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증거 범죄 추리의 왕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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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의 왕 시리즈 첫 권이다. 지난 번에 읽었던 <동트기 힘든 긴 밤>이 시리즈 3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순서가 바뀌어 출간되었다. 시리즈 마지막 권에서 워낙 강한 인상을 받았기에 첫 권이 나온다고 했을 때 정말 반가웠다. 이렇게 빨리 나올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했기에 더 그랬다. 그런데 중국판 <용의자 X의 헌신>이란 소개가 괜히 눈에 거슬린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감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 금방 사라졌다. 범인이 누군가 하는 것보다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생각하면서 빨려들어갔다.

 

최고의 법의학자 뤄원과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의 대결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옌량의 추리에 크게 공감하지 못한다. 그가 느낀 부조화가 고차방정식을 푸는데 단서가 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의심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의문이다. 만약 옌량이 ‘날 잡아주세요’란 메시지를 남긴 연쇄살인범에 관심을 두고 수사에 참가했다면 그의 부조화가 더 쉽게 납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뤄원을 보고 연쇄살인범 수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뭐 어쩌면 이런 점이 평범한 나의 한계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덕분에 두 천재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몰입도는 더 높아진다.

 

3년 간 벌어진 다섯 건의 연쇄살인 사건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범인이 남긴 증거들이다. 그것은 줄넘기 줄을 이용한 교살과 지문과 ‘날 잡아주세요’ 란 메모를 쓴 종이 한 장이다. 경찰은 지문을 하나씩 수집해서 범인을 잡으려고 하지만 대도시에 인구 이동이 많은 관계로 쉽지 않다. 이 연쇄살인범을 잡기위해 네 번이나 특별조사팀이 만들어졌지만 성과가 없었다. 다섯 번째 살인이 벌어지고 이 수사의 책임자인 자오톄민은 옌량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실패한다. 경찰을 떠났기에 이런 수사에 관심이 없다. 다만 작은 해프닝 하나가 생기면서 작은 재미를 던져준다. 나중에는 옌량이 경찰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나와 이전 작품의 궁금점 하나가 해소되었다.

 

뤄원은 최고의 법의학자였다. 일중독자였다. 아내와 딸이 바라는 사소한 일들을 해주지 못했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아내와 딸이 사라졌다. 얼마 후 그는 법의학자를 그만두고 아내와 딸을 찾아 나선다. 그러다 우연히 한 사건을 보게 된다. 식당 주인의 여동생 주후이루와 그녀를 좋아하는 궈위가 실수로 동네 깡패를 죽이는 장면이다. 당연히 먼저 뤄원은 자수를 권한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자신이 죽였다고 말한다. 이들의 행동이 뤄원의 뭔가를 자극했다. 뤄원은 현장의 증거를 조작하고, 두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경찰에 대응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이대로만 한다면 둘은 경찰의 의심을 피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긴장감이 또 하나 조성된다.

 

무증거 범죄. 현재 법률에서 증거가 없다면 법의 심판대에 올릴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자백이다. 경찰은 이 두 남녀가 살인했다는 의심을 하지만 알리바이나 증거 등이 모두 그들이 아님을 보여준다. 형사의 감과 수사가 이어지지만 어떤 결정적 증거도 없다. 그러다 발견된 지문의 정체는 이들에 대한 의심을 지우게 한다. 바로 ‘날 잡아주세요’ 연쇄살인범의 범행이란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미 뤄원이 이 살인범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짜 놀라게 되는 이유는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적으로 표현된다. 작가가 잘 깔아놓은 장치와 의도가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사회파 추리소설이라고 하지만 어떤 사회문제가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사회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파고들지 않기 때문이다. 두 천재의 대결에 집중하고, 우발적 살인을 한 두 남녀의 행동과 이들을 돕는 뤄원의 심리가 더 돋보인다. 동네에 깡패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뤄원의 아내와 딸이 사라졌다고, 성추행을 하는 인물이 있다고 사회파 추리가 아니다. 관료조직과 현실의 우선순위가 한 개인과 가족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고, 한 의인이 왜 이런 불의를 저질렀는지 알려줄 때 사회파의 힘을 가진다. 물론 뤄원이 저지른 범죄를 두둔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까지 하게 되었는지 보여줄 때, 그가 예상한대로 현실이 흘러가지 않을 때 단순한 수학공식 같은 대결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간이 남는다. 이 작품도 긴 여운을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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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병동
가키야 미우 지음, 송경원 옮김 / 왼쪽주머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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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작가의 다른 작품인 <40세, 미혼출산>을 읽었다. 상당히 재밌게 읽었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좋아 다른 작품을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 검색을 하니 낯익은 제목들과 표지들이 상당히 보인다. 작가를 제대로 몰랐기에 그냥 무심코 지나간 책들이다. 아마 이 책들 중 몇 권은 나의 위시리스트로 올라갈 것 같다. 물론 다른 책들처럼 언제 읽을지 모르는 책더미에 묻힐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을 공고히 하게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이번 소설이 했다. 이름도 조금씩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호스피스 병동의 여의사 루미코는 미녀이지만 언어의 표현력이 많이 부족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에 둔감하다. 당연히 자신의 노력이나 마음과 달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다 화단에서 청진기 하나를 발견한다. 이 청진기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다. 환자의 몸에 청진기를 대면 환자의 마음속 목소리가 들린다. 더욱 놀라운 것은 환자가 후회하는 시간으로 돌아가 새로운 선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험은 루미코도 같이 한다. 이런 후회와 새로운 경험의 공유가 루미코를 환자에게 신뢰받는 의사로 만든다.

 

dream, family, marriage, friend 등 네 편의 이야기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유명 여배우의 딸이 꿈꾸었던 배우의 삶, 가족보다 일이 먼저였던 직장인, 딸의 결혼을 반대한 엄마, 친구의 거짓말을 대신해주지 못한 아쉬움 등이 후회의 감정으로 죽음을 앞둔 그들이 뒤덮는다. 마법의 청진기로 이들의 속마음을 파악한 루미코는 그 후회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하지 못한 혹은 하지 않은 삶을 살게 한다. 이 다시 사는 삶은 그들이 가진 후회의 감정을 날려버리는 기회가 된다. 시한부 삶이 남은 그들에게 마음의 평온함을 남겨둔다.

 

삶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자신의 현재에 불만이 있다면, 후회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나 자신도 지난 삶을 돌아보면 그 순간들이 적지 않게 있다. 소설 속 상황처럼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강한 후회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때 나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을 것이다. 작가는 마법의 청진기를 통해 현실의 1분으로 마법의 1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이 경험은 그들이 결코 생각하지 않았던 삶의 순간으로 이끈다. 네 이야기 중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작가는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이끌면서 현실을 긍정하게 되고,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다.

 

다른 삶을 살아보는 과정이 반드시 실현 가능했던 삶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다른 선택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엄마와 닮지 않았지만 유명 여배우의 딸이란 후광과 지저분한 연예계를 보여주고, 승진을 포기하고 자신과 가족을 위한 삶이 오히려 더 높은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딸이 외모 외에 볼 것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막았는데 그 남자가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방송에서 보여줄 때 느낀 후회의 감정은 그 남자와 그 가족의 실체를 통해, 또 다른 환자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마음속에 담고 있던 여자가 돈을 훔친 것을 친구가 먼저 말해 그의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후회한 삶의 이면이 드러날 때 삶의 서늘한 현실이 불쑥 다가오고, 반전이 펼쳐진다.

 

이 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루미코의 가족사가 등장하고, 그녀를 좋아하는 동료 의사 이와시미즈를 조금씩 이해한다. 한때 모델을 할 정도로 잘 생기고 큰 병원의 후계자란 소문이 있는 이와시미즈는 루미코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동료였다. 새로운 경험은 그녀의 둔감력을 약하게 만들고, 편견으로 바라본 그의 삶을 제대로 알게 한다. 이렇게 둘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감정은 슬며시 마음 한곳에 자리를 잡는다. 작가는 판타지 같은 설정 속에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누가 그녀에게 이 청진기를 전달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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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라스트 걸 - 노벨 평화상 수상자 나디아 무라드의 전쟁, 폭력 그리고 여성 이야기
나디아 무라드 지음, 제나 크라제스키 엮음, 공경희 옮김, 아말 클루니 서문 / 북트리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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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노벨상에 무감각해지고 있다. 문학상은 그나마 발표할 때 기억하지만 다른 상들은 그냥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중에서 평화상은 더욱 그렇다. 아는 사람이나 단체가 받을 때는 기억하지만 나머지는 아쉽게도 그냥 지나간다. 이 상의 권위나 시대상을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2018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이 책의 저자도 사실 나에겐 낯선 이름이었다. 최소한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녀의 활동 기간을 생각하면 더 낯설다. 유럽과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고, 한국의 언론들이 이런 인물들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조금은 남탓을 하고 싶다.

 

IS에 대한 이야기가 요즘은 많이 사라졌다. 한때 이 단체가 세상을 뒤덮은 적이 있다. 언론에서 이 단체의 일부를 보여주었지만 한국에서는 피상적이었다. 잔혹한 영상이나 몇 가지 상황 등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떨까? 시리아 난민에 대한 우리의 대처를 생각한다면 또 어떨까? IS가 점령한 지역에 살던 민족이나 국민들은? 부끄럽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단순한 지명과 이름이었을 뿐이었다. 야지디란 종교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저자인 나디아는 이라크 북부 야지디 마을 코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책의 앞부분은 나디아가 자란 마을과 자신의 가족 이야기로 가득하다. 가난하지만 노동력을 위해 대가족 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나온다. 과학의 발전이 TV, 휴대폰 등을 가져다주지만 종교적 갈등을 사라지게는 만들지는 못했다. IS가 이 마을을 점령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룰 문제는 아니다. 야지디 마을에서 순진한 처녀로 살아가던 나디아에게 ISIS의 점령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한 조직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쿠르드노동자당(PKK)이다. 페슈메르라고 불리는 이 군인들은 결정적인 순간 몰래 떠났다. 대학살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것이다.

 

ISIS는 이라크 등에서는 다에시로 불린다. 이들은 놀랍게도 야지디 여성들을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성 노예로 삼는다. 코초에서 남자들을 모아서 학살하고, 여자들을 차에 태워 자신들의 점령지에 보내 노예로 만든다. 어떤 방식으로 여자를 선택하고, 매매하는지 나오지만 그들이 저지르는 성폭행의 형태까지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행간으로 읽어야 한다. 어떤 여성들은 극렬하게 저항하고, 일부는 자살하지만 나디아는 그들의 성폭력에 그 어떤 저항을 하지 않는다. 저항하면 다른 폭력이 가해지고, 더 큰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탈출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실제 탈출해서 자신의 경험을 세계에 알리지 않았던가.

 

다에시가 점령한 곳에서 야지디 여성들이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그들이 탈출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말할 때 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나디아는 그들이 용기 있게 나섰다면 그 피해를 줄였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 나디아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가족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보라. 이런 일이 알려지면 그들의 행동과 영혼은 더 큰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이들을 옹호할 마음도 없다. 나디아를 도와준 나세르 가족 같은 적극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신고는 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탈출하다 잡힌 사람들이 그들을 도와준 사람들을 발설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수적이다. 또한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디아의 증언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야지디 여성들은 결혼 전까지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 만약 이렇지 못할 경우 가족 살인까지 일어난다. 다에시들이 야지디 여성들을 겁줄 때 이런 사실을 계속 이야기한다. 나디아가 처음 탈출했을 때 이 사실을 숨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 학대와 처량한 경험담에 더 관심을 두려고 한다. 나디아는 이것을 넘어 오빠가 살해당한 일, 어머니의 실종, 소년들의 세뇌까지 모두 말하려 한다. 나세르와 함께 탈출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도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데 이것도 그 상황을 잘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 나디아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당했는지 보여줄 때 분노할 수밖에 없다.

 

탈출이 성공했다고 행복한 미래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슬픔이 기다리고 있다. 함께 탈출하지 못한 여자 친척들과 사람들, 새롭게 알게 된 죽음들, 열악한 환경 등이 펼쳐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나디아 등이 휴대폰으로 안전 지역에 머물고 있는 가족과 계속 통화를 하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나의 오만과 무지 탓인지도 모른다. 세계의 변화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인정하지 않은 탓이다. 나디아는 다에시들을 법 앞에 세우기 원한다. 그들이 벌받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UN등에서 연설할 때 간단하지만 명확하게 자신의 경험과 의지를 표현한다. 이 지속적인 노력이 그녀를 노벨 평화상으로 이끈 것 같다. 많은 생각과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인간과 종교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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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안전가옥 앤솔로지 1
김유리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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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좋아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자주 사먹지 못한다. 내가 좋아한다고 늘 가고 싶을 때 가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반대하고, 아이가 싫어하면 갈 수 없다. 회사 근처에 좋은 냉면집이 있다면 점심시간에 가서 먹을 수도 있는데 불행하게도 없다. 한때는 냉면에 대한 환상을 품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유명한 강북의 냉면집 육수 맛 차이를 이제는 조금 안다. 그것은 어느 비 오는 날 우연히 느끼게 된 것이다. 슴슴한 맛 사이로 강하게 느껴지는 육수의 맛. 처음 평양냉면을 먹고, 가끔 먹을 때도 몰랐던 맛을 우연하게 느끼게 된 후 맛에 각성했다. 이런 내가 냉면에 대한 소설을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수상자 한 명과 초대작가 두 명은 관심을 두고 있던 작가들이 아닌가. 그렇게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첫 작품 <A,B,C,A,A,A>는 제목부터 낯설다. 김유리란 작가도 낯설다. <옥탑방고양이>의 작가라고 하는데 드라마도 영화도 본 적이 없다. 아! 연극은 봤다. 진주의 냉면집의 대기 번호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연하의 남자친구와 자신의 외모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뭐지? 이 커플 수상하다. 키 크고 잘 생기고 어린 남자가 나이 많고 이혼 경력 있는 뚱뚱한 여자가 사귄다. 흔히 하는 말로 여자가 재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남친 A에서 시작해 전에 이전 남자들로 넘어가면서 그녀의 연애사가 펼쳐진다. 이 어울리지 않는 커플 이야기가 재밌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글빨 때문이다. 냉면의 추억도 한 자리했다. 수많은 냉면 맛집 중에서 자신들만의 맛집 한 곳을 발견한 이들을 떠올리며 괜히 부럽다.

 

<혼종의 중화냉면>은 중국집 냉면의 기억에서 시작해 자신의 삶으로 이어진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부모의 이혼 후 대만 새아버지를 가졌었다. 이후 엄마는 또 이혼했다. 재밌는 사연 중 하나는 엄마는 아이누 족이고, 새아버지는 대만 내성인이다. 둘 다 일본과 대만의 주류가 아니다. 화자가 기억하는 중화냉면은 새아버지의 딸이자 언니가 만들어준 중국식 냉면이다. 이 냉면의 기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작은 고찰도 나오지만 목적은 정체성이란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중화냉면도 중국에는 없고, 일본에서 유래한 것과 다르듯이 화자도 민족성 혹은 국민성도 일반적 분류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끔찍한 혼종 대신 좋은 혼종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남극낭만담>은 평범한 남극 조사단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 오마주라고 하는데 솔직히 이 작품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인디 영화감독이 지원금을 받고 남극 조사단의 음식을 영화로 담기 왔는데 뭐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러다 김 박사가 냉면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인공 조미료 이야기가 나오고, 냉면집 맛의 비결도 조금 폭로된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이들이 탄 차가 크레바스에 떨어지고 난 다음이다. 미식의 광기가 어떤 문제까지 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의 한 극단이 재현되고, 평범한 듯한 남극의 풍경은 완전히 뒤바뀐다.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dcdc의 작품이기도 하다.

 

전건우의 <목련면옥>은 전통적인 공포 소설의 공식을 따라가다 반전으로 이어진다. 최근에 공포 소설가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시대 설정을 1998년으로 잡았는데 이 시절은 한국 경제의 파탄과 가정의 파괴를 대량으로 불러온 시기다. 성실하게 일만 한다고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오는 시기는 지났다. 당연히 좋은 일자리는, 숙식이 제공되는 일자리는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목련면옥은 손님이 많은 냉면집이다. 화자 김준민이 첫날 먹은 냉면은 정말 맛있었다. 농담처럼 인육이니 그가 자는 방을 기어다니는 여자가 있다는 등이 농담을 건낸다. 이렇게 조금씩 고조되는 긴장감은 호기심과 정의감이 결합하면서 아주 무서운 이야기로 돌변한다. 더불어 마지막에는 반전까지.

 

<하와이안 파인애플 냉면은 이렇게 우리 입맛을 사로 잡았다>의 작가 곽재식은 오랫동안 관심을 두고 있다가 얼마 전 첫 단편을 읽었다. 집에 둘러보면 몇 권 더 있다. 이번 작품은 황당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우리가 어떻게 맛집을 만드는지, 맛집의 실체란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성실한 실패란 놀라운 발상과 이 발상이 만들어낸 허구가 어떻게 스토리텔링으로 변해 성공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주면서 말장난의 유쾌한 전개로 이어진다. 정부 투자사업의 성공이 오히려 실패란 설정과 이 일 이후 두 남자의 다른 삶의 방식도 현실과 허구의 모습으로 끝맺는다. 그런데 하와이안 파인애플 냉면은 어떤 맛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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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9-05-09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들이 모두 재미있을 것 같아요. 불행히 저는 냉면을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책은 기대가 되네요.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기가 좋은 이유 - 내가 사랑한 취향의 공간들 B의 순간
김선아 지음 / 미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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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사랑한 취향의 공간 20곳을 다룬 에세이다. 읽으면서 내가 가본 곳이 있나 하고 세어보니 딱 네 곳이다. 그 중 한 곳은 들어가 보지 않은 곳이다. 바로 성수동 어니언이다. 아내가 빵을 사러 들어갈 때 밖에 주차를 하고 기다리고만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곳이냐고 다시 물으니 폐가 같다고 한다. 이전에는 상당히 특이하다고 한 것 같은데 시간이 흐르면서 강한 이미지로 남은 것은 좋아하는 빵과 폐가 같은 분위기인 모양이다. 미아점이 있다고 하니 순간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아마 갈 일은 없겠지만 새로운 분점이 생기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음에는 나도 한 번 들어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무 곳의 장소 중 유일하게 자주 보는 장소가 별마당 도서관이다. 회사가 그 근처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자주 본다. 그곳을 지나가다 보면 늘 외국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처음 이 곳이 생겼을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책이 얼마나 사라질까 였다. 회사 동료들도 이런 걱정을 했다. 그런데 현재까지 잘 운영되고 있다. 가운데 이벤트로 상징물이 가끔 바뀌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이유로 놀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아쉬운 대목을 첫 이야기에서 만났는데 그것은 별마당 도서관의 사진이 너무 별로로 나왔다는 것이다. 다른 공간들도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다.

 

아르코 예술극장·미술관은 한때 연극을 보기 위해 자주 간 곳이다. 요 몇 년 동안은 거의 갈일이 없었지만 다른 이름이라 조금 놀랐다. 만약 나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라면 가보지 못한 장소일 것이다. 처음 이 건물을 보고, 지금도 그 견고한 모습만 이미지와 그곳에서 본 연극 몇 편만 기억에 남아 있다. 디자이너가 본 건축물과 관객이 본 이미지는 차이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우연히 토요일 늦은 시간에 한 번 들어가 본 곳이다. 재밌는 전시물과 조금 복잡한 구조 때문에 기억한다. 내부의 공간만 기억하고 있는데 바깥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마 봤다고 해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다 보면 가보고 싶은 곳이 반드시 생긴다. 나의 경우는 뮤지엄 산과 카페 진정성 본점과 문화비축기지와 서울로 등이다. 이곳들의 특징들은 모두 아이와 함께 가기 좋은 곳이다. 카페 진정성 본점은 밀크티와 함께 아이와 뛰어놀 수 있을 것 같고, 나머지 세 곳은 신책 하듯이 걸을 수 있는 곳들이다. 나의 문화적 안목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내 나이가 좀더 어렸다면 TV에서도 본 커피 한약방이나 명동 근처 피크닉, 성수동 오르에르, 한남동 옹느세자메, 오랑오랑 등도 필수 코스 중 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걸으면서 누군가와 만나 이런 장소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색다른 재미외 기억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인테리어나 설계 등은 단순한 참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재밌는 것은 호텔 등의 숙박 시설을 3곳이나 넣은 것이다. 서울에 사는 내가 자러 갈 일은 없을 곳들이다. 하지만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단순한 숙박 시설을 넘고, 서울의 경계를 넘어 외국은 이런 곳들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네스트 호텔은 호캉스로 하룻밤 보내고 싶다. 건대 커먼그라운드 글을 봤을 때 서울숲 앞에 있는 컨테이너 상점 거리가 떠올랐다. 잠깐 착각도 했다. 더 넓은 부지와 다양한 연출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퀸마마마켓 등은 왠지 모르게 크게 끌리지 않는다. 실제 가게 되면 멋지다고 감탄할지 모르지만 나의 취향과는 조금 떨어져있다. 선농단은 왠지 큰 감흥이 없다. 왜일까?

 

좋은 공간을 사진 찍고 건축가의 감상과 설명을 달았는데 이 설명들보다 감상에 더 눈이 간다. 설명은 내가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감상은 나의 감상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공간에 대한 설명에서 받은 감상이 아이와 함께 가 볼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건축을 설명해준다고 하지만 소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그곳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함께 실린 사진들은 앞에서 말했듯이 그 원래 모습을 충실히 책 속에서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선택한 스무 곳은 서울이나 서울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혹할만한 곳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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