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대기 - 택배 상자 하나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 보리 만화밥 9
이종철 지음 / 보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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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차에 실린 택배 물건을 부리거나 싣는 일을 까대기라고 한다.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나 자신도 어릴 때 전자제품 도매를 하는 부모님 때문에 물건 내리고 올리는 일을 한 적이 많지만 트럭에 빽빽하게 가득 들어찬 물건들을 보면 먼저 질린다. 전자제품이야 같은 크기이고, 무게도 일정하지만 이 택배 물건들은 크기도, 무게도 제각각이다. 준비되지 않은 근육은 이런 경우 더 힘들 수밖에 없다. 일에 일정한 리듬을 타면 덜 힘든데 이런 경우는 리듬 타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기에 다른 사람의 속도에 맞춰야 한다. 쉴 틈 없이 레일 위에 택배를 올려놓아야 한다. 그것도 몇 시간이나. 생각만으로도 벌써 힘들다.

 

솔직히 말해 이전에는 택배 상하차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의 얕고 짧은 경험이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착각 때문이다. 이 알바를 시작하기도 전에 도망간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것이 현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루 하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란 이야기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작가 자신이 몇 년 동안 이 일을 했다는 점에 놀란다. 대단하다. 그리고 이 일을 몇 년 동안 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에는 가슴이 아프다. 시급이 다른 알바보다 조금 더 높다는 이유만으로 계속했기 때문이다. 다른 알바도 해야 하는 사연 속에는 낮은 인건비도 한몫했다. 부부가 함께 택배나 운송업을 하는 장면을 볼 때 괜히 더 먹먹해진다.

 

이 만화는 작가가 까대기를 하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 좀 더 좋은 환경과 조금 더 높은 시간급을 원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지점장과의 대립은 사실 구조적 문제다. 사람을 한 명 더 쓰면, 그만큼 손해가 나니 지점장 입장에서는 줄이려고 한다. 처음 까대기를 한 곳의 지점장이 그랬다. 시간에 쫓기는 택배사원들이 화장실을 얼마나 지저분하게 사용하는지, 까대기 레일 주변을 얼마나 어지럽히는지 보여줄 때 그 조그만 신경조차 그들에게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함께 고생한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자신도 살기 힘들어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까대기 일을 하시던 우 아저씨가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이나 첫날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도 이 현장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관계가 깊어지면 쉽게 이곳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갑과 화장실 청소 문제로 첫 택배지점을 떠날 때 이바다의 행동도 이 관계의 깊이를 잘 보여준다. 열심히 일하는 알바일수록 더 잘 대해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깨닫지 못하다가 같이 알바한 동생의 행동에 쉽게 동의하는 모습은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드러낸다. 더 큰 택배사로 옮기면서 조금 더 대우가 좋아졌지만 일은 변화가 없다. 어떤 날은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명절이 되면 택배 대란이 일어난다. 나 자신도 밤 열한 시가 넘어서 물건을 받은 적이 몇 번 있다. 택배 접수 마감은 연휴 며칠 전부다. 명절 선물이 가세하면서 물량이 더 늘어난 것이다. 택배 집하장에서 일어난 문제가 물류의 흐름을 막은 적도 있다. 이 만화를 읽으면 그 일이 조금 이해된다. 무책임하다고 말하는 인간들이 있다면 그들이 그 현장에서 며칠 고생해보면 된다. 일당이 많다고 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다. 가서 해봐라. 얼마 전 회사에게 택사 아저씨를 불러 물건을 보내니 택배비가 천 원 늘어났다. 워낙 저렴한 비용이란 것을 알기에 묻기만 하고 바로 지급했다. 그래도 초창기 택배 비용 정도다.

 

택배 노동 현장을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그 사실적 표현 속에 불편함도 가끔 있다. 내가 받은 물건들의 작은 파손들 때문이다. 적은 비용 속에서 이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치열해진 경쟁은 이것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던지고, 깔고 앉고, 파손되고, 보상하는 모습들은 현장 그대로다. 보상할 수박으로 더위를 잠시 잊는 그들의 모습은 보기 좋지만 아픈 현실이 담겨 있다. 비가 오면 비를 피할 곳이 없고, 추위도 그냥 견뎌야 한다. 좀더 좋은 시스템을 만들면 좋겠지만 이것도 돈이다. 자본의 논리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편하게 받는 택배 속에는 이른 자본의 논리와 그 속에서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까대기를 비롯한 수많은 택배 관련 사람들이 엮여 있다. 과장되지 않은 이야기라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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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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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기생충>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기생충으로 사람을 조정하고 사랑의 감정을 만든다는 흥미로운 설정과 전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노로봇을 이용한 기억 조작이다. 이 만들어진 기억을 작가는 의억(義憶)이라고, 그 대상을 의자(義子)라고 한다. 현재 삶이 불만족스러울 때 사람들은 의억을 사서 가공된 기억 속에 숨는다. 이것과 반대로 레테라는 것은 기억을 지우는 나노로봇이다. 잊고 싶은 기억이 있을 때 이 레테를 먹는다. 아마가이 치히로가 원했던 것은 레테인데 ‘그린그린’이란 의억이 잘못 왔다. 이 약은 이상적인 청춘의 기억을 뇌에 심어주도록 프로그래밍된 나노로봇이다.

 

원하지 않는 가짜 추억 속 소꿉친구가 생겼다. 이것을 없애는 방법은 레테를 먹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먹지 않고 이 가짜 추억을 그대로 둔다. 실제 그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친구가 없었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혼한 부모들은 자신들은 의억을 사지만 미성년자 아들은 이것을 사지 못하게 했다. 사이가 좋지 못한 부부는 이혼하고, 친권은 아버지가 가졌다. 그런데 엄마가 레테를 먹고 아들을 잊었다. 삶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채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갈 뿐이다. 이런 그에게 가공의 소꿉친구는 좋은 추억이다.

 

어느 날 축제에 갔다가 그는 가상기억 속 소녀를 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자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인물이 현실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먼저 부정하려고 한다. 치히로는 선배에게 들었던 사기를 떠올리면서 실존을 부인한다. 그런데 자꾸 의억 속 기억들이 떠오른다. 행복했던 순간들이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 옆집에서 등장한다. 혹시 자신이 레테를 먹고 나쓰나기 도카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물리적 자료를 찾고, 친구와 아버지를 만나 도카의 존재를 확인하지만 그 누구도 실존을 확인해주지 못한다. 그녀는 누굴까?

 

만들어진 기억이 현실에 스며들 때 자신의 의지와 감정은 흔들린다. 사랑이란 감정이 허구 위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러다 이들은 오랜 친구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 시간들은 진짜다. 이때의 감정도 사실이다. 그런 어느 날 도카가 사라진다. 이 사라짐으로 인해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것은 도카의 이야기이자 치히로와 도카의 의문스러운 사연에 대한 해답이다. 이 이야기는 또 하나의 외로운 인생을 보여주고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려준다. 이 의문이 해결되었다고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작은 이야기가 또 하나 펼쳐진다.

 

미국 영화 <토탈 리콜>에서는 만들어진 기억과 액션을 거대하게 엮었다. 이런 부분은 스릴러의 소재로도 딱 맞다. 하지만 작가는 개인으로 축소시켰다. 일본 사소설이 먼저 떠오른 것은 선입견일까? 작가는 확장된 이야기로 나아가지 않고, 축소하면서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만들어진 사랑과 진짜 사랑의 경계와 기억에 대해서, 사랑이 꼭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져야만 하는지. 이것은 전작 <사랑하는 기생충>에서도 나온 물음이다. 전작처럼 밝고 화려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와 미스터리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잘 풀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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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느 메디치의 딸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박미경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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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뒤마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다이제스트로 나온 것을 읽은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를 읽은 것은 처음이다. 그 유명한 <삼총사>나 <몽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작품은 책보다 영화 등으로 더 익숙하고, 세계문학전집 속 책들은 책장 속에 그대로 모셔두기만 했다. 고전 장편들 중 꽤 많은 작품들이 이렇게 책장 속에 쌓여만 있는데 솔직히 언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가슴 한 곳에서는 이 작품들을 읽고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언젠가 나만의 시간이 늘어난다면 이 책들 중 몇 권은 읽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목을 원작과 다르게 바꾸었다. 인터넷 번역기를 돌리니 <마르고 왕비> 정도가 원래 제목이다. 번역본의 제목인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은 마르고 왕비를 말한다. 이 소설 속에서는 마르그리트다. 마르그리트는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데 정략결혼의 대상이 된다. 그는 바로 나바르 왕이자 신교도 수장인 앙리 드 나바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힘든 점 중 하나는 바로 프랑스 역사에 대한 무지다. 역사를 모르다 보니 역사적 사건이 의미하는 바도, 그 인물들이 어떤 의미와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작가가 보여주는 이야기 외에는 알 수 없다. 물론 이 부분만 가지고도 재밌게 읽을 수는 있다.

 

이 정략결혼을 계획한 인물은 카트린느 메디치다. 태왕후인 그녀는 이 결혼을 통해 나바르 왕 앙리를 죽이려고 한다. 이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바로 앙리 살해다. 결혼식에 참석한 신교도들을 죽이고, 정부의 화장품에 독약을 실고, 다른 음모를 만들어 앙리를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이 음모는 번번히 실패한다.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에 의해, 아들이자 왕인 샤를르 9세에 의해, 또 다른 변수에 의해서 말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알 수 없어 의문이 들었지만 프랑스 왕권과 관련하여 이야기가 풀려나오면서 분명해졌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지만 시대에 따른 변화는 몰라 조금 아쉽다.

 

카트린느의 음모가 하나의 중요한 축이라면 이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친구에서 적으로, 다시 적에서 친구가 된 두 백작이 또 하나의 축을 담당한다. 라 몰과 코코나 백작이다. 라 몰은 마르그리트 왕비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내놓는다. 다시 친구가 된 코코나는 이런 친구를 응원하고 함께 음모에 맞선다. 이 둘이 다시 친구가 되었을 때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 하나는 나중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든다. 잘 생기고 사랑에 목숨을 거는 라 몰보다 좀더 대범하고 여유가 있는 코코나에 더 끌리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특히 마지막에 그가 보여주는 우정은 정말 놀랍다.

 

벽에도 귀가 있을 정도로 비밀과 음모가 난무하는 궁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빠르게 펼쳐진다. 암살이 벌어지고, 음모는 계속 생긴다. 죽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온갖 정보를 모으고 지력을 동원한다. 왕위에 대한 욕심이 음모로 이어지고,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못한다. 동맹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각자 다른 생각을 한다. 실수와 용기, 호의 등이 엮이고 꼬이면서 계획한 상황은 펼쳐지지 않는다.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낯선 이름과 상황 등으로 처음에는 혼란스럽지만 금방 익숙해지면서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된다. 개인적으로 마르고 여왕보다 카트린느 메디치란 제목을 달고 나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마르그리트의 등장이나 활약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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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 떨고 있어
와타야 리사 지음, 채숙향 옮김 / 창심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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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읽지 않았거나 거의 읽은 책이 없는데 낯익은 작가들이 있다. 와타야 리사가 그렇다.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하면 이 책 포함 다섯 권이 출간되었다. 모두 낯익은 제목인데 읽은 책은 두 권 정도다. 최연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란 타이틀은 책소개에 항상 나오고, 이것이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 이런 착각을 불러온다. 집에서 찾아보면 사놓고 읽지 않은 책도 분명히 한두 권 정도 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각인이 신간이 출간되면 관심을 가지게 하고, 기회가 되면 읽게 만든다. 실제 그런 작가들이 몇 명 더 있다. 이 책도 그렇게 읽었다.

 

스물여섯, 아직 처녀고 오타쿠 기질이 있는 직장 여성 요시카가 주인공이다. 한참 일본 드라마를 볼 때 이 나이가 되도록 처녀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남자인 내가 이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한때 남자들이 군대 갈 때 총각 딱지를 떼 주던 시절이 있었다. 결코 부끄러워할 이야기가 아닌데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어지면 어쩔 수 없이 위축된다. 성경험이 없다고 연예경험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요시카는 이 시대의 희귀동물 같이 연예경험도 없다. 멸종동물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설정한 것은 그녀 자신이 그런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연예를 하지 않고 짝사랑만 한 그녀는 발칙한 상상을 한다. 첫사랑의 남자와 결혼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부터가 황당하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는데 이 상상의 원인과 상상 속에 등장하는 두 남자 이야기가 조금씩 펼쳐진다. 첫사랑의 이름은 ‘이치’이고, 두 번째 남자는 ‘니’다. 숫자로 표기된 이것은 1, 2를 뜻한다. 이치는 중학교 때부터 짝사랑한 남자고, 니는 회사 동료다. 이치는 일방적으로 자신만 알고 있는 감정이고, 니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데이터를 요청했다. 좀더 고약하게 표현하면 일순위와 이순위란 의미다.

 

그녀의 짝사랑은 안보는 척 보는 것이다. 이 행동 때문에 딱 한 번 이치가 그녀에게 말을 건 적이 있다. 도쿄로 온 후 그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것을 위해 작은 음모와 계획을 세운다. 음모란 표현이 이상하지만 모임 자체가 그녀의 음흉한 의도가 깔린 것이다. 예상한대로 그와 함께, 물론 다른 동창생들도 있는 시간을 가진다. 이때 학창 시절 그를 살갑게 대한다고 생각한 친구들의 행동이 그에게 얼마나 스트레스였는지 알게 된다. 이보다 더 놀라운 장면은 그녀에게 강한 충격을 준다. 예상하지 못한 말 한 마디였다.

 

니는 직선적이다.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잘 표현한다. 그와의 만남은 교감보다 엇갈림이 더 강하다. 그녀가 바라는 곳에서 그는 견디질 못한다. 재밌는 점 중 하나는 그녀의 상황을 동기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상태로 만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화를 냈던가. 그가 키스를 위해 입술을 내밀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가 그를 밀친다. 이후 그녀가 벌이는 황당한 사태는 이전에 그 어떤 소설이나 영화에서 본 적조차 없는 행동이다. 어쩌면 이 현실에서 떨어져 나간 순간,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의 진심을, 바람을 제대로 봤는지 모른다.

 

이것과 함께 단편 <사이좋게 지낼까?>도 같이 실려 있다. 표제작과 다른 느낌이라 조금 놀랐다. 분명한 이야기보다 이미지가 더 강하게 다가왔는데 조금 어둡다. 표제막의 황당하지만 발랄함이 이 단편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작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 것 같은데 차분하게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언제 시간되면 읽지 않은 다른 작품도 읽고 싶다. 물론 이 말은 공수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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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멸종 안전가옥 앤솔로지 2
시아란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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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의 두 번째 앤솔로지다. 첫 번째가 냉면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두 번째는 완전히 다른 주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놀라운 상상력과 재밌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다섯 편이 실려 있는데 대멸종이란 주제를 각각 다른 장르로 풀어내었다. 장르는 특성상 판타지와 SF를 주로 사용해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앤솔로지에서 다루는 대멸종 이야기 중 셋 가지가 한 인물에게 종의 멸종이 달려 있다. 그리고 세 이야기도 다른 방식으로 선택과 행동을 풀어낸다. 안전가옥의 다음 앤솔로지가 벌써 기다려진다.

 

<저승 최후의 날에 대한 기록>은 대멸종을 다른 시각에서 본다. 인간의 종말이 사후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끌고 간다. 이 단편에서는 염라대왕이 나오는 한국 전통 저승의 모습을 다루고, 이 저승과 다른 문화 혹은 종교의 저승과도 교류한다. 인간의 종말은 우주에서 온 감마선이고, 갑자기 죽게 된다. 지구의 자전에 따라 시차가 있을 뿐이다. 환생이나 저승의 부활 등을 위해 저승에서 노력하는 모습은 인간 사회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개인적으로 이승과 저승의 주인공을 만들고, 작은 희망을 담은 장편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는 고단한 프로그램 개발자 이야기로 시작한다. 인력을 갈아 넣어 만들어지는 프로그램 세계를 다루다가 갑자기 비약한다. 이 비약이 낯설지 않지만 방법은 황당하다. 무언가를 계속 먹다가 생긴 능력이라니. 하나의 게임이 제한된 점프 횟수 65,536번을 채우면 중단되는 버그를 고치기 위해 채용된 직원의 수사는 그 개발자와의 대화 속에서 또 다른 문제를 보여준다. <매트릭스>의 세계관과 비슷하지만 그 규모는 훨씬 거대하고, 인간의 존재와 멸종을 다르게 풀어낸다. 이 앤솔로지에서 인간의 대멸종을 다루지 않은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선택의 아이>는 무대가 캄보디아의 작은 마을이다. 주인공 가나는 돌고래 뿌와 대화를 할 수 있다. 뿌는 여섯 번째 대멸종과 인류의 멸종을 구분한다. 이 구분이 소설의 핵심이다.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나거나 인류가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가 선택되어야 한다. 이 선택이 가나에게 달렸다. 작가는 우리가 동남아에 가서 흔히 보는 최하층민의 삶과 가나가 가진 작은 희망을 보여준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둡다고 해도 자신에게 작은 도움과 선의를 베풀어주는 좋은 사람이 있다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악의가 넘치고 폭행이 이어진다면 그 희망은 너무 미약하다. 노아의 방주를 다르게 해석한 부분도 흥미롭지만 한 아이의 선택에 멸종이 달렸다는 설정은 조금 씁쓸하다.

 

<우주탐사선 베르티아>의 설정 중 하나는 작년에 읽은 <세븐이브스>와 닮았다. 그것은 달의 파괴와 지구의 파멸이다. 살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땅속이란 것도 닮았다. 하지만 그것과 달리 이 소설은 500년 전 우주의 중심으로 떠난 우주탐사선 베르티아 속 우주인들의 시선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류의 종말이 인간들에 의해 벌어졌다는 사실을 빠르게 알고, 남은 인류를 찾는다. 사실 이것으로 끝났다면 흔한 <혹성탈출> 같은 소설이 되었겠지만 승무원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더 복잡해진다. 그들이 보지 못한 우주의 중심과 발견이 전부가 아니라는 설정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달을 불렀어, 귀를 기울여 줘>는 양판소 판타지의 설정을 빌려왔다. 마력 빈대의 줄임말인 마빈이 마계의 달을 불렀다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가 이 달을 부른 것은 자신에게 부족한 마력을 빌리기 위해서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다섯 편의 단편 중 가장 취향에 맞지 않고 낡았다는 느낌을 받은 작품이다. 하지만 대현자 마르테가 마탑에서 마빈의 발견하고 함께 길을 떠난 이유를 밝히는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괜히 10서클 대마법 중 하나인 운석을 불러와 공격하는 것에 현실 감각이 생겼다. 아마 이 단편에 작은 불편함을 느낀 것은 나 자신이 무협과 판타지를 열독하면서 이 장르와 분리하면서 생긴 문제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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