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마와라시
온다 리쿠 지음, 강영혜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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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소설을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밤의 피크닉>으로 입문한 후 여러 작품을 읽었지만 취향을 조금 타는 작가다. 한참 책을 사 모을 때 상당한 숫자의 책을 집에 쌓아두었는데 늘 그렇듯이 묵혀만 둔다. 그 책들이 이제 재간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 시간에 대한 나의 감각이 흐려진다. 온다 리쿠에 대한 설명 중 하나가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란 것이다. 내가 읽은 소설에서 그렇게 강하게 느끼지 못한 것 같은데 이번 작품은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산타와 그 형 다로가 운영하는 것이 골동품점이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오래된 건축물의 크지 않은 물건인 문고리, 맹장지, 들창, 난기둥, 문 등의 자잘한 의장이 들어간 것이다. 읽으면서 내가 무심코 보고 지나간 것, 기억 속 장소와 물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이야기의 문을 여는 부분에서 스키마와라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작가가 만든 용어다. 틈 사이에 존재하는 아이라는 의미다. 동창회에서 어릴 때 산타와 함께 걷던 여자를 본 동창이 한 말을 듣고 형이 만든 용어다. 산타에겐 여자 형제가 없기에. 그리고 산타란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어식 표기다 보니 한자의 발음은 같지만 다른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산타는 散多다. 직관적으로 산타클로스를 떠올린 사람이 많겠지만 말이다. 재밌는 부분은 둘째란 의미를 가진 지로란 이름의 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의미가 모호한 주인공의 이름의 기원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책 마지막에 나오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발음과 의미의 차이를 여러 곳에 녹여내었다. 대표적으로 산타가 있고, 스키마와라시로 부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마미라고 부르는 소녀 유령(?)이 있다. 한자 문화권의 특징이라고 해야 하나. 이 마미는 철거 예정인 건물에서 나타난다. 당연히 위험한 공간이다. 여기에 산타에게 초능력을 부여했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인데 늘 발현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런 종류도 아니다. 이야기가 진행함에 따라 이 능력이 발현하는 순간은 많은 경우 타일과 관련되어 있다. 오래된 건물에서 떼어내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타일을 만질 때 알 수 없는 환영을 마주한다. 이렇게 적고 보니 대단한 비밀인 것 같지만 긴박한 스릴러와는 거리가 있다.


작가 취향의 집대성이란 안내글이 보인다. 이 소설 속 산타가 보고 맛보고 경험하는 공간 등이 작가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한다. 여기에 판타지와 미스터리 등을 버무려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상당히 가독성이 좋고,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조금은 느슨한 느낌이라 속도감을 그렇게 강하게 느끼지는 않는다. 그런데 읽다 보니 끝이다. 개인적으로 산타가 경험한 것들이 나의 추억을 불어오고, 주변에서 쉴 새 없이 바뀌는 건물들을 돌아보게 한다. 도시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 속에 과거의 모습은 밀려날 수밖에 없다. 작가가 눈 여겨 본 부분이 바로 이 모습이다. 하지만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 속에서 다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 기운을 통해 산타가 환상을 보는 것 같다.


늘 그렇듯이 무심코 표지를 보다 소녀의 모습이 눈길을 끌어 자세히 보았다. 소설 속에 묘사된 그 모습이다. 표지의 짙은 푸름이 이 무더운 여름에 나를 잠시 과거의 한 장소로 데리고 간다. 희미한 추억의 한자락이지만 왠지 아련하다. 형이 모은다는 문고리 등을 떠올리면 한때 나의 수집벽이 스쳐 지나가고, 골동품점을 저녁에 식당으로 운영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이젠 사라진 관계들이 떠오른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약간의 어리둥절함도 느끼지만 앞부분에 깐 의혹들이 해결되는 상쾌함도 있다. 화려해지고 거대해진 공간과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낡고 작은 곳에 대한 아련함이 더 샘솟는 것 같다. 어릴 때 그렇게 큰 것 같았던 곳이 어른이 되어 보면 생각보다 너무 작은 것에 놀랐지 않은가. 어떤 대목에서는 일본 애니를 한 편 본 것 같은 느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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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 - 개정판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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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나온 소설의 개정판이다. 사실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하기 전에 이 소설이 개정판이란 사실을 몰랐다. 작가의 신작이라고 생각했다. 구판 표지를 보니 왠지 낮이 익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만약 좋아했다면 그의 소설들을 더 읽었을 것이고, 더 열심히 모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로쟈가 한국 남성작가에 대한 글을 쓸 때 그를 포함하면서 부쩍 관심이 늘었다. 그냥 무심코 헌책방에서 싼 가격 덕분에 산 <생의 이면> 구판에 자주 눈길을 준 것도 이런 이유다. 뭐 그렇다고 읽을 정도의 열정도 시간도 현재 나에겐 없다. 산 후 바로 읽지 않은 책들의 가능성은 언제나처럼 늘 희미하다.


작가 이승우에 대한 평가가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좋다는 것과 그의 대표작에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관념에 천착했다는 것 정도가 아는 전부다. 그런데 목록을 펼쳐 놓고 보니 읽은 책이 한두 권 보인다. 사놓고 묵혀둔 책도 당연히 눈에 들어온다. 외국 작가의 책을 읽다 펼쳐든 그의 문장은 나의 예상과 달리 가독성이 아주 좋았다. 분량이 많지 않다 보니 생각보다 더 빨리 읽었다. 개정판이란 정보 때문에 소설 속에 나온 몇 가지를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확인한다. 혹시 개정판에서 바뀐 것이 아닌가 하고. 하지만 이 둘을 천천히 비교할 능력도 마음도 없다 보니 건성으로 확인한다. 나의 기억이 잘못된 것으로.


말테와 로맹 가리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한 권을 내가 읽었고, 한 권은 읽지 않은 작품이다. 로맹 가리의 소설에 대한 한승원의 지적을 보면서 왠지 크게 공감을 못한 것은 나에게 그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가 결핵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요양지를 바꾸게 된 이유를 보면서 그에 대한 평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화자는 편모 밑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부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았었다. 그가 요양을 온 곳에서 한 노교수의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꿈까지 이어지면서 그는 생부를 찾으려고 한다. 아빠 역할까지 완벽하게 한 엄마에게 물을 수 없어 외삼촌에게 묻는다. 그를 만나러 간다. 삼팔선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소설은 대부분 중요한 인물들을 이름이 아닌 익명으로 처리한다. 자신의 애인도 P라고 부르고, 생부인 듯한 사람도 약력으로 표시하지 이름은 말하지 않는다. 그가 지역 선거에 출마했지만 기호로 표기한다. 그가 머문 여인숙 주인이 누굴 만나러 왔냐고 물을 때도 그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그의 얼굴에서 자신의 미래 모습을 그려본다. 적극적으로 만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군사경계선에 가깝다 보니 사람들이 의심의 시선으로 쳐다본다. 의지가 분명하다면 바로 만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주저한다. 이 주저가 한순간 폭발하는데 그때 엄마의 이름이 나온다. 아버지의 역할까지 아주 잘 한 엄마의 이름이 말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감정이 격해지고,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흔히 잊고 있던 아들이 찾아오면 반갑게 맞아줄 것이란 상상을 한다. 물론 처음에는 의심과 어리둥절함이 같이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상황은 그것과 다르다. 생물학적 아버지란 피할 수 없는 사실도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근원적인 의문이 아버지 부재의 인식과 만나 일어나는 상황은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로 대입이 가능하다. 혈연을 확인하는 것보다 현재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이 우선이다. 현재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 이런 현실에서 화자가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당연한 것이었던 존재가 누군가에는 부재였다는 사실과 나의 존재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시간 내어 집에 있는 책들 한 권씩 찾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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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의 섬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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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도심 재난 3부작> 중 한 권이다. 다른 두 작품은 <크래시>와 <하이-라이즈>다. 한참 책을 사 모을 때 <하이-라이즈>는 샀다. 그런데 <크래시>는 잘 모르겠다. 아마 오래전 본 영화 <크래쉬>의 이미지 때문에 사지 않았던 것 같다.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만든 영화는 상당히 난해했고, 개인적으로 취향과도 맞지 않았다.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인 <지구 종말 시리즈>도 뒤늦게 알게 된 작가의 명성 때문에 어렵게 중고책을 구해 놓았는데 최근 개정판이 나왔다. 영화 <태양의 제국>의 원작자란 사실도 이번에야 제대로 인식했다. 알았다면 헌책방에서 샀을 텐데 조금 아쉽다.


지구 종말 시리즈에 대한 서평을 보면 난해하다는 글이 보인다. 내가 이 작가의 작품에 손이 쉽게 나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그렇지만 이런 유명한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간다. 실제 이 작품을 읽으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독성이 좋았다. 내용은 가독성과 상관없이 상당히 난해하다. 이 난해함은 주인공이 이름 붙인 ‘교통섬’이란 공간에 떨어지고, 벗어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공감을 하지 못한 부분에서 비롯한다. 입체교차로에서 과속으로 떨어진 것은 이해한다고 해도 그가 그곳에서 차에 치여 다시 교통섬에 떨어지는 과정과 생존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이 장면을 하나의 블랙코미디처럼 해석한다면 다르겠지만.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로빈슨 크루소>를 변주해 작품을 내놓았다.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재밌게 보는데 왜 소설로 재해석된 작품들은 그렇게 가슴에 와 닿는 재미를 주지 못할까? 존 쿳시의 <포>도 그런 작품 중 한 권이다. 영화는 오락성에 중점을 두었고 소설은 재미만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리고 이 소설을 SF 장르로 구분한 것을 닐 게이먼의 해제를 읽기 전에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SF 장르는 작가가 처음 단편을 쓸 때 유행하던 것들에 좀 더 가까운데 말이다. 밸러드식 내우주 SF란 것을 처음 접하는 나는 조금 혼란스럽다.


건축가 로버트 메이틀랜드는 런던 중심부 웨스트웨이 입체교차로에서 과속하다 가드레일을 박고 추락한다. 다행히 큰 부상이 없다.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 높은 경사면을 올라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가면 상황은 쉽게 끝날 수 있다. 그런데 입체교차로란 곳이 항상 붐비는 공간이다. 과속으로 차들은 달리고, 어떤 차들은 그에게 상처를 준다. 결국 차에 치여 그가 교통섬이라고 부르는 곳에 다시 떨어진다. 다친 몸으로 높은 경사면을 올라가기 힘들다. 차만 다니지 사람은 주변에 잘 보이지 않는다. 교통섬의 사고난 차에 앉은 그를 본 운전자도 그가 자의적으로 그곳에 머문다고 생각한다. 의도하지 않은 고립과 생존의 문제를 마주한다. 그러다 고열에 시달린다. 그의 생존 활동을 지켜보던 두 남녀가 그를 돕는다.


이 두 남녀는 제인과 프록터다.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가 이렇게 두 남녀로 변주되었다. 프록터는 사고로 지능이 떨어지는 중늙은이다. 젊은 여성 제인은 서서히 그 정체가 드러난다. 이 둘은 자발적으로 이 교통섬에 머문다. 제인은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온다. 메이틀랜드에게 제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교통섬을 나가고, 차에 치인 부위들도 치료받아야 한다. 프록터는 트라우마 때문에 이 섬에서 나갈 마음이 없다. 외부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오게 되면 프록터는 갈 곳이 없어진다. 이 두려움은 메이틀랜드가 이 섬을 나가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음식을 구하는지 보여준다. 생존의 기반 중 하나가 음식물 불법 투기라니. 가파른 경사로를 올라갈만큼 체력이 되지 않는 메이틀랜드와 결코 밖으로 나갈 마음이 없는 제인과 프록터의 짧은 동거가 이어진다. 읽으면서 그 상황을 떠올리고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접근했지만 생각보다 가독성이 좋았다. 로빈스 크루소 변주도 내가 생각한 것과 달라 신선했다. 밸러드식 내우주 SF는 다 읽은 지금도 여전히 난해하다. 이 소설 속 상황과 장면을 현대인의 삶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한데 왠지 그 이야기가 매력적이지는 않다. 잘못 이해하는 것일까? 다만 상황과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되면서 생각의 꼬리를 문다. 개인적으로 마지막에 제인이 교통섬을 나가 너머 쉽게 차를 얻어 타는 장면을 보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프라이데이는 과연 누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도식적으로만 해석하기엔 상황 등이 고전과 너무 다르다. 다른 작품에 대해 ‘도전’을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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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와 폐허의 땅
조너선 메이버리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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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를 소재로 한 청소년 소설이란 소개에 조금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두툼한 분량과 좀비에 대한 색다른 해석 때문에 가벼움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 소설 속 좀비는 기존에 영화 등에서 본 좀비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단순히 좀비만 다르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좀비를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여기에 열네 살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작은 로맨스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선과 성장을 같이 다루면서 단순한 오락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뛰어난 가독성과 멋진 설정과 구성은 어느 순간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첫 번째 밤 이후 좀비가 주변 사람들을 감염시켰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터무니없는 행동을 한다. 세상은 좀비로 가득하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좀비 가득한 도시를 떠나 자신들만의 안전지대를 건설했다. 이 마을 외곽은 좀비들로 가득하다. 외부의 위험이 있지만 사람들은 방벽을 쌓아둔 채 삶을 이어간다. 베니는 열다섯이 되면 직업을 가져야 한다. 만약 직업이 없다면 배급이 반으로 줄어든다. 그의 형 톰은 좀비 사냥꾼이다. 베니는 형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고, 겁쟁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능력을 무시한다. 그가 기억하는 첫 번째 밤 집에서 탈출할 때 기억 때문이다. 여러 가지 직업을 체험하지만 그에게 맞는 일이 없다. 결국 형의 조수가 되기로 한다.


톰은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좀비 사냥꾼이라고 말한다. 어린 베니가 볼 때 가장 멋진 좀비 사냥꾼은 찰리 등이다. 그가 좀비 지대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말할 때 베니는 그를 우르러본다. 형의 조수가 되어 함께 마을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형이 하는 일을 보게 된다. 아기 때 기억 때문에 좀비를 없애야만 할 대상으로 인식하던 베니가 좀비가 누군가의 가족이란 사실을 조금씩 깨닫는다. 이 과정에 이 소설 속 좀비가 어떤 모습인지 드러난다. 좀비들은 느릿하게 움직이고, 물리지만 않는다면 좀비가 되지 않는다. 공포에 휩싸이지만 않는다면 좀비 한둘은 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일은 주변에 좀비들이 있음에도 홀로 혹은 몇 사람이 모여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죽으면 좀비처럼 되살아난다. 그래서 영면을 위해 죽은 자를 슬리버를 사용해 다시 죽인다.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톰이 하는 일은 좀비를 죽이는 일이지만 무차별 살해는 아니다. 좀비를 피해 도망친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 그 좀비 가족의 영면을 바란다. 좀비 초상화를 들고 그들이 예전에 살았던 곳에 가서 가족의 편지를 읽어주고 죽인다. 영결식이다. 좀비 사냥꾼 톰이 다른 좀비 사냥꾼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이런 것을 본다고 해서 금방 지금까지 쌓였던 감정들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작가는 이런 감정을 사실적으로 다룬다.


작은 마을에서 친구들이 아는 아이와 연인이 되지 않겠다는 약속은 자신을 옭아맨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닉스가 그에게 다가오지만 이 약속 때문에 한 번 거절한다. 그리고 좀비 카드 속 한 여자 아이가 그의 시선을 끈다. 좀비 사냥꾼 찰리는 이 카드를 베니에게 빼앗으려고 한다. 형이 나타나 험악한 상황은 벗어난다. 하지만 이 일은 후반부에 벌어질 추격과 함정과 반격의 시발점이다. 비가 오고 천둥이 크게 치던 밤 방벽이 무너진 순간 은밀하지만 악의적인 움직임이 이어진다. 자신의 악행을 영원히 숨기길 바라는 찰리 일행이 벌인 살인과 납치 사건이다. 이후 벌어지는 빠르고 강렬한 액션은 숨쉴 틈도 없이 몰아친다. 그 속에 작은 로맨스도 하나 살짝 집어넣었다.


이 소설 속 좀비를 보면 한국형 좀비들에 비해 너무 느리고 무력해 보였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존재는 이 좀비가 아니라 인간이란 사실을 작가는 아주 잘 보여준다. 느린 좀비를 묶은 채 놀리고 공격하고 살해한다. 수천 좀비를 포박해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움직일 수 있게 한다. 대표적인 악행으로 아이들과 좀비가 싸우게 하고, 이 처참한 광경에 흥분한 사람들에게서 돈을 번다. 게임랜드다. 좀비 카드 속 사라진 소녀도 그곳에 있었던 아이다. 자신들의 악행이 마을에 알려지지 않길 바란다. 증인이 될 수 있는 사라진 소녀의 행방은 그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폭풍 치던 밤에 일어난 사건은 여기서 비롯했다. 그리고 현재의 삶을 유지하려는 마을 사람과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베니 등이 대비된다. 에필로그는 또 다른 영결식이자 성장이다. 색다르고 멋진 좀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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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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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우리가 기존에 누리고 있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여성 비밀요원들은 공식적으로 다루어진 적이 없는 인물들이다. 물론 비밀요원 자체가 공식적으로 다루어진 적이 없지만 이 시대 여성들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영국 특수작전국 소속 엘레노어 트리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쉽게 드러난다. 엘레노어가 여성 비밀요원을 선발하고 관리하게 된 데는 남성 비밀요원들이 프랑스에서 자주 연락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첩으로 취급받을 확률이 낯은 여성 요원에 대한 아이디어를 그녀가 내놓았다. 이 아이디어가 채택되면서 실무 담당자가 되었다. 그 당시는 파격적인 인사다. 그녀가 선발하고 훈련하고 프랑스로 보낸 여성들의 사진을 발견한 인물은 그레이스다.


1946년 뉴욕 출근길에 자동차 사고가 일어난다. 그레이스는 꽉 막힌 도로를 피해 그랜드센트럴역으로 간다. 그곳에서 갈색 여행 가방을 발견한다. 호기심에 가방을 열고 십여 장의 여성 사진을 보고 그것을 챙겨 출근한다. 그녀는 미망인이다. 남편은 대학 졸업 후 군복무를 위해 가던 중 과속으로 죽는다. 다른 전쟁 미망인과 다르다.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던 중 한 법률사무소에 취직한다. 그녀가 볼 때 그녀가 없어도 별문제 없는 것 같은 사무소다. 전후 유럽에서 건너온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머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읽다 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일하는 자선사업처럼 다가온다.


마리는 엘레노어가 선발한 비밀요원이다. 그녀의 유창한 프랑스어가 선발의 주요한 요인 중 하나다. 그녀는 딸이 한 명 있다. 남편은 나쁜 놈이라 헤어졌다. 딸을 친척집에 맡겨 두고 런던에서 돈을 번다. 이런 그녀에게 더 많은 급여를 준다는 엘러노어의 제인은 매력적이다. 스코틀랜드 훈련소에 간다. 이곳에서 그녀는 다른 여성 비밀요원들을 만난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조시다. 훈련은 힘들다. 포기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녀들을 감독하는 여성은 꿈도 프랑스어로 꾸라고 말한다. 그녀들은 단순히 비밀전문을 보내는 훈련 외에 간단한 호신술과 총기 등을 다루는 법도 배운다. 이 교육 과정은 엘러노어가 강하게 주장한 부분이다.


이 세 여성이 이리저리 교차하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레이스가 현재라면 엘러노어와 마리가 과거다. 힘든 훈련을 받는 마리, 이런 훈련을 받는 여성들을 조용히 지켜보는 엘러노어, 이 여성 비밀요원들의 사진을 발견한 그레이스 등이 주연이다. 현장에서 직접 위험을 겪으면서 활약하는 인물들이 마리 등이라면 그 후방에서 그들을 돕는 인물이 엘러노어다. 열두 장의 사진 속 여자들은 소재 파악이 되지 않아 실종 상태다. 그레이스는 이 사진들에 담긴 미스터리를 풀려고 노력한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은 마크다. 우연히 만난 후 원나잇을 하고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서로 다른 위치와 시간대 속 여성들의 삶을 통해 전쟁이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숨기고, 왜곡하고, 억압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숨겨진 진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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