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라 할 만한 것 - 오시이 마모루가 바라본 인생과 영화
오시이 마모루 지음, 장민주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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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때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진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쉽게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비디오테이프로 봤다. 주로 본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 등의 작품이었다. 영화 잡지 등에 나오는 작품들에 대해 관심이 높았는데 그 중 한 편이 <공각기동대>였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주인공의 누드톤을 빼면 강하게 인상에 남는 것이 없었다. 기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뇌를 이해하지 못하니 그들이 펼치는 활약이 낯설기만 했다. 그러다 TV용을 보고, 인터넷과 전뇌에 대한 이해가 조금 깊어지자 다른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감독이 쓴 인생과 영화 이야기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두툼한 책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과 영화를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말했듯이 이 책은 우선순위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순위는 언제나 선택의 문제가 생긴다. 그의 인생이나 애니메이션 스텝들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말한다. 재밌는 것은 남녀의 차이다. 여자 스텝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남자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생활력 때문이다. 남자 스텝들은 오타쿠가 많은 것 같은데 승진과 성취감이 그렇게 큰 것 같지 않다. 그러니 현실적인 여성들이 이들을 남편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원화를 그릴 때 더 빨리 많이 그려서 승진하려는 욕구가 없다. 이런 사람들이 감독까지 올라오는 일은 없다.

 

그의 직업관은 명확하다. 능력 우선이다. 개인사는 사회적인 문제가 크게 되지 않으면 신경쓰지 않는다. 감독이란 위치도 자신의 경험으로 풀어낸다. 감독이 촬영 현장에 늦게 나타나는 것도 다른 스텝이 말해 준 것이다. 그가 빨리 나타나면 다른 스텝들이 긴장하고 서두르게 된다. 프로듀스와 다투는데 이것도 서로의 일을 하는 것이다. 입장 차이를 이해하고 있다. 일과 개인을 분리하고 있는데 그에게 최고의 파트너는 집에 있는 개다. 너무 관계가 밀착되어 있지 않고 복잡하기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나의 삶을 살짝 엿봤다.

 

가짜뉴스와 정치로 넘어가면 그의 정치관에 조금 의문이 생긴다. 특히 공모죄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민스럽다. 그는 “공모죄나 새로운 헌법을 어떻게 올바르게 운용해나갈 것인가”라고 말한다. 하나의 법이 만들어진 후 잘못 운용될 경우 바로 잡으면 된다는 생각일 테지만 현실은 이것을 악용할 가능성이 더 높다. 자신이 “그 기술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인간 존재가 파악하기 어렵다. 더욱이 뒤에 숨겨놓은 인간의 악의에,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둔감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정치인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주제가 계속 눈에 거슬린다.

 

그의 글 중에서 내가 자주 내뱉는 말이 있다. 원전 부분이다. 원전이 안전하면 도쿄 근처에 지어라는 말과 같이 서울에 원전을 지어라는 말이다. 인간들의 이율배반적 표현은 곳곳에 널려 있다. 나도 물론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술이나 과학 등이 아니다. 인간이다. 인간보다 재밌는 게 없다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 전쟁영화도 그 속에 사람들의 사연들이 담겨 있기에 감동을 준다. 이것은 <신 고질라>의 안노 히데아키의 영화를 비평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영화는 재밌지만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감독의 시선에서 본 평론은 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이해하는 영화의 깊이를 알려준다. 아직 <신 고질라>를 보지 않았는데 검색하니 정치 풍자극이란 평가가 많다. 조금 혼란스럽다.

 

아마 김지운 감독이 새롭게 만든 <인랑>이 상영되지 않았다면 이 책은 이렇게 빨리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김지운 판 <인랑>을 보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예전 판과 함께 보고 싶다. 그리고 아직 보지 않은 오시이 마모루의 다른 영화도 보고 싶다. 어릴 때보다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알게 된 것이 있으니 영화 속에서 그의 철학을 조금은 찾아내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끔 영화감독들의 영화평을 읽고 뭔 소린가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들이 보는 세계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한동안 끊다시피한 영화를 다시 시작해야 할 모양이다. 나의 우선순위에 조금 변화를 줄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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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첸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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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바리코, 낯선 이름이다. 이 이름보다 더 낯익은 것은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다. 물론 이 영화 본 적이 없다. 거의 20년 전 영화이다 보니 봤다고 해도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저자의 이력을 보았다. <이런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아! 그 소설의 작가다. 태국 여행 중 아주 재밌게 읽었던 그 소설. 다른 소설들을 번역해 주었으면 했던 그 작가. 그런데 이번 작품은 소설이라고 하기 좀 그렇다. 1인극을 위한 모놀로그다. 이 부분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노베첸토. 정식 이름은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다. 그는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났고 평생 배 위에서 살았다. 피아노 위에서 발견되었고, 선원 대니 부드먼 손에 키워졌다. 출생 신고가 되지 않아 그 어떤 신고서에도 그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버지니아 호와 사람들의 소문 속에만 존재한다. 그는 천재 피아니스트다. 너무나도 뛰어난 연주를 하는데 그의 음악을 들으면 사람들은 감정의 홍수 속에 파묻힌다. 1등실 손님이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매일 3등실로 내려왔다. 이런 소문은 멀리 퍼져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실존 인물인 ‘젤리 롤 모턴’과 피아노 경합을 벌이게 된다. 이 장면은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그 이미지를 그려보지만 음악은 머릿속에서 재생되지 않는다. 불협화음 가득한 재즈 몇 가락이 전부다. 영화는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이런 음악을 다룬 책들을 읽을 때면 늘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어떤 음악이면 이런 감정들을 불러올까 하고. 만약 이런 음악을 듣게 되면 나의 반응은 어떨까?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벤트가 하나 펼쳐진다. 그것은 고정되지 않은 피아노에 앉아 연주를 하는 장면이다. 파도에 따라 배가 기우는데 그 움직임 속에서 그 어떤 충돌도 없이 멋진 연주를 한다. 마지막에 유리가 파손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 장면들을 떠올리면 아주 멋진 영상이 재생된다. 비현실적이지만 환상적이다. 이렇게 이 모놀로그는 아주 강렬하고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노베첸토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배에서 내릴 결심을 한다. 그런데 그날이 되자 몇 발자국 내딛은 후 포기하고 배로 돌아온다. 그 앞에 펼쳐진 더 넓은 세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와 피아노는 한계가 있는 곳인 반면 세상은 그에게 무한으로 다가왔다. 불안감이 그를 배에 묶어두었다. 88개의 건반으로 무한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가 세상의 넓이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제2차 대전과 선박의 마지막이다. 버니지아 호가 폐선 처리될 때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하고. 하지만 불안한 예측은 현실이 된다. 마지막 장면은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다.

 

모놀로그란 것을 의식하는 동시에 영화적 연출을 생각한다. 문장을 읽을 때는 모놀로그를, 이미지를 떠올릴 때는 영화다. 이런 의식적인 행동은 이 짧은 글에 다양한 재미와 깊이를 제공한다. 만약 영화를 먼저 보았다면, 나중에 본다면 영화의 이미지가 이런 상상력을 제한할 것이다. 또 작가는 장면과 상황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읽을 때 나도 모르게 강하게 힘을 주거나 연극적인 음성으로 읊조린다. 당분간 노베첸토의 이미지가 일상 속에서 불쑥 불쑥 떠오를 것 같다. 명확하지 않고 실체도 없는 음악도 이미지로 다가온다. 짧은 글이지만 강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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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국화
매리 린 브락트 지음, 이다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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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와 제주 4.3 사건을 다룬다는 점 때문에 읽기를 주저했다. 한 여성의 참혹했던 삶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겪은 고통을 읽는 내내 떠올리며 받아들이는 과정이 어떨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저는 자꾸 눈에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졌다. 결국 읽게 되었고, 예상한 아픔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마지막 장으로 가게 되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혀지고, 눈물이 흘렀다. 과거의 하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기억해달라고 할 때, 아미가 소녀상을 보고 떠난 언니를 떠올릴 때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소설은 두 명의 여인이 주인공이다. 하나와 아미다. 이 둘은 자매다. 제주 해녀의 딸들이다. 하나가 언니고, 아미가 동생이다. 1943년 하나는 물질을 하다가 일본군이 동생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그 앞에 나섰다. 일본이 어린 소녀들을 공장으로 데려가는 것을 알기에 이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선택은 두 자매를 역사의 비극 속으로 끌고 가는 갈림길이었다. 하나는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었고, 아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아픔을 간직한 채 제주 4.3사건과 한국전쟁을 경험한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하나에게는 1943년이란 과거 시간만 다루고, 아미는 현재 속에서 과거를 말하게 한다.

 

과거는 그 시점에서 현재다. 하나는 자신이 끌려갈 때 어떻게 될지 몰랐다. 모리모토가 그녀를 겁탈하고 그녀에게 집착할 때도 그녀는 자신이 삶이 성 노예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제주에서 시작한 이동이 만주로까지 이어져 한 건물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기다린 것은 성욕에 휩싸인 수많은 군인들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루에도 십 수 차례 겁탈이 이어졌다. 도착 첫날 한 여성이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이것을 안 게이샤 출신 위안부 케이코가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이 참혹한 시간 속에서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케이코가 뺨을 때린다. 이때 소녀들 몇몇이 소리죽여 운다. 위안소 속으로 다시 돌아갈 때 하나는 사라지고 사쿠라가 남는다. 그녀 속에 남아 있던 인간성이 사라진다.

 

언니의 도움으로 끌려가지 않은 아미의 삶도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제주 4.3사건으로 부모님을 잃고, 살기 위해 경찰 출신과 결혼한다. 제주 4.3사건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 당시 어떤 참혹한 일이 있었는지 알기에 아미와 그 마을 사람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에 공감한다. 사랑하지 않는 남편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두었고, 생계는 해녀의 물질로 유지했다. 남편이 남는 시간 동안 자식과 사랑과 정을 쌓았지만 그녀의 속은 돌처럼 굳어갔다. 자식들을 사랑하지만 남편에겐 일말의 정도 줄 수 없었다. 오랜 세월 사실을 숨긴 채 살아야 했던 그녀였기에 자식들은 엄마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그녀가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성 노예가 된 하나에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긴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조금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하나에게 집착하는 모리모토의 존재는 가능하지만 이후 벌어진 상황과 사건이 나에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중에 결과만 놓고 보면 하나의 삶이 아미의 삶보다 평온하다. 물론 단절된 이야기 속에 또 어떤 아픈 과거가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최악은 벗어났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현재의 하나가 어딘가에서 나타날 것 같았다. 하지만 작가는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희망으로 마무리한다. 제주로 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아미는 평생 수치심을 안고 살았다. 이것은 한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고 스러질 동안 두 번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부끄러움. 목청껏 정의를 외치지 못한 부끄러움. 사는 이유도 알지 못하면서 계속 살아가는 부끄러움.” 이것이 평생 아미를 지배했다. 그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위안부 집회에 오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언니 하나의 소식을 듣고 싶어서. 결국 마주한 것은 소녀상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것인지, 아니면 실제인지 모르겠지만 소녀상의 소녀는 하나의 사진이란 설정으로 이어진다. 얼마 남지 않는 생명을 부여잡고 그 소녀상 옆에 앉았을 때, 손자가 나중에 소녀상에 절을 할 때 눈시울이 붉혀졌다. 지금도 그 장면들이 떠오르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마주하기 힘든 역사지만 반드시 정면에서 봐야할 우리의 역사다. 잊지 말고 널리 널리 퍼져야 할 사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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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소녀 Wow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위즈너 그림, 도나 조 나폴리 글, 심연희 옮김 / 보물창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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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Fish Girl”이다. 표지만 보면 인어 공주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이 그래픽노블은 인어 공주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하는 왕자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인간으로 변한 후 물거품이 된 그 이야기 아니다. 인어 소녀의 정체는 이야기 속에서 아주 불분명하다. 인어 공주처럼 물 속에서 살고 물고기와 문어와 소통하지만 물 밖으로 나오면 다리가 생긴다. 마녀의 마법이 작용한 것도 아니다. 작가는 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외관 상 평범한 수족관 관장이자 넵튠으로 변신한 그의 이야기 속에서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인어 소녀는 리디아란 소녀를 만나기 전까지 수족관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넵튠의 공연이나 설명을 위해 작은 연출을 할 뿐이다. 인어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이들에게 잠시 보여준다. 절대로 본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 그런데 리디아가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본다. 인어 소녀에게 리디아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친구다. 자신이 살고 있는 수족관 밖의 세계를 알려준다. 이 작은 접촉이 그녀로 하여금 수족관 밖으로 나갈 용기를 준다. 물밖에 처음 나갔을 때는 하반신에 통증이 왔다. 문어의 도움으로 다시 수족관 속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다음 시도에서 하반신이 다리로 바뀌는 것을 알게 된다.

 

작은 수족관에서 넵튠은 바다의 신을 연기하고 인어 소녀에 대한 관심 등으로 돈을 번다. 관객이 던진 동전을 인어 소녀가 주워주고, 입장료와 인어 소녀 관련 옷을 팔아 수족관을 유지한다. 많은 관객들이 들어와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인어 소녀가 자신의 존재를 살짝 살짝 보여주면서 소년 소녀들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혹시 소년 등이 그녀를 보았다고 말해도 어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 이것은 넵튠이 지적한 어른의 문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인 ‘나잇값’이니 ‘현실’이니 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것은 오션 원더스 수족관의 영업 비밀이기도 하다.

 

이름도 없던 인어 소녀는 리디아를 통해 이름을 얻게 된다. 미라클에서 따온 ‘미라’다. 둘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미라는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진다. 어느 날 밤에는 홀로 수족관 밖으로 나간다. 바닷가에 붙어 있는 수족관이다 보니 금방 해변에 도착한다. 바닷물이 그녀의 발에 닿으면 다시 비늘이 돋아난다. 바닷물이 다리에 닿았을 때 “안 돼! 안 돼! 바다가 날 잡으려고 하잖아!”하고 말한다. 마르면 두 다리로 변한다. 밤의 외출은 신기하고 즐겁지만 아직 미라에게는 힘든 일이다. 리디아에게 요가를 배워 다리 근육을 키웠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리디아와 함께 피자도 먹고 같이 수족관에서 수영도 한다. 순수한 소녀들의 만남이자 놀이다. 이것을 본 넵튠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인어 소녀는 그 자신에게 종속된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미라의 정체가 드러나면 실험체로 바뀔 것이라고 계속 주장한다. 이 공포는 리디아가 미라를 돕기 위해 어른들에게 그녀의 존재를 말하려고 할 때 강한 반대로 표출된다. 인어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인어를 그대로 둘 인간들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리디아의 순수함이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점이자 미라에게 주입된 교육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갇힌 세계 속에서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미라가 인간과 함께 지내려고 노력하자 수족관 속 물고기들이 그녀에게서 멀어진다.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문어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 만화에서 주목해야 할 존재 중 하나가 문어다. 묵묵히 미라의 곁을 지키고, 도와주는 존재이자 어느 날은 파괴자로 변신한다. 그의 대답없는 모습은 밖으로 드러난 행동으로만 추측이 가능하다. 바다와 문어의 도움으로 수족관을 벗어난 그녀의 미래를 보면서 결코 밝은 미래를 떠올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인어의 존재를 믿지 않는 어른처럼 그녀 앞에 펼쳐질 어둡고 힘든 미래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현실의 때가 너무 많이 묻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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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기담
전건우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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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시원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고시원의 풍경은 방송으로 본 것이 전부다. 공간의 크기만 놓고 본다면 학창시절 나의 하숙방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에 둘이 있었고, 다른 하숙방의 형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좁은 방에 둘이 있지만 밖이 열린 공간이다 보니 그렇게 답답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고시원은 한 평이란 좁은 공간에 많은 집기를 넣어놓았고, 열린 공간이 없고 다른 방 사람들과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 이 익명의 공간은 사람들을 점점 고립시킨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 멋진 장르 복합물을 만들어내었다.

 

303호 홍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316호 외국노동자 깜과 311호 취업준비생 편, 311호 아저씨 최, 317호 소녀 정으로 이어진다. 이 사이 사이에 비정성시를 패러디한 비정묘시가 들어가 있고, 이 이야기 속 고양이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려준다. 그리고 고문고시원의 유래를 설명한 첫 이야기와 맞물리는 마지막 유령들이 등장한다. 각 방의 화자들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 각각의 장르가 드러난다. 공포, 추리, sf, 무협, 스릴러, 액션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연결이 상당히 부드럽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는 기묘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이 부분이 몰입도를 높인다.

 

고시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증금을 낼 형편이 되지 않아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창문이 있으면 월세를 3만원 더 내야 한다. 이들에게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이 닫힌 공간이 그들의 절박한 환경과 맞물려 더욱 폐쇄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작은 관심이 어느 순간 이 고시원이 완전히 닫힌 곳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을 가장 잘 알려주는 인물이 바로 303호 고시생 홍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문고시원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를 깨트리는 첫 발자국을 내딛는 다. 외로움에 지친 그녀가 귀신과 대화를 하고, 옆방에 관심을 두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316호 깜은 외국노동자다. 한때 개그프로그램에서 흔히 하던 말을 그는 수시로 내뱉는다. ‘괜찮아요.’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기에 아파도 힘들어도 이 말을 낼 수밖에 없다. 그가 초능력을 얻게 된 과정도, 이 초능력으로 사람을 구했을 때 보인 사람들의 반응도, 그의 신상이 털려 인터넷 개인방송에 이용당할 때도 그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자 피해자였다. 이런 그에게 고시원의 작은 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휴식처다. 이 고시원에 대해 휴식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 명 더 있다. 311호의 매일 죽는 역할을 맡은 최와 317호의 킬러 소녀 정이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상황은 다르다. 그렇지만 이 고시원의 공간이 주는 평온함은 같다.

 

313호 편은 무협을 사랑한다. 아니 협객을 동경한다. 이것이 취업실패의 주요 원인이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였던 도서대여점 사장을 만나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위한 비법을 전수받는다. 무협의 단어를 사용해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무협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면접을 보고, 최종 단계까지 마친 그가 마주한 것은 너무 강력한 신공이다. 지인소개, 낙하신공. 311호 최는 빚을 지고 자살한 것처럼 꾸민 후 사라졌다. 그런데 시체가 없다 보니 그의 부채가 남은 가족에게 전가되었다. 아내의 전화 한 통은 실종자에 노숙인으로 살았던 그에게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스트레스 해소방에서 매일 죽는 연기를 한다는 것은 그의 실제 삶과도 이어진다. 그리고 그를 죽이는 방식과 동일한 실재 사건을 마주한다.

 

317호 정은 소녀 킬러다. 킬러였던 아버지에 의해 킬러로 키워졌다. 그녀는 알바를 하면서 열심히 사는데 그녀의 이력을 아는 사람이 다가온다. 그녀의 살인은 도시 전설처럼 퍼진다. 그러다 한 무당의 살인 의뢰가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꼬인다. 그 무당은 죽어야할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당을 구하기 위한 그녀의 활약은 한 편의 액션영화와도 같다. 이런 각 방의 사람들이 모여 위기에 빠진 고시원과 그 일원들을 구하려고 한다. 그 적은 뱀 사나이, 얼음장, 괴물 등으로 불린다. 여기에 고시원에 살고 있는 유령들이 합세했다. 장르 복합적인 이야기는 어느 순간 거대한 적과 마주하고, 각각의 인물들은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어두운 현실에서 이들의 연대는 작은 빛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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