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것없어도 추억이니까 - 마음이 기억하는 어린 날의 소중한 일상들
사노 요코 지음, 김영란 옮김 / 넥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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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추억이 뭐라고>의 개정판이다. 추억이란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40대의 그녀가 쓴 에세이인데 읽으면서 시대에 맞지 않다는 느낌을 조금 받았다. 실제 출간된 연도가 1992년이다. 이 에세이는 시간 순으로 이야기가 풀려나오는데 읽으면서 ‘이런 것까지 기억하다니’ 하고 먼저 놀랐다. 나이가 많이 들면 어린 시절 기억이 더 뚜렷해지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 글을 쓸 당시는 그 정도 나이가 아니다. 아니면 그녀의 기억들이 그녀의 작업 연장선에서 떠오른 것일까? 여하튼 이 소소하지만 정확한 기억력은 놀랍다.

 

베이징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어린 시절의 일부를 보낸 후 일본으로 돌아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야기다. 패전국의 이미지가 강하게 드리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 글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원자폭탄 개발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박수를 쳤다는 점이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보다 추억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글들을 읽으면서 날선 느낌에 깜짝 놀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련한 추억의 분위기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분위기를 냉정하게 끊어내기 때문이다.

 

전쟁 후의 가난한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들 중 하나가 형제자매의 죽음이다.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은 형제자매의 모습을 작가는 있는 그대로 적었다. 이 아픔을 감정을 뒤집듯이 표현하는 대신 그 나이 또래가 느꼈을 법한 감정으로 풀어낸다. 어쩌면 그 시절에는 죽음이 그렇게 낯선 풍경은 아닐지도 모른다. 자기 주변에 있던 사물들을 입속에 넣고 맛을 보는 장면을 보면서 먹을 것 없던 시절의 한 기벽을 떠올린다. 밤에 아이들을 두고 엄마가 강을 건너 영화를 보고 온 뒤 아랫도리가 젖지 않은 것을 보고 작가가 추론하는 장면은 과거의 요코일까? 글 쓰는 당시의 요코일까? 이런 감정들의 시점들이 궁금하다.

 

어린 소녀의 당돌한 짝사랑 이야기는 재밌지만 서늘하다. 학생과 선생 사이를 다룬 글은 한 인간의 감정이 사제지간의 정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고양이를 아주 두려워했던 그녀가 고양이를 소재로 그림책을 그렸다는 사실은 의외이고, 우비 사건은 그녀의 당당함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녀는 당돌함과 오빠의 말 한 마디 없는 것에 더 마음이 쓰인 모양이다. 오빠가 창피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마지막 문장은 예상외의 반전이다. 강렬하게 느낀 감정들이 나온 가끔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달달하고 야한 감정이고, 짝사랑을 깨달은 부끄러움이다. 도둑질한 브로치를 달고 다니지 못한 것은 죄에 대한 공포와 원하는 것을 가진 만족 사이의 줄다리기다. 이런 심적 압박이 나에게 살며시 다가온다.

 

유년기는 악마의 시절이라고 말했지만 악의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중학교 때 일어난다. 바다에서 그녀의 머리를 계속해서 밀어 넣은 선배의 행동이 그렇다. 엄마와 사이가 틀어진 날들 중 벌어진 식칼 에피소드는 무섭지만 공감할 수 있다. 작가는 결실을 맺지 못한 끊임없는 짝사랑을 했다고 하는데 그 에피소드 중 하나에서 표현된 대사나 감정에 어린 시절 감정을 살짝 돌아보게 된다. 절친한 친구를 만나게 된 도둑질은 어릴 때와 다른데 이 변화가 재밌다. 대중목욕탕 이야기는 얼마 전에 읽은 다른 에세이를 떠올려주었고, 한때 하숙한 숙모 집 귀신 이야기는 서늘한 경험담이다. 자신이 대중의 유행에 적응하지 못한 순간도 보여주는데 이 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읽으면서 각 제목 옆에 있는 약간 서툰 듯한 그림을 발견했다. 어떻게 보면 초등학생의 그림 같다. 그런데 이 그림이 작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뭐지? 더 읽다 보면 이 그림들이 바뀌는 순간이 있다. 어떤 이야기가 끝날 때 한 장에 이 그림이 나온 다음이다. 그리고 다른 그림이 제목 옆에 나온다. 작은 분류는 없지만 이 경계가 장을 나누는 표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지막 그림은 그렇지 않은 차이가 있지만.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누구나 삶의 순간들을 정리해서 글로 쓴다면 좋은 에세이를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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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 생존기 특서 청소년문학 7
손현주 지음 / 특별한서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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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 주아령은 베체트병에 걸린 아빠 때문에 이사를 간다. 장소는 서울에서 양평의 중미산 근처다. 이사 간 집은 마을버스 정류장 앞이라 마을 사람들이 불쑥 들어오는 곳이다. 낡은 시골집을 아빠와 엄마가 직접 수선해서 두 아이를 데리고 왔다. 아빠의 병은 신경을 많이 쓰면 시력을 잃고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아내와 아이들이 불평을 내뱉을 때마다 자신의 죽음을 내세운다. 보고 있는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한참 민감한 시기의 소녀가 시골 중학교로 전학을 했으니 얼마나 불만이 많을 텐가. 이 불만과 자신처럼 전학 온 싸가지와의 우정을 작가는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처음 그녀가 반에 들어왔을 때 반 아이들이 특별전형을 이야기한다. 서울의 좋은 대학 가는 방법 중 하나가 시골 마을 학교에 가서 내신 성적을 올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적이 좋은 이 마을 아이가 내신에서 밀리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 불만을 반 아이들이 순간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이 불만을 재우는 방법으로 아빠의 병을 내세울 수도 있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성적이라면 전교 1등이 가능할 것이란 자만심이 자리잡고 있다. 외고를 가고 싶어 했고, 서울에서 성적도 좋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전학 온 후 학업을 조금 멀리하고, 불만에 빠져 살다보니 예상과 다른 결과를 받는다.

 

도시 사람들의 흔한 실수 중 하나가 농사를 쉽게 보는 것이다. 병충해뿐만 아니라 자연 재해도 무시할 수 없다. 부모님들이 신나게 텃밭을 가꾸고, 비닐하우스를 만들지만 병충해와 태풍에 너무 쉽게 무너진다. 오래된 농사꾼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다른 모습이다. 초보자가 여기에 더해 유기농법을 적용하다보니 더욱 힘들다. 더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언론에 나오는 유기농법의 성공사례가 얼마나 많은 사실을 가리고 있는지 그 이면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작가가 이 부분까지 파고들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쉽지만 청소년 소설이란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된다.

 

싸가지. 이 별명을 지은 것은 이사 첫날 일어날 뻔한 자전거 사고 때문이다. 이슬은 관절인행을 잭이라고 부르고 엄청난 애정을 쏟는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중반에 나오는데 실제로는 이 싸가지의 감정 변화를 이해할 수도, 바로 따라갈 수도 없다. 부모님들이 모두 죽고 이모와 함께 사는 그녀가 보여주는 급격한 심리 변화는 어떨 때는 황당함의 극치다. 얼굴에 가부키 배우 같은 화장을 하고, 가곡을 랩으로 부르는 행동을 한다. 당연히 공부에 집중하지도 않고, 학교도 제대로 등교하지 않는다. 이런 싸가지도 아령과 함께 만나고, 감정을 교류하면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걱정을 조금씩 내려놓는다.

 

아이들의 세계가 그들만의 규칙으로 흘러갈 때 어른들은 또 그 사회에 자리잡기 위해 변신을 한다. 그 중 하나가 교회에 나가는 것이다. 이 소설 전에는 이런 일이 한국 사회에 있다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외국에 나간 친구나 다른 사람의 경우 이런 일이 빈번함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선한 의도에서 마을 사람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가던 아빠가 타이어 펑크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생기는데 이것은 현실의 비극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아빠는 구치소에 들어가 있고, 엄마와 자식들은 공포에 빠진다. 이때 아령은 이슬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열여섯 소녀가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도 일정 부분 나온다.

 

많지 않은 분량에 가독성도 좋다. 자극적인 상황을 억지로 만들지도 않고, 현실의 소녀와 어른들의 현재에 많은 부분 할애한다. 아령과 이슬의 우정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부분에서 어떻게 아령이 참아냈는지는 궁금하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한 것이나 그 아픔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그 일부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슬이 겁에 질려 자신을 내려놓으려고 할 때 아령이 보여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은 걱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현실로 나오게 한다. 이렇게 아이들은 성장한다. 물론 아령의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현실을 있는 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마음가짐과 그 작은 행동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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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 - 아이스너 상 수상 Wow 그래픽노블
레이나 텔게마이어 지음, 원지인 옮김 / 보물창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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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녀 레이나의 치아교정과 감정 변화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치아교정을 하는 친구가 레이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레이나는 어느 날 밤에 장난치다 앞 이빨 2개를 깨트린다. 이때부터 치아교정은 보통의 것과 달라진다. 전문 용어가 튀어나오고, 교정 장치도 바뀐다. 나 자신이 한 번도 치아교정을 받아보지 않아 이 장치들을 잘 모른다. 아마 이 그래픽노블의 시대 배경이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임을 감안하면 현재와 많은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4년 반이란 시간은 아주 긴 시간이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여자 아이 레이나에게는 특히 더할 것이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진행된다. 치아교정이 중심에 놓여있지만 학교생활도 빼놓을 수 없다. 교정 기구를 낀 상태에서 조심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이 항상 나열되어 있다. 일정 기간 시간이 지난 후 교정 기구를 더 조이고, 비틀고, 풀고, 찌르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볼 때마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다. 빠진 자기 이빨을 다시 심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이것이 실패한 후 어떤 치과 치료가 이어지는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엄마에게 제대로 말하지 않고 치료한 의사에게 엄마가 날린 멋진 분노는 부모라면 배워야 할 기본자세 같다.

 

치아교정이 레이나에게 일정 기간 반복해야할 일정이라면 학교생활은 치아교정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상이다. 청소년기 학생들의 고민이 잘 녹아 있지만 자극적인 사건은 없다. 친구들의 놀림이 왕따 같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학내 폭력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순수하게 잘 녹아 있고, 그 마음을 안으로 삼키는 모습들이 눈길을 끈다. 물론 이 감정들은 친한 친구들에게 알려지고, 잠깐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놀림의 정도가 심해져서 밀접했던 관계가 깨어지지만 이것은 새로운 친구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읽으면서 이 시대만의 모습인지, 아니면 미국 학교가 이런 것인지 궁금했다.

 

사춘기 소녀들의 감정과 신체 변화를 평범하고 간결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을 재밌게 만든다. 치아교정 때문에 밝고 환하게 웃지 못하는 레이나의 일상을 잔잔하게 풀어내면서 가족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소박하지만 재치 있게 다룬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일어난 날의 에피소드는 우리의 삶을 아주 흥미롭게 보여준다. 전기가 다시 들어온 순간에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과 반복되는 뉴스에 둔감해지는 시청자들이 짧지만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이보다 나에게 더 인상적인 장면은 지진으로 친한 친구가 죽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빠가 한 월드시리즈 연기 걱정이다. 찾아보기 전에 책속에 연도가 나왔는데 나의 생각과 달랐다. 검색하니 1989년도다.

 

치아교정 과정도 흥미롭지만 이 그래픽노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모든 치료가 끝난 후에 벌어진다. 이 교정 과정이 끝난 후에 그 어떤 극적인 변화가 없음을 알게 되는 그 순간들이다. 그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 즐겁고 유쾌해야 하는데 약간 무덤덤하다. 우리의 삶이란 종종 이렇게 흘러간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더 축하해준다. 이와 반대되는 장면도 있다. 디즈니의 영화 <인어공주>를 보러간 날이다.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서 완전히 빠져든 그 순간부터 그녀의 미래 일부는 고정되었을 것이다. 이 경험이 그림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데도 좋은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활짝 웃는 레이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슴 가득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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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기의 여행 - 대책 없이 느긋하고 홀가분하게
송은정 지음 / 걷는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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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목에 끌렸다. 송은정이란 이름은 조금 낯설었다. 작가 소개글을 읽다가 팟캐스트에서 그녀가 방송에 출연한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관심도가 더 높아졌다. 결정적인 것은 역시 부제인 ‘대책 없이 느긋하고 홀가분하게’이다. 아마 더 끌린 것은 ‘대책 없이’란 단어일 것이다. 여행을 갈 때 꽉 짜인 일정을 짜서 간 적이 거의 없다. 일정에 여유를 두고 보통 움직인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그곳을 가는 편이지만 도착한 후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또 제각각이다. 이런 변수들이 싫을 때도 있지만 이것이 다녀온 후 기억에 더 많이 남는다.

 

이 에세이는 여행과 일상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화려한 풍경에 대한 예찬이나 놀라운 여행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가 살면서 경험한 사소한 것을 중심으로 풀어낸다. 일본 교토 가이드북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동네 골목길로 마무리된다. 그 사이를 채우는 여행지는 유럽과 남미를 모두 아우른다. 놀랍고 신기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들도 많을 텐데 작가는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조금 심심해 보인다. 그런데 이 심심한 듯한 이야기가 가슴 속에서 작은 꽃망울을 피우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간결하게 기록한 글들일수록 더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아이슬란드 일주 기록은 부럽기만 하다.

 

잘 짠 일정에 맞춰 효율적으로 여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예상한 것과 다른 일이 생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도 재밌다. 물론 이 예상 밖의 일이 짜증과 불안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일일수도 있다. 최대한 불편을 줄이고, 작은 변수들이 만드는 재미를 누린다면 최상의 여행이 된다. 실제 이런 여행을 계속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가끔은 불편함이, 짜증이 동반한 여행이 추억으로 더 길게 남는 경우가 있다. 이 책 속 많은 여행들이 그랬다. 길치이기에 가지는 두려움과 불편함을 조금만 견디고 주변을 돌아보면 꽉 짜인 일정 속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 보인다. 같은 곳을 자주 갈 때 이런 여유는 더욱 필요하다.

 

어떤 특별한 시간 순서대로 쓴 글이 아니다. 지역이 해시태그로 붙어 있지만 무시해도 별 상관이 없다. 해시태그가 붙은 나라나 지역은 이야기 속 배경일 뿐이다. 이 장소들의 시간 순서가 일정하지 않다보니 작가의 근심 걱정이나 그 순간의 삶들이 뒤죽박죽 섞여 나온다. 읽으면서 시간 순으로 정리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글들이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성되었다면 그 시간만큼의 삶이 글 속에 잘 표현되었고, 생각의 변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을 테다. 여행, 마음, 하루로 이어지는 이야기로는 조금 부족하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일까?

 

느긋하고 홀가분한 여행을 떠나본 게 얼마나 되었을까? 그 시절 여행은 큰 일정만 정해놓고 지루하게 시간을 때운 적도 많다. 차로 무작정 달리기만 한 경우도 있다. 목적지를 가다 중간에 방향을 바꾼 적은 또 몇 번이던가. 그런데 이 여행들이 지금도 나의 머릿속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다. 그 순간의 깨달음이 나의 여행 방식을 조금씩 바꾸었다. 일정을, 볼거리를, 쇼핑을 꽉 채우기보다는 좀 더 빼고 빼서 가볍게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게으름은 사진 찍기보다 머릿속에 담기란 변명으로 바뀌지만 확실한 것은 사진 찍지 않은 순간들이 아직까지는 더 많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많은 에피소드 중에 엄마와 함께 일본을 여행한 이야기가 가장 큰 여운은 남긴다. 그것은 아마 그녀에게 내어준 그릇 때문일 것이다. 서투른 여행 가이드에 신경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 엄마와 여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유니 사막에 대한 평가는 나의 상상을 넘었고, 안산 이야기는 우리 동네 뒷산 이야기로 생각이 이어졌다. 내가 생각만 하고 하지 못한 작은 여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문득 어릴 적 무작정 골목길을 들어가 돌아다녔던 일이 생각난다. 막히면 돌아 나오고, 힘들게 목적지를 향해 가던 그 어린 시절들. 포기란 단어를 사랑과 연결해서 풀어낸 이야기는 부부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작지만 소소하고 느긋하지만 그 속에 치열한 삶이 담겨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 치열함은 느긋하고 홀가분하게 보이는 모습 뒤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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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가 마르지 않아도 괜찮아
타카노 후미코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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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잡지 <하나코>에 1988년 6월부터 1992년 2월까지 연재된 만화다. 이 만화가는 만화가들의 만화가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사실 이 부분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리보기로 본 몇 컷의 만화는 재밌을 것이란 확신을 심어줬다. 그리고 모두 읽은 지금은 이 확신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중년의 남자인 내가 공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마무리가 몇 편 보이지만 사랑스럽고 엉뚱발랄한 루키짱을 보면 즐거워진다. 친구인 엣짱의 모습에서는 왠지 모르게 이전 직장의 여성 동료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연재만화란 특징 때문인지 한 편 한 편이 독립적이다. 물론 연작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전체적으로 루키짱과 엣짱이 같이 등장하는 빈도가 높고, 여성의 일상을 간결하지만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최근에 여성의 일상을 다룬 만화를 자주 보게 되는데 그 원조라고 하는 부분에 공감한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그림에 색을 넣었다는 점이다. 요즘 만화에 색이 들어가는 경우가 흔치 않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작가의 유일한 올컬러 작품이라고 한다. 간결한 선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세밀한 표현이 굉장히 많다. 읽으면서 자주 감탄하게 된다. 특이 표정으로 넘어가면 더욱 그렇다.

 

삼십대 중반 두 여성이 등장하는데 루키가 근검절약하는 스타일이라면 친구 엣짱은 멋 내기를 좋아한다. 루키의 직업은 병원의 의료급여 청구서 작성 업무를 재택근무하는 것이다. 일주일 만에 일을 끝내고 남은 시간은 도서관 가거나 책을 읽고 우표를 수집한다. 목욕을 좋아하고 운동신경은 둔하지만 사과를 손으로 쪼갤 수 있다. 연예는 관심이 없는 듯하고, 패션에도 둔하다. 이 부분을 채워주는 인물이 바로 친구 엣짱이다. 그녀의 옷 중 많은 옷들이 엣짱이 준 것이다. 엣짱의 직장 송년회에 참석하는 에피소드는 다른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특히 엣짱이 좋아하는 직장 후배 오가와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소소하지만 즐겁다.

 

이 만화 곳곳에 그 시대의 풍경이 담겨 있다. 유선 전화기는 대표적이다. 지금은 유선전화로 통화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이전에는 이 전화가 유일한 연락 방법이었다. 집 전화가 없다면 공중전화로 연락하고, 전화번호부는 온갖 정보와 광고가 들어있었다. 이것이 불과 2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만화를 읽다 보면 여유가 넘쳐난다. 시간이 남는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스마트폰 등이 없으면서 다른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친구와의 대화, 작은 외출, 그 외출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 이렇게 아주 일상의 한 장면을 작가는 간결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그림과 이야기로 나를 매혹시켰다.

 

몇몇 에피소드는 남자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탓인지 공감하지 못한다. 빨래가 마르지 않았는데 다른 옷을 꺼내 입는 것보다 벗고 있는 것이 더 편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밖에서 그녀의 집을 볼 수 있다면 문제다. 자전거 수리점 남자가 던지는 관심에는 무감각하드니 다른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말에는 추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 보고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전기밥솥 사용 설명하는 장면은 잘 보면 멍청한 행동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이렇게 이 만화는 나에게 읽는 내내 공감과 의문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지난 시절에 대한 추억도 같이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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