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자(06. 02. 14) 한국일보 등에는 뉴욕타임즈(02. 12) 기사에 근거하여 러시아 영화계의 '뿌리찾기' 바람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내용을 따라가면서 몇 마디 보태기로 한다. 뉴욕타임즈 기사의 원제는 'Time to Come Home, Zhivago'(지바고, 집에 갈 시간이다)이며, 이걸 약간 변형하여 '닥터 지바고, 집에 돌아오다'란 제목을 붙인다. 주된 내용은 과거 헐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졌던 러시아 명작들이 일종의 붐처럼 러시아 영화로 다시 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 왼쪽 사진이 데이비드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고, 오른쪽이 올 5월중 TV방영예정이라는 러시아판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소재로만 활용됐던 러시아 명작 소설들이 줄줄이 러시아 영화 감독에 의해 영화나 TV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12일 이런 현상을 1930년대 ‘전함 포템킨’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감독 등이 활약했던 소련 영화 전성기에 견줄 수 있는 새로운 영화혁명이라고 평가했다.(*러시아 영화가 부흥을 맞고 있다는 전망은 몇 년전부터 나온 것인데, 2004년작 <나이트 워치> 등의 상업적 성공은 이를 뒷받침하는 한 가지 사례였다. 이러한 '성공'은 러시아의 문화적 전통과 정체성 회복의 계기로 삼으려는 노력이 현재 러시아에서 진행중인 것이다.)


 

 

 

가장 상징적인 영화는 <닥터 지바고>.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동명 소설을 1965년 할리우드의 데이비드 린 감독이 영화화한지 무려 41년 만에 러시아인의 손에 의해 TV 영화로 거듭난다. 구 소련 시절 금지소설로 분류됐던 이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는 것도 처음이다. 러시아 NTV는 올 5월 8시간 분량의 이 영화를 내보낼 예정이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러시아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앞서 마하일 불가코프의 명작 <거장과 마르가리따>는 지난해 12월 TV 영화로 만들어져(왼쪽 이미지. 오른쪽은 감독 블라지미르 보르트코) 러시아 시청자의 절반 이상을 사로잡는 경이적인 기록을 낳았다(*<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러시아 연극의 고정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한편, 현재 절판중인 국역본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새 번역본이 내년까지는 나올 예정이다). 스탈린 치하 강제수용소의 군상을 풍자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제1원>도 TV 영화로 제작돼 지난달 말 러시아 TV에서 방영됐다.(*'The First Circle'을 옮긴 <제1원>은 <제1권>(분도출판사, 1974)로 번역돼 있는 솔제니친의 장편소설을 가리킨다.) 

닥터 지바고를 제작중인 알렉산드르 프로쉬킨 감독은 “데이비드 린 감독을 존경한다”며 “하지만 그의 영화는 미국 영화일 뿐”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인의 작품을 러시아안이 해석해 영화로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 소설을 러시아인이 해석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영화에 많은 오류가 숨어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린 감독은 슬라브인과 비슷한 금발의 배우 줄리 크리스티를 지바고의 연인 라라로 캐스팅했지만 원작은 라라가 벨기에인 아버지와 프랑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비 슬라브적인 인물로 묘사한다”고 꼬집었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는 빨간 머리의 러시아 여배우 슐판 카마토바를 라라역으로 캐스팅했고 지바고 역에는 오마 샤리프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올레그 멘쉬코프를 기용했다. 멘쉬코프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통해 한국 관객에도 익숙한 배우이다.(*'슐판 카마토바'는 '출판 하마토바'의 잘못된 음역이다. 외신기자들도 이제는 영어-러시아어 음역체계에 대해서 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올레그 멘쉬코프'는 그냥 '올렉 멘쉬코프'라고 읽어주고 싶다. 얼마전 TV에서 재방영된 <러브 오브 시베리아>의 주연배우가 올렉 멘쉬코프인데, 한국일보인가는 '올렌 멘쉬코프'라고 적었었다.)

뉴욕타임스는 “스페인 라다하라 평원에서 올 로케된 린의 영화 현실은 가공일 뿐 실제 러시아 평원을 배경으로 제작되는 이 작품이 러시아 문학과 영화의 진수를 느끼게 해 줄 것”이라는 러시아 영화계의 반응을 전했다. 러시아 영화계의 이 같은 동향은 구 소련 붕괴 후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온 러시아가 최근 정치안정과 유가급등에 따른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국가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여러 시도 중 하나로 봐야 할 것 같다.(*어찌되었거나, 러시아문학 전공자로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다. 이걸 다 언제 구해 보나?) 

06. 02. 17.

P.S. 모스크바 통신에서 '올렉 멘쉬코프'에 대해 몇 자 적은 대목이 생각나 옮겨온다. 작년, 그러니까 2005년 새해 벽두에 쓴 것이었다.

어제보니까 러시아의 (2005년)새해맞이는 푸틴의 5분 연설로 시작된다. 그는 12월 31일 밤 11시 55분에 대부분의 TV채널에 등장해서 새해의 의미와 새해를 맞는 러시아의 각오/다짐을 되새겨주었다.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2005년이 전승 60주년이 되는 해라는 것이다(러시아/소련은 1945년 5월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2차 대전의 승전국이 된다. 러시아는 그 전쟁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나라이다). 러시아인의 90%가 독일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하고 독일에서의 삶을 꿈꾸기도 하지만, 독일에 대한 승리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를 지탱하는 가장 큰 이념적 버팀목이다(그걸 보충하는 것이 ‘러시아 정교’이다). 방대한 영토의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이기에 그런 버팀목은 불가불 요구된다. 사회주의 시절엔 아마도 ‘러시아혁명’이 그런 역할을 수행했을 테지만, 지금은 오직 ‘조국전쟁에서의 승리’뿐이다. 이 ‘국가 이데올로기’를 어떻게든 유지시켜보려는 노력은 옆에서 보기에 간혹 안쓰럽다.

푸틴의 연설에 이어서 채널 NTV(엔떼베)에서는 ‘올렉 멘쉬코프와의 첫밤’이라는 쇼프로그램을 방송했는데, 멘쉬코프는 <시베리아의 이발사>(<러브 오브 시베리아>로 출신>)와 <위선의 태양>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남배우이자 러시아의 국민배우이다(*그는 러시아의 '중년의 꽃미남'이다). 듣기에, 아직 미혼이며 그의 전기까지 출간됐을 정도이고 중년이지만 배용준의 인기를 능가한다(러시아 연예계라는 게 우리처럼 떠들썩하진 않지만).

그래서 그날 챙기게 된 영화가 그의 1999년작인 레지스 바르니에 감독(<인도차이나>의 감독)의 영화 <동과 서>이다(왼쪽 사진은 <시베리아의 이발사>에서 줄리 오몬드와 멘쉬코프. 그리고 오른쪽은 <동과 서>에서 산드린 보네르와 멘쉬코프). 프랑스 등 4개국 합작 영화인데, 2차 대전 종전 후 1946년 의사인 러시아 남편을 따라서 남편의 조국 ‘소련’으로 간 프랑스인 아내의 ‘지옥에서의 10여년’을 다루고 있는 영화인데(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연은 산드린 보네르이고 카트린 드네브도 조연으로 출연한다(푸틴이 러시아의 1945년을 기념하고 있다면, 멘쉬코프는 1946년 이후에 러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고발한다).

러시아 생활에 절망하던 프랑스 아내는 간첩 혐의로 수용소에 끌려가기도 하지만 1956년(이 해 전당대회에서의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에 대해서는 이전에 언급했다)에 복권되며, 이후 남편의 숨은 노력으로 비밀 망명에 성공한다(그녀는 아들과 함께 불가리아의 프랑스대사관으로 망명하며, 그리스를 거쳐서 프랑스로 돌아간다). 혼자 남겨진 남편이 프랑스에서 가족과 재회하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30년 후인 1987년에 와서이다(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이들의 재회를 가능하게 했다). 아래 사진은 각각 <시베리아의 이발사>와 <동과 서>의 DVD 타이틀.

‘동’과 ‘서’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아픔을 겪은 러시아/프랑스판 이산가족을 다룬 영화인 셈인데, 우리의 관객들이라면 보면서 눈물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이다. 이런 '반공'영화가 소개되지 않는 것도 참 신기한 노릇이다(러시아 영화를 소개하는 채널조차 안 갖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므로 이럴 때는 '주변 4강'이란 말이 무색하다. 고작 '시베리아 유전'에나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인가? 심히 척박한/천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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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02-1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러시아에는 저렇게 문학이 많을까요... ^^;;

로쟈 2006-02-1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땅넓이에 비하면야.^^

비로그인 2006-02-1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구 수는 그래도 땅 넓이 만큼 많지는 않은데^^

2006-02-17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2-1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때리다님/ '고뇌'하는 인구수는 우리보다 훨씬 많은 듯합니다...
**님/ 닥터 지바고의 국역본을 모두 갖고 있지만, 찬찬히 대조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지바고의 시 같은 경우, 대개는 맘에 들지 않더군요. 파스테르나크는 좀더 섬세하게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재로선 아무 번역본이나 붙잡아도 '무드' 정도는 전달받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톨스토이 관련 자료들을 검색하다가 그의 얼굴 사진들을 모아놓은 걸 발견했다. 나중에 자료로 쓰기 위해 여기에 옮겨놓는다. 톨스토이의 러시아명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928-1910), 흔히 '레프 톨스토이'이지만, 영어식으론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이다. 간혹 사전이나 번역서 등에 '레오 톨스토이'란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레프 톨스토이'라고 표기해주는 게 옳겠다. 사진이 찍힌 연대는 우측 하단에 씌어있다.

06. 02. 16.

P.S. 러시아어 표기와 관련하여 한마디. 푸슈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1830)은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초연은 1879년)로도 만들어져 잘 알려진 작품인데 영어명은 'eugene onegin'이어서 종종 '유진 오네긴'이라고 옮겨지기도 한다. 지난 1999년엔 영국의 여성감독 마사 파인즈에 의해 <오네긴>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국내에 출시돼 있으며 주연은 감독의 오빠인 랄프 파인즈가 맡았다. 타치야나 역은 리브 타일러). 아래 사진은 각각 오페라와 영화의 한 장면.

그보다는 좀 나은 표기가 '예게니 오네긴'인데, 'Evgenii Onegin'의 음역으로 부정확함에도 불구하고 (대개 음악 분야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것은 마땅찮다(지난주엔 <씨네21>에서도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소개하면서 <예프게니 오네긴>이라고 표기했다). 우리의 러시아어 표기는 보통 '무성음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어미에 오는 [v](즉, 무성음화되어 [f]로 발음되는 'Lev'에서 [v] 같은 경우)는 '브'가 아닌 '프'로 읽어준다. 하지만, 'Evgenii'의 경우 유성음인 [je]와 [g]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에 굳이 '프'로 발음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질 않는다(오히려 이런 조건에서는 [f]가 와도 [v]로 유성음화된다). 그러니, 앞으로는 '예게니'라고 침튀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냥 부드럽게 '예브게니'라고 불러주는 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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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2-16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지휘자 중에서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

같은 경우는 동호회에서 예프게니냐 예브게니냐 때문에 논쟁도 많았었죠.


로즈마리 2006-02-18 0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예브게니 오네긴이 오페라, 영화로도 있었군요. 예브게니 오네긴을 읽었던 것 같은데도 내용이 잘 생각 안나네요. 당시, 아 이런 식의 서사시도 대단하군, 하는 인상을 받았던 그 느낌만 생각 나네요. 역시 정리를 안 해서 그런가? ㅠㅠ 핫 오페라는 왠지 보고싶네요..^^

로쟈 2006-02-17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게닌'이 아니라 '오네긴'입니다. 그리고 '서사시'가 아니라 '운문소설'입니다.^^

로즈마리 2006-02-17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러네요. 그나저나 전 서사시로 생각했는데...그 둘의 차이가 궁금하네요. ㅋㅋ

로쟈 2006-02-1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그렇게 적었거든요.^^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은 버스-전철-전철-버스로 이어지는 80분의 여정이다. 방학이라 격일출근 비슷한 걸 하고는 있지만, 당장 다음달부터는 아침 1교시 수업이 이틀이나 잡혀 있는 관계로 보통의 직장인들과 같이 '찌든' 출근길을 보내야 할 참이다(시간도 90분으로 늘어난다. 그 정도면 풀타임 영화상영시간이다). 그런 경우 끼여 있는 몸도 여유가 없지만, 더 유감스러운 건 무언가를 읽을 여유가 없다는 것. 보통 때 오며가며 읽는 신문/잡지도 만원 지하철(일명 '지옥철')에서는 언감생심이기 십상이다. 그러다 좀 느지막하게 출근하는 날이면 '올모스트 헤븐'이다. 유식한 유한계급들은 잘 모르겠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무식'하다.

 

 

 

 

아침에 전철을 타고 오면서는 신문을 읽고 버스를 갈아타고 오면서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기 위해서 지젝의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을 뒤적거렸다. 전체 5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4-5장이 '호모 사케르'를 중심적인 테마로 다루고 있기 때문인데(지젝은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생존 철학자로 자신의 동료들이기도 한 알랭 바디우와 조르조 아감벤을 꼽았다. 나는 <언어와 죽음>이란 책으로 처음 아감벤을 접했지만, 아감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지젝을 경유한 것이다), 1995년에 처음 출간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이미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면서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해가고 있다(세번째 이미지가 영역본, 그리고 네번째 이미지는 불가리아어본이다). 아마도 올해는 국역본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한편, 웹진 '자율평론'에서는 아감벤에 관한 자료들이 많이 제공되고 있으므로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조하시길). 

한데, 예기치 않은 대목을 다시 읽게 되면서 아감벤에 대한 글은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다(그러니까 그 글에 대한 나의 생각들은 잠시 '대기소'에 머물러야만 되겠다. 그것들도 나름대로 '사케르'이군). 국역본은 이미 지적되어온 대로 '번역의 사막'인지라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내가 읽을 한 문단은 국역본 97-8쪽, 원서 '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Verso, 2002)의 47-8쪽이다. 국역본에서 인용하되 필요할 경우 별도의 표시없이 수정하여 인용하겠다. 그럼, 웰컴, 지젝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치체제의 붕괴, 이를테면 1990년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생각해 보라.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사람들은 게임이 끝났음을, 공산주의가 패배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단절은 전적으로 상징적이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으로부터 체제의 최종적인 붕괴까지는 단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순서의 일이 (2001년) 9월 11일 이후에 일어났다고 하면 어쩌겠는가? "

"아마도 WTC(세계무역센터)의 붕괴가 낳은 궁극적인 희생자는 '미국 권역(American Sphere)'이라는 어떤 대타자(the big Other) 형상일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이어서 지젝이 막바로 떠올리는 것은 미국의 '파트너'였던 러시아(과거 소련)이다. 말하자면 '소비에트 권역(Soviet Sphere)'이 될까? 때는 1956년 2월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 때이다. 이때 스탈린 사후(1953) 당 제1서기였던 흐루시초프는 비밀연설(비공개연설)을 통해서 절대권력이었던 스탈린의 과오(!)를 비판한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이전에 잠깐 써둔 것을 옮겨온다. 먼저, 스탈린 체제의 과오에 대한 한 논문에서의 인용: "사실 스탈린의 독재와 테러가 국가와 공산당에 가져다 준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우선 스탈린 시대, 특히 1930년대의 테러는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공산당 당원과 국가 관리들에게도 엄청난 타격이었다. 예컨대, 흐루시초프의 연설문에 따르면, 17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139명 중 98, 70% (주로 1937-38년에) 체포되어 총살당했으며(*니키타 미할코프의 <위선의 태양>(1994)은 이 시기에 대한 영화적 증언이다) 표결권과 심의권을 지닌 [17] 전당대회 대의원 1,966명 중 절반이 훨씬 넘는 1,108명이 반혁명 범죄로 고발되어 체포되었다.’"(*그 연설문이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책세상, 2006)로 번역돼 나왔다. 역자는 인용한 논문의 필자인 박상철 교수이다.)

 

 

 

 

그리고 아래 포스터는 <위선의 태양>. 영화 속 코토프 대령 역은 감독 니키타 미할코프가 직접 연기했으며, 딸 나쟈(나디야)는 실제로 미할코프의 막내딸이다(<러브 오브 시베리아>에서도 카메오로 나온다).

"이런 상황은 하위 기관들이나 지방의 경우에도 비슷하였다. 모스크바 시() 당위원회와 모스크바 주() 당위원회에서 1935-37년에 근무했던 서기 38명 중 35, 시 또는 구 당위원회 서기 146명 중 136, 그리고 수많은 국가기관, 노동조합, 경제계, 과학 및 문화계의 지도적인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하여,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대략 스탈린 시대에 처형되거나 감옥에서 죽은 이들의 숫자는 2,000-2,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체포된 사람은 4,000만 명 가량). 이런 식의 공포정치로 형성된 스탈린 체제’ 덕분에, 당시 소련이 높은 경제성장률을 계속 유지하면서 가장 후진적인 문맹자들의 농업국가에서 국민 다수가 문맹에서 벗어난 도시 중심의 산업국가로 완전히 변모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이러한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국가와 당의 기간요원들이 느꼈던 신분의 불안정이었고, 이미 상당한 규모로 팽창되었던 공산당, 행정부, 군부, 경제계 등의 관료계층은 신분 안전과 업무 자율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기를 원했. 그리고 그렇게 해서 스탈린 사후에 형성된 것이 안정적인/특권적인 거대 관료조직이다. 이것은 이후에 노멘클라투라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스탈린 시대에서 포스트-스탈린 시대로의 이행 (라캉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주인-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의 이행에 대응한다(라캉의 관심은 현대 사회에서 헤게모니적 담론이 주인-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 이행한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지젝, <이라크>, 도서출판b, 171).

 

 

 

 

서구의 경우 그러한 이행이 표시되는 지점이 1968년 혁명이었다면, 소련의 경우에는 이보다 앞선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2 14-25)에서의 흐루시초프의 反스탈린 비밀연설이었다. 요컨대, 서구의 68혁명에 짝이 되는 것은 러시아의 1956년 비밀연설이다.

 

 

지젝은 <이라크>에서 이 연설을 본래적인 정치적 행위의 사례로 들고 있기도 하다(물론 비민주적인 형식의 것이긴 하지만). 본래적인 정치적 행위는, 그것의 형식과 관련해서, 민주적인 것과 동시에 비민주적인 것일 수 있다 다른 한편 대중적 의지의 본래적 행위는 폭력적 혁명이나 진보적 군부 독재 등의 형식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스탈린의 범죄를 비난하는 흐루시초프 1956년의 연설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였다…”(116-7쪽, 강조는 나의 것) 세번째 이미지가 러시아어본(2004)이다. 

 

 

<이라크>(2004)에서의 이러한 언급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2002)에서 잠깐 언급된 내용을 보다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02년의 언급은 이 비밀연설이 불러일으킨 파문에 일단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제20차 소비에트 당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범죄행위에 대해 비난하는 비밀연설을 하는 동안 12명 정도의 대표자들이 신경쇠약을 일으켜서 밖으로 실려나와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폴란드 공산당의 강경파 서기장 볼레슬라프 비에루트(1892-1956, 왼쪽 사진)는 며칠 뒤 심장마비로 사망한다.(그리고 모범적인 스탈린주의 작가 알렉산드르 파제예프(1901-1956, 가운데 사진)는 며칠 뒤에 권총자살한다.)" 참고로, 파제예프의 소설작품으론 <궤멸>(예문, 1988)과 <젊은 근위대>(중앙일보사, 1990)가 번역돼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논문에는 <해빙>(중앙일보사, 1990)의 작가 일리야 에렌부르그(1981-1967, 오른쪽 사진)의 회고가 인용돼 있는데, 그에 따르면 “2 25일 비공개회의에서 흐루시초프가 보고할 때, 몇몇 대의원들은 실신했다... 그 보고문을 읽으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정말 이것을 복권된 사람이 친구들 사이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중앙위원회 제1 서기(=흐루시초프)가 전당대회에서 말했단 말인가. 1956 2 25일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위대한 날이 되었다.”(해서 러시아의 1956년은 프랑스에서의 1968년에 값한다.)

 

 

 

 

 

 

 

 

 

  

물론 이 연설의 효과가 문학에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이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되는 것이 1962년이니까(우리의 경우 4.19와 최인훈의 <광장> 간의 관계가 여기에 대응할 것이다. 한편 우리는 1987년 체제에 대응하는 문학을 갖고 있는가? 혹은 그에 대응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사진 왼쪽은 연설중인 흐루시초프, 오른쪽은 스탈린과 함께 한 흐루시초프. 레닌과 스탈린에 이어서 소비에트의 권좌에 오르지만 소위 '막돼먹은' 언동으로 국내외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던 흐루시초프는결국엔 심복이었던 브레즈네프에게 퇴위당한다. 그는 소련의의 권력자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의 회고록과 증언 등이 우리말로 번역됐었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됐다. 다시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이라크>에서 지젝을 조금 더 따라가본다: 이 대담한 조치의 기회주의적 동기들은 뻔한 것이지만(*이 연설을 계기로 흐루시초프는 당권을 장악한다), 여기엔 분명 단순한 계산 이상의 것이 있었으며, 전략적 추론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일종의 무모한 과잉이 있었다. 이 연설 이후에 사태는 다시는 전과 같지 않았으며, 지도자의 무오류성이라는 근본적 도그마는 침식되었고 따라서 연설에 대한 반응으로서 노멘클라투라 전체가 잠시 마비 상태에 빠진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117) 그러니 흐루시초프가 1956년 봄(4월 30일자)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게 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겠다(그는 1955년 2월에도 표지를 장식했었다).

 

 

여하튼 이러한 지젝의 지적/판단은 옳은 것이다. 다만, 그가 사용한 노멜클라투라란 말에 대해서 나는 유보적이다. 스탈린의 최측근들조차도 그가 신임하는 동안에만 생존할 수 있었던 시대에 (안정적인) 사회계급으로서의 노멘클라투라라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련에 노멘클라투라가 사회계급으로 부상하는 것은 흐루시초프 이후에 들어선 브레즈네프 시대에 와서이다. 따라서 표면적으론 소프트 스탈린 시대처럼 보이지만, 브레즈네프의 시대는 주인-담론의 시대(=스탈린 시대)가 아니라 대학-담론, 혹은 관료-담론의 시대이다. 대학-담론(University Discourse)을 소련의 상황에 맞는 보다 적절한 용어로 바꾸자면, 관료-담론(Bureaucracy Discourse)이 될 것이기에(자가용 운전을 즐겼던 브레즈네프가 출근길에 곧잘 자신이 직접 관용차를 몰았다고 한다. 운전기사는 조수석에 태우고).

 

이 관료-담론 시대의 (유토피아적)최대치는 79년에 만들어진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에 반영돼 있다('모스크바의 지하철'에서 영화의 이미지들은 소개한 바 있다). 소련의 유토피아는 그 영화 속에 있()(냉전시대였던 1970년대가 소련식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유금세월이자 화양연화였다. 그 시절의 종말이 다들 브레즈네프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증언하는 아프칸 침공이다(덕분에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서방측에 보이콧됐다. 그리고 이 전쟁의 와중에 브레즈네프는 사망한다). 그러니, 소련보다 한술 더 떠서 아프칸에 이어 이라크에 침공한 미국의 패권 또한 (징후적으로) 사양길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적어도 역사는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진리는 황제보다 강하다란 푸슈킨의 유언을 비틀어서 말하자면, 역사는 패권보다 강하다.      

 

 

흐루시초프의 정치적 제스처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1980년대 중반의 고르바초프이며, 그의 페레스트로이카이다(페레스트로이카의 문학적 상관물이 요즘 TV시리즈로 방영되면서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아나톨리 리바코프(1911-1998, 왼쪽 사진)의 <아르바트의 아이들>(열린책들, 1988; 우아당, 1988)이다. 전체 3부작 가운데, 1부가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아니, 2부도 번역돼 있다. 이 작품은 2004년에 TV 미니시리즈로 제작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덕분에 재출간된 작품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가운데가 소설 3부작, 그리고 오른쪽이 DVD로도 출시돼 있는 미니시리즈). 한데, 국역본은 절판중인가? 

 

나중에 고르바초프 자신이 고백한 바이기도 하지만, 브레즈네프 시대의 부정적 유산을 물려받은 그에게 소련의 가장 큰 적은 미국이 아니라 (거대)관료체제였다. 그는 (흐루시초프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인민대중과 상대하면서 관료주의를 타파해나가려고 하지만, 그러한 이상주의는 흐루시초프 때와 마찬가지로 조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실패와 함께 소련의 역사는 종말을 맞았고. 고르바초프를 대신하여 들어선 1990년대 옐친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는 과두지배를 뜻하는 올리가르흐(복수형은 올리가르히)이다.

 

현재 러시아를 지배하는 계급은 민영화(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막대한 이윤과 부를 챙긴, 과거 노멘클라투라의 새로운 버전으로서의 올리가르흐이다(같은 제목이 영화도 만들어졌었다. 옐친 시대의 최대 갑부였던 베레조프스키를 모델로 한). 옐친 시대의 부정적 유산을 물려받은 현 푸틴 정부 최대의 정치적 과제는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신흥 노멘클라투라, 혹은 '신종 러시아인'으로서의 올리가르흐를 개혁하는 것인바(그는 석유재벌이자 러시아 최대 갑부 호도로프스키를 감옥에 집어넣었고, 영국으로 도망간 베레조프스키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최근에 그가 지방 자치주 지사를 직접선거에 의한 선출에서 대통령 임명제로 바꾼 것도 나는 그러한 방향에서 이해한다(이건 물론 민주주의의 후퇴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민주적 직접선거에 의해서 선출되는 지사들의 대부분은 지역 마피아였다).

 

요컨대, 푸틴은 일관되게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잡고 있는데(한국사 패러다임으로 얘기하자면, 왕권(王權)이냐 신권(臣權)이냐), 문제는 그 궁극적인 지향점/회귀점이 스탈린이냐, 브레즈네프냐 하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임명제 대통령으로서 푸틴이 (주인-서기장이었던 스탈린의 경우에서처럼) 주인-대통령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물론 부정적인 전망만이 있는 건 아니다. 전임자들과는 다르게 푸틴 정부에는 (원유 수출로 챙기고 있는) 막대한 자금력이 있으니까(현재 러시아의 외환 보유액은 1,000억 달러가 넘는다). 과연 좋은 나라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상이 대략 재작년에 쓴 글이다. 주절이주절이 늘어놓았는데, 우리가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자.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비밀 연설이 끼친 파문들, 곧 여기저기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권총으로 자살하고 난리도 아니었다는 것. 다시 지젝. "여기서의 요점은 그들이 '순수한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 대부분은 소비에트 체제의 본성에 대한 어떠한 주관적 환상도 갖고 있지 않았던 잔혹한 조종자들이었다. 무너진 것은 그들의 '객관적' 환상, 곧 '대타자(big Other)'의 형상이다. 이 대타자를 배경으로 해서만 그들은 권력에 대한 무자비한 충동(욕동)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자신의 신념을 옮겨놓은 대타자, 즉 그들을 대신한다고 믿어왔던 대타자, 그들의 믿는다고-가정된-주체로서의 대타자가 붕괴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그리고 9. 11 이후에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2001년 9월 11일은 제20차 아메리칸 드림 전당대회의 날이 아니었을까?"(강조는 나의 것) 물론 여기서 '전당대회'가 뜻하는 바는 제20차 소비에트의 전당대회가 의미했던 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대타자'의 붕괴이고 파국이다. 그리고 실상 이 '아메리칸 드림'에 내가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은 며칠전부터 대서특필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미식축구 선수 '하인즈 워드'  덕분이다. 분량상 이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페이퍼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06. 02. 08.  

 

P.S. 아래 성화는 16세기의 것인데, '천국으로 가는 러시아(인)의 계단(A Russian Ladder to Heaven)'이란 제목을 갖고 있다. 멀고도 가까운, 혹은 가깝고도 먼 나라,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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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부터 미열과 두통 때문에 일과를 놓치고 있다. 할일은 많은데 머리는 아프고 손은 더디다. 게다가 어제는 발목까지 삔 탓에 (자업자득이긴 해도) 이래저래 불만이 터져나온다. 그린버그의 글을 정리하는 일을 미루고 잠시 재작년에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란 제목으로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창고에 다시 정리해둔다. 새학기에 러시아문화에 대한 입문 강의도 (다시) 맡게 되었기에 워밍업도 좀 해두어야겠고. 주된 내용은 "러시아에는 얼마만큼이 자유가 필요한가"에 대한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콘찰로스프스키의 인터뷰 갈무리이다. 그런데, 콘찰로프스키가 누구냐고? 이런, 젠장...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1937- )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모스크바영화학교 동기생이다. 둘 다 미하일 롬에게서 배웠는데, 비슷한 시기에 졸업작품을 만들고, 1960년대 중반 러시아 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콘찰로프스키의 데뷔작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타르코프스키의 경우 졸업작품은 <증기롤러와 바이올린>이고 데뷔작이 <이반의 어린시절>(1962)이었다(콘찰로프스키는 <증기롤러와 바이올린>의 시나리오도 썼다). 1962년 베니스영화제의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다.

참고로, 주인공 ‘이반’으로 나왔던 소년도, 지난달에 우연히 TV 인터뷰를 보니까, 중견 영화감독이 돼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이 부를랴예프이다. 혹 소년의 얼굴이 생각나시는가? 아래는 그 '소년'의 어린시절과 최근 모습이다.

그리고, 타르코프스키의 두번째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의 시나리오가 바로 콘찰로프스키와의 합작이다.

콘찰로프스키는 내가 알기로 타르코프스키보다 먼저 70년대 중반에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소비에트 몰락 이후 1990년대 중반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정확한 년도는 알지 못하며 짐작에 그렇다). 그의 헐리우드 시절 초기 대표작이 <폭주기관차>이며, 스탈린의 전속 영사기사의 삶을 다룬 <이너 서클>이 또한 그의 작품이다(<아마데우스>에서의 ‘모차르트’가 주연을 맡았다. 톰 헐즈이던가?). 그밖에도 미국에서 활동하며 많은 영화와 TV시리즈를 만들긴 했지만(<탱고와 캐쉬>, <마리아스 러버> 같은 영화들도 떠올려볼 수 있겠다), 비평가들은 보통 그가 젊은 시절의 ‘재능’을 낭비한 걸로 평가한다. 동기였던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 성취와 비교해서도 그렇고, 러시아 영화의 ‘황제’라고도 불리는, 그의 동생 니키타 미할코프와 비교해서도 그렇다(콘찰로프스키의 풀네임은 ‘안드레이 미할코프-콘찰로프스키’이다. 거기서 ‘미할코프’를 떼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이 형제의 사이가 원만한지에 대해서도 나는 알지 못한다).



러시아로 되돌아온 이후에도 콘찰로프스키는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내가 알기로 그의 최신작은 1996년의 제1차 체첸전쟁을 다룬 <바보들의 집>(2003)이다(실화를 다룬 이 영화의 배경이 전장(戰場)의 정신병원이다). 이 영화로 그는 제59회 베니스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영화의 비디오CD를 사놓고 아직 다 보지는 않았는데, ‘문제의식’에 있어서 에밀 쿠스투리차의 <언더그라운드>와 유사한 종류가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어쨌든 ‘타르코프스키의 친구’ 혹은 ‘미할코프의 형’ 정도로 나는 그를 자리매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읽은 인터뷰는 그의 ‘존재감’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아예 번역까지 해버렸다. 번역은 ‘정확성’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의역했는데, 그게 ‘유려함’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읽기에는 더 무난할 듯해서이다. 참고로, 나는 인터뷰 내용 중 많은 부분에서 콘찰로프스키에게 공감하는데, 이 때문에 같이 수업을 듣는 독일 학생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내 의견(‘자유론’)은 번역문 뒤에 간략히 밝히기로 하겠다.

인터뷰가 게재된 지면은 주간신문인 <논거와 사실(영어로는 ‘Arguments and Facts’)>인데(사진), 발행부수가 많은 주간지의 하나라고 한다(우리의 <일요신문> 같은 종류이다). 어제 처음 한 부 사봤는데, 9루블로 표시된 정가와는 달리 구내에서는 11루블(450원쯤)에 판매하고 있었다. 전체 32면. 일간지인 <이즈베스찌야>나 <니자비씨마야>(우리말로는 ‘독립신문’)와는 달리 활자나 체제가 좀 조잡해서, 정말로 ‘유력지’인지는 의심스러웠다(하긴 대부분의 신문이 그렇지만). 그리고, 정확한 인터뷰 시점은 확인하지 못했다. 러시아 두마(=의회) 선거 직후인 듯한데, 그 선거가 언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제기된 문제가 여전히 현재적이기 때문에(지난주에도 ‘러시아에서의 자유’라는 주제의 TV토론이 있었다), 시점에 구애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인터뷰의 제목은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이다. 인터뷰는 한 문단의 서론 이후에 시작되며, ‘기자들’이라고 표시되지 않은 문단은 전부 콘찰로프스키의 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주석에는 *표시를 했다. 이하는 번역문이다.

의원 선거가 끝나고 러시아에 사실상 단일정당 체제의 두마(=의회)가 형성되자 우려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논거와 사실>의 지면에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아버지’ A. 야코블레프, 반체제작가 V. 부코프스키 등 여러 사회활동가들의 목소리가 실렸다. 그들은 러시아에 대두되고 있는 ‘우려할 만한 정세들’에 대해서 지적했다. 즉, 우리가 지난 수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쟁취해온 시민권적 자유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에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필요한가?>란 문제와 관련하여 이와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저명한 영화감독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는 <논거와 사실>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예기치 않은, 역설적이면서 상당히 논쟁적인 자신의 견해를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러시아 국민에게 어떤 요구들이 존재하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에 무엇인가에 대한 요구(*영어의 ‘need’에 해당한다)가 사람들에게 없을 경우에는, 아무리 유익한 것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수요를 얻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가령 캐비어(*상어알젓) 한 양동이를 세네갈 사람들한테 제공한다고 해봅시다. 과연 얼마나 먹고 싶어할까요! 그들은 이 특별한 음식에 거의 손도 대지 않을 텐데, 그건 캐비어가 나쁜 음식이어서도 아니고, 그들이 모자란 사람들이어서도 아니죠. 세네갈 사람들, 물론 훌륭한 국민들인데, 단지 그들에겐 캐비어에 대한 요구가 없을 뿐입니다.

같은 질문을 러시아에도 던져봅시다. 과연 이 나라에서 언제 자유에 대한 요구가 객관적-역사적 조건으로서 제기된 적이 있습니까? 대답은, 유감스럽게도, 부정적입니다. 플레하노프(*러시아 맑스주의의 ‘아버지’)조차도 레닌에게 미리 경고했었죠. “러시아의 역사는, 구워서 사회주의란 고기만두를 만들 밀가루를 빻지 못했다네.” 즉, 러시아의 역사는 유사 이래 그 발전과정 속에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요구를 창출해내지 못했던 것이죠.

라디오 <스바보다>에서 “당신에게 자유란 무엇입니까?”란 여론 설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두 가지 답변이 기억에 남는데, 첫번째는, “자유란 무엇보다도 국가로부터 간섭 받지 않는 것이다.”이고, 두번째는, “자유란 만약 당신에게 말이 있고, 초원에 천막이 있다면,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것이다.”예요. 이 두 가지 정의는 특별히 러시아적입니다. 두 정의는 그냥 러시아 철학이 아니라, 러시아 농민의 철학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농민들의 철학이란 언제나 국가와의 대립관계 속에서 자신을 설정해 왔기 때문이에요. 국가는 농민들에게 한번도 뭔가를 주어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빼앗아가기만 했죠. 농민들의 역사, 이것은 국가와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입니다.

의원 선거결과 집계가 끝나자 사회학자들은 어째서 젊은 층들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우파에 표를 던졌을까를 분석하려고 했습니다. 이건, 그 정치세력(*우파)이 그들(*젊은 층)의 권리와 자유를 중지시킬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하는데도 말입니다. 몇몇 사회학자들은 아주 슬픈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젊은 층들에게 자유란, 단지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의 시간, 그러니까 일할 필요가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러시아에서 모든 서구적 가치들(*사상), 루소나 디드로 등등의 계몽사상가들이 공표한 그 가치들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 가치들은 단지 소수의 계몽된 그룹, 인텔리겐치아 층에서만 받아들여졌죠. 인텔리겐치아, 이건 순전히 러시아적인 현상입니다. 다른 나라들에는 인텔리겐치아 대신에 그냥 전문지식인들(*인텔렉츄얼)이 있죠(*‘비판적/혁명적 지식인’이 하나의 ‘사회적 계급’으로 존재했던 나라는 러시아가 유일하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교육받은 소시민계급에서 생겨났습니다. 이 소시민계급이란 해방된 농노들이죠. 그 때문에, (의사, 교사 등) 19세기의 ‘잡계급’(*1)들은 ‘나로드’(*2)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죠. “나는 여기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데, 나로드는 여전히 노예상태에 있구나!”(*1860년대의 비평가 도브롤류보프는 딸기잼을 먹을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바로 그랬죠, 나로드는 너무도 오랫동안 노예상태에 있었고, 이 때문에 어떠한 삶의 안락도 체험할 수 없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합니다. 러시아의 모든 재앙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쪽에는 서구사상을 수용하여 진보적으로 사고하는 인텔리겐치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이러한 사상에 관심도 없고, 그걸 이해할 수도 없는 절대 다수의 나로드가 있다는 것(*이러한 분열현상에 대해서 참고할 수 있는 문헌은 이인호, <지식인과 역사의식>(문학과지성사)이다).



 

 

 

(*1) ‘잡계급’은 소수 귀족과 다수 농민/농노가 아닌 제3의 계급을 가리키는데, 19세기 전반기에 형성된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그 출신에 따라 (소수) ‘귀족 출신’과 (다수) ‘잡계급 출신’으로 대별되는바, 전자의 대표자가 작가이자 사상가 게르첸(Herzen)이라면(그는 대귀족의 사생아였다) 후자의 대표자가 비평가 벨린스키(Belinsky)이다(그는 사제의 아들이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19세기 러시아문학은 인텔리겐치아의 문학이었다. 하지만, 교육받지 못한 대부분의 나로드 때문에 당시 문맹률은 95%에 달했는바, 다르게 말하면, 그 위대한 러시아문학은 5%에 의한, 5%를 위한 문학이었다.

(*2) 우리에겐 ‘브 나로드’ 운동(심훈의 <상록수>)이라고 할 때의 그 ‘나로드’이다(‘브’는 ‘toward’란 뜻의 전치사). ‘민중’ 혹은 ‘인민’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실내용은 주로 ‘농민’이다. 대략 1840년대부터 제정러시아의 사회적 계급은 짜르(=황제)/귀족과 나로드, 그리고 인텔리겐치아로 3분 된다. 인텔리겐치아는 주로 ‘참회하는 귀족’(작가로선 톨스토이가 대표적이다)과 대학교육을 받은 잡계급 지식인들로 구성되었다. ‘브 나로드’ 운동은 1880년대 인텔리겐치아들의 농촌 계몽운동이었는데(‘농활’의 원조이다), 그 진보적/혁명적 취지와는 달리 이 운동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농민들의 고발로 이들은 (다행히 총살을 면할 경우) 대부분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요구, 즉 캐비어 혹은 거위간의 맛을 아는 소수의 요구와 캐비어가 뭔지, 거위간이 뭔지도 모르고 그에 대한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다수의 요구는 서로 충돌하게 되는 것이죠. 결국 이 계몽된 소수는 나로드가 무얼 원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겐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레닌의 오류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플레하노프는 레닌에게 이렇게 말했죠. “자넨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걸세.” 그러자 레닌이 말하길, “아니요, 혁명은 역사의 산파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앞으로 끌고 나갈 겁니다.”

하지만, 좌건 우건 갑작스런 진동(*혁명)은 매번 재난을 초래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1990년대에 ‘역사를 앞으로 끌고 나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체험했습니다. 혁명적인 방법으로 자본주의로의 길로 진입한다는 게 그런 것이죠. 무엇을 얻게 되었습니까? 다수의 절대 빈곤화와 국가 체제의 완전한 붕괴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더 이상 아무런 구심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물론, 나로드에게 자유는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누가 자유를 향유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돈을 빨리 벌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고작 한줌의 무리들뿐이죠(*이 한줌의 무리를 ‘노브이 루스끼’, 즉 ‘새로운 러시아인’ 혹은 ‘신종 러시아인’이라고 부른다. 그 말의 함의는 그들이 ‘본래의 러시아인’이 아니란 얘기다. 그들은 자본주의 이행기에 한몫잡음으로써 백만장자,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현 러시아 사회의 새로운 ‘귀족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모스크바에 독일의 어느 도시보다 많은, 비싼 독일차들이 굴러다니는 건 이들의 과시적인 부(富) 덕분이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 국민의 요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얻게 된 결과입니다. 누가 국민의 요구를 이해했을까요? 스탈린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한번은 서기장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소파에 누워서 대답하기를, “어머니, 짜르가 무엇인지는 아시죠?” “그럼, 그럼, 알지.” “그게요, 그거랑 거의 비슷한 거예요.” 스탈린은 나로드의 요구가 절대권력에 있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고, 러시아인들이 그를 지지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비극이 아닙니다. 짜르가 폭군이 되느냐, 성군이 되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기자들) 당신의 생각대로 한다면, 우리는 짜르시대로 후퇴해야만 할 거 같군요. 자유로운 사회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왜 자유 곧 전진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는 1990년에 자유로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우린 러시아 나로드에게 그들이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자유를 부여했습니다. 우리가 얻은 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앞으로 전진했습니까? 대답을 해보세요! 러시아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돼 버렸어요. 그걸 타고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기자들) 가긴 가겠죠. 하지만, 문제는 어디로, 어떤 속도로 가느냐겠죠.

-그게 그겁니다. 요컨대, 자유가 반드시 전진은 아니라는 것이죠… 1990년대 초의 그루지야를 예로 들어봅시다. 거기서는 절대 자유선거에 의해서 감사후루지아(Gamsakhurdia)가 선출됐었죠(*그때 선출된 대통령인 모양이다. 사진). 98%가 표를 던졌습니다. 그가 시작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루지야 인텔리겐치아의 절반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게 전진입니까? 대답해 보세요! 감사후르지아는 실상, 권력의 찬탈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루지야가 전진했던가요?

-보통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자유와 안전 중에서 어느 걸 선택할 것인지.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기자들) 안전.

-당연하죠! 러시아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보살핌입니다. 나의 증조부이자 저명한 철학자 표트르 콘찰로프스키는, 1940년대에 파리에서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쓰셨더랬죠. “자유란 위대한 선물이다. 하지만, 절대적인 축복은 아니다. 자유를 잘 다룬다는 건 원자력 에너지를 다루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때문에, 자유가 러시아인들에게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슬프지만은 않다.”

만약에 어떤 사람에게 만족스런 조건이 주어진다면, 그는 동물이 될 겁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남아있기 위해서는 불만스런 조건이 필요합니다. 물론, 합리적인 한도 내에서 말입니다. 예컨대, 인간은 적당히 추울 때 적극적으로 일을 합니다. 어째서 3,000킬로미터의 적도 부근이 절대 빈곤지대입니까? 거긴 덥거든요. 당신이 누워 있으면 나무에서 바나나가 떨어집니다. 그걸 먹으면 되고, 일을 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너무 덥기 때문에. 하지만, 좀 추운 곳으로 가면, 일을 해야 따뜻해질 수 있고, 그런 곳에서 정상적인 부르주아사회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국가는 이 ‘만족스런 조건들’과 ‘불만스런 조건들’ 사이에서 균형을 창출해야만 합니다. 국가(=정부)란 것 자체가 나로드를 보살피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죠. 그건 커다란 환상입니다. 국가란 인간이 동물이 되는 걸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국가는 인간의 탐욕과 본능을 제한합니다. 인간은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니까요…

 

 


 

유감스럽게도, 러시아 문화의 몰락은 넘쳐나는 정보가 서서히 인간의 정신적 체험을 잠식해가고 있는 것과 관계 있습니다. 체험이 더 증가하는 게 아니라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의미는 줄어듭니다. 인터넷, 이건 쓰레기통입니다. TV도 쓰레기통이고, ‘맥도널드’도 쓰레기통입니다(*쓰레기가 정말 많이 나온다!). 이런 게, 오늘날 전세계에 퍼져나가고 있는 ‘미국식 대중문화’이고, 이건 ‘미국문화’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위대한 시인이 출현한다고 해도 아무도 그에게 귀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시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오늘날엔 영화도 끝났고, 예술은 자신의 권위와 대중에 대한 매혹을 잃었습니다.



 

 

 

프랑수아 모리악이 말한 대로입니다. “20세기는 축구의 세기가 될 것이다.” 그의 예언은 약간 빗나갔는데,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가 스포츠의 세기가 되었습니다. 어디로 돈이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까? 축구, 테니스, 야구, 농구, 각종 레이스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슈마허나 베컴은 톰 크루즈만큼이나, 더는 아니더라도, 유명합니다. 왜인가요? 돈이죠! 시장은 이미 예술에서 스포츠로 옮겨갔습니다. 나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선 다행스런 일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발가락으로나 썼을 법한 작품을 터무니없는 돈을 받고 팔아넘긴다든가, 원칙적으로 배우로서의 조건이 안되면서 마지막 사무라이를 연기하는 것보다는(*톰 크루즈를 염두에 둔 얘기 같다. 원한이 좀 있는지?) 잘 뛰어다니는 게 그래도 나으니까.



-(기자들) 러시아의 영혼은 남아있습니까?

-러시아의 영혼은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영혼이 반드시 청렴을 뜻하는 걸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돈은 악이고, 영혼은 선이라는 이분법은 큰 오류입니다. 영혼이 사악할 수도 있고, 반면에 돈이 순수할 수도 있으니까요.<끝>

여기까지이다. 이상, 콘찰로프스키의 다소 ‘도발적인’ 견해에 대해서, 독일 학생들은 상당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헤겔의 후손들답게(그들이 헤겔을 거명하진 않았지만), 인류사의 진보는 자유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전제가 그들의 뇌리에는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도 모르겠다(그것이 '러시아 영혼'과 대비되는 '독일 정신'이다). 하지만, 나는 콘찰로프스키에게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동의는 그의 주장에 깔려있는 ‘역설’에 대한 동의까지 포함한 것이기에 ‘전적’이다. 그가 말하는 러시아가 내가 알고 있는 러시아이다. 전제주의나 독재는 나쁜 것이지만, 그것이 자본의 ‘합리적인’ 독재보다 더 나쁜 것일까? 이 질문은 “과연 후세인이 부시보다 더 나쁜 놈일까?”란 질문과 같은 것이다.

 

 

 

 

현재 러시아에서 이 ‘자본’(대부분 유태계 자본이라고 한다)의 독재를 얼마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국가’이다. 이 국가란 푸틴의 국가관료체제를 말하는바, 그래도 그 점이 자본과 결탁했던 옐친과는 다른 푸틴의 면모이다. 그리고, 현 러시아적 문맥에서, ‘자유에 대한 요구’는 현재 감옥에 있는 ‘기업가’ “호도르코프스키에게 자유를!”과 거의 같은 의미이다. 요즘(물론 재작년 얘기이다) 씨아일랜드에서 열리고 있는 G8(러시아언론은 ‘G7+1’ 대신에 ‘G8’이란 표현을 쓴다) 정상회담 얼마 전에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상황을 주제로 미의회에서 열린 청문회(헬싱키위원회)에서도 호도르코프스키 사건은 도마에 올랐었다.



이 청문회에는 세계 체스챔피언으로 이름을 날렸던 카스파로프가 푸틴을 맹비난하는 증인으로 나서 눈길을 끌었는데, 이 소식을 전하는 <이즈베스찌야>의 기사 타이틀은 ‘카스파로프 대 푸틴’이었다. 카스파로프는 푸틴이 임기중에 개헌을 밀어붙이고 다음 대선에 또 나올 것으로 믿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대 운동을 미리부터 전개하고 있다. 현행 러시아 헌법상 대통령은 1회에 한하여 연임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난 3월의 대선에서 연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푸틴은 다음 대선(2008년)에는 출마할 수 없다. 푸틴에 대한 불만의 대부분은 몇몇 기업인들과의 불화에서 비롯되었는바, 탈세혐의로 체포된 러시아 최대의 부호(富豪) 호도르코프스키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요컨대, 일부 러시아의 지식인들과 미의회 지도자들이 보기에, 러시아는 정치적 경쟁자라고 해서 (무죄한!) 기업가를 감금하는 나라, 그래서 아직도 ‘덜 민주적인’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 일은 미국같이 ‘민주적인’ 나라에서는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기업인들의 기부금으로 정치하면서 대통령도 되고, 대통령이 되어선 기업들 뒤를 봐주기 위해서, ‘자유의 이름으로’ 전쟁도 서슴지 않는 나라야말로 ‘자유주의’의 천국 아닌가?(이 ‘천국보다 낯선’ 천국의 일상에 대해서는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 자세하게 보고해 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민주적인’ 나라가 ‘덜 민주적인’ 나라보다 과연 ‘더 좋은’ 나라인지 확신할 수 없다.

 

 

 

 

사실, 러시아에서 ‘자유’나 ‘민주주의’는 이제 겨우 십수 년의 역사밖에 갖고 있지 않다. 걸음마 단계인 셈. 다른 한편으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공부해볼 수 있는 아주 유익한 ‘현장학습장’이다. 여기선 ‘민주주의의 발생과 진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민주주의의 ‘빅뱅’ 현장처럼. 그러니, 민주주의를 공부하려면 미국에 갈 게 아니라, 러시아에 와야 할 것이다(물론 한국도 민주주의의 생생한 ‘학교’이지만).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민주주의가 어떤 공모관계에 있는가를 배울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유에 대한 ‘원자론적’ 이해가 아니라(“내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란 숭고한 구호들에서처럼), 자유라는 가치가 놓여있는 시스템에 대한 ‘체계론적’ 이해이다.



지난 화요일(6월 8일) <이즈베스찌야>의 쟁점란의 주제도 요즘 유행하는 ‘자유’였다. 거기에서는 러시아인들이 생각하는 자유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짐작하게 하는 설문결과도 제시됐는데, 열거된 단어들 가운데 즉각적으로 긍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는 무엇인가란 설문의 결과, 1위는 질서(61%)였다. 이어서 2위가 정의(53%)이고, 자유(43%), 애국심(40%), 안정성(40%), 러시아인(34%) 등이 뒤를 이었다. 민주주의(19%)가 15위이고, 시장(13%)이 19위로서 20위인 사회주의(12%)와 비슷했다. 35개의 단어 중 1%로 공동 꼴찌를 차지한 단어들은 개인주의, 혁명, 자유주의, 자본주의 등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혁명’이며, 러시아인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개인주의’나 ‘자유주의’, ‘자본주의’ 모두 ‘혁명’적인 걸로 인식된다는 사실이다(이 ‘자본주의 혁명’에 대한 콘찰로프스키의 견해를 상기해 보라).

러시아인들이 선호하는 이데올로기는 “정의-안정성-노동-평등-집단주의”를 내세우는 사회주의(19%)였고, 민족주의(12%), 자유주의(8%), 공산주의(5%)의 순이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이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지만, “자유-시장-서구-비즈니스-민주주의”라는 개념쌍들로 구성된 ‘자유주의’보다는 ‘사회주의’를 훨씬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콘찰로프스키의 견해는 특별히 ‘도발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정의나 평등이 없는 자유주의’보다는 ‘자유나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주의’에 더 호감을 갖고 있는 다수 러시아인들의 ‘주류적인’ 정서를 ‘역설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우리에겐 ‘병역’만큼이나 신성한 ‘민주주의’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지지는 생각보다 낮다. 장년세대는 아직도 1970년대 브레즈네프 시대에 대한 ‘시대착오적 환상’을 갖고 있다. 얼마전 이 브레즈네프와 그의 시대에 대한 역사 다큐멘터리가 방송되기도 했다. 우리의 ‘박정희 판타지’와 비슷한 현상).

자유(주의)에 대한 체계론적 이해라는 것은 그것을 “자유-시장-서구-비즈니스-민주주의”처럼 일련의 개념적-가치론적 사슬 속에서 이해하는 걸 말한다. 이러한 사슬은 물론 다른 모든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발생론적, 계보학적 근거를 갖는다. 이것이 자유에 대한 나의 논점이다. 그에 따를 때,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는바, ‘장사꾼(부르주아)들의 자유’와 ‘농부들의 자유’(러시아의 경우엔 ‘나로드의 자유’)가 그것이며, 이 둘은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그걸 뭉뚱그려 ‘시민의 자유’라고 하는데(이 ‘시민’은 오지랖이 넓어서 재벌도 시민이고, 백수도 시민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다른 ‘자유’가 혼종돼 있어서 오해를 초래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러시아어에서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유용하게도 두 종류의 자유를 적절하게 구별해서 표시할 수 있는 단어들이 있다. ‘볼랴(volya)’와 ‘스바보다(svoboda)’가 그것이다. ‘볼랴’는 ‘의지로서의 자유’이며, ‘스바보다’는 ‘법적인 권리로서의 자유’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농부들이 요구하는 자유는 ‘볼랴’이며, ‘스바보다’는 장사꾼들이 요구하는 자유이다. 영어의 경우 ‘freedom’과 ‘liberty’가 거의 구별없이 쓰이는 듯하지만 굳이 구별하자면, 각각 ‘볼랴’와 ‘스바보다’에 대응될 수 있다. Free-will이란 조어에서 볼 수 있듯이, freedom에는 생래적/자발적 의지의 관철이란 의미가 들어가 있으며, 'liberty'는 'liberalism'(자유주의)과 연계되는 단어이다. 그리고 이 리버럴리즘은 콘찰로프스키가 이의를 제기하는바, ‘진보주의’란 함의도 갖는다.



 

 

 

자유가 하나의 이념으로서 전면화되는 것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이다(*대혁명의 이념은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에도 파급되며, 1825년 12월의 ‘제카브리스트 봉기(=12월당 봉기)’를 낳는다). 그리고 이념으로서의 자유, 혹은 ‘자유주의’는 혁명의 주체인 부르주아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농부들도 장사꾼(부르주아)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요구하지만, 그 요구는 내 생각에 ‘이념화’될 수 없다. 그러니까 ‘농부들의 자유주의’란 말은 넌센스이다. 즉 ‘스바보다’는 ‘이즘’이 될 수 있지만, ‘볼랴’는 ‘이즘’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콘찰로프스키가 들고 있는 예에서처럼, 농부들에게 자유란 자기 말과 천막이 있는 걸로 충분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자기가 경작할 수 있는 논밭을 소유한 걸로 충분한 것이 농부의 자유이다. 그것은 ‘더 많이!’(볼셰)라는 요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더 많이!’라는 건 장사꾼들의 요구이며, 볼셰비키들의 요구이다.



 

 

 

<근대성의 구조>의 저자가 잘 보여준 바대로, ‘기업가 정신’과 ‘혁명가 정신’은 동일하다. 레닌은 탁월한 혁명 사업가이며, 예컨대 정주영은 비즈니스에서의 특출한 레닌주의자이다. 그들은 밀가루 없이도 빵을 만들어낸다. 그들을 묶어주는 키워드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기투(project)로서의 헌신이고 투자(project)이다. 그리고 이 헌신/투자는 중단 없는 과정이다. 편집증적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공산주의’란 미래, ‘초일류기업’이란 미래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멀미’를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비즈니스로서의 혁명’의 질주, 혹은 ‘혁명으로서의 비즈니스’의 질주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농민의 마인드, 나로드의 마인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닷새 일하고, 이틀 쉬는 걸로 더 바랄 게 없는 (순환적인) 삶! 

‘자유’는 언제 ‘자유주의’가 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주어졌다. 그것이 ‘돈(=근대 자본주의)’과 결합될 때이다. 농민의 자유가 ‘농민-영주’, ‘나로드-국가’라는 2자적 관계에서 문제되는 것이라면, 장사꾼의 자유는 돈을 매개로 한 3자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모든 형이상학의 문제가 1이냐 2냐의 문제로 환원된다면, 모든 정신분석학의 문제는 2냐 3이냐의 문제로 환원된다). 즉, ‘부르주아-돈-국가’. 라캉-지젝이 즐겨쓰는 도식을 빌어와서 말하자면, 농민의 자유는 충동적 자유, 즉 충동으로서의 자유라면(2자적 관계에서 욕망은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에), 장사꾼의 자유는 욕망으로서의 자유이다(이때의 자유는 항상 자유에 대한 금지로서의 ‘법’과 연관된다. 금지가 없으면 욕망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의 제한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그래서, 법과 자유는 서로 길항하지만 공모적이다). 이 ‘자유에 대한 충동’과 ‘자유에 대한 욕망’이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할 때, 중요한 건 모든 사람이 자유에 대한 욕망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콘찰로프스키는 같은 생각을 캐비어와 거위간에 대한 ‘요구’는 다를 수 있다는 사례를 들어서 말했다(욕구로서의 자유!). 비록 요구(필요)와 욕망이 구별되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나는 콘찰로프스키의 논변이 궤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보 이반’의 나라 러시아에는 욕망으로서의 자유(=돈)에 대한 요구가 없다는 것이며, 그런 자유(=돈)는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발상의 근거가 장사꾼도 아니고 인텔리겐치아도 아닌 ‘나로드’(=농민)이다. 나로드의 자유는 인텔리겐치아나, 시민(부르주아)의 자유와는 다르다는 것(러시아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19세기 후반에서야 비로소 형성되며, 서구에 비해서 상당히 미약했다). 그리고 그 점에서 나는 그에게 동의한다(물론 한국은 러시아와는 또 사정이 다르지만)...

06. 0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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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2-06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려워 어려워요

로쟈 2006-02-06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이 좀 길어졌지만, 제 의견은 '자유의 문제'가 간단하지 않은, 어려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happyant 2006-02-07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ostrov 2008-12-29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재미있어서 훔쳐다 놓(http://blog.naver.com/ostrov/140060310614)습니다!

헛헛헛헛 2009-09-20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ㅁ'
 

모스크바 지하철에 관한 이미지들을 검색하다가 기억도 되새길 겸 몇 장을 모아놓는다. 자주 드나들던 '우니베르시쩨뜨'(=대학) 역과 그 주변 사진들이다.

맨 처음 건 주로 이용하던 역사 건너편 사진인데, 오른쪽으로는 가판들이 좀 있고, 트롤레이버스의 종점과 함께 시장이 있다. 가로에 보이는 건물들은 모스크바의 전형적인 건물들이다. 하단부에 쳐 있는 철망들이 고드름 보호망이다. 2003년 6월에 찍은 사진으로 돼 있는데,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을 리 만무하다.

아래 사진이 자주 이용하던 역사. 사진에 나오지 않지만 오른편으로 더 가게 되면 자주 이용하던 출입구가 나온다. 전면에 보이는 건물은 그래도 생긴 지 몇 년 안되는 쇼핑몰 건물인 '유니버시티'이다. 딸아이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들을 산 곳이기도 하고, 간혹 구내 환전소에서 환전을 하기도 했다. 약속 장소로도 자주 이용되는 곳.

역사 안으로 들어가서 표를 사고 개찰구를 통과하게 되면, 아래 흑백사진과 같은 에스컬레이터가 등장한다. 대부분의 전철역이 이 정도 혹은 그 이상의 '깊이'를 자랑한다(그리고 비슷비슷하다). 70년대 영화 속의 모습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좌우 벽면의 광고판들 정도가 달라졌을까.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서게 되면, 아래 사진과 같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거의 없는 걸로 보아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시간이 아닌가 싶다(사진의 사이즈를 좀 늘렸더니 약간 흐리게 나온다).

전철 차량은 좀 낙후돼 있지만, 그래도 별다른 사고 없이(폭탄 테러만 아니라면!) 운행되고 있는데, 아래 사진과 같은 차량이 승강장에 진입해 들어오고 문이 열리게 되면 얼른 타면 된다. 사전 예고 같은 거 없이(인정사정 없이) 문이 닫히고 열리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날치기도 주의해야 한다. 어리버리한 행색을 보이면 여지없이 당한다!).

아래 사진은 신설역으로 모스크바강을 가로지르는 철교에 위치한, 그래서 가장 좋은 전망을 자랑하는 '참새 언덕' 역에 전철이 진입하고 있는 모습.  

Фотографии -> Поездки -> Поездка в Москву (27-28 декабря 2002) -> 002

그리고 끝으로, '참새 언덕'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시 전경. 2004년 10월에 찍은 사진으로 돼 있으니까 내가 보았던 '그 가을'이기도 하다. 전면에 보이는 경기장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의 메인스타디움이었다고. 지표상으로 가장 두드러진 건축물이다. 낙엽수들 사이로 살짝 드러나고 있는 것이 모스크바 강이다.  

06. 02. 06.

 

 

 

 

P.S. '모스크바'란 지명과 떼놓을 수 없는 영화는 (1988년 12월) 국내 최초 개봉 '소련영화'였던 블라지미르 멘쇼프의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1979, 150분)이다(1980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러시아 사람들이 흔히 말하길, "이 영화를 보지 않은 러시아인,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사랑하지 않을 러시아인은 없다". 그러니까 '러시아적 감성'의 바로미터가 되는 영화('베사메무초'가 주제음악으로 흘러나왔을 때 다들 뒤집어졌었다). 음반 <백만송이 장미>(아울로스, 2002)에는 영화의 엔드타이틀과 함께 흘러나오는 주제가 '알렉산드라'가 포함돼 있다.

왼쪽은 영화의 (VCD)포스터, 그리고 오른쪽은 영화를 모티브로 한 발렌친 쵸르느이흐의 소설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2004). 영화의 주인공 카챠(베라 알렌토바 분))와 고샤(알렉세이 바탈로프 분)가 처음 만나는 장소가 모스크바의 지하철이다(아니다 교외선 같다! 여하튼 기차다). 아래 장면. 그리고 그 아래 장면은 영화를 본 사람들은 기억할 소풍 장면이다.

Вера Алентова. Кадр из фильма Москва слезам не верит_Фото_Актеры советского и российского кино 

Вера Алентова, Наталья Вавилова и Алексей Баталов в фильме Москва слезам не верит_Фото_Актеры советского и российского кино

그리고 영화의 히로인 베라 알렌토바(1942- ). 영화 속에서 그녀는 20대 처녀와 40대 중년의 카테리나를 연기한다. 멘쇼프의 영화에 자주 출연한 듯하다. 오른쪽은 영화 속 스틸. 50년대 후반의 '꽃처녀' 카테리나와 친구 류드밀라. 이 꽃처녀들도 이젠 다들 60이 넘은 나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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