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하루 - 생활 모험가 부부가 담아낸 소소한 계절의 조각들
블리 지음, 빅초이 사진 / 소로소로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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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모험가 부부와 숲이란 단어에 혹했다. 포토 에세이란 소개에 금방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 생각대로 책을 끝까지 읽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부분 사진으로 채워져 있고, 짧은 글이 작은 감상으로 달려 있다. 덕분에 생활 모험가 부부의 숲에서의 일상을 조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여유가 묻어나고,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물론 몇 가지 사진에서는 장르 소설 애호가의 상상력이 끼어들고, 괜한 산불 걱정을 했다. 읽는 동안 여유를 가졌고, 그 짧은 글에서 공감하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다룬다. 이 아름다운 풍경과 사진들을 보면서 어딜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이 책의 편집자는 그 장소를 알려주지 않는다. 가을의 산 모양을 보고 제주도인가? 하고 의문을 품었는데 일본 후지산이다. 눈이 쌓여 있지 않는 후지산은 괜히 낯설다. 그리고 그 후지산을 트레킹한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나무와 그늘이 없어 산행하는 동안 힘들었다고. 이후 이어지는 사진들을 보면서 그곳도 후지산인지 궁금했다. 내가 생각한 풍경과 달랐기 때문이다. 장소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는 것은 아쉽다.

 

빅 초이의 사진을 보면 화려하지 않다. 풍경과 사물과 사람이 어우러져 있다. 숲의 풍경과 사물이 같이 놓여 있는 사진도 있고, 사람이 중심인 사진도 있다. 전문가의 손길에 의해 연출된 장면과 잘 찍은 사진 한 컷은 잠시 동안 호흡을 멈추고 쉴 시간을 준다. 각 계절마다 달린 조금 긴 감상보다 더 시간을 들여서 보게 되는 사진도 있다. 캠핑을 하지 않기에 그들이 가진 장비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지만 괜히 관심을 두고 오랫동안 쳐다본다. 그러고 보니 숲이나 계곡에서 하루를 보낸 것이 정말 오래되었다. 도시의 시간 속에서 나의 시간을 잠시 잃은 것 같다.

 

일상을 모험으로 채운다면 어떨까? 그 모험이 꼭 위험하고 화려할 필요는 없다. 어릴 때 나의 모험은 조금 먼 동네였는데 이제는 먼 도시나 다른 나라로 바뀌었다. 작은 여행의 즐거움을 잃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묻혔다. “모험은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고.”라고 할 때 공감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면서 작은 변화들을 더 많이 거부한다. 동네의 새로운 길이나 식당을 찾지 않고, 해외여행에서도 낯선 길을 멀리한다. 육체가 늙는 것보다 어쩌면 마음이 더 빨리 늙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움직일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은 늘어났지만 나의 심리적 공간은 왠지 더 좁아졌다.

 

숲의 사계절을 담고 있다보니 그들의 옷과 장비와 풍경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봄의 옷을 보면서 두툼하다고 생각했지만 초봄의 숲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서늘하다. 그들이 친 텐트와 다른 장비를 보면서 얼마나 빨리 장소 세팅을 끝낼까 하는 궁금함이 생긴다. 오래 전 멍청한 다섯 남자가 아주 힘들게 오랫동안 텐트를 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 그대로의 소박함에 머무는 하루’란 표현이 있지만 다른 생각할 틈 없이 하루의 일과에 집중하게 되는 숲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 같다. 대부분 이 부부만 사진에 등장하는데 가끔 다른 사람들도 보인다. 함께 하는 즐거움이 사진과 짧은 글에서 느껴진다. 캠핑이 계속되면서 술보다는 커피와 차를 더 마신다는 말에 그들의 모험을 새롭게 들여다본다. 숲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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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파서블 포트리스
제이슨 르쿨락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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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컴퓨터는 지금 기준에서 보면 고대 유물처럼 보인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휴대폰을 볼 때보다 더 심하다. 얼마 전 옆집에서 준 뽀로로 컴퓨터의 그래픽을 보면서 80년대 오락실 그래픽이 떠올랐다. 최근에 나오는 3D가 아닌 도트로 표시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80년대 컴퓨터보다 훨씬 성능이 좋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빌리가 만든 그래픽을 보고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기억을 더듬으면 결코 이것보다 더 좋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컴퓨터의 가격을 보고 놀란다. 1987년인데, 메모리가 겨우 20메카인데 수천 불이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열네 살 소년들이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를 원한다. 그 이유는 바나 화이트의 누드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고 인기 퀴즈쇼 ‘휠 오브 포춘’의 진행자다. 자신들의 여신이 엉덩이를 드러낸 표지를 보고 그냥 넘어간다면 그들은 결코 평범한 소년들이 아니다. 이들은 이 잡지를 얻기 위한 작전을 짠다. 길 가는 어른에게 잡지 가격보다 더 주고 잡지를 받는 계획도 세운다. 쉽지 않다. 이런 소년들의 열망이 가득 담긴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빌리의 관심사와 사랑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 시간 속에 소년들은 조금씩 성장한다. 작가는 1987년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그 시절을 지난 독자들은 몇몇 익숙한 이름에 잠시나마 향수에 빠진다.

 

9학년 남자 세 명이 성인잡지를 구할 방법은 무엇일까? 오래전 세운상가에서 포르노 태입을 구입한 친구의 이야기가 순간 떠오른다. 비밀리 접속하고, 고액을 전달했지만 내용물은 동물의 왕국 혹은 전원일기였다는 그 도시 전설 말이다. 이 소년들도 마찬가지다. 성과 여자의 몸에 관심이 있지만 나이라는 제한 때문에 당당하게 구할 수 없다. 자신들을 위해 잡지를 사줄 것 같은 성인에게 돈을 주면서 사달라고 하는데 이 남자가 놀라운 제안을 한다. 더 많이 사서 학생들에게 빌려주거나 웃돈을 받고 파는 사업이다. 이 매력적인 제안에 빠져 가진 돈 모두를 준다. 그리고 그 남자는 돈을 가지고 사라진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이들에게 남는다.

 

바나 화이트에 대한 열망을 넘어선 집착은 그 잡지를 구해줄 수 있다는 불량소년 타일러와 연결된다. 그가 들어가서 잡지를 사서 전달해주면 될 것 같은데 그는 밤에 몰래 들어가 돈을 놓아둔 후 잡지만 가지고 나오면 된다고 말한다. 대략적인 방법과 함께 아주 중요한 보안장치 해제 번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아주 잘 생긴 하지만 손에 문제가 있는 클라크가 젤린스키 상점의 딸 메리를 유혹하면 금방 비밀번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뚱녀란 이미지를 가진 그녀를 유혹할 마음이 클라크에게는 없다. 하지만 성인으로 분장해 잡지를 구하러 갔을 때 메리의 프로그램 실력에 반한 빌리가 자발적으로 나선다. 그의 목적은 비밀번호가 아닌 자신이 프로그램한 게임 <임파서블 포트리스>을 완성하는 것이다.

 

클라크와 알프가 젤린스키 상점으로 침입하기 위한 루트를 짤 때 빌리는 메리와 새로운 프로그램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의 게임을 완성해간다. 이때 빌리의 머릿속에는 바나 화이트보다 자신의 우상인 플레처 멀리건을 만나는 게 우선이다. 둘의 협력 작업은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여간다. 둘의 사이도 점점 가까워진다. 그런데 알프가 바나 화이트 사진을 예약 판매한다. 반드시 구해야만 한다. 하지만 빌리는 메리와 알콩달콩 사랑을 키우면서 자신의 게임을 완성한다. 그러다 알프가 돈을 잃는다. 이제 그 잡지를 구하지 않으면 돈을 낸 친구와 선배들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작가는 10대 소년들의 말도 되지 않는 대결과 대화를 곳곳에 녹여내면서 웃게 만든다. 추억의 가수들과 배우들 이름이 등장해 향수에 빠진다. 사실 이 소설의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 80년대 문화와 풍경들이다. 여기에 열네 살 소년의 첫사랑을 집어넣어 사랑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멋지게 그려내었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장면으로 꼽고 싶은 것은 빌리가 경찰서에서 돌아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엄마에게 말하고, 엄마가 그 이야기를 진시하게 듣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있기에 빌리는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친한 친구 둘이 있다.

 

10대들의 유쾌한 행동들은 흥미롭고 재밌다. 하지만 가끔 그들의 모험 끝에서 만나는 현실은 너무 잔인하다. 작가는 이 현실을 보여주지만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소년들을 보여준다. 얼마나 활기차고 쾌활한가. 빠르게 넘어가는 이야기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가졌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많다.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겠지만 이 소년들이 누리는 문화들이 너무 미국적이란 것이다. 게임에 문외한이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여자 누드가 나온다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열여덟 번이나 빌려본 이들을 보면서 지금은 너무 쉽고 흔한 일이 된 여자의 누드가 떠오른다. 바나 화이트의 <플레이보이> 표지가 책소개에 나온 것을 보면 세월의 변화를 더 많이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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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워줄게 미드나잇 스릴러
클레어 맥킨토시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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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최근 나무의철학 출판사에서 매년 연속으로 내고 있는데 언제나 관심만 두고 있었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많다 보니 우선순위가 뒤로 밀렸다. 개인적으로 심리 스릴러를 찾아서 즐겨 읽지 않지만 좋은 작품은 늘 챙긴다. 그런데 문제는 심리 스릴러들의 경우 책 중반까지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작가가 그려내는 심리 묘사나 상황 등이 나와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1부가 끝날 때까지 좀처럼 이야기 속에 몰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2부와 3부를 보면서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자살일까? 다시 생각해봐.” 엄마의 기일에 전달된 한 장의 카드는 애나의 일상의 뒤흔든다. 19개월 전 아버지 탐이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고, 그 7개월 후에 엄마 캐럴라인마저 그 절벽에서 자살했다. 부모 두 분이 모두 같은 곳에서 자살한 일은 애나에게 엄청난 충격이다. 경찰은 신고 전화와 다른 조건들을 검토한 후 자살로 처리했다. 그 후 애나는 심리 상담사 마크를 만났고, 딸 엘라를 낳는다. 출산 후 겨우 일상으로 복귀하는 듯했는데 이 카드 한 장이 그 동안 억눌렀던 그녀의 감정을 뒤흔든다. 부모님이 타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확신을 가지고 경찰의 재수사를 요구하려고 한다. 그곳에서 은퇴 후 경찰서 민간 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머리를 만난다.

 

소설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진행된다. 애나와 머리의 삶과 애나의 부모인 듯한 사람의 이야기다. 애나가 재수사를 접수했지만 이 신청은 정식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머리가 위에 정식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문의 카드를 제외하면 애나 부모의 자살을 타살로 규정할 어떤 증거 자료도 없다. 규정대로라면 위에 보고해야 했겠지만 그는 자신의 일로 처리한다. 그리고 그의 불안한 일상이 드러난다. 바로 아내 세라의 정신병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해와 자실을 시도한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매일 그녀를 면회 간다. 그가 현직 형사였을 때 그녀가 그를 많이 도와준 적이 있다. 이 사건이 다시 둘의 힘을 합치게 한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머리다.

 

일반적으로 자살로 끝난 사건을 타살이라고 말하면서 재수사를 요구하면 어떤 반응이 올까? 아마 대부분은 그녀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것이다.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산후우울증을 의심할 수도 있다. 마크가 그 카드를 보고도 꿈쩍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살인사건으로 확신한 그녀에게는 범인을 잡겠다는 의지가 가득하다. 머리에게 계속 연락을 한다. 그녀의 이 의지가 사건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녀 가족의 숨겨진 비밀들이 하나씩 밝혀진다. 이 과정을 작가는 교묘한 서술로 살짝 독자의 눈을 가린다. 뒤에 이어지는 반전들은 이 영향력과 나의 선입견이 같이 작용한 탓이다.

 

비극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일어난다. 하지만 그 씨앗은 오랜 시간을 거친 후 부화하기도 한다. 이 가족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가족 내부의 문제가 하나씩 드러난다. 흔한 스릴러의 공식에 따라 간다면 삼촌 빌리나 엘라의 아버지인 마크 등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다. 처음 시선이 간 인물도 바로 이들이다. 이들에게는 애나의 부모를 죽일 이유가 충분히 있다. 바로 돈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이 전면으로 나서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바뀐다. 이 등장인물이 반전의 연속을 만든다.

 

소설 속에서 애나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끝없이 맞이한다면 머리는 자료를 모으고 조사를 하면서 이 사건 뒤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다. 그가 한 발 나아갈 때면 사건도 같이 한 발 나아간다. 그리고 그 차이는 점점 좁혀진다. 그의 수사 방법은 발로 뛰는 전통적인 방식과 인터넷을 통한 조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특징은 날카로운 관찰과 통찰력이다. 어느 정도는 이 부분이 불만스럽다. 독자에게 같이 전달되는 자료가 너무 없기 때문이다. 고전 미스터리에서 자주 사용하던 설정이다. 마지막 애나의 에필로그도 살짝 아쉽다. 너무 많이 나간 느낌이다. 머리와 세라의 첫 만남 장면이 의미하는 바도 놓인 위치를 생각하면 애매하다. 개인적으로 머리를 계속 등장시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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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그레이스 페일리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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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세 권의 단편집으로 미국문학의 전설이 되었다는 소개글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하루키의 에세이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이 소설에 대한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다. 물론 그는 그녀의 소설이 결코 쉽다고 말하지 않는다. 열성적인 독자들은 “소중하게 숙독하고 맛을 완전히 이해하고자 노력하는데, 질 좋은 오징어를 씹듯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곰곰이 맛을 음미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자신은 즐겁게 읽었다고 하는데 절대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소설을 아주 힘겹게 읽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그레이스 페일리 소설 읽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열일곱 편의 단편들은 분량이 제각각이다. 1960년부터 1974년까지 쓴 단편들인데 읽다보면 이 시간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그것은 페이스란 등장인물 때문이다. 페이스란 이름이 직접 등장하는 이야기도 몇 편 있고, 그녀인 듯한 인물이 등장하는 단편도 몇 편 보인다.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몇 번의 숙독이 필요할 것 같다. 아직 이 작가의 소설이 지닌 매력을 깨닫지 못한 나에게는 솔직히 어려운 일이다. 무형식의 형식이란 것도 나에겐 색다른 즐거움보다 당혹스럽고 낯설고 어렵다. 그렇다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드는 것도 아니다. 단지 좀더 집중해서 읽고, 이야기 그 자체를 즐겨야한다는 의미다.

 

소설을 읽으면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노골적인 표현들인데 그 시대를 감안하면 외설죄가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떤 명확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 자유로움을 부여한다. 이런 구성은 “현실의 인물이든 가공의 인물이든 모든 이는 삶에서 열린 운명을 누릴 자격이 있다.”란 문장과 선이 닿아 있다. 그녀가 글을 쓰는 현재에는 이야기 속 인물들의 미래는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나무에 앉아 의미 없이 수다를 떨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에 이런 무의미한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기승전결이 없다 보니 갑자기 뚝 끊어지듯이 끝나는 이야기들이 많다. 단편의 매력 중 하나이지만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집중하지 않으면 이야기 속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순간도 생긴다. 유대계 여성의 이야기지만 그 흔적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소설 속에서 이런 사실이 계속 나오지만 말이다. <소녀> 같은 단편은 사회성 강한 미스터리 단편 소설로 읽어도 부족함이 없다. 가까이 다가가서 상황을 만들다가 사건이 발생한 후에는 관찰자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논리적인 추리로 마무리한다. 사실 이런 작품들이 많았다면 이 단편집 읽기기 훨씬 쉬웠을 것이다.

 

삶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인물의 환경에 따라 그 모습은 더 많이 변한다. 이야기는 나쁘게 말하면 중구난방이고 좋게 말하면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하는 대화 방식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소설을 읽을 때 이런 대화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 여유가 많고, 그 대화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면 집중해서 그 대화 하나 하나를 따라가겠지만 보통은 그냥 지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그 재미를 충분히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는 전개도 작품을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하지만 늘 이런 소설이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갑자기 어느 순간 이야기들이 내 안에 들어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와 재미를 전달해준다. 다만 이 작품의 경우는 아직 그 숫자가 적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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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역 폭발사건
김은미 지음 / 제8요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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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광고 문구로 나를 유혹했다. 재일 조선인의 후예 코헤이와 제국주의 부활을 노리는 일미회와 일본 생체 실험의 생존자이자 윤동주의 연인 강복순을 둘러싼 추격전이란 설정이다. 이 설정은 소설 속에서 그렇게 매력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실제 기대했던 긴박감이나 긴장감이 후반부에 갈수록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독성이 좋아 읽기에 무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잘 읽히는 소설이었다. 광고에 나온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뺀다면 더욱 그렇다.

 

인적이 드문 어두운 새벽 신주쿠역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일본 경찰은 이 폭발물을 둔 인물을 금방 잡지만 그는 범인이 아니다. 그는 돈을 받고 그곳에 놓아두었을 뿐이다. 당연히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랐다. 이 작은 사건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한 결말이다. 왜 이 폭발사건이 일어났는지, 이 폭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등이 펼쳐진다. 그리고 시간은 한 재일조선인 소년 코헤이의 과거로 넘어간다. 중학생 때 반 친구들에게 재일조선인이라고 차별받고, 외톨이처럼 보내다가 재일한국인들과 어울려 지낸다. 이때의 만남이 잠깐 친구를 만들어주지만 이 만남이 계속 지속되지는 않는다. 조용히 사라진다.

 

코헤이의 어머니는 재일조선인이다. 이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한 통의 우편이 도착한다. 준영이란 이름으로 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어딘가로 떠난다. 부모님이 떠나기 전날 코헤이는 예지몽을 꾼다. 부모님이 차 사고로 돌아가시는 꿈이다. 그리고 실제 이들은 차 사고로 죽었다. 부모의 죽음은 그로 하여금 세상과 떨어져나가게 만든다. 친구들과도 멀어진다. 그러다 한 번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드는 일이 생긴다. 바로 윤하다. 윤하는 자매학교 행사 때문에 일본에 왔다. 코헤이는 윤하에게 바로 돌아가라고 쪽지를 보낸다. 학교 행사 때문에 온 그녀가 쉽게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날 밤 지진이 일어난다. 그녀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코헤이가 도와준다. 다른 나라와 환경은 몇 번의 메일과 편지를 오고 가게 만들지만 어느 순간 시들해진다.

 

코헤이와 윤하가 현재를 보여준다면 복순은 과거를 알려준다. 일제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농지를 잃고 만주에서 땅을 개척하던 부모는 과로 등으로 한 명씩 죽는다. 공부 잘하는 오빠는 그곳에 머물고, 복순은 일본으로 식모살이하러 온다. 여기서 주인 아들의 친구인 동주를 만난다. 동주와의 만남은 복순으로 하여금 민족의식에 눈 뜨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녀가 독립운동에 매진하지는 않는다. 이 과정에서 둘은 더욱 가까워진다. 그러다 이들은 모두 일본 경찰에 잡힌다. 소위 내란죄이지만 실제는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두려워한 일제의 무리한 행동이다. 이 장면들을 보면서 이 둘의 애절한 사랑이 그려질 것 같았는데 역사에 드러나지 않은 인물을 부각시키기에는 자료가 너무 없다. 이 이야기는 코헤이와 윤하 이야기 사이에 조금씩 들어간다.

 

현재로 넘어오면 윤하는 한국에 흔한 계약직 직원으로 살고 있다. 그러다 계약 해지되고, 남자 친구에게도 차인다. 그때 코헤이가 떠올라 일본에 온다.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코헤이 입장에서는 민폐다. 그는 사람과 멀어진 시간 동안 열심히 공부해 의사가 되었고, 가업을 다시 시작했다. 간호사 한 명을 두고 동네 병원을 운영한다. 그런데 이 평온한 일상에 윤하가 끼어든다. 예지몽의 불안을 가진 그는 윤하를 자신의 집으로 강제로 데려 오고,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자신을 둘러싼 일상에 문제가 생기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바람대로 일이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둘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조금 방심하는 순간 윤하가 납치된다.

 

항상 누군가 코헤이와 그의 집을 감시하고 있다. 일미회의 하수인들이다. 한 개인이 일본의 막후 세력을 이길 방법은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신주쿠역 폭발사건이다. 이 사건과 함께 일미회를 압박한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긴박한 상황들이 이어져야 하는데 작가는 너무 느슨하고 일상적으로 풀어간다. 오랫동안 숨겨왔던 복순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녀의 도박이 일미회의 수뇌부 한 명을 압박한다. 이 순간도 역시 큰 긴장감을 불러오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잘 짠 구성과 각 요소에 역사를 녹여낸 설정과 매끈한 문장이 돋보이지만 강한 임팩트가 없다. 코헤이의 액션도 하수인을 잡기 위한 순간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기대한 농밀한 서스펜스는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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