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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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달라지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편리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이렇게 편하다니, 매우 좋은 걸!'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다 보면,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런 이유로 <호모 데우스>와 같은 책들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가지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은 하나의 자산이 되기도 한다. 남들보다 먼저 앞을 내다보고, 그에 대한 대비를 어느 정도는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그 능력으로 부(富)도 축적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호모 데우스>라는 책을 선택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라는 어떤 식견으로 미래를 보고 있는지 궁금했고 그의 식견을 미루어보아 나는 어떤 대비를 할 수 있을지 알고 싶어서였다. 또, 그의 전작인 <사피엔스>를 읽었으니 왠지 속편인 <호모 데우스>를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이유가 전자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사피엔스>에서는 인류의 역사를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으로 구분하여 바라보며 다양한 종이 살고 있는 지구를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가 지배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호모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큰 이유에는 상호 주관적 실재인 법, 돈, 신, 국가 등을 믿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모데우스>에서는 그것보다 더 나아간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호모 데우스가 가지고 있는 오래된 집단 신화들과 21세기의 신기술이 만나면 어떻게 될 것인지가 그 이야기이다.
 
 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생략)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_p.39

 

 

  호모 사피엔스는 신을 만들고, 신을 죽였으며, 이제는 스스로 신이 되어가려고 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되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호모데우스>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그동안 인류는 다른 종보다 지능이 뛰어나단 이유로 신이 되어 지구를 지배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컴퓨터는 인간보다 더 빠른 수식을 계산할 수 있고,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기억한다. 한 마디로, 컴퓨터가 인간보다 지능이 더 뛰어나다. 그렇다면, '컴퓨터'를 만든 인간은 컴퓨터의 신이 될 수 있는가, '지능이 높은' 컴퓨터가 인간의 신이 될 수 있는가. 
  
  생존의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과 시스템에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가치는 경험을 하는 데 있지 않고, 경험들을 자유롭게 흐르는 데이터로 전환하는 데 있다. _p.530

 

 

 

 

  유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를 통해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런 생각없이 미래를 맞이하는 것보다, 그가 던진 질문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읽은 <호모데우스>는 생각보다 이애하기에 어려웠다.
  그의 전작인 <사피엔스>는 과학과 역사적 시선이 주된 시선이기에 훨씬 파악하기 쉬웠지만, <호모데우스>는 종교와 과학, 인본주의 등 조금은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지식적 견해가 부족한 나로서는 이해하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렇게 독서노트를 쓰게 됨으로써, 책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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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홀했던 것들 - 완전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완전한 위로
흔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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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들 사이에서 SNS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나도 덩달아 가입했다. 몇 시간동안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돌아다녀야 볼 수 있는 게시글들을 한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아직은 싸이월드 감성이 남아 있을 때라 그런가, 그 때 당시 나는 감성적인 글귀들을 모으곤 했다. 
  그러다 흔글 작가의 글귀들을 보게 됐다. 당시 하상욱 시인이 재치 있는 몇 마디만으로도 SNS에 짧은 시 열풍을 일으켰다면, 흔글 작가는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글귀들로 SNS 짧은 에세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밤하늘, 고요한 사막, 황혼 등의 감수성 풍부한 이미지와 그의 글귀들의 조화가 좋아 스마트폰 배경화면이나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SNS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글보다는 이미지에 집중하게 됐다. 긴 글을 읽는 것보다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흔글 작가의 작품들을 이미지로 접한 나는 그의 글귀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적 요소에 집중하고 있었다. '예쁜 글귀 사진.' 그의 작품에 대해 나는 그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종이란 매체는 사진, 동영상들과는 달리 오로지 '글'에 집중하게 만든다. 아무 것도 없는 드넓은 흰 공간에, 오로지 있는 건 까만 글씨뿐이다. 어떤 단어를 골라 쓰고, 어떤 비유로 문장을 완성시키는지. 오로지 그가 쓴 글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소홀했던 것들>을 통해 만난 흔글 작가의 짧은 에세이들은 담백하면서도 서정적이었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필사도 했다. 처음 봤을 때 꽂혔던 글귀들을 노트에 한 문장, 한 문장 적어 내려가면서 다시 한번 곱씹었다. 더욱 그의 문장이 좋아졌다.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선택한 비유법도 좋았고 '감성적이어야 해!'라고 해서 흔히 말하는 오글거림의 범주에 있는 표현법이나 문장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담백한 그 문장이 좋았다.

 

 

  SNS가 등장하고 나서부터 긴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긴 글을 읽고는 싶으나, 그게 쉽게 되지 않는. 흔글 작가의 <내가 소홀했던 것들>은 짧은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부담감 없이 읽으면서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책. 그게 <내가 소홀했던 것들>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싶다.
  쉽게 잠 못 이룰 겨울 밤,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 속에 들어가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기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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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감정 오작동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실천 인문학
오찬호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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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고 배웠다. 물론 그 때는 그 '다양함'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몰랐다. 단순히 이런 저런 사람들이 사는 것이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했다. 머리가 점점 커지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그 '다양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다. 정말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그저 '다양하다'는 범주 안에는 넣기 힘든 유형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많은 사람들의 삶들을 보다보면 괜스레 부끄러워진다. 당사자가 느껴야 할 부끄러움임에도 나의 몫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나 스스로 '아차!'하면서 부끄러워지는 경우도 있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나는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는 '감정 오작동 사회'라는 키워드로 우리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현상이 만연한 사회의 모습. 마치 고장난 기계처럼 이상하게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오찬호 박사는 '나'를 지키기 위한 방법을 제시해주려 한다.

" 이 책은 사회학적 자기계발서다. "

 

  달라진 사회 '안'에서 행복할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이들을 더 이상 실망시킬 수 없었다. 학교 안에 머무르는 연구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작가의 입장에서 독자의 갈증을 마냥 내버려 두는 건 직무유기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매뉴얼을 만들기로 했다. "이러다가 다 망한다!" 는 쓴소리가 아닌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나'부터 변하자!"는 일종의 사회학적 자기계발이랄까. _p.12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읽으면서 오찬호 박사가 제시하는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나는 누굴 차별한 적이 없는가? 내가 선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역으로 남을 차별하는 행동이었다면?"
"나는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살았는가? 내가 살아온 삶은 성과 있는 삶인가, 그렇지 않은 삶인가?"
"나는 평범한가? 그리고 나의 평범함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인가?"


 

 

 

 

   올해 나는 24살이 되었다. 나의 10대는 대학 입시를 위해 바쳐졌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틀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나의 20대 초반은 대내활동, 공모전 등 일명 스펙쌓기를 위해 바쳐졌다. 밤을 새고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끙끙거렸다. 그러나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남들도 나와 같은 과정을 거쳤고 누군가는 성과를 얻어냈다. 그들과 함께 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성과가 없는 나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나의 20대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모든 기업의 자기 소개서에는 지원자가 겪었던 경험에 대해 묻는 문항이 있다. 
"지원자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가장 큰 역경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 사례에 대해 서술하시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지원자의 해결력에 대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문항이기에, 기업 입장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문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평범하게 살아 온 것이 죄라면 죄다. 20년이라는 시간을 평범하게 살아왔는데, 대학을 다니는 4년이라는 시간동안 어떻게 고난과 역경이 한꺼번에 찾아올 수 있겠냐. 20대 초반이 겪을만한 고난과 역경은 대체 무엇이냐."

 

 

 

 

  얼마 전까지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제가 낯을 엄청 가려서 처음에는 말을 잘 안해요. 근데 친해지면 말이 엄청 많아져요." 라며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나서 어색하지 않다면 그게 어찌 사람이란 말인가.(p.182)  이후 친해진 사람들에게 "나 A형이라서 낯가려!" 라고 이야기하면 "네가?"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어쩌면 나는 은연 중에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그 누가 남에게 처음부터 나쁜 인상을 남기려고 하겠느냐마는.) 지금 당신이 보는 모습은 내 진짜 '낯'이 아니라고 최면 걸듯이.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는 그리 심하게 낯가리는 편도 아니다. 하나의 공통점만 발견하는 즉시 나는 말이 많아진다. 친하든, 친하지 않든 간에. 그동안 나는 왜 나 스스로가 낯가리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상대방에게도, 나에게도 걸었던 '낯가리는 나'에 대한 최면은 몹시 부끄럽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나에게 질문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나는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나는 스스로가 괜찮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통해 나는 나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된 것 같다. '사회학적 자기계발서'라는 오찬호 박사의 설명에 맞게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는 사회의 문제를 제시하면서 '나'라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이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이대로 괜찮은가요?" 

 

 

* * * * * * 

 

 

" 괜찮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우리들의 메세지를 공유해주세요. "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구입하면, 책에 담긴 메세지로 만든 키링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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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 대한민국 스토리DNA 16
전상국 지음 / 새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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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그 나라의 문화, 정서를 담아낸다. 그래서 나는 한국 문학보다는 외국 문학을 더 선호한다. 한국 문학 속에는 한국의 현실이 지독히도 슬프게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외국 문학에 비해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지만 한 편으로는 씁쓸함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외면할래야 외면할 수 없는 그 씁쓸함이 참 싫다.
  대한민국 스토리 DNA의 16번째 책인 전상국 작가의 <우상의 눈물>은 올해로 등단 54년을 맞은 그가 직접 고른 9편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상국 작가는 인간 내면의 숨겨진 선과 악의 문제를 직시하여 작품을 쓰는데, 그렇기에 선정된 9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뚜렷한 개성을 선보여준다. 특히 1960년대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전상국 작가의 작품들에는 대한민국의 아픔과 상처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전상국 작가의 대표작인 <우상의 눈물>은 1980년대 소설로, 절대 '악'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 
유급생인 기표는 자신의 무리 재수파와 함께 반 아이들을 지배하며 지내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임시 반장이었던 유대의 추천으로 반장이 된 형우는 기표를 도와주겠다는 명목으로 그의 커닝을 돕는다. 하지만 기표가 이를 고발하고, 형우는 기표와 재수파들에게 맞아 입원을 하게 된다. 그 사이 형우는 학우를 지키는 영웅으로 추대 받고 있었다. 
  퇴원한 형우는 기표를 위한 모금 활동을 시작하고 유대는 커닝을 주도했던 형우의 행동이 담임 선생님에 의한 지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가정 문제가 반 아이들에게 알려진 기표는 여동생에게 편지를 남긴 뒤 자취를 감춘다.

  나는 속으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무서웠다. 어른들의 음흉스러움. 알면서도 모른 체 시치미를 뗀 그 저의는 무엇인가. _p.73

  육십육 명이 탄 배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단 한 사람의 낙오자나 이탈자가 없어야 한다. 우리들의 항해를 방해하는 자, 배의 순탄한 진로를 헛갈리게 하는 놈은 용서받지 못한다. 유대의 눈으로 비춰진 기표는 반 아이들을 억압하는 '악'으로 보였다. 그리고 기표를 누를 수 있는 형우는 '선'으로 보였다. 그러나 소설이 후반부로 흐를수록 기표의 '악'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가해자였던 그가 피해자가 되면서 유대는 그제서야 절대 '악'이 누군지 알게 된다.
  전상국 소설은 '교실'이라는 한정적 공간을 통해 1980년대 우리가 처해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데올로기가 미화되면서 '진짜' 권력을 가진 인물은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에 대해 <우상의 눈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전상국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발자취는 참으로 무섭다. 폭력으로 무감각해진 발자취들. <아베의 가족>, <맥>, <동행>에서는 6.25 전쟁을 직접 겪은 인물들을 내세워 전쟁의 비극을 낱낱이 보여주며 그로 인한 상처와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난 그 광 속을 잊을 수가 없었던 거요. 그 광 속에서 이틀 동안이나 이빨 사이에 박힌 장갑 실오라길 빼내려구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슈? 침이 묻은 손은 자꾸 얼어들구, 실이 끼인 잇몸의 살이 떨어져 피까지 나왔지만 난 그 장갑 실오라긴 아무래도 뺄 수가 없었던 거요. 예, 늘 그 생각을 한 거죠. 난 그 육실하게 춥구 캄캄한 광 속에선 실오라길 죽어두 빼낼 수가 없었다, 이겁네다. _<동행>中

  그리고 <침묵의 눈>, <투석>을 통해 1970년~80년대의 어두운 현실을 그려낸다. 전상국 작가는 보았음에도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그 시대의 아픔들과 그 아픔을 딛고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도대체 그럴 자격이 없는, 가장 독선적인 사람이 민주화란 갑옷을 입고 큰 목소릴 냈다. 목소리 큰 사람에 질질 끌려다니는 이들도 많았다. 학자답지 않은 야심을 품고 정치꾼 같은 교활성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어른이 없었다. 잘못을 따져 꾸짖고 때로는 너그러이 가슴에 안은 그런 큰바위얼굴이 없었다. _<투석> 中

  무속신앙을 믿는 인물을 통해 잘못된 신앙이나 신념 체계가 빚어낼 수 있는 비극을 그려내고 있는 <우리들의 날개>, 관습적인 연애 및 결혼과 그것으로 인한 구속감,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여성들을 그려내고 있는 <플라나리아>와 <전야>를 통해 드러난 대한민국의 발자취는 읽는 내내 씁쓸함을 안겨준다.

 

 

 

  씁쓸하기 때문에 계속 곱씹는다. 왜, 우리는 이런 씁쓸한 현실을 계속 살 수 밖에 없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조금씩 변화를 취한다. 한국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에 있다고 본다. 그동안 우리가 지나왔던 씁쓸한 발자취를 다시 되돌아보고, 더는 반복하지 않는 것. 싫음에도 계속 읽어야 한다. 읽어야 생각이 변하고 바로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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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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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스마트폰을 찾는다. 밤사이 온 연락은 없는지 확인한다. 토스트기를 이용해 빵을 굽는다. 컴퓨터를 켜 이메일을 주고 받고 필요한 업무들을 해결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길을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먼 지역으로 움직인다. 똑같이 대량으로 생산된 물건들을 값싸게 구매한다. 집으로 들어와 TV를 보며 하루를 마감한다. 이 모든 것들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계'들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기계들이다.
  증기기관의 등장으로 시작된 산업혁명(1차)은 전기 에너지(2차),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3차)을 거쳐 IoT(사물인터넷),AI(인공지능)까지 이르게 되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을 통해 눈 앞에서 확인한 AI의 힘은 매우 컸다. 이미 시작된 4차 산업혁명 이전에 우리는 '의식을 가진 기계'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말로 인간만큼의 의식을 가진 기계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의식을 가진 기계들은 인간들의 삶을 잠식시킬까?

  기계는 인간보다 더 고등한 생명체로 발전하지 않는 대신 인간의 수요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따라 존재 여부와 진보가 이루어지며, 따라서 언제나 인간보다 하위이다.
  지금까지는 모두 좋다. 그런데 하인은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주인의 생활을 잠식하며, 인간은 기계가 주는 혜택을 금하는 순간 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_≪에레혼≫ p.256~257

 

 

  ≪에레혼≫은 1872년 새뮤얼 버틀러가 쓴 풍자소설이다. 버틀러는 다윈의 <진화론>을 색다르게 받아들여 영국의 산업화로 인해 등장하게 된 기계를 바라보고 있다. ≪에레혼≫은 nowhere(어디에도 없는)을 거꾸로 쓴 제목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라인 에레혼은 우리가 아는 사고방식은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선생이 나간 다음 좀 전의 대화를 곰곰이 돌이켜보았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이 내 예상을 뛰어넘게 왜곡되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곤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니 참담했다. _≪에레혼≫ p.99

  에레혼은 유토피아를 역으로 상징하는 곳이었다. 신체적 질병은 죄악이자 비도덕한 것으로 여겼는데 약하고 병든 이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만이 약함과 병의 확산을 막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신체적 결함의 불운 역시 죄가 되었다. 그러나 횡령 등의 범죄에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단순한 정신 질병에 걸린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 정신 질병은 교정관의 교육에 따라 해결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세상 어디에서도 사용할 수 없는 돈을 통용시키는 음악 은행과 세상의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가성학과 가설언어를 가르치는 비이성의 대학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레혼은 지구의 생물들이 진화를 통해 지금의 모습에 이른 것처럼 기계 역시 진화를 할 것이며, 의식을 가진 기계가 나와 인간들의 삶을 잠식시킬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반기계파들에 의해 모든 기계들이 멸종한 상태였다.

   그 때 가장 학식 있는 가설학 교수가 기계는 궁극적으로 인류를 대체하게 되며, 식물에 비해 동물이 우세하듯이 기계는 동물보다 우월하고 동물과는 다른 생명력을 지닌 약동하는 존재가 될 것임을 입증하는 뛰어난 저서를 발표했다. _≪에레혼≫ p.104

 

 

 

 

영국의 산업화로 인해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함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노동시간이 짧아진 사람들은 여가를 즐기기 시작했고 다양한 매체가 등장함에 따라 대중 문화가 발달했다. 또, 기계를 다뤄야 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교육을 받으면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향상했다. 그러나 버틀러는 기계로 인해 편해진 사람들의 삶을 조금은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인간 사회는 증기에 의존하면서 계속 팽창하고 확장하고 있다. 갑자기 증기의 힘이 철회되더라도 인간이 증기가 도입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란 힘들 것이다. _≪에레혼≫ p.275 

  그렇다. 우리의 삶은 이미 다양한 기계에 익숙해져 있고 만약 그 기계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들은 불편함을 호소하며 기계 등장 이전의 삶에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우리는 더욱 기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어진다. 스마트폰을 통해 필요한 것들을 이루어 내는 것도 모자라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이나 기기를 이용하여 삶 전체를 이루어 내려고 할 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벌써 그런 생활에 도달했다. 스마트 기능을 가진 냉장고는 요리하는 우리에게 레시피를 불러주고, "지니야~ 음악 틀어줘!"라고 이야기하면 어느새 내 취향에 맞는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버틀러는 ≪에레혼≫을 통해서 당시 영국의 산업화에 대해서 풍자하고 있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과연 기계의 발달이 우리에게 이익만을 가져다 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더해서 우리에게 기계에 의존하는 삶에 대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에레혼≫을 읽으면서 조지 오웰의 ≪1984≫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빅데이터 시대, 많은 정보들로 인한 사생활 침해가 가능한 현재를 예견했던 ≪1984≫처럼 ≪에레혼≫은 AI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레혼≫이 ≪1984≫보다 먼저 쓰여졌다.) 그러기에 지금이 ≪에레혼≫을 읽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1872년에 상상했다기엔 너무나도 지금과 닮아 있는 모습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에레혼≫을 읽다보면, 그 곳의 상황에 미루어 현실을 되돌아 볼 수 있다. 우리는 AI의 등장에 열광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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