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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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말 화려한 수상 이력을 가진 SF소설이다. 2020 휴고상, 로커스상, 네뷸러상 등을 모두 수상했다. 이 수상 이력을 보고 SF팬이 그냥 지나가기는 힘들다. 집필과정도 재밌다. 두 작가가 각각 소설 속 주인공 ‘레드’와 ‘블루’를 맡아 서신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이 부분은 사실 문장의 차이 등을 거의 느끼지 못했는데 번역을 한 사람이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미묘한 차이를 내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첫 장의 문장을 읽고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이 소설은 흥미로운 설정을 몇 개 풀어놓았다. 시간 여행, 다중 우주, 시간을 넘나드는 편지, 두 적대적 집단 등이 서로 엮여 있다. 레드와 블루라고 부르는 두 존재도 서로 적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블루가 레드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관계를 맺는다. 이들은 시간의 가닥을 타고 옮겨 다니면서 자신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한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서로가 보낸 편지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달된다. 이 소설 속 편지는 종이만이 아니라 빛과 나무와 열매의 씨앗, 찻잔 속 찻잎 등 다양하다. 이들이 편지를 교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장 처형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기에는 이 둘은 실력이 너무 뛰어난 스파이들이다.


소설 속 두 진영의 정체를 잘 모르겠다. 가든과 에이전시로 대변되는 두 진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소개글에 따르면 가든은 생태학적인 조직이고, 에이전시는 기계적인 조직이다. 가든 이야기를 듣다 보면 판타지 속 세계수가 떠오르고, 에이전시는 인공 배앙된 인조인간이 연상된다. 잘못 이해한 것일까? 솔직히 이 구분은 소설을 읽다 보면 무의미하게 다가온다. 그들이 각각 지닌 특성이 이야기 속에서 조금씩 흘러나오지만 이 특성보다 더 중요한 내용들이 편지 속에 풀려나오기 때문이다. 수많은 고전에서 인용한 문장들과 점점 자라라는 감정이 더 눈에 들어온다.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이 강력한 두 스파이는 서로를 인정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된다. 왜 SF 로맨스라고 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책 표지에 실타래가 나온다. 소설 속에서 두 진영은 시간의 가닥을 옮겨 다닌다. 시간의 가닥을 오르고 내리는 묘사가 나오는데 솔직히 이 장면을 이미지 하는데 힘들었다. 쉽게 생각하면 거미줄을 타고 오르내리는 장면인데 시간의 가닥이 그렇게 간단하진 않을 것이다. 혹시 생각한대로일까? 두 스파이가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교환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수없이 많은 시간의 가닥과 엄청난 공간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소설이지 않은가. 시간의 가닥과 장소는 이들의 절실한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배경일 뿐이다. 과거의 공간이나 미래의 공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스파이로 임무에 충실했던 둘이 편지 교류하면서 더 알게 되는 것은 적이나 자기 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서로가 편지로 감정을 교류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인식하지 못한 자신을 더 알게 된다. 그리고 상대를 더 알고 싶어 한다. 이 과정에 자기 편의 정보가 흘러나오는 경우도 있다. 감정은 이성을 이해할 수 없는 방향을 이끈다. 소설의 작은 재미 중 하나는 이 두 스파이가 활약하는 공간과 시간이다. 칭기즈칸의 기마군단이 나오고, 카이사르 암살 현장에서 움직이고, 19세기 런던의 조용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신화 속 공간인 아틀란티스 대륙은 또 어떤가. 이 역사 속 장면에서도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시간의 가닥에 매달려 다른 상황을 연출한다. 멋지다.


묵직하고 간결하게 표현된 장면들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집중을 요구한다.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은 낯선 세계와 연출로 머릿속 조립이 더디었다. 시간의 패권을 다툰다고 하지만 그 방대한 시간과 공간을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이 부분에서 소설 마지막 장면은 강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다. 이 두 작가가 만들어낸 두 존재, 레드와 블루의 편지는 원작은 어떻는지 모르지만 한국판에서는 두 색깔로 표기되었다. 개인적으로 푸른 색 글씨가 더 읽기 힘들었다. 그리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편지를 보고 이전에 읽었던 소설 몇 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소설은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편지가 교류한다. 언제 시간이 난다면 다시 읽으면서 내가 놓친 이야기들을 한 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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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
태린 피셔 지음, 서나연 옮김 / 미래와사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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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스릴러란 점과 남편에게 다른 아내들이 있다는 소개글이 나를 유혹했다. 아내 모르게 다른 아내를 둔 이야기라면 여기저기에서 본 적이 있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 조금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주인공의 이름은 써스데이다. 그녀의 남편, 정확하게 표현하면 혼인신고는 하지 않은 세스와 매주 목요일을 함께 한다. 그녀는 만날 때부터 세스에게 다른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스는 유타주 출신이고 자신의 부모님도 일부다처제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 당연히 자신의 아내도 써스데이를 만나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중동에서 법적으로 부인으로 셋까지 두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들은 한 집에서 산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에 대해 모르고, 다른 아내들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시선을 끌기 충분한 도입부다.


일주일에 하루 오는 남편을 위해 정성스럽게 저녁을 차리고 멋진 밤을 보낸다. 그러다 남편의 주머니에서 한 청구서를 발견한다. 해나란 여성의 것이다. 자신이 동의한 관계이지만 다른 아내들에 대한 관심과 질투가 조금씩 자란다. 이 청구서를 발견하기 전까지 다른 아내들의 이름을 몰랐다. 이제 이 이름을 단서로 세스의 다른 아내를 인터넷에서 검색한다. 젊고 예쁜 여성이 시애틀에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세스가 약속한 여행을 다른 아내의 임신 때문에 취소하면서 질투의 감정은 더 커진다. 그리고 화해의 마음으로 함께 시애틀에서 하룻밤을 보내자고 할 때 그 집을 찾아간다. 멋진 집과 아름답고 친절한 해나, 그런데 팔에 멍자국이 보인다. 해나는 아직 그녀의 정체를 모른다. 그들은 연락처를 주고받는다.


작가는 써스데이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시선이 한 곳에 있다 보니 사실보다는 그녀가 보고 느끼는 감정에 더 휘둘린다. 세스의 말을 통해 첫번째 아내를 온라인에서 발견하고, 가공의 남성을 내세워 데이트 앱으로 접근한다. 세스의 법적 아내가 바람을 피우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란 속내가 담겨 있다. 그리고 해나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에게 상처가 더 있는 것을 발견한다. 세스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일까? 아직 한 번도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는데. 해나와 저녁을 함께 하는 중 갑자기 그녀가 사라진다. 집을 찾아가도 해나가 없다. 무서운 마음에 든다. 세스를 만났을 때 충돌이 발생한다.


세스와의 충돌 후 그녀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 세스가 자신의 폭행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입원시킨 것 같다. 여기서 한 번 이야기의 분위기가 바뀐다. 작가는 교묘하게 분위기를 바꿔 누가 사실을 말하는 지 의문 속으로 던져 놓는다. 그녀의 망상일까? 아니면 세스의 치밀한 작업의 결과일까? 병원을 퇴원한 후 그녀는 진실을 찾아 다닌다. 이 과정은 상당히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솔직하게 말해 이 소설의 알부분은 상당히 지루한 편이다. 그녀가 풀어내는 감정들이나 상황이 나의 공감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했다. 더딘 책읽기가 될 수밖에 없었고, 긴 집중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다 마주한 마지막 전개와 구성은 뒤틀리고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었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조차도 의심의 눈길로 바라봐야 했다. 취향을 많이 타는 심리 스릴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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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 기억을 지우는 자
김다인 지음 / 스윙테일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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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페이지 등에서 주최한 추미스 소설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이란 점과 심리 스릴러란 소개가 시선을 끌었다. 개인적으로 카카오페이지 추미스 소설 공모전 소설들을 재밌게 읽었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사하는 나비라는 설정을 호접몽에서 빌려와 엮은 부분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런데 소설이 중반 정도 지나면서 기대한 심리 스릴러보다 판타지 액션 성격이 더 강한 것을 보고 조금 의아했다. ‘뭐지?’ 심리 스릴러라고 했는데 나비가 되어 트라우마 속으로 들어가 부딪히는 상황과 장면은 판타지와 액션의 결합이다. 고전적인 무기인 칼과 도끼 등에 총까지 가지고 지옥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들어가 악마들을 무찌르는 그녀를 보고 내가 생각한 심리 스릴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었다.


시작부터 이 소설은 강렬한 액션을 보여준다. 총으로 악당들을 신나게 무찌른다. 이 장면을 블랙박스에 담았다. 그런데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다.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고치기 위해 내면세계 속에 들어간 호접자, 이른바 나비가 연출한 장면들이다. 이 소설의 재밌는 설정 중 하나는 이 나비들이 블랙박스를 통해 촬영이 가능하고, 이 영상이 법적 증거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나비는 소수만 가진 재능이고, 트라우마를 잘못 다루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직업이다. 당연히 고소득이 보장된다. 주인공 고유진은 나비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여동생과 살았는데 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나비가 되어 대상의 내면세계에 들어가 트라우마를 고치고, 증거자료를 촬영한다. 대부분 일은 경찰을 통해서 들어오는데 그 능력을 사적으로 이용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목사 박재영은 지옥에서 살아온 아이 최서연의 내면세계를 통해 지옥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한다. 만약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면 점점 기울고 있는 교세를 더욱 확장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형사를 통해 사적으로 들어온 일이고, 엄청난 소득이 보장된다. 유진에게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염마라고 칭하는 이상한 소녀를 만난 다음 이 일을 맡기로 한다. 유진 이전에 몇 명의 나비들이 서연의 내면세계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유진은 스스로 지옥에서 왔다는 서연의 마음을 조금씩 연다. 니바가 내면세계로 들어갔을 때 그 대상자의 신뢰를 얻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약한 시간보다 떠 빠르게 최서연의 내면세계로 들어간다.


목사가 바란 지옥의 풍경처럼 서연의 내면세계는 어둡고 악마들로 가득하다. 현란한 액션과 전투 장면이 펼쳐지는데 읽으면서 영화로 잘 만들면 멋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심리 스릴러를 생각한 나에겐 조금 어리둥절한 장면들이다. 내면세계 속에서 고유진이 보여주는 액션은 판타지 속 최고 여전사의 모습 그대로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고, 물러남도 없이 악마들을 무찌른다. 만약 이 부분만 떼어내어 읽는다면 멋진 판타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한 사람의 내면세계란 설정을 감안하면 진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유진이 깬 후에도 강렬하고 잔혹한 액션을 집어넣었다. 무협, 판타지. 액션을 좋아하는 애 취향에는 맞지만 앞의 의문이 반복되었다.


앞에 깔아 둔 어색한 장면들에 대한 답을 후반부에 내놓지만 현실과 연결시키면 생각을 한 발 더 내딛어야 한다. 현실이 아니기에 있을 수 있는 장면들이란 사실은 너무 쉽게 트라우마를 인격화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하나의 의문이 해소된다고 해도 다음 의문이 나오는 구성이다. 기억과 트라우마를 엮어 앞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해석처럼 풀어낸 마지막 장들은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종교인과 정치인의 결탁과 비리를 간결하게 녹여내면서 탐욕에 물든 인간들이 만들어낸 현실의 지옥 풍경 중 일부를 보여준다. 작가가 설정한 내면세계와 나비란 존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많은 변주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이 멋진 세계를 다르게 활용한 작품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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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가족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4
김하율 지음 / 폴앤니나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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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작가다. 최근 낯선 작가들의 단편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 그 대부분은 앤솔로지를 통해서인데 가끔 그들의 단편집을 읽는다. 이 앤솔로지들의 특징은 장르소설이란 점이다. 오래 전에는 쉽게 만나볼 수 없었던 여러 작가의 단편모음집이 이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특정 작가의 단편이 궁금해서 선택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작가의 단편에 눈길이 가는 경우가 자주 있다. 좋은 현상이다. 사실 이 낯선 작가의 단편집에 눈길이 간 것도 sf장르의 앤솔로지에 실었다는 글을 본 다음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취향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모두 일곱 편이 실려 있다. 황당하고, 기발하고, 웃기고, 슬프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놀란다. 설정 자체가 황당해서 뭐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 심어져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표제작인 <어쩌다 가족>과 <판다가 부러워>이다. 이 두 작품은 부동산 가격 폭등과 전세난은 소재로 삼고 있고, 마지막 장면은 예상하지 못한 임신 상황을 만들면서 마무리한다. 결국 이 임신이 그들이 예상하고 기대한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축하받아야 할 임신이 상황에 따라 결코 축복받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지만 보는 순간 이 웃픈 장면이 가슴에 푹 박혔다.


모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둘 있다. 하나는 <마더메이킹>이고, 다른 한 편은 <그녀의 이름을 보았다>이다. <마더메이킹>은 화학반응으로 모성을 만들어내겠다는 회사의 상품명이자 모성애에 대한 현실적 관찰을 다룬다. 실험 단계에서 이 주사는 개발자인 남성에게 주입된다. 그 결과는 예상한대로다. 모성에 대한 환상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돌아본다. <그녀의 이름을 보았다>는 장기이식과 엄마와 딸 사이에 낀 엄마의 이야기다. 뇌사로 판명되면 딸에게 장기 이식이 가능하다. 무능력한 아버지와의 일화가 주로 나온다. 그럼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돈을 벌기 위해 정신없이 일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낯선 이름’이라고 했을 때 ‘왜?’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엄마는 이름보다 엄마란 호칭이 더 익숙하다.


<바통>의 바통은 우리가 릴레이를 할 때 주고받는 그것이 아니다. 은박지에 포장된 김밥이다. 취업난과 생계 문제가 엮이고, 그 사이에 연인의 배반과 실직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다. 자신들이 바라는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하철 역사의 풍경 속에서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가족의 발견>은 한 코피노의 아버지 찾기에서 시작해 죽이기로 끝난다. 살인 모의는 코피노 미셸의 생각이 아니다. 이복누나, 아니 이복언니의 생각이다. 이 아버지란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인간인지 보여주는 장면들을 보면서 나의 윤리의식을 잠시 내려놓았다. 마지막 아버지의 한 마디와 사기 경력자의 의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피도 눈물도 없이>는 예상을 벗어난 장면의 연속이다. 400년 만에 부활한 흡혈귀가 처음 찾아간 곳이 선지국집이라니 기발하다. 하지만 이 선짓국을 즐겨 먹는 흡혈귀의 별명은 선녀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사업 실패 등으로 사채를 쓴 알바다. 서빙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선녀에겐 신선한 피를 일정한 기한 동안 공급한다. 문제는 부쩍 자주 찾아오는 사채업자다. 선녀의 능력이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상황은 나의 예상을 넘었다. 아주 멋진 블랙코미디다. 이 간결한 단편 속에 세상의 쓴맛을 가득 담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유쾌하게 읽었지만 씁쓸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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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지 않는 도시 - 세상 모든 사랑은 실루엣이 없다
신경진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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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전 작가가 낸 책이 세계문학상 수상작 <슬롯>이 유일한 줄 알았다. 7년만의 신작이란 소개가 기억에 혼선을 불러온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 개념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이 책도 사 놓고 오랫동안 묵혀 두고 있다. 늘 그렇듯이 인터넷서점에서 작가로 검색하니 낯익은 표지가 보인다. 이 소설이 이 작가의 처음 읽는 소설이 아니다. 저질 기억력이 책 내용까지 기억하게 할 정도는 아니다. 내가 쓴 글을 보니 작은 기억이 떠오를 뿐이다. ‘희망이 있다면 사랑뿐이다’란 문장을 적어 놓은 것이 보이는데 이 소설에서도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오래 전 <결혼은 미친 짓이다>란 소설과 이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있었다. 원작은 이만교, 영화감독은 유하였다.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난다. 사랑과 결혼의 분리, 사랑의 유효기간 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때만 해도 결혼은 해야 하는 것으로 당연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더 각박해지고 더 힘들어지면서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 자체에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도 늘어났다. 결혼 연령도 많이 늦어졌다. 나도 여기에 일조한 사람이긴 하지만. 작가는 이런 세대의 변화를 소설 속에 압축하고 녹여내었다.


일곱 명의 남녀가 나온다. 60년대의 영임과 하욱 부부에서 시작해 21세기 한나와 태영 커플까지 3대의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인물은 90년대의 정우와 2010년대 한나다. 실제 이 두 사람이 교차하면서 현재 자신들의 삶을 연애, 결혼, 섹스 등과 엮어 풀어낸다. 6~70년대 고도성장기에 조금만 이재에 밝았다면 부동산으로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시대였다. 물론 지금도 부동산으로 쉽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때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욱은 명문대 출신 쌍둥이 형 상욱의 도움으로 언론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영임과 결혼 첫날 이 사실을 말하고 그녀의 그늘 밑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그늘 밑이라고 해도 ㄱ 시절 약간의 권력을 가진 남자들처럼 행동하고 생각한다. 낯익은 과거의 한 모습이다.


87학번 정우는 소위 운동권이다. 과후배의 초청으로 압구정으로 넘어가 세 명의 여성들을 만난다. 그 중 하 명이 영임과 하욱 부부가 형의 딸을 입양해 키운 태윤이다. 처음 태윤은 영임의 사랑을 덤북 받았다. 이 사랑은 영임이 임신해 아들을 낳으면서 식모처럼 변했다. 공주에서 부엌데기로의 추락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녀의 미모에 혹하거나 관심이 있을 뿐이다. 정우가 그녀에게 빠진다. 그리고 차인다. 이 시기는 압구정 오렌지족의 시대다. 그들의 문화 일부가 나온다. 학생 운동으로 수배자였지만 졸업 후 그는 군대에 간다. 강원도 전방에서 근무하는 그를 면회 온 여성이 있다. 바로 그때 앉아 있던 세 명 중 한 명인 은희다. 복수의 감정을 담고 그를 만나러 왔다. 인연은 이상하게 엮이고 꼬인다.


한나는 미술계 큐레이터였다. 자신보다 어린 남자 준희와 동거한다. 그런데 이 준희란 남자가 상당한 마마보이다. 문어발 연애를 한다. 그녀가 한 말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실천한다. 고객의 성희롱에 가까운 손길에 주저할 때 다른 화가의 도움으로 벗어난다. 그녀가 이 갤러리에 취직하게 된 데는 한 유명 화가의 도움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과신한다. 사표를 던진 후 현실을 마주한다. 삶이 얼마나 힘든 지,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자본으로 너무 쉽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자신에게 손길을 벋친 사람도 있다. 미술품 중개로 상당한 돈을 챙긴 그녀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실험하고, 나아간다. 그리고 임신한다.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다. 낳고 나서야 그 아버지가 떠오른다.


정우와 한나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 이전 세대와 그 세대의 삶이 조각처럼 드러난다. 정우가 과외로 돈을 벌 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대치동 학원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 시대는 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기자가 되지만 적성에 맞지 않다.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 관계가 자신을 옭아맨다. 이 소설에서 정우와 한나가 갈리는 지점은 결혼 유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삶을 함께 할 동반자에게 기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우는 다른 386세대처럼 뻔뻔하게 자신의 욕심만 채우지 못하고 방황한다. 힘든 길을 선택했다. 한나는 선택의 순간 좋은 친구가 있었고, 생각과 행동이 맞는 파트너를 만났다.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결혼의 다른 모습은 한나 커플이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라는 과대 포장된 제도 찬양에 일침을 가한다. 결혼에 대한 의식의 변화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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