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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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작가 이름이다. 이 작가의 책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그런데 작품 목록을 보니 낯익은 제목 하나가 보인다. <막스 티볼리의 고백>이란 책이다. 구해 놓고 몇 년을 묵혀두고 있는 책들 중 한 권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한 호평 때문에 샀다가 그냥 묵혀두었다. 뭐 이런 책들이 한두 권이 아니니 새롭지도 않다. 그런데 이번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나를 이 책으로 인도했다. ‘퓰리처상 100년 만의 가장 과감한 선택’이란 문구는 더욱 나를 부채질했다. 읽으면서 어느 부분은 감탄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취향을 탔다.

 

아서 레스. 그는 게이다. 50세 생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중년의 동성애자다. 사실 게이라는 사실을 빼면 한 남자의 진한 사랑 이야기다. 그런데 아직 나의 머릿속은 이 사실이 먼저 떠오른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서는 전 남친 프레디의 결혼 소식에 충격을 받고 세계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난 이유는 그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기 위해서다. 실연의 상처는 여행을 떠났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여행 내내 이 상처들이 그의 삶을 들쑤신다. 더불어 그가 사랑했던, 그를 사랑했던 시인의 기억들도 같이 동반한다. 여행은 멕시코, 이탈리아 등을 지나 마지막으로 일본을 거치는 일정이다. 이 여행은 문학과 관련된 일도 있고, 사막에서 자신의 생일을 보내기 위한 것도 있고, 일본 가이세키 요리 기사를 쓰기 위한 것도 있다.

 

결코 짧은 여행이 아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여행이다. 기억과 아픔을 떨쳐내기 위한 여행은 남친과 함께 한 도시와 공간과 추억으로 뒤덮여 있다. 그를 초청한 문학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간 곳들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을 일으킨다. 자신 있다고 생각한 독일어는 작은 해프닝의 연속을 불러온다. 그리고 잠깐 새로운 연인이 생기지만 이것은 작은 일탈일 뿐이다. 그는 결혼한 상태도 아니고, 누군가와 맺어져 있지도 않다. 이 작은 일탈이 가는 곳마다 생기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과 공감이 연결될 때 잠시 이루어진다.

 

그의 추억 속에는 두 사람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하나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인 로버트고, 다른 하나는 친구의 아들인 프레디다. 이 둘의 기억이 이 소설 속에서 반복되고 뛰어나온다. 그 기억은 장소와 관계 속에서 불쑥 올라와 그를 삼킨다. 독자는 이 기억을 통해 그의 삶과 고민 등을 들여다볼 수 있다. 로버트의 격려 속에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몇 권을 책을 출간했다. 큰 방향을 일으킬 정도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를 초청하는 단체들이 있다. 멕시코도, 이탈리아도, 독일도 그래서 간 곳이다. 물론 이 초청을 승낙한 것은 프레디의 청첩장이 원인이지만 이 여행은 그가 완전히 무명은 아님을 보여준다. 무명이라면 누가 초청을 하고, 그의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겠는가.

 

솔직히 이 소설의 재미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문장의 흐름이나 유머가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피곤함도 한몫했는지 모르지만 집중력이 깨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상당히 좋은 가독성을 가졌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아서가 보여준 자신감 없는 행동과 생각들이 나를 처지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빛나는 순간들이 현재가 아닌 과거 속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도 있다. 지금도 몇 가지 에피소드는 나의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된다. 나이에 관해서는 그의 고민들이 나에게는 그렇게 와 닿지 않는다. 예전에 후배들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에 빠졌을 때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의 행동들이, 집착들이 가슴 한 곳에 조용히 파고든다. 시간은 사랑을 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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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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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다. 여자들이 산을 오르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기록했다. 여덟 산을 다루는데 등장인물이 겹치는 것도 있다. 서로 관계가 이어지는 사람도 있고,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여자들이고, 그들은 산을 오른다. 마운틴걸이란 용어가 있는 것을 보면 한동안 일본에서 등산이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들이 산에 오르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마운틴 걸의 영향도 있고, 등산화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경우도 있다. 원래 등산을 좋아했던 사람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이유들이 등산이란 하나의 주제로 묶여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일본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100대 명산이 나오는데 그 중 아는 곳이 거의 없다. ‘거의’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후지산 때문이다. 만약 이 산이 빠지면 ‘거의’도 빼야할지 모른다. 일본 소설 등을 읽으면서 수많은 산을 봤지만 이 산들이 결코 낯익어지지 않는다. 한자로 이름을 외웠던 기억이 발음대로 바뀌면서 더 심해졌다. 유명한 일본 산악 소설 혹은 산악 미스터리를 적지 않게 읽은 것을 감안하면 정말 저질 기억력이다. 이런 한탄과 상관없이 이 소설을 읽다보면 나도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생긴다. 한참 체력이 좋을 때도 계곡에서 논다고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은 주제에 말이다.

 

첫 이야기는 등산화에 반해 친한 동료와 함께 산에 오르게 된 리쓰코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사내 커플과 결혼할 예정이다. 친한 마이코는 아파 못 오고,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른 유미와 산에 오르게 된다. 유미가 중간에 내놓은 비싸고 맛있는 간식도 그녀는 불편하다. 조공이란 생각 때문이다. 자신의 결혼 문제도 있다. 이런 감정들이 불쑥 튀어나와 감정을 뒤흔든다. 긴 여정과 중간에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속내를 말하고, 자신과 서로의 삶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 조공이라고 생각한 맛있는 간식도 다른 아주머니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힘든 등산을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의 심리와 엮어 잘 풀어내었다.

 

거품경제 시절 좋은 직장에 취직한 미쓰코는 거품경제의 화석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럭셔리 제품으로 몸을 휘감고 있지만 신상이 아니다. 우연히 나간 모임에서 한 남자를 만나 등산화를 선물 받고 산을 오른다. 그녀의 눈치를 보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보는 미쓰코의 모습은 처음에는 불편했다. 하지만 이렇게 변하게 만든 이유를 읽으면서 환경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 알게 된다. 이후 풀려나오는 고백 등은 어느 순간 막혔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미쓰코가 가는 길에 리쓰코 일행도 같이 가고 있었다는 사실과 나중에 뉴질랜드 통가리에 이 커플이 다시 등장한다는 점은 소소한 재미 중 하나다.

 

홀로 등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가 산을 오르면서 커플이라고 착각한 남녀와 만나 정상으로 올라가는 과정은 밖에서 볼 때 평범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등산은 그녀와 부모님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홀로가 아닌 ‘같이’가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이것은 마이코가 남자 친구와 함께 자신이 오르길 원했던 후지산 대산 긴토키 산을 오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산을 보기 위해서는 그 산이 아닌 다른 곳에 올라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목표 설정과 달성보다 진정 원하는 바를 찾는 것이 우선이란 점도. 이 이야기 속에 리쓰코와 유미의 현재 모습이 담겨 있어 상당히 반가웠다.

 

미야자와 가의 자매가 증장하는 단편이 세 편이나 있다. 첫 이야기는 동생 유미가, 두 번째 이야기는 언니가 화자다. 동생은 아버지를 돌보면서 번역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집에 왔지만 현실은 아버지의 연금에 빌붙어 있다. 바른 생활이 몸에 박힌 언니는 동생의 이런 삶이 불만이다. 리시리 산을 올라가자고 하는데 이상하게 이 자매가 어딘가를 가면 비가 온다. 징크스다. 함께 산을 오르면서 언니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고, 다음 이야기에서는 조카와 함께 겨울산을 오른다. 두 자매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산의 풍경을 보는 장면들은 나도 모르게 내가 산을 오르는 듯한 기분에 빠지게 한다. 마지막 장에 유미가 홀로 산에 가고, 그곳에서 동행을 만드는 이야기가 있어 훈훈한 마무리로 이어진다.

 

유일하게 일본산이 아닌 뉴질랜드 ‘통가리로’ 편은 유즈키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풀어간다. 유즈키는 유미의 친구이자 여자들의 등산일기란 사이트에서 유명한 모자 장인이다. 이 단편은 유즈키가 모자를 만들게 된 사연과 더불어 통가리로 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을 알려준다. 전 남친 요시다와 함께 했던 트래킹과 현재의 트래킹이 교차하고, 기억과 추억이 뒤섞이면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른다. 처음에는 이 교차하는 장면들을 이해하지 못해 난해하게 다가왔지만 어느 순간 시간의 교차를 알게 되면서 재밌어졌다. 카메오처럼 등장한 미쓰코 커플의 모습은 또 다른 재미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살인 없는 가나에의 소설은 조금 낯설지만 탁월한 심리 묘사와 관계를 엮고 풀어내는 능력은 여전히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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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
윤재성 지음 / 새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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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작가의 전작인 <외로움살해자>의 평이 좋았기 때문이다. 낯선 작가를 만날 때 이런 작은 서평 하나가 좋은 길잡이가 된다. 실제로 책을 받아 읽으면서 가독성이 좋아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방화범과 그 방화범에 피해 입은 알코올중독자, 부패 정치인과 그에 기생하는 조직 폭력배, 기자와 형사와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 등이 끝까지 정신없이 달리게 만든다. 물론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방화범의 능력과 행동 등이 너무 과하게 설정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부패 정치인이 보여주는 권력에 대한 욕망은 방화범과 더불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벌인다.

 

착한 청년이었던 형진은 방화범에게 큰 화상을 입는다. 여동생이 불 속에서 죽는다. 이 사건은 그를 조금씩 뒤틀리게 만든다. 방화범을 잡아야 하고, 방화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흉측한 외모 때문에 사회로부터 조금씩 격리된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술의 힘을 빌려 잠든다. 불이 나면 현장에 달려가 그때 그 방화범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기대는 자책과 절망으로 뒤덮인다. 술은 유일한 탈출구다. 만약 그를 통해 특종을 얻길 바란 김정혜 기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김정혜는 한때 신문사 에이스였다. 하지만 남자에게 빠지고, 남자에게 차이면서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때 형진에 대한 정보는 특종의 냄새를 풍겼다. 끈기와 노력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당연히 형진은 거부한다. 그의 사연을 취재한 방송이 그의 삶을 돌려놓지도, 희망을 던져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정혜는 밥 사주고, 술 마실 돈을 주는 여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방화 사건이 터지면서 이 둘은 하나로 묶인다. 형진의 방화에 대한 전문 지식이 빛을 발하고, 거의 폐인인 그를 정혜가 도와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때만 해도 이 콤비의 새로운 활약에 대한 기대와 현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무택. 서울 시장을 노렸지만 계속 낙천한 정치인이다. 서울시장을 넘어 대통령까지 넘보는 장무택은 출연 비중이 낮지만 연쇄 방화로 기존 권력을 무너트리려 한다. 권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9.11 음모론을 생각하면 불가능하지 않다. 이것을 실현하는 하수인이 철우다. 돈이라면 그 어떤 험악하고 잔인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보이지만 철우는 장무택을 한 방 먹일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돈의 힘은 철우로 하여금 계속 연쇄 방화를 일으키게 한다. 여기에 형진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진짜 방화범이 서울의 건축물에 불을 지른다. 이 혼돈과 피해 규모와 대범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과하게 나간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경찰 등이 너무 무력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한국 경찰의 무능함 혹은 부패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물론 유능하고 정직한 경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더 많을 것이다. 이 무능함을 최대한 부각시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든다. 어떤 경우에는 방화범에게 한 팀이 모두 죽는 경우도 생긴다. 방화범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그것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이에 비해 형진과 정혜가 보여주는 활약은 대단하다. 형진이 자신을 환자로 만든 방화범의 수법을 간단하게 간파하는 모습이나 모방범을 찾아내는 활약 등은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 행운이 작용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에는 권력의 힘을 작용한 부분도 있다. 그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너무 나갔다.

 

극단으로 상황을 몰고 가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런데 후반부에 가면 감성을 자극하는 설정이 나타난다.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형진이 용의자이고, 서울이 불타면서 경찰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고 해도 이들의 등장은 지극히 감상적이다. 만약 그들이 있는 곳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달랐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리고 방화범의 설정 자체도 판타지 같다. 이런 아쉬움 속에서도 안정된 문장과 진행은 작가의 전작과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다양한 군상을 극한으로 다루는 솜씨가 좋고,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잘 살아 있다. 문득 나의 불만이 현실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면서 가능성을 무시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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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더스
밸 에미크, 윤정숙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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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상실, 기억, 가족, 우정, 삶 등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자신이 뮤지션이자 배우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자전적 요소가 있는 모양이다. 작가는 두 인물을 번갈아 화자로 등장시키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두 인물 중 한 명은 어른이고, 다른 한 명의 열 살 소녀다. 어른은 현직 배우인 개빈 윈터스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함께한 모든 기억을 지우고자 관련된 물건들을 불태운다. 이것을 옆집 사람이 찍어 올리면서 더 유명해진다. 한 소녀 조앤은 매우 뛰어난 자전적 기억력(HSAM)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것은 모든 것을 영화처럼 기억하게 만든다. 처음에 카터에서 떨어져 생긴 증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이 부분을 읽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가 떠올랐다. 장르도 다르고, 능력에도 차이가 있지만.

 

조앤은 ‘위대한 미래의 작사, 작곡가 콘테스트’를 준비하고 있다. 조앤은 자신이 유명해지길 바란다. 또 하나 더. 음악을 만드는 아버지가 문을 닫으려는 스튜디오를 살리는 것이다. 유명해져서 돈을 많이 벌면 최고지만 이렇게 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좋은 음악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열 살 소녀가 좋은 가사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때 부모님의 친구인 개빈 아저씨가 집에 온다. 그는 사랑하는 시드니 아저씨가 죽은 후 절망에 빠져 있었다. 화재 사건을 본 부모님의 연락을 받고 온 것이다. 개빈 아저씨는 아빠와 함께 학창 시절 밴드를 한 적이 있다. 개빈 아저씨가 가사를 다듬어준다. 이렇게까지 가게 가는 과정 속에는 조앤의 완벽한 기억이 한몫한다.

 

조앤의 놀라운 기억력은 모든 것을 잊고자 한 개빈에게 시드니 아저씨의 기억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입고, 말하고, 행동했는지 그대로 알려준다. 이 완벽한 기억력은 시드니가 개빈에게 알리지 않은 몇 가지 사실이 드러나게 한다. 덕분에 몰랐던 사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와 같은 재미가 살짝 펼쳐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 조앤과 개빈의 사이는 더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 조앤에게는 좋은 작사가와 보컬을, 개빈에게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자기에게 숨기고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작가는 이 과정은 아주 천천히 다룬다.

 

기억되길 바라는 조앤과 잊고자 하는 개빈의 만남과 동행은 잔잔하지만 조용히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작은 행동들과 교감은 자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지 않는다. 조앤의 작은 일탈이 부모나 개빈에게 큰 걱정거리를 안겨주지만 별다른 긴장감 없이 다른 상황으로 이어지면서 개빈에게 숨겨져 있던 감정을 드러내게 한다. 이 감정의 표출이 큰 이슈가 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작은 에피소드로 다루고 넘어간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이 일을 어떻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일로 인해 개빈 등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이기 때문이다.

 

앞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선입견이 혼란을 불러왔다. 시드니 아저씨란 표현이 있었지만 개빈 아저씨란 표현과 나란히 나오기 전까지 이들이 동성애자였던가 하고 의혹을 가졌다. 흔히 사용하는 동성애자나 게이라는 표현이 없다 보니 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흔히 사용하는 표현을 자제하다 보니 좀 더 섬세한 독서를 해야 한다. 이 소설은 비틀즈의 큰 영향력 아래 있다. 조앤의 이름이 존의 여성 버전이고, 중간 이름도 레논이지 않은가. 비틀즈를 찬양하지만 소설 속에 그들의 가사를 직접적으로 녹여내지 않고, 작가의 가사를 풀어낸다. 하지만 각 장의 제목은 모두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다. 책을 읽으면서 비틀즈의 노래를 듣고 싶었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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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나의 빈센트 - 정여울의 반 고흐 에세이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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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빈센트 고흐 마니아의 열렬한 팬심이 담긴 에세이다. 처음에는 이 팬심이 부담스러웠고, 약간 과한 해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 마음은 천천히 읽어가면서 조금씩 빠르게 사라졌다. 소개글에 의하면 10년간 빈센트가 머물었던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도시 곳곳을 찾아다니며 기록한 그의 흔적과 풍경을 담았다고 하는데 저자의 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그 빈자리를 전문 사진가의 잘 찍은 사진과 고흐의 그림들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작은 화보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수많은 그림들은 나의 눈을 즐겁게 해줬다.

 

10년의 여행이라고 하지만 그 시간의 흐름이 과연 이 에세이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아쉬운 부분이다. 지역으로 나눠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것도 아니고, 시대 구분에 따라 편집된 것도 아니다. 단서라면 그림 정도랄까? 나의 무지함 때문인지 5부로 나눈 구성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짧게 쓴 글들은 하나의 그림과 이어지고, 그의 삶의 단편을 들여다보게 한다. 저자는 고흐의 삶을 객관적인 시선보다는 팬심에서 들여다보면서 그를 우상화하고,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저자가 고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듯하다. 이 서간집을 나 자신도 상당히 재밌게 읽은 적이 있다. 내용과 문장들에 얼마나 빠져들었던가.

 

솔직히 말해 고흐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저자가 아니다보니 글의 방향성이 눈에 바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가 어떤 공부를 했는지, 누구에게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등의 정보가 잘 정리되어 있지 않다. 각각의 에세이 속에 녹아 있어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 빈센트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조금 어지러운 구성이다. 시대 순이나 지역 순으로 엮어가면서 감상을 풀었다면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여행이 이 에세이를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많은 자료들이 글 속에 녹아 있어 새롭게 알게 되는 이야기도 상당히 많다. 처음 보는 그림도 있다. 내가 생각한 화풍과 다른 그림도 보인다. 빈센트를 좀더 잘 알게 된다.

 

팬심 혹은 덕질은 한 사람이나 한 대상을 알기에 최고의 방법이다. 저자의 이 에세이는 빈센트의 죽음과 그의 그림을 둘러싼 의혹 등을 깊숙이 파고들지는 않지만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그 속에 자신의 의견을 풀어놓는다. 최근에 나온 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란 것이나 정신병 때문에 그림을 그렇게 그렸다는 등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 두 소재만 가지고도 많은 사람들이 두툼한 책 한 권을 만들어내는데 저자는 이런 의혹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그가 겪은 고통과 고난과 고민 등에 더 집중한다. 당연히 그가 존경하고 배우려고 한 화가도 곳곳에서 나열된다.

 

밀레, 들라크루아 등은 그의 그림에 가장 강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한 명은 대상에, 다른 한 명은 색채에서 영향을 끼쳤다. 소설가들도 꽤 있다. 그가 디킨스 등을 좋아했다는 사실과 초기에 그린 그림 등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이 모든 정보들은 저자가 빈센트의 편지와 그와 관련된 책과 정보들을 꾸준히 읽고 저장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금전적으로 힘들 때 산 화보집들과 첫 이야기에 나온 일본의 보험사 에피소드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좋아한다면 이 정도는 힘들지만 할 수 있는 일이고, 나 자신도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한 적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전에 읽었던 그녀의 책에 대한 반감을 조금씩 지워간 것도 이런 내용들이 큰 역할을 했다.

 

많은 사진이 실려 있어 예상한 것보다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앞에서 작은 화보집이라고 했는데 전작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그림들이 실려 있다. 아쉬운 점은 고흐가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들이 같이 배치되어 있지 않아 검색해야 하는 불편함이다. 특히 모사작일 때. 고흐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게 담겨 있는 문장과 이야기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정확하게 확인하고 냉정한 판단으로 다가가야 할 부분이다. 그가 자라고 머문 곳을 다루다 보니 작은 여행을 다녀온 느낌도 든다. 고흐의 그림을 현존하는 건축물이나 풍경 앞에 안내판을 세운 점은 반가우면서도 상업적이란 생각과 더불어 그의 불행했던 시절이 떠올라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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