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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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이스하키단일 뿐이다. 운동경기일 뿐이다. 환상일 뿐이다

p.203


아이스하키는 우리 나라에 익숙한 스포츠는 아니다. 게임룰도 낯설고 영화에서 본 산더미만한 덩치들이 한데 엉켜 으르렁거리는 장면만 기억난다. 선수 뿐 아니라 관중까지 열광의 덩어리로 불타오르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오베라는 남자』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작가로 등극한 프레드릭 배크만이 차가운 얼음위의 스포츠를 소재로 책을 냈다. 전작 『베어타운』에 이어 올해 『우리와 당신들』이 출간됐다. 스포츠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 머리 속에 일정한 틀을 가진 공식이 떠올랐다. 기댈데 없는 가난한 환경에 처한 천재적인 재능의 선수가 약점은 있지만 뛰어난 지도자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승리하거나 그에 준하는 인간적 성장을 이루는 인생역전 드라마. 이야기꾼 프레드릭 배크만이 스포츠 드라마를 어떻게 변주할지 궁금했다.


작디 작은 퍽 하나를 두고 온 몸으로 싸우는 경기 아이스하키에 일 년 삼백육십오일을 넘어 평생을 몰두하는 마을이 있다. 베어타운이다. 스포츠는 경기에 직접 참가하는 선수뿐 아니라 보는 관중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환상이다. 결과가 나오는 마지막 희비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지금의 삶이 아니라 누렸어야 하는 다른 삶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도시와 마을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그들의 엄청난 이야기를 이이해하고 싶으면 소소한 이야기부터 귀담아 들어야 한다.

p,96


『우리와 당신들』은 무엇보다 편견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가 타인에게 갖는 편견과 우리가 우리에게 갖고 있는 편견. 우리는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진정으로 객관적인 입장이 될 수 있을까. 또 틀렸다고 반대하거나 싫어하는 일에는 그럴만 한 근거가 있는 걸까. 하키를 유일한 인생의 낙으로 섬기는 베어타운은 선수가 저지른 불미스러운 일로 찢기고 분열된다. 전작 『베어타운』이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일이 옳은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우리와 당신들』은 우리와 다른 누군가를 포용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베어타운』의 주요 조연이었던 선수 벤이와 사건 피해자 마야를 비롯한 모든 인물들이 타인이 만들어 놓은 인물틀을 뚫고 자신의 인생을 찾아 나간다. 남성성을 분출하는 하키 선수라는, 문제를 일으킨 ‘계집애’라는, 선수단과 마을을 뒤에서 조종하는 훌리건이라는, 여자를 좋아하는 코치라는 견고한 틀을 벗어버린다. 여자 코치 사켈은 현실에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는 불공평한 게 공평한 것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현상이지.”(p.438)라고 인정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다. 어떤 일에도 한 가지면만 존재하진 않는다. 주정뱅이 술집 주인 라모나을 말처럼 다름을 알아보려면 시간과 분별력이 필요하다.


“……요즘은 인간들이 두 부류로 나뉘거든.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부류와 분별력이 좀 더 필요한 부류. 두 번째 그룹은 가망 없지만 그들의 머릿속에 분별력을 때려 넣기 전에 첫 번째 그룹이 몇 명이나 되는지 먼저 파악해야 하는지 몰라.”

p.463-464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저들과 다르지 않을지 모르고 저들도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용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좌우되는 삶을 사는 우리는 그래서 서로를 용서하기 어렵지만 또 그래서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다. 산골마을 베어타운이 그나마 자부심을 가질 수 있던 것은 그들의 아이스하키팀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배척하는 사이 팀은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하지만 누군가의 피 앞에서 서로를 보살피는 지혜를 터득한다. 사람들은 서로를 책임지며 다시 함께한다. 대척점에 있었던 당신들이 우리의 곁으로 와 함께하는 삶이다.


베어타운 사람들은 세상이 단순하다고 큰 소리 치지 않았다. 인생 자체에 삶이 녹다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거의 무의미한 무언가를 전혀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외칠 자격이 있다.


“그래서 뭐! 원래 힘든 거야. 안 그러면 대도시의 아무 새끼들이나 할 수 있게?”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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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의 독서 - 김영란의 명작 읽기
김영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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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쓸모』의 확장판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 이 책이 전작의 후속작이라고 썼지만 『토니외 크뢰거』와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가 겹쳐들면서 같은 책을 더 길게 다시 읽는 기분이 들었다. 다루는 작가와 책들이 다르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도 차이가 있지만 저자의 차분한 문장과 편안한 분위기가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 것같다.


『시절의 독서』는 저자의 삶의 경로에 따른 독서의 흐름을 따라 구성한 책이다. 저자가 살아온 시절을 책 꾸러미로 대신 보여준달까. 저자는 "책에서 세상과 싸울 무기를 구하기보다는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세상을 납득해보려는 도구를 찾아왔다"고 말한다. 『책읽기의 쓸모』에 이어지는 설명이다. 저자는 대법관이라는 전문직을 수행하면서 주부로 양육자로의 역할에 충실한 한편 다독가로서 자기 자리도 놓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싶다. 그러나 저자가 책에서 보여주는 작가들의 생애를 보면 '김영란 대법관'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김영란 저자' 될 수 있었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저자는 끊임없이 읽었고 그 읽기를 삶에 적용했다. 독서를 '현실 도피'의 일환이 아닌 진실 탐구의 '도구'이자 '무기'로 삼은 것이다. 저자는 '거짓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거짓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작가 어슐러 K. 르 귄의 말에 의지했다.


루이자의 경우, 어린 시절 가족들이 모여서 가상의 세계를 짓고 부수고 한 놀이들이 상상력을 키워주는 데 강력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반론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더 자라서는 이웃에 살았던 아버지의 친구들이 루이자의 상상 속 세계를 보편성을 지닌 세계로 끌어 올리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루이자의 어깨를 무겁게 만든 가족들이 결국 그녀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

p.48


책에 소개된 저자 김영란의 '시절'을 통과한 작가는 모두 8명이다. 루이자 메이 올컷, 브론테 자매들, 버지니아 울프, 도리스 레싱, 마거릿 애트우드, 카프카와 쿤데라, 커트 보니것, 안데르센이 그 면면이다. 다독가의 빽빽한 책장에서 골라 모셔온 작가들이터. 저자는 다수 작가들의 생가 또는 기념관을 방문했다. 일 때문에 출장을 가도 작가들을 잊지 않고 찾아다닌 모양이다. 작가들이 어떤 환경에서 생활하고 글을 썼는지를 저자 자신의 방문기를 통해 보여준다. 루이자 메이 올콧의 콩코드, 영국의 브론테 박물관, 덴마크의 안데르센 생가를 묘사한 글은 각각의 작가들에 대한 이미지를 구체화시켰다. 문학 작품을 만들어낸 '보이지않는 신의 손'처럼 느껴졌던 작가들이 '몸'을 가진 인간의 형상으로 파악되면서 그들이 남긴 문학이 더 현실감을 지닌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브론테 형제자매들의 작은 책 만들기는 맏딸 마리아와 둘째 딸 엘리자베스가 죽은 후 시작되었다. 살아남은 아니들은 작은 책을 만드는 일에 집착했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작은 책을 만드는 일에 집착했따. 아이들은 죽음을 극복하는 행위로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죽임을 당한 인물들이 정령의 마법으로 되살아나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 정령들은 바로 브론테가의 아이들이었다.

p.57 


루이자 올컷이나 브론테 자매처럼 함께하는 가족이 꿈을 꾸는 계기를 주고 꿈을 꿀 수 있게 단련까지 해주었던 경우와는 달리, 버지니아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벗어나서 접하게 된 블룸즈버리그룹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부모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던 버지니아에게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블룸즈버리그룹이 주어졌다.

p.112


저자가 다룬 작가들은 서로서로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 『작은 아씨들』의 루이자 메이 올컷은 샬롯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의 열렬한 팬이었고 버지니아 울프는 어느 시점에 브론테의 생가를 순례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싸우기를 단념했던 '집안의 천사'와 치열하게 맞닥뜨렸던 작가는 도리스 레싱이었고 마거릿 애트우드는 『금색 공책』을 읽고 레싱의 위대함을 선언했다. 애트우드가 상상했던 엄혹한 미래는 이미 카프카와 쿤데라의 세계에서 예견되거나 확장됐다. 이렇게 작가들의 세계는 어느새 저자 김영란을 구성하는 일부가 됐다.


(…) 그들의 삶에 대한 사유는 종내는 나의 사유가 되었다. 비록 그들의 삶이 나의 삶의 시간을 구성했지만 결국 나는 그들을 관찰하는 사람에 불과했다는 것이 이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의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글을 마칠 무렵이 되자 결국 책을 통해 만난 그 모든 사람들이 내 삶에 들어와 있는 인물들이며 나였다는 생각 또한 든다.

p.268


김영란 저자의 책이 놀라운 건 그가 전'대법관'이었던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저자는 전문직 여성으로서 일을 놓지 않은채 가부장적 질서에 맞춰 가정을 꾸렸다. 그의 독서는 모두 그 과정에 이루어졌다. 읽은 것을 자신의 사고 체계로 수렴하고 책과 책, 저자와 저자를 연결해 더 깊은 인식의 세계에 들어섰다.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이 생각난다. 진리를 찾는 인물들의 사상과 일대기를 연결하고 연결해 거대한 감동의 그물망을 짜냈던 포포바처럼 김영란 저자도 읽어온 책과 사람을 엮어 자신의 시절을 그려냈다.


간신히 집안의 천사와 싸워서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둔다 해도 유령과 바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인습과 편견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

버지니아는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했지만 도리스는 이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쳤고 마지막까지도 이 문제에 몰두했다. 도리스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처럼 20세기 작가들에 대한 러시모어산에 새겨질 인물로 꼽힐 수 있게 된 까닭은 이런 좌절의 경험을 진솔하게 써내려가서 버지니아가 말한 두번째 문제의 뿌리까지 파고들어갔기 때문이다.

p.154


읽는 일과 쓰는 일은 별개다. 저자처럼 읽는다고 누구나 이런 책을 쓰지는 못한다. 두 권의 책을 통해 저자의 놀라운 읽기에 대해 알고 나니 저자의 쓰기가 궁금해 진다. 그는 어떤 경로로 이런 쓰기에 도달하게 된 걸까. 일기를 썼을까, 메모를 썼을까, 필사를 했을까. 틈틈이 썼을까, 시간을 정하고 썼을까. 어릴 때부터 쓰기도 좋아했을까, 어느 날 쓰는 재능을 발견했을까. '쓰기의 쓸모' 아니면 '시절의 글쓰기'를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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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아메리카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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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초두, 미합중국이 붕괴되었다…

『헬로 아메리카』 中


『헬로 아메리카』는 1981년에 초판이 발행된 소설이다. 에너지 고갈과 인위적인 환경 변화로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나는 원정대의 행로를 그린다. 책을 읽기 시작한 후 몇 페이지 못가 애잔함이 느껴지는 문장을 발견했다.


웨인의 눈길은 도시의 나이 든 가부장이라 할 수 있는 옛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머물렀다.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기둥도, 월가에 군림하며 네온사인으로 메카 방향을 가리킨다는 200층짜리 OPEC 타워도 보였다.

p.10


2020년 뉴욕 스카이라인에서는 지워진 세계무역센터가 밸러드의 소설 속 폐허 속에는 여전히 건재했다. 모든 거주민이 떠나고 광석 먼지만 가득한 도시에서도 굳건히 서있으리라 믿었던 초고층 빌딩이 종교를 앞세운 갈등으로 파괴된 것이다.


소설은 북아메리카 대륙 멸망 이후에 도착한 탐험가들의 모험기다. 물 속에 가라앉은 자유의 여신상은 더 이상 미국의 자유가 이전같은 모습이 아님을 상징한다. 미국은 탈출 행렬에서 낙오한 소수의 사람들이 '원주민'이 되어 태고적 부족 사회의 모습으로 사는 곳이 되었다. 유럽의 원정대에 밀항한 주인공 웨인은 꿈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떠나기 전에 친부를 찾는다는 이유를 앞세운 탈출의 열망을 가졌다면 멸망의 잔해 위에 상륙한 뒤에는 '원정대 대장'을 목표도 했다가 '미국 45대 대통령'의 꿈을 꾼다. 등장인물들은 각자가 미국 땅에서 이루고자 하는 숨겨진 속내를 가지고 있다. 미국 대륙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탐험 또는 방랑 속에서 서로의 욕망은 상대를 돕기도 부딪히기도 한다.


원정대 일행은 원시림으로 변한 사막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 북미에 마지막으로 남은 문명지를 발견한다. 그곳은 타인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질병"으로 여기는 맨슨이 다스리는 도시다. 그는 자신이 세운 왕국을 타인의 손에서 지키기 위해 미대륙 전체를 희생시키려 한다. 광기에 휩싸인 맨슨의 모습은 재난의 상황에서도 혼자만의 천국에 갖힌 지도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모두가 갈망하는 에너지를 자신의 환상을 실현하는데 소모하고 파괴할지언정 자신만의 국가를 나눌 여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맨슨이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모습을 한 로봇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에서 작가의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권력이 권력을 응징하는 모습인 동시에 권력자의 모습을 본 뜬 가짜가 살아있는 권력을 처벌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못한 지도자의 자리는 인형의 힘에도 위태로운 법이라 해석해보면 어떨까.


모든 희망을 버리고 예고된 죽음을 바라보던 웨인은 천신만고 끝에 죽음의 도시에서 탈출한다. 그리고 다시 꿈을 꾼다.


벌써 그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었다. (…) 언젠가 백악관에 당당히 입성해서, 자신을 예비한 행동이라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청소했던 그 집무실에 앉으리라. 수정으로 빚어낸 비행기를 타고 취임식 자리에 도착해서, 최초로 비행기 위에서 취임 선서를 하는 대통령이 되리라. 옛 꿈은 죽었다. (…) 새로운 꿈을, 진짜 미래에 어울리는 꿈을 꿀 때가 되었다. 선라이트 플라이어 편대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꿈을.

p.364


'아메리칸드림'은 계속된다. 재연 재해와 인간의 욕망으로 초토화된 땅에서도. 밸러드는 "아메리칸드림에 숨겨진 논리를 따라가면 결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핵 룰렛을 즐기는 맨슨 대통력으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작은 기회만 있어도 "낙관론과 자신감"을 버리지 않는 웨인이 제45대 대통령이 되는 옛 꿈이 아니라 "진짜 미래"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꿈"을 이루는 것이 작금에 걸맞는 '아메리칸드림'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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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피플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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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세대의 프롤레타리아우리는 신세대의 프롤레타리아

우리는 신세대의 프롤레타리아

『밀레이엄 피플』 中


2003년 출간된 『밀레니엄 피플』은 중산층 혁명을 탐색하는 심리학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소설이다. 겉으로 보아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는 첼시 마리나의 주민들이 어느 순간 각성해 자신들을 억압하는 사회 시스템에 저항한다. 안온한 하루하루에 만족했던 사람들에게 주위를 돌아보라고 삶의 실체에 눈뜨라고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 중산층의 일상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일깨우기 위해 혁명 주모자들은 '의미없는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주인공 데이비드 마컴은 전처의 갑작스런 사고 원인을 파헤치던 중에 중산층 혁명의 중심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혁명이 갈수록 폭력성을 더해가는 가운데 자신이 그들에게 유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밀레니엄 피플』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자 문제는 '중산층 혁명'이라는 개념이다. '혁명'은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을 말한다. 기존의 것을 무너뜨릴만큼 불합리한 무언가가 쌓여야 시작될 수 있는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흔히 '중산층'은 누릴만큼 누리는 계층을 의미한다. 아주 상층도 아니지만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할 정도도 아닌 전문직 종사들 말이다. 이들이 굳이 '혁명'을 일으킬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는 교육에 의해 순치된 중산층이 자신들의 상태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100년 전의 공장 노동자와 똑같"은 "노예"가 돼간다고 쓰고 있다. 전문직 종사자들은 그 필요성이 다할 때면 사회에서 밀려나고 재개발이 시작되면 주거지에서도 쫒겨날 상황이다. 번듯한 중산층의 모습은 겉치레일 뿐이다. 밸러드는 중산층의 허위와 함께 혁명의 당위를 드러내지만 혁명의 주체를 영웅화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고통은 진짜입니다. 많은 가구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케이나 리처드 굴드의 말을 듣고 자신의 삶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들은 사립학교가 아이들을 세뇌해서 온순하게 사회에 적응하도록 만들고 소비 자본주의 사회라는 허상을 이끌어 가는 전문가로 개조하는 시설이라 여깁니다."

(…)

"명확한 악당은 없습니다. 제체가 자율적으로 작동하니까요. 우리가 품고 있는 시민의 책임감에 의존해서 말입니다. 그게 사라지면 사회는 무너지겠지요. 사실 벌써 붕괴가 시작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pp.171-172


불안한 현실을 일깨우기 위한 소소한 폭력 행동은 갈 수록 격해져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데 혁명의 주모자 리처드 굴드는 점점 더 폭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혁명 세력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고 격화돼 가던 혁명은 경찰의 대대적인 개입으로 진화된다. 소설의 결론은 혁명의 실패를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게 보인다. 애초에 혁명에 접근했던 이유와 별개로 마컴과 그의 아내 샐리가 첼시 마리나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특히 마컴은 자신의 상류층 생활의 토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샐리의 경우도 불합리한 사고의 희생자로 사는 삶을 이해하고 자립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그러나 가구는 모두 원래 위치에 있었고, 바뀐 것은 내 시점뿐이었다. 자유를 맛본 나는 세인트존스 우드의 삶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 있는지, 얼마나 불합리하게 상류층의 냄새를 풍기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p.313


가장 인상적인 변화는 스티븐 덱스터 목사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 필리핀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부조리한 폭력에 믿음을 잃었던 그는 굴드의 폭력을 자신의 손으로 제압한 후 성직에 대한 "열정과 신실함"을 되찾는다. 비록 그의 행동은 종교적이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가 막은 피해를 고려한다면 신도 용서하지 하리라는 믿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내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바이저를 들어 올렸던 그 짧은 순간의 스티븐 덱스터였다. 내가 본 얼굴에는 그를 처음 성직으로 이끈 열정과 신실함이 깃들어 있었다. 가해자들의 채찍 아래서 잃어버렸고, 자신만의 가혹한 혜인을 가졌지만 자격을 박탈당한 상담사의 격려를 받으며 이 서부 런던의 주택단지에서 찾아 헤맨 그 열정과 신실함이.

p.470


『밀레니엄 피플』의 중산층 혁명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 없어 보이면서도 모든 것이 변한 그야말로 '대혁명'이었다. 생각이 변한 이후엔 아무 것도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출판사도서모임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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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 - 남성문화에 대한 고백, 페미니즘을 향한 연대
박정훈 지음 / 내인생의책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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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정훈 기자가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남자들을 향해' 쓴 글을 묶은 책이다.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어이없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제목을 보고 떠오른 여러 상념 중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자영』의 에피소드 한 대목이 있었다. 학원에서 몇 번 마주쳤던 남학생을 보고 정색하는 주인공에게 "네가 먼저 웃지 않았냐"고 반문하는 장면이다. 유인물을 앞에서 뒤로 전달하는 과정에 무의식적으로 지었던 표정을 '유혹'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이 부분을 읽고 너무 소설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많았을까, 드물지 않은 일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을까. 여성이 말하면 주제를 모르고 오버한다고 여겨질 말을 남성 저자가 속 시원한 문장으로 적었다.


"스스로 특권을 누린 '가해자'였음을 인정하고, 폐미니즘을 통해 성찰하고 변화하자는 내용"을 담은 책 속의 글들은 크게 '관계', '젠더 폭력과 역차별론', '일상 속 여성혐오', '반성'이라는 주제로 나눴다. "남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던 일들이 왜 여성혐오인지 밝히고", "여성과 평등한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새로운 남성성'" 을 탐구해보고자한 결과다.


일관된 맥락으로 써나간 글이 아니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시의성있는 사례를 그때그때 담아낸 글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저자는 사회적인 이슈와 드라마와 영화같은 문화 컨텐츠, 소소하게는 자신의 블로그에 달린 댓글을 소재로 삼아 글을 풀어나간다. 일상 사건에 담겨있는 여성 혐오의 시선을 잡아내기도 하고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여성'이 어떻게 왜곡되게 이용되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붙어 있는 소제목이 또한 일품이다.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을 눈에 띄게 뽑아내느라 쏟았던 노력이 여기서 빛을 본 듯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저년'과 '화냥기'라는 말 없이는 예술 못 하나요?", "경찰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너무 진지한 페미니즘을 파기엔 부담스럽고 여성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은 한 쪽 입장만 보여주는 것같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 혐오가 작동하는 현장을 기자다운 현실감각을 발휘해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SNS 소통을 목적으로 쓴 글이라 가독성이 높다. 저자가 가독성이 높다는 말을 마냥 칭찬으로만 받아들일 것같지는 않다. 저자는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글, "불편한 글"을 지향했다. "읽기 쉬운 글"이란 생각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기존 질서에 부합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담은 글은 문장의 수월함과는 다른 독해의 어려움을 수반한다. 그러나 박정훈 저자는 '납득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문장을 썼다. 담고 있는 내용이 걸림없이 머리에 들어온다는 얘기가 아니라 문장 자체가 읽기 쉽다는 말이다.


안정된 사회적 위치에 오른 '중년 비장애인 남성'이 읽기 쉬운 글, 애쓰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는 글, 마냥 흡족해하는 글만 나오는 사회는 불행하다. 그들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권력을 고착화하는 반지성주의 행태가 지속되면 '불편한 글'은 더욱 나오기 힘들어진다.

(…)

그들은 '나와 다른 시민'들과 연대는커녕,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당연히 혐오와 적대 의식만 쌓인다.

pp.172-173


책의 마지막 꼭지의 소제목에서 '남성들이 함께 부끄러워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저자의 '반성'이 남성들에게 가 닿는 일은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생득적으로 쥐어지던 '보편'과 '정당'의 위치를 인식하기도 어렵거니와 그것을 아무런 이유없이 포기할 기득권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저자의 말처럼 "독자 중 단 한 명만이라도 설득할 수 있다면, 아니 조금 부끄럽게만 할 수 있어도" 다행이다. 눈에 띄는 변화는 그리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일상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아주 느리게라도. 큰 기대는 버리되 주위의 작은 기적들을 소홀함 없이 눈여겨보는 일이 지금의 최선이 아닐까 싶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던 적이 많았다. 여혐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도 내면화했고, 남성으로서의 편리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다. 여전히 남성에게는 숨쉬듯 당연하지만, 여성은 얻기 힘든 부당 이득을 누리고 있기도 하다. 이런 사람이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며 "여혐하지 마시오"라고 준엄하게 누군가를 꾸짖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웠다.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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