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한 숫자들 - 통계는 어떻게 부자의 편이 되는가
알렉스 코밤 지음, 고현석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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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통계를 잘 믿지 않는다. 완전히 신뢰하기에는 통계 작성에 ‘어떤 의도’가 너무 많이 개입한 것을 보았다. 의도적인 누락이나 오류를 집어넣어 자신들이 원하는 숫자로 바꾸는 것도 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는 무시할 수 없다. 현대의 과학이나 사회의 발전 등에 통계가 기여한 바가 너무 크고, 제대로 된 자료들은 현실의 모습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에 끌린 이유도 이런 통계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부는 숨기고, 가난은 감춰라.”란 문장은 왜곡된 통계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이 책은 이런 편향적인 데이터 수집의 문제와 그 대안을 이야기한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재미있게도, 자극적으로도 서술하지 않았다. 현실과 문제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이 개선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말한다. 빠른 개선이란 것도 몇 년의 시간이 걸려야 시작할 수 있다는 표현을 보고 아주 현실적으로 문제를 본다고 느꼈다. 집계 불이행.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저자는 지속적으로 풀어낸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수많은 용어들, GDP, 지니 계수, 인구조사, 출산율 등이 정확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누락된 숫자들은 제 시간에 통계에 반영되지 않거나 왜곡된 의미를 지닌다. 대표적으로 GDP의 경우 최상위와 최하위 문제가 어떤 식으로 변했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다. 최근 부의 불균형을 말할 때 1 대 99가 아닌 10 대 90 혹은 20 대 80을 말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언피플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가려진 최빈층을, 언머니는 감춰진 부자들의 돈을 가리킨다. 언피플을 읽으면서 우리나라를 떠올렸다. 우리에겐 해당사항이 없다고 처음에는 자신했지만 세부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면서 이 자신감은 조금씩 사라졌다. 제대로 집계되지 않은 부분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와 닿는 문장은 현실적으로 집계하기 힘들다는 기술적 핑계다. 일하면서 나 자신도 많이 내뱉은 말이다.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제대로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나라를 대상으로 한 글이란 것을 알 수 있다. 2부의 언머니와는 완전히 반대에 있다.


언머니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소득 이전과 조세회피다. 우리가 흔히 조세피난처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독재자나 마피아의 검은 돈을 떠올리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다국적기업의 과세되지 않는 자금이라고 말한다. 국내외 법적 허용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조세회피는 법의 테두리를 공고화시키면서 계속 유지되고 있다. 자신들의 숨겨진 부가 밖으로 드러나고, 과세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부자들은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이 자금의 흐름을 숨기고 정당하다고 말한다. 이런 숫자들이 한 국가의 GDP까지 왜곡시킨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 있다. 언론에 자주 나오는 애플을 떠올리면 쉽다. 불평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지니 계수 대신 팔마 비율을 대안으로 제시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공부가 더 필요하다.


마지막에는 집계 이행을 촉구한다. 누락되고 감춰진 수자들을 포함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소득 이전을 끝내는 방법으로 합산 과세를 주장하는데 각 나라의 협동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집계 불이행에 정치적 동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도 정치적인 행동이란 지적은 가슴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순위, 지수를 비롯한 기타 데이터 도구들이 환영을 받는 것은 현재 권력의 시각에 도전할 때가 아니라 부합할 때다.”란 지적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왜 집계 불이행이 정치적인 문제인지 알려준다.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개선하고 바꿔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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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에서 잠시 멈춤
구희상 지음 / 이담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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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은 내가 처음 해외여행으로 간 곳이다. 방콕은 내가 처음 배낭여행으로 갔다 온 곳이다. 첫 배낭여행 이후 몇 년 동안 매년 태국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보통 치앙마이나 파타야 등을 다녀왔는데 태국에서 그 출발지점은 언제나 방콕이었다. 작은 배낭 하나를 매고, 겨우 며칠 머무는 방콕이었지만 여행의 방법이나 시선을 조금만 바꾸어도 달라진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그리고 8년 전 마지막으로 방콕을 다녀온 후 그 지독한 매연과 불편한 택시 등에 질려 가고 싶은 마음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누군가 짧은 여행으로 어딘가를 간다고 할 때면 방콕을 추천한다. 그리고 몇 년이 시간이 흐른 후 그곳에 대한 그리움이 생긴다. 몇 번을 다녀왔지만 아직 가보지 못하고, 맛보지 못한 음식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방콕에서 한 달 살기. 해보고 싶은 여행이다. 한때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가 유행한 적이 있다. 코로나 19 이전까지만 해도 나의 눈길이 간 부분이다.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은 언제나 나를 유혹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내가 방콕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다고 해도 그것은 잠깐의 일이다. 이후 방콕이나 태국 다른 지역은 늘 관심지역이다.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해야 하는 지금은 휴양지 위주로 바뀌었지만 방콕의 저렴하고 훌륭한 호텔 등은 쾌적한 여행에도 상당히 도움을 준다. 내가 가지 않는 동안 그랩으로 이동하는 방법이 보편화되어 택시의 바가지 요금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이런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면서 이 책을 읽었다. 내가 잘 모르는 방콕과 즐겁게 경험한 방콕의 여기저기를 다시 보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예상은 책을 읽으면서 점점 사라졌다.


단순한 여행에세이가 아니다. 인문 여행서 두 번째 티켓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예상한 방콕의 모습은 많이 발견하지 못했지만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정보들을 새롭게 인식하고 많이 보고 배웠다. 세 파트로 나누어 풀어내는 방콕 이야기는 내가 갔다 온 시간의 흐름만큼 차이가 많이 난다. 물론 변함없는 부분도 많다. 여행 에세이에 인문을 붙였는데 읽다 보면 이 부분이 더 눈에 많이 들어온다. 방콕에 대한 인물 사회 정보에 더 집중하고 있어 여행의 추억이나 정보를 얻는 대목에서는 조금 아쉬움이 있다. 물론 여행을 가기 전 그 나라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얻기를 바라는 독자라면 아주 좋은 기초서적이 될 수는 있다.


그가 꼽은 방콕의 여행지 중 하나가 국립박물관이다. 처음 배낭여행을 갔을 때 이곳을 방문했었다. 낯선 문화재는 신기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왕궁과 사원들을 해상보트를 타고 이동하면서 관광했던 것이 기억난다. 학교 선생하는 친구와 가서 그런지 왠지 수학여행의 느낌이 있었다. 충실한 일정이었다고 자평하는데 실제 방콕 사람들의 삶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본 것은 그 뒤에 다시 방문했을 때다. 카오산 로드 근처에 머물면서 발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강의 지선에서 운행하는 보트를 타고 시내에 나가기도 했고, 가장 저렴한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이런 나의 행동은 하나의 간단한 체험이었지 삶이 아니었다. 필요하면 바로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낡고 작고 화면도 흐린 테레비로 한국 드라마를 보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 당시에도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크기였다.


개인적으로 파트 1 부분이 가장 재밌었다. 자신의 경험이 많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파트 2와 3으로 넘어가면 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보고서처럼 다가온다. 태국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이 알면 좋지만 몰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인문’에 초점을 맞춘 부분이다. 개인의 경험이 조금 묻어 나오지만 연구원의 기록처럼 다가와 재미는 떨어진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이 반복되는 부분도 많다. 몇 년 사이에 바뀐 문화도 업데이트가 되어 다시 간다면 참고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태국 민주화와 왕에 대한 부분은 내가 갔다 온 이후 많이 바뀌었고, 잠시 그 당시의 기억을 더듬게 한다. 연구자의 시선보다 여행자의 시선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의 말처럼 방콕의 매연 냄새가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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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일기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지나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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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싼마오의 에세이를 읽었다. 인터넷 서점 기록을 뒤져보니 2009년에 <사하라 이야기> 2권인 <흐느끼는 낙타>를 읽었었다. 2권을 재밌게 읽어 1권은 사 놓았는데 역시 쌓아두기만 했다. 어딘가에 묵혀 두고 있는 모양인데 현재 찾을 수 없다. 전작도 재밌게 읽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재미있다. 사하라를 떠난 후 카나리아 섬의 작고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에 터를 잡고 사는 이야기다. 열두 편의 에세이는 이 알콩달콩한 부부의 삶과 이웃 이야기를 맛깔나고, 현실적으로 풀어낸다. 읽으면서 1970년대를 감안해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읽는데 이질감이 전혀 없다.


이 부부가 카나리아 섬으로 오게 된 이유는 사막의 내전 때문이다.  섬에 집을 구한 후에도 호세는 사하라에서 한동안 일을 한다. 위험의 정도가 심해지자 그 일을 그만 두는데 그들의 친구는 아내의 닦달에 계속 그 위험한 일을 한다. <대부여 돌아와요>에 실린 이야기다. 친구가 자신의 모습을 잃고 누군가의 남편으로 변했다고 지적한 부분을 읽고 안타까웠다. 이 이야기를 한국의 수많은 엄마에게 적용한다면 누구 엄마로 전락한 여성들이 떠오른다. 싼마오는 부부가 누군가에 종속된 관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그녀도 시어머니와 시누이 부부가 왔을 때 보여준 모습은 문화적 차이와 함께 시대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호세와 그 누나 등이 보여준 행동은 놀라울 정도로 이기적이다.


<플라스틱 아이들>을 읽으면서 현재 아이들이 유튜브와 게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과 겹쳐졌다. 나라고 뭐 특별히 달랐겠는가 말이다. <수호천사> 이야기는 자신이 나이가 들고, 부모가 되는 순간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에피소드다. 호세의 비중이 가장 많은 이야기는 아마도 <가출한 아내에게>일 것이다. 대만으로 온 싼마오에게 보낸 편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호세의 절실한 마음과 예상 외의 전략이 읽는 재미를 북돋아준다. 아내의 답장이 없어 괴로워하다 낸 작은 잔략은 아내의 화를 북톧고, 온갖 욕설을 내뱉게 한다. 덕분에 집ㅇ로 돌아오는 시간이 상당히 많이 단축되었다. 그 전략은 이 에세이를 천천히 읽으면서 반전 같은 재미를 누리면서 즐기길 바란다.


이 책에서 가장 먹먹한 이야기는 <작은 거인>과 <어느 낯선 사람의 죽음>일 것이다. <작은 거인>의 마지막 장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열두 살 아이가 엄마와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쪼개 일하고, 가정폭력을 견뎌내는 모습은 대단하다는 감탄을 넘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느 낯선 사람의 죽음>은 카나리아 제도에 온 수많은 북유럽 남성 중 한 명의 죽음을 다룬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의 마지막 모습은 씁쓸하다. 하지만 이 모습보다 이 노인의 최후를 대하는 이웃들의 너무나도 개인적인 모습이 더 인상적이다. 싼마오와 호세가 이 노인을 병원에 데리고 가고, 장례식까지 처리한다. 영사관마저도 노인의 병원 문제는 관여하지 않았다.


<상사병>은 호세의 입을 통해 싼마오가 꿈꾸는 미래의 한자락을 풀어낸다. 뭐 거기에 살짝 호세의 바람도 묻어있지만 구체적이고 꼼꼼한 계획은 ‘뭘 그렇게까지?’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카나리아 제도 유람기>는 두 부부가 카나리아 제도를 돌면서 각 섬에서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섬의 관광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대목과 관광지로 발전한 섬으로 이탈하는 다른 섬주민들 이야기가 각 섬의 특징들과 함께 어우러져 잘 요약되어 나온다. <털보와 나>는 간략한 그들의 결혼 에피소드다. 이 이야기에서 여성이 독립된 존재란 사실을 분명하게 말한다. 아마 이런 사실들이 그녀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한 에세이 속에 다양한 형식으로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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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아이, 크리 오늘의 청소년 문학 31
일요 지음 / 다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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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끌린 이유는 보통의 좀비물과 다르다는 것과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작가의 말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이 소설은 기존의 좀비물과 다른 것은 맞지만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했다. 먼저 기존의 좀비물처럼 이성을 상실하고, 사람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좀비가 등장하지 않는다. 블루Z바이러스가 등장하는데 증상도 다르다. 오히려 최근에 발생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이 바이러스를 가진 사람들을 잠복체라고 부르고, 없는 사람들을 건강체라고 부르면서 차별하는 미래 사회를 그렸다. 가독성은 좋은 편이지만 이야기의 구성이나 전개는 조금 밀도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크리는 지하 17층에서 세탁 등의 노동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냥 보면 평범한 아이다. 할리 아줌마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란다. 이들이 사는 곳을 생츄어리라고 하는데 밤이 되면 선전노래와 함께 분리정책 홍보 영상이 나온다. “태양은 잠복체를 죽여요.”란 문구는 왜 이들이 밤에 일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표어다. 잠복체는 밤에 열심히 일하고, 아주 열악한 음식을 배급받고, 아침이 오면 잠자리에 든다. 이에 반대편에 서 있는 아이가 홍보 영상에 나오는 로미다. 건강체이면서 지상층에 살고 있다. 프레지덩의 아이로 늘 영상에 나와 홍보를 한다. 단순 비교하면 더 행복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크리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밝다면 로미는 훨씬 좋은 환경이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고 작은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단순한 이분법 속에 작은 차이를 집어넣었다.


크리는 파드라는 초능력을 가진 아이다. 이 능력을 알고 있는 인물이 바로 라키바움이란 타워 중앙컴퓨터와 연결된 사람이다. 크리가 자신의 초능력을 발현한 것을 발견하고, 몰래 타워로 데리고 온 인물이다. 그녀가 바란 것은 크리가 파드를 사용해 블루Z바이러스를 없애는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다. 생츄어리에서 글자를 배우지 못한 크리는 파드를 이용해 책 내용을 알게 되고, 염동력도 사용 가능하다. 목욕이란 것도 타워에 올라와 처음 해보고, 맛있는 음식도 처음 먹는다. 크리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을 돌보아준 할리 아줌마를 찾는 것이다. 타워를 돌아다니려면 피부색에 파란 반점이 없어야 한다. 이 반점은 잠복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잠복체들이 잠을 잘 때 쏘는 빛에 의해 이런 파란 반점이 생긴다. 재밌는 설정 중 하나는 건강체들이 홀로그램으로 자신의 피부색을 옷처럼 여러 색으로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도구의 도움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속인다.


두툼하지 않은 분량에 체제 전복을 그린 소설을 다루긴 쉽지 않다. 몇몇 곳에서 디테일이 살아 있다고 해도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다 보니 이야기의 비약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 소설도 그런 비약이 심하다. 잠복체와 건강체의 차별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식으로 유지되는지 간결하게 나오지만 이 차별을 이용해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부각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의 설정으로 타워를 조정하는 시스템의 핵심으로 라키바움을 두고, 파드란 초능력을 이용해 단숨에 전복시키는 장면들은 통쾌할지 모르지만 지속적인 개혁을 이루는 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혁명 같은 일을 한 명의 소녀가 초능력으로 이룬다는 전개는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다. 시리즈로 나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라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왠지 모르게 크리와 로미의 대화에 어색함을 느낀다. 꼰대라서 그런지 크리가 로미에게 반말하고, 내뱉는 어투가 남자 같고, 로미가 여성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서울 태생이 아니기 때문일까? 로미의 비중이 뒤로 가면서 줄어들고, 비밀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크리가 보여준 잔혹한 진실 부분은 생각할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하지만 기존의 좀비물과 다르게 접근한 부분과 이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특권을 더 강화시킨 사람들이란 설정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실제 현실에서 문제가 생기면 이 문제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과 현실을 깨달았다고 그 현실이 바로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내가 시리즈를 이야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난관과 문제들은 이야기를 더욱 확장시켜주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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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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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작가 이름을 보았을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작품은 이선영 작가의 소설이 아니었다. 작가의 이력을 보고 기억을 조정했다. 집에 있는 소설이다. 언제나 나의 저질 기억력은 작품과 작가를 헷갈린다.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매칭이 이루어진다. 이 틀린 매칭이 맞다는 기억으로 출력되고, 사실 확인 전까지 공고해진다. 가끔 틀린 기억은 합리화란 이름으로 사실을 왜곡하려고 한다. 사실을 확인해도 시간은 이 사실을 잊는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나의 저질 기억력처럼 작동한다. 이 소설 속 학교 성폭력도 그 중 하나다. 가해자가 보여준 발언과 행동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경기도 가평 청우산에서 여자 변사체가 발견된다. 투신 자살로 보이지만 백규민 형사는 이질감을 느낀다. 신원을 확인하다 사망자가 오기현이라고 확인한다. 그녀의 언니 윤의현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마지막 확인 작업으로 의붓아버지 오창기를 데리고 온다. 그를 데리고 온 파출소 순경의 모습은 너무 공손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든 의문 하나 왜 지문 확인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시체의 부식 정도나 상처 때문에 지문을 확인할 수 없었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한국은 주민등록증을 발급할 때 모두 지문을 날인하고 그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데 말이다.


첫 장에서 백규민의 과거사가 간략하게 흘러나온다. 경찰대학 출신이라 출세가 보장되어 있는데 한 사건 때문에 좌천되어 가평으로 온 것이다. 아내와 이혼했고, 부모와도 좋지 않게 헤어졌다. 가슴 속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가 기현의 언니 윤의현을 봤을 때 끌린 것은 그녀 속에 깔린 어둠과 상처 때문이다. 그리고 자매라고 하는데 둘의 성이 다르다. 출생연도도 1년 차이가 난다. 의현을 낳고 재혼해 기현을 낳았다고 한다. 작가는 이렇게 자매의 과거사를 조금씩 쌓아 올리고, 기현의 죽음에 의문을 던진다. 실족사나 자살일까 아니면 타살일까? 부검을 해야만 이 사실이 명확해진다. 법적으로 부검을 하려면 부친 오창기의 동의가 필요하다.


오창기의 꽃새미 마을은 대지주의 권세 안에 자리잡고 있다. 파출소 경찰이 왜 그렇게 굽신거렸는지 알려주는 대목이 마을 앞 꽃가게들의 실제 주인이 누군지 알려줄 때 바로 나온다. 세상이 서울의 부정부패에 눈길을 줄 때 지방 토호들은 자신의 이익을 착실하게 챙긴다. 자신의 비리를 조력자들을 통해 덮는다. 오기현과 오창기의 사연은 그렇게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마을 여자들을 달뜨게 하는 남자 신명호가 등장한다. 시력을 잃었고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그다. 시선을 이 두 남자에게 가져간다. 누가 그녀를 죽였을까? 그런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 다른 가능성 하나가 떠올랐다. 책을 덮기 전 그 가능성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교묘한 트릭을 사용해 독자의 시선을 가렸다. 이 사실이 풀려나올 때 장면 하나 하나가 의미를 가진 채 다가왔다.


학내 성폭력과 성추행,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등을 소재로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을 엮었다. 대학 내 성폭력 문제를 학내에서 어떻게 처리하고 대처하는지 보여주는 장면과 가해자의 말과 행동은 역겹지만 사실적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려워하는 현실은 비정상적이지만 현실의 실제 모습이다. 오창기와 오기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론에 드러나는 사건들은 피해자의 상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이 피해자의 사연을 자신들의 이익에 이용하는 언론들이 얼마나 많은가. 탐사보도란 이름으로 공익을 위하는 척하지만 속내는 시청률이라는 점을 작가는 그대로 지적한다. 좋게 보면 공생이지만 결국 언론은 이 사실을 빨아먹으면서 기생한다. 공생이 되려면 지속적이거나 피해자의 상처가 아물어야 가능하다. 이 소설 속 이야기들은 상처를 봉합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진실의 무게가 주는 무거움을 감당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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