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십자가 2
김종록 지음 / 김영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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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하면 시대를 주도하던 사상도 변화가 요구된다.  시대가 사상을 주도하면서 사상은 욕망에 오염되고 권력과 물질에 물든다. 그 때, 불교가 배척받기 시작된 원인은 오염된 불교 사상이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특정 종교가 대형화 대기업화되고, 성전을 상속하며, 더 큰 파이 조각을 갖기 위해 새벽에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물적 욕망을 갈구하는 마음이 모여지는 것이 드러나면서, 더욱 크게 성장하고 있지만 동시에 조소당하고 배척받고 외면받는 까닭이기도 하다.

 

책 제목에서 예상했던 것은 불교 경전 혹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서 붓다의 가르침과 예수의 말씀을 하나로 연결하는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를 거라는 거였다. 소설은  지밀이라는 스님이 당시 타락한 불교와 무신 정권 전란 중에 붓다와 예수가 공통적으로 추구했던 이상향을 만들어가며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경교라는 기독교의 사상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묘사했다. 

 

사상에 동화되는 과정은 그 사상 자체 설득당하는 과정이 아니라 마을의 색다른 삶의 모습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는 마을  지도자 김승은 경교승이다. 전쟁 속 살상과 폭압과 핍박 속에서 흙과 똥과 인육을 먹으며 살고 죽는 고려 땅 한 쪽 귀퉁이에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 없이 경교라는 하나의 사상 아래 모두가 정직하게 일하고 동등한 공동체를 일구고 살아가는 광경을 지밀에게 보여준다.  지밀에게 이 마을은 이상형이었다. 그리고 김승이 추구하는 것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적 사상을 이용한 혁명이었다.

오직 한 분 예수처럼 생경하고, 참신해야 사람들이 안심하고 기대고 영혼을 맡깁니다.

지밀은 이렇게 종교를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목적에 이용하는 마을 지도자 김승을 비난하고 저항하나  도움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한다. '주옥같은 성경'이 대장경 목록에 들어가도록 힘써달라는 부탁과 무신정권을 치고 혁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삼별초라는 점조직으로 몽고군을 기습했고, 무신정권의 반란군 소탕 군인 야별초 기마대에 대항하고, 민중에 기생하는 썩은 불교 세력에 맞서며 선진화된 화약과 조직력으로 무신정권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경교는 타락한 불교의 대안이었고, 민초들의 영혼을 한 곳으로 모을 힘이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최이 무신정권의 집정시기에 몽고군에게 백성과 수도를 내어주고 강화도로 천도한 후  흩어진 백성의 힘을 하나로 모은다는 명분으로 대장경판을 조성하는 과정이다.  이 때 서방의 종교 기독교의 한 종파인 경교를 믿는 흔적을 발견하고 조사를 나선 지밀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5C 경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창시한 기독교의 한 교파인 경교는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와 중국까지 퍼졌다. 동방 기독교로 통하는 경교는 로마교황청에 의해 이단시되었다. 이 책에서는 고려중기 경교의 전파 과정을 몽고 침략을 계기로 잡혀간 한 여인(여옥)이 몽골군 총사령관의 총애를 받아 아이를 출산하게 되고 당시 실질적 황후였던 베키가 아이의 대모가 되어 자연스럽게 예배당과 기독교 문화를 접하고, 후에 여옥이 다시 고려로 돌아가 이를 전파하는 것으로 풀었다.  베키는 징기스칸 연합 서방투르크의 영향으로 지배층이 모두 네스토리우스교인 외몽골 케레이트의 왕족이었다.   지밀이 조사 과정에서 만난 신비한 아이 가온은 여옥의 딸이었고, 가온은 신비한 힘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바람따라 물따라 선교를 위해 고국으로 돌아온 여옥은 여사제가 되었다. 가온만 알고 있다는 복음서는 유년기에 알고 있던 성서와, 석가모니, 노자, 공자의 말씀을 섞은 것이다.

 

전쟁은 교역을 불러왔고, 교육은 서로 다른 문물을 뒤섞었죠. 중략. 동방박사가 예루살렘에 갔듯 예수도 지금 내 나이 무렵, 동방을 순례하며 수행하죠. 그러다 자연스럽게 동방의 종교들을 접했겠죠

역사소설 특유의 남성적인 문체와 생경한 용어들 때문에 책 읽기에 집중이 필요하고, 술술 넘어가지 않지만, 두 권의 긴 역사 소설에는 단 몇 장의 아름다운 로맨스가 있다. 최이의 첩이 되어 암살을 모의하는 심경의 태생과정을 그린 부분이다. 고려 최고의 각수장이 김승의 딸 심경의 태생은 마치 설화같다. 비오는 오느 밤 사모하던 비구니와의 하룻밤이 씨앗이 되어 태어난 심경은 젖동냥으로 키운 아버지를 화재로 잃었다. 부인사 장경판전 경판 수리를 위해 그곳에 있던 아비는 몽골군의 공격으로 알려진 화재에 숨졌으나, 장경판전 화재의 원인은 몽골군이 아니라 최이 무신 세력이었다. 그녀는 원수를 갚기 위해 계획적으로 차기 집권자이자 최이의 아들 최항에게 접근하여, 첩이 된다.

내 일찍이 저녁 달빛에 서린 삶의 비의에 사무처 슬픔을 양식으로 먹고 자랐으니, 그리하여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의 서성거림이 인생임을 진작 알았으니, 슬픔은 내가 세상 살아가는 근원적인 힘이다 p64

탐욕을 제도화한 인간들의 교활함이 만드는 부당한 세상에서 불공평한 제도가 없어지고 부패의 고리가 끊기면 이상향이 실현될까. 절대권력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의 노동력에 빌붙어 놀고 먹는 지배 계층 무리가 없어지면 이상향이 실현될까. 실패한 혁명 뒤에 죽어간 무수한 사람들의 흔적은 역사에 남아 있지만 실패하기도 전에 혁명을 꿈꾼 사람들이 목숨과 맞바꾼 이상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팔만대장경판에 아주 작은 단초들을 남겼다. 상상력을 통해서만 그려질 수 있는 작은 단초는 이렇게 당시의 삶을 재현하고 이야기가 되었다. 꿈꾸지 말아야 할 것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했기에 소설이 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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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십자가 1
김종록 지음 / 김영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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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한 시선으로 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신과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모호하다. 모호함의 껍데기를 벗고 그게 무엇이 되었든 아하 바로 이게 진리야 하고 철썩 굳어지는 믿음을 만드는 강한 설득력을 어쩌면, 이야기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는 역사 속에 있었고,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상과 이념과 믿음의 교차 지점 안에서 종교와 사상의 이해와 융합이라는 무모한 도전을 눈 녹이듯 스르르 녹여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1편. 전쟁 중 방문한 개경에서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고, 장님이 되었다 눈을 뜨는가 하면, 동행하던 스님이 죽는 등 스토리 상에는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사상적으로  적어도 여기까지는 아직 전개에도 도달하지 못한 느낌이다. 고려말, 수도 개경에 무지랭이 백성들을 잔혹한 몽고군에게 버리고 강화로 피신한 최이 무신정권과, 불교 숭상 정책의 수혜자로 정권의 삼각형의 한 꼭지점이었던 불교계는 합심하여 대대적인 국책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1011년부터 시작하여 76년만에 완성된 고려대장경판인 초조대장경판이 1232년에 불타자 그 전란의 와중에 이를 다시 새기기로 하고, 스님 지밀은 이 프로젝트의 한 가운데에서 경교라 불리우는 그리스도교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이를 조사하기 위한 모험에 떠밀린다. 


조사 중 찾아간 마을.. 거기서 지밀 스님은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자들이 예수를 믿으며 소박하지만 낙원을 이루며 사는 모습을 발견한다. 당시 불교는 민초들을 억압하는 하나의 지배계급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서방을 통해 전파된 예수교를 믿게 된 동기와 자세한 내막은 이제 2편에서 시작될 듯하다. 막 재밌어지기 시작했는데, 이제 1편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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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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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 이라는 책에 있던 단편 하나를 오디오 북으로 들었다. 달리는 고속도로에서였다. 


그녀가 뚱뚱하다는 것은 책의 도입부에 아버지가 한 말을 회상하는 데서 암시한다. 


그만 좀 처먹어라.


그녀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그 말을 기억하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대학 입학과 더불어 찾아온 사랑 비슷한 어설픈 감정. 그녀가 좋아하기로 작정한 그녀의 선배가 뚱뚱한 그녀에게 가진 감정은 친구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여자친구도 따로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절박했을 때, 그러니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꼬로록 꼬로록 물 속과 밖을 들락날락 하며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듯, 그 절대 절명의 절박한 시점에서 붙잡을 수 있는 지푸래기 한 오라기는 그녀의 뚱뚱함이었다. 


만인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듯한 경험을 좋아하는 선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절하지 못하고 했어야 했던 그녀의 절망 앞에서, 그 선배는 비루하게도 그녀와의 우정을 이용해서 나쁜 남자가 되어야 했다. 그녀는 상처받았고, 그녀는 수치스러웠고, 그녀는 분노했고, 그녀는 모멸감 속에서 세상을 저주했으리라. 그러나, 그녀가 어릴적 물에 빠졌을 때, 자신이 붙잡은 어느 소년의 팔, 그리고 그 소년의 팔 한쪽에 낸 푸른 상처와 손톱 자국을 회상했을 때, 그녀는 그 선배를 이해하기로 했을 것이다.  
 

그 모멸감을 극복했을 때, 그리고도 오랫동안 여전히 그 선배를 좋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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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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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문으로만 듣던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만났다.

 

<침묵의 거리에서>는 한 중학생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과 그 너머 미숙하지만 인간군상의 모습을 형성해가고 있는 아이들의 세계를 그렸다.  중2. 귀엽고 천진하기만 어린이도 아니고 아직 청소년이라기에도 미숙한 나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신체의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고, 나를 구성하는 세계가 가족과 부모에서 친구 쪽으로 확 기울면서 부모와는 가장 두터운 벽을 쌓고 교우 관계는 전부가 되는 걸 경험했다. 

 

비슷비슷해서 구분도 어려운 일본 이름이 가리키는 인물이 대략 누구인지를 파악할만 하면 바뀌어 버리는 장면 전환은 미국 범죄 드라마 CSI를 상기시켰다. 장면이 바뀌면서 생기는 행간에서 경쾌한 CSI 장면 변환 배경음 땡땡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각기 다른 시점의 각 장면의 그들은 각기 저마다의 입장과 이해관계 속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야기의 갈래는 사건 직후 어른들이 사건을 바라보는 세계와 사건 전 아이가 존재했던 시간 속에서의 아이들의 세계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뉜다.  아이가 죽은 시점에서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이다. 

 

처음부터 지목된 가해자 5명의 부모들은 죽은 아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착한 자기 자식이 '누명'을 쓰거나 불이익을 당할까, 피해자 가족에게 복수를 당할까. 좁은 마을에서 가해자로 낙인찍혀 힘들어지지나 않을가 하는 걱정 뿐이다. 담임 역시 피해자보다는 집단 왕따를 불러오게 한 가해자 아이들에게 더 마음을 쓴다. 기자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기사를 쓰고 싶어하지만, 형사와 검사는 14세 미만의 턱에서 운명이 갈린 아이들에게 어떤 인권의 침해도 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한 아이가 셔틀이 되어 돈을 뱄기고 집단적으로 폭력을 당한 흔적을 잔뜩 남기고 누군가의 강요로 지붕에서 나무로 뛰다 떨어져 죽었다는 심증이 지배적인데도 그렇다. 1편에서는 대략 그렇다.

 

2편으로 넘어가면서, 입을 꾹 다물던 가해자 아이들이 조금씩 입을 열면서 그리고 피해자의 부모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짓기를 요구하면서 사건 전 아이들의 세계가 조금씩 드러난다.

 

소설은 아이를 누가 죽였는가에 주목하지 않는다. 왜 죽었는가에도 그다지 관심은 없다. 아이가 죽자 밝혀지는 중2 학생들의 그 어린이도 아닌,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의 인격체들이 약육강식의 사회를 형성하면서 때로 비열하고 때로 따스하고 때로 폭력적이고 때로 서로 보살피기도 하는 때묻고 낡은 어른들 세계의 미숙한 축소판을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다.

 

우리는 언제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다. 결국 아이를 죽게 만든 건 인간 사회의 본질이다. 강한 자 앞에서는 비굴해지고 약한 자 앞에서는 군림하려는 그 쓸쓸한 인간의 본성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준 사람은 바로 죽은 아이였다는 사실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어느 곳에도 마음 둘 곳 없게 만든다. 약하고 여리고 조금 눈치없고 불쌍한 피해자이기만 한 아이로 알고 있던 아이가 꼬집히고, 채이고, 목졸림을 당하고, 셔틀을 해야 끼워주는 그런 또래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둔한 머리로 나름대로 터득했던 그 대내림의 역사 속에서 사회가 세상이 한올 한올 얽히고 꼬여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스한 마음을 가진 여자 아이 도모노는 그 아이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돕고 싶었지만 그녀의 작은 배려의 말이 아이에게 들어갔다 돌아오는 건 거들먹거림 뿐이다.

 

아이를 죽게 한 건 과보호와 물질적 충족을 나약함과 결핍의 방어막으로 삼게 한 부모들이었다.  아이를 죽게 한 건 인간이 다른 모든 인간을 무조건 좋아하며 어울려 살 수 만은 없다는 잔인한 사실이었다.  아이를 죽게 한 건 폭력을 당하든 셔틀을 하든 지붕에서 나무로 뛰어 내리든 사회 속의 일원으로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아이의 절박함이었다. 아이를 죽인 건 아이 자신이며 동시에 사회를 이루며 마음을 나누고 살아가는 사회 속의 우리 모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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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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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바다의 기별 첫 챕터 맨 앞장에 이렇게 적었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김훈이 이야기한 그 멀고 먼, 닿을 수 없는 관점에서 본 사랑을 하루키는 2300페이지 짜리의 거대한 판타지 소설로 단단하게 빌드하고, 개연성을 부여하고, 기어이 닿지 않는 것들을 닿게 하였다. 둘 다 천재다. 1편과 2편이 미스터리 추리물에 가깝다면 3편은 사건이 해결되면서 동시에 너무 멀고 아득해서 도저히 닿을 것 같은, 품을 수도, 만져질 수도, 건널 수도, 다가오지도 않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멀고 먼 아득한 사랑을 달이 두 개 뜨고, 리틀 피를이 죽은 시체의 입속에서 기어 나와 공기 번데기를 만드는 기묘한 세계에서 이루어 놓는다. 기묘한 세계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다시 달이 하나 뜬 세계로 돌아가지만, 그 세계가 원래 있던 그 세계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러나 기묘한 세계 1Q84와 고양이 마을에서 둘은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고, 그것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만났다. 20년 동안 품고 있던, 따뜻했던 마음 하나로 둘이 만났다.

 

56
희망은 수가 적고 대부분 추상적이지만 시련은 지긋지긋할 만큼 많고 대부분 구체적이지.

 

73
오래된 모루처럼 완고한 그 두개골 안쪽에는 대체 어떤 모양의 의식이 몸을 숨기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곳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은 걸까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내버려진 집처럼 가재도구는 남김없이 실려 나가고, 예전에 살던 사람들은 기척도 없이 사라졌을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벽이나 천장에는 순간순간의 기억이나 광경이 낙인으로 새겨져 있을 것이다. 기나긴 시간을 들여 키워진 것은 그렇게 맥없이 無 속으로 빨려들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 바닷가 요양소의 소박한 침대에 드러누워 있지만, 동시에 깊은 저 안쪽 빈집의 고요한 암흑 속에서 다른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광경이며 기억에 에워싸여 있는지도 모른다.

 

111
덴고와의 현실적인 접점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일이 훨씬 단순했다. 어른이 된 덴고를 만난다는 건 아무 마메에게는 그저 꿈이고 추상적인 가정일 뿐이었다.

 

168
작업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력감을마 침내 어딘가로 몰아 낼 수 있었다.

 

219
아주 짧은 한 순간, 시간의 문이 안 쪽을 향해 열린다. 오래된 빛이 새로운 빛과 하나로 섞여든다. 오래된 공기가 새로운 공기와 하나로 섞여 든다. 이 빛과 이 공기다.  

 

341
사람은 때가 되어 죽는게 아니에요 안에서부터 서서히 죽어 가다가 이윽고 최종 결제 기일을 맞는 것이지요.

 

464
눈을 감으면 후카에리의 시선이  남기고 간 욱신거림이 갈비뼈 안쪽에 느꼐졌다. 아픔은 바닷가로 서서히 밀려오는 온화한 물결처럼 다가왔다 가 멀어져 갔다 다시 다가왔다가 멀어져 갔다. 이따금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아픔이 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따스함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우시카와는 마음 속에서 둔중한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신비의 차가움이 지금까지 그 곳에 있는 아픔을 둔감하게 마비시켜 왔을 것이리라.

 

668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각자 소중히 가슴에 품은 채 끝까지 떨어져 지내는게 좋지 않을까. 그러면 언제까지고 희망을 품은 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희망은 몸의 깊은 곳을 따뜻하게 해주는 자그만한 발열이다. 손바닥으로 소중히 감싸서 바람으로부터 지켜온 작은 불꽃이다. 현실의 난폭한 바을 받으면 훅 하고 간단히 꺼져 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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