 한계를 알려준다. 친구를 위하는 지극한 마음이 아내의 노동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살짝 눈에 거슬린다. 시대에 맞게 해석해야 할 부분도 많다. 역자가 덧붙인 해석이 개인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좋은 글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점점 정보가 많아지고, 알아야 하는 것이 많아지는 현실에서 그 선인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시대와 맞지 않다. 그도 여러 번 지적했듯이 현실에 맞는 해석과 행동이 필요하다. 후인들이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역자와 편집자들이 편집한 한문들은 현실의 필요에 의해 편집되었다. 한문에 띄어쓰기가 없어 해석의 어려움이 있지 않은가.

 

옛 기억을 더듬으면 한 글자의 어원을 찾는 과정이 나온다. 우리가 그냥 무심코 지나간 그 한 글자가 그 사람의 학식과 공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고 삶과 행동을 엮어서 풀어낸 공부와 더불어 나의 독서를 깊이 반성하게 만든다. 속도와 권수에 집착했던 과거와 현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추위에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을 만들어야 했지만 독서만은 막을 수 없었던 그의 삶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는 현대인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부분이다. 올바른 삶의 자세를 바로 잡는데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도 될 것 같다. 선인들의 피와 땀이 아로새겨진 책들을 죄다 읽고 싶다는 무모한 욕심과 바보라는 단어가 왠지 가슴에 강한 울림을 준다. 그리고 문장의 길이와 그 글을 해석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저자는 잘 보여준다. 짧은 글이 더 긴 해석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간결함 속에 깊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 S. From Paris 피에스 프롬 파리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사 모으다보면 잘 읽지 않는데 계속 사는 작가가 있다. 그 중 한 명이 마르크 레비다. 그의 출간 목록을 한 권씩 보면서 꽤 많은 제목이 낯익다. 할인행사에 산 책도 있고, 헌책방에서 산 책도 있고, 궁금해서 사놓은 책도 보인다. 그런데 이 책들 읽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읽지 않은 것이 확실한 책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번에 확실하게 읽은 책 한 권이 생겼다. 바로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책이다. 흥행하는 작가의 작품답게 가독성이 굉장히 좋다. 결과는 뻔한데 그 과정이 재밌다. 아마 연속적으로 읽으면 질리겠지만 가끔 한 권씩 이런 책을 읽는다면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간단한 설정이다. 첫 작품이 성공한 미국 소설가 폴과 영화배우 미아의 로맨틱 코미디다. 미아의 남편은 유명 배우이지만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그 남편을 사랑하지만 배신감을 이기지 못해 파리로 온다. 이곳에서 절친한 친구 다이지가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원래 건축사였던 폴은 첫 작품이 대박나면서 전업 작가로 나선다. 그 다음 책들은 그렇게 썩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계속 작품을 내고 있다. 이들 각자의 일상을 먼저 보여준 후 한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를 통해 연결된다. 원래 이 만남은 이들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폴은 경이라는 한국 번역가 여자 친구가 있다. 여자 친구라고 하지만 1년에 한두 번 오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녀를 좋아하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이런 그에게 첫 작품 <저스트 라이크 헤븐>의 주인공인 아서와 로렌이 등장해 작은 변화가 생긴다. 그 첫 작업이 폴 몰래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에 가입하고 소개글을 올린 것이다. 로렌이 가입했다면 아서는 더 적극적으로 폴에게 어울릴 듯한 여자를 찾아 메모를 보낸다. 이런 시도가 조금은 평온했던 폴의 일상에 작은 변화를 만들어낸다. 미아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했다.

 

미라, 영국 여배우인 멜리사 바로우가 본명이다. 남편의 외도 때문에 친구 집에 피난 왔지만 마음속으로는 남편이 잘못을 빌기를 바란다. 그녀가 친구 다이지를 위해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를 검색한다. 그러다 폴의 정보를 본다. 어느 로맨틱코미디처럼 처음에는 친구를 위한 의도였다. 아직 자신은 남편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 여배우이지만 머리 모양을 바꾼 후 그녀를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 파리에서 지내는데 별 무리가 없다. 웨이트리스로 다이지를 도와주면서 자신의 삶과 감정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폴과의 만남은 이 연장선에서 벌어진 일이다.

 

첫 만남은 아서의 장난(?)이었다. 네 명이 함께 식사하는 것처럼 폴에게 말해 놓고 이 부부만 다른 곳으로 간다. 미아의 존재조차 몰랐다. 미아는 폴이 보여주는 몇 가지 반응이 이상하다. 미친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주방장이라고 속인 책 어색한 만남을 이어간다. 서로에게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다. 하지만 운명은 왠지 모를 이유로 미아의 가방 속으로 폴의 핸드폰을 넣어둔다. 둘은 다시 만나고, 친구라는 선을 긋는다. 서로에게는 경과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자신들의 연인을 찾기 위한 만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로맨틱코미디 공식대로 흘러간다. 엮이고, 꼬이고, 서로의 감정을 알게 되는 시간들이 이어진다. 그 사이에 폴의 비행공포 문제점 하나와 한국에서 대박난 일 때문에 한국국제도서전에 오는 일이 생긴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런 일이 현실에서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수많은 독자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특히. 재밌는 부분은 프랑스 문학상을 하나도 수상한 적이 없는 작가가 소설 속에서 상을 하나 받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경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문학상이 추구하는 바와 작가가 추구하는 바가 다름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시간 나면 작가의 다른 작품도 한 권씩 읽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