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줌파 라히리는 1967년생, 뱅골 출신의 이민 2세로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2세 이후 쭉 미국에서 산 미국 사람이다. 그녀는 단편집 <축복받은 집>으로 1999년 소설가로 데뷰하고 그 이듬해 2000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미국인의 정체성을 파고드는 장편 위주의 중견 작가에게 주어졌던 퓰리처상이 신인이며 이민자이며 단편작 모음에 퓰리처 상을 수상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축복받은 재능을 가진, 축복받은 작가다.

 

<축복받은 집>이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이 집의 구성원에게 어떤 결핍이 내재된 집. 그것들을 각자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구성원. 그 곳 부부들은 가슴을 적시는 뜨겁고 절절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 하루 일상으로서 어쩐면 서로에게 가구처럼 늘 그자리에 한결같이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생각하게끔 만드는 가정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 실린 대부분 단편들은 함께 인도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 상실과 이민자로서의 이방인의 낯선 시선 이질감과 특히 문화적 상실감이 짙게 배경으로 드리운다.

 

내가 읽은 책이 2001년도 동아일보 판이어서 그런지 저자에 대한 약력이 허술해, 서핑을 해보았으나 신통한 게 없어서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찾아보았다. 소설집에는 9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국내에서는 <축복받은 집>이라는 소설 이름으로 책 이름을 지었지만, 원서에는 <질병의 통역사>(원제  Interpreter of Maladies)를 제목으로 삼았다.

 

질병의 통역사

 

미국 관광객을 태운 인도 현지 가이드가 코나라크 라는 힌두교의 유적지 태양 신전을 보러 가는 길이다.   관광객은 인도계 미국인 가족. 현지 사정과 언어 문화에 어둡고, 서구화된 미국적인 의상과 언어, 행동을 한다. 한때 외교관의 통역을 꿈꾸었던 카파시는 질병 통역사라는, 병원에서 환자의 증상을 통역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하찮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가족을 부양한다. 외국어에 능숙한 덕분에 관광 가이드라는 사이드 잡을 가졌다. 카파시가 태운 관광객 다시씨 가족은 카파시가 보기엔 서로 전형적인 <가구>다. 남자는 가이드북에 물두하고, 여자의 눈빛은 선그라스 속에 감추어 있지만 가이드에게 인간적인 흥미를 보인다. 부부는 말이 없다.

 

이 단편이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건 바로 이거다. 남편에게 가구인 한 여자가,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구도 하찮게 여기는 자신의 직업을 인정한 것이다. 질병 통역사 카파시는 여자가 자신에게 보인 관심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착각의 세계의 빠져 들어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그의 상상은 우습지만 슬프다. 그래서 이야기는 코믹하면서도 짠하다. 그 관광객 부부가 호의를 보이며 함께 사진을 찍고 주소를 메모하는 순간부터 그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아 그의 상상적 로맨스는 멀고 먼 달콤한 미래에 닿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하찮은' 질병 통역 일을 '로맨틱'하게 생각하는 여자를 만났다. 이제 그녀와 사랑하는 일은 시간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는  행복하다. 차에 두 사람만 남고 여자가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겨 그에게 어떤 한 비밀을 얘기해 주기 전까지 그는 그녀와 함께 벌어질 어떤 일을 기대하며 충만해졌다. 그의 영혼은 짜릿하게 창공을 향해 비상했다.

 

카파시가 운전석 앞의 백미러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여다 보는 그들 가족은 그의 시야 앞에 놓인 백미러에 의해 왜곡되어 보인다.  렌즈 없이 벌거벗은 눈으로 그녀와 그 가족을 보았을 때에야 비로서 자신과 그 가족 사이의 멀고 먼 거리를 깨닫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너무나 사소한 존재여서 제대로 모욕할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116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자연스럽게 끼게 되는 렌즈는 사물을 왜곡시켜 대상을 자신에게 편한 대로 해석하게 한다. 가까운 거리는 멀게 먼 거리는 가깝게 보여질 수도 있다. 인도의 생활고에 하루 하루를 고된 노동과 생활고, 무거운 책임감으로 살아가던 카파시에게 그 렌즈는 잠시동안 아주 잠시동안 설레임과 즐거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 착각의 깨달음에 대한 대가는 어떤 종류의 상처이고 어떤 종류의 아픔일까. 카파시와 다시 가족 사이에는 태평양 만큼 멀고 먼 문화적 차이와 경제적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백미러를 통해 공동된 언어와 같은 민족이라는 쉽게 건널 수 있는 마을 앞 시내처럼 얕고 가까와 보였지만 보였지만, 만날 수 없는 넓고 넓은 바다였다. 두 가족이 살고 있는 세계는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세계였다.

 

미나는 썬글라스로 자신의 일부를 폐쇄한다. 그녀가 보낸 카파시에 대한 호의는 그는 너무나 하찮은 존재여서 그녀가 가진 출생의 비밀을 덜어버려도 상관이 없을 듯한 사람에게 보내는 예의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너무나도 힘든 비밀을 카파시에게 쓰레기처럼 던져 버리고 홀가분하게 그곳을 뜨고 싶었을까. 그러면 조금은 가벼워질까. 그럴까. 카파시는 사람들에게 질병의 증상을 통역한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너무나도 무거운 비밀을 그에게 통역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누구에게?

 

섹시

 

<섹시>는 짧고 흔한 스토리임에도 오랜 여운과 생각 거리를 준다. 흔하디 흔한 불륜 관계가 주제다. 여자의 사랑은 인도인으로서의 상실된 정체성을 배경으로 한다. 이제껏 인도의 문화와 생활에 관심도 없던 미란다는 애인을 통해 자기 이름이 반은 인도식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남자의 인도적 정체성이 강할 수록 결핍으로 인해  생기는 문화적 이질감과 소외를 경험한다. 개인의 탄생과 성장 배경의 차이에서 생기는 차이. 그 속에서 생기는 이민족의 정서를 일탈적 사랑 속에 정교하게 녹여내었다. '그녀의 플롯은 너무나 질서 정연한여 정교한 수학적 증명을 연상시키는다' 라는 표지 뒷면의 찬사에 거짓 없이 공감하게 되는 단편이다.

 

 

대체로 바람둥이들의 특징은 자신과 상대방을 속이지 않는다. 다만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파트너만 속는다. 그들은 뻔뻔해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먼저 말함으로써 상대를 유혹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얻는 이점은 가정과 배우자를 상대의 욕망의 경계선 밖에 위치시킴으로써 겉으로는 가정을 보호하는데 성공하지만 사실상 자신을 보호하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임자가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가는 고스란히 그 사람을 사랑한 사람만의 몫이다. 알고도 사랑한 죄, 이 소설에서 남의 사람을 품은 것에 대한 댓가는 우리가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드라마틱하거나 신파적이거나, 충격적인 방법이지 않다. 그 댓가는 조용하지만 더 예리하고 날카롭고 그래서 더 훨씬 더 깊이 찌른다. 자신에 대한 자각. 자신에 대한 발견. 한 남자에게 한 여자로서 무엇이었는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아픈 자각이다.

 

주인공의 이름에서도 이민 2세로서의 문화적 혼돈이 반영된다. 미란다는 영어이름 이지만 인도계 이름 중 미라라는 이름과 섞여 있다. 미란다는 인도계 여성이지만 인도어를 할 줄도 모르고 인도에 대해 아무 상식도 없다. 그러나  강한 인도인의 정체성을 사진 데브를 사랑하면서 그녀는 인도 문화를 경외한다. 음식과 말과 글자와 그들의  신에 대한 의식, 이 모든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 하지만 이미 그녀에겐 모두 낯선 것들이다.

 

어떤 것은 글자라기 보다 숫자 같았고 어떤 것은 옆으로 누인 삼각형 같았다. 그녀는 여러번 시도한 끝에 책에 있는 것과 비슷한 절차로 자신의 이름을 써 낼 수 있었다. 중략. 그것은 그녀에게 한번 번 갈겨 쓴 글씨에 불과했지만 이 세상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미란다는 그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59 <섹시 중에서>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여자는 백화점에서 섹시한 이브닝 드레스를 산다. 그녀는 로맨틱한 저녁을 꿈꾼다. 2주간의 여행에서 돌아온 남자의 아내, 남자에게 일탈은 끝났지만 의무는 남아있다. 주말마다 아내에게 운동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녀를 만나러 오는 남자는 그녀가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것을 볼 시간이 없다. 남자에게 여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이 가장 섹시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는 언니의 형부가 바람이 나서 파경을 맞게 된 사실을 매일 매일 이야기하고 매일 언니에게 전화한다. 동료가 형부와 형부의 내연녀를 욕할 때, 그녀는 자기도 다른 여자의 남자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고백하지 못한다. 깨달음은 순간이다. 그 동료가 언니와 함께 외출하기 위해 베이비시팅을 맡기고, 그 아이, 그러니까 아빠가 바람나서 엄마가 매일 울고 있는 환경에 처한 아이와 함께 한 시간, 그녀는 아이를 통해 한 가족을 깨고 있는 자신을 본다. 우연히 옷장 안의 그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드레스를 본 아이는, 여자 주인공 미란다에게 입어보라고 조른다. 남자를 위해 옷을 샀지만 남자와 로맨틱한 이브닝을 가질 기회가 없어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드레스를 어쩌면 그 남자의 아이였을 수도 있었을 아이 앞에서 입어본다.

 

아이는 말한다. 섹시해요. 아이가 섹시하다는 말의 뜻을 알까? 아버지가 다른 여자에게 가버리기로 한 아이에게 섹시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아빠에게 다그치고 소리지르고 울고 하면서 그녀가 섹시하냐고, 얼마나 섹시하냐고, 따져물었을까. 한 아이의 아빠를, 한 가족의 부양자를, 한 여자의 남자를  빼앗아가 버린 섹시함. 그말의 의미를, 그 부부의, 그 가족의 아귀다툼 속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아이. 그 아이에게서 나온 섹시해요 라는 말을 통해 자신이 이제껐 무엇이었는지를 자각하는 여자. 한 번쯤은 만나서 헤어짐의 의식을 갖기를 계획하지만, 결국 그 헤어짐의 의식을 치를 기회마저도 오지 않는 걸 알아버릴 때의 초라함. 남의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잠시 동안의 일 

 

우리는 밤이 낮처럼 환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오래전 사람들이 밤에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무 제약 없이 할 수 있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실내에서는 밤과 낮이 구분이 없다. 이 때 갑작스레 발생하는 정전은 매우 특별한 이벤트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정전이 발생되면 동네는 축제 분위기다.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와 떠들고 시험을 앞둔 아이들은 잠시의 일탈이 즐겁다. 그러나 가구 같은 두 사람. 이제 어둠 속 그대 나  사이에는 흔들리는 촛불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남자는 어둠속에 내밀었던 서로의 속내가 생활에 변화를 주기를 바랐다. 여자는 흔들리는 촛불 앞에서 의식을 치르듯 작은 진실들을 꺼집어 냈고, 남자의 그것도 보여달라고 했다. 남자는 그 정전 속의 진실게임이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를 바랐고, 여자는 깊은 상처와 함께 관계를 떨쳐내기 위한 정리가 되기를 바랐다.

 

그 부부가 처음부터 서로에게 가구였던  건 아니었다. 만삭이 될 때까지 여자의 배 속에서  싹을 틔어왔던 새 생명의 급작스런 상실은 그 부부를 가구로 만들었다. 며칠동안 예고된 저녁 시간의 깜깜한 정전이 가구 같던 두 사람 서랍을 열었다. 깜깜한 어둠속에 촛불이 오래된 가구의 손잡이를 더듬어 문을 열고 가구 속 더 어두운 상실의 슬픔을 어루만졌다. 진실 게임이 익숙해 질 무렵, 이제 가구가 아닌 사랑이 되어 서로의 몸과 마음을 생명으로 다른 수 있음을 기대하게 되었을 때 정전은 끝이 난다. 일탈도 끝난다. 진실 게임도. 어둠속에 촛불처럼 흔들리던 작은 기대도. 끝이 난다.

 

예고되었던 정전의 밤은 예상보다 일찍 끝나고,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정전 기간동안 그녀에게 품었던 실낱같은 희망이 얼마나 헛되었는지를 알고 깊이 분노한다. 그래서, 그는 비밀을 털어 놓는다. 그녀의 깊고 아픈 상처 뒤에는 마치 반전처럼 그 남자가 그녀를 향한 애정과 배려로 무덤까지 혼자 가져가려 했던 비밀 아닌 비밀이 있었다. 배 속에 있을 때까지는 숨쉬었던 아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미 꺼져 버린 생명이었을 때 그는 그 죽은 아기의 시체를 혼자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직접 묻었다. 그는 이미 상실로 넋이 나간 아내에게 모든 일은 이미 끝나 있었다고 말하고 실재했던 싸늘한 아기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다. 아내를 사랑했기에, 그는 아기의 죽음이 추상적인 것이 아님을 혼자서만 확인하고, 그 죽음의 실존적 슬픔을 혼자만 감당했다. 

 

정전, 전기의 공급이 강제성이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차단 역시 자유롭다. 불을 끄면 다시 세상은 어두워진다. 아내는 조용히 불을 껐다. 아-- 작은 탄성이 나왔다.   내가 읽는 좀파 라히리의 첫번째 단편이다. 두고두고 길게 여운으로 남을 짧은 단편..

 

진짜 수위

 

동 파키스탄이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방글라데시가 된 해가 1971년이다. 난리통에 부리 마는 가족과 집과 보석과 그 모든 것을 잃고 캘커타로 이주해 왔다. 그러니까 배경은 70년대에서 80년대의 캘커타라고 하겠다. 그녀는 낡은 연립 주택의 계단 참에서 기거하며 그 건물의 청소며 잡다한 일을 한다. 그녀가 하는 말은 주민들로서는 믿을 수 없이 허세 새로운 것들뿐이다. 전쟁 전 그녀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는지 호화 스러 웠던 과거. 가난한 그곳 주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호사를 누린 기억을 끊임없이 이야기 했다. 아무도 있지 않았으나 그녀의 존재가 연립주택의 관리면에서 해가 될 께 없었으므로 그녀는 주민들과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단편집은 리뷰 쓰기 힘들어..

 

개인적으로 나는 단편을 그리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짧은 단편 속 정교하게 계산된 메세지를 캐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자라 읽은 후에 큰 감흥을 못받는 경우가 많아서다.  둔한 감각을 깨닫는 아픔은 유쾌하지 않다. 무엇보다 캐랙터나 배경에 익숙해질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게 가장 큰 단점이다. 작품집을 읽을 때는 하나만 읽고 거기에서 주는 여운에 충실한 후 그 여운이 가시면 다음 작품을 일는 것이 좋다. 이 소설집은 나의 단편에 대한 이런 선호도에 있어 예외적으로 좋았다.

 

쉽게 읽히고, 어려운 복선이 깔려 있지도, 곰곰히 그게 무슨 뜻일까 하며 의미를 곱씹어야 하는 은유적 행위도 많지 않다. 단순하고 평이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이렇게 많은 생각들을 이끌어 내게 하는 줌파 라히리는 젊은 나이에 소설가로서의 처녀작으로 퓰리처상과 뉴욕타임즈 상을 수상했다.  일상적인 모습에서 내전과 가난, 이민 등의 문화적 충격을 지닌 시대의 자화상과 미국에 정착한 이민족으로서 겪는 아픔과 상실을 따뜻한 언어로 그렸다.

 

단편  하나 하나 모두 다 기록하고 싶지만, 너무 길어지고, 지쳐서 이쯤 마무리. 저지대를 읽기 전에 그 전에 나온 책들 찾아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제야, 비로소 인생이 다정해지기 시작했다 - 일, 결혼, 아이… 인생의 정답만을 찾아 헤매는 세상 모든 딸들에게
애너 퀸들런 지음, 이은선 옮김 / 오후세시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천천히 맞딱드리게 될 노년.  삶의 어떤 측면에서라도 함께한 시간 계수가 커졌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회상이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 훨씬 많은 컨텐트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너 퀸들런. 그녀가 스스로 돌아본 그녀의 젊음은 육아와 일과 자아 사이에서 여성해방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해방의 자유만큼 책임과 의무가 어깨를 누르며 매일 전쟁같은 일상을 치러 내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그것은 성공을 통과한 시간이었기에 독자의 눈엔 그 힘겨웠던 시간마저도 눈부셨다.

 

육아와 일과 불확실한 미래와 경제적 미래와 자아와의 갈등 사이에서 하루하루 전쟁같은 삶을 살았던 것에서는 그녀와 다르지 않았음이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하지만 눈부신 성공도 충족한 자아실현도 만족스럽고 충실한 양육과 가정생활을 영위했던 시간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을 통과하고 있음에, 저만치 기다리고 있는 노년을 바라보면 어떤 종류의 글로도 위안이 되지 못한다. 어느덧 누구나 향하는 그 곳, 노년과 죽음, 그 시간으로 뻗어 있는 시간의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며 나는 그녀의 자신만만한 수다가 위안이기 보다는 부럽다.

 

애너퀸들런, 그녀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퓰리처 상을 수상한 언론인이자 작가이자 소설가이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부러워하는 것마저 사치로 느꺼질 이 야릇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잔잔한 가슴에 파문을 던지게 된 것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애너 퀸들런의 인간적인 너무나 수더분하고 평범한 동네 아주머니 같은 일상적 수다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성공에 대해 읽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그녀의 평범한 일상 더 평범한 생각들을 읽어내야 하는 데 약간의 당호깜을 느낀다. 그녀가 동네 미용실에서 만난 이웃집 여자처럼 평범해 보이는 첫번째 이유. 그것은 나, 내 가족, 내 딸들, 내 남편이 이야기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매일 매일 친구들과 모여서 하는 그런 얘기, 내가 그랬는데, 내가 이런 사람인데, 내 아들이, 내 남편이, 내 과거의 어느 시간에, ... 그런 이야기를 책을 통해 늘어놓는 애너 퀸들런의 수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과 그녀가 함께한 시간들 속에 그녀의 전쟁같은 삶을 이끌었던 너무나 평범한 그들이 사는 이야기.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환기시키며 수다스럽게 현재 60대인 자신의 노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지나간 시절을  주워담는다. 남편은 단연 첫번째 주제다.

 

애너 퀸들런의 인간관계가 60대가 되었을 때에는 그녀를 진정 아끼고 무조건 응원하는 사람들만 남는다. 그녀의 현재 나이가 되고 보니 든든한 지원군처럼 느껴지지 않는 사람과는 만나고 싶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 지원군들 중  남편이 그녀에겐 으뜸이다. 제일 첫번째 챕터가 남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나한테 몹쓸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간다. 부부동반 모임이나 아이들 친구의 이름은까 먹을지 몰라도 내 최신작을 악평했던 사람은 절대 잊지  않는다. 나는 남자의 그런 면이 좋다. 아니 남자의 그런 면을 사랑한다. 50

그 다음은 친구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사랑해 주는 여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들보와도 같다는 사실을 점점 실감하게 된다는 그녀의 말은 백퍼센트 동감이다. 그런 사람들은 오랜 시간 그러니까 켜켜히 나무테처럼 쌓여 상처와 흔적을 모두 함께 간직한 오랜 친구여야만 가능하다. 나를 나의 모든 단점들까지도 알고 이해해주는 그들이 나의 소소한 행복을 깨닫게 해주는 사실 말이다.

 

 

흔히,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은 고집이 세다. 이건 나의 선입견이겠지만 특히 노년 남성은 더욱 그러하다. 직장과 가정에서 책임과 의무를 잔뜩 짊어진 채, 또 한 편으로는 권위라는 칼자루를 들고 묵묵히 나아가야 했던 한 사람의 삶이 의식이 시간과 함께 석고 처럼 굳어가는 슬픈 현상이다.  사회적인 기대치와 역할에서 자유로운 여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만만해지는 반년 남자들은 권력과 사회적 지위와 청춘의 힘을 잃고 초라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초라함에 대한 반작용일 지도 모르겠다. 애너 퀸들런 역시 나이듦에 대해 비슷한 성찰을 한다.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완고해진다 행동도 수채화가 아니다 점점 동판화와 가까워진다 완벽주의자라는 강박증 환자가 된다. 96

그녀는 어느날 신문에서 강도를 물리친 '노부부' 이야기를 읽고 예순 8의 나이를 노부부라고 칭 한 것에 대해 분개한다. 언론계에 몸 담고 있던 그녀 스스로 오랫동안 '연로'하다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썼을까 싶어 그녀 스스로가 쓴 기사를 찾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젊었을 때 그 단어는 그녀의 기사에 수시로 등장 하였던 것이다.  반면 그녀가 나이 먹어감에 따라 기사에 등장하는 횟수가 점점 줄이기 시작하더니 아예 사라졌다. 그녀는 이러한 현상을 나이를 먹을수록 연로하다는 단어에 경멸의 의미가 담긴 것처럼 느껴지는 데다 그녀가 생각하는 연로의 기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큐 센터의 연구에 따르면 50세 이상 성인들은 대부분 실제 나이보다 최소 10년 이상 젊게 생각한다고 한다. 60 에서 74 사이에서는 3분1 이 10년에서 20년까지 젊게 생각했다. 연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당 하지 않는 연령대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애너 퀸들런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시대에 태어나 발전이 전쟁처럼 느껴지는 시대를 거쳤다. 여자는 능력과는 무관하게 결혼하거나 아이가 생기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세대였다. 그녀도 어렸을때는 육아와 가정 아니면 일 이 둘 중에서 하나만 고를 수 있는 시대, 남자에게서 신분을 부여받는 시대에 살았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아니면 아무데서나 무엇이든 해도 되는 시대, 직장을 박차고 나와 금세 다른 곳에 취직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찾아왔다. 여성 해방 운동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가능하게 했지만 여전히 날선 편견은 어디서나 기다리고 있고, 해방의 댓가로 여성은 예전 여성의 두 세명 몫을 감당해야 했다. 그녀 또래의 노년의 초입에 서 있는 세대는 지금, 여전히 살아 계신 부모와 시부모의 건강을 살피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제 앞가림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등골을 파주면서 지난 세대에 비해 두 세배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제 와 돌이겨 생각해 보면 인생의 기로였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기차에서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거나 등장인물들이 회전문을 사이에 두고 아슬 아슬하게 비켜가는 장면이 영화에 흔하게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조치를 취한다.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필립로스의 대표작이다. 왜 이제야 번역본이 나오게 되었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2009년에 <울분>과 <휴먼스테인>이 번역되어 나온 이후로 2013년과 2014년에서야 <에브리맨>, <포트노이의 불평>이 나오고 <미국의 목가>가 이제 출판되었다. 1998 퓰리처 상 수상 작품이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그 전에 녹화했던 방송이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읽어준 단편 소설 하나가 깊이 마음에 꽂혔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레이먼드 카바의 대성당에 실린 단편이다. 작품집의 원작은 1983년 출판되었고, 2007년 김연수의 번역으로 최초 출판된 후, 이번에 출판된 것은 개정판이다. 원작도 기대되고 김연수의 유려한 번역도 기대된다.

 

 

 

 

 

 

 

  

 우리가 광주의 5월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5월의 빛나는 햇살 아래 스러져간 수많은 청춘들을 영원히 보내지 말아야 하는  이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ndevous 2014-06-0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세 권 중에 두 권 선정됐으면 좋겠습니다 ^^ 개인적으로 소년이 온다와 미국의 목가!

CREBBP 2014-06-03 12:53   좋아요 0 | URL
저도 1순위는 미국의 목가. 빨리 선정작업 끝났음 좋겠어요. 안된 거 하나 먼저 사서 읽게
 
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http://youtu.be/sZBKer6PMtM

 

 

이 동영상을 보고 당신은 무엇이 생각났는가. 세 개의 기하학 도형이 만들어내는 어떤 수학적 혹은 물리학적 공식이 생각났는가? 그럴리가. 혹 그것들을 의인화하여 생명을 불어 넣고 스토리를 짜 맞추며 감정과 영혼을 재단하지는 않았는가? 아마도. 대다수는 후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두 개의 세모 한 개의 동그라미가 시뮬레이션한 장면을 본 사람들의 상상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스토리의 가지수는 아마도 무한할 것이다.

 

아무 패턴도 없는 임의의 문장이나 사건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이것을 짜 맞추어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심리학자  하이더와 지멜은 피험자들에게 세 개의 기하학 도형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사각형과 함께 움직이는 동영상을 보여준 후 방금 본 것은 묘사하게 했다. 피험자 114 명 중 3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이 영혼 없는 도형에게 생명을 불어넣고는 문을 쾅 닫고 구애의 춤을 주고 공격자를 물리치는 등의 비합리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 셜록 홈즈가 상대방의 옷차림이나 손에 낀 반지 같이 아주 평범한 , 즉 수십만가지 추측이 가능한 애매모호한 단서로부터 확신에 찬 추리를 하듯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주변의 모든 사물로 받아들이는 자극을 단서로하여 풍부하고 확신에 찬 이야기를 지어낸다.

 

우리는 이야기의 부재를 견딜 수 없어 한다. 고작 열줄짜리 노랫말에서 주마등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스케치하고  무의미한 몽타주 몇 장에서도,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무작위의 문장 몇 개를 늘어놓아도 거기서 열렬히 이야기 구조를 부여하려 한다. 먼 옛날의 희미힌 기억, 꿈속에서 보았던 몽롱한 이미지, 주어진 단편적인 단서들만을 가지고  프레임을 세우고 나머지는 오로지 상상력에 의존하여 프레임 사이를 빽빽히 메꾸어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거짓밀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저자는 기억과 거짓말, 음모론 등의 동작에 관여하는 뇌의 작용을 진화론적으로 접근하여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성이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탐구한다.

 

이야기의 원천은 상상력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 속에 갇혀 있지만 상상력은 그것을 마음껏 뛰어 넘는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실제로는 좁고 편협하고 답답하지만, 상상력을 불어넣는 주변의 수많은 스토리텔링 환경 속에서 자유로이 넓고 무한한 세계를 넘나든다. 그런데 그 무한한 세계는 또다시 뇌라는 아주 작은 물렁물렁한 덩어리의 각 부분과 화학작용과 전달물질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저자는 인간의 무한 상상력의 세계를 이야기라는 주제에 담아, 생물학, 심리학 신경과학을 동원하여 과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문적인 용어나 학술적 주제를 담지는 않았다. 쉽고 재미있게 다루어진다. 영화나 소설, 드라마, 광고에서 심지어 노래가사까지 모든 스토리들을 사랑하는 독자에게, 책을 통해 그것의 실체에 대해 접근하고 탐구하는 재미는 책읽기의 기쁨을 극대화시켜주었다.  

 

스토리텔링은 스포츠 경기와 광고 리얼리티 프로그램 MMORPG 게임 등 모든우리의 일상에 깊숙히 침투하여 있다. 제품과 브랜드에 대해 감동적인 서사를 만들어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재판 과정에서도 감동적 스토리텔링 연출이 배심원들의 심금을 울려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낸다. 이야기를 만들고 소비하는 인간의 충동은 문학, 영화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잠재한다. 저자 조너슨 갓셀은 스토리텔링 본능을, 소설, 영화, 드라마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소꿉놀이, 밤마다 기이한 스토리를 생성해내는 꿈, 코르사코프증후군과 같은 정신질환, 실제 사실과 상상을 연결해서 현실적 설명을 만들어 내는 음모론자들, 인간의 거짓 기억이 만들어 내는 자기 합리화, 초자연적 존재에 기대는 모든 종교와 신화, 심지어 국가의 탄생 신화 따위를 교묘하게 조작해내는 역사교과서 등 주변의 모든 것들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 모든 스토리텔링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저자말에 의하면 말썽이다. 우리가 오래전 국어 시간에 배운 바에 의하면 소설의 '갈등'처럼 말썽은 모든 스토리텔링의 기본 문법이다. 그래서 갓셀은 스토리텔링의 기본 문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야기 = 인물 + 어려움 + 탈출시도.

 

즉, 이야기는 희극적이든, 비극적이든, 낭만적이든 거의 예외 없이 문제가 있는 사람(혹은 의인화된 동물)이 무언가를 바라고, 그 주인공과 그의 소원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장애물을 극복하고 소원을 이루려고 애쓰며 그 과정에서 대가를 치르는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진부한 스토리텔링 규칙이 벗어났을 때, 그것은 재미없어진다. 그 중에서도 말썽 즉 어려움은 아이들의 흉내놀이, 픽션, 꿈의 환상 등 모든 종류의 스토리텔링 본성을 하나로 묶는 굵은 실이며, 이 모든 활동에 삶의 문제에 대처하는 연습을 해명하는 단서라는 것이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주장하는 내용 중 하나다.

 

픽션을 경험할 때 우리의 뇌는 실제로 맞딱드리는 상황처럼 작동한다. 즉 실제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뇌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대하는 사람의 뇌가 거의 비슷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영화 속 아슬아슬한 장면을 보면,  모두가 똑같이 소리 죽여 긴장하고, 사건이 해결되었을 때에는 똑같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쉰다. 

 

픽션의 진화적 기능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삶의 거대한 딜레마를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라면 픽션을 많이 소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회 활동에 더 능숙해야 한다. 92-93

실제로 연구에 따르면 픽션을 즐겨 읽는 사람이 논픽션을 즐겨 읽는 사람보다 사회성이 뛰어났다. 결국, 픽션은 삶의 거대한 난제를 시뮬레이션 하는 강력하고도 오래된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체를 본 후, 감동에 젖어 비뚤어진 민족관을 형성하게 된 히틀러의 사례를 보면서, 편협된 픽션의 세계가 어떻게 한 인류와 역사에 치명적인 해를 입혔는지의 예를 보인다.

 

사람들은 출판업계가 겪고 있는 종이 책의  불황을 단순하게 픽션, 이야기, 꿈이 사라지는 현상으로 보고 애통해하고 있지만 저자의 생각은 이와 반대이다. 글자를 통한 픽션 역시 인류 역사에 있어 약 몇백년정도라는 아주 극히 일부분 내에서 전성기를 차지하였다가 이제 그 자리를 미디어, 멀티미디어와 게임과 같은 양방향의 스토리텔링 시대에 넘겨주게 되었을 뿐, 스토리텔링이라는 본성은 결코 절대로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고대 중세를 넘어 인쇄술이 발전되기 전까지도 샤먼, 이야기꾼들과 같은 형태로 스토리텔링 미디어는 존재했었고, 단지 최근까지의 대세가 소설적 형태를 띈 픽션에서 영화와 드라마와 게임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 뿐이다. 

 

가상세계의 스토리텔링은 우리, 아니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이다. 아마도 우리의 아들 딸들은 이미 그 자신이 스스로 생성한 캐릭터와 모험들로 가득찬 가상 세계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자아를 만들며 수만, 수십만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써나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MMORPG 플레이어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에서 "절반 가량이 게임 안에서의 교제가 가장 만족스럽다고 답했으며, 20퍼센트는 MMORPG 세계가 진짜 집이고 지구는 "가끔" 들르는 곳에 불과하다고 답했다"는 사실은 묘한 흥분감을 준다. 우리는 지금 인류의 대전환 시점에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현재의 인간은 실제 세계에서 점점 가상의 공간으로 이동중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먹는 것과 싸는 것이 과학적으로 해결된다면 모두들 매트릭스 영화처럼 어떤 기계앞에서 뭔가를 잔뜩 뒤집어쓰고 평생 가상 세계속을 살다가실존적 삶과 죽음의 순간만을 이쪽 생에 의지하게 될 지도 모른다.

 

혹자는 MMORPG가 현대 사회에서 소외감을 키운다며 비난을 일삼는다. 하지만 가상 세계는 소외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소외에 대처한 결과에 가깝다. 가상 세계는 현대 사회가 앗아 간 것을 우리에게 돌려준다. 가상 세계는 중요한 측면에서 현실 세계보다 더 진짜배기로 인간적이다. 가상 세계는 우리에게 공동체를, 자신감과 자존감을 돌려준다. 235

저자는 책 말미에 정말 두려운 것은 이야기가 미래에 인간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완전히 집어삼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인간이 처하게 될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을 버려두고 스스로 생성한 캐릭터로 신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면, 설사 그것이 이야기 속이 되었든 변형된 형태의  MMORPG가 되었든, 저자 스스로도 인정했듯 그것이 소외를 극복하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면 그래서 모두모두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해진다면 그것이 설렬 가짜일지라도 두렵기보다는 흥미로움에 더 가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의 식탁 - 독성물질은 어떻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나
마리 모니크 로뱅 지음, 권지현 옮김 / 판미동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은 아이들이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미래의 어떤 세대를 그린 영화다. 원인 모를 불임이 전세계에게 닥친 것이다.  어떤 이유이에서건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세계는 카오스 그 자체이다. 책을 읽으면서 환경의 오염으로 인한 재앙의 그 실제를 확인하면 사실 그런 종류의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 허구 속의 일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다국적 대기업의 이윤에 기생하는 과학자의 양심이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는 탐욕스런 자본주의는 멈출 줄 모른다. 멈추려 속도를 낮추는 순간 두려움은 곧바로 파멸과 이어진다. 우리가 지금만큼 파괴하며 살기 전의 어느 세대로 돌아가더라도 그 파괴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삶이란 인간에게 얼마나 척박한지  상상할수도 없고 어쩌면 살아남을 수도 없을 지 모른다.  시간여행이라는 허구 속의  모험은 단지 상상속에선 달콤한 로맨스일뿐이다..그 로맨스 속의 불편함에 현대 인간은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어떤 환경적 재앙 앞에 기업과 정부, 단체들이 신처럼 받드는 믿음은, '얻는 이익'이다. 예를 들어 일일섭취허용량이라는 것의 개념은 실제 인간에게 위험한 리스크의 범위를 나타내는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규범적이며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개념이다.  허용범위의 개념 뒤에는 얻는 이익에 비해 리스크를 허용할 만한가가 항상 숨어 있고, 그 화학물질을 사용해서 이익을 얻는 쪽은 소비자가 아닌 기업이다.

 

미국 의학 드라마 닥터 하우스(House MD)는 환자에게 닥친 질병의 원인을 알아 내기 위해 환자의 몸에 차가운 기계 와 주사바늘을 들이대는 대신 수련의들을 환자의 집으로 보내 집안 구석구석을 탐정처럼 조사한다 . 하우스의 의료 팀들은 냉장고 속과 욕실의 약품 선반, 그리고 청소도구함에서부터 쓰레기통과 배수구까지  집안 구석구석을  뒤진다.  또한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의 가족 친구들과의 면밀한 인터뷰를 통해 그가 방문했던 나라, 그의 행동 습관과 환경을 조사해서 병의 원인과 병명을 규명해 낸다. 병은 먹은 것, 공기를 통해 들이 마신 것, 생활을 통해 만진것 , 여행한 곳에서 옮겨온 것 , 그리고 가족력에서 기인한다는 아주 일반적인 상식을 이용해  범인을 잡듯 병의 원인을 잡아내어 치료방법을 적용하는 매우 이상적인 시스템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아무리 꿀같은 의료보험 혜택이 주어진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일 듯하다.

 

18C  산업 보건 의학의 선구자 이탈리아의 베르나르디노 라마치니는 환자를 만났을  때 맥박을 재기 전 환자의 직업은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그의 저서 <노동자의 질병>에 전하고 있다. 오늘날 산업사회가 시작된 이래 질병의 원인이 작업장 환경에서 기인하는 경향이 폭발적으로 강해졌다. 특정한 화학물질의 장기간의 노출이 특정암, 파킨슨병, 신경정신병, 면역체계이상 등을 유발하는 사실을 누가 왜 어떻게 은폐하고 그러한 직업병을 가진 사람들을 기업과 국가와 단체는 어떻게 외면해 왔는가에 대한 적나라하고 방대하고, 신뢰성있는 고발 내용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일일섭취허용량은 선량한 소비자들에게 어떤 절대적이고도 과학적인 기준이라는 권위를 부여받아왔다. 세계보건기구니 미 유럽의 식품위생국이니 하는 선진국과 국제 단체들이 어련히 알아서 인류의 건강에 치명적인 해가 되지 않도록 일일섭취허용량을 정했겠느냐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책을 읽기 전 나와 같은 우민의 전형적인 믿음이었으니 말이다. 일일섭취허용량은 누군가가 창조해낸 블랙박스라는 사실이 책의 한 파트를 통해 샅샅이 해부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두렵고 고통스럽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동물들이 '겉으로 보기에' 아무 효과를 일으키지 않을 때까지 2주에서 2년까지 일정 농도의 독을 섭취시키고, 관찰한 후 그것을 무독성량으로 정하고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하기 위해 10에서 100 혹은 1000까지의 계수를 아무렇게나 적용시켜 나눈다. 그 '아무렇게나' 결정되는 계수는 순수하게 결정권자의 상상력에 의존된다. 그러니까, 일일섭취허용량은 기업들이 맹독성 화학 제품들을 팔기 위해 고안해낸 허구이다.  실제로 아스파탐의 경우 일일섭취량을 훨씬 못미치는 양을 섭취해도 광범위하고 심각한 질환을 보이고, 임산부를 통해 아이의 혈액에 침투해 그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암을 유발하기까지 한다.  슈퍼마켓의 진열대에 가득찬 식품의 포장에는 깨알같은 글씨의 식품 첨가물이 수십가지씩 적혀져 있다. 이제 우리는 먹는 것에 대해 어떤 기준에 의지해야 할까.  

 

죽음에 이르는 위험한 독성 화학 물질이 해충방재를 위해 농약을 치는 농부들과 화학물질을 다루는 작업장에서 시작하여 먹거리 전반과 일상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게 되는 것을 묵과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살게 된 지금 기업이 지배하고 있는 독성화학물질의 연구 자금과, 역시 기업의 인사들에 의해 좌우되는 각종 보건단체들에 또다시 나, 내가족, 내 아이의 생명을 맡기고 있는 현실이다. 목적이 이윤인 기업의 돈으로 움직이는 구조에 고스란히 인류의 생존을 맡겨야 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국제잔류농약전문가그룹과 같은 대표적 국제 전문가 그룹은 기업의 이윤을 위해 엄청난 자금을 받고 일하고, 기업에게 유리한, 근거도 없고 조작된 보고서를 대량 생산 생산, 인용하여, 무에서 유를, 엉터리 주장에서 학술적 진리로 탈바꿈시키고, 영업비밀이라는 방침아래 원데이터소스는 공개하지도 않는다. 기업에게 불리한 주장을 하는 일부 과학자들은 정부 기관을 통해 해고와 위협을 당하고 기업의 대변인들은 승승장구 다시 국제 기관의 핵심 위원으로 회전문 인사에 위촉되는 일이 세계의 건강을 책임지는 쪽 사람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독성 화학 약품과 환경적 재앙을 피해 과거로 돌아간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그 편리함의 댓가로 맞바꾼 것은 아이러닉하게도 죽음이다. 편리함을 생산하기 위해 독성 화학물질이 노출된 작업장에서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 독성 화학물질을 뿌려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 근거도 없이 화학물질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편리하게 조작된 일일허용기준에 적합 판정을 받고  당당하게 식탁에 오른 먹거리와 미실거리들, 세계 유수의 화학 업체들과 화학 독성학 전공 과학자들의 만성적인 유착 관계는 죽음을 앞당기는 독극물의 오염을 가속화시켰다. 획기적이고 선구적인 암 치료법이 꾸준하게 개발되고 있지만, 산업화 이후 급작스레 많아진 암 유병률은 계속 증가했고, 60세 이상의 나이가 되면 모두들 한줌의 약을 끼니때마다 먹어야 하는 게 표준인의 삶인 것처럼 만성적인 질병이 골골백세라는 사회 현상을 설명해주고, 정부가 나서서 인공수정을 지원해줘야 할 정도로 불임률은 급속도로 높아졌다. 농약은 인류 역사상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기 파괴적인 발명품이다. 인간이 다른 생물체를 해 하거나 죽이기 위해 만들어 꾸의 적으로 자연애 방출한 유일한 화학 제품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거다.

 

해충을 제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농약 중 목표물을 공격하는 양은 0.1%도 안된다 99.9% 이상이 환경에 머물며 국민 건강을 해치고 생태계의 토양, 물, 대기를 오염시켜 유익한 비오토프를 파괴한다 . - 데이비드 피멘텔. 미국 코넬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153

 

LD50은 노출되는 동물의 반이 죽는데 필요한 화학 물질의 양을 측정하는 독성 지표로 화학 물질의 질량을 노출된 개체의 몸무게로 나눈 값  mg / kg으로 표시 한다. Ld50이  5mg/kg 이하인 고체 화학물질 20이하인 액체 화학물질 지극히 위험한 물질로 간주 된다 비타민c는 11900. 소금은 3000 청산가리는 0.5 ~ 3, 다이옥신은 0.02다. 독일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주입했던 치명적인 독가스,치클론B의 ld50은 1mg/kg이다. 이 유태인을 죽인 독성 물질이 곡물 종자를 처리하고 저장 곡물을 보호하기 위해 1997년까지 쓰여져왔다. 과학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독성 지표는 탐욕스런 기업 논리에 편리하게 이용된다. 기업들은 소금도 많이 먹으면 반쯤 죽는다는 이러한 논리를 확장하고 왜곡하여 독성 식품에도 섭취량에 못미치는 양을 먹으면 해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친다는 것이다.

 

신뢰성 있는 자료로를 충분히 납득 가능할만큼 지면을 아끼지 않고 조목조목 설명하고 따지고 해부한다. 저자의 지칠줄 모르는 탐구 정신으로, 우리의 식탁, 우리가 숨쉬는 공기, 우리의 토양, 우리의 물을 화학적 근본 성분을 파멸로 이끌고 있는 탐욕스런 기업과 그에 결탁한 과학자들 이란 이름의 또다른 기업인들, 민간연구와 공공연구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어서 기업과 한 번도 일한 적이 없는 전문가를 구하기 조차 불가능한 사회. 이런 것들을 면밀히 해부하고 나면, 배반감과 충격으로 치가 떨린다.

 

1부에서는 농약으로 인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농부들의 사례. 다국적 화학기업과 이들을 옹호하는 연구자 집단의 검은 밀착 관계. 길고 지난한 과정의 법정 투쟁에서 농약 피해자들에게 들이대는 이중 잣대가 적나라하게 파헤쳐진다. 지시한 대로 적적량의 농약을 사용한 농부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수 배에서 수시배까지 특정암, 파킨스병, 면역 이상, 정신병 등에 걸렸다.  2부에서는 산업 현장에서 목숨을 빼앗아간 많은 기업들의 독성 물질과 이들이 어떻게 독성물질이 파괴한 노동자들의 폐해를 은폐하고 조작하고 외면해 왔는지에 대해 다룬다. 3부에서는 아스파탐의 예를 들어 독극물 '일일섭취허용량'에 대한 과학적 사기극과 해결되지 않는 잔류 농약 최대 허용량에 대해 파헤친다. 여기서 예로들은 아스파탐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후 치가 떨렸다. 교묘한 방법으로 아스파탐은 설탕보다 좋은 건강식품이라는 이미지를 심어놓은 기업 광고에 속아, 그동안 아무렇게나 마신 아스파탐은 일일섭취허용량보다 적게 섭취하더라도 매일 몇주간 계속 섭취했을 때 나타나는 변화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아스파탐 섭취 연구에 자원했던 동료 의사에게 되돌아온 것은 실명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였다. 연구는 중단되었지만, 보고서는 완성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제기관은 아스파탐의 유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스파탐은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그 상자가 열리면 시스템 전체가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반세기 넘게 적용되고 있는 규제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비스페늘 A도 마찬가지입니다. 425

 

기업이 돌아가는 전형적인 방식은 일단 화학자가 새로운 물질을 합성해서 시장에 내놓으면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물질이 초래할 수 있는 효과를 알게 된다. 이것이 기업이 돌아가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이 불활성물질이 아니라 천연 호르몬을 모방하는 합성 물질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에스트로겐과 암과의 관계를 연구 도중 우연히 증식하는 암세포가 새로운 플라스크의 사용에서 비롯되었다는 우연한 발견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인류는 한꺼번에 그 부작용이 어떤 형태로 일어날 지 모르는 탐욕스런 기업의 마루타가 되어, 언제 어떻게 파멸을 맞게 될 지, 파멸보다 더한 고통에 몸무림치는 지옥 속에 살게 될 지 모르는 일이다. <칠드런 어브 더 맨>은 엉뚱한 무한 상상력의 결과에서 출발한 공상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미래의 어느날 실제로 닥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경고한 통찰력 있는 영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