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공산당 정치국은 군사 충돌을 포함한 전쟁과 평화 문제, 외교 정책의 근본적인 조정이나 변경 등 매우 중요하고 전략적인 외교 방침과 정책을 결정한다. 그 외에 일상적인 외교 정책이나 긴급 돌발 사안은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결정한다. 그래서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외교 정책 결정에서는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외교 정책과 관련하여 공산당 중앙, 즉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정치국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외교 정책의 기본 방침과 정책을 결정한다. 둘째, 외국과의 갈등(군사 충돌 포함)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군사작전을 승인한다. 셋째, 아시아와 같은 주요 지역의 정책, 미국·러시아·일본 등 중요 국가의 정책을 결정한다. 넷째, 미국과 일본 등 중요 국가의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를 결정한다. 다섯째, 중국의 외교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지역이나 국가에 대한 방침과 정책, 주요 쟁점 문제(issues)에 대한 방침과 정책을 결정한다.

공산당 총서기와 같은 최고 지도자의 역할은 없는가? 그렇지 않다. 현재 시진핑 총서기는 동시에 중앙군위 주석과 국가 주석을 겸직하고 있다. 소위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지위에 있다는 것이다.

외교 안보 정책의 결정 및 집행과 관련하여 인민해방군이 어떤 역할을 얼마나 수행하는가는 아직도 논쟁이 끝나지 않은 주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첫째, 공산당이 외교 안보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군이 근본적인 측면에서 지속적이고 결정적이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군은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앙군위, 영도소조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결정은 공산당 중앙이 맡는다.

외교 안보 정책에서 군의 영향력은 분야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보면, 마오쩌둥 시대와 비교할 때, 개혁·개방 시대에는 정치 영역에서 군의 영향력이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산당의 권력승계 과정에서 군은 더 이상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수한 군사 영역에서는 군의 자율성과 영향력이 여전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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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 근대 동아시아와 말기조선의 시대구분과 역사인식
이삼성 지음 / 한길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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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화단사태 이전까지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중국에 경제적으로 침투함에서 중국 정부와 개별적인 양자협정의 형태를 주로 취했다. 하지만, 의화단사태 이후 열강들은 경쟁적인 차관계약(competitive loan contracts)을 점차로 회피했다. 대신 그들 서로 간에 협력적 컨소시엄(cooperative consortiums) 형태로 중국에 대한 자본진출 방시을 변화시켰다. 중국지배를 위한 제국주의 열강의 카르텔적 성격을 재확인해주는 것이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425 


 이삼성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멸망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가 이전과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중화질서의 붕괴다. '조공-책봉'체계를 중심으로 연결된 동아시아 질서는 1840년대 아편전쟁을 계기로 급격하게 흔들리며 조약 중심의 세계질서로 대체된다. '조공-책봉'체제에서 형식적인 위계질서는 '조약'으로 형성된 제국주의 국제 질서 안에서 실질적인 위계질서로 대체된다. 이 모든 것은 18세기부터 19세기 사이 극히 짧은 기간에 이뤄진 혁명의 결과였다. 


 유럽에서 정치혁명은 산업혁명과 시간적으로 맞물리면서 함께 전개되었다. 경제에서 산업혁명이 '성장의 한계'에 갇힌 전 근대적 경제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효과가 있었듯이, 정치혁명은 전 근대적 정치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신민(臣民)은 시민(市民)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기 동양에서는 전 근대적 경제질서와 함께 전근대적인 정치질서가 지속되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111


 19세기에 경제면에서 산업혁명과 정치면에서 시민혁명은 유럽사회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 분업을 통한 대량생산체제는 저가의 원료공급지와 대규모 소비지로서 식민지가 필요했으며, 시민혁명을 통한 평등의식의 확산은 대외 침략의 이익을 분배하는데 기여하면서 제국주의 시대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왜 중국의 19세기는 이와 달랐던 것일까.


 (중국에서는) 지배세력의 유교적인 정치경제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사회안정도 경제팽창과 함께 유지되었다. 이 같은 안정 속의 시장팽창에도 불구하고 산업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업 자본주의조차 중국에서는 그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광범한 원시산업화가 근대적인 공장형 산업의 발전으로 진전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은 애덤 스미스적 성장 한계인 농업적 동학 안에 갇혀 있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110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에서 우리는 이와 관련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4세기 전후 유행한 페스트로 인해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해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노동력 절감을 위한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고, 여기에 더해 바다 건너에 있는 식민지로의 인구 유출은 자본집약적 생산을 가속화시켰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안정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고, 전통적인 농업에서는 잉여생산인력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기에 큰 변화가 생겨날 수 없었다. 지속적인 안정과 평화가 결과적으로 중화질서를 무너뜨리는 아이러니는 여기에서 생겨난다.


 전통적 왕조체제는 초기에는 나름대로 생명력으로 넘쳐나기도 했다.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국가 관료기구의 기강을 세우는 등 국가경영에 혁신을 도입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황실과 지배층은 부유하지만 국가는 가난해진다. 국가 관료 기구는 비대한 지배층의 민중에 대한 통제 불능의 수탈기구로 전락해간다. 민중은 반란을 일으키고, 왕조는 기강이 해이해진 군사력을 긁어 모아 간신히 반란을 진압한다. 경우에 따라서 외세의 힘을 빌려야 할 때도 있게 된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155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한 결과 기득권들은 그들의 위치를 공고히하고, 밑으로의 수탈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사회불만이 쌓이다가 민란이 일어나는 공식. 청나라와 조선 말기 보여진 공통적인 모습이었다.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 ~ 1864)의 난과 동학농민혁명(1894 ~ 1895)는 이같은 성격이 잘 드러난 사건이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동원하려 했던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부르주아 혁명으로 정치혁명을 이뤄냈던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동아시아의 절대왕정 편에 서서 사회적 모순을 지켜내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청나라와 조선이 이같이 기득권의 논리에 의해 끌려갔다면, 이와 상반되는 사례가 개화기 일본이었다.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변동의 핵심은 반외세의 슬로건인 존왕양이를 주창하는 세력이 일본 국가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이들이 동시에 개국과 개화의 추진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반외세 자주를 추구하는 것과 개방과 개혁을 지향하는 것이 모순이 아닌 통일을 이룬 것이다. 이것은 지배층의 정치적 통합을 가능하게 했다. 또 한편으로 지배층과 일반 민중 사이의 일정한 정치적 통합을 달성하게 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210


 기득권의 권리 수호와 기득권의 교체. 19세기 동아시아 질서는 여기에서 결정된 것이 아닐까.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췄던 청나라와 조선은 그 권력이 외척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 아래에서 권력이 사유화된 반면, 그보다 지방권력의 성격이 강했던 일본에서는 유사 시 막부(幕府)를 대신할 번(藩)이 등장하면서 정치적인 혁명을 이뤄냈고, 그 결과 일본은 중화질서의 변방에서 중화질서 해체의 선봉장이 되었다.


 일본이 궁극적으로는 요동반도를 포기했지만, 두 가지 점에서 시모노세키 조약은 중화질서의 종언을 의미했다. 첫째, 중국의 영토인 대만과 팽호 열도가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의 변방이었던 일본의 차지가 되었다. 둘째, 중화질서의 마지막 남은 속방이자 그 질서 건재의 상징이었던 조선을 중화질서에서 분리시키는 것을 조약으로 공식화했다. 이를 또한 세계 열강이 다같이 공인했다는 점에서 중화질서의 종언은 최종적이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376


 물론, 개화기 일본에서 보여진 변화의 움직임은 이후 천황을 정점으로 한 와(和)의 세계로 굳어지면서 군국화되면서 근대화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동쪽 끝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서쪽 끝이길 원했고 이러한 그들의 열망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단어를 통해 단적으로 알게 된다. 자신들을 검은 머리 서구인으로 생각하는 그들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를 통해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질서로부터 고립된 그네들의 처지를 생각해본다면 이해못할 바는 아닐 것이다.


 요컨대 일본에 1890년대라는 10년간은 국가기구로서의 천황제와 가족제도로서의 가부장제를 각각 헌법과 민법에 의해 제도적으로 확립한 시기였다. 그것을 일본 국민 전체의 뇌리에 획일적으로 주입시켜 천황제 국가체제를 일상생활 속에서 구현해내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근대적인 전 국민 의무교육제도였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227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에서는 이렇게 '조공-책봉'체제를 무너뜨리고 '조약'에 근거한 새로운 국가질서의 등장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무력에 의해 강요된 세계질서가 칸트주의에 입각한 국제조약이 아님은 너무도 분명하기에 이를 굴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에게 조약체제는 불평등 체제에 다름아니다.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조공체제는 불평등에 바탕을 둔 미개한 질서이고 서양의 국제법 체계는 주권적 평등에 기초한 말 그대로의 '만국공법'이었을지 모르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피차 일반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서양이 만국공법의 이름 아래 중국에 부과한 질서야말로 정치군사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경제에서까지 적나라한 이익의 관점에서 침탈적인 질서를 명분으로 감싸 강요하는 것이라고 인식했을 가능성이 많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307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에서는 서구세력의 중국 침탈 시 보여주었던 특성에 대해 언급한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인도 등지에서 벌어졌던 제국주의 세력간의 치열한 다툼 대신 중국에서는 철저한 협력과 이익분배가 행해진다. 시쳇말로 아편으로 혼미한 중국을 '다구리 치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시간이 흘러 깨어난 중국을 막기 위해 단합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사의 순환과 흥망성쇠(興亡盛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비서양 세계에 대한 서양의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적 진출은 매우 경쟁적이고 갈등적이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은 해외에서 식민지쟁탈을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이곤 했다. 이에 비해 서양 제국주의가 중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벌인 20년간의 전쟁의 과정은 매우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서양의 중국 침탈 과정이 서양 식민주의 전개과정의 일반 패턴과는 달리 '제국주의 카르텔'의 관점에서 분석되어야 하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이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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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의 사상 통제는 정풍운동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정풍운동은 당정간부의 업무 태도와 사업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공산당이 전 조직과 당원을 대상으로 학습과 자기비판을 집중적으로 전개하는 일종의 자체 정화 활동이다. 또한 정풍운동은 공산당 주석이나 총서기 등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전개하는 정치운동이기도 하다.

결국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전개하는 사상 통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공산당의 ‘선전 사상공작’이다.
선전(宣傳, propaganda)은 "사람의 사고와 감정, 궁극적으로는 행위에 영향에 미칠 목적으로 사회 정치적 가치를 전달하는 활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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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선전은 "중요한 상징의 조작을 통해 사회 전체의 태도를 관리하고, 여론을 통제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공산당만이 간부를 관리한다는 ‘당관간부(黨管幹部)’ 원칙은 공산당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원칙이다. 이것과 한 쌍을 이루는 원칙이 바로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관리(黨管意識形態)’ 원칙이다. 이는 공산당만이 국민의 이데올로기를 관리하고, 이에 도전하는 어떤 정치 세력이나 사회조직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이처럼 시진핑이 강조한 ‘당성 원칙’의 견지라는 선전 원칙, ① ‘정확한 여론 선도’, ② ‘단결 안정 고무’, ③ ‘정면 선전 위주’라는 세 가지 선전 방침은 공산당이 선전공작에서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기본 지침 역할을 하고 있다.

공산당 중앙 선전부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공산당의 관점에서 보면, 선전부가 정권 유지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그것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보면, 선전부는 중국에서 언론 및 사상의 자유를 저해하는 최대의 방해 요소일 뿐이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이 두 가지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이윤 창출을 위해 독자와 시청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공산당의 선전 기율과 보도 지침을 어느 정도 무시해야만 한다. 당정간부의 일탈 행위에 대한 비판 보도와 사회문제의 심층 보도, 선전성이 짙은 오락 프로그램의 방송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고 선전 기율과 보도 지침을 정면으로 위반할 경우는 검열과 제재로 경영자와 언론인 모두 생존하기 어렵다.

이 모든 제도를 합한 것보다 더 중요한 공산당의 언론 통제 제도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언론 보도 지침(news guideline)’ 제도다. 이는 한국에서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시기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언론 보도 지침 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산당은 이를 통해 언론매체를 일상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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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이 전개하는 국민 교육 운동 중에서는 세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첫째는 1986년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법률 지식 보급 운동’, 즉 ‘보법활동(普法活動)’이다. 둘째는 1986년에 시작되고 1990년대에 들어 확대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신문명(精神文明) 건설’과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核心價値?)’ 실천 운동이다. 셋째는 1994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사회주의 애국주의(愛國主義) 교육 운동’이다.

인사 통제와 조직 통제는, 비유하자면 사람을 ‘외면’에서 통제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내면’, 즉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숨기고 겉으로만 복종하는 척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외면’의 통제만으로는 이런 상황을 막을 수 없다. 공산당이 사람의 ‘내면’까지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산당은 이를 ‘사상정치공작’, 줄여서 ‘사상공작(思想工作)’ 또는 ‘정치공작(政治工作)’이라고 부른다.

정치국이 선정한 집단학습의 주제는 공산당이나 중국이 직면한 문제 또는 최고 지도자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를 살펴보면 특정한 시기에 어떤 주제가 공산당 지도자의 관심사였는지, 또한 공산당이 가장 중시하는 정책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가 있다. 이처럼 정치국 집단학습의 주제는 공산당의 정책 의도를 보여주는 ‘풍향계’ 같은 역할을 한다.

시진핑 시기가 후진타오 시기와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시 시기에는 외교와 관련된 주제를 6회나 학습한 점이다. 만약 외교와 안보(군사)를 하나의 주제로 분류하여 계산하면 모두 15회(안보 9회+외교 6회)나 된다. 반면 후 시기에는 외교가 학습 주제로 선정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안보(군사)는 4회가 있었다. 이는 시진핑 정부가 외교 안보 문제를 매우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시 시기의 정치국 집단학습은 공산당과 관련된 주제(17회)와 외교 안보 주제(15회)가 두드러지게 많다는 특징이 있다. 이 중에서 외교와 안보 주제는 ‘국제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후진타오 시기가 주로 ‘국내 문제’에 집중한 데 비해 시진핑 시기는 국제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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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 전통시대 동아시아 2천년과 한반도
이삼성 지음 / 한길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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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의 세계로부터 약 2천 년에 걸쳐 존재한 중국 중심적 동아시아 질서는 크게 두 방향의 '관계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중국 농경문화와 북방 초원지대에 근거를 둔 유목민족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과 한반도, 일본, 베트남 등 중국의 동방 또는 남방에 있는 사회들과의 관계축이다. 기본적으로 같은 농경문화권 사이에 발전해간 국제질서이다. 전자를 중국-북방축이라 하고, 후자를 중국-동남방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86


 이삼성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는 고대부터 17세기 병자호란(丙子胡亂) 시기 까지 동아시아 외교사를 정리한 책이다. 본문에서 저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으로는 '조공', 정치적으로는 '책봉'이라는 외교체제에 대해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 1907 ~ 1991),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 1919 ~ 1998), <요동사>에 나타난 김한규의 인식을 비교한다.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이들의 관점은 각기 독창적인 장점과 함께 한계점을 갖는다. 저자는 이러한 한계를 비판하면서 이를 종합하여 저자의 역사관을 형성하는데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은 이러한 저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동아시아의 고대 ~ 근세사다.


 중국대륙의 실체는 하나의 중앙정부의 팽창과 수축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대륙의 역사, 그리고 그 대륙과 한반도의 관계의 역사는 중화세력과 북방 민족들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의 함수였다. 한반도가 침탈의 대상이 된 역사적 조건은 중국 중원의 중앙정부의 힘의 함수가 아니라 중화세력과 내륙 아시아권의 북방민족들이라는 다행위자들의 역학의 함수였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223


  저자는 먼저 강력한 중앙정부로서 중국(中國)의 존재에 대해 회의(懷疑)한다. 저자에 의하면 중국은 단일한 한족(漢族) 중심의 대륙국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황하 이북의 초원 제국과 황하 이남의 농경 제국간의 치열한 공방이 우리에게 가해진 '대륙으로부터의 위협'의 실제 모습이었음을 말한다. 통일된 중앙정부보다 분열된 두 세력의 다툼이 역사의 실제라면, '조공-책봉' 체제는 어느 한 편의 절대우위에서 다른 편에 강요된 양상이 아니라 상호 인정을 통한 갈등의 봉합 체제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중국과 주변국 사이의 관계는 19세기 제국주의의 위계질서가 결코 아니었다.


 필자는 조공책봉체제(朝貢冊封體制)를 중국의 속방으로 불리면서도 실질적인 내적 자율성을 가진 국가들과 중국 사이에 전쟁과 평화를 규율하는 일종의 '안보 레짐'의 성격을 가진 외교제도였다고 정의하고자 한다.... 공식적 위계질서 안에서도 제국은 지배의 체제이다. 그러나 중화질서에서는 종속적 지위에 있는 국가도 내치(內治)에서 실질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외교에서도 일정한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지배의 양식이라기보다는 안보 레짐의 성격이 강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171


 저자는 이러한 동아시아 질서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않고 서구 제국주의 관점의 주종(主從)관계로 바라봤을 때 제대로 된 실체에 다가갈 수 없음을 지적한다. '형식적인 위계관계, 그렇지만 실제적인 독립관계'라는 동아시아 조공책봉체제의 이중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19세기 서구인들만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극우집단의 한국사 인식 또한 여기에 기반하여 끊임없는 자기 비하와 함께 한 걸음 나아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긍정하는 잘못된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저자의 이러한 지적은 분명 다시 생각할 부분이다.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은 법적으로 독립적인 행위자들(de jure independent actors)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사실상의 독립적 행위자들(de facto independent actors)이었다. 조공책봉체졔는 그들 사이의 행태적 역할을 처방하고 활동을 통제하며 기대치를 틀 짓는 일련의 지속적이고 상호 연관된 제도로서 이해될 수 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172


  조공책봉관계와 함께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부분은 일본의 특수성이다. 동아시아의 일원이면서도 지정학적으로 섬(島)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조공-책봉'이라는 동아시아 질서 안에서 경제적인 이점만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 일본의 특수성이다. 일본은 동아시아 질서 안에서 정치적인 관계를 선택적으로 맺을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상적인 자유가 부여될 수 있었고, 이러한 점이 반도에 위치한 고려-조선과 다른 점이었다.


 조공은 공물을 바치는 행위에 더하여 일반적으로는 중국황제의 신하를 자인하는 순종의 정치적 제스처도 포함한다. 그러나 왕위에 대한 중국의 승인을 구하는 것은 조공과는 별도의 의례인 책봉관계의 몫이다. 조선이 중국의 통일제국들인 명이나 청에 대해 맺었던 조공관계는 중국과의 정치적 신속의 관계인 책봉 체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실권자가 중국에 대해 취한 조공관계의 개념에는 책봉에 내포된 깊은 종속관계가 전제되지 않았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425


 조공책봉체제가 구축한 중화(中華)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주변국가 일본. 그들의 경계성은 그들을 오랑캐로 만들었지만, 반대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는 그들의 첨병(尖兵)으로 자임할 수 있었음을 본문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일본의 성리학(性理學)이라 하겠다. 책봉체계에 매어 있던 조선에서는 성리학적 질서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이단 시 한 반면, 정치적 구속이 없었던 일본은 독창적인 유학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점은 이후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앞서 나갈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질서에서 일본이 주변성은 오히려 일본에게 동서양의 전략적인 중간자, 그리고 이어 동아시아 질서에서 선진세력으로 도약하는 지정학적 조건이 된다. 일본이 근세 이후 동양과 서양 사이의 교량 또는 지정학적 중간자의 위상을 갖게 만든 것은 우선 일본의 독자성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함께 조선을 포함하는 중화권이 경제적 번영의 시기임에도 갖고 있던 정신적 내향성과 경제적인 비상업적 경향도 동아시아가 서양으로의 통로와 교량의 역할을 일본에 일임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420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에서는 이렇듯 조공책봉체제와 일본의 특수성을 통해 고대부터 근세 중반기에 이르는 동아시아 외교사를 인식하는 틀을 제공한다. 독자들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조공-책봉'의 관계를 통해 경제적-정치적 동맹은 분리되어 접근할 수 있으며, 오히려 분리되어 실리를 취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체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었을 때 빚어지는 참담한 결과가 삼전도의 비극임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일본 고학(古學)파는 이토 진사이(伊藤 仁齊, 1627 ~ 1705)와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 ~ 1728) 등의 학문과 그들의 제자 및 동조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주자학과 그것을 비판한 양명학(陽明學) 모두를 극복하고자 했다(p649)... 일본 고학은 고유한 비판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일종의 비판철학이라고 할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론을 개발하였다. 중국의 고전사상을 이해하는 데서 주희 등 기존 중국 유력 사상가들이 구축해 놓은 정설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방법론이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650


 과거 동아시아 정치 질서에는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던 만주 등 대륙 세력이 하나의 극점이었고, 대륙과 육로로 연결된 우리는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신 경제적 이익만을 선택적으로 취할 수 있었던 것이 일본의 지정학적 이점이었다면, 미국-중국의 양강(兩强)의 영향력이 충돌하는 진공상태에 놓여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라면, 과연 과거와 같이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외교를 펴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까... 이는 한 번 생각할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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