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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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지성주의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감정을 사람들에게 불러넣은 복음주의 신앙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정치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평등을 향한 우리의 열정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반지성주의가 교육계에서 막강한 세력이 된 것은 교육에 관한 우리의 신념이 복음주의에 입각한 평등주의였다는 사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지성에 의한 수술이라고 할 만한 끈질기고 섬세한 방법으로 선의의 충동에 기생하는 반지성주의를 잘라내야 한다.(p47) <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 1916 ~ 1970)는 <미국의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에서 미국 사회에 만연한 반(反)지성주의의 뿌리를 밝히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 건국 초기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미국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 에 담긴 생존, 자유, 행복 추구의 사상이 점차 희미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 귀족 지식인 계급에 의한 건국과 이들의 몰락


 저자에 따르면 미국 건국 당시 미국 사상에 큰 영향을 준 두 집단 -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 ~ 1790),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 ~ 1826) 등 건국의 아버지와 청교도 성직자 계급 - 에 의한 지배는 내부 분열(分裂), 대중민주주의 확산과 산업화(産業化)등의 사회변화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미국사의 초기에는 두 개의 지식인 집단이 영향력이 막강한 사회적 권력을 행사하는 데 관여하거나 책임을 도맡았다. 청교도 성직자들과 건국의 아버지들이다. 다만 자신들의 결함이나 어찌할 수 없는 역사적 변화 때문에 두 집단 모두 나중에는 우위를 상실했다.(p544)<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적인 엘리트 집단의 지배 대신 대중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았지만, 정치에서 지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쇠퇴한 것을 민주주의 운동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당파 분열이 극심해 지면서 엘리트 집단은 몰락하기 시작했고 정치 윤리도 존중하지 않게 되었다. 훌륭한 인격과 용기로 미국 혁명을 주도하고 탁월한 통찰력과 기량으로 1787 ~ 88년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던 이 사람들이 1796년에는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철저히 분열되고, 프랑스 혁명의 여파에 따른 의견 충돌까지 겹치면서 히스테릭하게 서로 으르렁대게 된 것이다.(P207) <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2. 대중민주주의 확산과 기업 문화의 대두


 이들을 대신한 것은 민중(民衆)이었다. 몰락한 귀족 지식인 계급과는 반대로 대중민주주의가 확산되면서 미국 민중의 지식 수준은 높아졌고, 삶의 지혜가 학문의 지식보다 강조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성직자들의 권위가 추락하였고, 이들을 대신하여 복음주의가 민중에 퍼지게 되었다. 여기에, 산업화로 인해 기업들의 산업 인력 수요가 늘어나면서 사회적으로 초등교육에 대한 필요가 높아져 가면서 일반 민중 의식은 초등 교육 중심으로 종교적으로는 복음주의와 함께 확산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분위기의 문제점은 바로 지식에 대한 혐오이며, 남성 위주 분위기 형성이었다. 후대에 말보로 맨(Marlboro Man)으로 대표되는 미국 남성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만들어지게 되었다.


[사진] Marlboro Man(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91831279878083075/)


 민중민주주의가 힘과 자신감을 키워감에 따라, 직관력을 타고난 민중의 지헤는 지식 계급이나 자산 계급의 교양 있고 지나치게 세련되고 자기중심적인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일반적인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복음주의자들이 마음의 지혜나 하느님과의 직접 교섭을 중시하고 학문으로서의 종교나 형식적으로 제도화된 성직자 집단을 거부한 것처럼, 평등주의 정치를 주창하는 이들도 보통사람의 타고난 현실적 감각과 진리와의 직접 대면을 중시하고 훈련된 지도자들을 배제시키자고 제안했다.(p219) <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복음주의와 원시주의가 미국인의 의식의 뿌리에 반지성주의를 심어놓는 데 일조했다면, 기업 사회는 반지성주의가 미국적 사고의 전면에 계속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미국적 삶의 민주적, 능률적인 성격에는 항상 행동하고 결정하는 생활이 수반되었다. 대범하게 생각하는 습관, 신속한 결정, 즉각적인 기회 포착 등이 장려되었다 - 그러나 이 모든 활동이 사고에서의 신중함이나 치밀함, 정확함과 어울리지는 않는다.(p84) <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3. 초등 교육 중심의 정책


 그 결과 미국의 교육은 고등 교육 중심이 아닌 초등 교육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제한된 예산 하에서 전국에서 빠른 시기에 초등 교육을 수행한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과제였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교육은 자연스럽게 질(質)이 아닌 양(量)에 치중한 성장을 하였다. 그 결과 교육자는 저임금의 여성 인력으로 채워지게 되었고, 이는 교육과 교양을 경시하는 미국 문화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윌리엄 매닝 William Manning이 생각하는 교육론은 일반인들도 큰돈 들이지 않고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고, 고등교육은 예전처럼 오로지 초등교육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즉 보통학교 common school에 저임금의 교사들을 보내는 방향으로 체계화해나가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일반교양을 지닌 값싼 노동력을 배출하는 쪽으로 고등교육의 기능을 한정하자고 제안했다. 수준 높은 학문에는 장려할 만한 본질적인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p217) <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모든 사람이 보통학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고, 남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교육시키려면 마땅히 고도로 훈련된 교사들을 공급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데, 미국에는 그에 필요한 능력이나 의지가 없었다. 언제까지고 값싼 교사만을 찾았다. 학교 교사는 공무원으로 여겨졌고, 공무원의 급여는 지나치게 높아서는 안 된다는 사고가 미국의 평등주의 철학에 있었기 때문이다.(p437) <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교육이 여성의 직업으로 여겨지는 미국에서는 교직이 정당한 남성의 일이라는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때문에 미국에서 교육과 문화는 여성의 일이라는 남성적 신념이 강화되었다.(p438) <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4. 대중과 분리된 지식인


 19세기 미국 민중들이 반지성의 길을 걸었다면, 미국 지식인들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19세기 초반 미국의 급격한 사회 경제 변화는 젠틀맨(Gentle man)계급을 낳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이들은 문화 예술을 후원하는 긍정적 역할과 함께 미국 지식인들을 현실참여로부터 배제시키는 부정적 역할도 함께 수행하였고, 이후 미국 지식인들은 미국 사회 주류로부터 '소외' 당하게 되었다. 

 

 1820년 무렵부터 기존의 공화주의적 질서는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의해 급속하게 무너졌다. 평신도들이나 복음주의자들은 이미 기성 성직자들의 권위를 떨어뜨린 상태였다. 이제는 새로운 정치 스타일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민주적 지도자가 상인-전문직 계급으로부터 정치적 지도력을 낚아챌 차례였다... 그 결과 상당한 부와 여가, 교양을 지녔지만 이렇다 할 권력이나 영향력은 가지지 못한 젠틀맨 계급이 남았다. (p545) <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건국의 아버지들의 문화를 이어받은 것을 나는 머그웜프 문화 mugwump culture라고  지칭하려 한다. 이 계급은 19세기 내내 독립적이고 세련된 미국 사상이 표출되도록 하는 주된 수용자 노릇을 했다... 18세기 공화주의 유형의 지적 미덕은 머그웜프 환경에서 점차 약해져 사라지고 말았다. 그 주된 원인은 대개 머그웜프 사상가들이 이런 미덕을 현실의 경험과 밀접하고도 유기적으로 관련지을 기회를 빼앗긴 데 있었다.(p546) <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대다수 미국인들과 달리, 이 계급 사람들은 전통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통은 힘의 원천이나 출발점이 아니라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이었다.(p547)... 젠틀맨 계급은 여러 세대에 걸친 비판을 통해 작가들로 하여금 "세상 위에 따로 떨어져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식의 사회 감각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줄곧 노력했다. 그 결과,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던 강렬한 확신은 사라졌다.(p549) <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5. 소외된 지식인의 서로 다른 선택


 19세기 말 이후 지식인들의 현실참여는 조금씩 늘어나게 되었지만 지식인과 권력과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권력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지식인들은 권력에 대한 혐오를, 권력 참여를 선택한 지식인은 오히려 반지성주의에 선두에 서서 자신의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길을 가게 되었다.


 지식인들은 수효와 영향력를 증대시켜 좀더 조직적으로 미국 사회와 각종 기관, 시장 등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스스로의 소외에 대해 점점 자의식 과잉이 된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었다... 머그웜프 시절의 특수한 소외 상황은 이 세대의 전위적인 사람들의 소외와는 전혀 달랐지만, 양측에 공통되는 소외감이나 불만, 실패, 비탄에 대한 의식이 정신적 유대를 만들어냈다. 적어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민주적인" 지삭인도 귀족적인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녹아들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p558) <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권력과의 결합을 완전히 포기한 지식인은 자신의 무력한 입장이 모종의 계몽에 유용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이런 지식인이 권력에 접근하고 권력과 관계되는 문제에 관여하다보면 다른 형태의 계몽이 가져다 줄 가능성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권력과 결합된 지식인은 직접적으로 지식인의 공동체의 사고에 따르는 형태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p586)... 미국의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권력의 자리로부터 차단되고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에 놓여왔다. 그래서 그들은 권력과의 갑작스러운 결합에 눈이 부신 나머지 지적 분별력을 상실할 위험이 상존한다.(p587) <미국의 반지성주의> 中


  저자는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미국 건국 초기 '건국의 아버지들'과 '청교도 정신'이 내부 분열과 외부 변화로 인해 사라져 버렸고, 이를 대신한 민중민주주의는 초등 교육 중심의 교육 제도 영향을 받아 반지성주의로 흘렀음을 지적한다. 반면, 건전한 지식인들은 일반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반면, 복음주의 등 극단적인 움직임이 미국 사회를 움직이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미국의 반지성주의 성향은 바뀌지 않은 듯 하다. 대표적으로 2012년 '교과서 진화론 삭제 사건' 등은 이러한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여겨지며,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 1928 ~ )와 같은 지식인들의 사회 비판 목소리는 일반 대중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1960년대에 씌여진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지금도 유효한 분석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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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3 1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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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3 1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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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3 1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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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3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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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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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권력의 자리로부터 차단되고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에 놓여왔다. 그래서 그들은 권력과의 갑작스러운 결합에 눈이 부신 나머지 지적 분별력을 상실할 위험이 상존한다.(p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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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도의 이해 (반양장)
데이비드 파렐 지음, 전용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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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비례성은 선거라는 게임에서의 승자와 패자, 정당군, 의원의 행태를 결정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반면, 비례성은 불안정성을 야기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미약하다. 이런 관점에서 비례제를 선호한다는 결론을 내렸다.(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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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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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되는 순간 사라지는 피아노곡과 사랑. 스완의 에바 페론 오데트. 시각, 청각, 촉각으로 돌아보는 과거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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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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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을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법적인 제약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p487) <파시즘> 中


 로버트 O. 팩스턴(Robert O. Paxton, 1932 ~ )의 <파시즘 Fascism>은 역사 속에 나타난 히틀러(Adolf Hitler,1889 ~ 1945)와 무솔리니(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 1883 ~ 1945)의 사례를 중심으로 파시즘을 정의한 책이다. <파시즘>이 대상으로 하는 전후 독일/이탈리아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이번 리뷰에서는 이에 대해 살펴보고, 파시즘에 대해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1. 외부로부터의 위협


 저자는 파시즘 등장의 배경으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느끼는 위기감을 지적한다. 외부로부터의 위협과 불안한 사회구조.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내외 조건이 갖춰졌을 때 파시즘이 싹트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1917년 2월과 10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새롭게 등장한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1917년 이후 좌파는 1914년 이전에 했던 것처럼 세력을 모으면서 때를 기다리기만 하지 않았다.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위력적으로 보였던 볼셰비키 혁명의 선두에 서서 전 세계를 향해 전진해나가는 것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볼셰비즘이 울린 화재경보는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자유주의적 가치와 제도가 맞닥뜨린 곤경을 한층 더 가중시켜 비상 사태로 몰아넣었다. 의회, 시장, 학교라는 세 가지 핵심적인 자유주의적 제도들은 이 비상 사태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p114) <파시즘> 中


[사진] 무솔리니와 히틀러(출처 : https://www.smithsonianmag.com/history/how-journalists-covered-rise-mussolini-hitler-180961407/)


2. 위기에 취약한 사회시스템


 일반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다진 모든 종류의 보수주의 체제는 파시즘이 권력을 획득하기에 좋은 환경이 못 되었다. 이들은 파시스트들을 무질서를 선동하는 세력으로 간주해 궤멸시키거나 파시스트들이 내세우는 이슈와 지지 세력을 선점해버렸다. 보수파들은 단독 통치가 가능한 상황이라면 파시스트들과 연합하지 않았다.(p255) <파시즘> 中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에서도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 ~ 1919)와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 ~ 1932)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자들의 대두는 전후 독일 사회에 새로운 충격을 가져왔지만, 기존 시스템들은 이러한 충격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회의 위기 상황에서 기득권들의 선택은 '파시즘과의 연대'였다. 


 빌헬름 시대 독일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근대성'에 반대하는 강력한 반유대주의 세력과 폭도가 많았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위기에서 독일의 군대와 관료 사회에 대한 사법적/정치적 지배가 다른 유럽 국가들만큼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p184) <파시즘> 中


 위기에 처한 것은 통치의 기술이었다. 좋은 집안 출신의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 사회적 명성과 존경에 의지해서 선거에 계속 재당선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명망가의 지배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 명망가의 지배가 '대중의 국민화'로 인해 거센 압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p186) <파시즘> 中 


 보수파 지도자들은 파시즘이라는 대안을 선택했다.(p236)... 보수 세력은 한갓 오스트리아계 상병 출신인 히틀러나 풋내기 사회주의자 선동가인 무솔리니는 높은 자리에 앉는다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었다. 교양있고 경험도 풍부한 보수 진영 지도자들의 기지가 없으면 정치를 이끌어갈 수 없으리라고 예상했던 것이다.(p241) <파시즘> 中


3. 그렇다면 왜 파시즘이었는가?


 저자는 파시즘이 '대중에 의한 정치'의 토대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민중(demos)에 의해 지배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발생하는 정치 혼란은 파시즘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된다. 파시즘이 초기에 보여준 관대한 모습은 보수파들의 경계를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고, 그 결과 기득권인 보수주의자들은 파시즘과 손을 잡게 되었다.


 파시즘(fascism)은 좌파의 계급 투쟁과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및 입헌주의에 맞서기 위해 각 나라의 민족 문화에서 부흥, 통합, 정화와 같이 대중을 동원하기에 가장 용이한 주제를 찾아내려 했다... 파시즘은 자신들과 본질적으로 성향이 다른 지식인 식객들까지도 넓은 마음으로 환대했다.(p106) <파시즘> 中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의 하나는 자유주의 질서의 위기였다. 파시즘이 암실에서 나와 공적인 무대로 가장 쉽게 진출했던 곳은 기존 정부의 기능이 형편없거나 아예 전무했던 곳이었다. 파시즘에 대한 토론의 장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내용은 파시즘이 자유주의의 위기를 기반으로 삼아 번성했다는 사실이다.(p185) <파시즘> 中


 파시즘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대중 정치(mass politics)'다. 좌파에 대항하는 대중 운동으로서 파시즘은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기 이전에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p110)... 보수주의자들이나 신중한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파시스트들은 결코 대중을 정치 밖으로 몰아내려 하지 않았다.(p112) <파시즘> 中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집권 과정에서 필연적인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유주의 전통의 척박함, 뒤늦은 산업화, 민주주의를 용인하지 않는 엘리트층의 잔존, 혁명의 물결이 지닌 위력, 국가적 굴욕에 대항한 발작적 봉기 등 다양한 요소들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선택의 폭을 좁히는 데 기여했을지도 모른다.(p236) <파시즘> 中


4. 파시즘의 변모와 집권


 유권자 단체나 압력 단체가 중심이던 정치에 성공적으로 참여하게 된 초기 파시즘 운동들은 말과 행동에 더욱 정확히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파시스트들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무차별적인 저항이라는 비조직적 영역을 포기하고 긍정적이고 실제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확실할 정치 공간을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p140)... 그러나 파시스트당이 구체적인 정치 활동에 뿌리를 내리자마자, 파시스트들이 사용하던 반부르주아적 수사의 선택적 본성이 뚜렷이 드러났다. 실제로 파시스트들의 반자본주의는 지극히 선택적인 것으로 드러났다.(p141) <파시즘> 中


 기존 기득권과의 연합을 통해 힘을 갖게 된 파시스트들은 초기에는 다른 세력과 연대를 위해 온건한 형태를 유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폭력', 폭력이 낳은 '혼란', 혼란이 불러오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파시스트들은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 국민과 거칠게 다루어야 할 국외자들의 차별을 부추겼다.(p198)... 위기를 심화시킬 목적으로, 나치당은 대상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의도적인 폭력 사태를 더 많이 일으켰다.(p222) <파시즘> 中


 그렇지만, 자신들이 일으킨 폭력이 그들에게 권력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1923년 뮌헨 폭동(Munchen Putsch)을 통해 집권하려던 히틀러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 그를 감옥으로 보냈지만, 공산주의자가 일으킨 방화사건은 그에게 대중의 이름으로 권력을 건네주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아직도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독일의 유권자들은 나치당에게 과반수의 표를 준 적이 없다.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임명되어 전 독일을 지배하던 1933년 3월 6일에 치러진 의회선거에서 지지율은 상당히 올랐지만 아직은 미흡한 43.9퍼센트에 그쳤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어느 누구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지 않았다. 집권 전에 무력으로 기존 정권을 위협하거나 집권 후에 무력을 동원해 정부를 독재 체제로 변환시키기는 했지만, 어느 쪽도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p225) <파시즘> 中


  하지만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운 좋은 사건이 일어나 우파나 중도파 중 어느 쪽의 반대도 없이 사실상 내부로부터 쿠데타를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운 좋은 사건이란 바로 1933년 2월 27일에 발생한 베를린의 독일제국 의회 의사당 방화 사건이었다.(p245)... 수많은 독일인들이 그러한 공포에 공감하여 나치에게 거의 무제한적인 권력을 내준 셈이다.(p246) <파시즘> 中


5. 파시즘의 붕괴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한 파시즘 체제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1940년 대 이래, 파시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파시즘 정권들이 당과 강력한 보수 세력 사이에 맺어진 모종의 협약이나 동맹관계에 의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왔다.(p274)... 파시즘 지배는 여러 세력이 연합을 이룬 가운데 벌어진 끝없는 주도권 쟁탈전이었다. 이 투쟁은 헌법상의 규제와 법에 의한 통치가 무너지고 사회진화론이 대세를 장악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p277) <파시즘> 中


 저자는 <파시즘>을 통해 파시즘을 정의해 나가지만 이것이 쉽지 않음을 말한다. 그 이유는 파시즘이 나타난 양태가 국가마다 다르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 파시즘이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부정하는 모든 세력들의 연합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A의 여집합'이 집합 'A'의 부정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듯, 파시즘은 부정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는 정치행동이었다.


 파시즘 정권들은 마치 하나의 분자구조물과도 같았다. 다시 말해, 파시즘 세력과 보수적 질서라는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물질이 자유주의와 좌파에 대한 적대감, 적으로 규정한 대상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겠다는 의지라는 두 가지 공통점을 매개로 하여 결합하여 탄생한 합성물이 바로 파시즘 정권이었던 것이다.(p333) <파시즘> 中

 

 문제는 이러한 서로 다른 세력들의 결합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불안한 구조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파시스트 정권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전쟁은 파시즘의 안정화를 위해 가야할 수순이었고, 파시즘의 종말도 함께 할 친구가 되었다.


 급진화 단계는 파시즘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어떤 정권도 급진화될 수는 있지만, 자기 파괴에 이를 정도로 격렬한 폭력을 분출하는 파시즘적 충동의 깊이와 위력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 급진화의 핵심은 팽창주의 전쟁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체제의 적들, 다음으로는 파시즘의 보수파 동맹 세력, 마침내는 독일 국민들까지 상대로 하여 이성을 잃고 완전 몰살을 기도하며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p384)... 나아가 급진화는 파시즘의 핵심으로 간주되었던 민족과 국가마저 거부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최종적 분석에 따르면 파시즘은 타고난 성격 자체가 불안정하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보면 파시즘은 겁에 질린 보수파나 자유주의자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참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p386) <파시즘> 中


[사진] 폐허가 된 프랑스 시가지를 통과하는 독일군 오토바이(출처 : http://world-war-2.wikia.com/wiki/File:German_motorcycle_driving_through_ruined_French_town,_France_1940.jpg)


 <파시즘>은 이와 같이 역사 속에 나타난 파시즘의 여러 모습을 통해 최종적으로 파시즘을 정의한 책이다. 과거와 현재,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등장한 파시즘의 모습을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 결과 저자는 리뷰 서두에서 인용한 긴 정의를 내리게 된다. 비록, 저자의 정의는 길고 어렵지만 파시즘의 모순을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불안한 사회상황에서 타인을 부정하는 욕망들의 결합체'를 파시즘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축약일까. 개인적으로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이와 같이 정리해본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분단을 동시에 가져다 준 제2차 세계대전. 21세기에도 냉전(冷戰)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파시즘'이 주는 역사적 의미는 작지 않다고 여겨진다. 또한, <파시즘>에서 분석하고 있는 전후(1920~ 30년대) 독일의 정치 상황이 주는 교훈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에서 <파시즘>은 일독할만한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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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4-04 1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근래 파시즘 책 더 읽어 보고 싶었는데,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9-04-04 19:46   좋아요 1 | URL
네. 책 분량이 제법 있지만, 내용적으로도 잘 정리되어 편안하게 읽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북다이제스터 2019-04-04 20:42   좋아요 1 | URL
네, 파시즘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다(파시즘을 정의하기 어렵다)라는 말이 인상적인데요, 이데올로기가 없는 생각도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글 보며 순간 생각 들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4-04 21:25   좋아요 1 | URL
^^:)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파시즘의 정의가 모호해서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것 같습니다.

2019-04-05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5 1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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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5 1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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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5 1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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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1 16: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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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1 16: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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