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다 - 카르멘 라포렛 탄생 100주년 기념판
카르멘 라포렛 지음, 김수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6년에 나온 <나다>의 개정판이다. 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판으로 새롭게 나왔는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추천 글과 함께 역자의 작품해설이 덧붙여져 있다. 이 책을 처음 선택할 때 바르가스 요사의 추천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인적으로 아는 작가의 추천에 상당히 약하다. 장르문학으로 넘어가면 너무 넘쳐 문제지만 그래도 이런 추천글을 보면 눈길이 간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 이후의 삶을 그려내었다고 해서 더 관심이 갔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유명한 고전들도 있지 않은가. 내전 당시 모습을 보여준 작품들에 비해 그 이후 삶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에 살고 있기에 한국전쟁 이후 삶을 다룬 소설에 익숙하기에 그들의 삶도 그렇게 낯설지는 않지만.


읽으면서 몇몇 대목에서는 6.25 이후 서울 풍경을 다룬 소설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낯선 나라의 도시라면 그 이미지를 그대로 대입할 수 없다.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는 비슷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전후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은 거리의 풍경과 그곳에 머물며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드레아의 시선이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일까? 대학생이란 신분 때문일까? 그녀가 외할머니 집에서 겪게 되는 일들이 그렇게까지 최악으로, 힘든 삶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살 곳이 있고, 어떻게든 음식을 조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횡간을 읽는데 무딘 탓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의 여자가 늦은 밤 외할머니집에 온다. 기차의 연착으로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그녀의 도착을 반겨주는 사람은 할머니가 유일하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외삼촌들이 있지만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바로셀로나에 온 이유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서다. 어쩌면 작은 로망이 있었는지도. 숙소가 해결된다는 것은 생활비의 엄청난 절약이다. 하지만 그녀가 살게 된 그 집은 혼란과 가정 폭력과 광기로 가득하다. 안드레아는 그 대상이 아닌 관찰자로 그 집에 머물면서 그 장면들을 하나씩 보고, 각자의 비밀들을 하나씩 알게 된다. 이 소설의 재미 중 하나는 이런 비밀들이 엮이고 꼬인 관계 속에서 드러날 때다.


처음 도착한 그녀를 가장 억압한 인물을 이모다. 그녀의 연금을 대신 수령하고, 끊임없이 잔소리한다. 그러다 내전 당시 있었던 이야기 하나가 그녀의 과거와 엮이면서 슬며시 비밀을 드러낸다. 슬픈 사랑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는 돈을 모아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애잔하다. 이모가 집을 떠나면서 그 방을 차지 했지만 그녀의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연금을 탄 후 억눌렸던 욕망이 튀어나온다. 무절제한 소비로 이어진다. 돈은 금방 떨어지고 배를 곪는다. 그녀가 이런 생활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대학 동창 에나에게 있다. 그녀의 집에서 받은 대접에 대한 대가로 에나의 엄마에게 장미를 선물하기 때문이다. 허세 중 하나는 이모처럼 한 달에 한 번 집 근처 구걸자에게 돈을 주는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알 수 없고 폭력적인 것은 집안에서 일어난다. 후안 삼촌과 외숙모, 로만 삼촌 사이에 일어나는 폭력과 욕설과 미묘한 감정들이 뒤섞여 나타난다. 어떻게 외숙모가 후안 삼촌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알려주는데 이 과정 속에는 또 하나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이 드러났을 때 이 기묘한 관계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낯선 장면 하나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그것은 후안 삼촌이 외숙모에게 가하는 가정 폭력이다. 아니 이 폭력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후안 삼촌이 자신의 폭력을 후회하고 미안해하는 것을 외숙모가 받아들이면서 그 행위를 반복하게 되는 상황이다. 이런 폭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많이 보지 않았던가.


로만 삼촌은 뛰어난 연주자다. 그의 음악에 매혹되는 장면이 몇 번이나 나온다. 하지만 그 실력을 그는 갈고 닦지 않는다. 그의 음악과 매력에 매혹된 여자들이 있지만 그는 정착하지 못한다. 뒤늦게 감정을 내뱉고 감정을 폭발시킨다. 이렇게 두 형제가 자라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엄마가 그런 행위를 어릴 때부터 용인한 것도 있다. 마지막에 다른 이모들이 와서 한 이야기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 전에 고백한 것도 있다. 관찰자로 그들의 삶을 엿보았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란 감정을 키우려고 했던 그 순간 마주한 현실은 거대한 아픔이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과거 이야기가 하나 흘러나온다.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이야기다. 이것도 로만 삼촌과 관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치하난의 우물
장용민 지음 / 재담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맨스와 스릴러가 어우러진 소설이라고 해서 혹시 로맨스에 더 중심을 둔 소설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다. 이 걱정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특유의 빠른 전개와 개성 강한 캐릭터에 빠지면서 잊었다. <귀신나방>이나 <궁극의 아이>가 음모론에 기대 황당한 듯한 상상력을 극대화했다면 이번 작품은 하나의 전설을 기반으로 짧지만 강렬한 며칠을 풀어놓았다. 읽는 내내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영화로 만들면 누가 이 역할을 하면 좋을까 상상했다. 작가가 영화감독을 꿈꾸고,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그의 소설이 얼마나 영화적 상상력을 구현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는지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읽은 소설들은 모두 영상으로 옮긴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은 10년만에 한국에 온 태경이 누리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면서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누리는 낙원동을 돌면서 빈 병을 모아 고물상에 넘기는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스무 살 노숙자다. 미혼모였던 어머니에게 버려진 것을 한 할머니가 거두어 키웠다. 할머니마저도 5년 전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누리는 밝게 웃으며 리어카를 끌고 빈 병을 모은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무서울 수도 있다. 그의 미성숙을 속이는 고물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노인을 도와주면서 부치하난의 우물이란 전설을 듣는다. 할머니가 바란 것이 반쪽을 찾아 행복하게 사는 것인데 이 전설이 그의 가슴에 와 닿았다.


태경은 불행한 삶을 살았다. 양아버지가 겁탈하고, 엄마는 그 사실을 묵인했다. 지옥을 탈출하기 위해 양아버지 눈을 찔러 달아나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또 다른 지옥이 그녀를 창녀로 만들었다. 이런 그녀에게 하나의 희망이 있다. 지상낙원처럼 보이는 남태평양 휴양지에 가는 것이다. 창녀를 그만 두고 달아나 하는 일이 소매치기다. 자신의 미모와 날랜 손놀림으로 그 희망을 부풀리지만 종로 등을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동네에 발이 묶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이전 포주에게 잡힌다. 그녀가 다시 끌려간 곳은 마약 거래를 축하하는 자리다. 그곳에서 여신의 눈물이란 45캐럿 다이아몬드를 본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다이아몬드를 훔친 후부터다.


부치하난의 우물이란 전설은 사막과 물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간결하게 이 사랑 전설을 풀어놓는다. 사막 어디에서나 물을 찾아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부족과 사람의 인육을 먹고 사람의 뼈로 갑옷과 무기를 만드는 부족이 나와 더 전설처럼 들리게 한다. 이 전설은 비극이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누리는 자신이 부치하난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날린 종이비행기에 실린 목걸이를 한 태경을 올라라고 생각한다. 다섯 살 지능을 가진 누리는 이성보다 감정에 기댄 말을 더 잘 한다.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드러난다. “사랑은 심장을 주는 거야.”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화로 만들면 좋을 소설이다. 속도감, 캐릭터, 전설, 진한 사랑 등이 모두 담겨 있다. 하지만 장용민 특유의 과장된 감정이나 장면은 조금 아쉽다. 밑바닥 인생의 다양한 삶을 파편처럼 보여주지만 그것이 풍경처럼 다가올 뿐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사람의 감정을 이성으로 재단하려는 나쁜 습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거대한 음모론에 빠져 황당한 설정으로 넘어가는 것보다 이 소설이 더 맞다. 아직 읽지 않은 장용민의 소설 몇 권이 집에 있는데 한 권씩 도전해 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이 작가 정말 운명을 좋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번역가로 더 낯익은 이름이다. ‘아밀소설집’란 표지를 보고 김지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작가 김지현을 처음 만난 것은 에세이 <생강빵과 진저브레드>였다. 이 에세이를 상당히 재밌게 읽었지만 소설을 쓴다는 생각은 못했다. 번역가로 인식한 작가들이 소설을 내는 경우를 가끔 본다. 대부분의 경우 생계용으로 알고 있는데 어느 순간 소설보다 번역에 더 치중하는 듯한 작가들을 보게 된다. 아쉬운 부분이지만 이런 번역가의 번역은 상당히 좋은 경우가 많아 믿을 수 있다. 어떤 경우는 번역가의 이름을 보고 책을 선택할 때도 있다.


표제작의 제목을 보고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국도나 고속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은 동물들이다. 내가 본 동물들은 거의 대부분 작은 동물이지만 사슴 같이 큰 동물들도 죽는다고 들었다. 이런 동물들이 도로 밑으로 다니게 하기 위해 통로도 만들어 두었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이 단편 속 ‘로드킬’은 다르다. 인간들이 과학의 힘으로 죽음을 어느 정도 극복한 미래의 이야기다. 유전자 변형을 거치지 않은 여자들을 소수 인종이라고 부르고, 가둔 채 관리한다. 남자들이 그녀들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온다. 처음에는 보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상품 관리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 보호소를 탈출한 소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화장실에서 듣는데 이때 로드킬이란 단어가 나온다. 처음 듣는 단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 소수 인종과 고라니를 대비해서 보여주는데 씁쓸하고 작은 희망을 엿보게 한다.


<라비>는 왜 읽으면서 아프리카 소수민족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선입견이 작용한 것일까? 아니면 이야기 속에서 그런 분위기를 읽은 것일까? 라비는 마지막 주술사다. 주술사 할머니 손에서 원시성을 유지한 채 살기를 강요받는다. 공용어를 배우지도 못하게 하고, 과거의 기록을 외우게 한다. 문자가 없는 곳에서 구술 전승은 특별한 권력이다. 하지만 현대로 넘어오면 바뀐다. 바뀐 세상을 본 라비가 구습을 좋아할 리 없다. 이 부족에 민속학자 등이 오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그리고 구전 전설이 펼쳐진다. 인간의 탐욕과 새로운 나무의 탄생이 엮인다.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는 미세먼지가 심해진 가상의 미래를 다룬다. 시점을 한 사람에게 고정시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 명씩 등장시키면서 이 세계를 설명하게 한다. 현실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고, 시점의 변화가 이야기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화자의 구분이 명확해 쉽게 읽을 수 있는데 <몽타주>에 오면 나의 오독인지 모르겠지만 슬며시 바뀐다. 긴 독백을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것으로 이해했는데 잘못일까? 도입부의 서늘함이 뒤로 가면서 집중력이 흐트러져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 같다. 언제 다시 한달음에 읽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외시경>을 읽으면서 심리 스릴러의 서늘함을 느꼈다. 비어 있는 앞집을 늦은 밤 들어가는 여자의 모습과 주인공의 과거가 엮이면서 기존에 읽었던 스릴러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 존재에 대해 분명하게 알려주지 않지만 마지막 장면이 주는 서늘함은 그것을 덮기에 충분하다. <공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전설이나 동화가 가장 떠올랐다. 바다 괴물의 제물이 될 여자를 구해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것에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간다. 인간의 탐욕, 집착, 오해 등이 펼쳐지고 마지막 장면을 읽다 보면 왠지 모르게 시간의 순환 고리 속에 갇힌 느낌도 든다. 하지만 가장 강렬한 것은 변질된 제의 방식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원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덧붙여진 욕망과 형식을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서현 지음 / 마카롱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8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대상 수상작이다. 대상 수상작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현재까지 읽은 수상작 중 개인적으로 최고다. 약간 촌스러운 듯한 제목이지만 이 한 단어가 우리 사회의 가족과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 사제 폭탄이 하나 ‘펑’하고 터지면서 벌어지는 상황들은 덮어두고, 묵혀두고, 숨겨둔 감정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고, 사람들은 익명이나 관심이란 가면 뒤에서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퍼트린다. 이 소문과 거짓말들도 폭발의 부산물이다. 읽다 보면 너무나도 낯익은 장면들이다. 피해자 가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그들의 시선과 말들은 그 가족을 다시 한번 더 ‘펑’하고 터트린다.


평범한 5인 가족. 그냥 평범하다고 했지만 아빠는 대학교수, 엄마는 약사, 쌍둥이 큰딸은 보조 방송작가, 아들은 스타트업 공동대표이고, 늦둥이 막내는 고등학생으로 강남의 부유한 아파트에 산다. 남들이 보기엔 부러워 보이는 집이지만 그들의 삶속으로 들어가면 보통 사람들의 삶보다 결코 낫다고 말하기 힘든 삶들이 드러난다. 비교 당하는 것이 싫어 아등바등 살아온 쌍둥이 남매, 대학생 때 임신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한 엄마와 그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산 아빠, 친구가 생일날 장난처럼 불러준 노래 ‘왜 태어났니’에 공항장애에 빠진 막내 등의 사연과 감정 등이 폭발한다. 여기에 사람들의 무책임한 발언과 음모론 등이 불을 끼얹는다.


배송된 택배 상사를 집안에 들여놓고 막내 승아는 옥상에 올라간다. 잠긴 자물쇠는 유튜브 영상을 따라해 푼다. 그 사이 방송작가 아라는 공모전에 작품을 힘겹게 제출한다. 33살, 독립을 못하고 부모님께 빌붙어 산다. 자신이 한심하다. 그러다 사제폭탄이 터진다.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문과 집안이 엉망진창이다. 가까운 코엑스에서 인공지능 박람회가 열리면서 테러의 가능성이 주목받는다. 대테러부대와 인근 경찰서가 출동해 가능성을 조사한다. 사건이 생기면 최근에는 어디에나 등장하는 1인 미디어 유튜브도 등장한다. 여과되지 않은 정보들이 흘러 넘치고, 피해자 가족들은 다양한 언론(?)에 의해 재단된다. 폭탄 테러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의심하는 시선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읽으면서 분노한다.


처음에는 방송작가가 의심을 받고, 그 다음은 막내 승아가, 다음은 쌍둥이 현이, 대학교수인 아빠도, 약사인 엄마도 폭탄테러범으로 의심받는다. 경찰의 조사가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향하면서 사람들의 의심도 그들에게 향한다. 작가는 이 다섯 가족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그 사이사이에 폭발사건을 다룬 방송 프로그램 인터뷰와 경찰의 시선을 넣어 이야기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이 인터뷰는 보통 이 가족들의 지인들이 등장하는데 자신의 상황에 따라, 이해에 따라 내용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악의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기에 더 과격하다. 어쩌면 그들도 경찰의 수사 정보 누출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 보면 누가, 누구에게, 왜 사제 폭탄을 보냈는지 의문이 생긴다. 범인이 빨리 잡히면 이 가족들이 온갖 음모론에 희생당하는 일이 사라질 텐데 수사가 더디기만 하다. 테러의 가능성이 지워지면서 일선 경찰서가 수사를 하는데 단 두 명이 전담한다. 이 형사들이 이 가족들을 대하는 장면을 보면 결코 호의적으로 볼 수 없다. 실제 경찰이 이렇게 접근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말과 시선은 이 가족 중 한 명이 저지른 사건처럼 단정하는 모습이 살짝 보인다. 모든 가능성을 지워가는 것이 경찰의 일이라고 하지만 그 피해가 피해자 가족에게 그대로 전가되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 경찰과 언론 등이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서 왜 이가족은 변호사를 선임해 수많은 가짜 뉴스와 음모론을 확대재생산하는 사람들을 고소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뭐 읽다 보면 이 콩가루 같은 집안 분위기에서 그런 대응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처음에는 폭탄 테러란 소개에 조금 가볍게 생각했다. 그 가족들의 비밀이 드러난다고 해도 폭발이 중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숨에 읽으면서 범인 찾기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작가는 부러울 것 없는 듯한 가족의 비밀을 터트리고,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가짜뉴스와 경찰의 수사 정보 누출 등을 유기적으로 엮어 이야기의 밀도를 높였다. 부분적으로 가독성이 좋지만 읽으면서 이 가족이 처한 상황과 읽으면서 느낀 감정들 때문에 잠깐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이야기는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을 돌아보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읽는 킹의 신작이다. 다른 필명으로 이전에 낸 소설을 최근에 읽었지만 근래 나온 책을 읽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오래 전 킹의 소설을 한 권씩 사서 읽었던 적이 있는데 이것도 오래된 일이다. 산 책들이 쌓여만 간다. 그리고 옛날에 읽었던 책들이 재간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약간 안도한다. 사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면 킹의 중편집은 <별도 없는 한밤에> 이후 처음이다. 책소개를 보니 닐 게이먼은 “그의 마지막 중편집이 될”지도 모른다고 한 글이 보인다. <피가 흐르는 곳에>가 마지막 중편집이 아니길 바란다.


이번 중편집도 네 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는 빌 호지스 시리즈 속 홀리 기브니가 주인공이다. 이 시리즈도 구해 놓고 읽지 못하고 있는데 이 중편을 읽으면서 읽어야지 하는 강렬한 압박을 느꼈다. 추리소설가로 첫 발을 내딛은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아껴(?)둔다. 홀리는 파인더스 키퍼스의 소장이다. 빌 호지스가 죽은 후 탐정사무소를 인계 받은 것 같다. 이 부분을 알려면 빌 호지스 시리즈를 읽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방송으로 보려고 하는데 속보가 나온다. 중학교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데 왠지 모르게 뉴스 특보를 전하는 체트 온도스키란 기자가 눈에 밟힌다. 이 체트가 그녀가 경험한 이방인과 관계된 것 같다고 느낀다.


이방인 부분을 읽으면서 빌 호지스 시리즈가 추리소설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녀가 경험한 이방인은 자신의 외모를 바꾸고, 사람들의 공포를 먹고 힘을 키운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체트는 가장 강렬하게 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킹 특유의 세밀한 감정 묘사와 더불어 홀리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뒤섞이고, 자신의 경험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기다렸기에 그녀와 같은 의심을 품은 사람을 만난다. 참혹한 사건 현장마다 있었던 그의 존재를 그녀보다 먼저 깨달은 사람이 있다.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죽일 때 생기는 문제 등은 서로 엮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홀리는 다르지만 말이다. 가장 긴 분량인데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다. 이 중편만 얇은 책 한 권으로 낼 수 있을 정도인데 이렇게 묶여 나왔다니 기쁘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아이폰1과 관련 있다. 스마트폰으로 처음 세상에 나와 우리의 삶을 바꾼 그 물건 말이다. 주식 투자가 해리건 씨가 글을 잘 읽는 크레이그에게 소설을 읽는 알바를 시킨다. 그리고 매년 복권을 선물로 주는데 이 복권 중 하나가 3천 불 당첨된다. 이 돈으로 그렇게 원했던 아이폰을 사고, 하나 더 사서 해리건 씨에게 준다. 착한 아이다. 신문으로 세상의 정보를 받던 해리건 씨는 이제 손 안의 인터넷으로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한다. 이때 흘러나온 몇몇 회사 이름은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다. 해리건 씨가 죽은 후 이 아이폰을 관에 넣는다. 자신이 어렵고 힘들 때 전화해서 해리건 씨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말한 인물이 죽은 채 발견된다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전화 한 통, 신세 한탄 한 번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니.


<척의 일생>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가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3막에서 1막으로. 전 세계가 대규모 지진과 재앙으로 종말을 향해 가는 와중 광고판에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이란 광고가 나온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생활 곳곳에서 나오는데 척은 누굴까? 3막의 마지막에 척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척의 삶이 하나씩 나온다. 회의 갔다가 버스킹에서 신나는 춤을 추는 척,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를 잃은 후 그의 작은 삶과 이후의 삶과 이어지는 추억 등. 마지막 장면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는데 생각할 거리가 많다.


<쥐>는 창작과 생명 거래의 이야기를 다룬다. 단편만 여섯 편 발표한 작가가 어느 날 장편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이 장편을 집필할 장소로 가면서 생긴 일을 재밌게 풀어내었다. 한적한 시골 통나무 집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구성을 받아쓰기와 같은 속도로 집필하는데 심한 독감과 태풍까지 겹치면서 난관에 부딪힌다. 이때 쥐가 나타나 거래를 제안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일 때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작품은 완성된다. 소설 창작을 둘러싼 어려움을 악마의 계약과 엮었는데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힘든 지, 그 어려움을 뛰어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 중편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한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나온다. 그리고 작가 후기에 네 편의 아이디어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라고 느꼈던 것이 거짓이라니 역시 거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