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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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으려 생각하다보니 2년쯤 전에 읽고 미처 갈무리 하지 못한 『1984』가 생각났다. 디스토피아 3부작을 다 읽고 비교해보고 싶은 원대한 희망이 있었지만 각각의 책을 읽는 시기가 멀리 떨어지다 보니 앞의 책이 희미해지고 말았다. 『1984』는 발췌만 정리된 상태. 옮겨 적어 놓은 대목들을 보며 책을 훓어보니 전에 깊이 생각지 못한 부분이 드러났다. 오웰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를 읽으면서 작가가 생각했던 방식을 조금 알게 됐기 때문인 듯하다.


특히 노동자에 대한 묘사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윈스턴은 소설 초반에 아귀다툼을 하는 노동자들을 보며 '구역질'을 느꼈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노동자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 그는 노동자의 생명력과 순수성을 깨닫는다.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신경쓰지 않고 '신어'로 생각이 조작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윈스턴의 입을 빌어 오웰이 "노동자야말로 인간"이라며 '노동자'의 의미를 환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두 세대 전의 사람들은 역사를 바꾸려 하지 않았고, (…). 그들은 개인적인 성실성으로 삶을 살았고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 문득 노동자들은 아직 이런 상황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윈스턴의 뇌리를 스쳤다. 그들은 당이나 국가나 이념 따위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충실했다. 그는 비로소 노동자들을 경멸하지 않게 되었다. 경멸하기는커녕 그들이야말로 어느 날인가 생명을 되찾아서 세계를 재건할 수 있는 잠재된 힘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이야말로 인간이다. 그들의 내면은 경직되어 있지 않다.

pp.233-234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지하반역단체의 수장으로 알려진 임마누엘 골드스타인의 책에서도 드러난다. 골드스타인은 존재가 불확실한 사람이었지만 빅브라더를 위협하는 세력을 한데 모이게 하는 구심점이다. 그가 썼다고 알려진 책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의 내용이 『1984』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오웰은 자신이 생각하는 '집단주의'의 원리와 위험성을 책 속의 책으로 다룬다. '책 속의 책'은 권력자들이 대중을 지배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대중의 '가난과 무지'가 '소수의 특권층'을 유지하는 힘이라고 말이다. 지금의 사회에 비추어 보자면 오웰이 제시한 두 가지 전제 중 후자 쪽이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듯 싶다. 소설 속의 세계는 언어와 정보를 통제해 사고를 조정한다. 알고리즘이 통제하는 지금의 정보망도 우리에게 유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모든 사람들이 시간적 여유와 함께 경제적 안정을 똑같이 누리게 되면 빈곤에 허덕인 나머지 사회에 무관심했던 대중이 마침내 눈을 뜨게 되고, 또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면서 결국은 소수의 특권층이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들을 몰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계층 사회의 장기적인 존속은 가난과 무지를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

p.267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피한 한 구석에서 자신만의 글을 쓰던 윈스턴은 '획일성, 고독, 빅브라더, 이중사고'가 없는 시대를 꿈꾼다. 한 권의 빈 노트 그리고 펜과 잉크가 한 사람의 사고를 자유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사무실에서 맡은 일이 과거를 지우는 일이라는 걸 인지하고 기억을 말살시키는 '이중사고'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미래를 향해, 과거를 향해, 사고가 자유롭고 저마다의 개성이 서로 다를 수 있으며 혼자 고독하게 살지 않는 시대를 향해, 진실이 존재하고 일단 이루어진 것은 없어질 수 없는 시대를 향해.

획일적인 시대로부터, 고독의 시대로부터, 빅브라더의 시대로부터, 이중사고의 시대로부터ㅡㅡ축복이 있기를!

pp.43-44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이것이 당의 슬로건이다. 그러나 과거는 본질적으로 변경될 수 있음에도 여태 그런 적이 없다. 지금 진실한 것은 영원히 진실하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이치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기억을 끊임없이 말살시키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이를 '현실 제어'라 칭했는데, 신어로는 '이중사고'라고 한다.

p.53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

p.75


윈스턴이 사랑하게 되는 여성 줄리아는 그와는 또다른 생각을 가진 인물이다. 윈스턴이 인간의 생각과 의식을 통제하는 당의 활동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면 줄리아는 '당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쾌락을 금지하는 '규칙'만을 피하고자 한다. 윈스턴은 이런 생각의 차이를 '세대'에서 찾는다. 작가는 '빅브라더'처럼 강력한 권력의 지배가 공고해진 이후의 세대는 권력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 힘들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녀의 인생관은 매우 단순했다. 인간은 쾌락을 원한다. 그런데 '그들', 즉 당은 그것을 못 갖도록 한다. 따라서 가능한 한 당의 규칙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 하지만 당이 하는 일 전반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 이상 당의 강령 따위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 그녀에게 있어서 현명한 것은 당의 규칙을 위반하면서도 끝까지 살아남는 일이었다. 그는 혁명의 시대에 성장하여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당을 마치 하늘과 같은 불변의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고, 당의 권위에 저항하기는커녕 토끼가 개를 피하듯 그저 회피하기만 하는,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젊은 세대에 얼마나 많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해 보았다.

p.186


윈스턴에겐 줄리아와 함께 할 수 있는 허름한 방이 자유로운 세계의 전부였다. 생각만으로도 안온해지는 공간, 그에겐 그곳이 '자기만의 방' 또는 '19호실'이었을 것이다.


그 방이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고 거기에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윈스턴은 그 방에 가 있는 것 같은 안온함을 느꼈다. 그 방은 하나의 세계였고, 멸종된 동물들이 다시 살아나서 돌아다니는 과거의 주머니였다.

p.213


윈스턴이 끝까지 믿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마음이었다. 그는 어떠한 강제도 사람의 내면은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줄리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빅브라더는 두 사람의 예상보다 강력했다.


그런데 단순히 살아남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는 게 목적이라면, 궁극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사람들이 그들을 자신들과 똑같이 개조시킬 수 없듯 그들 또한 사람들의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다. 설령 그들이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하나하나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하더라도, 인간의 속마음까지 공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속마음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신비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pp.236-237


지하 단체 '형제단'의 조력자로 등장한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을 현혹시켰다. 조직으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받지 못한다해도 대의에 투신할 것인가를 묻고 답을 듣는다. 오브라이언의 실체는 빅브라더의 첩자였다. 그는 자신이 충성하고 있는 권력의 구조를 잘 아는 인물인 동시에 그에 반하는 세력의 행동 양식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오브라이언이 정체를 밝히기 전에 윈스턴에게 건넨 말에 진실 한조각이 숨어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젠가 권력구조가 변화하리라 예상하고 있었고 윈스턴과 같은 사람의 위험을 무릎 쓴 행동이 "미래의 삶"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의 의중을 떠보려고 한 말일지 모르지만 미래의 '진정한 삶'을 기다리며 엄혹한 상황을 견디는데 "건전한 정신의 영역"을 넓히는 일보다 가치있는 일이 무엇일까 싶다. 


결국 당신들은 아무런 보람도 희망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하오. 얼마 동안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자백하고는 죽게 될 거요. 그것이 당신들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보람이요 희망이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어떤 형태의 변화가 일어날 가망성은 거의 없소. 우리는 죽은 몸이나 마찬가지요. 우리의 진정한 삶은 미래에 있소. 우리는 미래에 가서야 한줌의 먼지와 몇 조각의 뼈다귀로 변해 새로운 삶을 열 수 있는 거요. 그런데 그 미래의 삶이 언제쯤 열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소. (…) 현재로서는 건전한 정신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뿐이오.

p.249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밟고 선 권력의 유지 기반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자였다. 그래서 스스로 해야할 일 또한 잘 알았다. 그는 윈스턴의 머릿속까지 바꿀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주체적인 생각을 파괴하는 방법. 이 고문기술자는 '쾌락주의적 유토피아'를 상상으로 치부하고 '고통을 향한 진전'을 현실로 정의한다. 오웰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보다는 고통을 기본값으로 여긴 집단주의를 더 사실적이라 여겼거나 혹은 더 경계하길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건 옛날의 개혁자들이 상상했던 어리석은 쾌락주의적 유토피아와는 정반대의 것이네. 공포와 반역과 고뇌의 세계이지. 짓밟고 짓밟히는 세계이며, 세련될수록 더욱더 무자비해지는 세계이네. 우리가 만드는 세계에서의 진전이란 고통을 향한 진전일 뿐이네. 

p.373


읽은 순서는 오웰, 헉슬리, 쟈마찐이었지만 정리한 순서는 거꾸로가 됐다. 결국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이 출간된 순서대로 뭔가를 써보긴 한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개운찮은 기분이다. 이유는 아마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 『멋진 신세계』는 운좋게 토론 도서 투표에서 선정돼 모임에서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나머지 두 권에 대한 다른 생각은 어디서 들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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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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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는 위험을 내포하는 자유와 안정이 전부인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했다가도 위험 앞에서 나약하게 안주하려 하는 존재인 동시에 규격화된 안정속에서 성장한 후에라도 본능이 분출하는 개별성을 드러내는 존재다. 자유 또는 안정,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구성된 행복은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그 둘이 이룰 수 있는 최상의 행복 비율은 어느 정도인 걸까. 똑같아야 할까. 어느 쪽의 비율이 더 높아야 할까. 개별 인간의 개성에 따라 서로 다른 비율이어야 하는 걸까. 『멋진 신세계』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책이다.


기분을 통제하는 약 소마가 규칙적으로 지급되고, 인공수정으로 아이가 만들어지고 계급에 따라 세뇌시며 양육하는, 모든 오락이 장려되지만 문학과 철학 등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학문은 제한되는 『멋진 신세계』의 설정은 잘 알려져 있다. 헉슬리 이후 발표된 디스토피아물에서 이런 설정들이 종종 활용되다 보니 원조격인 『멋진 신세계』가 클리셰로 느껴졌다. 계속 '이 책이 원조다, 1932년에 출간된 생각이다'를 되뇌이며 책의 의미를 되새겼다.


인위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사회 체제에 비판적인 주인공 버나드의 친구 헬름홀츠가 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 세계에는 실용과 거리가 먼 책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헬름홀츠는 글의 힘을 깨닫지만 세뇌된 사회 구조의 한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어휘들이란 X선이나 마찬가지여서 제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무엇이라도 뚫고 들어갑니다. 글을 읽는 사람이 거기에 찔리는 셈이죠. 무언가를 뚫고 들어가는 글을 어떻게 쓰느냐, 바로 그것을 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어요.

p.124


버나드는 행복을 보장하는 약, 소마를 끊는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행복을 '느끼기만' 하는 일을 멈추고 싶었다. 진보적인 생각이지만 소설이 진행될 수록 그 진심이 의심스러워진다. 그는 소속된 계급과 걸맞지 않게 능력이 부족한 자신에 대한 열등감에서 남과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을 뿐 어려움이 닥치자 바로 최선의 안온함을 추구한다.


"난 차라리 나 자신 그대로 남아 있고 싶어요." 그가 말했다. "불쾌하더라도 나 자신 그대로요. 아무리 즐겁더라도 남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p.149


버나드가 '신세계'로 데려온 '야만인' 존은 소마에 취해 생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어머니 린다를 보고 의사에게 항의한다. 의사는 소마의 위험성을 인정한 후 환각으로 얻을 수 있는 '영원성'을 강조한다.


"소마는 시간적으로 몇 년쯤 상실하게 만들기는 합니다." 의사가 얘기를 계속했따. "하지만 그것이 시간을 벗어나서 인간이 측정할 수 없는 다른 존속성의 기간을 얼마나 무한하게 누리도록 도와주는지 생각해보세요. 모든 소마 휴식은 우리 조상들이 예전에 영원성이라고 부르던 그런 개념의 한 조각입니다."

p.240


존은 어머니가 소마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길 바랬다. 그는 현실이 끔찍하다는 걸 알지만 그 때문에 '숭고하고, 고귀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다시금 현실로, 소름 끼치고 끔찍한 현실로 돌아오도록,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절박함이 있기 때문에 더욱 숭고하고, 고귀하고, 한없이 소중한 세계로(…) 

p.312


'멋진 신세계'의 권력자 무스타파 몬드 총통은 자신이 통제하는 세계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이 사고하고 성찰하는 이상 행복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책을 금고 속에 넣고 사람들에겐 소마를 쥐어준다.


"(…) 신은 기계와 과학적인 의학과 보편적 행복과는 병립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 문명은 기계와 의약품과 행복을 선택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런 책들을 금고 안에 넣고 잠가둬야 합니다. 이런것들은 음란하니까요.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테니……."

p.354


존은 '인간적'인 삶의 조건을 원했다. 고뇌하고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그러면서 최고의 가치를 찾고 추구하고 싶어 했다. 무스타파는 존에게 '불행해질 권리'를 허락한다. 존이 찾고 싶었던 '인간다움'의 모습은 수도사의 생활에 가까웠다. 쾌락을 죄악시하는 그의 태도 또한 보편적인 '인간다움'과는 거리가 있다. '신세계'의 삶에서도 존의 선택에서도 행복의 필요충분 조건은 충족되지 못한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p.362


인간 삶에 한 방향으로 향한 정답은 없다지만 우리 모두는 자신을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병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의미는 영영 알수 없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러니 '행복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없'을 때 인생을 재미있게 살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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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읽기에 도움이 될까 싶어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를 읽었다. 아쉽게도 기대했던 작품 해설과는 거리가 있었다. 『멋진 신세계』 (1932)출판 후 26년이 지난 1958년 당시에 자신이 예언이 얼마나 현실화됐는지를 서술하는 책이었다. 『멋진 신세계』 앞에 붙은 서문에서도 작가는 작품에 대해 이랬었다면 저랬었다면 하는 생각을 적었었다. 헉슬리는 이 작품이 애착이 많았던가보다. 다시 쓰지도 못하겠고 그냥 두자니 자꾸 첨언을 하고 싶은 마음이 보였달까.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는 일간지 「뉴스데이Newsday」에 '사고방식을 장악하는 폭력Tyranny Over the Mind'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던 기사를 모은 것이다. 글들은 사고방식 뿐 아니라 "인구 과잉과 조직 비대화 그리고 선전 기술이 발달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직면한 자유의 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자신의 과거 저작과 비교해가면서.


군중 속의 개인이 어떻게 집단 심리에 휘둘리는지에 대해 서술한 대목이다. 헉슬리는 세뇌, 암시 등으로 사람의 심리를 조종해 독재자의 의도대로 군중을 움직이게 하는 일을 특히 경계했다.


군중 속으로 섞여들면 민중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힘과 도덕적인 선택을 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암시에 쉽게 휩쓸리는 성향으로 인해서 군중은 그들 자신의 의지나 판단력이 사라지는 수준까지 현혹당한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군중 속의 한 사람은 마치 어떤 강력한 마취제를 대량으로 삼킨 듯한 행동 양식을 보인다.

p.105


예술과 정치, 신학의 관계에 대한 헉슬리는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역사적으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유적들이 결국은 통치자, 성직자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평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가 싶다. 역사적인 예술품이라 불릴만 한 것들 중에 미술가가 자발적으로 만들었거나 민중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것이 있던가.


정치와 신학 차원에서는 폭군의 전제 정치나 터무니없는 말장난과 아름다움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것은 대단히 다행한 일이어서, 폭정과 황당함이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더라면 세상에는 고귀한 예술이 거의 존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 조각, 건축의 걸작품들은 정치적 혹은 종교적인 선전을 위해, 신이나 통치자나 성직자의 보다 위대한 영광을 위해 제작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왕들과 성직자들은 독재적이고, 모든 종교는 미신과 뒤죽박죽이 되었다. 천재성은 폭군의 종노릇을 했고 미술은 지역 신앙의 장점들을 광고했다.

pp.120-121


자유로운 삶을 위해 저자가 내놓은 해답은 '소규모 시골 공동체'다. 현대적인 도시의 삶을 떠나 소박한 생활로 돌아가야한다는 권고가 수용가능한 것일까. 미디어에서 최고의 삶처럼 표현되는 도시 생활을 부정할 방법은 무엇인가. 소수의 사람들이 시골 공동체를 꾸린다 해도 적은 수에 그칠 뿐 대다수를 소박한 삶으로 이끌기는 어렵지 싶다. 지금의 구조에서 득을 보는 소수는 자신의 돈줄을 놓지 않으려 할 것이고 지금껏 삶의 이상적인 모델을 도시의 삶으로 여긴 사람들도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도시 안에서도 소규모 시골 공동체와 같은 형태의 조직을 구성함으로써 인간적인 삶을 찾을 수 있다는 저자의 답이 너무 '멋지'게만 느껴지는 이유다. 


따라서 전체 사회와 개인의 정신적인 황폐화를 피하고 싶다면, 대도시를 떠나 소규모 시골 공동체를 부활시키거나, 기계적인 대도시 조직의 망상網狀 구조 내에서 소규모 시골 공동체와 똑같은 도시형 모형을 이룩하여, 전문적인 특수 기능을 단순히 구현한 개체가 아니라 완전한 인격으로서 개인들이 만나고 협동하는 사회를 이룩함으로써 대도시를 인간화시켜야 한다.

p.209


책머리에 크리스토퍼 히친스(평론가, 작가)가 2003년에 쓴 '올더스 헉슬리의 예언'이 붙어 있다. 헉슬리에 대한 평인 동시에 『멋진 신세계』에 대한 해설로 볼만한 글이다. 본문에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언급하며 비교하는 대목들이 있어 흥미로웠다. 『멋진 신세계』보다 후에 출판된 책의 내용을 자신의 것에 견주어보는 일은 대범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헉슬리 이전에 출판되어 『멋진 신세계』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에도 관심이 간다. 세 작품 중 가장 먼저 출판됐으나 번역 소개된 시기는 가장 늦은 자마찐의 『우리들』, 이 책을 읽고 나면 반유토피아 세계에 대한 밑그림이 머리 속에 그려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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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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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문장 쓰는 법』을 읽고나서 저자 김정선이 전문분야인 교정·교열만 잘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오랜 기간 다른 사람의 문장을 돌보는 동안 그 자신의 문장도 함께 자랐던 모양이다. 아니면 문재를 타고 났던지. 글자 하나하나를 예사로 보아 넘기지 않는 저자의 섬세함에 호감이 갔고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 


다음으로 순서로 집어든 책은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다. 이런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 있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상한 문장을 잔뜩 보고나면 나의 이상한 문장도 참을 수 없게 될 것만 같아 읽기를 망설였다. 배워서 쓰는 것도 아니고 교정·교열을 받지도 않는 문장들을 계속 생산해내고 있는 바 그 글줄을 이상하게 보기 시작하면 더 이상 아무 것도 표현하지 못할 듯했다.(사실 책을 읽고 나니 자꾸 이상함에 집착하게 되긴 한다) 그래도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이라는 부제처럼 글을 가지런하게 하고 싶은 날도 언젠가 올지 모른다며 책장을 넘겼다.


역시나 책은 단순히 문법을 논의하고 교정의 기술을 나열하지는 않았다. "문장 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문장을 어색하게 만드는 표현"을 목록으로 만들어 제시하고 한편으로는 저자와 글 사이에 존재할 법한 '관계'를 다룬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런 저런 표현들을 쓰면 어색한 문장이 된다는 내용을 읽으며 머리가 복잡해지려는 순간 조금 전에 읽었던 소설이 이어진다. 독자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저자랄까. 이런 '기술'은 앞서 출간된 『동사의 맛』에서도 발휘됐다고 한다. 저자는 '꼼수'라고 칭했지만 이 책의 매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꼼수'에 해당하는 '소설 같은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문장과 저자를 소재로 하고 있고 이론보다 실전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책에 정리된 글 다듬는 '비법'은 '적·의를 보이는 것·들', '굳이 있다고 쓰지 않아도 어차피 있는',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게 만드는 표현', '내 문장은 대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당하고 시키는 말로 뒤덮인 문장' 등이다. 교정·교열의 지침들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중독에 빠지지 말라'고 주문한다. 습관적으로 쓰이는 표현들과 다양한 표현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수사를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다. 외국어 표현도 "다채로운 한국어 표현을 위해 필요하다면"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후한 인심을 발휘하기도 한다.


문제는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쓰는 데 있다. 어떤 표현은 한 번 쓰면 그 편리함에 중독되어 자꾸 쓰게 된다.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니 아예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편리함의 중독자인지 살피라는 것뿐이다.

p.22


일각에서는 외국어에서 온 표현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한국어 이용자가 수억 명 정도 된다면 모를까 기껏해야 1억 명도 안되는 현실에서 언어 순혈주의를 고집하다가는 자칫 고립을 자초할 수도 있따. 외국어에서 온 표현이라도 더 다채로운 한국어 표현을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려해야 하지 않을까.

p.56


외국 문학 전공자들의 번역에 대해 꼬집는 부분은 항상 생각해오던 바였던지라 시원하게 느껴졌다. 해당 작가 전문가라는 분의 번역에 실망할 때가 종종 있었다. 연구는 깊을지 모르나 한국어 구사에 문제가 있어 독자에게 지식의 풍성함을 전달할 수 없다면 그 연구라는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작가 전문가의 번역을 번역 전문가가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만들어줬으면 싶은 소망을 느껴본 독자라면 이 대목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외국 문학 전공자들에 대한 편견? 솔직히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옮긴이 해설'이나 '옮긴이의 말'에서는 멀쩡한 문장을 구사하면서 정작 번역문은 절뚝거리는 문장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이게 같은 사람의 문장이라고? 늘 의심하곤 했다. 전문 번역가보다 관련 분야 연구자들이나 교수들의 문장이 더 안 좋았다. 오죽하면 해당 작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에게는 되도록 번역을 맡기지 말라는 말이 다 있겠는가. 번역하 생각은 않고 각주를 통해 논문을 쓰려 한다는 게 편집자들의 불만이었다.

p.25


"모든 문장은 다 이상합니다"라고 단언하는 대목에서 안심했다. "정답"고 없고 "표준적인 문장"도 없다고 했다. "규칙적으로 일관되게" 다듬어진 문장은 애초 글쓴이의 머리 속에 있던 생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고 글을 읽는 사람의 머릿 속에서 또다시 거리가 벌어진다. 나만의 문장은 다른 시간대에서 읽는다면 나 조차도 일해하지 못하는 '난해'로 남게 되지 않을까. 나만의 문장을 세상에 이해시키기위해서는 합의된 언어 규칙에 맞춰 변신을 시도해야 한다. 저자는 회사원이 히어로가 되는 변신을 제안하지 않는다. '습관'과 '중독'을 유의하라는 정도의 주문은 '독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한 '변신'의 방법으로는 소소한 것이 아닐지.


모든 문장은 다 이상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상한 것처럼 말이죠. 제가 하는 링은 다만 그 이상한 문장들이 규칙적으로 일관되게 이상하도록 다듬는 것일 뿐, 그걸 정상으로 되돌리는 게 아닙니다. 만일 제가 이상한 문장을 정상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면, 저야말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표준적인 문장' 같은 건 없노라고 말이죠.

정답같은 건 없습니다. 그건 심지어 맞춤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맞춤법이란 그저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규칙일 뿐이죠. (…) 다만 책을 사서 읽는 독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제가 하는 일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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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문장 쓰는 법 - 못 쓰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땅콩문고
김정선 지음 / 유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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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소설의 첫 문장』 등으로 익숙한 교정 전문가이자 작가의 책이다. "이십 대 후반부터 27년간 남의 글을 손보는 일을 하며" 살았다는 분이 알려주는 '문장 제작 비법서'일까. 열 문장 정도만 매끄럽게 쓸 수 있으면 '쓰는 사람'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열 문장이 스무 문장이 되고 스무 문장이 삼십 문장, 그렇게 글이 글을 물고 증식하는 건 일도 아닐테니. 글쓰기와 책 쓰기 방법을 말하는 수 많은 책과 다른 지점은 무엇일까 찾아보는 것도 독서 포인트다. 글만 쓴 사람이 아니고 남의 글을 평생 들여다 본 전문가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좋은 글로 가는 지름길은 아니라도 중대한 팁 정도는 얻을 수 있겠지.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집필의도를 밝힌다.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투로 적은 문장에서 친밀감마저 느껴진다. 한국어 단어의 나열이 아닌 제대로 된 '한국어 문장 쓰기 방법'을 배울 수 있으라는 기대도 솟아난다.


예로 든 분들 모두 무슨 큰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한국어 문장을 쓰는 일에 익숙지 않아서 낭패를 보시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글쓰기 책을 보면 독자가 한국어 문장을 쓰는 데 이미 익숙해 있다고 전제하고 내용을 전개하고 팁을 제시하고 있어서 큰 도움이 안 되겠더라고요. 글쓰기 책을 추천해 드리기가 영 주저되곤 했죠. 고민 끝에 이렇게 제가 직접 쓰게 되었네요.

p.11


저자는 '글쓰기 어려운 이유'는 '번역'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만의 의견을 모두에게 통용되는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번역'이라고 정의하고 '나만의 것'과 '모두의 언어' 사이에서 타협하라고 제안한다. '모두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방법으로 저자는 한 문장을 길게 늘여써 보라고 말한다. 문장쓰기의 금언인 '짧게 써라'와 대조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처방을 내린 이유를 읽어보면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게 된다.


'단문교'短文敎라는 종교 단체가 결성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단문에 대한 칭송은 거의 숭배에 가깝죠. 하지만 이는 글을 어느 정도 쓰고 다루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진리도 아닙니다.(…)

게다가 글을 자주 써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짧은 문장이 외려 더 부담이 될지도 모릅니다. (…) 짧은 문장으로 두세 문장 정도 쓰고 나면 그다음 이어갈 짧은 문장들이 부담으로 다가올 게 뻔합니다.

pp.21-22


책은 예시문을 자세히 제시하면서 생각이 흐르는 대로 문장을 길게 쓰고 나서 다시 자르고 다듬는 과정을 설명한다. 같은 내용의 원고가 초벌에서 교정된 상태로 바뀌는 단계들이 흥미롭다. 저자가 권하는 여러 방법들을 차근차근 따라 해보는 것면 도움이 되겠지만 문장을 다루는 방법을 들여다보는 자체가 재미있을 뿐 아니라 중간중간 예시 글에서 드러나는 '김정선'이라는 사람 자체도 인상적이다. 


말과 글의 다름을 설명하는 대목은 잘 읽히는 글을 쓰고자 한다면 기억해둘만 하다. 말은 마주하는 상대가 있고 목소리를 비롯해 비언어적 수단과 주변 환경까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을 한꺼번에 여럿 동원할 수 있다. 그러나 글은 다르다. 


반면 글은 이 모든 조건을 단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오직 읽는 행위 하나만으로 독자를 정해진 시간동안 묶어 두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공감도 얻고 이해도 얻어야 합니다. 독자의 시간, 즉 독자가 글을 읽는 동안 어떤 시간을 경험하게 될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pp.82-83


저자는 자신의 말을 녹취해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자신의 대화 녹취록을 보여주면서 말이 글이 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중언부인을 정리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흐름을 부여한다. 글 쓰기는 "불특정 독자를 고려하여 그들이 끝까지 읽을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질서"를 말에 부여하는 작업이다.


책 후반에는 짧은 문장 쓰기에서 주의해야할 사항을 제시한다. 복잡한 글쓰기 방법보다 이런 간단한 도움말부터 실천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우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접속부사와 지시대명사의 쓰임입니다. (…) 꼭 써야 할 때가 아니라면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말없음표, 말줄임료라고 부르는 '……'는 되도록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

셋째, 주어를 반복적으로 쓰게 되면 의도하지 않았어도 해당 주어가 강조될 수 있으니 문장 안에 숨길 수 있다면 숨기는 것이 좋습니다. (…)

넷째, (…)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쓸 때는 이 서술격 조사를 생략하거나 아니면 다른 종결어미 (가령 'ㅡㄹ까'나 'ㅡㄴ가')로 바꿔 쓰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서술격 조사나 종결어미를 과감히 생략한 문장을 중간중간 섞어 주시는 게 좋습니다.

p.137-138


대명사, 명사, 수사와 같은 체언보다 동사와 형용사같은 용언 위주의 문장을 구사하라는 (살짝) 전문적인 제안에 이어진 간단한 팁도 글을 퇴고할 때 확인해 봐야할 내용이다.


의존명사 '건'을 얼마나 많이 썼는지

조사 '의'를 얼마나 많이 썼는지

'대한' 혹은 '대해'를 얼마나 많이 썼는지

p.154


책에서 제시한 방법을 다 고려해 뭔가를 써보려하면 아무 것도 못쓸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럼에도 하얀 화면을 앞에 두고 깜박이는 커서와 맞서는 건 책에 인용된 철학자 미셸 푸코와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일 게다. "글쓰기를 통해 어제의 나와 다른 오늘의 나를 발견하고 창조"하고 "'내게조차 낯선 나'와 매번 맞닥뜨리기를 열망하기 때문일 게다.


나는 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더 이상 이전과 똑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쓴다.

(폴 벤느, 『푸코, 사유와 인간』, 이상길 옮김, 산책자, 2009)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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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여행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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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영국 추리작가협회 주관의 대거상을 수상하고 신작 소설 『도서관 런웨이』와 산문집 『빈틈의 온기』 가 연이어 출간되면서 알게 된 작가 윤고은. EBS 라디오에서 책프로그램 'EBS북카페'도 2019년부터 진행해왔다. 활동 반경이 넓어 한 번쯤 들어봤을 법 한 이름인데 눈여겨 두지 못했기 때문일까. 이제야 기억에 남겼다. 


소설 『밤의 여행자들』 초판은 2013년에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3권으로 출간됐다. 책 뒷 면에 붙은 시리즈 목록에서 이미 읽은 책들을 일별해보니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와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보다 앞서 출간됐다. 『한국이 싫어서』를 읽은지가 아주 오래인듯 느껴지는데 그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책을 지금에서야 읽는다.


소설은 '재난 관광' 프로그래머 고요나가 회사 '정글'에서 퇴물 취급을 받는 '재난' 상황에서 시작한다. '정글'은 일단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으면 주거, 복지 등 필요한 모든 걸 제공하고 필요를 다한 직원은 애매한 일에 시달리다 퇴사하게 만드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다. 요나는 자신의 기획을 빼앗기고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했으며 담당 업무가 아닌 고객상담전화에 시달린다. 그러면서도 회사에서 밀려난 다른 직원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성추행당한 무리, 즉 퇴물이나 패배자, 떨거지들로 규정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요나의 추락은 회사에서 '옐로카드'를 받았을 때가 아니라 패배자들과 연대를 거부했을 때 시작된 것같다. 어떻게든 정글에 남을 수 있을 거라고 회사에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타인의 고통을 멀리하고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는 태도는 그녀가 해왔던 일 '재난 관광'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너무 가깝지 않게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타인의 고통을 구경한다. "너무 가까운 것은 무서"우니까. 


재난 여행을 떠남으로써 사람들이 느끼는 반응은 크게 '충격 → 동정과 연민 혹은 불편함 → 내 삶에 대한 감사 → 책임감과 교훈 혹은 이 상황에서도 나는 살아남았다는 우월감'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어느 단계까지 마음이 움직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결국 이 모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재난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나는 지금 살아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니까 재난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했다,는 이기적인 위안 말이다.

p.61


사람들은 재난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지만, 그 여행 중에 자신들이 또 다른 재난을 남겼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p.72


요나는 자신의 재난을 직시하지 않고 상사가 제안하는대로 다른 재난 관광을 평가하는 여행을 떠난다. 오래 전 발생한 씽크홀로 재난을 겪은 지역 '무이'로 떠난 요나는 그곳에서 '재난 관광지'의 이중성을 발견한다. 관광지의 주민들은 재난을 연기하고 있었다. 


"글쎄요, 사실 전 여기에 어떤 재난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전에는 그냥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아무것도 없을 뿐이지, 그게 재난인 건 아니잖아요."

(…) 무이는 가난했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외부인의 시선일지도 몰랐따. 외부인의 관점에서 무이를 재난 지역이라고 분류하는 것은 오만일 수도 있었다.

pp.150-151


주민들이 살아가는 일상은 재난과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관광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기업은 일상을 재난으로 탈바꿈시키려 한다. 요나는 이 모든 진실을 알아채고도 " 자신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래 된 재난으로 '무이' 지역이 더 이상 관광객을 끌어 들일 수 없게 되자 한 기업이 재난을 계획한다. 더 크고 피해자도 많은 재난, 즉 사람들이 관심을 끌만한 재난을 말이다. 재난은 어느 정도 규모가 돼야하고 새로워야 하며 이야기가 있어야 이슈가 된다. 소설 속 자연재해 뿐 아니라 우리 일상의 사건 사고에도 똑같이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가.


"모든 재난이 눈길을 끌 수는 없잖아요. 이슈가 되는 재난들은 따로 있어요. 보통 이 세가지 요소를 충족시켜야 하죠. 일단, 규모가 어느 정도 이상은 될 것. (…) 어느 정도 규모가 있어야 바쁜 사람들이 시간을 내서 동정하고 주목해 준다 그겁니다. 세상이 너무 자극적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관심이란 건 정직한 거니까요. 둘째로 새로운 지역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 연민에도 권태가 올 수 있으니까요. (…) 마지막은,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바로 스토립니다. 재난이 벌어진 후에 사람들이 신문을 뒤적이는 건, 재난의 끔찍함을 보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 만신창이 속에서 피어난 감동 스토리를 찾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죠. 그건 우리가 자주 잊고 사는 거거든요."

pp.143-144


무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예정된 재난을 파악하지 못한다. 기업은 단계적으로 정보를 차단해 재난에 휩쓸릴 사람들이 사건의 전말을 연결하지 못하게 만든다. 인공 재난을 조장하는 무리에 끼어서 한국에 돌아갈 날만 기다리던 요나는 자신과 마음을 나눴던 사람이 재난에 캐스팅되었음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과거형이 된 재난 앞에서 한없이 반듯해지고 용감해진다. 그러나 현재형 재난 앞에서는 조금 다르다. 이것이 재난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해도 방관하거나, 인식하면서도 조장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싱크홀은 저편 사막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p.175


요나는 재난을 만들어내는 자의 모습이 자신과 같다는 걸 깨닫고 다른 선택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자신의 역할을 바꾸기로. 멀리서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던 사건에 뛰어들기로. 그 순간 내내 마음 속에 있은 '억울함'은 비로소 '안도감'으로 변한다. 


이건 내 역할이 아니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요나는 그 억울함 끝에 설명할 수 없는 안도의 감정을 만난다. 자기 대신 럭이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조금은 다행이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 그렇게 믿지 않았던 감정의 굴곡 위로 지금 요나는 흘러간다.

p.199


재난의 현장을 관광한다는 설정은 현실과 동떨어진 디스토피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읽는 내내 책의 내용은 현실을 재난 상황을 중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크고 작은 사고가 났을 때 우리는 소설에서 말하는 재난이 이슈가 되는 세 가지 원칙에 따라 뉴스를 선별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곧 객관적인 자세로 멀리 떨어져서 관광을 시작하고 있지는 않은지. 소설 초반에 재난이 닥쳤던 한국의 진해와 이야기 마지막에 무이에 닥친 '쓰나미'가 연결돼 있다. 재난 관광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 재난 관광지가 될 수도 있다. 고통을 객관화하고 있지 않은지 숙고해야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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