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전철을 타면서 이번주 <씨네21>을 집어들었고("포르노 혁명은 어떻게 시작됐나"라는 기사제목도 눈에 띄고 해서),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끄트머리쯤에서 씨네 블로그 소식란에 '타르코프스키가 묻혀 있는 묘지에 다녀오다'(http://blog.cine21.com/spotkanie)를 읽었다. 내용은 대략  "1986년 12월 29일,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가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2005년 12월 28일,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를 추모하러 레지던스 감독들 셋과 그의 친구들이 파리 근교에 있는 묘지에 다녀왔다. 파리에 러시아처럼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이었다."라는 것. "기념일이니 많은 추모객이 와 있고 콘서트도 열릴 예정이라는 정보에 쉽게 무덤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묘지는 너무 조용했다"고.

일행은 20주년인 줄 알고 갔지만, 계산대로 20주년이 되는 건 올 2006년 12월 29일이다. 그리고 러시아식으로 하자면, 지난 7일이 크리스마스였으니까 내일 모레가 그의 사망 19주기가 될 듯하다. 망명감독이었던 만큼 그가 러시아 밖에 묻혀 있다는 건 자연스럽지만 그가 파리 근교에 묻혀 있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두 달 전에 올해가 사망 20주년이 된다는 걸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기회가 닿은 김에 그에 대하 몇 가지 이미지들을 띄워놓는다(당연한 일이지만,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글을 한편 쓰는 것이 올해의 목표 중 하나이다). 먼저 블로거님이 올려놓은 묘지 사진들 중 두 장(원경과 근경).

그의 묘비에 생몰연대와 함께 기록돼 있는 건 러시아어로 '천사를 본 사람에게 (바침)'란 뜻이다. 말하자면, '천사를 본 사람'이 그의 묘비명이 되겠다. 묘비 옆에 놓여 있는 건 러시아 정교의 상징물인 성모상(이콘화)이다. 아직 시들지 않은 붉은 카네이션(?)이 화병에 꽂혀 있는데, 마음으로나마 꽃송이를 더 보탠다.

'천사를 본 사람'이라고 돼 있지만, 사실 타르코프스키 자신을 천사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독일 감독 빈 벤더스가 그런 경우이다. 페터 한트케의 대사 “아이가 아이였을 때, 이런 질문을 하던 때가 있었다. 왜 나는 네가 아니라 나인가?"로 시작되는 그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1987; 영어제목은 <욕망의 날개>)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전에 천사였던 오즈 야스지로, 프랑수아 트뤼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친다는 자막이 엔드타이틀로 들어가 있다(내가 그 영화를 제일 처음 본 건 아주 오랜 전 남산 독일문화원에서였다. 미어터지는 관객들 때문에 끼니도 굶었던 그날 나는 줄곧 서서 영어자막의 이 '흑백' 영화를 봐야했다. 그 전에 보았던 <파리, 텍사스>가 아니었다면 그런 수고를 무릅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벤더스 영화제가 연초부터 개최되어 진행중이기도 하다(일시 2006년 1월 3일(화)~2006년 1월 10일(화) I 장소 서울아트시네마 I 상영작 <베를린 천사의 시><랜드 오브 플렌티> 등 5편). 소식을 전한 기자는 70년대 대표작들인 <페널티킥을 맞이한 골키퍼의 불안><도시의 앨리스><길 위의 왕들>이 빠져 있어서 아쉽다고 했는데, 그 점은 나도 아쉽다. <베를린 천사의 시> 이후로 벤더스의 영화는 내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려나 이 참에 타르코프스키의 필모그라피를 한번 따라가본다(이미지들은 러시아의 타르코프스키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1. 증기롤러와 바이올린(1960, 46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모스크바영화학교 졸업작품이고 뉴욕학생영화제(1961)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나는 화질이 안 좋은 복사본으로 두어 차례 영화를 봤었는데, 길을 닦는 증기롤러 기사와 바이올린 레슨을 받는 한 어린 학생간의 짧은 만남을 줄거리로 한 영화.

2. 이반의 어린시절(1962, 96분)

타르코프스키의 공식적인 '데뷔작'. V. 보고볼로프의 소설 <이반>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다. 장르상 '전쟁영화'이면서 '비극적 서사시'로 분류되기도 한다. 6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장상 수상작이고, 철학자 사르트르가 '초현실적 리얼리즘' 영화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나는 좋은 화질과 나쁜 화질로 두 번쯤 봤는데, 장편영화 중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지 않다.

3.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 185분)

장르는 사극, 즉 역사드라마인데, 제목 그대로 러시아의 전설적인 성상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학교 동기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와 함께 각본을 썼는데, 루블료프의 전기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만큼 몇 개의 일화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야심작'이면서 그의 영화로선 가장 방대한 스케일을 자랑하지만 권력과의 마찰을 빚기 시작하면서 이후 감독으로서의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게 된 작품.  

4. 솔라리스(1972, 169분)

알려진 바대로 스타니슬라프 렘의 SF소설을 원작을 한 영화(렘은 영화에 불만을 표시했었다. 사실 타르코프스키는 'SF'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몇 년 전에 스티븐 소더버그가 리메이크함으로써 다시금 관심을 끈 바 있다. 1972년 칸느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5. 거울(1975, 108분)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어머니에게 바쳐진 가장 '자전적인' 영화. 그의 노모가 직접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 이미지는 도입부에서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 타르코프스키의 아버지 '아르세니'는 러시아의 저명한 시인이며 <거울>과 <향수> 등에 나오는 시들은 모두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시이다.

6. 잠입자(1979, 163분)

타르코프스키가  러시아에서 찍은 마지막 영화. 러시아의 대표적 SF작가인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하지만, 역시나 영화의 방점은 'SF'와 무관하다. 1982년 칸느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 이미지는 영화 속 주인공, '잠입자' 혹은 '안내인'의 모습.  

7. 향수(1983, 127분)

이탈리아의 한 온천을 배경을 한 영화이며, 1980년대 서구 평단에 '타르코프스키 르네상스'를 가져온 작품. '80년대 국내에서 타르코프스키가 '전설'로만 회자될 때 가장 자주 들먹여지던 작품이 이 <노스텔지아>와 유작인 <희생>이었다. 주연을 맡은 배우 올렉 얀코프스키는 최근까지도 현역 배우로서 영화를 찍고 있다. 이 영화로 타르코프스키는 로베르 브레송과 함께 칸느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공동 수상했다.

8. 희생(1986, 153분)

잉마르 베르이만의 주선으로 스웨덴에서 만든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영화를 찍을 당시 그는 암투병중이었으며, 그는 이 영화를 자신의 아들에게 바친다. 국내에는 1995년에 처음 개봉되어 예상'밖'의 관객들을 동원하기도 했었다(그리고 작년 봄에는 이를 기념하여 <노스텔지아>와 함께 재개봉되기도 했었다). 1986년 제39회 칸느 영화제에서 유일무이하게 그랑프리, 예술 공헌상, 기술상, 국제 영화 비평가 협회상 등 4개 부문 동시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작품. 곧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예술의 '신화'가 되었다. 여러 번 영화를 봤지만, 위의 이미지는 기억에 없다(어찌된 것인지?). 흔히 알려진 런닝타임(143분)보다 10분 더 긴 것과 관련돼 있는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미지는 아래와 같은 것이다.

영화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는 그냥 멋쩍음을 덜기 위해서 집어넣은 것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물론 다른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장편 영화들은 5작품 '컬렉션'을 비롯해서 모두 출시돼 있다. 그리고 <봉인된 시간>과 <순교일기>도 아쉬운 대로 소개돼 있고. 하지만, 본격적인 영화론이 할 만한 책이 김용규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이론과 실천, 2004)밖에 없다는 건 유감이다. 전문가의 글로는 <세계영화작가론2>(이론과실천, 1994)에 실린 정성일의 타르코프스키론이 '전설'로 회자되고 있는 정도이다(언젠가 '러시아영화감상'이란 수업을 할 때 리포트를 받으면, 타르코프스키론의 1/3 정도는 이 글을 베껴쓴 것이었다). 타르코프스키에게 빚진 바 없는 이들이라면 상관없는 얘기이지만, 그게 아닌 이들이라면 분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본격적인 감독론은 아니지만, 타르코프스키를 부분적으로 다룬 책들은 여럿이다. '클라시커 50'의 <영화감독>(해냄, 2004)에서 개괄적인 소개를 참조할 수 있고, '시사인물사전' <쾌락의 독재>(인물과사상사, 2000)에도 타르코프스키가 항목으로 포함돼 있다. 이윤영의 <영화, 피그말리온의 꿈>(문학과지성사, 1999), 조광제의 <인간을 넘어선 영화예술>(동녘, 2000), 송희복의 <영화, 뮤즈를 만나다>(문예출판사, 1999) 등에도 타르코프스키론이 실려 있다(이윤영의 글 정도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들로는 한창호의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돌베개, 2005)와 김정란의 <빛은 사방에 있다>(한얼미디어, 2005)가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장을 포함하고 있다. 후자에 실린 '타르코프스키를 만나다’에서는 저자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과 상상 속에서 나눈 대화를 담고 있다고 한다(이 두 권의 책은 아직 읽지 못했다)...  

 

 

 

 

06.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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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5-01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가져가요. 필요해서. 그림이 안보여요. 영화포스터들.

로쟈 2007-05-0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새 다운됐네요.--;
 

'1963년의 성탄절'이란 제목을 달았다가 '브로드스키의 성탄절'로 고친다. 아래에 옮겨온 글은 원래 재작년, 그러니까 2004년 성탄절에 쓴 것인데, 러시아의 시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의  시 '성탄-1963'에 대한 '읽기'이다. 제목 그대로 성탄을 기념하는 시인데, 씌어진 것은 1964년 1월이다.  러시아에서는 축일을 구력에 따르기 때문에 1월 7일, 그러니까 내일이 성탄절이며,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이다(메리 크리스마스!). 어느 새 '재작년'이 돼 버린 기억을 잠시 떠올리며, 성탄시를 옮겨놓고 이미지들을 띄워놓는다(아래의 사진은 역시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데릭 월코트와 브로드스키. 월코트의 수상작은 <오메로스>(고려원, 1994)이다).

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1940-1996)는 성탄절에 관한 시들만으로 시집 한 권 분량을 썼기 때문이다. 그는 거의 해마다 성탄을 기념하는 시들을 썼으며, 그가 쓴 성탄시들이 대략 20편 정도 된다. 17세 때부터 시 번역(주로 영시 번역)을 하면서 습작을 겸했던 이 마지막 러시아 시인이 (노동을 하는 대신에) 시를 쓴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되는 것이 1964년이다(예외는 예외로서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는 것이 1972년이며, 거기서 그는 러시아어와 영어로 시를 쓰고(짐작에 영시인으로서의 그는 존 단과 T. S. 엘리엇 계보에 속한다) 강단에서 시를 강의한다(나보코프가 러시아 망명문단의 가장 탁월한 소설가였다면, 브로드스키는 가장 재능있는 시인이었다).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1988년에서야(그러니까 노벨상 수상 이후에서야) 비로소 그의 시집들이 러시아에서도 공식 출간되며, 1992-97년 사이에 4권짜리 전집이 출간됐고, 현재는 2권에서 7권짜리까지의 다양한 전집들이 나와 있다. 그리고, 뛰어난 에세이들과 두꺼운 인터뷰집들도. 한국에서 그가 소개된 것도 물론 노벨상 수상 직후이다. 기억에 두 권의 번역 시선집, <소래 없는 노래>(열린책들), <겨울물고기>(정음사)가 (부랴부랴) 나왔고, 나중에<아름다운 시대의 종말>(문학사상사)인가란 또 다른 시집이 번역/소개됐다(제목에 20세기가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안정효가 옮긴 그의 에세이집<하나 반짜리 방에서>(고려원)도 나왔는데, 이 책이 노벨상 수상 이전에 나왔는지 이후에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번역시집들이야 대개 그렇듯이 독서용이라기보다는 장서용이기 때문에(겨울 물고기란 시 정도만 인상에 남는다. 우리말로도 시였기 때문에), 브로드스키가 우리에게 소개는 되었지만, 데리다의 표현에 따르면 정말로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다만, 노벨상 작가/시인으로, 고상한 상품으로 잠시 우리에게 다가왔다가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지나가버렸던 건 아닐까? 이젠 브로드스키를 전공한 러시아문학도들도 없지 않으므로(두엇 된다) 그의 작품세계가 보다 본격적으로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물론 읽기가 쉬운 건, 인터뷰와 에세이, 그리고 시집 순이다).

 

브로드스키에 대한 문단들을 쓰면서 CD로 나와 있는(국립문학박물관에서 제작한 것으로 16편의 시를 시인이 직접 낭송하고 있는데, 1시간이 좀 안되는 분량이다) 그의 시낭송을 오랜만에 들었는데, 얼핏 들으면 독일시를 낭송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약한 비음이 많이 섞여 있는데, 호흡기쪽에 문제가 있지 않았던가 싶다). 하여간에 그의 시들을 읽을 때는 그의 목소리를 참조하여, 그의 목소리로 읽게 될 것이다(이게 포노센트리즘음성중심주의이다. 형이상학에서뿐만 아니라 시 읽기에서 음성중심주의는 불가피하다). 그렇게 한번 시험 삼아 읽어본다. 그가 23살의 성탄절을 기념하여 쓴 시<1963년의 성탄절>(1964년 1월에 완성한 걸로 돼 있다)인데, 제목을 직역하면 그냥<성탄 1963>이다. 그러니까 이때의 성탄(聖誕)은 해마다 찾아오는 성탄절이 아니라, 기원 1년, 아기 예수의 탄생일을 가리킨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면, 성탄절은 이 성탄의 반복(불)가능성에 근거한다. 아래는 1960년대말의 브로드스키.

 


전체 12행 중 마지막 4행은 이렇게 돼 있다(첫 4행을 반복/변주하고 있는데, 시 분석 시간이 아니므로 이런 자세한 내막은 생략한다. 그러니까 이 시의 1/3만 읽도록 한다. 일종의 맛보기로). 물론 (러시아어의) 키릴 알파벳으로 읽힐 수는 없기 때문에, 로만 알파벳과 우리말로 음역한다(굵은 글씨에 강세를 주어 읽으면 된다).


Volkhby prishli. Mladenech krepko spal.

Krutye svody jasli okruzhali.

Kruzhilsja sneg. Klubilsja belyj par.

Lezhal mladenech, i dary lezhali.

 

발흐 쁘리슐리. 믈라제네츠 끄렙까 스.

끄루띄예 즈슬리 아끄루좔리.

끄루쥘샤 스. 끌루샤 벨르이 르.

믈라제네츠, 이 다리.


이게 일단 무슨 뜻인가를 보이기 위해서 (대충 직역해본) 영역과 우리말 번역을 제시한다.


Magicians had come. A Baby was sleeping fast.

Round arches surrounded the trough.

Snows were swirling. White vapor was whirling.

The Baby was lying, and the gifts were laid.

 

동방박사들이 왔다네. 아기 예수는 곤히 잠들어 있었네.

둥근 아치의 기둥들이 구유를 둘러싸고 있었네.

눈들이 원무(圓舞)를 그리고, 하얀 입김이 맴돌았네.

아기 예수는 누워 있고, 선물들이 놓였다네.

 


세 명의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점치고서 예루살렘으로 찾아와 요셉과 마리아에게 선물을 증정했다는 얘기는 성탄과 관련하여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이다. 그 동방박사가 러시아어로는 볼흐브(Volkhv)인데, 마법사/점성술사라는 뜻이다(물론 이 경우는 좋은마법사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magician이라고 옮겼는데(실제로는 어떻게 옮겨지는지 알지 못한다. 영어 성경을 읽은바 없기 때문에), 이게 우리말로 박사인 것이 재미있다. 이런 용례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면, 박사는 모름지기 별점도 볼 줄 알고, 제법 마법도 부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하니, 우리 주변엔 엉터리박사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


 

 

 

 

 

 

 

 

옆길로 잠시 새는 얘기지만, 사실 박사(博士)란 말의 어의(語義)는 널리 아는 사람이다(넓을 박이니까). 그런데, 그 박사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1)대학에서 수여하는 가장 높은 학위. 또는 그 학위를 딴 사람. (2)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이런 박사의 줄임말이 이다. 내가 어제 김박, 이박하고 저녁을 먹었지.에서 김박’‘이박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럼, 쿠웨이트 박도?). 그러한 제도적인/비유적인 정의에서 나는 넓을 박의 원형을 발견하지 못하겠다. 어떤 일의 전문가를 박사라고 칭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요즘의 박사들은 밤하늘을 쳐다보는 대신에 한 우물만 판 사람들을 가리킨다(해서,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그러했듯이, 별만 쳐다보고 다니다가는 그런 우물에 빠지기 십상이다. 요즘은 철학 전공자들도 밤하늘을 쳐다보기보다는 우물이나 파지만).


그러니까 요즘 쓰는 박사라는 말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들어가 있다. 널리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한 주제에 대해서) 깊이 아는 사람, 다르게 말하면, 좁게 아는 사람박사이니까 말이다(가령 협사(狹士)가 아니라). 해서 이러한 추세에 따르자면, 널리 아는 박사는 박사로서 의심스러운 사람이며, 척척박사는 사이비-박사의 별칭이다. 좁게 아는 사람으로서의 진짜 박사들은 보통 자신의 무지를 용맹정진에의 표식 혹은 부산물로 간주하는바, 이들이 주로 내세우는 것이 전공 타령이다(이 전공에는 내 전공남의 전공이 있으며, 서로간에 간섭을 안 하는 것이 예의이다).

 


전공(專攻)이란 말의 어의는 오로지 (하나만) 친다이다(더 리얼하게 말하면, 한 놈만 족친다). 여기서 친다(攻)란 말을 보다 친근한 말로 바꾸면 물고 늘어지다가 될 것이다. 즉, 전공이란 자기가 물고 늘어지는 한 가지를 가리킨다. 가령, 연애가 전공인 사람은 연애만을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다. 연애(戀愛)가 뜻하는바, 밤낮으로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즉, 사모/사랑에 눈먼, 연애에 눈먼 사람이다. 거기서 알 수 있는바, 오로지 하나만을 물고 늘어지기의 가능조건은 눈멂이다. 한 우물 파기의 전제조건 또한 눈멂이다. 오호, 두더지들! 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진짜 박사들, 곧 두더지-박사들이 주로 하는 일이란 자기 앞가림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들은 자기 앞가림을 위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을, 세상을 근심하며 살피는 눈을 찌른 이들이다. 보고 있지만 보지 않기 위해서, 알고 있지만 모른 체하기 위해서, 혹은 알아야 하지만 알지 않기 위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이 두더지-박사들과 대조되는 것이 마법사/점성술사로서의 동방박사들이다. 그들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고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감하고 사막의 먼 길을 찾아온다. 예루살렘의 한 허름한 마구간까지(우리는 흔히 마구간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서 알게 된 거지만 동굴이라고도 있다. 마구간이 동굴에 있었다고 하면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탄생, 곧 성탄(聖誕)을 축하하기 위해서 말이다. 인용한 브로드스키의 바로 앞 시구에 따르면, 바로 이 날 밤부터 삶의 계산이 시작되었다(쥐즈니 스트 나취짜 스 에또이 취). 여기서 삶의 계산(zhizni schet)라는 건 브로드스키의 고유한 표현인데, 영어로 하면 account of life정도가 될 듯하다. 그건 무슨 뜻일까?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가 쓰고 있는 서력(西曆)의 시작이 바로 이 기원년, 즉 애노 도미나이(A.D.; Anno Domini)로부터가 아닌가. 그러니까 아기 예수가 탄생한 바로 그날, 바로 그 해로부터 삶의 카운트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말은 틀린 얘기가 아니다. 그 카운트가 시작된 것이 바로 2004년 전이고 오늘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시간을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관습을 고려해본다면(이건 거의 관습법이다), 성탄일이 갖는 에포크(epoch)적 의미를 간취할 수 있을 것이다. 성탄절은 그런 에포크적 계기의 반복(불)가능성을 표시한다.


일상적으로도 성탄절인 25일부터 31일까지는 한 해의 마지막 한 주이다. 해서 한 해의 계산(=어카운트)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한 해의 손익을 계산하고(무얼 잃고 건졌는가? 누굴 차고 누구한테 채였는가?), 몇 점짜리 한 해였는가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그걸 좀 좀스런 차원이라고 한다면, 좀 거창하게는 인생/인류의 구원에 대해서 계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지나온 나/우리의 생애가 구제/구원 받을 만한 것인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삶의 계산은 복합적이며 복잡하다(왜 아니겠는가? 하나부터 세기 시작했지만, 벌써 2004이고, 곧 2005가 되는데!). 성탄일이 갖는 이러한 에포크적 계기는 현상학적 에포케(epoche), 곧 판단중지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간의 원점이면서 계산의 영점이기 때문이다. 그걸 브로드스키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그의 시구를 다시 읽어보자. 이번엔 반복되는 소리에 주의하면서.


발흐븨 쁘리슐리. 믈라제네츠 끄렙까 스빨.

끄루띄예 즈보듸 야슬리 아끄루좔리.

끄루쥘샤 스녝. 끌루빌샤 벨르이 빠르.

리좔 믈라제네츠, 이 다릐 리좔리.


여기서 반복되는 소리인 끄루(끌루)이란 뜻의 러시아어 끄룩(krug)과 어원을 같이한다. 그러니까 기의(시니피에)상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기표(시니피앙)/소리상으로는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백코러스나 백댄서처럼). 그걸 나는 둥근(아치), 원무(를 그리고), (돌았네)라는 식으로 옮겨봤지만(원무를 그리다, 맴돌다는 원래 소용돌이치다란 동사를 옮긴 것이다), 그것은 소리의 번안일 뿐이지 번역은 아니다. 시에서는 음향적인 내용이 논리적인(=로고스적) 내용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시의 번역가능성은 동시에 번역불가능성이다. 아니, 그 불가능성을 옮기는 것이 시의 번역이다. 다행히, 시에는 그런 음향적인 내용 외에도 논리적인 내용이 가미가 되며, 그걸 옮기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인용한 대목의 중간 두 행을 보자.


둥근 아치의 기둥들이 구유를 둘러싸고 있었네.

눈보라가 원을 그리고, 하얀 입김이 맴돌았네.


여기서 둥근 아치와 (마구간의) 구유는 의미론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들이다(즉 8월의 크리스마스같은 것이다). 둥근 아치가 사원/성당(聖堂)의 배경이라면 구유는 마구간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치들이 구유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시인은 아기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을 성당화한다. 이것이 소위 성체화(聖體化; transubstantiation)이다.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성체화이다(성체화는 나의 번역이고, 신학에서 뭐라고 번역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이 기적아닌가? 마구간이 성소(聖所)가 되는 것 말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져온 이 기적은 바다를 가르는 식의 모세의 기적과는 다르다. 모세의기적이 반복적인 일상에 날벼락을 가져오는/내리는 것이라면, 예수의 기적은 그냥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즉 무의미한 삶이 어느 순간 의미 있는 삶으로 전도되는 것이다(즉, 땡전 한푼 없던 삶이 뭔가 의미깨나 있는/있을 삶으로 카운트되기 시작하는 것). 이를 테면, 그것은 기적 없는 기적(miracle without miracle)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그리고 그의 삶은 그러한 기적, 기적 없는 기적의 가능성을 지시한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니.라는 식의 포교 문구를 나는 그냥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참고로 말하자면, 불경스럽게도 나는 신도 내세도 구원도 믿지 않지만, 시는 믿는다. 브로드스키가 보여주듯이 시에서도, 그리고 문학에서도 성체화의 기적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구원 없는 구원 말이다. 여보게, 예수 가라사대, 이 마구간 같은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군! 여기가 성당이요, 천국이래. 아니, 궁전이고, 타워 팰리스래! 그래요? 거기도 마구간이래요?

 

이어지는 행에서 시인은 눈들이 원무를 그리고, 하얀 입김이 맴돌았네.라고 쓰는데, 눈들은 아마도 천사들을 대행하는 듯하다(하얀 입김은 아기 예수의 여린 입김일까?). 그런데, 어인 눈일까? 원래의 배경에서라면, 즉 예루살렘에서라면 눈보라 대신에 몰아쳐야 할 것은 모래바람 아닌가? 여기서 힌트를 주는 것은 제목의 1963이다. 즉 1963년에 젊은 (자칭) 시인 브로드스키가 놓여있는 공간, (눈보라 치는) 레닌그라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참고로, 1960년대 러시아시는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옙투센코나 보즈네센스키 등의 체육관 시인들이 한쪽에 위치하고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레닌그라드파라 불린 언더그라운드 시인들이 있었는바, 안나 아흐마토바가 이들의 대모(大母)였으며 브로드스키는 이 후자에 속한다. 그는 전자의 시인들을 혐오했다).


해서, 마구간 바깥에 눈들이 원무를 그린다(눈보라의 소용돌이가 일어난다)는 배경설정은 공간적인 오버랩이면서 시간적인 오버랩이다. 그것은 1963년이란 시간을 기원년의 시간으로 성체화한다. 그런 식으로 고작 두 행을 가지고서 시는 마구간을 성소로, 그리고 1963년을 그리스도의 시간(in the year of our Lord)으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시의 기적이며, 이 기적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기 예수의 탄생이다. 그러니, 브로드스키가 해마다 성탄에 관한 시를 쓰고자 했던 것은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인류 역사상 그만한 이벤트를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는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축복했던 우리의 동방박사들은 그런 의미에서 브로드스키의 선조(先祖)이자 시인들이다. 그들이 어떤 축원의 말을 남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에서는 그들이 남긴 선물이 기록돼 있다. 시의 마지막행이다.


아기 예수는 누워 있고, 선물들이 놓였다네.

 


원시에서 누워 있다’‘놓여 있다는 같은 동사이며, 이 시행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구문적으로도 동일하다. 그것이 암시적으로 뜻하는 바는 아기예수=선물이라는 것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는 사건이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뜻하는 선물이었다면, 동방박사들은 인간을 대표해서 거기에 답례를 했던 것이다(그러니까 동방박사들이 먼저 선물한 것이 아니다). 이 선물의 교환이 신과 인간 사이의 비대칭적 교환이다. 그것이 비대칭적인 것은 아기 예수(단수)와 선물들(복수)의 교환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마지막 시행을 다시 읽어보자.


리좔 믈라제네츠, 이 다릐 리좔


이 시 전체가 원환적인 구조로 돼 있다고 언급했지만, 이 마지막 시행도 원환적이다. 같은 소리로 열리고 닫히기 때문이다. 보통 원(환)은 완전성과 영원성의 상징이다. 그러니 성탄에 관한 시가 그러한 원환적 구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반면에 이 시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내 생각에) 아기 예수의 부모, 즉 요셉과 마리아가 등장하지 않는 점이다(앞부분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건 좀 특이한 일이다(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이게 왜 그럴까를 캐기 위해서는 아마도 브로드스키의 다른 시들과 함께 성탄과 관련한 시와 그림들을 좀더 뒤적여봐야 할 것이다. 그런 게 ‘공부’이긴 하지만, 내가 당장에 해치울 수 있는 공부는 아니다. 그런 공부를 하기에는 돈깨나/시간깨나 부족하다. 현재의 나로선 말이다...

 

 

06. 0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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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7 0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1-07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사람의 운명이란 게 그렇죠? 저 같은 경우는 지도교수님의 '재미있는' 강의에 빠지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게 '경지'인지 '지경'인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돌바람 2006-01-10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한 편의 조각을 이리 감상하는 것도 참 특별한 경험입니다. <겨울 물고기>랑 <하나도 채 못되는>(성원, 한벙운 옮김, 1987)만 맛보고 드는 단순한 생각 하나.
브로드스키는 1972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의 자신을 이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나는 분명하고 명확하게 그들을 볼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이 얘기는 내 어린시절의 향수 때문이 아니라 내가 떠나온 모국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 지금이 아닌 그 당시 그들의 생활 속에는 지금의 내가 어린 나이로 기억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잘 기억하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 그러나 지금의 나,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그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더우기 지금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지 않은가? 아! 지금이 미국과 나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는데, 그리고 이것이 내가 그들과 우리의 방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인용한 부분에서 '그들'은 시를 쓴다는 이유로 그를 감옥에 쳐넣은 그의 조국일 수도 있고 직접적으로는 그를 기억하는 부모이자 페테르부르크인들(레닌그라드인이 아닌.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일 수도 있겠지요. 포커스를 맞춰서 본다면, 브로드스키는 예수를 부모의 기억과 예수가 예수로서 자신을 바라보는(1973년 이후의 브로드스키처럼) 공동의 기억 공간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예수가 예수가 되려면 예수가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저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끼워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내(예수)가 그들(요셉과 마리아)과 우리의 방(성탄??)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이건 좀 위험한 생각이지만, 예수가 예수가 되려면 그의 탄생은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동방박사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깨달은 이후(브로드스키에게는 1973년 이후가 되겠지요) 바라보는 자신의 탄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참 인간적인 예수이지요. 위의 인용구는 브로드스키가 그의 에세이에서 꾸준히 강조하는 맥락이라는 점에서 인용한 것이어요.^^

*에세이만 보고 끼워맞추다 보니 기냥 억측이 난무합니다. 시집이 없으니 으그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요. 아, 하나 더.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도 쬐끔 맛보여주심 안 되나요?

로쟈 2006-01-10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미하며 읽으셨군요.^^ 브로드스키의 에세이까지 소장하고 계신 분은 드물게 만나는지라 반갑습니다. 제가 분석한 시는 청년 브로드스키의 소품이고, 같은 테마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두루 살펴봐야 종합적인 의견을 제출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아흐마토바의 시도 읽으신 듯한데,'푸슈킨과 아흐마토바'란 주제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아흐마토바 시 읽기가 언제 가능할는지는 미지수입니다. 돌바람님의 주문을 한켠에 담아두고 있겠습니다...

돌바람 2006-01-11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청년 시절의 시로군요. 헛다리 짚었네요.
아흐마토바의 시는 브로드스키를 통해 부분 인용된 것들만 보았답니다.
 

 

 

 

 

<30분에 읽는 도스토예프스키>(랜덤하우스중앙, 2005)를 읽었다. 이 '30분 시리즈'에서 <니체>와 함께 지난주에 구입한 책인데, 비록 만만한 분량이긴 하나 30분은 족히 더 걸리고 아마 1시간 정도는 투자해서 읽어야 할 분량. 물론 이런 가이드북에 큰 기대를 걸어서는 곤란하지만, 책은 기대보다는 잘 짜여져 있으며 저자 로즈 밀러의 식견 또한 여간한 수준은 아니다. 그는 주로 영어권 연구서들을 참조하고 있는데, 이래저래 알려주는 정보도 요긴하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모출스키의 <도스토예프스키>(책세상, 2000)와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공부 요령이기도 한데, 어떤 주제나 인물에 대해서 좀 두꺼운 책과 얇은 책을 나란히 읽으면 '정리'와 '부연설명'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데, 번역 자체가 비교적 만족스러운 <니체>에 비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몇 가지 오류가 눈에 띈다. 주로 러시아 인명과 관련된 것들인데, 직접적으로는 역자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은 그닥 참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어서 씁쓸하다(교정자도 안 읽었다는 얘기이고). 비근한 예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맏형 드미트리의 애칭이다. 영어 표기로는 'Mitya'가 되는데, 이걸 '미챠(미쨔)' 대신에 '미트야'로 옮긴 것. '카테리나'의 애칭 'Katya'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카챠(까쨔)' 대신에 '카트야'가 돼 버렸는데, 좀 우스운 해프닝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친구였던 비평가 '스트라호프(Strakhov)'가 '스트라코프'로 옮겨진 것도 부주의하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사전>(열린책들, 2002)도 출간돼 있기 때문에 굳이 우리말 번역본을 직접 읽어보지 않더라도 고유명사 표기에서의 오류들은 피해갈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 참조하지 않은 것은 오만이거나 객기일 터이다.

또 그런 태도는 꼭 그 이상의 실수들을 낳게 된다. 책에서 여러 차례 인용되고 있는 연구서로 <도스토예프스키와 문학 창조과정>이 있는데, 역자는 그 저자를 '장 콕토'라고 옮겨 놓았다(86쪽 등). 터무니없는 오류인데, 'Dostoevsky and the Process of Literary Creation'란 연구서의 저자는 저자는 자크 카토(Jacques Catteau)이다. 원저는 불어이며, 저자 로즈 밀러는 영역본(캠브리지대 출판부, 1989)에서 인용하고 있다(원저는 불어권에서 나온 가장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이다). 또 135쪽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읽기(Reading Dostoevsky)>의 저자이자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인 'V. 테라스(Victor Terras)'를 'V. 테릿'이라고 옮긴 것도 오류이다. 아울러 본문에서 거명된 연구문헌들의 국역본이 참고문헌란에서 많이 누락돼 있는 것은 아쉽다. 요즘처럼 정보검색이 편리한 시대에 이런 누락이 발생하는 것은 그저 성실성의 문제일 뿐이다.

이런 류의 가이드북을 읽으면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만약에 내가 이런 책을 쓴다면'이다. 물론 관건은 분량이며, 얼마만큼 핵심을 압축해서 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라면 훨씬 두툼한 분량의 책을 써야하겠지만(나의 장기적인 목표는 2021년이다. 작가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 거기에 힌트가 될 만한 사항 하나. 92쪽에서 '자크 카토'를 인용하고 있는 대목: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고상한 인물들 중에서도 돈키호테는 가장 완성된 인물이다. 하지만 돈 키호테의 고상함은 그가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동시대 작가 투르게네프에게서 돈키호테가 햄릿과 함께 인물의 두 전형이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돈키호테의 짝은 그리스도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상함'과 돈키호테의 '우스꽝스러움'을 동시에 구현하고자 했던, 세계문학사에서 아마 유례가 드문 작가이다. 물론 <백치>의 주인공 미슈킨(므이슈킨) 얘기이다. 사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자체가 진지함과 우스꽝스러움의 결합체이긴 하다.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세르반테스 이래의 산문문학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도 하다. 그 전통을 가까이로는 고골로부터 이어받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나는 그러한 전통을 '파토스(pathos)의 문학'에 견주어 '바토스(bathos)의 문학'이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내가 '바토스'란 단어를 처음 본 건 나보코프의 <러시아문학 강의>에서였던 듯한데, 그는 고골 문학의 특이한 정서를 '바토스'란 말로 표현했다. '돈강법'이라고 옮겨지는 바토스는 "점차로 끌어올린 장중한 어조를 갑자기 익살스럽게 떨어뜨리기"란 (음악)기법을 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파토스'에 상응하는 폭넓은 뜻으로 새기며, 그때 바토스는 고양된 정념과 익살의 혼종을 뜻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경애해마지 않는 것이 세르반테스에서 고골로, 도스토예프스키로 이어져오는 바로 그러한 '바토스의 문학'이다.   

세르반테스와 같은 스페인어권에서 그러한 바토스를 가장 숭고하게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 멕스코 영화의 거장 아르투로 립스테인의 <짙은 선홍색>(1996)이다(나는 지난 세기에 한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이 영화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는 것은 상당히 미스테리한 일이다). '내 인생의 걸작' 중 한편인데, 내용을 살짝 퍼오면 이렇다.

"뚱뚱하고 볼품없는, 게다가 입에서는 심한 구취까지 나는 간호사 코랄은 두 아이를 가진 과부다. 누군가의 관심이나 호감을 끌지 못하는 코랄. 그렇지만 누구 못지 않은 열정과 낭만을 내면에 갖고 있는 욕구불만의 여자다. 잘생긴 영화배우 샤를르 브와이에를 연모하는 코랄은 어느날 잡지에 실린 사교란에 자칭 샤를르 브와이에를 닮은 남자라는 니콜라스의 광고를 보고 가슴이 부풀어 편지를 쓴다. 샤를르 브와이에처럼 우아하고 매력적인 스페인 신사 니콜라스의 방문을 받은 코랄, 그녀는 한눈에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실상 그의 정체는 빈털터리에다가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쓰고, 엉터리 스페인 억양을 흉내내어 돈많고 홀로사는 여자들을 꼬셔 돈을 뜯어내는 삼류 제비였다."

"뚱뚱하고 못생긴데다가 재산도 없고 두 아이의 엄마인 코랄은 당연히 니콜라스의 표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차비마저 없는 빈털터리인 니콜라스는 코랄과 하룻밤을 보내고는 그녀의 지갑을 훔쳐서 달아난다. 그리고는 이내 그녀에 대해서는 잊는다. 그러던 어느날, 코랄이 두 아이를 데이고 니콜라스를 찾는다. 당황한 니콜라스는 그녀의 청혼을 단호히 거절하고 코랄에게 엄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한다. 실망한 코랄은 니콜라스가 자신의 아이들 때문에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길로 두 아이를 고아원 앞에 버리고 니콜라스의 집으로 돌아온다."(코랄이 엉엉 울면서 사랑을 위해 두 아이를 고아원에 버리는 장면은 압권 중의 하나이다.)

"니콜라스가 외출한 빈 집에서 코랄이 발견한 것은 자신과 똑같이 수많은 여자들에게서 온 편지와 사진, 그리고 NO가 그려진 자신의 편지였다. 코랄은 니콜라스의 과거의 의문스러운 약점을 잡아 니콜라스를 꼼짝 못하게 하고는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아이까지 버리고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코랄의 광적인 사랑에 감동받은 니콜라스는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제 둘은 동업자가 된 것이다. 코랄은 니콜라스의 사업이 번창하도록 돕기로 하고 표적이 될 여자들을 직접 고른다. 그러나 사업이 무르익어 갈때마다 질투심에 눈이 먼 코랄은 순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곤 한다. 이제 그들은 단순한 동업자가 아닌 피로 맺어진 불안하고 광적인 사랑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결국은 형장에까지 이르게 되는 이 커플의 엽기 살인행각을 따라가는 로드무비가 <짙은 선홍색>이다. 그리고 그런 게 내가 말하는 '바토스의 영화'이다.

 

 

 

 

또 다른 사례로 가령 낭만적 동경의 상징인 '푸른 꽃'의 경우는 어떤가? 나는 그 동경의 대상을 '푸르죽죽한 꽃'으로 변형시킨 시를 써보기도 했는데, 이런 식이다.    

  푸른 꽃향기에 나는 중독 되었구나 나는 눈이 멀었구나

  그대 살을 맞댄 자리에 이렇듯 깊이 박힌 대못이여, 내 몸의 가시여, 횡재여

  어느 입에 발린 사랑이 또한 나를 놓고 통곡을 하랴, 가슴을 치며, 물 말아먹으며

  마음의 일용할 양식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바대로 다 가져가리니

  가시를 묻은 자리에 피어나는 꽃들이여, 가시나무 꽃들이여

  너희의 다복한 일상에 어찌 찔리는 바 없지 않으랴

  우리가 서로를 아파하고 아프게 하며 이렇게 살아가는 음풍농월에 지화자,

  언젠가 햇빛 짱짱한 날에 백마 타고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우리를 

  개 패듯이 패리니

  그날에 마치 짙푸른 깻잎처럼 다시 푸르게 피어날

  목숨의 향연이여, 인과(因果)의 향연이여, 푸르죽죽한 꽃향기여!

 

여기엔 물론 노발리스의 '푸른 꽃', 이육사의 '광야', 니체의 '초인'의 어구나 이미지들이 혼종돼 있으며 그러한 혼종을 통해서 의도하는 효과가 '바토스'이다. 이 바토스는 파토스를 부정하면서도 보존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지양의 한 문학적 등가물이기도 하다. 언젠가 보다 체계적인 '바토스의 시학'에 바탕을 둔 도스토예프스키론을 쓰고자 한다. 그것이 내 인생의 한 목표, 즉 '푸르죽죽한 꽃'이다...

 

05.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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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9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1-29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한때는 제 별명이 '개그맨'이기도 했습니다. 실없이 웃긴다고...

토마스 2005-12-07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짙은 선홍색>은 국내에서 개봉된 바 있습니다^^
 

 

 

 

 

3년전 '한겨레21'에 러시아계 한국인 박노자 교수의 칼럼으로 도스토예프스키 비판이 두 차례 실린 적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카페도 운영하고 있었던지라 그와 관련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적은 생각들을 (그닥 달라진 바 없기에) 그대로 여기에 옮겨놓는다. 그리고 후반부엔 그때 다른 분이 퍼온 칼럼을 붙여놓는다. 그 글들은 <하얀 가면의 제국>(한겨레신문사, 2003)에 재수록돼 있다(나는 책을 갖고 있지만 다시 읽어보진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나라, 러시아'란 제목의 첫머리에.(사실, 그 글들의 초점은 도스토예프스키 자체라기보다는 러시아에 대한 한국인들의 스테레오타이프적인 선입관이 교정될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에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는 분리해서 고려해야 한다는 보는 입장이다.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증언대로라면), '위대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하다. 그것이 차이이다. 박노자 교수는 대개 (잡지 발행인으로서도 활동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시론(時論)을 근거로 하여 그의 국수주의적이고 반동적인 태도를 비판하지만, 그것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전모를 대신할 수는 없다(한 작가의 세계관이나 정치관이 그의 문학의 크기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박노자 교수도 작가의 '위대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거인'의 명암을 올바로 보자고 제안할 뿐이다. 내게 그 명암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결함'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더욱 신뢰하도록 만든다(나이브한 이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을 지지하며, 그의 정치학이나 윤리학은 자신의 <작가일기> 등에서 공표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편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의 현실과 인간조건을 (단순하게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복잡하게 사고했다. 소설은 복잡성의 정신이라는 쿤데라의 주장에 따라 그것을 달리 '소설의 승리'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치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쓴 답장입니다. 박노자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비판과 관련한 저의 견해이기도 하니까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정치와 별 상관이 없긴 하지만 좋아하는 작가인만큼 궁금하고, 또 박노자의 칼럼으로 더욱 궁금해졌거든요. 박노자의 말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 과정이 이해가 되는것도 아니구요. 그와 같이 다층적인 성격을 가졌던 사람이 황제에게 충성한 보수파였다거나 평생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이 정치와 별 상관이 없다는 건 좀 편향된 의견입니다.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한 특징은 시류적인 문제들에 대한 작가의 의견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투르게네프가 그러하고(그의 성격은 비사교적, 비정치적인데, 벨린스키와의 교우가 그를 사회소설 작가로 이끕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아서 대개의 소설이 페시미즘적인 결말을 갖고 있습니다),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러합니다. 톨스토이는 푸슈킨과 마찬가지로 좀 예외인데, 이들은 서구식 미학주의를 수용한 경우입니다. 즉 미는 진과 선의 영역과는 좀 다른 걸로 생각하는 것이죠.

-<안나 카레니나>를 쓴 이후의 톨스토이는 물론 자신의 그런 미학관을 포기/비판하고, '미=선'의 자리로 복귀합니다. 반면에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는 <친구들과의 왕복서한>이나 <작가일기> 등과 같은 저널적인 글들에서 아주 노골적으로 국수적인 슬라브주의와 러시아 정교주의를 지지하고 옹호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왈, "인간(유럽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한다."(*고골의 <친구들과의 왕복서한>은 근간 예정이고, 도스토에프스키의 <작가의 일기>(벽호, 1995)는 발췌역으로 나왔었는데 현재는 절판됐다.) 

"하지만 그의 타민족에 대한 관점은 상당히 편벽되고 유치한 수준이니(폴란드, 독일, 동양에 대한 경멸, 프랑스에 대한 선망과 멸시 등등. 러시아에 대한 자학적인 비판도 만만치 않지만), 그에겐 사회적인 시각에 대한 균형이 결여되어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적어도 인간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저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인간 도스토예프스키가 좀 구별된다고 봅니다)는 유치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건 그의 전기들에 묘사되고 있는 기묘한 성벽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 시각에 대한 균형의 결여'는 좀더 탐구해야 하는 주제인데, 가령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관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와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떻게 그처럼 위대한 철학자가 국수적 민족주의(나치즘)에 동조할 수 있었을까? 그건 어떤 '실수'가 아니라 그의 사상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어떤 성향의 발로로 보는 것이 최근의 시각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도 비슷하지 않을까요?(이 문제는 좀더 세밀한 논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인지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혼의 리얼리즘'은 곧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비약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죄와 벌>은 황당한 작품이었지요. <죄와 벌>을 읽은때가 몇 년 전인데, 그때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훨씬 자연스러웠거든요. 그렇게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파격을 행했던 사람이 갑자기 회심을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느낀대로 하자면 '자존심도 없는' 결말이었지요. 자기를 그렇게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가인데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죄와 벌>에 관한 건 좋은 지적이십니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이 되는 문제이구요. 라스콜리니코프의 '회심'은 정확히는 에필로그에서 이루어집니다.(이 주제에 관해서는 르네 지라르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김현 편,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에 부록으로 실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 에필로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적인 의견이 있었고, 저도 그러한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적어도 소설의 본문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서 회심의 계기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죠(그러면 에필로그의 회심은 좀 억지스러운 것이 될 터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페테르부르크라는 폐쇄적(악마적) 공간에서 그러한 회심이 가능하지 않게 묘사한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수도 있습니다.

 

 

 

 

-(독백적인!) 시사적인 글들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의 이문열이나 조갑제 스타일의 인물처럼 보입니다.(이문열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다고 봅니다. 바흐친이 다성악적 소설이라고 했지만, 거기엔 작가의 이념적 목소리는 결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도스토예프스키적) 소설의 승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의 소설들에선 어떠한 문제도 단순하게 처리되고 있지 않습니다.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는 <악령>만 하더라도 단순한 (소설이 아닌) 정치 팜플렛을 의도했지만, '소설'로 확장된 <악령>은 거대한 형이상학적 심연이 되고 맙니다. 그것을 단순한 정치적 주장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좀 무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의 소설들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뛰어넘고 있다고나 할까요(이 점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이문열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박노자의 세계와 한국] 2002년08월13일 제422호

거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암

-그의 끔찍한 군사주의·배타주의 사상은 빨갱이 딱지를 떼기 위한 노력이었나

1877년 말, 러시아와 터키의 전쟁이 막바지를 향할 무렵이다. 우세한 무기를 갖고 있는 러시아 군대는 터키의 수도인 이스탄불(비잔틴 제국 시절의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할 정도로 확실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서구의 금융자본에 의한 착취, 러시아의 끊임없는 남하, 근대화 부진으로 ‘유럽의 병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약해진 터키 제국은, 발칸 지역에 대한 패권을 러시아에 넘겨주는 셈이 되었다.

-독일인과 손잡고 프랑스를 박살내자?

30여년 뒤에 바로 발칸의 패권 문제가 발단이 되어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릴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줄 알 리 없는 러시아의 보수적 지식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라는 이슬람식 명칭을 그들은 외면한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토론하고 있다. ‘러시아 문명론’을 내놓은 당대 우파의 유명 논객 다닐레프스키(N.Y.Danilevsky)는, 콘스탄티노플을 “러시아를 위시한 모든 동방민족을 위한 자유 도시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꽤 관대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멸시와 러시아의 ‘영성’에 대한 거의 광적인 집착에서 다닐레브스키보다 한수 위인 우파의 저명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1821∼81)는 “그 따위 비열한 타협”이라며 단호하게 반대한다:

“러시아인과 기타 슬라브 민족들이 서로 비교라도 될 만한가? 러시아는 기타 슬라브의 각 민족보다 위대하고, 모든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도 그들보다 위대하다. 거인이 난쟁이들 보고 평등을 설교해봤자 쓸데없는 일 아닌가? 우리가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은 영원히 우리만의 도시로 남아야 하고, 콘스탄티노플과 인근 지역, 그리고 흑해와 지중해 사이의 해협을 지키기 위해 육·해군을 주둔해야 한다”(<작가의 일기>,1877년 11월)

이 정도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도덕성의 절대성과 인간의 심층적인 심리를 매우 깊숙이 아는 작가’로만 알고 있는 한국의 일반 독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무고한 생명을 살해한 일은 절대로 선(善)이 될 수 없다”는 이념을 기조로 전 세계의 독자를 매료시킨 <죄와 벌>을 쓴 사람이, 콘스탄티노플을 ‘우리 도시’로 만들기 위해 어느 정도로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야 하는지는 몰랐던 것일까? 위대한 인본주의자로 알려진 사람이 폭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일에 왜 그토록 열중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1인 잡지인 <작가의 일기>를 읽으면, 더 큰 수수께끼에 맞닥뜨린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짐승 같은’ 터키인들을 쫓아낸 뒤에 “사회주의의 모태가 된 프랑스를 독일인과 함께 손잡아 박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때문이다. 즉 권위주의적인 독일 제국과 함께 사회주의를 허용할 만큼 ‘타락한’ 민주적 프랑스를 멸망시키는 것이 러시아의 ‘민족적 사명’이라는 이야기다. 그 과정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슬람 짐승들과 적그리스도인 사회주의를 예수의 이름으로 이기는 성전(聖戰)”이라고 부른다.

-끈질긴 ‘훈육주의’경향

작품 속에서는 ‘생명 존중’을 그토록 강조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왜 자신의 사회 참여적인 잡지에서 이처럼 끔찍한 군사주의적·배타주의적 언어를 썼을까? 일설에 따르면 자신의 농노를 학대하다가 살해당한 가혹하고 속물적인 아버지를 두었고, 군사기술자학교(일종의 사관학교)에서 온갖 집단 괴롭히기를 목격·체험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었을 때부터 악(惡)의 문제에 대해 매서운 성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1840년대)에 그는 초기 사회주의적 성향의 혁명가와 어울려 개혁·혁명을 통한 악의 제거와 인간·사회의 개선을 꾀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젊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구도(求道)를, 제정 러시아 정권은 가혹하게 차단해버렸다. 갑작스러운 체포(1849년)와 사형 선고, 총살 현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영원한 듯한 수십분,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감형(사실 ‘훈육을 위한 연극’이었다.). 그 뒤 4년간 시베리아 감옥살이를 하고 졸병으로 오지에서 4년간 복무한 그에게는 ‘사상범 전과자’라는 빨갱이 딱지가 붙었다. 혁명적 신념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상황에서 망명을 하거나 혁명에 투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 사회주의를 포기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때부터 정반대 길을 가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불온한’ 과거를 애써 부정하고 오히려 반사회주의운동의 선봉에 서는 특별한 ‘충성’을 보인다. 특히 귀족계·황실과 관계가 가까워진 1870년대 후반에 그는 ‘빨갱이 딱지를 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일제 시대의 많은 전향자들처럼 러시아 제국의 국체(國體)인 정교회 신앙과 관제 민족주의로 돌아온 전향자 도스토예프스키는 ‘국체 명징(明徵)’- 즉 어용적 이념의 강조·선포- 에 남다른 공을 들였다.

‘전향’ 이후에도 그의 평생 화두인 ‘악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민의 형태는 완전히 바뀌었다. 악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단순한 표피’로 규정한 채 도스토예프스키는 ‘영혼 속의 악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종교적 색채가 강한 이러한 탐구는 종교를 명분으로 내거는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영혼 속에 악한 본질이 내재돼 있다는, 성악설(性惡說)적인 면모가 짙은 그의 결론은 러시아 국교인 정교회의 교리보다는 고대·중세의 신비주의적 이단인 그노시스교(Gnosticism·靈知敎)에 더 가깝기도 했다. 자신의 ‘온건함’을 입증하려는 욕망에 불탄 도스토예프스키는 교회와 국가의 역할을 더 강조했다. 러시아 진보진영으로부터 오랫동안 비웃음을 받아온 최초의 ‘반사회주의적 소설’ 가운데 하나인 <악령>을 쓴 1870년대의 도스토예프스키는, 교회와 국가가 없는 한 인간의 악한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 사회가 생지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 ‘기독교적 국가’의 광신도였다.

“하나님이 없는 한 모든 것들이 다 허용돼 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언은, “하나님의 신앙을 강요·훈육하는 교회와 국가가 없으면 모든 악이 허용돼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작가의 일기>에서 체벌과 범죄에 대한 엄벌을 옹호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끈질긴 훈육주의적 경향과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악을 억제해주는’ 국가와 교회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제1호 적이었다. 19세기 초반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책을 읽었을 뿐, 그 외의 진보운동 관련 소식을 보수적 신문을 통해서만 읽은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억제를 받지 못해 악한 본질이 발전된 적그리스도형 인간’으로 취급했다. 노동자들이 빼앗긴 여유의 자유, 경영 참여와 정치 참여의 자유를 노동자에게 돌려주려는 것이 사회주의의 취지였다는 것은, 사회주의를 배태한 유럽의 문화토양을 매우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작가로서의 위대성을 바로보기 위하여

그는 사회주의를 배태한 유럽- 특히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강한 프랑스- 의 자유주의마저도, ‘하나님의 은근한 부정’으로 규정해 저주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에 대한 인식이 그 정도였으면 러시아 제국의 경쟁자인 터키 같은 비유럽 국가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결국 ‘인간의 악한 본질을 억제하는 구세(救世)의 위업(偉業)’으로서 가장 ‘건전한’- 즉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러시아와 독일의 세계 제패는 그의 열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작가의 일기> 1877년 11월호에서 러시아 육·해군에 대한 애착과 관심의 비결은 바로 이 같은 세계관과 욕망의 구조였다.

이념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가 광적인 수구주의로 기울어졌다고 해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천부적 재능에 고생과 고민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의 저변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외부로부터의 훈육’에 대한 기대 심리, 국가 권력에 대한 거의 맹목적 시각 등을 바로 이해해야 그의 작가로서의 위대성도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거인의 명암을 다 아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거인에 대한 존중이 아닌가 싶다.

-이 글은 410호에(아래 참조) 실린 ‘도스토예프스키를 선망한다고?’를 읽은 독자들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요청해 쓴 것입니다. 편집자  

[박노자의 세계와 한국] 2002년05월22일 제410호

도스토예프스키를 선망한다고?

-한국과 러시아, ‘서구인들이 강요한 색안경’을 벗고 서로의 진실을 아는 길

88올림픽 때 미국과 축구 경기를 벌인 옛 소련팀이 한국 관중의 응원을 받아 미국인의 질투를 산 획기적인 사건이 어언 15년이 지났다. 두 나라의 관계가 그동안 온갖 기복을 거듭했지만, 민간교류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한국 유학생들이 러시아 대학의 외국 학생의 주종을 이루고, 러시아 출신의 노동자·기술자·상인·프로그래머 수천명이 한국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현재, 두 나라의 민간인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생소하지 않다. 그러면 그들은 이미 낯익은 서로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어떤 스테레오타이프(고정관념)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한·러 교류의 발전을 지켜봐온 필자는 이에 대해 간단한 인상을 적어보겠다.

-사실과 허위의식의 비율

한국과의 교류에 관여하는 러시아인 쪽의 ‘눈’을 이야기하면, 맨 처음 느끼는 것은 한국의 과거나 역사·문화에 대한 무지다. 한국학(내지 인접 학문)을 직업으로 하는 극소수를 제외한다면, 대다수의 한국 인식 수준은 서구인의 평균과 다르지 않다. 무지의 원인인 자국(自國)과 서구·미국 중심의 편향된 오리엔탈리즘적 학교 교육과 매체의 보도를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지만,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한인 교포나 러시아와 한국의 해방운동의 역사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그나마 영문 자료라도 읽어가면서 ‘한국 공부’를 조금씩 하려고 하는 재한 프로그래머나 교수 등과 달리, 한국과 업무상 관련이 있는 고급 관료들은 그러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해 전 협상에서 통역을 맡은 부장관급의 러시아 관료와 사석에서 나눈 대화가 지금도 기억난다.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화제를 돌리자, 원래 직업이 교육자(!)인 부장관이 마치 상식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듯 “100년 전에는 동굴에서나 살던 한국 사람들을 고층 아파트에서 살게 한 것이 미국의 원조지 딴 요인이 있나”와 같은 말을 거듭 했다. 주변부 국가의 매판형 지배층다운 그런 관료들의 숭미(崇美)의 병과 한심한 무지는 두 나라 관계에서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 쉽다. 러시아를 독일 중심의 유럽에 예속시키려는 푸틴 정권의 종속적 노선은, 고질화된 오리엔탈리즘의 병폐를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킨 셈이다.

러시아를 보는 한국인들의 눈은 과연 얼마나 다를까?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한국인들의 러시아어나 문화에 대한 학습 열의는, 주한 러시아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보다 더 높다는 것도 필자가 많이 본 일이다. ‘학이시습’(學而時習)을 이상시한 조상의 문화정신에 감사해야 하는지, 아니면 주러 서구인들이 주한 서구인들보다 주재 국가의 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사실과 연결시켜야 되는지는 모르겠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러시아에 관한 상식에서, 사실과 서구·미국의 프로파간다에 의한 허위의식의 비율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정 러시아 관료층의 위선과 아첨, 철저한 인간성의 말살을 천재적으로 풍자한 살티코프-시체드린(Saltykov-Shchedrin)보다 관료층의 상부와 밀접하게 유착한 골수 보수주의자 도스토예프스키를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꼽는다는 것은, 미국·서구 보수층의 ‘가치 서열’을 그대로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인 인간의 해방을 갈망한 미래 지향적인 스크랴빈(A.Skryabin)의 음악보다 보수적인 차이코프스키를 선호하는 것도, 서구의 ‘정전’(正典·canon)을 추종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한 마디로 ‘평균적인’ 한국인이 러시아에 대해 덜 무지하지만, 러시아를 ‘서구인의 러시아관(觀)’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은 마찬가지다.

-상인과 노동자의 판이하게 다른 만족도

두 나라를 오가는 사람들의 서로에 대한 만족도는 어떤가? 필자의 관측으로 체감적인 만족도는 객관적인 현실뿐 아니라 주관적인 기대의 수준에도 많이 달려 있다. 물론 기대의 주체인 여행자의 사회·경제적인 신분도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한국의 공산품을 사러 다니는 러시아의 상인(‘보따리꾼’이라고 하지만, 그 규모는 ‘보따리’의 수준을 넘는다)들은, 한국을 ‘바이어’가 장사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세계적 규모의 ‘무역 대국’이라는 기대를 안고 온다. 필자가 지켜본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기대는 충족됐다. 기대 이상의 상운(商運)을 만난 일도 많았다. 한국을 늘 만족해하는 한 상인이 필자에게 “한국은 실제로 기적의 나라야! 아니, 재고에 없는 물건마저도 주문하기만 하면 1주 내로 이렇게 많이 만들다니, 라인을 어쩜 이렇게까지 돌릴 수 있어?”라고 묻곤 했다.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비정규직들이 하루에 10∼12시간씩 고함소리를 들으며 사람을 기절시킬 만한 속도로 일한 그 공장의 라인이 돌아가는 모습을 상인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한국에 노동(특히 미등록 막노동)을 하러 오는 러시아 출신들이 한국을 ‘착취와 폭력의 대국’으로 본다는 사실이 과연 이상한 것일까? 그들의 실망의 정도를 이해하려면, 한국의경제 기적과 근대화를 찬양하는 주류 신문 외에 한국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접하지 못한 그들은 한국의 ‘합리적인 노무 관리’(?)에 큰 기대를 걸고 온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러시아인의 만족도는 한마디로 한국 근대의 어느 측면을 접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수출 능력으로 득을 얻는 사람의 ‘한국’과, 그 수출 능력을 뒷받침해주는 착취공장에 건강과 인권, 생명까지도 바쳐야 하는 사람의 ‘한국’을 보는 눈은 천양지차다.

한국의 근대성에 큰 기대를 걸고 오는 러시아인과 달리, 러시아로 가는 한국인들은 역시 서구·미국의 매체를 따르는 한국 매체의 보도대로 ‘위험한 후진국’으로 가는 줄로 알고 경계심·체념의 태도를 미리 준비한다. 그들이 실제로 부정적인 경험(경찰관의 돈 갈취나 폭력·사기·범죄)을 할 때마다, 실망보다는 “역시 생각대로구나!”를 반복한다. 처음의 상상조차 뛰어넘을 만한 정도의 부정적인 경험만 아니면, 러시아에서 체류하는 한인은 쉽게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다. 경찰이 이유 없이 돈을 요구해도, 학교 당국이 노골적인 전횡을 저질러도, 행정 관료들이 뇌물 갈취에 혈안이 돼도, 재러 한인의 대다수는 “후진국은 다 그렇지”라고 하며 그대로 따른다.

현재 러시아 관료들의 저질성에 대해서는 필자도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는 ‘돈 먹는 하마’인 러시아의 관료 체제에 돈을 계속 먹인다고 해서 선진화의 날이 오겠는가? 서로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러시아의 발전을 막는 관료 기구들에게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맞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제정 러시아’흠모와 ‘소련’혐오

스테레오타이프를 이야기하자면, 역시 서구적인 오리엔탈리즘 식으로 한국인들을 ‘동양인’으로 여겨서 역대 극우정권이 악질화·고질화한 온갖 봉건적인 폐습들을 ‘동양 문화의 유산’으로 오해하는 러시아인들의 태도부터 꼬집어야 한다. 즉 주한 서구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러시아인들도 학교 체벌을, 동양 사회에서 동양인의 사고방식이나 체질상 없어서는 안 될 문화 형태로 보고 있다. 제정 러시아에서도 만연한 체벌들을 레닌의 초기 공산당 정부가 전면 폐지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물론 주머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주한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귀한 ‘서양 아이들’을 외국인 학교로 보내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군번·학번을 숭배하는 권위주의 사회가 낳은 연령 차별주의나 연소자 하대를, ‘동양 사회에서 당연한 일’로 취급하여 본인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한 분통을 터뜨리지 않는다. 많은 한국인들의 스테레오타이프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서구·미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배운 듯한 제정 러시아의 ‘고급 문화’에 대한 흠모와, 옛 소련 시기를 ‘기형’으로 보는 태도를 꼽을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로마노프 왕가의 왕궁(겨울 궁전)의 사치 앞에서 넋을 잃는 한국 관광객들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지만, 70%의 문맹률과 흉년마다 아사자 몇십만명씩을 낸 제정 러시아를 흠모하는 것은 고혈을 빼앗긴 백성에 대한 모독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너무나 많은 면에서 서로 닮은 한국과 러시아는 지금 서구인들이 강요한 ‘색안경’을 끼고 서로를 쳐다보는 셈이다. 주한 러시아인들이 갖고 있는 ‘한강의 기적’, ‘무역의 대국’, ‘유교적인 규율과 서열의 나라’의 이미지도, 러시아를 접촉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차이코프스키의 찬란한 고향, 공산주의 때문에 후진국이 된 나라’라는 생각도, 결국 냉전시대의 미국·서구의 보수 언론·학계가 만들어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스테레오타이프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상대 나라 민중의 고생과 투쟁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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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G의 생각
    from vizualizer's me2DAY 2008-07-19 12:42 
    도스토예프스키 비판에 관하여 - 로쟈의 저공비행
 
 
urblue 2005-11-1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갑니다. (__)

릴케 현상 2005-11-11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한 칠팔 년 전에 마광수의 산문을 읽었는데,(기억은 잘 안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보수성에 대해 치를 떨며 일반인들이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톨스토이가 오히려 비교적 낫다고 했던 것 같네요.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마광수는 시론을 얘기한 게 아니라 소설 작품들을 보수적이라고 해석했던 것 같은데...제가 잘못 기억한 걸까요?

yoonta 2005-11-11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을 쓰셨군요..(혹시 학위논문도 도스토예프스키로 쓰셨나요?) 저야 문학도 잘 모르는 사람이고..도스토예프스키도 잘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 도스토예프스키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르다는 로쟈님의 평가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데요..인간의 내면 혹은 심리의 다층성과 다면성을 보여주는 그의 글쓰기를 단순히 사회,정치적 요소로 환원시키는 일과 작가로서의 그와 보수주의자로서의 그를 혼동하는 일은 그에 대한 편향된 시각일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위 글에서 님은 도스토예프스키와 이문열 그리고 하이데거를 비교하셨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문열보다는 하이데거에 가깝다는 논지의 말씀을 하시면서 하이데거의 나치연루는 단순히 그의 정치적 판단의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의 본질적 구성부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라는 말씀을 하셨네요..

최근 번역된 데리다의 <정신에 대해서>라는 책을 보면 하이데거의 정신/정신적인 것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분석하면서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사유의 경건함'을 유지시키고 '기술'에 의한 '정신'의 퇴락을 방지하기 위한 '정신'Geist의 역할을 강조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정신에 대한 강조로 인해 결과적으로 그는 그가 그렇게 단절하려고 했던 서양의 전통형이상학과 인간중심주의 그리고 기독교적인 성격과 독일국수주의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인데요..도스토예프스키도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히면서 인간 내면을 심층적으로 서술해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질문의 제기방식 자체에서 오는 인간중심적이고 기독교주의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할수 있다는 것이죠..때문에 하이데거나 도스토예프스키 양자 모두는 그들의 근원적 출발점들(기독교주의적이며 인간중심적인)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볼수있지 않을까요? 하이데거(독일민족주의와 기독교주의)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치적 수구성(슬라브주의와 기독교주의)도 이러한 근원적 한계에서 나오는 것이고요..

때문에 비록 도스토예프스키를 하이데거에 대한 평가에서도 적용될수있는 것처럼 작가적 그와 정치적 판단 주체로서의 그를 분리해서 사고할 수있을지라도 그의 문학과 정치적 판단은 보다 근원적 지점에서는 양자가 결합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그렇다면 그를 (요 전 페이퍼에 쓰신 것처럼) 니체를 넘어선 '윤리적 주체의 구체성'의 한 예로 제시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지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니체는 비록 전통형이상학이라는 양식성의 한계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기독교적) '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반기독교주의자임을 자처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는 니체가 서양적 사유의 한계밖으로 한 발 더 나아간 사고를 보여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승주나무 2005-11-11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 읽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좋아해서 장편을 다 읽고, 그에 대한 글도 써 보았지만, 이렇게 작품 외적인 그의 견해를 들여다볼 기회는 없었는데..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비로그인 2005-11-1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하기에 도스또예프스끼는 포스트모더니티를 예견하였고 동시에 그 포스트모더니티가 가져올 문제점을 스메르쨔꼬프를 통해 갈파하고 있었던 정말이지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이반과 스메르쨔꼬프...

로쟈 2005-11-13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예상하실 수 있는 바이지만, 혁명 이후 톨스토이는 레닌에 의해서 '러시아 혁명의 거울'로 추앙받은 반면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반동적이고 퇴폐적인 작가로 격하됩니다(적어도 1930년대까지는 이러한 경향이 지속됩니다). 자신의 문학에 끼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에 대해서 고리키가 자아비판까지 해야 했으니까요. 도스토예프스키의 부상은 제1, 2차 세계대전 등이 가져온 '폐허의식'과 유럽식 합리주의에 대한 회의와 맞물려 있는 거 같습니다. 해서, 마광수의 도스토예프스키 보수성 비판은 일리있되 독창적인 건 아닙니다. 성에 대한 집요한 관심도 마광수는 톨스토이와 공유하고 있죠. 차이라면 톨스토이는 약골이 아니어서 아주 왕성한 '생활'을 누렸다는 것 정도겠죠.

yoonta님/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는 학부 졸업논문을 썼더랬죠.^^ 공정하게 말하기 위해서라면 니체와 하이데거를 읽으신 만큼 도스토예프스키도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스위스의 한 광장에서였나요, 니체가 학대받는 말을 끌어안고 흐느끼다가 정신을 잃은/놓은 장면. <죄와 벌>에서의 장면을 반복하고 있기도 합니다. 삶을 문학이 모방한다지만, 삶 또한 문학을 모방하기도 하는데, 그 한 가지 사례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톨스토이가(보다 정확하게는 투르게네프가) 러시아문학의 '쇼펜하우어주의'를 대표한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니체주의'와 가장 강한 친연성을 갖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건, 아직은 그들간의 차이보다는 친연성입니다.

yoonta 2005-11-13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보지 않은건 아니에요..^^ 죄와벌 그리고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정도는 보았죠..특히 까라마조프는 감동적으로 본 작품입니다. 다만 니체나 하이데거등에 대해서 공부했던 것 만큼은 아니라는 점에서 로쟈님 말대로 좀더 '읽어줄' 필요는 있는 것 같네요.

문제는 철학이라는 것과 문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지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의 글쓰기나 들뢰즈의 글쓰기가 일부러 전통적인 철학적 글쓰기를 지양하고 '사건'으로서의 '생성'으로서의 글쓰기를 하였던 이유에 대해서 동의한다면 어떻게보면 철학은 문학으로서 '완성'되어야하는 어떤 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럼에도 철학과 문학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 차이는 마치 정신분석학에 비유하자면 정신분석가와 '증상'을 보이는 환자와의 차이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양자가 서로에 대해서 '전이'한다는 점에서 '친연성'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님과같이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교하다보니 누가 더 '잘났나?'를 비교하는게 부질없는 짓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네요...^^

로쟈 2005-11-1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의 비유에 따르자면(물론 yoonta님만의 비유는 아니지만) 철학이 '정신분석가'라면 문학은 '환자'가 되겠군요. 일리 있는 의견이나 그런 만큼 '통속적'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비평과 진단>의 들뢰즈라면 동의하지 않을 의견입니다. 문학과 정신분석학의 관계는 사실 더 복잡하니까요. 프로이트의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도 한 가지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혹은 '정신병동의 셰익스피어'에게서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자신의 이론을 적용하는 게 아니라).

yoonta 2005-11-14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속적'이라..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보셨는진 모르지만 제 말은 어디까지나 비유지 문학이 정말로 '환자'라는 이야기는 아닌데요? 그리고 설령 문학이 환자라고 하더라도 그때문에 문학이 '폄하'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요. 정신분석학자처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어야만 '우월한'사고라는 편견을 가지고 계신건 아닌지..그리고 프로이트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만 배운게 아니라 그들의 '환자'들에게서도 배운 것 아니었던가요?

로쟈 2005-11-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자'란 말이 폄하의 의미가 아니듯이 '통속적'이란 말이 폄하의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흔히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는 의미에서 쓴 말입니다. 제 의견은 의사-환자의 이분법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정신분석학자처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어야만 '우월한'사고라는 편견을 제가 갖고 있다면, 굳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문학을 옹호할 필요가 없습니다(정신분석학이 얼마만큼 논리적/이성적인가란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덧붙이자면, yoonta님은 문학/예술이 비논리적이며 비이성적(감성적)이라는 편견을 갖고 계신 건가요?

yoonta 2005-11-14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까지나 상대적인것 아닌가요? 문학과 철학사이의 관계는 이런 댓글로 답하기에는 쉽지않은 복잡한 관계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철학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문학/예술은 감성적이고 '기표'의 효과에 의한 '사건'으로의 생성의 측면이 강하다는 거죠. 그것이 편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로쟈님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냐는 말은 기분나쁘시다면 취소..^^ 꼭 그렇다는 의미로 쓴 문장은 아닙니다..

로쟈 2005-11-14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댓글로 다루기에는 덩치가 너무 큰 문제입니다. 나중에 책 한 권씩 쓰도록 할까요?^^ 더 좋은 건 그런 주제를 다룬 책이 나와주는 것이겠지만...
 

3년전 가을에 쓴 두 개의 짧은 글을 편집해서 옮겨온다.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는데, 요즘의 관심사와도 무관하지 않아서 읽을 만했다. 새롭게 몇 마디 보탰지만, 보탠 말들에 따로 표시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2002년 가을의 글이면서 2005년 가을의 글이기도 하다.  

 

 

 

 

 

 

 

  

 

 

<비평>(2002년 가을호)에 주제서평으로 '피에르 부르디외'가 실렸다.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과 함께 산 책인데, 부르디외는 내게 언제나 안티-철학을 연상케 하는 사회학자라는 점에서 들뢰즈와 부르디외란 조합은 아이러니컬하다. <파스칼적 명상>(동문선, 2001)을 다룬 홍성호 교수의 글에서 재인용한 부르디외의 고백(나는 그 책의 서반부밖에 읽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지식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고 진정으로 느껴본 적이 전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의 사유에서 철학적 주지주의 같은 그런 위상에 연결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추방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나 자신 안에 있는 지식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부르디외의 철학(적 주지주의) 비판이 비록 바깥으로부터의 비판이긴 해도 철학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판(철학을 흡수/해소시키려는 전략) 못지 않게 문제적이며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대담에서 부르디외는 마르크스를 철학화(philosophizing)하는, 그래서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으로 만드는 알튀세르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는데(아마도 고종석과의 대담이었던 듯하다. 기억에 대담은 <책읽기/ 책일기>(문학동네, 1997)에 실려 있다), 그의 이러한 비판은 레비스트로스의 관념론적 인류학에 대한 마빈 해리스의 유물론적 비판과 짝지을 만하다(해리스는 <문화유물론>(민음사, 1996)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한길사, 2005)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무려나 부르디외의 고백은 그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단적으로 말해서 철학은 자신이 말해지는 장소(where)에 대해서 무지하며 둔감하다. 그래서 철학은 어디에서나(everwhere)나 적용가능할 걸로(이게 소위 보편성이다) 착각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나는 아무데서나(nowhere)의 다른 이름이다. 팍스 로마나나 팍스 아메리카와 같은 착각과 패권의 남용이 철학에도 작동하고 있는데, 이름붙이자면 '팍스 필로소피카'쯤이 될까?


근대 철학적 인식론의 경우에도 '그것은 무엇인가?(What is it?)'란 물음의 무엇(what)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소위 형이상학의 '고질'이다). 그 인식의 주체는 보편적 주체이지 (고진이 말하는) 단독자가 아닌다. 즉 그 주체는 아무도 아닌(noman) 모든 사람(everyman)이다. 거기엔 그것이 누구에게 진리인지, 어디에서 진리로 통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 나에게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철학의 결함에 대한 추궁으로 읽힌다. 그의 장이론이 얘기하는 것이 바로 모든 상징적 재화가 거래되는 장소(where) 아닌가? 철학적 담론이 그 자신이 통용되고 정당화되는 장소의 상대성에 주목하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상대화되고 사소화된다. 이에 대한 가장 신랄한 문학적 사례는 안톤 체홉의 단편들과 희곡들에서 찾을 수 있다(동완 선생의 체홉 번역을 나는 좋아한다. 재작년에 신원문화사에서 재출간되었다).

 

 

 

 

 

 

 

 

 

 

철학이 그 장소의 문제에 그나마 관심을 기울여 얻어낸 것은 자신의 기원으로서의 '그리스'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다: "철학자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리쾨르) 데리다 밝혀놓고 있는 것은 이 그리스적 기원으로부터 철학이 탈출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철학의 언어들이 갖고 있는 그리스적 기원 때문이다. 그 탈출가능성을 말하는 언어들이 이미 그리스적 기원의 언어들이라는 것. 따라서 탈출은 말이 아닌 제스처로써만 가능하다. 마임으로만. 따라서 그리스와는 다른 기원의 철학을 모색하는 들뢰즈의 철학은 언어로써 언어의 바깥을 지향하는 '마임의 철학'이다. '아무데서나(nowhere)' 대신에 들뢰즈가 내세우는 것은 '지금-여기(now-here)'이고 '에레혼(erehwon)'이다.


서동욱의 '경험론과 철학'이란 글은 철학의 다른 가능성으로서 유대적 기원(레비나스)과 노마드적 기원(들뢰즈)을 암시한다. 나는 그것이 또다른 철학으로 불려야 할지 아니면 철학을 넘어선(비철학) 다른 무엇가로 호명되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들뢰즈의 철학은 'non-philosophy'로 지칭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기원에 대한, 장소에 대한 물음 앞에까지 철학이 도달해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물음은 철학이 충분히 사회학화될 때 더 잘 규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안톤 체홉의 사할린 섬 리포트도 그런 의미를 갖는 건 아닐까?

 

 

 

 

 

 

 

 

 

 

참고로, 철학에서 누구(who)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니체이다. 그에게 동일한 사태 혹은 진리는 주체의 존재양식에 따라 다르게 현상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1962)의 서두에서부터 표나게 내세우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다. 분명,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니체가 원했던 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니체는 의미와 가치의 철학이 비판이어야 함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칸트가 가치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참된 비판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 바로 이것이 니체가 저작에 착수하게 된 동기들 가운데 하나였다... 가치철학이란 참된 비판의 실현이며, 전면적인 비판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식, 다시 말하자면 철학을 '망치질'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한 니체 자신이 가장 높이 평가했던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유일무이한 심리학자' 도스토예프스키이다. 문학사가인 치제프스키를 따르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칸트 비판에 있어서도 니체와 같은 전선에 선다. 아니 보다 더 철저하다. 치제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에 있어서 분신의 주제'란 논문(르네 웰렉 편, <도스토예프스키 연구>, 열린책들, 184-210쪽)에서 이렇게 말한다(이 글은 가장 훌륭한 도스토예프스키론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주장하는 사랑은 보편적/추상적 인간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개인으로서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가르친 성경이야기> 류에 상응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르침이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진정한 주제이다. "여러분 사랑해요!"라는 말보다 쉬운 고백은 없다. 그것은 제스처이다. "나는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고 일기에 적어놓는 일도 기분나면 매일같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건 자기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정작 어려운 사랑은 바로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그리스도는 말했다. 그는 그 외에 다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어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러한 사랑을 말하는 순간, 철학은 그 구체적인 사랑을 철학화한다. 그게 철학의 본성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이건 '크라잉게임'이다). 그러한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라면 철학은 좀 변신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온갖-되기를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는 없을까? 들뢰즈의 다양체(multiplicity)를 '나'도 '인간'도 아닌 '이웃'으로 읽을 수는 없을까? 그렇게 읽을 수 있는 어떤 내재성의 공간이 주어진다면, 거기서 니체를 통과해온 도스토예프키는 들뢰즈와 대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지에 입을 맞추면서 자신을 놓아버린 익명적, 비인칭적 주체로서...

 

05. 11. 10. 

 

P.S. 이 글의 원 재료는 '철학이냐 사회학이냐"와 "칸트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해서 "철학이냐 문학이냐"란 제목으로 통합하려고 했으나 '이웃'을 사랑해야겠기에 OR 대신에 AND를 넣어, "철학 또는 문학" 혹은 그냥 "들뢰즈와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해둔다...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세 가지 양상을 가진다. <누군가가(Someone) 어디에서(Somewhere) 어떻게든지(Somehow)>가 어떤 윤리적 행위에 필연적으로 연루된다. 처음의 두 요소는 완전히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다. 그러나 세 번째 것은 추상적으로, 즉 논리적인 용어로 채택될 수 있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가장 원초적이며 가장 단순한 형태이다. 바로 이런 까닭 때문에 우리는 도덕철학의 역사에서 윤리적 행위의 첫 번재 두 요소들을 무시하거나 혹은 추상적 사유의 방식으로 그것들을 도식화하든가 하는 경향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윤리적 행위의 <어떻게(how)>는 <누가(who)>와 <어디에서(where)>로부터 완전히 추상화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립하게 되는 형식적 윤리와 법사상에 대한 예리한 분석/해명은 서동욱의 <차이와 타자>(민음사, 2000)의 제6장 '들뢰즈의 법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대목이다). 이때 명시적으로 참조되는 작품은 카프카의 <유형지에서> 같은 것이다. 그러한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편이 될 수 있지만, 치체프스키-도스토예프스키는 니체마저도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영원회귀'라는 반복이 또다른 '보편화' '형식화'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영원회귀'를 주제로 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빌 머레이 주연의 <사랑의 블랙홀>이다. 문학작품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1990), 그리고 네하마스의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책세상, 1994)도 읽을 만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  

 

 

 

 

 

 

 

 

 

 

다시 치체프스키: "우리가 의식적으로 윤리적 합리주의자들이 아닌 사상가들 속에서조차도 윤리적 주체에 대한 그런 강조의 결핍을 발견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칸트의 '정언명령'조차 윤리적 주체의 개인적 구체성을 무시하고 있다. 칸트에게는 <도덕적 법칙들은 자연의 일반법칙들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윤리적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그것의 획일성과 단조로움이다... 게오르그 짐멜이 명확하게 제시했던 것처럼 '영원회귀'에 대한 그(니체)의 가르침은 도덕적 세계의 획일성과 단조로움에 대한 칸트의 개념에 단지 또 하나의 형식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 피히테, 니체, 이들 세 사람의 사상가들 속에서 윤리적 주체는 개인적 구체성의 주요한 특징을 상실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복될 수도 복제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판의 요점은 칸트나 니체의 윤리학이 윤리적 주체를 배제함으로써 윤리적 행위를 추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자유의 영역이란 건 윤리적 주체의 구체성의 영역이다. 보다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자면, 철학이 인간의 자유를 충분하게 다룰 수 있느냐는 것, 혹은 철학이냐 문학이냐(문학적인 니체가 언제나 철학적인 니체를 넘어선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장소', '자유의 영역'은 달리 해석되고 있다. 즉, 그는 '이웃'이라는 기독교적 개념, 다시 말해 다수의 윤리적 주체들의 구체적인 개인적 존재를 기본적인 윤리적 전제사항으로 받아들이고서 출발한다. 윤리적 합리주의는 일반적으로 오직 인간에 대한 사랑만을 이해할 뿐 '이웃'은 낯설고 멀리 있다. 그러나 우리의 윤리적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명확히 '이웃'이라는 구체적 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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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1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1-1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알라딘에서는 '문화유물론'을 치시면 됩니다. 품절된 책이지만. 원제는 제 기억에 'Cultural Materialism'이고, <문화의 수수께끼>의 저자 마빈 해리스 주장하는 자신의 방법론입니다.

yoonta 2005-11-11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눈에 띄는 오자들...^^
모마드적 기원---->노마드적 기원
요수들을----->요소들을

도스토예프스키를 상당히 좋아하시나보군요..니체를 넘어선 윤리적 주체의 구체성을 그에게서 보실정도면 말이죠..님의 글을 보면서 질문이 생기는데..박노자의 <하얀 가면의 제국>을 읽어보면 도스토예프스키를 '골수보수주의자'로 평가하더군요..그의 작품을 "악을 가능하게하는 환경을 '단순한 표피'로 규정한 채 '영혼 속의 악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매달렸다"고 보더군요..즉 인간의 윤리의식을 사회환경속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영혼속에 악의 본질이 내재돼 있다는 성악설"을 취해서 나온 방식이라는 겁니다. 때문에 기독교적 국가와 교회가 인간을 훈육해야만 사회가 생지옥이 되는 것을 막을수 있다고 하는 홉스적 국가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더군요. 이런 요소들 때문에 그는 당시의 자유분방한 서방국가들보다는 슬라브중심의 민족주의에 집착하였고 타민족에 대한 침략(예컨데 터키)등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기도 하였다더군요..이런 관점은 분명 님이 평가하시는 도스토예프스키와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요..님이 위에서 말씀하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윤리적 주체로서의 개인이 (박노자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결국은 국가나 기독교에 의해 훈육되어야만 하는 대상에 불과한 것이고 그런 것을 전제로한 '윤리'라고 한다면 제가 받아들일수 없는 '윤리적' 주체가 될것 같은데..로쟈님은 이러한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로쟈 2005-11-11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쓴 것들에 오타가 많군요(타자를 잘 못쳤던 모양입니다.^^) 박노자의 도스토예프스키 비판은 저도 읽었었고, 그에 대한 질문도 3년 전에 받았었습니다. 그때 제가 적었던 걸 겸사겸사 페이퍼로 옮겨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