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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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은 서른 두 살의 천문학자 지연이 서울을 떠나 천문대가 있는 희령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빛이 없는 어두운 산골을 배경으로 하려다보니 천문대를 떠올렸고 지연에게 천문학자라는 직업을 부여하게 됐다고 했다. 밝음을 멀리한 산을 올라 새카만 하늘을 끝없이 바라보는 일은 마음이 외로운 사람은 하기 어려울 듯 하다. 마음 속 심연에 더해 눈 앞에도 암흑이 펼쳐진다면 외로움은 치유되기 힘들테니. 그래서일까. 우주를 연구하는 현실의 천문학자 심채경 박사는 유난히도 밝은 사람이다.


천문학의 매력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며 깨닫게 됐다. 우주적 신비를 설명하는데 온갖 인문 고전이 인용돼 있는 걸 보고 놀랐고 그런 비유를 통해 머리 위 하늘 넘어 어딘가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었다. 그러나 관심은 거기까지. 칼 세이건에 비견될 만큼의 문학적 필력이나 쉬운 서술을 만나지 못했다.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보다는 좀 쉬운 대중서를 보고 싶었지만 마땅히 눈에 띄는 책을 찾지 못하고 번역서의 부피나 난이도는 지레 겁을 먹게 하기 충분했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순수 국내파 천문학자 심채경 박사의 에세이다. 저자가 천문학자이라는 희귀한(?) 직업을 갖게 된 과정과 우주에 대한 애정, 천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동안 있었던 일 등을 적은 글들이 모여 있다. 물론 지구과학 공부를 제대로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저자가 쉽게 서술했을 '3부, 아주 짧은 천문학 수업'의 내용 일부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책은 '천문학'이라는 세계와 그 안으로 뛰어든 사람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아는데는 충분했다.


책을 읽기 전에 저자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온라인으로 연결해 두 시간 가량 이어진 강연에서 심채경 저자는 시종일관 밝고 맑은 얼굴로 자신의 책에 대해, 우주에 대해, 그것을 연구하는 일에 대해 즐겁데 이야기했다. 일견 어렵게 느껴지는 분야의 연구를 하는 사람이 저렇게나 경쾌 발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천문학쯤 하는 사람이라면 피곤에 찌든 얼굴에 우울한 낯빛을 하고 있으리라는 편견이 있었던 모양이다.(하긴 칼 세이건도 내 편견에선 한참 멀긴 하다. 편견은 편견일 뿐이다)


저자는 뭘 해도 열심히, 푹 빠져서 하는 사람이었다. 천문학 연구도 그렇지만 독서에도 마찬가지 열정을 발휘하고 있었다. 책 읽는 방법으로 "딴 생각을 많이 하는 독서"를 권한 저자는 자신이 했던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 읽기를 사례로 보여줬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드레스덴 폭격을 소재로 한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이 외계를 포함한 시공간이 뒤섞인 여행을 하는 구성을 하고 있다. 심채경 저자는 『제5도살장』을 '시간 순으로 재조합하기', '배경만 골라 읽기', '시야를 바꾸어 읽기', '등장인물 찾기', '개인적 경험과 연결시키기' 등의 방법으로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특히 '시야를 바꾸어 읽기' 방법에는 '공상과학(SF)'으로, '반전(反戰) 소설'로, '정신착란자의 관찰'로 읽어보고 '인생의 모든 순간을 아는 사람의 이야기'로도 읽었다. 한 권의 소설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딴 생각'을 보여주는 독서다.


책을 보면서 저자의 문장력을 눈여겨 보게 됐다. '연구자'의 느낌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문장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쉽고 잘 읽히는 일상적인 글을 쓰면서도 콕 찌르는 위트를 잊지 않았다. 문장력의 바탕은 '일기 쓰기'였다. 저자는 5살때 그림일기로 시작해 20대까지 일기를 써왔다고 했다. 아쉽게도 그것들을 20대 어느 시절 읽어보고는 전부 폐기했다고. 그리고는 읽기는 다시 보지 않기로 했다는데 조금 더 시간이 흐를 때까지 보존했으면 다른 판단을 하지않았을까 싶었다. 현재는 메모지, 회의록 구석, 블로그 등 그때그때 손닿는 대로 쓰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쓰기 연습이 충분히 돼 있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쓰기가 생활화돼 있는 사람이었다. 저자의 문장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기고 싶은 대목들 중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 부분이다.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p.13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서 읽은 '재능'에 대한 부분과 상통하는 대목도 반가웠다. 정세랑 작가는 '질리지 않는 것이 대단한 재능"이라고 썼는데 심채경 저자의 경우도 '즐거운 지루함'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일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사람의 직업은 정해진 '시간'을 성실히 채우는 일이고, 또다른 사람의 직업은 어떤 '분량'을 정해진 만큼 혹은 그에 넘치게 해내는 것이라면, 나의 직업은 어떤 주제에 골몰하는 일이다. (…) 그러다보니 한 단계 전진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주 즐거운 시간이다. 그리고 그 즐거운 지루함이 자연의 ㅎ나조각을 발견하는 것을 이어진다면 금상첨화다.

pp.78-79


천문학자의 관측과정을 서술한 대목에서는 저자가 자신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느낄 수 있다. 어떤 일에 몰입한 사람 특유의 아우라가 담긴 대목이다. 누군가 이런 문장을 읽고 관측하는 일을 꿈꾸게 되지 않을까. 다소 길지만 남겨두고 싶다.


오후 느지막이 올라가서 하늘 플랫을 찍어놓고, 어두워지길 기다리는 동안 멍하니 노을을 보다가 어둠이 찾아오면 기계처럼 오직 관측에만 집중하는 시간. 망원경 시야에 타깃이 들어오도록 맞추고, 초점 조절하고, 노출 주고, 로그 적고…… 그러다 보름달이 가까이 오면, 달빛이 너무 밝아서 내 타깃이 안 보인다며 불평도 하고 달이 너무 예뻐서 감탄도 하며, 의자에 푹 파묻혀 초코파이를 우적우적. 그러다 달이 지면 오기 전까지 다시 모니터 속으로 빠져든다. 허락된 짧은 밤이 다 지나면 아쉬운 마음으로 박명을 맞으며 다시 플랫을 찍는다. 벌게진 눈으로 돔을 닫고 망원경을 제자리에 파킹한다. 유독 밤새 빈틈없이 관측한 날은 파킹하는 그 순간이 가슴 끝까지 뿌듯하다. 너무 졸려서 미각이 거의 마비된 상태로 밥을 국에 말아 후루룩 한 그릇 비우고는, 관측자 숙소의 암막 커튼이 주는 그  따뜻한 어둠 속에서 죽음처럼 잠들고 싶은, 관측하기 딱 좋은 날.

pp.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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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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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티 피플』과 비슷하게 인물이 많은 소설이라는 소문을 듣고 인물 관계도를 미리 찾아봐야겠다 마음먹었다. 『피프티 피플』을 읽고 나서 색볼펜과 동그라미, 점선으로 나름 정리한 인물관계도에 만족했으나 곧 검색을 통해 무척 전문적인 이미지들을 찾을 수 있음을 알게 됐었다. 이번에도 그럼 미리 검색을…생각하며 책을 펼쳤는데 마치 그런 수고는 넣어두라는 듯 '심시선 가계도'가 보였다. 독자를 위한 편집자의 배려 속에 바로 읽기에 돌입할 수 있었다. 본문 읽기 말고 가계도 읽기.


​가계도에 따르면 심시선이라는 여성은 두 번 결혼에서 네 명의 자녀, 딸 셋 아들 하나를 얻었고 그 아래로 손녀 넷 손자 하나를 두었다. 거기에 자녀들의 배우자들, 첫째 손녀의 배우자, 심시선의 전 연인(?), 친구, 아는 사람 등까지 포함하자면 이번에도 50명까지는 안되지만 만만찮은 등장인물의 수였다. 기억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요즘엔 등장인물이 많은 이야기에 살짝 부담이 느껴진다. 그러나 깔끔한 가계도가 있으니 용기를 내 심시선의 세계로 입장했다.


​소설은 총 서른 한개의 장으로 채워져 있다. 각 장은 심시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화가이자 작가였던 그녀의 글 또는 인터뷰 등이 먼저 나오고 자손들의 이야기가 한 사람의 시점 또는 다중 시점으로 펼쳐진다. 6.25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심시선은 사진 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건너가고 우연히 만난 독일 화가의 눈에 띄어 유럽으로 건너간다. 화가의 지원(?)으로 그림을 공부하지만 그의 물리적 심리적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한국행을 택하고 그 과정에 두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이혼, 한 번의 사별을 경험한다. 심시선은 그림을 그렸었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글로 이뤄졌다. 끊임없이 글을 써서 가족을 부양했다. 장의 앞머리에 실려 있는 심시선의 목소리에는 파란만장한 여성사 한 가운데 그녀의 일생을 관통하는 굳건함이 박혀있다.


심시선의 큰 딸 이명혜는 시선의 십주기 제사를 하와이에서 지내기로 한다. 서사의 출발점이다. 가족은 모두 빠짐없이 참석해야하고 특별한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심시선이 한 때 살았던 섬을 걸어다니면서 그녀를 추억하고 그녀가 "좋아했을 것 같은 가장 멋진 기억"을 가져오는 것이다.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p.83


가족들은 이런 엉뚱한 제사 방식을 수긍하고 은근한 경쟁심을 가진채 특별한 기억 찾기에 몰두한다. 심시선의 한 조각을 나눈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나 싶다. 한편으론 주부의 노력으로 차린 상을 앞에 놓고 가부장의 수호자들이 절을 하는 방식의 제사보다 의미와 추억면에서 창의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번 누구의 제사인지도 헷갈리며 허리를 굽히기보다 바로 그 사람을 생각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한 번쯤 완성해보는 게 조상을 기억하는데는 더 효과적일 것 같다.


​가족들이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취하는 방법도 성격따라 가지가지다. 훌라, 파도타기를 배우기도 하고 최상의 커피, 그 지역의 새 깃털, 맛있는 음식, 한 순간을 포착한 사진 등을 모아오기도 한다. 미션의 형식과 달성 과정에는 심시선과 그 가족의 추억이 녹아든다. 엄마라면 했을 법한 일, 할머니와 마셨던 커피, 할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식품, 할머니에게 내보이고 싶은 경험들이다.


​하와이에서 보내는 가족들의 시간은 심시선의 일생을 복원하는 동시에 가족 각자의 인생 역시 보듬고 치료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심시선의 혈육들도 각자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큰 딸 명혜는 바깥 일에 바빠 가사를 돌보지 못하는 엄마를 원망하다 자신만의 생활을 찾으려고 한 이른 결혼에 실패한다. 둘째 명은은 떠난다는 말도 없이 가족을 등진 독일 국적의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다.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의붓딸 경아는 자식을 떼어놓고 유학가버린 엄마를 그리워했다. 첫 손녀 화수는 회사에서 염산 테러를 당했고 규림은 학교 폭력에 가담자로 지목됐고 동생 해림은 따돌림을 겪었다. 심시선과의 일화들 속에 가족들 자신의 이야기가 씨줄 날줄로 절묘하게 엮여 들어가며 직조된 서사는 '시선으로부터' 온 거대한 편지같기도 하다. 오래 전에 죽고 없는 그녀가 우리 시대에 보내는 자기 일생으로 쓴 편지말이다. 그 안에는 이민자, 여성, 가장, 예술가, 직업인으로서 살아간 한 사람의 다채로움이 가득하다.


​손자 규림의 서사에서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 규림은 여학생을 대상으로 단톡방에서 일어난 사진 합성 사건에 휘말렸다. 직접적인 가담자는 아니었지만 단톡방에 초대되었고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폭언을 듣는다. 이때 규림은 반박도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잠정적 가해자'로서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언사에 익숙한 상황에서 남자 고교생의 이같은 성찰은 당연하지만 놀랍도록 신선했다.


한빛은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규림은 자신의 해명이 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음을 이해했다. 화수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죽은 남자가 사촌 큰누나에게 염산을 던졌을 때,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할 때의 역겨움을 온 가족이 똑똑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규림 자신은 도저히 같은 짓을 할 수 없었다. 가해와 피해의 스펙트럼에서 스스로가 가해에 더 가까웠음을 인정해야 했다. 방전된 배터리와 나쁜 타이밍 이전에 멍청하고 멍하게 방조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p.174


작가는 이 소설을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자신의 계보가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다고 적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가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가를 이룬 이야기"이자 "쉽지 않을 해피엔딩"이 되었다. 현실에서 사례를 찾아보려니 너무 희귀해서 발견조차 힘든 이야기 속 '지난 세기 성공한 여성 예술가의 해피엔딩'의 마지막은 현재와 맞닿아 있다. 시선의 자손들이 나름의 해피엔딩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여기 현재에서도 더 나은 해피엔딩들이 이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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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내가 힘들까 - 나 자신과의 싸움에 지친 이들을 위하여
마크 R. 리어리 지음, 박진영 옮김 / 시공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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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과의 싸움에 지친 이들을 위하여'라는 솜사탕같은 부제가 붙은 책 『나는 왜 내가 힘들까』는 표지부터 눈길을 끈다. 슬립 드레스가 헐렁하도록 마른 여성이 등을 내보인 상반신 그림이다. "여기서 '자신과의 싸움을 할 수 있는 대상이 한정적이라는 메시지'를 읽는다는 건 좀 과한 해석일거야"하는 마음으로 책을 열었다.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표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원제목 『The Curse of the Self』를 생각해봐도 그랬다. 무려 '자아의 저주'라는 제목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와 큰 괴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출판 과정에서 저자의 의도가 더 많이 반영됐을 원서의 표지는 어떤 모양일까.



국내판과는 사뭇다른 뉘앙스다. 한 남자가 자신을 닮은 조상(彫象)을 앞에 두고 화면밖의 관찰자를 바라보고 있다. 남자와 같은 표정을 한 조상은 자신의 얼굴을 한 남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조상은 남자를 다 알고 있는 듯하고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그걸 알고 있는지 근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원서의 표지에서는 저자가 책에 담고자 한 의도가 더 잘 읽혔다. 책은 '자아'라 불리는 '자기인식'의 부정적인 면을 직시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은 이제껏 알아왔던 '자아'에 대한 상식을 반대 방향에서 보게 했다. "인간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적절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을 자기인식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보통의 인식이다. 자기인신이 있어야 "중요한 가치와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바람직한 행동"을 할 수 있고 반사회적 행동을 방지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긍정적인 내용으롤 가득 차 있어야 하고 자존감이 높"은 상태가 "이상적인 상태"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자기인식'때문에 "스스로를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가혹하게 대하거나 지나치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왜곡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탓에 자기중심적 경향이 높아지고, 지나치게 자신의 이익만을 중시한 나머지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나아가 우리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정체성이 인위적으로 나와 타인을 서로 다른 부류로 나눠버리는 탓에 이전에는 없었던 편견과 갈등이 탄생한다. 

p.6


자아를 "삶의 질을 끌어내리는 원흉"이라고까지 명명한 걸 보면 저자의 '자아'는 상당히 비대한 모습을 지녔던 모양이다. 저자는 낮은 자존감이 문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대한 자아 역시 문제가 됨을 알리고자 했다. 한국 사회의 경우 "자신을 과대표장하거나 자기를 높이려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태도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자아의 저주'를 고려해야하는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저자는 "겸손, 집단주의, 의존성 등이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문화권"의 "겸손하려 애쓰는" 태도에서 오히려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를 발견한다. '자기고양적 편향'은 문화권에 상관없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말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줄리언 제인스의 『의식의 기원』을 근거로 "내 머릿속의 목소리"의 기원을 설명하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세계사 책에서 고대와 현대인의 의식구조 차이를 설명하는데 인용됐던 책을 심리학 책에서 다시 만나니 정말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피가 조금만 적으면 좋으련만…) 자아의 존재를 깨닫기 전 사람들은 머리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신의 것으로 여겼다는 주장이다.


제인스는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들리는 말들이 사실은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어느 시점부터 신의 목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일이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000년 이후부터 그리스의 신들은 점점 힘이 약해졌고 인간사에 관여하는 일도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히브리인들은 여호화가 자신들로부터 멀어졌다고 느끼고 그 이유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제인스에 의하면 예언이나 계시, 천사의 존재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며 이들은 머릿속에서 직접 전달사항을 내리던 신의 역할을 대체하기 위해 나타났다.

p.63


사람은 동물과 달리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아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살면서 자아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자아의 필터를 통과한 세상은 그 본질과 다른 모습이 되고 나 자신의 모습 조차 자아의 눈에는 달리 보인다. 타인보다 낫고 보통 이상인 사람으로 자신을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편향된 자기 인식은 세상을 내 위주로 받아들이게 할 뿐 아니라 감정마저 좌지우지해 고통을 야기한다.


저자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동맹이지만 동시에 가장 무서운 적"인 '자아'가 "인생에서 겪는 가장 큰 고난들의 대부분"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갖춘 이 정신적 도구가 우리에게 심각한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자아 조절 문제가 대두된다. 저자는 자아를 넘어서기 위한 네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자아 꺼두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의문시해보기, '자기고양성과 자기방어 줄이기', '자기통제 최적화하기'가 그것. "자아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는 자아를 유용하게 쓰되 자기중심성, 자기본위적 태도, 자기고양적 태도 증의 노예가 되지는 않"는 '탈자아 상태'로 가기 위한 저자의 처방이다.


자기 생각에 의문을 제기해보라는 해법이 의식적으로 실천 사항으로 가장 중요해보인다. "실재하는 객관적 사건들과 주관적 해석의 혼합물"인 머릿 속 세상의 구조를 인식하고 자아의 해석에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저자의 문장을 응용해보자면 "내가 때때로 내적 해석에 휘둘린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내가 바로 지금 내적 해석에 의해 판단이 흐려져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고, (이 역시) 후자를 해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추상적 수준에서의 가능성"이 아닌 바로 지금 내가 자아의 색안경을 끼고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는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같다. 그러기엔 우리 모두 인식하지 못한 채 자아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아의 자장권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목줄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 아닐지. 이런 책을 읽고 얼마간 '나의 자아'에 대해 생각이라도 해보는 일이 소소하지만 해볼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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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의 테마로 읽는 페미니즘 도서목록 - 증보판
말과활 아카데미 엮음 / 일곱번째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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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책 읽기 모임을 한 번 끝낼 때마다 다음엔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고민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잘 아는 모임 운영자가 있다면 따라가면 그만인데 책 목록을 찾아가며 앞으로 나가려니 읽을 책을 찾는데 만만치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이 『추락』과 연결됐던 것처럼 이미 읽은 책이 다음 독서를 이끌어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고민이 많아진다. 페미니즘 도서를 적극적으로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임 참여자의 정서를 고려해야 하고 많은 책을 읽어온 취향도 전제해야 한다. 모든 걸 다 예상해 딱 맞는 책을 찾은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좋은 모임 시간을 갖기 위해 읽어볼 만한 책의 목록 정도는 알아두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검색으로 찾는 방법이 가장 빠를 수도 있다. 여러 독서가들의 책 목록을 참고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또 하나의 방법이 도서관 또는 서점의 해당 분야 서가 앞에 서는 것이다. 막연한 책 찾기에서는 보통 마지막의 방법을 더 좋아한다. 책의 물성을 직접 느끼면서 고를 때 더 잘 고를 수 있었던 경험이 많아서다. 모니터를 보고 검색어를 넣으면서 찾는 손쉬운 방식을 두고 시간과 노력을 더 들이는 쪽을 택하는 거다. 그러나 책의 물성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알 것이다. 책등에 박힌 제목을 훑어보고 적당한 크기와 두께, 알맞은 표지 디자인을 보면 감이 온다는 걸. “읽을 만하겠다”는 감각.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때론 이런 ’촉‘이 빗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도서관 서가 앞에 서서 한 분야의 책을 한 눈에 살펴보며 선택을 고민하는 일 자체의 기쁨이 있으니 가끔의 ’실수‘도 참아볼만 하다.


『12개의 테마로 읽는 페미니즘 도서 목록』도 그렇게 만난 책이다. 작은 크기여서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었는데 ’목록‘에 골몰하고 있다 보니 발견할 수 있었다. 종교인은 아니지만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라는 말이 딱맞는 순간이었다. 이런 책이 있었다니.


말과 활 아카데미에서 엮어낸 책은 제목 그대로 페미니즘 도서를 12개의 주제로 분류해 목록화했다. 12개의 주제란 페미니즘 교양, 페미니즘 문학, 몸/젠더/섹슈얼리티, 혐오/폭력/차별, 생애-연애/결혼/가족, 정신분석/윤리/언어, 정치/사회/경제/노동, 교차성/포스트 콜로니얼/ 에코페미니즘/포스트 휴먼, 공간/지리학/이주, 기억/역사, 문화/예술이다. 여기에 페미니즘 고전과 해외 페미니즘 학술저널의 소개를 더했다. 페미니즘의 다양한 분야에 어떤 책들이 출판됐고 그 책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책은 각 테마별로 추천 도서를 먼저 소개하다. 아마도 편집자들이 해당 주제를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이 된다고 판단한 책이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 교양서로는 『빨래하는 페미니즘―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나쁜 페미니스트―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여성성의 신화』, 『여자들의 사상―뜨겁게 생각하고 거침없이 행동하라』, 『페미니즘의 도전―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외 16권의 책을 서지사항과 함께 간단한 요약과 추천의 말을 붙여 소개하고 있다. 모임의 독서 목록으로 고려하고 있는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문장이 있다면,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를 택하겠다“는 저자 자신의 강연사일 것이다. 록산 게이는 세상에는 다양한 페미니즘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완벽하고 이상적인 페미니즘은 존재하지 않으며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임을 인지하자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이티 계 미국 이민자 가정의 딸이자 흑인이며 성소수자로서 다양한 정체성의 교차 지점에서 페미니스트로 성장해 온 경험을 섹슈얼리티와 인종, 미디어 등의 주제를 관통해 서술하며 복수의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어느덧 페미니즘이 주요 의제로 자리 한 한국 사회에서 완성형 페미니스트에 대한 강박으로 배타주의에 빠지기보다, 어떻게 하면 다양한 삶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로 이 사회에서 함께 성장하고 공생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함을 상기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p.9


추천 도서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음은 물론이고 번역서인 이 책이 이 시점 한국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까지 자세하다. 각 테마의 추천 도서 뒤 편에는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참고 도서)‘ 목록이 붙어 있다. 한 발 더 나아간 독서를 위한 배려다. 외국 도서의 경우 한국에 번역본이 나와 있는 경우에 한정했다.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국내 번역이 있는지 찾아보는 독자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선택이다. 한편 출간은 됐으나 절판되어 판매되지 않는 책은 목록에 포함돼 있다. 좋은 책은 사라지지 않고 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니 읽을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권고일 것이다.


현재의 모임에서 책 후반에 소개된 이론서로 보이는 테마들까지 섭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앞쪽의 교양서와 문학 분야의 책들을 읽어가다 보면 언젠가 더 심도있는 독서를 하고 싶은 날도 오리라 기대한다. 페미니즘 읽기의 줄기를 잡을 수 있는 책을 내준 말과활 아카데미에 고마운 마음이다. 품은 많이 들고 찾는 독자는 적은 책을 굳이 출간해주었으니. 2019년에 출간됐고 이젠 절판된 책의 개정증보판이 나오길 기대하는 건 과욕일 것이니 단념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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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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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 혹은 당신이 내 소설을 읽는 것, 심연 속으로 떨어진 내 말 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작가의 말' 中


백신패스가 처음 적용됐을 때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고립감을 느꼈다. 바깥 나들이를 즐기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와 함께 할 공유할 수 있는 외부 공간이 없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벽으로 느껴졌다. 백신 미접종 상태로는 지인에게 차 한잔 같이할 수 없었고 한 달도 전에 미리 예매해 둔 연극을 PCR검사를 받고 나서야 볼 수 있었다. 백신패스는 물리적인 제약 이전에 심리적인 차단이었다. 타인과 연결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 어딜가도 혼자. 그날도 혼자 커피를 주문하고 서성이던 서가에서 김연수를 다시 찾게 됐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에 끌려 펼쳤지만 막상 읽기를 결정한 건 ‘작가의 말’ 때문이다. 김연수 작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고 말하는 ‘심연’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고 쓴다. 작가는 자신을 고독하게 만드는 그 ‘심연’ 저편에 말을 걸었기 때문에 소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심연에 둘러싸여 침잠하지 않고 건너편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의지가 작가에겐 서사의 실마리가 됐다. ‘심연’을 “건너가지 못한 채, 그럼에도 뭔가 말”하려 시도하는 일, 주변과의 단절 상황에서 작가의 시도가 의미깊게 느껴졌다.


물론 마음은 단단히 먹었다. 내게 김연수의 소설은 그의 에세이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작가에 대한 나의 편견을 확인했다. 그의 소설이 모두 하나같으리라는 편견. 책은 시작부터 막힘이 없었고 어딘가 이해력을 시험하는 대목이 분명 있으리라는 조바심은 어느새 잊혔다. 서사도 서사지만 문장이 시였다. 막힘없이 읽었고 여운이 길게 남았다. 차오르는 말들을 삭이기 아쉬웠고 좋음을 나누고 싶어졌다.


소설의 첫 대목 주인공 카밀라가 작가로 변신하는 장면이 흡인력있었다. 미국에 입양돼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사춘기를 보내고 성인이 된 카밀라는 양모의 죽음 이후 양부로부터 어린 시절 물건이 담긴 상자를 배송받는다. 이십일 년 동안 이질감을 느꼈던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남자친구 유이치는 카밀라에게 유년을 소재로 글을 써보라고 제안한다. “사물에 들러붙은 삶의 흔적”은 카밀라를 작가로 만들고 친모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나는 유이치의 말대로 한번 해보기로 했다. 그가 제안한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매일 시간을 정한다. 한 시간 정도라면 가장 좋겠고, 삼십 분이라도 상관없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기억해. 뭔가 쓰는 순간, 넌 작가가 되는 거야.”). 그 시간이 되면 노트와 연필을 들고 그 상자 앞으로 간다. 눈을 감은 뒤, 상자에 손을 넣고 무엇이든 처음에 잡히는 물건을 꺼낸다. 그걸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바라본다. 그런 물건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는 듯(“갓 태어난 아이의 시절로 돌아가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거지.”). 우선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사물의 표면을 관찰한다. 그다음에는 기다린다. 자기 내부에서, 겹겹이 쌓인 기억의 지층 아래에서, 무의식의 짙은 어둠을 뚫고, 마그마가 꿈틀대듯이 어떤 일들이 떠오를 때까지.

p.27


유이치는 훌륭한 선생님이다. 부담갖지 않고 글을 쓰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렇게 주문했다. 매일 쓰기,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순서나 논리 같은 건 신경쓸 필요 없이” 받아쓰기, 하루에 최소 세 페이지는 반드시 채우기, “충분히 썼다는 생각이 들면 노트를 덮은 뒤, 지정된 장소에” 두고 숙성과정을 거치기. 남자친구의 친절한 코칭은 카밀라의 유년을 ‘너무나 사소한 기억들: 여섯 상자 분량의 입양된 삶’이라는 책으로 변신시킨다.


양모의 단속 덕에 카밀라는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카밀라의 심연이었다. 이십 여년간 묻혔던 과거는 죽음을 앞둔 양모의 유언과 상자 속 사진 한 장으로 열렸다. 소담스레 핀 동백꽃을 배경으로 찍은 갓난 아이와 어린 엄마의 사진. 카밀라는 사진 한 장과 친모가 출산 당시 열일곱 살이었다는 양모의 말을 붙들고 심연 건너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카밀라의 엄마 정지은은 고등학교 재학 중 임신과 출산을 했고 그 결과 카밀라와 자신의 심연을 만들었다. 지은이 친부의 존재를 숨겼기 때문에 소설은 스릴러 분위기를 띠게 된다.


노동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동료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살한 아버지의 존재는 지은을 고립시켰고 친부를 밝히지 않은 임신과 모두가 만류했던 출산은 그녀를 막다른 길로 몰았다. 친오빠를 비롯한 친구, 선생님 그 누구도 지은의 진실에 닿지 못했다. 지은은 자신의 아이가 타인과의 사이를 건널 수 있는 날개가 되리라 생각했다. 자신에게 쏠린 오해의 심연을 아이의 날개로 건널 수 있길 바랐다.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갈 수 있니? 너한테는 날개가 있니? (…) 나한테는 날개가 있어, 바로 이 아이야 (…) 

p.244


지은의 ‘날개’는 강제 입양으로 꺾였다. 날개 잃은 어린 엄마는 깊은 바다 심연으로 가라앉아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아이가 자신보다 더 나이를 먹고 엄마를 찾아 돌아올 때까지. 편견이 만들어낸 불편한 진실이 날개를 달고 바다를 건너올 때까지.


소설은 사람 사이에 놓인 층층의 심연을 드러낸다. 심연은 한 사람의 내부에도 존재했다. 자신의 마음과 불화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두움 너머로 말을 걸어보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저 너머 누군가가 응답해올 때 회피했던 진실을 덮어버렸던 과거를 마주해야했기 때문일 것이다. 카밀라는 친모의 바람대로 이름을 ‘정희재’로 바꾸면서 진실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바람의 말 아카이브’를 통해 그때 있었던 일을 보여주던 또다른 ‘희재’를 만난다.


사람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 불가사의하게 그 사이를 건널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김초엽 작가의 단편집 『방금 떠나온 세계』와 겹쳐 읽혔다. 김초엽 작가가 상호 이해 불가능성을 전제하는 공존을 그렸다면 김연수 작가는 십 년쯤 전에 사람 사이의 간극을 넘을 가능성을 믿었던 것 같다. 두 작가가 보이는 다름은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그만큼 더 어려워진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사람 사이를 보는 시야가 더 촘촘해졌음에 대한 증명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건 사람 사이의 ‘이해’라는 행위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도 속단은 관계의 실패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사람 사이의 넓은 거리, 그 사이를 건너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혼자 좋고 말 수 없어 한국 소설 읽기 모임 토론 도서로 추천했다. 참여자 모두 김연수의 발견을 외쳤다. ‘관계’에 집중해서 읽은 나와 달리 시적인 문장에 집중해 읽거나 사회문제를 개인의 문제와 엮으면서 죽은 지은의 목소리를 더한 구성을 눈여겨본 분도 있었다.


내가 심연의 고독을 건너는 방법은 책이다. 책으로 상대를 만날 수 있고 관계를 잇는 도구도 책이다. 에밀리 디킨슨은 시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에서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이라 노래했고 지은은 딸 희재를 ‘날개’ 삼아 희망을 발견하려 했다. 내게 날개 달린 희망은 책 하나로 수렴된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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