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말에 나온 책 중에 정인돈의 <셸리의 프로메테우스 연구>(동인, 2005)가 눈에 띄었다. 이때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1797-1851)가 아니라 저명한 낭만주의 시인인, 그녀의 남편 P. B.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이다. 메리 셸리가 평생 천재시인이었던 남편의 그늘에서 살아야했던 걸 생각해보면, '셸리'의 유명세가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렇듯 역전돼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이 셸리의 서사시 중에 'Prometheus unbound'(1820)가 있는데, 오래전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들은 과목이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주제로 한 비교문학 강의이었고 그때 읽어본 기억이 있다. 의당 기말 페이퍼에서도 몇 자 적지 않을 수 없었고. 생각이 난 김에 그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이란 글에서 한 대목 가져와 약간의 첨삭을 거쳐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뒷부분에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대한 언급도 있다(각주는 모두 생략한다).

<셸리의 프로메테우스 연구>는 아직 실물도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구해서 한번 읽어보도록 할 작정이다. 아쉬운 것은 셸리의 이 작품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혹 연구서에 '부록'으로라도 실려 있을까?). '밑 빠진 연구'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만 모양은 좀 덜 난다. 그럼 점에서, 얼마전 최부의 <표해록> 연구서와 역주서를 함께 낸 박원호 교수의 작업이 더 빛이 나며 의미가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신화소는 물론 ‘프로메테우스’라는 그의 이름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의 반항적/박애적 행위(=불을 훔침)와 그에 따른 징벌/고통(=간을 쪼임)이 다양하게 변형되어 이 신화의 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그는 불을 훔친 죄로 제우스의 벌을 발아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결박되어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이는 고통을 당한다). 이 가계의 이야기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프로메테우스’란 이름을 달고 있는 것들은 ‘직계-이야기’로, 그밖에 몇몇 신화소나 모티브에 의해 ‘프로메테우스적’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은 ‘방계-이야기’로 우리는 부를 것이다. 생긴 구석들이 제각각인 이 방계-이야기들을 그래도 묶어주는 것은 일종의 가족유사성일 테다.

하여간에 발가락이라도 닮은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들을 모두 긁어 모으자면 한이 없을 것이고, 얼굴이라도 제법 닮은 구석이 있는 이야기들만을 우리는 쫒아가게 될 것인데(*이 '이야기들'이 글의 다른 꼭지들이지만 여기서는 셸리 이야기만을 옮겨놓는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건너뛰어서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혹은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를 만나보기로 한다. 예의상 먼저 잠시 괴테를 접견한 이후에 말이다.

 

 

 

 

괴테(1749-1832)의 <프로메테우스>(1774)는 그가 25세 때 쓴 시로서 찬가(Hymnen)로 분류된다(내가 참조한 건 조창섭 편역, <시인의 노래: 독일 고전주의 문호들의 시와 삶>(서울대출판부, 1994)이다). 물론 제우스에 대한 찬가는 아니고 당연히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찬가이다. 이것은 본래 드라마로 창작하려던 것이었으나 드라마로는 단편에 머물렀고 시로서는 완성을 본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제우스에 대항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목소리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다. 그는 제우스신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데, 그것은 감사할 만한 어떤 은혜도 신으로부터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댈 숭배하라고? 뭣 때문에?/ 그대 언젠가 무거운 짐진 자의/ 고통을 덜어준 일이 있었던가?/ 그대 언젠가 불안에 떨고 있는 자의/ 눈물을 훔쳐준 일이 있었던가?”

그리하여 그는 ‘가련한 자’로 신들을 몰아치면서 도전적으로 말한다(<시와 진실>에서 괴테는 이 시는 ‘폭발의 도화약’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신의 땅과 오두막과 부뚜막(화덕)을 건드리지 말라고(“부뚜막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그대는 그리워하겠지.”). 프로메테우스적인 반항과 도전의 정신으로 충만한 이 시는 그리하여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 여기에 앉아, 내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지니라/ 나와 꼭 같은 종족을/ 괴로워하고, 울며,/ 즐기고 기뻐하되/ 나처럼/ 너를 안중에도 두지 않으리라!”

괴테의 이 시 또한 신화 일반의 전용이 그러하듯이 일단 당대성의 문맥에서 읽어야 한다. 그는 여기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가지고 새롭게 부상하는 사회질서와 몰락해 가는 기존 사회질서와의 갈등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에게서 프로메테우스는 18세기의 시민적인 자의식의 상징이자 그때까지 종교적으로만 이해되어 온 창조의 개념을 세속화시키는 것의 상징이기도 하다(“나 여기에 앉아, 내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지니라”). “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신들을 쓰러뜨려 버리는 프로메테우스는 민중의 대표자로서 압제 정치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두는 자의식으로 무장된 천재, 즉 자조자(Selbsthelfer)가 되는 것이다.”

질풍노도기에 통용된 자조자의 개념은 기존의 상황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사회변혁을 실현할 수단이나 자신이 감행하는 투쟁의 근본적인 목적을 알지 못한 채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항자를 뜻했다고 하는데, 괴테는 거기에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부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적 형상을 ‘자조자’에 투사함으로써이다. 이 시에서의 ‘오두막’은 시민(과 민중)의 삶의 터전이며 독립과 자립을 상징한다. 결국 이 시를 통해 “괴테는 왕권과 교권이 봉건 체제를 유지하는 보완적 관계에 있는 권력임을 폭로하고 낡은 상황을 변화시켜 새로운 질서를 관철시키는 것이 인간의 소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괴테의 프로메테우스 이해와 전용은 당대 진보적 지식인과 부르주아 계급이 가졌던 세계관의 한 단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세계관은 프랑스 혁명(1789년)을 통해 곧 극적으로 현실화될 것이다. 바야흐로 장기 19세기 ‘부르주아의 시대’(홉스봄의 규정)가 열리게 되는 것이고, 이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현실에서의 그러한 급격한 사회변동과 가치의 전도를 정당화하는 고대 그리스의 예언(fore-thought)의 목소리로 새롭게 자리매김된다.



P. B.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1818-19) 또한 그러한 맥락의 연속선상에서 조명될 수 있다. 셸리의 이 극은 아이스킬로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메테우스가 악과 완고의 상징인 주피터(=제우스)에 의해 신에 대항한 죄로 바위에 묶이게 된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어머니인 대지의 지지와 자연의 정령인 그의 애인 아시아의 사랑에 의해 버티고 있다. 주피터는 원초적인 힘인 데모고르곤(=운명, 역사적 필연성)에 의해 전복되고, 프로메테우스는 힘의 상징인 헤라클레스에 의해 구속에서 벗어난다. 이어서 사랑의 주제가 뒤따른다. 왕좌, 제단, 감옥, 재판관석은 지나간 유물이 되고 모든 인간들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된다.

따라서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해방’이다. 즉 셸리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프로메테우스의 고통, 그리고 해방, 그리고 새로운 인간/세계 창조의 비전이다. 당대의 현실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4막으로 된 이 서정 시극은 이 시의 서론에서 논의된 사회개혁을 주도하는 시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사회 개혁자로서의 시인 셸리의 열망과 모순들이 모두 나타난 신화극이며 정치 우화이다.”(정정호)

 

 


 

우리가 보기에, 이 셸리의 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가 가져온 제우스/프로메테우스 간의 가치전도를 또 다르게 변형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와, 존 밀턴(1608-74)이 <실락원>(1667)에서 하나님을 압제자로 보고 사탄을 그에 대항하는 영웅으로 본 견해를 접목시킨다. 이럴 경우, 그리스의 신화(mythology)와 기독교의 신학(theology)이 접합되면서 보다 복잡하면서도 이중적인 성격의 프로메테우스 상이 조형된다. 아래의 표를 보라.


             그리스신화(헬레니즘)   기독교 신학(헤브라이즘)
최고신    제우스/주피터                 하나님/그리스도
반항자    프로메테우스                  사탄/악마

그리스 신화(헬레니즘)의 제우스/주피터는 기독교 신학(헤브라이즘)에서 하나님/그리스도에 대응하고7) 프로메테우스는 사탄에 대응하지만 가치론적 위계에 있어서 이들은 결코 동일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비록 <실락원>과 같은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가치전도가 있기는 하지만, 헤브라이즘에서의 하나님(+)과 사탄(-)의 가치론적 위계는 헬레니즘의 그것과 비교할 때, 너무도 확고하며 견고한 것이다. 즉 제우스(+)/프로메테우스(-)로부터 제우스(-)/(프로메테우스(+)로 이행한 헬레니즘에서의 가치전도가 헤브라이즘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듯 상반된 가치론적 형상을 가진 두 존재를 반항자라는 성격에만 초점을 맞추어 동일시하게 되면[프로메테우스(+)=사탄(-)], 거기에 긴장과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컨대, 헬레니즘에서는 반신(半神)적 존재인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했지만(제우스신은 여자인 판도라를 창조), 헤브라이즘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 이때 프로메테우스와 사탄을 동일시하게 되면, 인간을 하나님이 아닌 사탄이 창조한 것이 되며, 이것은 헤브라이즘에서 중대한 신성모독이 된다.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셸리의 경우는 자신을 시(=상상력)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는 창조자로 자임하였을 수 있다. 4막에서 정령들이 이렇게 합창하는 대목처럼 말이다: “우리는 새로운 인간세상에서/ 우리의 계획을 실현시킬 거야./ 그리고 우리의 작품은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라 불릴 거야.”("We will take our plan/ From the new world of man/ And our work shall be called the Promethean."; 156-8행) 여기서 의미 깊은 것은 셸리를 비롯한 낭만주의 시인들이 가졌던 ‘새로운 인간’(혹은 ‘새로운 삶’)에의 비전이다. 이것이 ‘과도함’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주의 시인 자신에게로 향하게 될 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사회정치적 현실이라는 권력투쟁의 장으로부터 한 개인의 내면이라는 축소된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이제 한 개인의 내면의 드라마가 된 것이다.

물론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부터도 이런 내면의 드라마로 읽을 수 있다. 즉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싸움에 인간이 갖는 동물성과 영혼의 갈등, 폭력과 설득력의 갈등, 그리고 힘과 지성의 대립 등이 내포되어 있는 걸로 보면서, 인간에 내재하고 있는 정반대되는 양면,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정신의 세계와 야수적 힘의 세계를 그린 상징극으로 그의 비극을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아주 많이 ‘현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알베르 카뮈는 희랍인들이 아무것도 극단화시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반항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희랍인들은 확실히, 과도함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상, 과도함을 묘사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제자리를 부여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에 하나의 한계를 부여한다.” 이때 ‘과도함’이란 것은 내면의 드라마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면, 그 조건은 18세기 후반 이후 낭만주의에 와서야 비로소 제값의 규모를 가지게 된다고 우리는 본다.

요컨대,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에서 문제되는 것은 첫째, 그가 프로메테우스를 사탄과 동일시함으로써 또 한번의 가치전도를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가져왔다는 것이고, 둘째,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싸움을 한 개인(=시인)의 내적 드라마로 변모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이 내적 드라마는 ‘정치 우화’적 성격을 겸하고 있다. 즉 프랑스 혁명에 대한 시인의 태도와 정치적 희원이 적극적으로 시화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주피터를 전복시킨 데모고르곤이 새로운 세계의 구성원칙, 제시하는 “부드러움, 미덕, 지혜와 인내”(4막 562행)는 ‘힘’과 ‘폭력’에 기반한 제우스의 구시대적 지배원칙과 대비되는 정치적 이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인간에의 희원과 맞물린다.


 

 

 

 

거듭 말하자면, 시인은 새로운 세계와 인간을 빚어내는 창조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셸리의 창조자로서의 시인의 형상이 프로메테우스와 사탄을 결합한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문득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는가? 조물주 하나님의 창조가 아닌 프로메테우적 인간(=시인)의 창조라는 것은 분명 헤브라이즘적 전통에서 보자면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고, 요망하기 그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의 불길한 예감을 셸리와 같은 방을 썼던 그의 두 번째 아내 M. 셸리(1797-1851)는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와 거의 같은 시기에 쓴 <프랑켄슈타인>(1818) 속에서 그려보이고 있다(이 책의 초판 서문은 남편 셸리가 썼다).



‘현대판 프로메테우스’(The Modern Prometheus)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최초의 과학소설’의 주된 테마는 한 과학자가 이기적인 동기에서 생명을 불어넣어 만들어낸 괴물에 의해 자기 자신이 파멸당한다는 것이다. 젊고 야심 많은 과학자인 프랑켄슈타인은 인류에게 숭앙받고자 하는 이기적인 집착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를 포기하면서까지 연구에 몰두하여 결국에는 조각난 신체부분들에 전기불꽃을 주입하여 생명체를 만들어내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에 의해 아내마저 희생되고야 만다.

이 프랑켄슈타인 이야기가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끌어오고 있는 것은 한 영웅의 인간 창조와 그로 인한 주변의 평범한 인간들의 피해라는 신화소이다. 어쩌면 작가인 메리 셸리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견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히는 이 작품은 그녀의 아버지 고드윈이나 남편 셸리가 추구했던 당시의 급진적 이상주의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흔히 상상을 통한 인간정신의 고양이라든가, 상상을 통하여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소위 낭만주의 신화의 허구성을 그녀는 과감히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념적으로만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고드윈이나 셸리와의 가족관계 속에서 현실의 고통을 경험했던 여성의 관점으로 얻어낸 것이다.”

실제로 10대에 유부남 젊은 시인을 따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며, 남편과의 사이에 네 명의 아이를 두고 그 중 셋을 잃었던 메리 셸리는 천재 시인이었지만 오만한 남편에게서 지식인의 이면을 목격하고 이념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직접 체험했다. 그런 그녀의 <프랑켄슈타인>은 프로메테우스라는 헬레니즘 ‘영웅신화’의 이면을 밝혀내면서(프로메테우스=사탄), 그것의 폐해를 헤브라이즘적인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인간을 창조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생명의 불이 아니라 재앙의 불이 된다.

 

 

 

 

그리고 이 재앙의 불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전세계를 전쟁의 포화 속으로 몰아넣었던 진짜 현대의 ‘프랑켄슈타인’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프로메테우스주의, 즉 그의 나치즘이고 그의 아리안주의이다. 그는 <나의 투쟁>(1925-27)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까지 인간이 이룩한 문화, 즉 예술과 과학과 기술의 성과는 거의 예외없이 아리안족의 창조적 산물이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아리안족이야말로 고등 인류의 창시자이며, 오늘날 우리가 ‘인간’이라는 단어로 이해하는 원형이라는 추론은 지극히 정당하다. 아리안족은 인류의 프로메테우스이다. 그의 빛나는 이마에서 신성한 불꽃이 튀어 온 시대로 두루 퍼져 나갔으며, 침묵하는 비밀로 가득한 밤을 인식으로 환하게 밝히고, 그리하여 인간이 지상의 다른 모든 생물의 지배자로 우뚝 서게 하는 불을 거듭 새롭게 점화시켰다. 따라서 아리안족이 사라지게 된다면, 불과 몇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칠흑 같은 어둠이 지상을 뒤덮을 것이며, 인간의 문명은 소실되고 세계는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그에 의하면 아리안족은 “빛을 가져오는 자”이며 그밖의 무의미한 종족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자이다. 히틀러는 더 나아가 마니교와 그노시스파의 우주 창조설화에 등장하는 거인들의 싸움에서 밝음과 어둠의 이분법을 빌려와, 아리안족이라는 빛의 형상과 루시퍼라는 어둠의 형상을 대립시킨다. 히틀러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한 영웅(=아리안족)의 인간 창조라는 신화소를 가져오지만, 그러한 행위가 치러야 하는 고통스런 대가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의 프로메테우스는 자신보다 더 힘이 센 신들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유해한 박테리아”(=유태인)들과 대적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새로운 인간 창조에 있다: “국가 사회주의를 단지 정치적 운동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는 종교 이상의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는 새로운 인간 창조의 의지이다.”



“순수한 양심”과 “보다 높은 명령”(한나 아렌트)에 따라 인종 청소와 살육을 주저없이 감행한 히틀러와 그의 나치즘(국가 사회주의)에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이런 식으로 악의 형이상학으로 전용/남용되며, ‘프로메테우스=사탄’적 형상의 극한을 보여주게 된다. 프로메테우스 시인 셸리가 자신의 가족과 주변 몇 사람을 고생시킨 데 반해, 프로메테우스 정치가 히틀러는 수백 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결코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프로메테우스는 반(反)영웅, 반(反)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종결되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전체의 이익, 인류의 이익을 표면에 내세울 때, 우리는 언제나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러한 ‘전체(주의)’의 이념이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또 다른 폭력과 재앙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폭력과 재앙은 프로-메테우스(fore-thought)란 이름에 이미 예비되어 있다. 프로메테우스적인 영웅은 모든 미래에 대해서 마치 자신의 손금처럼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만이 예견하고 있는 운명에 따라 미리 앞당겨 판단하고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어떠한 불확실성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대화나 타협은 그에게서 불필요하다. 그런 대화나 타협은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의 가치 배당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몫이 얼마나 떨어질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이것저것 견주어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언제라도 자신의 생각이 모자랄 수 있음을 승인할 때에만, 우리는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며 서로의 이익을 조금씩 양보하는 가운데 제 3의 길을 찾는 것이다.


 

 

 


‘과도함’이 없었던 그리스인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는 아직 그러한 화해의 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에서 화해는 오직 제우스의 몰락 이후에야 가능하다. 이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영웅에 의한 일종의 ‘개벽신화’로 탈바꿈한다(*작년말에 재출간된, 마르크스와 그의 시대에 관한 벽화적 전기소설 <프로메테우스>(들녘, 2005)를 쓴 러시아 작가 갈리나 세레브랴코바가 염두에 둔 것도 이러한 '개벽'일까?).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우리는 바로 히틀러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해서,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두 얼굴의 불이다).

06.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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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스킬로스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6 13:50 
    원고 때문에 자료를 찾다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 오래 전에 적을 글을 발견했다. 이미 글의 몇 부분을 따로 정리해놓으면서도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은 빼놓았었는데 '창고 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PC보다는 이 서재가 검색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 참고가 될 만한 분도 계실 듯해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서두의 요약은 폴 디엘의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현대미학사, 1997)을 참조한 것이며,
 
 
비로그인 2009-02-11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글 뒤늦게 발견하고 담아갑니다.

로쟈 2009-02-12 09:31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랜만에 보는 글이네요.^^

42zone 2019-01-1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샘. 구로쪽에서도 강의 좀 개설해주세요.ㅠ
 

레비나스에 관한 글들을 띄우는 김에 러시아어본 레비나스도 잠깐 소개해둔다. 실상은 재작년 5월 모스크바 통신에 띄운 글에 포함돼 있는 내용인데, 당시 서점에서 새로 나온 <레비나스 선집>(2004)을 반가운 마음에 사들였던 추억을 담고 있다. 아래 사진의 왼쪽이 헌책방에서 구한 <레비나스 선집: 전체성과 무한>이고, 오른쪽이 신간이었던 <레비나스 선집: 어려운 자유>이다.

Э. Левинас Эмманюэль Левинас. Избранное.Тотальность и бесконечноеЛевинас Э. Избранное: Трудная свобода (сост. Левит С.Я.; пер. с фр. Вдовиной Г.В., Маньковской Н.Б., Ямпольской А.В.)

지난주(*2004년 5월)에 나온 신간 가운데, 가장 반가웠던 것은 <레비나스 선집>이었다. 역시 <크리스테바 선집>과 같은 ‘세상의 책’ 시리즈로 나온 최신간(이 시리즈에는 그밖에도 불트만, 아롱, 라크루아, 플레스너 등이 들어가 있다)인데, 로스펜출판사에서 내는 이 시리즈는 러시아와 부다페스트(헝가리)의 <열린사회연구소>에서 기획하는 ‘번역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간되고 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돈줄은 소로스 펀드이다.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펀드 매니저인 소로스는 헝가리 태생이고, (‘열린사회’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칼 포퍼의 제자로도 유명하다. 요컨대, 그는 ‘열린사회’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가끔 계란 세례를 받기도 하지만). 그 ‘실천’의 방식이 ‘세상의 책’들을 번역/출간하는 데 있다는 점은 음미해 볼 만하다. 덧붙여, 소로스의 바람대로, 이번 미 대선에서 부시가 (제발) 낙선해서, ‘군사 민주주의’(촘스키) 국가인 미국도 어서 빨리 ‘열린사회’의 대열에 동참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물론 소로스의 기대에 어긋나게도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어쨌든 소로스 펀드의 도움으로 나온 <레비나스 선집>의 제목은 ‘어려운 자유’이고, 전체 752쪽이다(1,500부 발행).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서점 <이데아>의 주인장 말에 따르면(사실 그는 몇 년 전에 뭐가 나온 게 있다고만 했다), 러시아에서 최초로 번역된 레비나스의 책은 2000년에 나온 <전체성과 무한>이다(*나중에 헌책방에서 구했다). 그리고 이번이 두번째인 듯한데, 모두 4권의 책이 한꺼번에 번역돼 나왔다(*<전체성과 무한>에는 5권이 번역돼 있다. 해서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 레비나스'는 모두 아홉 작품이다).

그 4권이란,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이론(Theorie de l’intuition dans la phenonelogie de Husserl)>(1963),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발견하며(En de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1947/67), <어려운 자유(Difficile liberte)>(1963), 그리고, <타인의 휴머니즘(Humanisme de l’autre homme)>(1972)이다(번역서명은 강영안 교수의 표기를 따른다). 이 네 편의 번역 외에도 <글쓰기와 차이>에 실려 있는 데리다의 레비나스론 후반부가 번역돼 있고,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개념풀이가 부록으로 붙어 있다. 전체 번역은 두 사람이 했는데, 그 중 3편을 번역한 I. S. 보비나(Vovina) 여사가 레비나스 전문가로 보인다.

레비나스의 책으로 국내에 번역된 것은 <시간과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 정도일 텐데(소로스의 ‘번역’ 펀드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이런 책들이 한꺼번에 번역되기는 아마도 힘들 것이다), 앞으로 사정이 얼마나 나아질지는 의문이다(*원전 번역에 관해서라면, 아직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앞의 책 4권 가운데, 내가 본 영역본은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이론> 한 권뿐이었는데, 그쪽도 사정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지금은 거의 다 번역돼 있는 듯하다) . 물론 러시아에서의 인문서 번역 현황이 모두 레비나스 수준인 것은 아니다. 대형서점의 ‘철학’ 코너에 가보면, 클래식전집이라고 나온 걸 빼고, 외국철학자, 특히 현대철학자들의 책을 구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너네도 거장이 나오긴 틀렸구나!”라는 게 혼자 생각이었다. 물론, 사유의 거장들이 없더라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므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더 많은 번역서들이 나와야 한다는 당위의 가치는 유보될 수 없다. 적어도, 번역은 소통과 나눔에의 의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이야말로 ‘프로메테우스의 일’이다. 그것이 유익할 뿐만 아니라, 간혹 아름답고 숭고한 것은 그 때문 아닌가?

어쨌든 부피만으로도 ‘숭고한’ <레비나스 선집>의 가격은 240루블이었다(9,600원). 얼마전 국내에서 새로 나온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가 35,000원이던데, 할인가격을 고려하더라도 1/3이 안되는 가격이다. 하지만, 가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번역의 질이다. 내가 러시아아어본의 <그라마톨로지>를 아무런 주저없이 집어든 것처럼, 외국의 한국학 전공자가 우리말 <그라마톨로지>를 집어들 수 있을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해서 (1)더 많이 번역되어야 한다는 원칙에다가 (2)믿을 만하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 유사-프로메테우스들에 대한 주의가 요망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신이여, 이들의 간을 쪼아주소서!).

06. 02. 13.

Эммануэль Левинас Время и другой. Гуманизм другого человекаЭмманюэль Левинас: Путь к Другому

P.S. 러시아어본들에서 레비나스의 생년은 구력에 따라 (1906년이 아니라) 1905년으로 기재돼 있다.(*'러시아어 레비나스'는 몇 권 더 있다. 왼쪽이 <시간과 타자> 등을 묶은 선집이고, 오른쪽은 연구논문들까지 같이 묶은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로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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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2-14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로쟈님의 마지막 말씀 '신이여, 이들의 간을 쪼아주소서!'를 저도 되풀이하고 싶군요.
 

 

 

 

 

주말 자투리 시간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읽었다. 4/5쯤 읽었는데, 번역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다 진지하게 다룰 생각이다. 어쨌거나 저자의 과감하고 열성적인 문제제기가 반가웠고 다루어지고 있는 사안의 새삼스러움에 착잡했다. 번역 문제에 '감'이 없는 교수들이나 관료들께서 많이 읽어주었으면 싶다. 하지만, 젊은 인문학도들이 이 책을 읽는 건 말리고 싶다(우리의 '착잡한' 현실에 도전욕보다는 환멸감을 먼저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문득 번역 문제의 한 파트인 오역의 문제에 대해서 이전에 써둔 게 생각이 나 여기에 옮겨둔다. 재작년 5월에 쓴 것인데, 모스크바에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을 우연한 계기가 읽다가 눈에 띈 오역들을 지적하게 됐고, 거기에 대해서 두 가지 ‘인상적인’ 반응이 있었다. 하나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자의 반응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독자의 반응이었다. 개별적인 사례이지만, 일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듯하여 이 자리에서 '재탕'해둔다. 당시에도 적었지만, 상당히 ‘공격적인’ 비판에 대해서 (반)공개적으로 해명을 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내가 제기했던 의문들에 대해 성의 있는 답변을 주신 역자께 다시금 감사드린다. 

(나의 의문에 대한) 역자의 해명은 (1)(공동번역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대해) 3년간에 걸친 단독번역이라는 것과 (2)(작품명 등의 혼동/혼란에 대해서) 편집과정에서 빚어진 실수들이 포함돼 있다는 것, (3)(그럼에도) 모든 오역에 대한 책임은 역자에게 있다는 것, (4)(희박해 보이긴 하지만) 재판을 낼 경우, 오역들이 수정될 수 있도록 출판사측에 건의하겠다는 것, (5)(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해서도) 계속적인 지적을 바란다는 것 등으로 요약된다(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의 ‘기억’에 따른 것이다).

먼저, (1)에 대해서는 역자의 ‘고투’ 대해서 사의를 표한다. 아마도 눈치 빠르게 이 책의 판권을 입수한 출판사측에서(현재 국내 출판계에서 지젝은 그 ‘난해성’과 무관하게 ‘상종가’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모든 책이 앞으로 번역/소개될 수 있다!) <삐딱하게 보기>의 역자를 번역의 적임자로 낙점했던 듯싶다. 소위 지젝 전문가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그건 자연스런 선택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게 2001년 하반기에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내가 가졌던 생각이기도 하다(그건 ‘번역이 그다지 나쁘진 않겠구나.’라는 안도감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젝의 책으로선 비교적 쉽다는 ‘영화책’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일 뿐이고(해서 어떤 경우에도 지젝의 책이 촘스키의 책처럼 팔리거나 읽히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라크’에 대한 책이라 하더라도), 거의 ‘고공비행’ 수준의 이론적 담론을 제대로 포착해서 격추하기란, 즉 제대로 소화해서 번역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사실 지젝을 읽는 즐거움은 그러한 난해한 이론/담론들의 ‘액츄얼리티’를 맛볼 수 있다는 데 있지만. 하여간에 비록 오역들을 지적하긴 했어도, 그런 이유 때문에 나라도 이 번역에 선뜻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부르디외 전공자의 부르디외 번역이 상식 이하라거나(그래도 부르디외 연구서를 낸다!) 크리스테바 전문가의 크리스테바 번역이 기대 이하라는 것이 우리의 번역 현실이다(그래도 크리스테바 연구서를 낸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대충 ‘존경’받을 교수들이 굳이 번역이란 ‘고투’에 나선 데 대해서 비난만 할 수는 없다(물론 이런 경우 못 믿을 건 번역서들보다도 그 ‘놀라운’ 연구서들이지만).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전공자’나 ‘전문가’란 타이틀의 ‘허명’에 대한 부수적인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굳이 그러한 오역들에 대해서 ‘인내’하지 못하고, 속된/헛된 ‘분별’에 나서는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저작권 보호법이 걸려 있기에, 한번 출간된 인문 번역서가 재번역/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상당히 무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번 오물을 뒤집어쓰게 되면 다시 손써볼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이건 역자들로서도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저작권이 적용되지 않는 고전의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나이브하게 말해서, 엉터리 번역서들이 난무해도 된다(나는 이 책들의 오역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거기에 들인 사회적 비용이 아깝긴 하지만, 다시 제대로 번역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문 ‘이론서’들이 그런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지젝의 <향락의 전이> 국역본은 정말 그런 희박한 가능성을 붙잡았지만(그런 사례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도 들 수 있다) 내차버린 경우이다(역자도 번역만 하지 않는다면 정신분석 ‘전문가’로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둘째는 인문학 자체/전체를 희화화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기본은 말(로고스)에 대한 사랑(필로스)이며 존중이다. 그 유구한 언어적 전승 속에서 거장들의 내면적 고뇌와 사유의 높이가 언어에 의해, 혹은 언어 자체로서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하지만, 오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이’는커녕, 짜증(‘고뇌’ 대신에)과 장벽(‘높이’ 대신에)만을 경험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말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언어뿐만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사랑과 존중도.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따금 이런 염치없는 오역서들을 통해서 젊은 대학생들이 ‘인문학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경우 그들은 인문학을 포기하거나(“그 책 너무 어렵던데요. 제가 머리가 나쁜가봐요.”) 무시하게 된다(“인문학? 맨날 괜히 밥 먹고 알지도 못할 소리나 해대는 거 아닌가요?”). 서로 짝패인 이 포기/무시가 이들의 탓인가? 인문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런 반응들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고 화가 난다. 그리고 전의를 다지게 된다.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말로는 인문학을 한다는 인문학의 배덕자들에게…

다시 <히치콕>의 경우. 내가 앞에서 얘기한 것은 오역의 일반론이지 이 책이 오물의 범벅이라고 얘기하는 건 결코 아니다. 역자의 해명 이전에도 나는 이 책이 ‘읽을 만한’ 책의 범주에는 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다른 책들에 비해서 특별히 오역이 많은 것은 아니란 점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른 번역본(‘러시아어본’이나 ‘영어본’)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어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분류하자면, 그런 도움 없이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고, 그런 도움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 ‘읽을 만한’ 번역이며, 차라리 안 읽는 게 더 이해에, 그리고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번역이 ‘나쁜 번역’이다. 물론 나쁜 번역의 경우에도 반면교사로서, 오역의 교보재로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든, 아무리 ‘적임자’에다가 ‘경험자’라 하더라도 ‘영화학’을 전공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젝의 ‘영화책’을 누워서 떡 먹기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철학 전공자, 심지어 정신분석 전공자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작년 내한 강연 때의 번역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그 번역문들이 올 가을쯤에 어떤 모양새로 출간될지 나는 (벼르면서) 기다리고 있다(복사된 유인물에서의 오역과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오역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물론 곧 쏟아져 나올 ‘지젝들’에 대해서도 나는 기대와 우려를 함께 가지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요컨대, 지젝의 책을 번역하면서 일부 오역을 한다는 것은 역자 개인의 ‘역량’에서만 비롯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건, 현단계 우리 인문학 수준, 조금 좁혀서 인문서 번역 수준의 문제이고(지젝을 번역할 만한 지적 토양과 ‘언어’가 아직 우리에겐 잘 준비돼 있지 않다), 우리 출판계의 총체적인 번역 여건과 (출판)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우리 인문학계와 출판계는 좋은 번역을 위해서 얼마나 투자하고 있을까? 번역에 대한 학계의 무관심은 이미 ‘관행’이 되어 있으므로 길게 늘어놓을 것도 없고(북매거진 <텍스트>의 지적을 옮기자면, “(우리 학계는) 다른 지식인의 논문이나 외국 문헌을 베끼는 ‘표절’은 예사이고, 응당 책임져야 할 ‘번역’도 나 몰라라 하면서 숨겨둔 무공비급인양 ‘원전’을 활용한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 힘써야 할 학회는 조폭처럼 치열하게 지역(나와바리)을 관리하고 소속원을 비판하면 떼거리로 몰려가 비판자를 공격한다. 그러다보니 자기 지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에 대해 침묵하는 ‘기묘한 공존’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더 안타까운 점은 이런 부패가 소위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번역자들을 ‘등쳐먹고’ 사는 출판계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을까?

<히치콕> 번역을 예로 들어보자면, 이 책이 재판을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3,000부를 찍었다고 할 때, 역자의 몫으로 돌아가는 번역 인세(대박이 안 날 만한 책들은 다 인세이다)는 17,800원(도서정가)*0.07%(인세)*3,000(부수)=3,738,000원이다. 물론 이건 내 추측이고, 실제와는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실제로는 훨씬 적은 액수의 번역료를 받았다고 한다), 개정판이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역자의 예상을 고려하면, 그 차이는 크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까, 대략 400만원 이하의 번역료를 보수로 받는 셈이다. 그러니까, 한 달 정도에 이 책의 번역을 해치울 수만 있다면, 그럭저럭 ‘수지’를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견적은 최소한 하루에 10시간씩 두 달 꼬박이다. 그것도 영화학과 근대철학,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예비학습’이 얼마간 되어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리고 물론 번역 중에라도 구할 수 있는 히치콕의 영화들은 다 구해서 보는 편이 오히려 시간을 절약하도록 해줄 것이다(물론 이 비용은 역자 부담이다). 그렇게, 두 달 동안을 이 책에 전념할 때 받을 수 있는 보수가 한 달에 200만원이 안된다(대개의 인문서 번역 형편이 그렇다). 당신이라면 이 ‘자원봉사’ 수준의 번역을 하겠는가?

 

 

 



따라서, 3년에 걸쳐 <히치콕>의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역자의 고백을 그의 게으름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역자후기에 따르면, 이 번역은 “아내와 엄마로서, 선생이자 학생으로서 거의 분열적으로 살아가는 옮긴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남편과 아빠로서, 선생이자 연구생으로서의 분열적인 삶을 정상인양 살아온” 나는 5년 전에 맡은 번역도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으므로 ‘게으름’으로만 치자면 내가 한 수 더 위이지만, 거듭 말해서, 그건 ‘게으름’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건’의 문제이다. 아주 실제적으로 말해서, <히치콕> 같은 경우 적어도 6개월간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보장될 경우에나 번역에 전념할 수 있고,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있다(*물론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번역지원 사업을 벌이고는 있지만, 박상익 교수의 지적대로 1년간 지원총액이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 정도에 머문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하긴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는 대표적인 우리말 오역서의 하나이다!).

가령,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박사연구자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공모하는바, 채택될 경우 매월 200만원씩 1년간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지원에 대한 의무는 등재학술지에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인문학계에서 제대로 된 <히치콕> 번역(400쪽)보다 더 많은 피와 땀을 요구하는 ‘논문’(30쪽)이 년간 과연 몇 편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그러니 (논문을 쓰는 대신에) 누가 (바보같이!) 번역을 하는가? 번역이나 하고 있는가? 이러한 여건 때문에 ‘악순환’이 생기는바, 번역에 대한 사회적 (상징계의!) 무관심과 ‘부적절한’ 보수 때문에 번역의 질이 떨어지고, 번역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며(책을 사보질 않는다), 신뢰가 없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냉대가 정당화되는 것이다(그래서 책을 많이 찍지 않는다). 그러니, 다시 번역자에게 제대로 돌아갈 몫이 없는 것이고. 해서 또 ‘저렴한’ 보수에 맞춘 때우기식 번역이 양산될 수밖에…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에서 끊어야 하나?

내 생각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여건이 좋아지길 기다리는 것이다(여건이 문제라고 했으니까). 기다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번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고(아예 번역학과가 생기고, 번역가가 최고 유망직종이 되는 등) 번역자에 대한 대우가 달라질지(그래서 번역자들이 다 외제차를 타고 다닐지) 누가 알겠는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아마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질 만한 일이다. 어쨌거나 ‘그런 무관심을 딛고’ 여전히 고도(Godot)를 기다려 볼 수는 있으리라.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번역자들이 알아서(아쉬운 사람이 우물 파듯이) ‘어려운 여건을 딛고’ 번역의 질을 좀 높이는 것이다(이런 걸 ‘살신성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경이로운’ 번역서들을 턱턱 내놓음으로써, 독자의 발길을 되돌림과 동시에 번역을 무시하던 이들의 코를 좀 납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전에 번역자 조합을 만든다는 전제하에서) ‘번역자 조합’의 조합원 결의를 통해서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는 것이다(나 또한 번역을 했고, 또 하고 있으므로 그 조합원의 자격을 갖고 있다). 번역자 인권과 제대로 된 보수를 보장받기 위해서. 번역자 시국선언과 양심선언이 뒤따르고, 한 번역자가 한강에 투신하는 등등…

어느 쪽이 더 리얼하고, 덜 리얼한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두 가지가 상호 상승작용하는 것이다. 가령, 번역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얼마나 고투하고 있는지가 TV에 방영되고, 거기에 연이어 사회적 관심이 갑자기 증폭되면서 번역자들을 위한 성금(지원금)이 물밀듯이 기탁되고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기폭제가 번역자들의 ‘고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현단계 부실 번역의 책임을 사회적 여건의 탓으로 돌리면서도 번역자들의 책임 또한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동료 번역자들의 노고에 경의와 동정을 표하면서도, 우리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달리는 말끼리 서로 더 채찍질을 하는 것은 더 잘 달려보자는 뜻이지, 가긴 어딜 가냐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2)에 대해서. <히치콕>의 경우에 동일한 영화명이 다르게 번역된다든가 하는 실수는 역자의 실수였다 하더라도 편집/교정 과정에서 다 체크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편집/교정자가 눈대중으로 책을 읽는 사람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도 ‘여건’의 탓이 크다. 편집/교정자들이 극빈층의 보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니까(그들의 ‘직업적’ 매저키스트 성향은 사회심리학적 분석대상이다). 그러니까, 그들로서는 두 눈 부릅뜨고 책을 볼 만한 여건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편집/교정자들에게도 다른 방도는 없어 보인다. 눈 빠지게 일하면서 빨리 그들만의 조합을 만드는 수밖에.

 

 

 



가령, <히치콕>의 46쪽에서 <히치콕의 스트레인저>로 출시돼 있다는 은 전부 <스트레인저>로 옮겨지고 있는 다른 대목들과는 달리 <열차 속의 이방인>으로 번역돼 있다(사실 이게 더 맘에 들지만). 이런 사례들 때문에, 나는 복수의 역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그건 알고보니 ‘분열적인’ 역자 한 명의 ‘오점’ 혹은 ‘얼룩’이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역자가 이런 영화명을 비롯한 고유명사들을 번역과정에서는 그냥 원어로 놔두었었는데, 나중에 (자료조사 등을 한 다음) 알아서 처리해야 할 편집진에서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않은 것. 그리고 다른 가능성은, 역자가 불우한 여건 속에서 정신없이 번역하느라 이렇게 저렇게 옮긴 것을 편집진에서 제대로 체크하지 못한 것.

사실, 이런 사례는 굉장히 사소한 것이지만(잘된 번역에서라면, ‘즐거운’ 옥에 티에 불과하다), 번역이 꼬이게 되면 그에 대한 신뢰를 무섭게 잠식해가는 계기가 된다. ‘의혹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이다(요컨대 역자나 교정자가 독자만큼도 책을 세심하게 읽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에). 물론, 편집/교정자들이 박봉에 ‘고투’하고 있다는 건 이미 언급한 대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실수’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이건 책임 이전에 ‘자존심’의 문제이다.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책, 완벽하다고 내가 자신할 수 없는 책을 내지 않겠다는 것. 그게 ‘자존심’이다. 물론 이런 자존심을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것이 출판사의 사장과 편집장 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3), (4)에 대해서는 특별히 덧붙일 말이 없다. 안면도 없는 역자를 난데없이 난처하게 만들었으니까 한편으론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바라건대, 개정판을 찍었으면 하지만(그러자면 역설적이게도 많이 읽혀야 한다!), 많이 팔린다는 ‘지젝’이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결자해지,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한 ‘독해’는 계속될 것이다(*실제로 계속됐었다). 다만, 다른 사정들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 마무리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이 (5)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물론 한두 장씩 읽으면서, 영화를 보지 않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인지 실감하고 있지만…



그리고 두번째로, 한 독자의 반응. 그것은 (1)(오역에 대한 지적들을) 관심 있게 읽고 있다는 것, (2) (하지만 번역을 기피하는 풍조 속에서) 자칫 ‘인신공격’적일 수도 있는 지나친 비판은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박상익 교수도 이런 문제는 조용히/넌지시 처리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충고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짤막하게 나의 의견을 밝혔지만, 보다 상세한 의견 개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번역/오역을 ‘응시’하는 나의 자리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1) 같은 번역자, 즉 동업자로서의 자리와 (2) 일반 독자로서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자리들에 따라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공식적인’ 명분에도 불구하고, 번역/오역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달라진다. 내가 분열적인가? 언젠가 밝혔지만, 나는 (별로 안 팔린 책이지만) 번역서를 낸 바 있고(러시아 소설이다), 또 현재 번역중인 책이 있으며(러시아 소설이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여건도 좋아져야겠지만!) 얼마든지 다른 종류의 인문서 번역에도 참여할 예정이다(서너 권 정도 검토중에 있다). 또 이전에 번역 스터디에도 여러 번 참여한바 있으며(가다머와 리쾨르, 에코, 굿맨 등의 번역이었는데, 완역/출간되지는 않았다), 교정이나 잡스런 번역에도 적잖게 동원되었었다(바흐친, 로트만 등). 요컨대, 나는 이 분야의 문외한이 아니다. 해서, “(그렇게 잘났으면) 옆에서 비판만 하지 말고, 직접 나서보지 그러느냐”는 식의 간혹 ‘뒤로 듣는’ 비아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나는 뒷짐지고 옆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에크리>(라캉)와 <피네간의 경야>(조이스), <구조적 안정성과 형태발생>(르네 톰) 등의 ‘숭고한’ 책들을 번역하는 일만 아니라면(그건 나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다, 마치 박상륭의 <칠조어론>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처럼. 대신에 ‘교정’해 볼 생각은 있다. 그럴 만한 능력은 있다고 생각하므로), 여건이 허락하는 한, 나는 어떤 번역에도 도전해볼 의사를 갖고 있다(번역이란 언어를 통한 존재의 전이라는 ‘사건’이다. 그러한 ‘전이’에, ‘사건’에 어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이러한 ‘번역자’의 입장에서라면, 가급적 ‘동료’의 ‘실수’ 등에 대해서는 눈감아주는 것이 ‘의리’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유리하다. 동료 의사의 실수를 의사들이 눈감아주고, 동료 변호사의 비리를 변호사들이 눈감아주는 것처럼.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리고,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니까. 그만한 일로 낯을 붉히는 건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으니까. 나도 ‘한국인’으로서 그 정도의 ‘상식’은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게 ‘번역자’가 아닌 ‘독자’의 자리로 오게 되면, 전혀 문제의 양상이 달라진다. 번역자는 같은 업종의 ‘공급자’로서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지만(간혹 불일치할 수도 있다), ‘독자’로서의 나는 ‘소비자’로서 ‘공급자’인 번역자와는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물론 일치한다면 더 좋겠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 주고 받는 관계이다. 독자로서 내가 읽는 책은, 누구한테 기증 받은 책이 아니라, 내 돈 주고 산 책이다(이 책에 대한 과도한 지출 때문에 나는 더러 수모도 당한다!). 그리고 그 돈은 어디 가서 주워온 돈이 아니다(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을 보라)!

때문에, 내 돈 주고 산 책이 엉터리라거나 불성실하다면 그건 관용의 윤리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다!). 그건 ‘공급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종의 ‘사기’니까. 내가 지젝을 샀는데(나는 지젝을 좋아한다!), 뜯어 읽어보니까 지젝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무슨 ‘수작’이 들어 있다면(그래서 ‘지젝’을 망쳐놓았다면) 관대한 당신은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라며 넘어가는가? 당신이 비싼 돈을 주고 이브닝 드레스를 샀는데, 알고 보니까 남대문 시장에서도 파는 ‘짜가’였다면, 그런데 반품도 안된다면, 그래도 당신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냥 넘어가는가? 있는 건 돈밖에 없으므로? 그냥 모르고 입고 다니는데, 그걸 굳이 ‘짜가’라고 옆에서 찔러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런 ‘못된 친구’와는 차라리 절교할지언정 그걸 만들어 판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 모르고 산 내가 잘못이지, 라고 생각하는가?

해서 사정은 복잡한 듯하면서도 아주 단순하다. 물론 번역서의 경우, 최종적인 책임은 번역자(피고용인)가 아닌 출판업자(고용주)에게 있다. 하지만, 역자 후기 등에 ‘사장님’에 대한 감사가 곧잘 언급되더라도, 책의 표지에는 저자와 함께 역자의 이름이 박힌다. 그건, 적어도 책의 만듦새는 출판사에서 책임지지만, 내용만큼은 역자가 책임을 감수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공급자(번역자)-소비자(독자) 간에는 일종의 거래가 성립되는 것이고, 이 거래에는 아주 기본적인 윤리가 개입한다. 제값을 치르고, 제값의 내용(읽을 거리)을 공급받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서로에게 제값이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면, 이건 상대방에 대한 ‘기만’이자 ‘모욕’이다(당신은 그냥 대충 이 정도 수준에서 읽고 떨어져라? 나도 어려운 책이니까 그냥 구경이나 하고 말지 그래?). 오역에 대한 나의 지적/비판은 그런 기만/모욕에 대한 대응이고, 응전이다.

오역에 대한 그간의 지적이 지나치게 신랄해서 간혹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 독자의 반응 때문에 하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의 발단이 ‘공격을 위한 공격’이 아니라 ‘방어적인 차원’의 공격이라는 점이며(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또 그런 부실한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다니, 당신 바보 아니냐?”는 식의 어조는 내가 받은 ‘모욕’(이렇게 번역해도 바보들이 뭘 알겠어?)과 금전적 손실(수입만을 따지자면, 나는 빈곤층에 속하는 시간강사이다. 소위 '화이트 프롤레타리아'이다)에 대한 대응으로서는 그래도 소심한 편에 속한다는 점이다(이 생각을 하면 다시금 분노가 솟구친다. <킬 빌>을 다시 봐야겠다!). 고작 카페 한두 곳과 인터넷 서점 한 곳에 ‘의견’을 올리는 게 내가 하는 일의 전부 아닌가?

그로 인한 역효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역효과는 ‘인신공격’을 받은 번역자들이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성적으로 ‘현역’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즉 부실 번역들을 계속 양산해내는 것이다(게으른 자들에게 축복을!).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나의 지적/비판의 정당성을 더 확증해 줄 것이기 때문에(“욕먹을 만하군!”) 그들의 전략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거 같지 않다. 그러니 내가 그 역효과에 대해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하다. 물론 잘못된 역자를 만난 몇 권의 책들이 더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자존심을 회복해서 더 좋은 번역서로 ‘컴백’한다면, 그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며 이건 ‘역효과’가 아니라 ‘효과’이다.

나는 단지 (애서가로서!)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책’에 대해서 근심할 따름이며, 그에 대해서만 말할 따름이다. 내가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이유도 없이 욕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모든 오역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함께 제대로 된 번역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혔다(그리고 그에 대한 반박 중 수용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수용하기도 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번역자도 실수를 한다. 그런데, 그건 번역자 자신이 가장 잘 알아야 정상이다(독자의 입장에 서서 한번만 읽어보면 알 수 있으니까). 번역자 자신이 그 책을 가장 깊이 있게 읽기 때문이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충 둘러대고, 틀어막고, 얼버무리고, 살짝 빼고 한 내용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번역자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른다면, 번역자로서는 수준 이하이고, 자격 미달이다(이런 번역자들에겐 ‘인신공격’도 부족하다).

거꾸로, 어느 정도의 수준과 자격을 갖춘 번역자에게서라면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성의’이다(‘여건’이란 건 이 ‘성의’를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요컨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긍정문이 부정문으로 바뀐다거나 문맥상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 이어진다거나 고유명사 표기를 헷갈리게 한다거나 우리말 문법에 맞지도 않는 문장을 쓴다거나(통사론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하는 따위들은 대개 고등교육을 받은 번역자들로서는 능히 피해갈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내가 비판하는 것은 그의 무능력이 아니라 고집스런 불성실과 아집, 그리고 부정직이다. 대충 얼버무리고, 황당한 걸 갖다붙이고, 자신이 이해가 안 돼도 넘어가는 태도 말이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그런 노력하지 않는 태도, 거만하고 방만한 태도이다. 독자가 무서운 줄 안다면, 그런 식으로 함부로, 대충 번역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도 이해가 안되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하는 만용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나쁜 번역서’들을 두고 하는 얘기이다). 그게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따라서, 한 독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독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은 부실한 번역서들에 대해서까지 “왜 그렇게 하셨어요? 감히 말씀드리거니와, 저라면 이렇게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번 봐주시겠어요?…”라는 식으로 예의를 갖출 생각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사실, 그런 똘레랑스(불간섭의 관용주의)야말로 지젝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는 태도이다(그가 가장 맘에 들어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파이트클럽>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외상적 실재와, 혹은 적대(나는 상냥하게 말하지 않는다!)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이른바 ‘실재의 윤리학’이다). 오역의 실상과 직접 대면함으로써만, 그런 자극과 충격을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만, ‘나의 번역’은 개선될 수 있다. 창피하다거나, ‘인신공격’이라거나 하는 것은 부차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참에 오역의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확실히 밝혀두고자 해서 이런 글을 쓰게 됐다. 결론은 독자에 대한 번역자의 예의란 것인데, 사실 거기에 덧붙여 ‘책에 대한 예의’ 또한 나로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여기선 더 부연하지 않겠다. 다만, “복사된 유인물에서의 오역과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오역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라는 말에서 그러한 생각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실한 번역의 엉터리 책들은 도색잡지보다도 부도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책은 고급 누드집만큼이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며, 그러해야 한다.



끝으로, 나쁜 번역서들만 판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기 위해서, (드물긴 하지만) 좋은 번역서들에 대한 옹호도 곁들인다. 내가 직접 읽은 한정된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나 <니체-데리다, 데리다-니체>(책세상) 같은 건 좋은 번역서였다(후자는 내가 갖고 있던 영역본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역자들은 모두, ‘관행적으로’ 존경받는 교수들이 아니라 박사과정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들에서도 약간 미심쩍은 곳(동의하지 않는 곳)이나 오타 등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옥에 티에 불과하다. 해서, 나는 이들 번역자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있으며, 그들의 또 다른 번역서들까지도 주목하고 있다. 다른 번역서들에서도 그러한 역자들이 속속 나오기를 기대한다…

06.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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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2-13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역투성이 번역본들이 "짜증"과 "장벽"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종종 '창조적 오역'으로 재생산되는 경우도 있지요..^^ 크리스테바 책을 오역투성이로 번역한 크리스테바전문자의 크리스테바 연구서들도 아마..이런 '창조적 오역'에 의한 결과물일지도 모를 일...^^;;
넘 미워만 해주지는 말자고요..^^
그런데 로쟈님이 번역하신 책을 한번 읽어보고싶은 생각이 드는데 어떤 책인지 좀 알려주세요... 읽어보고 싶네요^^

瑚璉 2006-02-1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생각하는 건데 출판사에서 어떤 책을 출간할 때는 하다못해 단순한 오자 교정이라도 담당할 수 있는 작은 그룹을 운용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참가자에게는 인쇄본 1권 정도 증정.

비로그인 2006-02-13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해결책을 보니깐. 거의 자조적이고 시니컬한 느낌이 팍팍 오는 군요.

 


로쟈 2006-02-13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절판됐습니다. 새로 나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壺裏乾坤님/ 그것도 방안이겠습니다.
스메르쟈꼬프님/ '전의'도 읽으셔야 합니다.

paby 2006-02-16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왜 그렇게 하셨어요? 감히 말씀드리거니와, 저라면 이렇게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번 봐주시겠어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단순히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는 문제가 아니라, 지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문제인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로쟈 2006-02-1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보다는 '과공비례'라는 게 제 소신입니다. 미심쩍은 대목에 대한 '이견'일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자기견해를 밝힐 수도 있지만, (주관적으로) '분명한' 오역에 대해서는 그런 공손한 지적이 제가 보기엔 오히려 역겹습니다. 역자가 '제가 보기에는 이러이러한 뜻인 걸로 사료되옵니다'라고 번역하지 않은 인상...

외로운 발바닥 2006-03-05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지 않은 글이었지만, 후딱 읽어버렸습니다.^^; 로쟈님 덕분에 번역과 오역에 대한 문제점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 글에 압축적으로 번역에 관한 제반 문제가 총 망라되어 있네요. 파이트클럽 사진 밑에서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외상적 실재와, 혹은 적대(나는 상냥하게 말하지 않는다!)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이른바 ‘실재의 윤리학’이다).' 부분 정말 제맘에도 듭니다. 퍼가고 싶은데 언제부터인가 퍼짐이 안되서 부득이하게 복사로 퍼갑니다.

로쟈 2006-03-05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의식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오늘자 한국일보에는 언제나처럼 '객원논설위원' 고종석의 '시인공화국 풍경들'이 실렸는데(이 연재가 47회에 이른 만큼 이젠 책으로 묶어도 좋을 만한 분량이 되었다), 오늘은 김현승(金顯承, 1913~1975) 시인 편으로 세번째 시집 <견고한 고독>(관동출판사, 1968)을 다루고 있다. 김현승 시인의 호는 '다형(茶兄)'이다. 생전에 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이 글은 커피를 마시면서 쓴다).

고종석의 글은 "김현승의 시세계는 예술과 철학의 경계에 걸터앉아 있다. 한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철학적이라 규정하거나 한 철학자의 정신세계를 예술적이라 판정하는 것이 반드시 상찬일 수는 없다. 이성의 규칙과 감각의 규칙은 자주 맞버티기 마련이어서, 그 둘을 한꺼번에 끌어안으려는 시도는 얼치기 예술이나 반편이 철학을 낳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미의 끝머리와 치지(致知)의 첫머리를 이어 거룩한 매듭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류사의 높다란 정신들이 늘 지향해온 이상이었다. 김현승은 그런 매듭 하나를 지었다."라는 문단으로 시작해서, "김현승이 목월보다 세 살 손위고 미당보다도 두 살 손위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시를 읽을 때, 독자들은 이 시인의, 특히 그 후기 작업의 첨예한 현대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김현승을 딱히 주지주의자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는 우리 시단에 드문, 진정 지적인 시인이었다."란 문단으로 마무리된다.

 

 

 

 

내가 새삼 놀란 건 다형이 미당보다 두 살 위라는 사실. 깊이 따져본 적은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같은 연배나 후배 시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경건한 고독의 세계'는 언제나 '토속적 탐미주의의 세계'보다 나중에, 혹은 그런 세계를 거쳐서 도달하게 되는 어떤 경지가 아닐까란 선입견 때문인 듯하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 만난 그의 시 '가을의 기도'의 마지막 대목에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라고 시인이 '기도'할 때, '마른 나뭇가지'가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보다 나중에, 말하자면 '뜨거운 피'의 세계 이후에 나오는 것처럼. 

해서 등단도 다형이 1934년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 데뷔하였으므로 193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서 등단한 미당보다 2년 앞서지만, 어쩐지 더 '나중'이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어떤 사건이 스토리상으론 먼저 나오지만, 플롯상으로 나중에 배치되어야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여하튼 그는 두 사람보다 연배가 좀 위이면서 미당과는 '생명파'로 같이 묶여서 불리던 청마 유치환(1908-1967)과 더불어 한국 현대시 정신사의 삼각형을 만든다면 그 한 꼭지점을 이룬다('바위'와 '구렁이'와 '까마귀').    

작년 11월에 시인의 서거 30주년을 맞이하여 <김현승 시전집>(민음사, 2005)이 출간되었지만, 이 고독한 '기독교 시인'은 시단과 평단의 주류적인 관심사 밖에 있었다(기억에 <김우창전집 3: 시인의 보석>의 표제가 김현승론에서 따온 것이다). 그것은 그가 미당이나 대여(김춘수)와는 달리 시의 '언어'보다는 시의 '이념'에 더 주안점을 두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기독교적인 성향의 시인들을 내켜하지 않은 터라 나도 지난 80년대 중반에 구할 수 있었던 김현승의 전집(시인사)을 제쳐두고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문학과비평사, 1989) 같은 시선집을 통해서 김현승과 대면했었다(아마도 군복무 시절이어쓴데, 그때 몇 자 적은 독후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는 곧 덮어두었다(시인의 '고독'에 동참하기에는 아직 젊었을 때니까).

이어서 언젠가 교육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였던 것 같은데, 김현승의 시세계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았고, 전남 광주 출신이었던 시인의 시비가 무등산에 세워져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동향의 후배 시인 황지우가 시비에 새겨진 시 '눈물'을 낭송하기도 했다(중학교 교과서엔가도 실려 있던 시. 박완서의 소설에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있다).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져......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아름답고 눈물겨운 시이지만, '시'로서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건 '연(鉛)' 같은 시인데, '납 연'자이므로 그냥 '납'이라고 불러도 좋겠다(실제로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오래전에,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엮은 세계시선집 1권(한국현대시)으로 나온 <나는 내가 무겁다>(정우사, 1994)에 표제를 빌려준 시가 바로 '납'이었다. 그때 만난 이 시가 내게는 김현승의 대표작이다.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

맑고 고요한 내 눈물을
밤이슬처럼 맺혀보아도,
눈물은 나를 떼어낸 조그만 납덩이가 되고 만다.

가장 맑고 아름다운
나의 시를 써보지만,
울리지 않는다. - 금과 은과 같이는

나를 만지는 네 손도 무거울 것이다.
나를 때리는 네 주먹도
시원치는 않을 것이다.
나의 음성
나의 눈빛

내 기침소리마저도
나를 무겁게 한다.

내 속에는 아마도
납덩이가 들어 있나부다,
나는 납을 삼켰나부다,
나는 내 영혼인 줄 알고 그만 납을
삼켜버렸나부다.

요즘은 중국산 꽃게, 대구, 복어, 병어 등에서 '친근하게' 발견되는 것이 납이지만, 시인에게 납은 '금'과 '은' 같이 되지 않는 시와 삶의 은유이다(나는 영혼에 대한 시들보다는 이 납에 대한 시들을 더 좋아한다). 하긴 예전보다 무거워진 나의 몸속에도 납덩어리가 몇 개쯤 들어앉아 있는지도 모를 일인바,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라는 시인의 하소연이 남의 것일 수만은 없다. 사실 보다 일반론적으로 해서,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를 들어올릴 수 없는 만큼,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라는 진술은 보편적 명제에 값한다. 그러니 시인의 고독은 딴은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견고한 고독'에서 '절대 고독'에 이르는 김현승의 시적 여정에 새삼 눈길을 주어볼 만한 이유이다. 


06. 0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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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1-27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신문을 항상 하루 늦게 보게 됩니다) 고종석씨 글을 읽고 김현승 시인 나이에 깜짝 놀랐는데, 여기서 또 로쟈님의 글을 읽게 되니 반갑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로쟈 2006-01-2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생각을 하셨다니 반갑습니다.^^
 

이 글의 이전 제목은 '<나쁜 피>의 한 장면에 대한 생각'으로 1997년 성탄절에 쓴 것인데, 내 딴에는 '생명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미래의 글을 예비하는 차원에서 적어둔 것이었다. 지난 황우석 사태를 통해서 알려진바, 영화 <아일랜드>(2005)에서와 같은 본격적인 생명복제시대는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다. 그러니 본격적인 글을 쓰는 데 아직은 '여유'가 있는 셈이다. 당분간은 20년전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입막음 해야겠다. 대신에 이미지 버전으로 업데이트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

1.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알렉스가 안나에게 묻는다. 안나는 등을 돌린 채 세차게 머리를 가로젓는다. 레오(스) 카락스의 사랑의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 <나쁜 피>(1986) 한 장면이다(*<소년, 소녀를 만나다>, <퐁네프의 연인들>이 나머지 두 작품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이 문답의 바로 이전 장면, 즉 문밖에서 담배를 물고 서성이던 알렉스가 라디오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나오자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다. 처음엔 비틀거리며 걷다가 몇 개의 블록을 마치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질주하던 그는, 음악이 멈추자 그대로 정지하고 다시 안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묻는다. "안나,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2. (한)순간에 완성되(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그것은 반시간적 사랑이 아닐까? 순간이나 영원이란 것은 시간적인 계기이지만 동시에 반시간적 계기이다. 그것이 반시간적인 것은 시간의 고유한 운동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순간은 영원의 무한수축이고 영원은 순간의 무한팽창이지만 이 수축/팽창의 운동은 자연적 시간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때의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동형론적 형질전환이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이렇듯 반시간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감성적 사랑이라는 개념적-정념적 테두리 안에서 다 파악될 수 없다. 즉 그것은 감성적 사랑을 초과한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라는 이 초감성적 사랑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을 정념의 형이상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념의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의 이념이 그러하듯이 현실이 아닌 오직 가상(이미지) 속에서만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3. 감성적 사랑, 즉 미적 가상이 아닌 현실 속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진화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만족할 만한(agreeable) 상태, 즉 행복을 위한 것이다. 행복이란 "정상적으로 생겨 먹은 생물체의 경우 ①자기보존의 본능과 ②종족보존의 본능, 이 두 가지의 충족을 의미한다. 본능 ①의 충족은 개인적인 생존을 뜻하므로 음식과 주거의 문제이다. ②의 충족은 종(족)의 유지와 번영을 뜻하므로 성적 욕구의 문제이다." 여기서 대개의 경우 자기보존의 본능(생존의 욕구)이 종족보존의 본능(생식의 욕구)보다 먼저 고려된다. 즉 생식의 욕구라는 생물학적 기제의 정신적(정서적) 대응(수반)으로서의 감성적 사랑은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는 사랑이다(사랑을 팔고 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초감성적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사랑이겠다(사랑에 죽고 못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한)순간에 자신이 완성되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도망간다(혹은 죽고 만다). 하지만 사랑을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다(귀신이 되어 되돌아온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나쁜 피, 우리의 생-본능을 관장하는 '나쁜 피' 때문이 아닐까?

 

4. 애초에 사랑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이어서이다. 즉 육체(나쁜 피)는 사랑의 가능조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육체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초감성적 사랑의 불가능조건이 된다. 이 육체는 우리를 정념의 공간 속으로 내던져 놓고는 뭔가 이루어질 만하면 다시 잡아당기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어디론가 무한질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곧 걸음을 되돌려야만 한다. 그래서 이 질주에 대해 "끝없이 몸부림치지만 나아갈 수 없는 삶의 불가해성과 무력함 그리고 이것 자체에 대한 분노 등"을 나타낸다고 한 것은 옳은 지적이다. 다만 여기서 '나아갈 수 없는 삶'이란 걸 나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 바꿔 읽고 싶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감성적 사랑, 아름다운 사랑의 끝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숭고하다(죽음을 무릅쓰는 사랑!). 이 숭고한 사랑은 (감성적) 사랑의 이해관계(목적)에 구속받지 않으며 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숭고한 사랑의 맹목적인 운동 앞에서 망연자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간혹 우리가 그러한 사랑에 걸려들기 때문에!). 알렉스의 물음에 대해 안나가 세차게 머리를 젓는 것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렇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두려운 사랑이다. 그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의 생-본능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 <나쁜 피>의 한 장면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그런 두려움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그것은 두렵다(불쾌하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의 생-본능이라는 인간조건을 일시적으로나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우리를 (한)순간 개방한다(우리의 죽음이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우리를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롭게 한다(머리가 잘린 통닭모양).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아니다, 그건 더 이상 사랑도 예술도 아닌 어떤 것이다. 하여간에 무엇인가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5. 프로이트의 이분법을 사용하자면, 아름다움은 생-본능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함)은 죽음-본능과 연관되어 있다. 생-본능은 사는 것, 잘사는 것, 보다 더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이성의 기능이란 것은 이러한 생-본능을 바람직하게 보좌하는 것이다(화이트헤드). 이에 대하여 죽음-본능은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본능에서 발원하지만 곧 그것을 초과하고 만다(그래서 이성-이념의 한계를 표시한다).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이란 결코 삶의 안쪽에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끊임없이 무에 유혹되고 죽음에 도취된다. 마치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처럼(에로티즘 또한 생식의 욕구에서 발원하지만 그것을 초과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불가해하듯이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우리에게 불가해하다. 이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타자이다. 우리의 이성, 즉 개념적 사태 이해는 이들 안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의 뒤치다꺼리에나 바쁠 따름이다. 간혹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우리를 유혹하는가? 그럼 어쩔 텐가? 우리는 안나와 마찬가지로 세차게 머리를 내저으며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이 또 다른 '나쁜 피'로부터 도망가는 수밖에. 그러다 발병이 나고 덜미를 붙잡히는 수밖에!

6. 칸트가 주장하는 취미(아름다움) 판단의 무관심성(무사심성)은 숭고에 대해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을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안나의 부정과 나란히 놓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대상에 대해 평정한 태도,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안락의자에 주저앉는 일로 충분히 가능할 수 있겠지만,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 가령 어떤 예술작품 속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어딘가 불편하지 않을까? 만약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이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라면 숭고에 대한 무관심은 필사적인 관심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알렉스의 질주를 떠올려 보자. 우리의 생-본능은 숭고(죽음)로부터,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주(질주)할 때에만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것. 그런 필사적인 도주를 우리는 '무관심'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 만큼이나 숭고에 대한 무관심 또한 아이러니적이다. 너무 말이 없어서 '떠벌이'란 별명이 붙은 알렉스처럼.

 

 

 

 

7. "현대의 영화가 보여주는 이 모든 특징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련성은 바로 사유의 무능력에 직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케 하고 무의 형상을 사유하게 하며 사유될 수 있는 전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사유하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운동의 교란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세계를 일정하게 유보시키는 것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유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철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들뢰즈) 이러한 주장은 비단 현대 영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리라.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대해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우리는 정당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능력을 절감하게 한다. 이것은 마치 데리다가 반 고호의 그림에서 구두끈이 반쯤 풀려/조여 있는 걸 두고 이중의 구속(double bind)을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우리의 잘난 예술은 우리를 (껴)안아주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놓아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담배나 (꼬나)물고 그것의 주변만을 서성거릴 뿐이다, 문밖에서. 그러다가 문득 자각한다, 우리 자신의 숭고함을!

 

 

 

 

8. 자신의 사랑에 대해 중언부언하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이지만,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겠다. 사실, 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물음, 즉 정념론적 과제는 나에게 있어서 칸트 이후에 제기된 인식론적 과제와 결코 다르게 읽히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순수이성비판>)라고 말할 때, 이성에 의해 제기되지만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는 물음들이란 바로 숭고한 물음들이며, 예술적인 물음들이다(가령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든가, "우주는 팽창하는데 왜 우리는 팽창하지 않는가?"라는 식의 물음들).

데리다식으로 말해서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조여 있는 이 물음들을 이성의 잉여효과, 혹은 과민반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미친 듯한 질주가 어찌 과민반응이 아닐 수 있을까? 진화사적으로 볼 때도 형이상학적 물음들이 우리의 자기보존 본능이나 종족보존 본능에 유리하게 작용할 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형이상학적 사유에 필요한 기회비용을 다른 데 투자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의미에서도 인식의 형이상학이나 정념의 형이상학 모두 본래의 프로그램을 초과하고 있다. 그것들은 프로그램의 돌연변이이며 아나그램이다.



9. 뒤샹의 경우.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뉴욕에서 리처드 무트(R. Mutt)라는 가명으로 레디메이드 작품 <샘>(변기)을 전시회에 출품하나 거절당한다. 이 미술사의 한 스캔들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그가 예술작품의 개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오브제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이 경우에는 화장실에서 미술관으로) 옮겨놓았을 때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걸 발견(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예술작품의 근원이 더 이상 예술작품이나 예술가 자신의 창조성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일부 작품의 경우에,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자리옮김이라는 일종의 새로운 명명행위이다.



뒤샹의 대표적인 레디메이드 중의 하나인 <자전거 바퀴>(1913)은 자전거 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이 바퀴와 의자는 모두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혀 예술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오브제가 동시적으로 제시됨으로써 거기에 어떤 미감적 효과(뒤샹 효과)가 유발되는 것이다(그래서 자신이 예술작품임을 주장하게 되는 것). 이 새로운 예술, 혹은 '미적 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병치(명명)이고, 자리의 이동이다. 이점은 <샘>의 경우에 보다 극적으로 드러난다.

  

전시회에 예술작품으로 놓인, 그리고 '샘'이라고 새롭게 명명된 이 변기에서 우리는 이미 도구 존재로서의 도구다움을 경험할 수 없다. 이 변기의 "둘레에는 그것이 귀속될 만한 거라곤 아무 것도 없이, 다만 무규정적인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기는 안전하고 편리한 배뇨를 위한 기구라는 도구의 도구 존재, 즉 신뢰성을 자신 가운데로 모아놓고 있다. 이를테면 변기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곧 숨어 있지 않음(탈은폐) 가운데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듯 '존재자의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이 이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준다? 이런 식의 하이데거적인 사유는 그림이 아닌 실제 오브제의 경우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이미지로서의 고호의 구두 그림이 실제의 구두에로 관심을 정향시킨다면, 실제로서의 이 뒤샹의 변기는 오히려 완강하게 자신의 도구로서의 흔적을 지우며 이미지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이 변기는 도구적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신뢰성을 철저히 부인하고 망각한 이후에야 예술작품으로서, '샘'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예술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이고, 무엇일 것인가?

10. 과학사에서 1997년이 의미있는 해로 기록된다면 그건 단연 복제양 돌리 사건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내지는 치료)라는 것은 생물체의 고유한 유전자 염기배열을 기술적으로 조작할 수 있음에 근거한다. 유전자 염기배열이란 A, C, T, G 네 개의 문자로 표시되는 DNA 염기의 조합('책')이다. 이제까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자신이 타고난 유전자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거기에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를 가할 수 있게 된 것.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 조작은 일종의 아나그램(철자변환)이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재료(레디메이드)의 배열을 바꾸는 것이고, 자리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이면서 예술이다.

아나그램으로서의 예술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기술과 예술의 비분리를 다시금 경험하게 될 것인지(이에 대한 사유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미래에, 이성의 도움없이도 자기복제를 통한 종족보존이 가능해질 경우(그것이 허용될 경우), (숭고한)사랑은 무엇일 것인지? 레디메이드 이후에 (숭고한)예술은 무엇일 것인지? 그런 물음들 앞에서 사랑과 예술은 자신들의 유사한 운명을 놓고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11. 모든 이야기를 정리해서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모든 단락은 보완을 강요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볍게 말하는 것이다."(카뮈)라는 권고를 제법 따르려고 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칸트와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좋아하는 만큼 더 읽게 되면, 조금은 무겁게 말할 수 있을는지(여전히 사랑하면서)? 끝으로, 이 몇 가지 생각의 꼬투리가 되어준 카락스/알렉스에게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알렉스 오스카(Alex Oscar)는 레오(스) 카락스(Leos Carax)의 아나그램이다. 예술은 분신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젊은 카락스/알렉스는 내게 말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12.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구애를 한다는 것이며, 이 구애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계속될 것이다."(<아방가르드의 다섯 노총각들>, 현대미학사, 1993)

06.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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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1-21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로쟈 2006-01-22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진행중인데요.^^

비로그인 2006-01-2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우석 사태로 생명 복제가 현실과 멀어졌다는 건 사실과 다르지 않나요?

황우석이 사기친 건 줄기세포고 생명 복제에서는 분명한 연구 성과 (스너피)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로쟈 2006-01-2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서 적었듯이, 제가 염두에 둔 건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아일랜드>에서 설정된 것과 같이 '본격화된' 생명복제 시대입니다(이 영화가 유독 한국에서 많은 관객을 동원했는데, 황우석 신드롬의 영향으로들 해석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