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자유주의를 편협하게 영국과 미국의 독점물로 다루지 않고 프랑스와 독일의 자유주의 전통에도 마땅히 비중을 둠으로써, 이 네 나라 모두를 대표적이지만 배타적이지 않은 핵심으로 다룬다. 논쟁의 에너지는 자유주의의 목표와 이념이 엄밀하게 말해서 서구적이고, 세속적-계몽적이고, 부르주아적-개인주의적이고, 친자본주의적 혹은 (남용되는 유행어를 사용하자면) 어설프게 세계주의적임을 드러내 보이는 데 집중된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곤경에 대한 실천적 대응으로 생겨났다. 이는 과도한 권력에 의지하지 않는 동등한 시민들 사이에서의 인간적 진보라는 윤리적으로 수용 가능한 질서를 제시했다. 그것은 국가든 부든 사회든 우월한 권력에 의해 휘둘리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는 근대적이고 냉정한 사람들에게 특히 설득력을 발휘했다. 자유주의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것을, 그리고 사람들과 사람들의 기획을 동등하게 존중할 것을 제안했다.

자유주의는 희망과 악몽을 사회에 대한 바람직한 그림 속에 용해시켰다. 즉, 상충하는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는 신념들이 제거되지는 못하지만 행운과 현명한 법 덕분에 부단한 충돌이 혁신과 논의와 교류라는 환영할 만한 결과로 전환될 수 있는 그런 공간, 자연적 조화가 부재하는 비친교적 공간으로서의 사회를 그리는 데 용해시킨 것이다. 충돌이 평화로운 경쟁으로 이어지는 그림은 어떤 혼란스럽고 유동적이며 늘 놀라움을 안겨주는 사회를 자유주의자들에게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었고, 따라서 어느 정도는 정당화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자유주의의 지도 이념 가운데 저항과 시민적 존중은 서로를 보강했다. 시민적 존중과 진보는 긴장 속에서 서로를 끌어당겼다. 첫 번째 쌍의 경우, 저항과 시민적 존중 각각은 권력과 국민의 적절한 관계에, 단 서로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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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 와서는 헌법 9조의 명문 개정이 없이, 일본이 직접 공격받지 않았는데도 타국 간의 전쟁에 참가할 수 있게 될 정도로 평화헌법이 왜곡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180도 전환을 감추는 키워드가 된 것이 ‘적극적 평화주의’였다.

원래는 오자와 이치로가 전수방위를 독선적인 ‘소극적 평화주의’, ‘일국 평화주의’라고 규탄하면서 그 반대급부로 대치된 개념이었다. 하지만 공식적인 정의가 없기 때문에 자칫 그 내용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포인트는 제멋대로 ‘평화주의’의 일종이라 자칭하면서 헌법 해석을 변경해버리면 이에 따라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일본에서의 역사수정주의의 고양은 바야흐로 국제적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복고적국가주의 경향이 비단 일본만의 일은 아니라 해도 야스쿠니 사관에 대한 공감이나 찬동이 해외에서 얻어질 전망은 전무하며 금후 일본이 고립되어버릴 단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에 비해 경제 정책이나 안보 정책의 ‘개혁’ 면에서 아직 일본은 세계적으로 봤을 때 뒤처져 있으며 불충분하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국내적으로 보면 이미 격세지감이 솟구칠 정도로 이러한 분야에서도 일본은 이미 우경화되었지만, 국제적으로는 아직 ‘보통 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냉전의 종언과 함께 55년 체제의 보혁 대립이 해동되자 정당 시스템의 유동화를 거쳐 소선거구제의 작용에 의해 양대 정당제가 등장하고 유권자들에 의한 정권 선택을 통해 신우파 전환이 강화시킨 국가권력에 대한 체크 & 밸런스 기능이 행해질 거라고 기대되었다. 그러나 대체정당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던 민주당의 붕괴에 의해 전후 한 번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정치 시스템이 밸런스를 상실하고 수상관저에 집중된 거대한 권력만이 고삐 풀린 형태로 신우파 통치 엘리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지금 그것이 심지어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좀먹는 반자유 정치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도에 넘치는 역사수정주의로 자칫 일본의 국제적 고립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의 현실이지 않을까

두 번째는 리버럴 세력이 신자유주의와 결별하는 것이다. 기업주의나 이기적 욕망이나 정념 추구를 정당화하는 도그마에 빠진 신자유주의는 실은 자유주의도 그 무엇도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개혁이 초래한 정치 경제의 과두 지배는 폭력이나 빈곤, 격차 등 오늘날 개인의 자유나 존엄을 위협하는 최대 원인이 되고 있다.

신우파 전환이 시간을 들여 파괴해온 자유민주주의의 여러 제도들을 다시금 만들어 세우는 동시에 리버럴 세력이 신자유주의 도그마와 결별하고 좌파 세력이 자유화·다양화를 한층 추진함으로써 민중적 기반을 넓혔을 때, 비로소 리버럴 좌파 연합에 의한 반전 공세가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검찰청이 주도하고 매스컴이 부채질했던 ‘정치와 돈’의 문제는 야당 시절부터 거의 일관되게 민주당만을 계속 뒤흔들었고 하토야마가 수상을 사임하는 한 요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오자와의 처우를 둘러싸고 민주당을 완전히 갈라놓는 데 성공했다.

신자유주의든 국가주의든 실제로는 이미 간판이 다 떨어져 버렸다. 이미 트랜스내셔널한 엘리트들에 의한 글로벌한 과두 지배가 국민 국가를 공허하게 만드는 현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된 지금, 금후 반미 복고주의에 의해 일본을 더더욱 ‘되찾자’라는 목소리가 우경화에 박차를 가해갈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대로 대체정당 없이 신우파 연합의 폭주가 계속된다면, 우경화의 다음 스테이지는 대미 추종 노선으로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을 데까지 복고주의적 국가주의 정념이 분출하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조건은 선거제도의 재검토, 즉 소선거구제 폐지를 중심으로 한 선거제도 개혁이다. 애당초 일본에서 소선거구제를 도입한 경위를 보면 의도적으로 사표가 많은 제도를 만들어 정당제 과점화를 ‘양대 정당제화’라는 미명 아래 추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고의적으로 과점 시장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권자와 정당 정치가의 관계를 자유 시장에서의 매매에 비유하는 유추analogy는 처음부터 파탄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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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정권의 막을 그토록 어이없는 모습으로 마감했던 아베가 놀랄 정도로 화려하게 복권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 번째는 신우파 전환이 관철되어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의회 자민당이 야당으로서 더더욱 우경화되었다는 현실이었다. 자민당 내에서 구우파 연합을 지지해온 비교적 온건하고 리버럴한 ‘보수 본류’의 고치카이와 게이세이카이의 계보는 이미 흔적도 없이 약체화되어 있었고 그를 대신하여 ‘진 보수’를 자칭하는 신우파 연합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정치 개혁 이후 추구되어온 ‘정치의 자유화’ 즉 유권자의 정권 선택이 가능한 경쟁적 정당 시스템이, 민주당 정권의 좌절과 함께 붕괴된 것이었다. 2012년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압승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던 것은 민주당의 괴멸적인 대패였다. 민주당은 2005년도에 참패한 우정 민영화 선거 때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겨우 57 의석에 그치는 대패를 맛봐야 했다. 자민당이 승리할 거라는 것은 노다가 해산 총선거 결단을 내리기 이전부터 이미 명백했다.

아베 입장에서 실로 다행스러웠던 것은 관료제나 재계, 그리고 산케이·요미우리 등 보수 미디어들이 민주당 정권에 완전히 넌더리를 내며 두 번 다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 정권을 보필할 자세를 취했다는 점이었다. 또한 실제로 현실에서 민주당이든 다른 당이든 저항 세력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민당 내외로부터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힘든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생채기가 여전히 선연했던 동일본 대지진과 원자력발전소 사고도 당장은 민주당 정권의 대응이 얼마나 미흡했는지를 오로지 나열할 뿐이었다. 이에 따라 역대 자민당 정권이나 아베 현 정권의 책임을 면해주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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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국가주의는 공통적으로 ‘리얼리즘’을 그 세계관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양자 모두, 자기 이익이나 자기 보전을 추구하는 행위자의 거래나 투쟁에 의해, 누가 무엇을 얻는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지가 결정되는,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유 경제’가 사회의 저항을 배제해가며 새롭게 창출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강한 국가’가 요청된다. ‘세계에서 가장 기업이 활약하기 쉬운 나라’(2013년 제183회 국회에서의 아베 총리 시정 방침 연설)란 보수 통치 엘리트들이 권력을 집중시킨 상태에서 ‘개혁’을 실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보수 통치 엘리트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전후 민주주의를 짊어왔던 정치 세력이나 제도가 방해가 된다. 그리고 전후 민주주의를 지탱해왔던 것은 노동조합이나 그 지지를 받았던 정당이었고, 이러한 혁신 세력과의 계급 간 타협을 통해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길을 선택했던 55년 체제에서의 ‘보수 본류’, 즉 ‘구우파(올드 라이트)’ 연합이었다.

신우파 전환이 진전을 이루고 이른바 그 정적에 해당하는 혁신 세력과 구우파 연합이 제각각 1990년대 중반이나 2000년대 초반까지 와해되어버리자, 신우파 연합이 애당초 주장했던 ‘자유’의 가치는 급속히 그 내실을 잃어갔다. 승리를 거둔 가운데 신우파 연합은 변용되어버렸던 것이다.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해나가기 위해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중국이나 한국을 ‘배려’해야 한다는 국제협조주의의 대전제가, 나카소네의 국가주의적 지향의 확대를 억제하고 있었다.

애당초 오히라 정권에서는 안보 측면에서의 대미 협조와의 긴장을 내포하면서 그것과 밸런스를 유지하는 형태로 구상되었던 것이 경제 문화 측면에서의 국제협조주의였다. 또한 그 양자를 통합시켰던 것이 그의 ‘종합 안보 전략’이었다. 거기에서 미일동맹 강화로 보다 중점을 옮겨놓았던 것이 나카소네였다. 그리고 유엔 중심주의 포즈를 취했지만 군사적 측면으로 국제협조주의를 확대 해석해갔던 것이 오자와였다.

하시모토 이후(오부치, 모리 요시로) 중국, 러시아, 한국 등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외교 노력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애당초 경제 문화 교류 등을 중시한 다국 간 협조를 지향했던 국제협조주의가 군사와 경제 양쪽에서의 대미 추종이라는, 상당히 본 취지와 거리가 먼 내용으로 바뀌어가는 전환점이 도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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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와 같은 중국과 국제사회 간의 인식 괴리가 지속된다면, 양자 간의 상호 이해와 소통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이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중국의 ‘오만함’과 ‘공격성’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사회의 비판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는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지역의 소수민족 탄압, 홍콩 민주화 운동 탄압, 대만에 대한 무력 시위 확대, 남중국해 일부 섬의 군사기지화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현재까지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중국인들은 ‘소극적 측면’이 초래하는 부정적 결과에 불만을 느끼기보다는, ‘적극적 측면’이 초래하는 긍정적 결과에 더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에게 공산당 영도 체제는 비민주적이고 낙후된 ‘권위주의’라기보다는, 중국의 상황과 조건에 맞게 운영되는 ‘중국 특색의 민주주의’로 보일 수 있다. 공산당 선전이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이 커다란 사회경제적 위기나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여 공산당 지도부가 현재의 통제 기제로는 국가와 사회와 인민을 제대로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전까지는, 또한 그런 위기를 맞아 중국인 대다수가 현재의 통제 기제를 불신하고 거부하는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공산당 통제 기제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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