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게 출근해서 점심을 먹고 나서야 인터넷을 둘러보는데(*이 글은 2003년말에 씌어졌다), 미디어다음의 메인 뉴스가 “여배우 매염방 암으로 사망”이다. 그녀가 암투병중이라는 얘기는 오래전에 흘깃 지나가면서 들은 거 같은데, 그럼에도 2003년을 불과 이틀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갑작스럽다. 지난번 장국영의 자살에 이은 매염방(Anita Mui)의 죽음으로 이들 홍콩의 가수이자 배우들을 좋아했던 이들에게 올해는 ‘최악의 해’로 기억될 모양이다.

 

 

 

 

장국영이나 매염방의 열혈팬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의 음악, 특히 영화주제가들을 좋아한다. 자신이 주연도 맡았던 영화의 주제가로 장국영이 부른 <천녀유혼>과 <영웅본색3>의 주제가로 매염방이 부른 <석양의 노래(夕陽之歌)>가 그것들이다(나는 그 노래들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던 관금붕의 <인지구>를 빼놓을 수 없다(이 영화로 매염방은 대만의 금마장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에 장국영이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 등 왕가위 감독의 영화 여러 편에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데 반해, 매염방은 몇몇 무협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지만(그녀는 연기력에 비해서 좋은 영화를 만나지 못했다), 재주 많은 두 사람이 홍콩 연예계의 한 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흔히 386이라고 부르는)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



나에게 매염방은 개인적으로 한 친구에 대한 기억과 연결돼 있다. 그 친구는 사실상 나에게 매염방이란 배우의 존재 자체를 각인시켜준바, 언젠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가 (나로선 이외였지만) 매염방이라고 했다(그때 나는 아마도 임청하를 좋아하는 배우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입 밖에 내진 않았는지도). 그러면서 그 친구가 내세운 이유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었다(나는 턱이 야무진 배우를 좋아한다. 임청하나 애슐리 주드처럼).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매염방 음반(테입)은 1989년에 나온 <브라질>이고, 커버에는 예의 게슴츠레한 눈빛과 도톰한 입술의 그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은 음반을 사는 일이 아주 드물지만, 그때만 해도 한번 산 테입은 거의 닳을 정도로 들었고, 매염방의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음반은 A면(The Bright Side)과 B면(The Blues Side)이 각기 다른 주제로 돼 있는데, A면의 첫곡이 <여름날의 사랑(夏日戀人/ Summer Lover)>이고, B면의 첫곡이 바로 <석양의 노래(Sunset Melody)>이다. 매염방과 더불어, 어느덧 우리 인생의 여름날들은 다 저물어 간 듯하다. 하지만, 그녀가 부르는 <석양의 노래>는 얼마나 박력 있고 장쾌한가! 나는 그녀가 암과의 사투 속에서도 그러한 의연함을 지켜갔으리라고 믿고 싶다.

매염방을 좋아했던 친구는 이후에 입술이 도톰하지는 않아도 매염방만큼 훤칠한 미인을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감쪽같이 숨겨왔던 자신의 배우자감을 처음 내게 소개하면서 의기양양해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그가 지난봄 끄트머리에 세상을 버렸다.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고, 우울해 하던 그를, 한동안 자주 보지 못하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내가 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는 더 이상 같은 하늘 아래 있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고통스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나를 포함하여) 세상 그 무엇도/누구도 그의 의지가 되어줄 수 없었다는 것이 슬프고 안타깝고 아쉽다. 그는 의연했던 것일까, 어리석었던 것일까?..

 

 

 

 

지난주말에 산 정현종의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에 실린 ‘숨막히는 진정성의 시: 바예호 읽기’를 읽으며, 오래 잊고 있었던 이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1892-1938)를 다시 떠올렸다. 그의 시선집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문학과지성사)가 바로 5년 전인 1998년 12월에 나왔었고, 나는 그해 겨울을 레바나스를 읽으며, 바예호를 읊조리며 보냈다(나는 스페인어권 시인들 가운데 미겔 에르난데스와 바예호를 좋아한다). 평생을 경제적 고통과 병마로 시달리다가 죽은 시인 바예호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는 그의 시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이다. “호이 메 구스타 라 비다 무초 메노스(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세월이 기다린다니!”
이렇게 나는 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니 말이다.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pero siempre me gusta vivir: ya lo decía.
Casi toqué la parte de mi todo y me contuve
con un tiro en la lengua detrás de mi palabra.

Hoy me palpo el mentón en retirada
y en estos momentáneos pantalones yo me digo:
¡Tánta vida y jamás!
¡Tántos años y siempre mis semanas!...
Mis padres enterrados con su piedra
y su triste estirón que no ha acabado;
de cuerpo entero hermanos, mis hermanos,
y, en fin, mi ser parado y en chaleco.

Me gusta la vida enormemente
pero, desde luego,
con mi muerte querida y mi café
y viendo los castaños frondosos de París
y diciendo:
Es un ojo éste, aquél; una frente ésta, aquélla... Y repitiendo:
¡Tánta vida y jamás me falla la tonada!
¡Tántos años y siempre, siempre, siempre!

Dije chaleco, dije
todo, parte, ansia, dije casi, por no llorar.
Que es verdad que sufrí en aquel hospital que queda al lado
y está bien y está mal haber mirado
de abajo para arriba mi organismo.

Me gustará vivir siempre, así fuese de barriga,
porque, como iba diciendo y lo repito,
¡tánta vida y jamás! ¡Y tántos años,
y siempre, mucho siempre, siempre, siempre!



한때 인생이 아주 싫었던 날들에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버텼다. 에밀 시오랑의 말대로, 자살에 대한 관념은 자살을 유예시킨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고 투덜거리면, 어느새 삶은 그럭저럭 살 만한 것이 된다. 그래서 말하게 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내가 지난봄에 그 친구에게 바예호를 읽어주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한해가 가고 있다. 하지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또 다른 한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건 산 자들의 몫이다. 저무는 해에 삶을 놓음으로써 자유를 얻은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내 친구의 명복을 빌고, 매염방의 명복을 빈다(이 도톰한 여가수 덕분에 그 친구가 좀 덜 심심할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죽은 어린 남매의 명복을 빈다. 전철에 몸을 던져 우리가 한국인임을 부끄럽게 한, 한 외국인 노동자의 명복을 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지진으로 숨진 수만의 이란 사람들...

바예호의 사후에 발표된 시들 가운데 한편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전투가 끝나고,
한 사람이 죽은 전사에게 다가왔습니다.
“죽지 말아!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두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를 두고 가지마! 힘을 내! 다시 살아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스물, 백, 천, 오십만의 사람들이 와서 절규합니다.
“이렇게도 많은 사랑도 죽음 앞에서는 힘이 없구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수백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애원했습니다.
“형제여, 여기 있어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그러자, 전세계 만민이 몰려와 그를 에워쌌습니다.
슬픈 시신은 감동이 되어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맨 처음에 온 사람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멀리해다오.12>

200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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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30분쯤 친 내용을 날리는 바람에 다시 친다. 같은 내용을 다시 치는 일이 내키지는 않지만, 오기는 못말리는 법이다. 하지만, 대단한 오기는 아니기에 내용은 대폭 삭감한다...

문제의 발단은 어제 날짜 한겨레에 실린 한 서평이다. 신간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아트북스)에 대한 서평(24면)을 쓰면서 고명섭 기자는 줄곧 '벤야민'을 '베냐민'으로 표기했다. 제목까지 '베냐민에서 보드리야르까지...'로 달고서. 이 독일의 문예이론가 W. Benjamin에 대해 관례적인 표기는 물론 '벤야민'이다. 벤야민이나 베냐민이나 발음상에는 차이가 없으므로, 아마 고기자가 고집을 부리는 데에는 표기원칙이 작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설사 표기원칙에 따라 '베냐민'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더라도, 이 표기체계의 일관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용에 따라 축적된 문화적 관행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베냐민'은 (무슨 비타민이나 약이름도 아니고).'벤야민'이 갖고 있는 문화적 의미, 혹은 좀 과장해서 아우라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나치를 피해 스페인 국경을 넘다가 청산가리를 먹고 죽은 사람을 베냐민과 짝짓지 못한다. 원음주의도 아닌, 이상한 표기원칙 때문에(게다가 이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원칙이다. 베냐민이란 이름으로 검색되는 책은 아직 한권도 없다), 그런 문화적 의미를 박탈당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 학식있는 기자에게서 간혹 이런 만용을 볼 때(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나는 유감스럽다.

유사한 다른 사례들도 있다. 프랑스철학 좀 전공했다고, 관례화된 '베르그송(Bergson)' 대신에 '베르크손' 운운하는 족속들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원음에 가깝다는 것이다. 외국어 표기에 있어서 원음주의는 한가지 원칙이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한 가지 원칙일 뿐, 절대적 타당성이나 객관성을 갖는 건 아니며, 교육부의 표기원칙과도 다르다(창작과비평에서도 원음주의를 선호하여 '소쉬르'를 '쏘쒸르'로 표기하는데, 좀 짜증스럽고,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혐오스럽다).

흔히 원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원칙이 한 가지 원칙이라고 말하는 대신에(원칙 중에서는 좀 순진한 원칙인데), 올바른 원칙이고, 진리에 근접한 원칙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베르그송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그동안 베르그송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라고. 그런 주장은 물론 사실이 아닐 뿐더러, 혐오스러운 상징폭력에 다름아니다(부르디외라면, 티내기로서의 '구별짓기'라고 말할 것이다). 프랑스에서조차 외국어 저작이나 인명 표기에 있어서 자기들식의 원칙/체계를 충족시킬 따름이지 원음주의 어쩌구 하는 수작은 부리지 않는다. 나는 그런 것들이 현학취 이상의 의미를 갖는지 의심스럽다. '베르그송'과 '베르크손'을 절충해서 '베르그손'이라 표기하는 이들도 있는데, 과연 그게 목숨걸 일인지. 옆에서 보기엔, 이런 수작들이 무용하지만은 않다. 이런 표기를 근거로 베르그송 연구자들의 세대구분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정은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독일문학 (연구서도 아닌) 소개서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젊은 베르터의 슬픔'으로 옮겨놓은 걸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이미 '베르테르'란 번역 표기가 굳어져 있는 상태이고, 더군다나 대다수 독문학자들이 그렇게 번역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베르터'란 표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 그게 원음에 가까운가? 과연 씩씩한 '베르터'가 유부녀 때문에 자살할 위인인가? 게다가 '베르테르'란 우리말(!)에 담겨 있는 문화적 의미를 '베르터'가 다 접수할 수 있는가? 이 역시 좀 모자란 이들의 현학취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바흐친(Bakhtin)을 '바흐찐'이라고 표기해야지만 되고 '바흐친'이라 표기하는 건 무식의 발로이며, 영미식의 왜곡된 바흐친 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러시아문학 전공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같다. 초기에는 '바흐틴'도 있었고, 심지어 '박틴'도 있었다. 사실, 어느 것이래도 무방하다. 우리말 체계에서 '차이'만을 가지면 되는 것이니까. 거기에 '이해수준'을 거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비뚤어진 전문가주의이다. 번역으로 책을 읽고 무얼 쓰는 건 다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외국인명의 표기는 원칙에 따라 두 가지가 공존할 수는 있다. '마르크스'와 '맑스'처럼. 그리고 거기에 무슨 우열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원칙적 일관성과 관례, 표기의 경제성 등이다. 그리고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가급적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이왕 하나로 통일돼서 쓰이고 있는 표기라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무슨 치명적인 이유가 없는 한. 엉뚱하게 좀 튀어보려는 수작들은 이젠 그만 사라졌으면 싶다...

덧붙여 말하자면, 튀는 공유명사 표기가 말해주는 것은 둘 중의 하나이다. 무식이거나 교만이거나. 계몽철학자 '디드로(Diderot)'를 '디데로'로 표기한다든가, 문학비평가 '바르트(Barthes)'를 '바데스'로 표기하는 건 '무식'이고, (이미 합의된) '후설(Husserl)'을 '후세를'이나 '훗설'로 표기하는 건 교만이다. 둘다 학문에는 유익하지 않다...

03. 0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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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e 2004-03-1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 동감, 정말 동감입니다!!! 베냐민에 반대하신다 해서, 깜짝 놀라 읽어보니, 벤야민에 반대하는 건 아니었군요... 저도 베냐민에 반대합니다. 넘 황당한 표현이네요.

로쟈 2004-03-12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지시군요^^

sayonara 2005-04-16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만... 또는 허영이 아닐까여!?

로쟈 2005-04-1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적어도 '이상한 고집'쯤은 되는 것 같습니다...

딸기 2005-06-09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다른이야기입니다만.
국제기사에서 이름/지명 표기는 '아우라'가 아닌 '이데올로기'의 문제인 경우가 많거든요. '한국식/관행적 표기법'이라는 것이 대략 서구 식민주의자들->일본어 발음 거쳐서 온 것들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저는 현지발음을 살려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다가 번번이 벽에 부딪칩니다. '관행적 표기' '외래어표기법'을 들고나오는 교열부의 벽에 말이죠. ^^

로쟈 2005-06-0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식/관행적 표기법'이라는 것이 대략 서구 식민주의자들->일본어 발음 거쳐서 온 것들"이란 지적은 일리 있지만, 일반화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현지발음'이라는 건 상상적인 것일 뿐이어서(가령, '톨스토이' 대신에 '똘스또이'라고 하면 현지음에 가까운 것처럼 착각하기 쉬우나 현지음을 고려하면 '딸쓰또이'쯤으로 표기해야 됩니다. 이게 권장할 만한 표기인지는 의문입니다), 그걸 표기에 다 반영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의 난점은 해당 언어의 '정확한' 발음을 모를 경우 표기를 역추적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상당히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얘기지만, 창비사에서는 경음 표기를 선호하는데, 가령, '데까르뜨' '싸르뜨르' 등, 하지만, 그게 '현지발음'에 더 부합하는지도 의문일 뿐더러 '탈식민주의적' 표기가 되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개인적으론,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면피용 혹은 생색용) 알리바이 종류라고 생각합니다. '벤야민', '베냐민'은 사실 현지발음과도 전혀 무관하기에, 저로선 기자의 양식을 좀 의심하게 됩니다(즉 허영이 아닐까 싶은 거지요).

비로그인 2006-11-0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 김용옥식의 표기법도 싫어 하시겠군요.ㅋ

로쟈 2006-11-01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원칙은 관행/관례과 일관성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은 사실 발음과는 무관하기에 '김용옥식 표기'와도 무관합니다...
 

중력이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다. 이것을 조금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프로그램(pro-gram)이다. 즉 우리의 글자들(gram) 앞에 있는(pro) 어떤 것이고, 이 글자들에 무게를 주는 어떤 것이다. 이때의 어떤 것은 어떤 작용력이다.

 

  

 



M. 하이데거의 존재(Sein)가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라면, 중력은 모든 글자들을 글자들이게끔 하는, 모든 형태들을 그런 형태들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다. 모든 생명체의 DNA글자들, 유전형(genotype)과 표현형(phenotype)은 그래서, 중력의 장 속에 놓인다. 그리고 모든 어련하다 싶은 행동양태나 행동거지들은 중력의 입김 속에 놓인다. 중력은 그런 것이다.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로서의 인간을 ‘내던져진’ 존재로 규정할 때, 그는 이 중력에 대해서 잠시 잊은 듯하다. 즉 그는 현존재의 한 면만을 말한 것. 다른 한 면이란 바로 현존재가 ‘잡아당겨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내던져진 채로 가만 놔두어지는 존재가 아니다(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꼼지락거린다). 따라서 내던져짐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현존재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는다. 잡아당겨짐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반드시 거기에 덧붙여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존재물음과 존재사유는 제값의 덩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시는 포스트그램(post-gram)이다(시인은 포스트그래머이다). 시는 글자들을 보내는 기획이면서, 동시에 중력 이후의 삶을 묻는 기술이다. 우리의 바탕이 이러이러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이란 걸 알게 된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시는 특권적이다. 삶이 무게(질량)와 거리의 관계에 의해 정식화되는 중력의 지배하에 놓인다면, 시는 그것에서 벗어난다. 적어도 벗어나는 체한다. 시는 무게와 부피를 가지지 않는다. 즉 시는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의미에 지배되지 않는다. 시는 단지 어떤 형태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시라는 것은 백과사전적(혹은 n차원적) 의미공간에서 어떤 자력(磁力)에 의해 결합되는 단어들의 집합이다. 새로운 시라는 것은 이 의미공간에서 새로운 항로를 발견한다는 뜻을 갖는다. 이때 시의 공간은 다만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다. 따라서 시는 현존하지 않는다. 시의 흔적만이 현존할 따름이다. 언젠가 당신 뺨에 흐르던 눈물 자국처럼, 그것은 곧 마르고 곧 지워지며 곧 잊혀진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부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삶을 많이 가난하게 만들 것이다. 시는 그런 것이다. 시는 삶의 윤리학이 아니라 존재의 윤리학이다.

시적인 것의 세 가지 사례: ⒜아침에 아이들을 깨울 때는 “일어나라”고 소리를 지르는 대신에 경쾌한 음악을 틀었다.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기 위해 잠옷 위에 바바리를 걸치고 아파트 현관으로 나갔다가 아예 지하철을 함께 타고 남편의 직장까지 가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경직 상태)로 되는 것이 생존에 가장 유리할 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동물들은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약탈자로부터 위기를 모면한다... 카메룬 두꺼비와 돼지코뱀은 위협을 당하게 되면 등을 땅에 대고 드러누워 혀를 빼물고 죽은 시늉을 한다. 그러나 이 방어기제는 완벽하게 발달된 것은 아니어서 똑바로 길을 가다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때 즉시 다시 드러눕는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한다.

⒞아버지께서는 시상(詩想)이 떠오르실 때면 항상 우리를 불러다 받아쓰게 하셨다. 언젠가 아버지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은 시 쓰시는 일밖에 없으시면서 그것도 왜 혼자 하시지 않으세요?”하고 철없는 불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시를 쓰려고 하면 내가 시를 쓸 수 있구나 하는 기쁨에 손이 떨려 글씨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 세 가지 사례는 등가적이다. 과연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3초의 시간 여유. 정답은 과잉, 뭔가 넘쳐남이다. 먼저 ⒜는 바순(파고트)을 전공, 시립교향악단의 수석 바순주자로 활동하다가 “립스틱을 지워야 하는 것이 싫어”서 그만 둔 M여사(41세)의 얘기다. 다른 건 평범하다. 경쾌한 음악쯤은 나도 튼다. 하지만 바바리만 걸치고 ‘아파트 현관’을 지나서 남편의 직장까지 동행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G. 베커의 가족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부부생활(결혼)은 생물학적 차이에 바탕을 둔 교환계약이며 생산기술과 부부노동의 잠재적 시장가격에 의해 부부생활이 결정된다. 이때 사회적 의미에서 결혼이란 특정한 남녀가 함께 생활하는 것을 제도로써 사회가 수용한 것이라고 정의된다. 사랑의 감정은 결혼이라는 제도적 교환계약의 한 요소이다. 필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따라서 M여사 류의 감정(표현)은 과잉이다. 그래서 시적이다!

⒝의 두꺼비도 마찬가지이다. 이 녀석의 불완전한 방어기제 또한 눈물나게 시적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혀를 빼물고 죽은 시늉”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이 시지프적인 두꺼비가 제법 시를 알 만한 동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양서류로서는 보기 드문 경우이다. 포유류의 시적 동물로서의 우리는 이 두꺼비에게 깊은 연민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는 박용래 시인의 얘기다. 시가 무엇이기에 손이 떨려 글씨도 제대로 못쓴단 말인가? 이건 시를 초과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시적이다! 이 세 가지 사례는 각각 제도와 본능과 시가 무엇인가라는 사유에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과잉, 넘쳐남을 통해서이다.

 

 

 

 

H. 베르그송은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을 ‘웃음’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나는 기계적인 것에 덧붙여진 생명적인 것을 ‘시(시적인 것)’라고 규정하겠다. 물론 이때의 시는 장르적인 규정이 아니다. 이 시적인 것은 우주적인 차원의 것이다. 바로 우리가 존재-시와 중력-시를 말하고 더듬고 사유하는 차원 말이다. 장르로서의 시는 이 전체-시(한 권의 시집Le Livre!)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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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4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식과 이해는 개개 사물과 사건의 ‘다름’ 속에서 ‘같음’을 보는 행위이다. 즉 차이 속에서 어떤 반복을 보는 행위이며, 그래서 어떤 타입과 패턴을 파악하는 행위이다. 여기엔 동서양이 따로 없다. 동양의 주자학적 전통에서 공부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말하는데, 이때 ‘격물’은 사물을 격자 속에 놓고 파악하는 걸 뜻한다(패턴에 대한 앎이 바로 공부이다). 이 격자가 바로 서양철학적 전통에서의 기하학적 공간이다.

기하학적 이성이란 자신의 삶이 유일한 삶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삶(패턴)의 한 양상(거품)에 불과하다는 걸 꿰뚫어보는 이성이다. 즉 이것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카뮈는 이걸 부조리라 부른다)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조되는 것이 바로 반-기하학적 이성, 섬세한 정신이다(‘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의 이분법은 파스칼을 따른 것이다). 그것은 진짜 물에서 헤엄치고 있는 개개의 물고기(혹은 물방개)의 물에 대한 현실적인 앎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이다. 즉 우리의 현실을 주무르는 손때묻은 이성이다. 나는 이걸 달리 아줌마적 이성, 아줌마 정신이라고 부른다(아줌마들은 섬세한 걸 좋아한다).

한 아줌마의 시적 발언 한 대목을 예로 들어보겠다(김상미의 ‘아줌마’).

한 명의 아줌마 안에 수백 수십 명의 아줌마가 숨어 있다
그 수심의 깊이는 아줌마가 아니면 절대 알지 못한다
아줌마는 현재 우리 집 안에도 있다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
아줌마의 생각을 알려면 아줌마들만의 은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회학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들이다.

이 시의 1행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줌마 나름의 (무시 못할) 내력이다. 이 내력은 기하학적 이성에서의 전체화된 부분, 부분화된 전체에 대응하는 것이고 맞먹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3행이다.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라는 건 뒤집어서 얘기하면, 아줌마들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만을 생각한다는 것. 이 자기-중심적 사고야말로 아줌마적 이성의 모토요, 아줌마 정신의 알토란 같은 핵이다.

이 억척 어멈의 이성(메를로-퐁티의 ‘신체적 이성’)은 삶의 현장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성이다. 이 이성은 물밖에서 팔짱끼고 있는 제3자적 이성이 아니라, 물속에서 팔딱이고 있는 주관적 이성이다. 그것은 결코 삶을 멀거니 관조하지 않는다(‘그’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이다). 악착같이 삶에 밀착하여 부대끼고 싸우며 이겨낸다. 그리하여 “육체적 편안함과 안락한 보금자리, 그리고 걱정없이 자녀를 기를 수 있는 가능성”(이런 것이 아줌마에겐 중요하다)을 확보한다. 아줌마는 동물적인 실존을 선택하는 것이다.

아줌마의 이러한 존재론에 비하면, 아줌마의 사회학은 별거 아니다(그런 사회학에 집중하고 있는 이 시의 나머지 부분은 그래서 우리의 주목에 값하지 못한다). 이 아줌마들에게 E=mc2 같은 기하학적 인식은 오직 미학적, 장식적 가치만을 가질 뿐이다(이건 결코 폄하의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아줌마’가 바로 우리 집 안에도 있고, 우리 자신에게도 있다(남성에게 있는 여성성은 ‘아니마’만이 아니다).

아줌마성이란 무엇인가? “라파엘의 그림이 다 없어진다면 야단들이 날 것이다. 그러나 이끼의 한 종류나 식물 한 가지가 없어지는 데는 아무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불균형한 휴머니즘이 현대문명의 이상한 점이다.”(레비-스트로스)라고 한 인류학자가 털어놓을 때, 그가 꼬집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아줌마성이다. 또 “언제나 대중은 그들이 원하는 것만을 본다.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와 프루스트에 관해 이야기한다 해도 그들은 내 낮은 목소리만을 듣고, 가슴만 뚫어져라 볼 뿐이다.”(제니퍼 틸리)라고 한 여배우가 털어놓을 때, 그녀가 꼬집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아줌마성이다(아줌마들은 돈을 좋아하고 또 음탕하다).

사실 이 아줌마성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면서, (생활 속의) 행복의 원천이긴 하다. 또 자기-중심주의와 가족-중심주의, 그리고 종족(민족)-중심주의, 자문화-중심주의에 아줌마성이 기여하는 바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에의 편향이다. 무엇에의 편향(편애)은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기하학적 이성과 반-기하학적 이성의 균형과 조화에서 인간다움의 품위와 가치가 찾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저마다의 죽음을 죽으면서 동시에 인류 공통의 죽음을 죽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로 그때 우리는 “수많은 파도 중의 하나처럼 개체이면서 동시에 전체일 수 있는 존재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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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06-09-2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저씨적 이성이라 써도 괜찮을 법한데. 이런 비유 보면 문득 생각나는 에피소드.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러 간다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옆집 아가씨 왈, 아줌마들은 (이런 영화) 이해하기 힘들텐데... 혹, 로쟈님 안에 은근한 마초 하나 키우고 있을까 두렵다는...

로쟈 2006-09-25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줌마적 이성'이란 게 '아저씨적 이성'과는 전혀 종류가 다릅니다. 저는 니체나 레비나스 같은 이들을 '아줌마 철학자'로 분류하는데, 이들은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들이기도 합니다(관련 페이퍼들이 여러 개 더 있습니다). 그리고 '은근한 마초'라고 할 때, 그 마초성이 XY염색체에 새겨진 거라면 저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06-09-26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물학적 마초성은 인정하지만 사회학적(혹은 심리학적) 그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히니 위안이 됩니다. 각설하고, '아줌마적 이성'과 전혀 다른 '아저씨적 이성'에 대한 주제로도 쓰신 게 있나요? 비교해서 읽어야만 제 독해가 그나마 나아질 것 같아요.

로쟈 2006-09-2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른 생각나는 건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란 페이퍼입니다. 제목이 은근히 마초적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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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 이 네 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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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를 견뎌내는 일이 삶에서 중요하다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를 견뎌내는 일이다.

∴ ∴ ∴

시는 우리 삶의 소중함과 비참함을 동시에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술이다.

∴ ∴ ∴

중력이란 무엇인가?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다. 이것을 조금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프로그램 pro-gram이다. 즉 우리의 글자들(gram) 앞에 있는(pro) 어떤 것이고, 이 글자들에 무게를 주는 어떤 것이다. 존재 Sein가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라면, 중력은 모든 글자들을 글자들이게끔 하는, 모든 형태들을 그런 형태들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다. 모든 생명체의 DNA 글자들, 유전형 genotype과 표현형 phenotype은 그래서, 중력의 장 속에 놓인다. 그리고 모든 어련하다 싶은 우리의 행동양태나 행동거지들은 중력의 입김 속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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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포스트그램 post-gram이다. 시는 글자들을 보내는 기획이면서, 동시에 중력 이후의 삶을 묻는 기술이다. 우리의 바탕이 이러이러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이란 걸 알게 된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시는 특권적이다. 시는 삶의 윤리학이 아니라 존재의 윤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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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 일로, 나는 기억에 없지만 어머니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밖에 나가서 동생이 다른 아이와 싸움이 붙어도 나는 멀거니 옆에서 구경만 했다고 한다. 다 끝나고 나서야 둘이 손을 붙잡고 울면서 돌아왔다고. 이제 와서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럴 만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라고 해서 내가 달리 처신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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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관심한 태도 dis-interestedness가 나에게서 삶에 대한 무능력을 낳고 무성의를 낳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이나 영화 속의 멀리 있는 사람들이나 좋아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단지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경우든지, 그런 태도가 전제하고 또 확보하는 거리 dis-tance가 나의 의미론적 생존의 조건이 된다. 나를 생각하게 하고 글을 쓰게 한다. 문학이라거나 철학이라거나 하는 등속의 구분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문체일 따름이다. 문체란 언어의 한 묶음의 변주 variation이고, 어떤 변조 modulation이며, 자신의 바깥을 향한 언어적 긴장이다.(들뢰즈) 문체는 언제나 이질적인 heterogenous 언어 속에다 전위차를 일으켜 그 사이로 무엇인가가 지나가게,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S]tyle carves differences of potential between which things can pass, come to pass...)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바로 그러한 작업이다. 자주 다른 이들의 이런 글들을 읽으며 감전되었던 경험을 다시 되돌려주고 싶은 것이다.

∴ ∴ ∴

나는 울고 싶은데 神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내 처는 줄곧 울고 있다. 나 역시 운다. 나는 의사가 와서 내가 쓰고 있는 동안 아내가 울고 있다고 말할까봐 불안하다. 나는 그녀에게 가지 않겠다. 내게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니까. 내 어린것은 온갖 것을 보고 듣는다. 그 애가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키라를 사랑한다. 내 어린 키라는 자기에 대한 나의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그 애 역시 내가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내게 내가 잘 잤는지의 여부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내가 언제나 잘 잔다고 말해준다. 나는 무얼 써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神은 내게 쓰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결함을 지녔다. 나는 인간이다. 神이 아니다. 나는 神이 되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춤을 추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시를 쓰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이것이야말로 내 생의 목표이다.(니진스키, <고백>)

∴ ∴ ∴

드디어 관에 뚜껑이 덮였다. 못이 꽝꽝 박히고 짐마차에 실렸다. 마차는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거리가 끝나는 데까지밖엔 전송하지 않았다.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말은 속보로 달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뒤를 쫓아가면서 어이어이 소리를 내어 울었다. 뛰어서 쫓아가느라고 그 울음소리는 몹시 떨렸고 가끔 끊어지기도 했다. 가엾은 노인은 모자를 떨어뜨렸지만 그것을 집으려고 멈추어서지도 않았다. 비가 그의 맨머리를 적셨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런 것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어 울며 마차의 이쪽저쪽을 겅중겅중 뛰어서 왔다갔다했다. 낡아빠진 프록코트의 옷자락은 날개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호주머니란 호주머니에서는 책들이 비죽이 기어나오고 무슨 책인지 커다란 것이 한 권 소중하게 쥐어져 있었다. 길가는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어떤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이 가련한 노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책들은 쉴새없이 호주머니에서 진창으로 굴러떨어졌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 세워 물건을 떨어뜨렸다고 가르쳐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다시 마차 뒤를 쫓아갔다. 길모퉁이에서 어떤 거지 노파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들러붙더니 함께 관 뒤를 따라갔다. 드디어 마차는 모퉁이를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 ∴ ∴

능글맞기도 하지만 괜히 잘 우는 사람들이란 고정관념을 나는 러시아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이 두 러시아인 댄서/작가에게 힘입은 것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겠다. 사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런 그들의 정서가 나에게 맞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다지 잘 우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에 대한 고백으로서의 울음이 우리 생의 첫 발성(언어)이었다는 사실에 언제나 감동받는다. 외롭고 힘들어 지칠 때마다, 우리가 이 근원의 장소를 찾아가고 이 원초적 정념에 호소한다는 사실에 언제나 고무받는다. 예컨대, <파리, 텍사스>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가정이 파탄나자 트래비스는 자신이 잉태되었던 바로 그 근원의 장소로서 '파리'(프랑스 파리가 아니다)를 찾아 사진 한 장을 들고 황량한 텍사스 사막을 헤맨다. 그의 그런 행위에 의해 물리적으로 동질적인 어떤 공간이 파리 Paris/텍사스 Texas로 분절된다. 이 분절은 성(聖)/속(俗)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미론적이고 구제론적인 것이다. 이 고질적인 의미론/구제론은 아주 인간적이고 너무도 인간적이다. 우리는 그리 돼먹은 듯하다.

∴ ∴ ∴

"나는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눈물들은 생각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들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쓰라리지 않을까?" 이것은 루마니아의 작가 에밀 시오랑(E. M. Cioran, 1911-1995)의 말이다. 철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둔 그는 1937년 파리로 건너가서 이후 죽을 때까지 인근의 창녀들이 야밤에도 소란을 피우는 싸구려 호텔 다락방에 은둔하며 살았다. 그가 철학을 그만둔 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칸트와 피히테, 쇼펜하우어, 베르그송을 읽으면서 철학을 제외하곤 시에도 무관심했던 그는 남들처럼 논문을 쓰기로 결정하고 어떤 주제를 고를까 고심했다. 그리고는 진부하면서 뭔가 독특한 주제를 찾았다고 생각해서 지도교수에게 달려갔다. "'눈물의 일반이론'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가능이야 하겠지. 하지만 참고문헌을 찾는 게 어렵지 않겠나." 이에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논문의 근거가 되니까요." 그는 자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는 경멸에 찬 시선을 보냈고, 그는 그 순간 철학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한다.

그의 말: "나는 철학이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은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은 인간을 각자의 운명속으로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 ∴ ∴

나는 언젠가 나 자신이 그런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오랑이 포기한 '눈물의 일반이론'이란 것. 현재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 눈물의 일반이론을 위한 연습이고 밑그림이라는 생각도 한다. 거꾸로 철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에 근거한다.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는 철학의 무능력 자체는 바로 우리의 무능력을 닮은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을?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진 각자의 운명(시오랑은 해체de-composition라고 부른다. 이 해체가 그의 글쓰기 양식을 규정한다.) 속에서, 각자의 눈물 속에서 의미있는 일반이론, 즉 연대 solidarity를 끌어내는 일 말이다. 개인의 울음을 집단의 통곡으로 바꿔놓는 일 말이다. 언젠가는.

∴ ∴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 ∴

이 시의 1연은 나(화자)의 사랑-이야기의 전조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건 현실에서는 잘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다. 이때 푹푹 나리는 눈은 이 사랑의 축복과 고난을 동시에 표시한다.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나는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밤주막에서 소주를 마시며 그녀를 기다린다. 이런 나의 현실을 이 시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토로하고 있는 부분은 2연의 전반부이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여기서 '사랑하고' 대신에 쓰인 '사랑은 하고'란 표현은 은근하게 나의 사랑을 특수화, 주제화하고 있다. '은'이라는 조사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는, 나의 사랑은 혼자만의 사랑이고 외로된 사랑이다. 즉 나는 그녀, 나타샤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오지 않을 그녀는 눈 나리는 밤에 내가 불러낸 일종의 미적 가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님'이란 말 대신에 이 시에 이색적으로 쓰인, 러시아 여성의 이름 '나타샤'도 나와 그녀와의 거리를 더욱 분명하게 표시하며, '푹푹'(한숨소리!) 날리는 눈발 또한 혼자 소주를 마시는 그의 쓸쓸한 정조를 부추긴다.

그렇지만 이런 그의 정조는 곧 반전된다. 후반부의 내용은 어느 정도 술이 오른 나의 소망사항이다. 나는 이렇듯 눈이 푹푹 나리고 쌓이는 밤에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타고 깊은 산골 마가리(오막살이)에 가서 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소망이고 꿈이다. 여기서 아마도 도회(혹은 읍내)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산골은 현재의 현실과 대립되어 있는 소망스런 미래의 공간이다. 나는 (현재의)도회/(미래의)산골, (현재의)현실/(미래의)소망이라는 구도를 떠올리면서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을 자신에게 독려한다. 나의 환유로서의 흰 당나귀는 이 이행의 매개자이며 보조자가 될 것이다.

3연은 소주 기운과 자신의 소망에 더욱 고조된 나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2연)와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3연)의 도치된 문형은 그런 정조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그의 자신감은 사랑의 주체로서의 나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후로 나에게서 푹푹 나리는 눈은 나와 나타샤의 사랑에 대한 따뜻하고 여유로운 축복의 뜻을 강하게 갖는다. 이윽고 마지막 5연에서 나의 기쁜 마음은 절정에 이른다. 이제 아름다운 나타샤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라는 표현은 나타샤와의 사랑을 통한 나의 신생(新生)을 말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 ∴ ∴

 

 

 

 


시에 대한 감상을 대강 적어보았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1938)는 60년 전의 시이다. 그렇지만 응앙응앙 하는 신생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생생함을 잃지 않고 있다. 나는 그런 것이 시로 변한 눈물들, 생각으로 변한 눈물들, 빈들거리지 않는 눈물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당신은 소주의 힘이라고 말하려는가?). 사실 우리가 "더러워 버리는 것"이기는 해도, 우리는 매번 세상한테 (넘어)진다. 그래서 넘어가는 사람 Uber-mensch이 되기 위한 바쁜 이행 Uber-gang의 와중에도 넘어지는 사람 Unter-mensch으로서 우리는 매번 몰락 Unter-gang하기를 잊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세상이 본래 그리 돼먹은 거라면. 우리가, 가난한 우리가 참는 수밖에. 우리가 이 운명을 사랑하는 수밖에. 이러한 운명이 너무 좋아서 응앙응앙 오늘도 우는 수밖에!

∴ ∴ ∴

간혹 돈가방이라도 들고 어디론가 튀고 싶다!..


98. 8.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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