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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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작품으로 두 번째 읽는 책이다. 부커 상 수상작인 ‘암스테르담’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먼저 구입한 책은 ‘속죄’다. 내가 구입한 많은 책들이 쌓이면서 보려고 한 책들이 우선순위 뒤로 밀려난 경우가 많다. 순간의 변덕에 의해서나 아껴두기 위해서 순위를 뒤로 놓아두지만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다른 책을 보기도 한다. 간단한 책 정리 끝에 이 책이 보였고, 적지 않은 페이지가 약간 부담이 되었지만 책을 들고 읽었다. 초반 약간 힘겨움이 있었지만 중반 이후 정신없이 빨려 들어갔다.

 

어린 아이의 악의 없는 행동의 결과로 빚어진 잘못과 비극을 어떻게 평해야 할까?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혼돈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에 대해 그 어린 소녀는 어떤 책임을 가져야 할까? 피해자는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용서해야 할까? 그로 인한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는 않을까? 등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책을 읽는 동안 계속되었다. 여러 사람의 미래가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1부가 책의 반을 차지하면서 각자의 시각을 보여주는 부분은 약간 지루한 면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브리오니, 세실리아, 보니 이 세 명의 사람들에게 1935년에 발생한 사건은 남은 일생을 좌우하는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한 여자아이의 혼동과 오해가 빚어낸 비극적인 일이다.

 

초반에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는 문장과 묘사는 강한 집중력을 요구하였다. 깊이 있는 문장과 묘사는 제목처럼 속죄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만드는 사건까지의 과정을 정밀하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각자의 시각에서 자신의 감정과 사실을 기록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끼워든 상상과 오해는 아집으로 변질되어 사실을 왜곡하게 된다. 그 왜곡된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은 용의자에 대한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과 다름없다. 그 늦고 어두운 밤에 본 부정확한 사실을 어린 아이의 말을 믿으면서 아니 믿고자 하면서 일어난 비극인 것이다.

 

속죄는 이 모든 일의 제공자인 브리오니가 자신을 알고 진실을 바라보면서 늙은 현재에 완성한 소설이기도 하다. 각 장마다 화자를 별도로 두고 말하지만 1부는 세 명의 시각이, 2부는 보니가, 3부는 브리오니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한다. 가장 처절한 현장은 보니가 프랑스에서 독일군에게 쫓겨 영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며칠이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감정과 만나고자하는 강한 의지가 비극적인 밤에 벌어진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뻗어나가는 상념으로 가득하다. 과연 자신이 브리오니를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왜?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면서 진행된다. 그리고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브리오니가 화자인 3부와 에필로그는 비극적인 밤에 대한 사실을 밝혀주고 자신의 바람을 적어내고 있다. 수련간호사가 되어 환자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 장면과 맞이하는 현실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실수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반성한다. 일상에서 전시 상황으로 변하는 그 과정에서 만난 과거의 진실과 피해자의 모습은 아픔으로 다가온다. 에필로그에서 그 사랑하는 연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을 때 과연 그녀는 자신의 속죄하는 마음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였다.

 

정밀하고 세부적인 묘사와 더불어 핵심만으로 글을 적었지만 적지 않은 분량이다. 수많은 이야기가 가지를 치고 뻗어나갈 수 있지만 농축시켜 감정이 넘치는 것을 막고 있다. 비극의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이 원하던 작가가 되었지만 자신의 가슴 속 깊이 남아있는 양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 자신이 피해자가 되었다면 과연 그 소녀를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용서할 수 있을까? 물론 금전적인 손해나 가벼운 부상 등이라면 쉽게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일생을 바꿀 일이라면 그 소녀가 평생 동안 속죄한다고 해서 내가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글쎄. 이 부분은 각자가 판단을 내려야 할 부분이다. 이와 별개로 작가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은 높아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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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기 - 세계가 높이 산
최준식 지음 / 소나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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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은 어렵지 않을까? 하고 이 책을 읽기 전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책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한 순간 날아가 버렸다. 쉽고 빠르게 읽히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자부에 찬 내용과 만나게 된다. 대부분 아는 내용들이지만 새롭게 다가온 것도 있고, 그냥 단순히 알고만 있던 것들을 새롭게 인식한 것들도 많다. 문기(文氣)라는 생소한 단어에 힘들어 했다면 문화의 기운이라는 풀어낸 단어로 쉽게 다가가면 된다.

문화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책과 관련된 것이다. 모두 세 마당으로 구성된 내용을 보아도 역시 책과 관련된 인쇄술, 기록, 문자에 대한 것이다. 모두가 세계 최초, 최고(最古), 최고(最高), 최대(最大) 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우리가 직지심경으로 잘못 알고 있는 직지심체요절,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팔만대장경,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훈민정음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인정받기 위해 박병선 박사가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하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선비 안의와 손홍록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한글이 지금 우리가 쉽게 사용하기 위해 일제 시절 한글학자들이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많은 지면은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분들의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얼마나 많은 문화적 유산을 받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 언급되었지만 그냥 지나간 분들이나 다루어지지 않은 분들의 엄청난 공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이 지닌 묘미 중 하나는 현재 유네스코에서 진행하는 세계문화유산과 기록문화유산을 중심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이 부동산 중심이라면 기록문화유산은 말 그대로 기록을 다루고 있는데 실물이 있어야만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한글이 아닌 훈민정음이 올라가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도 역시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들이다. 한마디로 세계가 인정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계가 인정했다고 하지만 왜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 담긴 책이 이 책이다. 최초니 가장 오래된 것 같은 것만이 아닌 그 본래의 가치를 높이 사 인정된 것에 대한 글을 읽다보면 그냥 역사 시간에 배운 하나의 문장이나 단어들이 얼마나 깊이 없이 지나갔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문화제국주의에서 바라본 환상이나 문화사대주의에서 올려 본 것을 제거하여 그 본래의 가치를 알게 한다. 또 이전에 읽은 소설 ‘대장경’이나 역사서‘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등이 떠오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얼마 전 신문 등에서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문자가 없다는 환상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글자를 몇 개 만든 학자나 재건된 수원성이 세계문화유산에 올라간 것이 ‘의궤’ 때문이었다는 놀라운 사실들은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었다. 

책 저자의 다른 책이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지 모르지만 책 전반에 흐르는 강한 기운으로 유교적 합리주의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도 느껴지고, 현 세태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특히 한글에 대한 부분에 가면 더욱 강해지는데 보면서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후보가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수업하자고 하는 놀라운 현실을 생각하면 이 책의 셋째 마당은 그런 분들이 꼭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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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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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편의 책에 대한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책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관계와 인연 등을 그려내고 있는데 역시 그녀의 다른 작품처럼 매력적이다. 사람과의 관계와 상황을 세밀하면서고 간결하게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능력은 사람을 책 속으로 빨아들인다. 아마 책에 대한 소설이라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해지는지도 모르겠다. 

 

가쿠타 미쓰요를 처음 만난 이후 가끔 그녀의 소설을 읽는다. 아직 읽지 않은 몇 권이 있지만 작가에 대한 나의 기대는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 읽은 소설들이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고 그 내밀한 감정들에 휩쓸려 떠내려간 적도 없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고 삶의 단면을 냉정하면서도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한번 들어가면 쉼 없이 읽게 만드는 힘을 가진 글들이었다.

 

아홉 편이면 적지 않은 편수지만 사실 각각의 이야기가 많은 페이지는 아니다. 모두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첫 번째 이야기인 ‘여행하는 책’이 전체적인 연관성을 드리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책장을 정리하기 위해 판매한 책을 세계 각국에서 만나고, 만날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말에 이어지는 소설들도 다른 느낌과 감정으로 책들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말한다. ‘책은 사람을 부른다’고. 지금도 그렇지만 가끔 헌책방에 가게 되면 처음 생각하지 않았지만 시선이 가고 약간의 주저 끝에 구입하는 책들이 있다. 대부분 그런 책들은 나에게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주었고, 다음에 다른 책에서 만난 작가의 이력 속에서 반가움을 느끼게 한다. 이런 만남과 세월 속에 새롭게 느껴지는 감정과 이해는 책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닌가 한다. 거의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않는 나이지만 가끔 너무나도 유명한 것에 비해 나와 맞지 않는 책들을 다시 읽는 경우가 있는데 아직 그 책들은 나에게 자신의 세계를 열어주지 않아 안타까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다시 읽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아홉 편의 짧은 이야기 속에서 만나는 책들은 언제나 반갑다. 내가 읽은 책도 읽고, 아직 모르는 작가도 보이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고, 나의 생활과 비교하면서 되돌아보기도 한다. 헌책인 경우 책에 적혀있는 몇 자들은 저마다 사연이 담겨있고, 나의 품을 떠난 책의 긴 여행을 약간은 아쉬워한다.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단편적인 기억만으로 열심히 책을 찾아다녔던 기억도 나고, 한참을 찾다 이제 포기라고 외치는 순간 눈앞에 나타나 기쁨에 찬 외침을 품어냈던 적도 있다. 선물로 받고, 준 책들에 하나하나의 기억과 추억이 담겨있고, 좌우로 눈을 돌리면 늘 마주하는 책들에 고마움과 동시에 언제 다 읽지 하는 두려움도 느낀다. 이 감정과 느낌을 모두 담아내기는 무리겠지만 작가는 기억과 추억과 사람들의 관계 속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깔끔하면서도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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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쿠치바 전설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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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는 것과 여인 3대를 다룬다는 점이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붉게 만들어진 표지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덕분에 소녀들의 뷰티플 월드라는 단어는 겨우 지금에야 발견하게 되었다. 모두 읽고 난 지금도 이 소설이 추리소설인가 하는 점에 약간 의문이 생기는 것은 책을 읽은 분이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이런 의문에 상관없이 책은 정말 매력적이다.

여인 3대의 이야기를 자신들이 직접하는 형식이 아니라 가장 마지막인 도코가 과거를 회상하며 할머니와 어머니의 삶을 그려내는 형식이다. 산사람의 자식으로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진 만요부터 소녀시절 한 지역을 주름잡았던 폭주족 아이언엔젤의 리더였던 게마리까지, 그리고 약간은 평범한 도코까지 3대의 이야기다. 이것이 시대의 흐름과 각각의 개성과 어우러지면서 대단한 흡입력을 발휘하며 빠져들게 한다.

 

3대 모두가 다른 개성과 능력을 보여준다. 만요의 능력은 미래를 보는 것이고, 게마리는 소녀만화의 거장이다. 도코의 경우 특별한 능력을 아직 보여주지 못하지만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살아간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 그들이 부딪힌 사건과 삶들이 결코 평탄하지 않고, 힘들고 어렵지만 역시 그들은 그들에게 지워진 짐을 벗어버리지 않는다. 아들이 태어나는 날 아들이 죽는 것을 본 만요나 12년간 주간만화잡지에 연재를 한 게마리 모두 그 짐을 버리고 떠나가기엔 너무 책임감과 지워져 있는 짐이 무겁다.

 

소설을 계속해서 읽으면서 이야기에 빠져들고 즐거워하지만 가끔 이 소설이 추리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언제 살인사건이 나오나 궁금하게 된다.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긴 하는데 거창한 것도 아니고 치밀하게 계산된 것도 아니다. 다만 단서가 되는 것은 만요 자신이 죽을 당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한 것이 전부다. 이에 손녀인 도코가 피해자를 찾는다. 탐정 놀이 같은 것이 도코의 시대에 벌어진 유일하고 특별한 일이다. 이 부분을 접하게 되면 일본에서 추리소설의 경계를 어디까지 정하는지 알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적지 않은 분량과 삼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니 한 자리에서 단숨에 읽기는 조금 힘들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기 전에 손을 떼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만큼 각각 개인의 삶이 매력적이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묘한 환상을 불러오는 것이다. 전후 일본의 시대 변화와 생활뿐만 아니라 의식 변화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아카쿠치바 집안이 있는 도시의 변천사까지 담겨있어 생각하지 못한 즐거움을 주는 대목이나 장면이 곳곳에 있다.

 

추리소설로써는 약한 부분이 있지만 너무 매력적인 이야기 구조와 진행은 대단히 만족스럽다. 개인이 아닌 가문에 매인 삶을 살아간 그들이 약간은 불쌍하기도 하다. 그 묘한 붉은 집에서 품어내는 기운에 짓눌린 사람들의 감정을 짧게 그려낸 장면을 보면 시대 속에 이렇게 살아간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추리를 넘어 시대를 같이 그려내었고,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한 그녀들을 들여다보면서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누렸다. 작가의 다른 책에 관심이 가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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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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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을 처음 만나고 그의 이름을 뇌리 속에 각인한 작품이 바로 백탑파 시리즈의 첫 권인 ‘방각본 살인사건’이다. 우연히 어떤 게시판에서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읽고 본 그 소설은 한국 팩션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고 작가를 기억하기에 충분했다. 그 후 읽은 그의 몇 편의 소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역시 백탑파 시리즈다.

 

작가의 소설에 대한 애착을 다룬 것이나 열녀문을 둘러싼 비극을 다룬 소설처럼 이번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이다. 학창시절 박지원하면 언제나 먼저 ‘열하일기’를 연상하고 외웠다. 교과서에서 만난 ‘열하일기’는 다른 글들처럼 시험을 위해 읽어야하는 한 편일 뿐이었다. 주옥같은 글들을 그 당시 시험만을 위해 읽다보니 그 깊이나 느낌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님을 생각하면 약간은 아쉽고 안타깝다. 다행히 지금이라도 새롭게 그 의미를 되새기는 다행이기는 하지만.

 

‘열하일기’를 생각하게 되면 정조의 문체반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연암 박지원에 대한 글들을 보면 이 여행기가 단순한 의미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는데 그 책을 읽지 않은 나에게 그 의미나 느낌이 제대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 글이란 것과 그 책을 다룬 책을 읽다보면 빨리 그 재미를 느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한데 그 분량이나 구입가격을 생각하면 조용해지는 현실에 다른 책들로 그 갈증을 조금씩 해소하고는 한다.

 

시대는 정조 때로 1792년. 정조는 연암의 여행기를 폐관소품으로 치부하고 금서로 정한다. 이미 장안에 베스트셀러이자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그 책에 대한 열광적 마니아가 된 사람들에겐 너무 힘든 어명이다. 이들 열하광들은 숨어서 ‘열하일기’를 읽고 토론하고 주해서를 만들려고 한다. 이때 이들을 둘러싼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단서들과 증인들은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그가 주인공이자 화자인 청전 이명방이다. 방각살인과 열녀살인사건을 해결한 탁월한 금부도사이자 전하의 종친이기도 한 그가 사건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그것도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요즘 같이 정조에 대한 드라마나 책들이 유행한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시대의 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점에 이미 몇 편이나 그를 다룬 작가의 작품을 즐긴 나에게 백탑파 시리즈라는 것과 ‘열하일기’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그 유혹에 빠져 수많은 해석과 부딪히며 청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만나는 ‘열하일기’는 또 다른 매력을 뽐내게 된다. 새롭게 드러난 청전의 연애이야기와 열하광들로 이어지는 살인사건은 정조시대의 시대 분위기와 더불어 긴장감을 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과 용의자를 쫓는 의금부 도사들과 정조의 어명에 의해 고문체로 만든 자송문을 지어라는 압박에 처한 백탑파 서생들. 이 모든 상황들을 잘 버무려낸 소설이 바로 ‘열하광인’이다.

 

하지만 수많은 해석을 달아야 하는 단어와 책들과 사람들은 속도감에 부담을 주었고, 약간은 느슨한 범인 찾기는 다른 부분에서 만들어낸 긴장감을 누그러트렸다. 지금 부각되는 정조의 모습이나 나의 기억 속 정조의 모습과 조금은 다른 정조의 모습에 왜 문체반정이란 단어가 만들어지고 사건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그림을 그려내기가 어렵다. 역사소설이 지닌 재미를 맘껏 살려내었다면 추리소설로는 조금 약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왜 그런 결단을 정조가 내렸는지 작가의 명확한 해설이 없다보니 그가 보여준 글들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혹시나 마지막에 이 시리즈가 끝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는데 작가가 현재진행형이라고 한 말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자신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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