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소년
레이먼드 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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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레이먼드 조는 자기계발서 작가다. 이 분야를 잘 읽지 않는 나도 익숙한 제목의 베스터셀러 작가다. 이런 그가 제4회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을 내놓았다. 이 단순한 이력만 보면 고개를 갸웃할 수 있지만 영상 및 문화 콘테츠 작가 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까지 들으면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소설 속 장면들이 영상 이미지로 다가온 것도 이런 이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빠른 장면 전개와 캐릭터의 힘을 살린 이야기는 끝까지 시선을 놓지 않게 한다. 어떤 장면에서는 예전에 본 영화 <비트>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주인공 바람의 나이도 19살이다.


하드보일드 성장소설을 표방한다고 한다. 낯선 조합이다. 무책임한 엄마 밑에서 자란 바람은 타고 난 싸움꾼이다. 엄마가 쓴 사채 때문에 조직 폭력배 백기를 만난다. 백기는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무서운 남자다. 그는 단순한 조폭을 벗어나 더 위로 올라가길 바란다. 그 전 단계로 조직을 만들고, 다른 조직을 무너트리고, 자신의 관할지역을 확장한다.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백기 밑으로 들어간 그는 탁월한 싸움 실력을 발휘해 어린 나이에 팀장이 된다. 그의 성공은 어린 조폭 유망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는 이 성공이 낯설다. 그가 바라는 것은 성인이 되어 군인이 되는 것이다. 성공이 보장된 조폭의 아주 이상하고 소박한 소원이다.


바람은 스스로 똑똑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배운 지식의 대부분은 텔레비전을 통해서다. 엄마의 사채 이자를 받으러 온 조폭에게 한 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바른 정보가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된다면 사회가 얼마나 좋겠는가. 그는 엄마를 위해 청소하고 밥하고 알바를 한다. 학교 짱이란 이미지는 그가 바란 것이 아니지만 알바를 잘리게 한다. 이렇게 사회를 조금씩 배워가는 그에게 백기가 보여준 세계는 또 다른 세계다. 연예인을 닮았다는 말에 화를 낼 정도의 미모를 가진 텐프로 클럽에서 그는 피아노를 치는 영선에게 끌린다. 처음으로 여자에게 사랑을 느낀다. 이런 그녀가 5번 룸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보스인 백기도 사라졌다. 백기와 대립하던 혁철이 그 조직을 흡수한다. 백기가 영선을 죽였을까? 이 소설에서 재미를 주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VIP 전용 클럽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조용히 묻힌다. 범인이 백기라고 경찰이 생각하지만 증거가 부족하다. 흡수된 조직에서 바람은 팀장에서 똘마니로 전락한다. 그러다 클럽의 마담에게서 그 방에 다른 한 명이 더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를 찾아간다.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가 잠깐 도움을 준 행동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이 잠깐의 도움이 그가 사라진 후 악몽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현실의 또 다른 이면이다. 나중에 영선의 사연이 흘러나올 때 인간의 선과 악이 얼마나 쉽게 바뀌는지 나온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짧게 운만 띄우는 방식이 더 잔혹하다. 그런 곳에서도 선의가 넘치는 곳이 존재한다. 이 희망이, 선의가 삶을 이어가게 한다.


액션으로 가득하다. 싸움꾼 바람의 좌충우돌하는 모습과 액션은 쉴 새 없이 펼쳐진다. 순수한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준다. 이 순수한 마음에 다른 능력이 뒷받침되면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과 액션은 눈을 떼기 힘들다. 하지만 그는 혼자다. 형을 통해 세상의 일부를 배웠다고 하지만 노회한 인간들의 컴컴한 속내까지 짐작하기에는 너무 순진하다. 이 순진함이 그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간다. 작가는 이 위기 중 하나에서 현실에서 실재 일어났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다. 그 폭력범이 재벌이라는 이유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잘난 척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5번 룸에서 일어난 사건을 둘러싼 현실의 진행도 그런 식이다. 더 많은 증거를 수집하는 것도, 용의자를 데려와 질문하는 것도 막혔다.


바람은 조폭이 되면서 ‘사람은 절대 죽이지 않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그의 무기인 죠스를 들고 수많은 조폭들과 용병들과 싸우면서도 살인은 저지르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전과자가 되면 군대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무언가를 지시하기보다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공부는 못하지만 작은 정보는 잘 기억한다. 형의 말은 그에게 좋은 교육 자료다. 공부는 못했지만 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과정에 보여준 모습은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반전처럼 펼쳐지는 몇 가지 사실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뛰어난 가독성과 재미를 주고, 현실의 사건을 적절하게 녹여내면서 공감할 대목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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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 대한 두근거리는 예언
류잉 지음, 이지은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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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대만 로맨스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로맨스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데 가끔 표지나 책소개에 혹해 읽는 경우가 있다. 이 소설도 표지와 서점에서 책장을 넘겨 본 후 끌려 선택했다. 여기에 미스터리 판타지 로맨스란 소개와 타임슬립이란 설정이 눈길을 끌었다. 로맨스는 별로이지만 판타지와 타임슬립은 내가 좋아하는 장르다. 청춘들의 사랑과 성장을 다루고 있다니 더 매력적이다.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읽은 소설은 상당히 가독성이 좋았다. 고등학생들의 밀당과 사랑이 눈길을 끌고, 커쉰이 꾼 예지몽이 과연 현실이 될 것인지 호기심을 자극했다. 소설의 마지막은 나의 예상은 뒤집었다.


대만 학생들의 학교 생활을 보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등반을 만들어 운영하고, 전교 석차를 게시판에 공지한다고 한다. 한때 한국도 이런 학교들이 상당히 많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 석차 공개가 사회 문제가 되면서 많이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커쉰은 우등반에 들어갔는데 공부보다 그림에 더 관심이 많다. 엄마는 딸이 공부에 더 집중하길 바란다. 이혼 후 혼자 열심히 힘들게 딸을 키운 엄마의 바람은 사회의 일반적인 시선을 닮았다. 좋은 대학이 밝은 미래를 완전히 보장하지는 않지만 더 쉬운 삶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현실인 곳에서 성적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부모들의 이런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고, 어떤 계기가 있어야만 바뀐다. 커쉰의 경우는 버스 사고다.


서쿨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커쉰은 브레이크 고장난 차를 타고 있었다. 운전수는 브레이크 고장을 말하고 빨리 내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커쉰은 내리지 못하고 사고를 당한다. 정신을 차렸는데 1년 뒤 보통반에서 기절한 후 깨어난다. 1년 동안의 기억은 사라졌다. 그 1년 사이에 엄마는 재혼을 했고, 커쉰은 바이상환을 사귀고 있다. 상환은 그녀가 지각했을 때 몰래 담치기 하는 것을 적발한 선도부 학생이다. 우등반이 아니면서 전교 석차 3위에 늘 이름을 올린다. 사고 며칠 전 오랫동안 사귀었던 남친 빙쉰과 헤어졌다. 그녀의 남친을 뺏어간 여자는 같은 우등반 신위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빙쉰의 여친은 다른 여자고, 커쉰이 상환을 사귀는 것을 질투한다. 상환도 이것을 보고 화를 낸다. 그리고 차에 치여 죽는다. 현실에서 다시 깨어난다.


불행한 꿈이다. 이 예지몽처럼 미래가 펼쳐질까 두렵다. 우등반에서 강등해 보통반으로 옮겼는데 그 반이 상환의 반이다. 자신을 구해준 아저씨가 엄마의 고등학교 남친이었다는 사실과 꿈속에서 그 아저씨가 새아버지란 사실을 알고 있다. 꿈이 사실처럼 다가온다. 꿈속 상황과 현실이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큰 흐름에서 하나씩 맞아들어간다. 새롭게 연인으로 발전하는 커플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에 한 가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 소설의 매력은 이런 어두운 그림자가 아니다. 현실적인 고등학생의 일상과 풋풋한 사랑 이야기다. 공부만 열심히 하는 우등반이 아닌 보통반으로 배경을 옮기면서 훨씬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 소설은 작가의 학창 시절 경험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읽다 보면 한국 연예인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일본 문화도 뺄 수 없다. 예전에 읽었던 대만 소설에서 쉽게 보기 힘든 장면이다. 괜히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두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보여주는 사랑 이야기는 커쉰의 엄마가 경험하는 어른의 연애와 분명히 결이 다르다. 아직 순수함이 가득하고, 예지몽의 두려움이 남아 있다. 상환이 말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읽으면서 생각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런 풋풋한 사랑은 언제나 즐겁다. 예상하지 못한 반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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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복수 주식회사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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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재밌게 읽는 요나스 요나슨의 신작이다. 제목만 놓고 보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 번 펼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번에도 소설을 읽으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나아가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즐겼다. 어떻게 보면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유쾌하게 즐기기에 이처럼 좋은 소설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한국이 나온다는 광고 문구를 보고 한참 기다렸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달콤한 복수를 의뢰하는 한국인이 나온다. 이 부분을 보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떠올랐다. 한국에서 유난히 더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100세 노인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는 한 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좀 더 복잡하다. 교활하고 위선적인 미술품 거래인 빅토르, 그에게 전 재산을 빼앗긴 전 아내 옌뉘, 갑자기 나타난 빅토르의 아들 케빈, 케냐 사바나의 마사이족 치유사 올레 음바티안, 스웨덴 최고의 광고맨에서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의 대표가 된 후고 등이 중요인물이다. 작가는 앞부분에 이들의 이야기를 한 명씩 늘어놓는다. 이전 작품들처럼 이들의 생각과 행동은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것을 웃돈다. 이 부분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 소설은 황당함에 멈추고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황당한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예상 외의 행동들을 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행동에 빠져든다.


복수. 이 얼마나 살벌하고 달콤한 말인가. 현대 사회는 개인의 복수가 금지되어 있다. 이 금지된 것을 대신해주는 회사가 있다니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하지만 잠시 입장을 바꾸면 그 복수의 대상이 겪게 되는 일들이 과연 그 정도의 피해를 입을 만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의뢰자의 입장에서는 부족할 수도 있다. 책 중반에 후고가 회사를 설립하고 몇 개의 의뢰를 처리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기발한 발상에 놀라면서도 상대방이 겪게 될 고통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잠깐이나마 의뢰자의 입장에 공감하는 나를 발견한다. 내 속에 쌓인 것이 많은 모양이다.


서로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인물들이 하나로 모이게 된 데는 빅토르의 역할이 컸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검은 색 피부의 아들 케빈을 케냐 사바나에 사자 밥이 되도록 놓아두면서 꼬이기 시작한다. 케빈이 나무에서 떨어질 때 지나가던 인물이 아들 없는 치유사 올레다. 올레는 케빈을 아들로 여기고 마사이 전사로 키우려고 한다. 마지막 관문인 할례 의식을 앞두고 있었다. 악어가 가득한 강을 헤엄치고, 창을 들고 사자를 사냥하는 용기를 가졌지만 자신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이 두려운 케빈은 아빠의 물건을 훔쳐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예전에 머물던 집에 살고 있는 옌뉘를 만난다. 둘 다 경제활동은 젬병이다. 돈을 벌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를 발견한다. 이렇게 이어진다.


상황이 더 복잡해지고 꼬이면서 유머를 잔뜩 뿌리는 것은 올레 음바티안이 케빈의 편지를 받고 스웨덴으로 오면서부터다. 현대인의 필수품 중 하나인 신분증이 없는 상황을 황당한 방식으로 해결한다. 여기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분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준다. 신분증이 없다면 그가 그 자신임을 증명할 수 없다. 케빈의 이야기 중 하나도 이것이다. 여권의 유효기간이 만료되고, 빅토르가 사망신고를 한 지 5년이 지나면서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이때 발생한 이야기는 상당히 철학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우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냥 재밌게 웃으면서 자신의 신분증을 잘 챙기면 된다.


사건이 소용돌이 치는 것은 케빈이 올레의 집에서 가져온 그림 때문이다. 케빈은 아빠가 그린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는 이르마 스턴의 작품이다. 나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상당히 익숙한 붓 터치가 눈길을 끄는 작품을 그린 현대 여성 화가다. 실제는 더 유명하겠지만 무지한 나에게 현재 그 정도의 지식 밖에 없다. 달콤한 복수를 위해 처음 그들이 짠 계획은 이르마 스턴의 모조를 이용해 그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었다. 단순히 작품 모조만으로 부족해서 동물과 그 짓을 하는 인물로 만들기로 했다. 이 작업은 성공을 거두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올레가 오면서 이 그림이 진짜 이르마 스턴의 작품이란 것이 드러난 것이다. 상황은 또 한 번 바뀐다. 올레가 스웨덴에서 벌이는 기이한 행동들은 또 어떤가. 유쾌하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네오나치즘 등을 표방한 인종주의와 혐오주의를 만난다. 이르마 스턴은 히틀러에 의해 탄압을 받은 작가 중 한 명이다. 자신의 아들마저 부정하고 죽이려고 한 빅토르는 뼈 속까지 인종차별주의자다. 생각은 그런데 성욕은 색을 가리지 않는 것을 보면 이중적 잣대를 잘 보여준다. 점점 세계적으로 혐오와 인종주의가 심해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결코 무심히 볼 수 없다. 이 경계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 정말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다. 보통 이런 종류의 글이라면 중간에 잠시 헤매는 순간도 있는데 요나스 요나손은 멋지게 캐릭터들을 살리면서 재밌고 유쾌하고 기발하게 이어간다. 벌써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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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카드 1 와일드카드 1
조지 R. R. 마틴 외 지음, 김상훈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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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시리즈 1권 <와일드카드>가 출간된 후 현재까지 29권이 나온 엄청난 시리즈다. <얼음과 불의 노래>로 더욱 유명해진 조지 R.R. 마틴이 프롤로그와 단편과 막간극을 쓰면서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다. 공동편집자로 멀린다 M. 스노드그래스가 보인다. 나에게 익숙한 작가는 로저 젤라즈니 정도다. 다른 작가들의 이력을 보면 상당히 화려한데 익숙한 작품이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SF 장르의 빈약한 시장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대로 아쉬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과연 어디까지 나올지도 궁금하다. 개인적 바람은 끝까지 나오는 것이다.


이번에 번역된 <와일드카드>는 확장판이라고 한다. 세 작가의 작품이 더 들어 있다. 초판본을 읽은 적이 없으니 소개글을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내용이다. 이 시리즈에 참여한 작가가 40명이 넘는다고 한다. 대단한 협업이다. 1권에만 13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각각의 작가가 다른 캐릭터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그 거대한 SF 세계관의 문을 연 것은 조지 R.R. 마틴이다. 하워드 월드롭의 <브로드웨이 상공 30분!>은 이 세계 최고의 영웅인 제트보이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이전에 지구에 이 바이러스를 보낸 타키온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가 나온다.


타키온의 행성이 지구인을 통해 와일드카드 바이러스를 실험하려고 했다. 이것을 막기 위해 타키온이 지구로 왔는데 이 바이러스가 담긴 캡슐을 놓쳤다. 문제는 이 캡슐을 핵무기로 생각한 악당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협박으로 큰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다. 이들의 공격을 제트보이가 완전히 막지 못하고 공중에서 산화한다. 캡슐은 터져 뉴욕에 와일드카드 바이러스가 퍼진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90%는 죽고, 살아남은 10% 중 9%는 괴물 같은 외형을 가진 조커가 되고, 1%만 초능력을 가진 에이스로 변한다. 이 바이러스 노출에 의한 참혹한 광경은 로저 젤라즈니의 <슬리퍼>에서 잘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단편 중 한 편이다.


월터 존 윌리엄스의 <증인>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에이스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매카시즘의 광기가 이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국가를 위해 최고의 활약을 펼친 에이스들을 자신들의 이념과 권력 아래 두기 위해 조작한 여론이 초능력을 가졌다고 하지만 인간의 정신을 가진 그들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천천히 보여준다. 매카시즘 속에 변전한 에이스 골든보이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이겠지만 씁쓸하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이들은 계속 나온다. 네 명의 에이스를 다룬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판타스틱 포>가 떠오른다. 또 다른 초능력자 ‘터틀’을 볼 때 머릿속에서 ‘닌자 거북이’가 스쳐지나갔다.


타키온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 <실추의 의식>은 그가 얼마나 인간적인지, 사랑의 상실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보여준다. 여기에 조커들을 등장시켜 새로운 사회계층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닥터 타기온의 부활이다. 매카시 광풍이 얼마나 많은 에이스들을 두렵게 했는지 알려주는 대목은 이후에도 이어진다. <파워스>에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숨긴 채 살아가던 CIA 정보 분석가가 다른 에이스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알릴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은 냉전 시대와 엮여 있다. 마지막에 그의 요원명으로 ‘스톱워치’로 불릴 때 잘 어울린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평온한 일상이 끝났음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단편이 추가되면서 역사의 흐름을 좇아간다. 60년대 히피 문화가 나오고, 빠르게 70년대로 넘어간다. 한때 악명 높았던 뉴욕 지하철을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지는가 하면, 에이스이지만 자신의 능력을 아주 나쁜 쪽으로 사용하는 악당까지 등장시켜 능력과 행동은 상관관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스티븐 리의 <꼭두각시> 속 악당은 등장할 때부터 극악했는데 성장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이용해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잘 아는 인물로 나온다. 초능력과 에로틱한 묘사를 미스터리와 잘 엮었다. 이렇게 이 시리즈는 다양한 캐릭터를 기존 역사적 사실과 엮어 풀어낸다. 그들이 지닌 거대한 능력을 각자의 성향이나 바람에 따라 각각 다르게 사용한다. 적지 않은 분량이라 단숨에 읽기는 힘들지만 다양한 이야기와 무한한 확장성은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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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시스터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9
김혜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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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9권이다. 무심코 본 숫자인 89가 천천히 그 의미를 음미하자 대단하다는 생각으로 되돌아왔다. 그 목록들을 대충 훑어보니 읽은 책도 몇 권 보이고, 낯익은 제목이나 표지도 몇 권 보인다. 개인적으로 청소년문학을 즐겨 읽지는 않지만 가끔 읽다 보면 인식의 틀을 깨부수는 글들을 만난다. 나이가 들면서 과거의 기억과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해지는 나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의 환기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 소설 속 두 자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내가 잊고 있던 가치 몇 가지를 다시 되살리는 기회가 되었다.


치앙마이와 베를린. 이나와 주나 자매가 엄마와 아빠를 따라 한 달 동안 머문 도시다. 이나는 이모의 출산으로 도와주려고 온 엄마와 치앙마이에 머문다. 주나는 전시회 목적으로 온 아빠와 베를린에 있다. 한때 이 자매는 아주 친했고, 서로 의지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둘 사이는 서먹해지고 함께 있기를 거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에 하나의 설정을 더 넣는다. 이나의 휴대폰이 물에 빠져 먹통이 된 것이다. 휴대폰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는 이나이기에 고치지도, 새로 사지도 않고 산다. 보통의 소녀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서먹한 두 자매는 이메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밖에 없다.


치앙마이, 땡모반, 타패 등은 나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치앙마이를 몇 번 여행한 적이 있다. 어쩌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치앙마이란 지명인지도 모른다. 이모의 남편은 태국 남자이고, 함께 작은 호텔을 운영한다. 이모와 엄마의 나이 차이는 열 살이다. 적지 않은 나이 차이다. 이모가 우주를 낳은 후 엄마와 이모는 자주 싸운다. 이나가 보기에 이렇게 싸우고도 같이 머무는 두 어른이 신기한 것 같다. 이나는 자신의 일상을 작은 그림으로 그리는데 이것을 본 직원 중 한 명이 그녀를 미술교실로 데리고 간다. 똥소녀 채강을 만나고, 잊고 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되살린다.


주나. 아빠를 따라 베를린에 간 소녀는 심심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내다 놀라운 소식을 SNS를 통해 본다. 자신이 짝사랑했던 서준을 절친 라임이 사귄다는 소식이다. 자신이 얼마나 서준을 좋아하는 지 아는 라임이 그 사랑을 뺏아간 것이다. 톡을 차단하고, 다른 친구를 통해 온 톡도 답신하지 않는다. 이 감정을 언니 이나에게 메일을 보낸다. 낯선 이국에서 경험한 일들이 메신저가 아닌 이메일을 통해 한 번 정제된 채 전달된다. 서로 다른 시간대이고, 아직 감정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이 방식의 교류는 서로를 조금 떨어진 상황에서 마주 보게 한다. 이 메일의 길이는 뒤로 가면서 점점 길어진다. 감정의 깊이도 더 깊어진다.


방학이라고 하지만 십대 소녀들을 학원에 돌리지 않고 장기간 해외에 머물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둘이 함께 가지 않고 각각의 부모를 따라 가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이 이유는 나중에 나온다. 어린 소녀들의 낯선 도시 생활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맞이한다. 이나는 그림을, 주나는 한국어와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주나가 어릴 때 한 수술은 주나에게 부모가 좀 더 관대하게 대하게 한다. 이나가 보기엔 차별이지만 아이의 안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 덕분에 주나는 이나보다 끈기가 조금 더 부족하다. 주나는 이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한다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잊고 있었다. 어릴 때 친구들과 논다고 정신이 없었다. 시간은 그 친구들을 한 명씩 떠나가게 만들었다. 그래도 남은 친구들이 많지만 그렇게 절실했던 친구가 어느 순간 잊게 되기도 한다. 십대의 나를 돌아보면 소설 속 소녀들처럼 작은 일에 가슴 아파하고, 분노하고, 눈물을 흘렸다. 나이가 든다고 이것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생활에 파묻혀 살다 보면 정말 좋아하는 것을 잠시 잊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 속에 녹여내고, 어른들의 관점을 조금씩 지워나간다. 어쩌면 이 소녀들의 생각이 작가의 경험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베를린보다 치앙마이에 더 많이 마음이 가는 것은 내가 그곳에서 한 여행들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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