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모차르트와 쇼스타코비치는 친숙한 이름이다. 이 두 '천재 음악가'에 대한 칼럼을 아침 신문에서 읽었다. 한국일보에 연재되는 '조윤범의 파워클래식'. 특히 초점이 맞춰진 것은 두 사람이 남긴 현악사중주 수작들. 내가 곡의 번호까지 기억할 리는 없지만, 필시 우리 귀에 익은 연주곡들일 터이다. 이들의 선배 음악가인 하이든은 83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겼다고 하는데, 양적으론 거기에 미치지 못해도, 이 두 후배 또한 상당 수의, 그리고 상당한 수준의 현악사중주를 작곡했다 한다.

 

  

 

 

우리의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경우 전체 23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기고 있는며, 그 중 '불협화음 사중주' 를 포함하여 그가 하이든에게 헌정한 여섯 곡, 즉 '하이든 현악사중주'가 유명한 듯(<사냥>이란 곡이 특히 유명하다고). 이후의 작품 가운데는 연주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음표들이 가득차 있다고 하는데, 특히 마지막 21번과 23번이 압권이라고. 필자가 소개하는 영화 <아마데우스>(1984)의 일화: (황제 왈) "음... 뭐랄까, 다 좋은데 음표가 너무 많아." (모차르트)"전 필요한 만큼만 썼는데요. 그렇다면 정확히 어디가 많았나요?" 이에 황제는 더듬거려지만, 실제로 연주해보면 황제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영화 <아마데우스>의 사운드트랙이 내가 산 몇 안되는 모차르트 음반 같다. 그 영향이겠지만,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모차르트의 음악은 레퀴엠이다.

 

 

 

 

참고로,  모차르트의 천재에 대한 살리에리의 질투라는 테마를 극화한 작품으로 푸슈킨의 소비극 중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있다(<아마데우스>의 시나리오 작가는 참조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우리말로는 푸슈킨 전집 중 희곡 파트에 들어 있는데, 가령 <보리스 고두노프>(열린책들, 1999/2001) 같은 책을 참조할 수 있다. 이 짤막한 작품은 러시아에서 TV용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으며 나는 그 비디오CD를 소장하고 있다. <아마데우스>와 마찬가지로, 살리에리의 아주 긴 독백으로 시작한다.  

 

 

 

 

모차르트의 또 다른 영화음악으로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에서의 클라리넷 연주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데우스>는 고등학교 때 단체관람을 했던 듯하고, 아이작(이자크) 디네센 원작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요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학력고사를 보고 난 고3 시절에 종로에 있던 명보아트홀에서 본 기억이 생생하다(디네센의 책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바베트의 만찬>에 국내에 소개돼 있다. *거기에 <일곱 개의 고딕이야기>가 더 보태졌다). 강수연 주연의 <씨받이>가 예고편이었다.   

모차르트와의 기억할 만한 또 다른 만남은 1990년 여름에 TV에서 본 프랑스 뒤세네 남매(Isabelle & Paul Duchesnay)의 아이스댄싱이었다. 그들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한 대목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비록 러시아 팀에 이어 2위를 차지했지만, 이들의 춤은 내가 이제껏 기억하는 최고의 아이스댄싱이었다(춤추는 걸 보며 눈물을 흘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단편적 이미지가 운동으로서의 춤을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아쉬운 대로 옮겨본다. 여하튼 그런 게 내가 기억하는 모차르트이다. 아니 '모차르트 이펙트'라는 게 더 있긴 하다. 딸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태교에 좋다고 해서 구입한 건지 어떤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하여간에 <모차르트 이펙트>(황금가지, 1999)도 나의 장서 중의 한권이다. 그렇다고 물론 모차르트가 집안에 넘쳐흘렀던 건 전혀 아니고 책은 어디 박스에나 들어가 있는 듯하다.

 

 

 

 

모차르트 관련서로 내가 한번 읽고 싶은 책은 최근에 나온 <모차르트와 함께 한 내 인생>(문학세계사, 2005)이다. 작곡가 모차르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에세이인데, 저자인 프랑스작가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가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 모차르트의 음악 중 16곡을 직접 선곡하고 각각의 곡에 대한 추억을 들려준다"고. 본문에 소개된 16곡을 한 장의 CD에 담아 부록으로 실었다고 하니까 초심자들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될 듯하다. 그리고 역시나 프랑스의 작가이나 비평가 필립 솔레르스의 <모차르트 평전>(효형출판, 2002). 책은 필립 솔레르스의 '진정한 모차르트를 찾아 떠난 여행'의 기록이라는데,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아 곳곳을 순례하고 그가 남긴 편지들의 어구를 되새기며 끝없이 그의 음악들을 철학적, 시적으로 해석한다." 전방위 지식인인 저자는 그 유명한 쥴리아 크리스테바의 남편이기도 하다.

다시 칼럼으로 돌아가서 이어지는 대목을 읽어본다:  "현악사중주 역사에 뚜렷한 획을 그은 모차르트는 다음 세대를 이어갈 무뚝뚝한 꼬마에게 확실한 바톤을 넘겨주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베토벤이 그 위대한 곡들을 남길 수 있었으랴. 그 후에도 많은 작곡가들이 돈벌이도 별로 안 되는 사중주를 쓰며 자신의 숭고한 작품집을 완성시켜나갔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천재는 20세기에 들어서야 그 빛을 드러내었다. 바로 쇼스타코비치다."

 



 

쇼스타코비치(1906-1975)란 이름이 제일 먼저 떠올려주는 이는 몇 해 전 세상을 버린 한 친구이다. 클래식 애호가였던 그가 가장 좋아했던 러시아 작곡가가 쇼스타코비치였고, 덕분에 나는 그의 교향곡이나 협주곡 등에 대해서 귀동냥을 할 수 있었다. 기억에 그는 LP음반으로도 쇼스타코비치 컬렌션을 가지고 있었고, 몇 번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혁명'이란 제목이 붙은 교향곡을 그의 방에서 틀어주기도 했었다.

그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을 15개나 쓴 작곡가이지만, 현악사중주도 딱 15개를 남기고 있다(한 연구자에 따르면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이 두 양식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모차르트를 의식한 듯한 간결한 1번을 쓰자마자 2, 3번부터 교향곡에 버금갈 정도의 웅장한 현악사중주들을 써내려갔다. 그의 초기 현악사중주들은 초기작인지 후기작인지 헷갈릴 정도로 기가 막힌 스타일들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11번부터 14번까지는 그의 작품들을 초연했던 ‘베토벤 사중주단’ 멤버에게 하나하나 헌정했다. 11번은 제2바이올린에게, 12번은 제1바이올린, 13번과 14번은 각각 비올라와 첼로 주자에게. 이토록 현악사중주에 애착을 가진 이가 또 있을까. 다 듣기엔 너무 많으니 한 곡만 추천해 달라고? 역시 제목 없는 2번의 마지막 악장을 들어보라.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 저리 가랄 정도로 멋지다." 그 멋진 음악을 나도 한번 구해서 들어봐야겠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두번째 기억은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의 주제가와 관련된다. 오래전 영풍문고 종로점에 들렀을 때 주제가로 쓰인 쇼스타코비치의 재즈모음곡 2번 중 왈츠가 반복해서 들려왔는데, 아마도 음악 담당자가 당시에 좋아했던 곡인 모양이었다(서점에 머물던 시간 내내 반복해서 들려왔다). 당시엔 누구의 음악인지도 몰랐지만, 왠지 러시아 음악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고,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게 쇼스타코비치였다. 나는 영화의 비디오CD와 사운드트랙을 모두 갖고 있기에 수시로 들을 수 있는데,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곡이 아닌가 싶다. 

 

 

 

 

쇼스타코비치 관련서로 나온 건 두 권인데, 그 중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이론과실천사, 2001)은 이 작곡가에 대한 많은 자료와 증언을 제시해준다. 하지만, 전문가의 의견을 들으니 대부분은 신빙성이 없다고 한다. 볼코프는 러시아의 망명 음악가이지만 프리랜서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시인 브로드스키와의 대담집도 갖고 있다), 그의 '증언'에는 각색된 픽션도 가미돼 있어서 러시아  음악학자들이 아주 싫어한다고(볼코프는 페테르부르크 문화사에 대한 책,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책 등도 갖고 있으며 러시아어로 다 소개돼 있다).

그럼에도 <증언>은 우리말로 접해볼 수 있는 가장 상세한 문헌이므로 그런 점을 얼마간 감안하고 읽으면 되겠다. 쇼스타코비치는 1928년 약관 22세에 당대 최고시인 마야코프스키의 풍자 드라마 <빈대>의 음악을 맡기도 했었는데, 두 걸출한 예술가가 조우하는 장면도 <증언>에는 기록돼 있기 때문에 전공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책이긴 하다. 내년에 좀더 정평있는 전기가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그런 기대를 가질 만한 것이 "내년 2006년은 이 두 천재 작곡가의 해다. 모차르트는 탄생 250주년이며, 쇼스타코비치는 탄생100주년이다." 이것이 사실 내가 굳이 이런 내용의 페이퍼를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2006년이 이제 한달 남았다!..

05.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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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1-30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차트르 레퀴엠 제가 강추하는 음반이 있습죠.

1996 Digital
HARMONIA MUNDI



Requiem in D minor KV 626
MOZART
Philippe Herreweghe (conductor)
Orchestre des Champs Elysees



 

 

 

 

 

 

함 들어보시면 좋을 듯.


비로그인 2005-11-3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club.nate.com/classicalmusic 네이트 고전음악 동호회
이 사이트에 가면 저작인접권이 말소된 음반 (녹음된지 50년이 넘었거나 연주자가 사망한지 30년이 넘은 음반 등.) 200여 장을 공짜로 다운 받을 수 있더군요. 참 좋습니다.

로쟈 2005-12-01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제가 음악보단 역시 책을 더 좋아하지만, 둘이 안 친할 이유도 없겠죠.^^
 

'나의 고전'이란 제하의 원고를 청탁받고 작성한 글을 옮겨놓는다. 내가 고른 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사르트르'였는데, 문학작품은 가급적 피해달라는 주문이 있었기 때문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란 강연 팜플릿을 골랐다. 내가 아는 한,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올해 <문학과 사회> 여름호와 <현대문학> 10월호에서 특집이 꾸며졌다. 하지만, 이 '과거의 영웅' 철학자에 대한 주목은 소략한 편이다. 말년의 주저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번역돼 나올 거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올해 책이 나오는 건지는 의문이다. 하물며 <집안의 백치> 같은 걸 기대하기는 현상황에서라면 더더욱 어려울 듯하다. 그런 게 아무튼 작금의 '상황'인 듯하다. 나는 그냥 나대로 그러한 상황에 편승하거나 거스르면서 내가 치러야 할 빚을 까나가도록 하겠다(연말까지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2-3편의 페이퍼를 더 쓸 계획이다). 무슨 빚? 청년시절의 우상에 대한 빚 말이다...

일반적인 고전들과는 달리 ‘나의 고전’에는 ‘이 나’라는 단독성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아무나의 고전’이 아닌 ‘나의 고전’이란 의미에서 ‘왜’란 물음 대신에 ‘왜 하필’이란 물음을 수반한다. ‘왜 고전인가?’가 아니라 ‘왜 하필 나에게?’란 물음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우연찮게도 그 물음은 어떤 고유한 죽음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과 상동적이다. 어떤 죽음에 대해서 ‘왜 하필 그가?’라고 묻는. 그러한 물음에 대하여 나는 아직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하필 그때 그가 그렇게 죽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내게 하나의 ‘고전적인’ 생애로 각인되었다는 것이다. 그 죽음은 1980년 4월 15일에 일어났으며, ‘장-폴 사르트르의 죽음’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사진은 사르트르의 장례 행렬).

바로 전해 10월 26일에도 매우 충격적인 죽음이 있었다. 나는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죽음이 몰고 온 충격적인 정황들 때문에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처럼 한 죽음의 간접적인 목격자이자 경험자가 되었다(TV에서는 며칠 동안 장송곡이 흘러나왔다). 분단국의 한 독재자가 연회장에서 부하의 흉탄에 맞아 숨진 것인데, 그 비극적인 죽음은 그러나 성대한 장례식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죽음’으로서의 아우라를 거느리지 못했다. ‘흔한 죽음’이었기에(대개의 독재자들은 그렇게 죽지 않던가?).

해서 어린시절,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까운 사람들 중 아무도 죽어주지 않던 내게 먼 이방인 철학자의 죽음과 성대한 장례행렬에 대한 자세한 보도는 그 죽음을 가장 매혹적인 어떤 것으로 각인시켜주었다(나는 신문의 일면 전체를 장식했던 이 장례식 보도와 사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신문지를!). 정치 대신에 문학을 인생을 걸 만한 일로 간주하면서 내가 작가로의 길을 꿈꾸게 된 건 아마 그 이후였던 듯하다(비록 아무런 작품도 아직 쓰지 않았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작가이면서 철학자, 혹은 철학자이면서 작가. 나는 그런 저자가 되고 싶었다(‘저자의 죽음’이란 유행어가 떠돌 때는 나도 따라 죽고 싶었다). 그 고유한 죽음의 주인이었던 그 사람 사르트르처럼 말이다.

 

 

 

  

장-폴 사르트르(1905-1980).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사망 2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흔히 그의 데뷔작 <구토>(1938)나 철학적 주저 <존재와 무>(1943), 혹은 자서전 <말>(1963)이 그가 남긴 ‘고전’으로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러한 ‘일반적인’ 고전들 대신에 ‘나의 고전’으로 꼽을 만한 책은 1945년 10월에 있었던 강연을 책으로 묶어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이다(그러니까 이 ‘팸플릿’은 내년에 환갑을 맞는다). 대학 초년생들도 읽을 수 있는 가장 쉽고, 가장 얇은 책!(<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2종의 국역본이 있다. 하지만, 마음놓고 인용하기에는 미덥지 않은 면이 있다. 새 정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대중강연의 원고였던 만큼 가장 확실하고 일목요연하게 자기 철학의 핵심을 짚어주고 있는 이 저작은, ‘공적인 교수들’과 대비되는 ‘사적인 사상가’로서 사르트르를 자신의 ‘스승’으로 경외했던 들뢰즈 또한 연극 <파리떼>의 초연, <존재와 무>와 함께 ‘사건’으로 간주했던 작품이다: “이들은 오랜 밤들을 지나온 우리가 사유와 자유의 동일성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던 작품들이다.”(Deleuze, "Desert Islands and Other Texts, 1953-1974", 77쪽)

  

참고로, 들뢰즈의 글모음집인 이 책은 불어본이 2002년, 영어본이 2004년에 편집돼 나왔으며, 단행본에 묶이지 않은 들뢰즈의 글 대부분을 카바한다. 1975-1995까지 발표된 글모음집이 될 제 2권은 "Regimes of Madness and other texts"란 제목을 갖고 있으며 근간 예정이다. 국내의 '들뢰즈 열기'를 감안하면 곧 번역/출간되어야 할 책이다. 책에는 1964년 11월 28일, 그러니까 사르트르의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 파문 한달 뒤에 들뢰즈가 'Arts'지에 투고한 글이 실려 있는데,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He Was My Teacher)"란 제목이다. 

 

 

  

 

한편, <문학동네>(2004년 겨울호)에 실린 실린 가라타니 고진의 평문 "근대문학의   종말"은 서두에서 "문학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주관성)"이라는 사르트르의 정의를 인용하고 있는데,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결미에 나오는 이 구절을 그는 들뢰즈의 텍스트로부터 재인용하고 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르트르와 들뢰즈 두 철학자간의 연계성을 떠올려볼 수 있다.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한 들뢰즈의 평가를 직접 옮겨보면 이렇다.

"그의 철학 전체는 재현이란 관념, 재현이라는 질서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변적 운동이었다. (그에게서) 철학은 그 자신을 '선(先)판단적인', '전(前)-재현적인' 보다 생생한 세계에 정초하기 위해서 판단의 영역을 떠나 그 활동 무대를 바꾸었다."(His whole philosophy was part of a speculative movement that contested the notion of representation, the order itself of representation: philosopy was changing its arena, leaving the sphere of judgment, to establish itself in the more vivid world of 'pre-judgmental,' the 'sub-representational,')(78쪽) 이러한 평가는 들뢰즈 자신의 철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때문에 사르트르와 들뢰즈의 차이보다 더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그들간의 접점과 연속성이다).  

본론으로 돌아와보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경우 나는 2종의 국역본 외에 불어본(신아사, 1973)과 영역본을 갖고 있다. 영역본은 월터 카우프만이 편집한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사르트르까지의 실존주의>(1972/1988)에 실려 있다. 니체 번역자이자 전문가로 잘 알려진 카우프만의 책으론 국내에는 <헤겔: 그의 시대와 사상>(한길사, 1995), <인문학의 미래>(미리내, 1998)가 소개돼 있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주저라 할 <니체: 철학자, 심리학자, 반그리스도>(1975)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예전에 니체학도들에게는 필독서였다). 

사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내용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선언적으로 제시돼 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주의’에 대한 오해와 비난들에 맞서서 실존주의는 무엇이 아닌가, 반대로 실존주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휴머니즘인가를 논변해 간다. 거기에 대전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이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란 명제이다(사르트르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읜바, 그것을 행운으로 간주한 ‘후레자식’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자유를 죽었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말했다.)

사르트르가 예로 들고 있는바, 종이칼이나 망치 같은 것을 제작할 경우에는 그 제작에 앞서서 어떤 개념 혹은 디자인이 먼저 요구된다. 머릿속으로 만들고자 하는 물건의 개념(본질)을 떠올리고 그에 따라 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실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보다 일관성 있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따를 때(사르트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마르셀과 야스퍼스 등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이다), 신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인간에겐 어떠한 본질도 사전에 주어져 있지 않다. 즉 실존은 아무런 사전 개념이나 계획 없이 존재하기에 본질에 앞선다.

따라서 ‘보편적 인간성’이란 없으며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인간은 이끼나 토마토나 양배추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이어나가는 ‘지향적 존재’이다. 요컨대, “나는 내가 만들어!”라는 것이며(“사랑은 내가 해!”란 드라마 대사는 사랑에 대한 사트르르적 태도를 잘 집약해준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즉 “나는 나 자신과 모든 사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윤리이며, 이러한 책임으로부터의 도피가 ‘자기기만’이고 ‘불성실’이다. 자유에 처형된 존재로서의 우리는 언제나 자유로우며 따라서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의 실존과 주체성을 우주의 한복판에, 초월적 중심에 갖다놓는 ‘오만한’ 철학이 어찌 휴머니즘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렇게 큰소리 칠만 했던 것이 대략 <현대>지를 창간하던 1945년부터 10여 년간이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르트르의 전성기였다. 해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는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당당한 한 지적 거인의 목소리가 육성으로 배여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목소리에 매혹되어 나는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은 좀 바뀌었다.

과연 인간이 어디까지 자유로운가란 물음을 던지면서, 사르트르적인 ‘낭만적 합리주의’(아이리스 머독)에 대해 얼마간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이후에 구조주의나 정신분석학 책들을 읽으면서는 이 사팔뜨기 철학자의 ‘영웅주의’ 철학이 갖는 유효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도 됐다(영국의 저명한 여성 작가 아이리스 머독의 'Sartre, romantic rationalist'(1953)은 영어권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이기도 하다. 머독의 평가는 적절해 보이는데, 나는 사르트르와 들뢰즈 모두 '낭만적'이란 수식어를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한 건 그가 나의 ‘영웅’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이때의 영웅성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참고로, <현대>지 창간사는 1966년 <창작과 비평> 창간호에 번역/소개된다. 사르트르의 시대정신은 <창작과 비평>의 창간사도 겸하고 있었던 것.)  

   

가령 사르트르의 전사(前史) 혹은 사르트르 이전의 사르트르.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던 8개월간의 유학생활에서 돌아온 사르트르에게 곧 30세 남자의 위기가 들이닥쳤다. 그는 거울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랫동안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마사지해야 했다. 1934년 겨울이었고, 그는 르 아브르에서 키가 작고 뚱뚱한, 그저 늙어가는 시골 교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부풀어오른 코담배갑처럼 혐오감을 일으키는 구제불능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 친구는 그에게서 비곗살을 빼준다고 스웨터를 입은 그의 배를 두 손 가득히 움켜쥐고서 짓궂게 괴롭히기까지 했다! 이것이 내가 읽은 두툼한 전기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대목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 만에 그는 자신을 우리가 아는 ‘사르트르’로 만들었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였다. 그는 실존주의가 ‘행동과 앙가주망의 모럴’이라는 걸 직접 몸으로 실천하며 보여주었던 것. 해서, ‘나의 고전’은 적어도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그의 책들이 아니라 그의 생애라고 말해야 온당할 듯싶다. 문학에 대한 사르트르의 언명을 조금 비틀자면, “고전은 그 본질상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자 ‘자기-되기(becoming-Self)’의 행동/사건이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05. 11. 28.   

 

 

 

 

P.S. 글의 제목은 (보다 관례적인) '사르트르의 삶과 철학'을 비튼 것이다. 내게서 그의 철학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의 삶이 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것처럼(2002년판 TV용 <닥터 지바고>는 반대로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한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1965) 시작 장면은 오늘처럼 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던 저녁 무렵으로 기억된다. 집에 가서 두 명의 지바고를 다시 보고 싶은 저녁이다. 러시아어 '지바고'의 어원적 의미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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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르트르를 발가벗기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1 23:45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고 나니 20세기 원조 지식인이라고 할 사르트르에 관한 평전 소식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르트르 세대 이후 가장 '대중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인 베르나르 알리 레비가 쓴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 역자는 사르트르 전문가인 변광배 교수다. 968쪽에 달하니까 얼추 안니 코헨 솔랄의 세 권짜리 평전 <사르트르>(창, 1993)에 이어서 가장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이네파벨 2006-01-12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사르트르의 "파리떼"라는 단편을 읽어보셨는지요...
중학교 1학년때 집에있는 세계문학전집에서 그 단편을 읽고..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엘렉트라의 오빠)의 복수를 소재로 한...햄릿과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카뮈의 이방인....등등의 이야기를 한데 섞어놓은 듯 한 그런 이야기......)
망치로 머리를 맞는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살면서 몇 번 경험하기 힘든 진정한 epiphany의 순간이었다고 할까요.....

아마...그 책이 저에게 특히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건...

절대 도덕, 절대적 사랑, 절대적 힘, 완전하고 단단하게 느껴졌던 어린시절의 알에서 막 깨어나오던 시절이어서 더욱 그랬을 거예요.

그 이후로 사르트르를 저의 우상으로 삼고...저 위에 언급된 그의 많은 저서들을 사놓고 읽어보았으나...까만건 글씨 하얀건 종이.....수준으로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이후 사르트르는...
좀 더 approachable한 까뮈나 보봐르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파리떼>가 담겨있던 그 책은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렸는데...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하지만 그 감동은 되찾을 수 없을것 같아요. 한번 흘러간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지 못하듯....

로쟈 2006-01-1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문문고본으로 갖고 있었는데 가물가물합니다. 드라마 아니었던가요?.,

이네파벨 2006-01-12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연극 대본 형식이었어요.
사르트르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데...역시 로쟈님이십니다.^^
 

 

 

 

 

 

 

옛날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철학에 대하여>(동문선, 1997)를 (부분)정리해놓은 게 눈에 띄어서 옮겨놓는다. 요컨대 개인적인 작업노트이다. '철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주제로 한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은 개인적으로 알튀세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익한 대담이라고 생각한다. 1993년인가 <이론>지에 번역/소개되었던 자크 데리다와의 대담(대담자는 마이클 스프린커)과 함께(이상하게도 이 대담은 원문의 절반 정도만이 번역되었다). '묘한' 사제간이었던 데리다와 알튀세르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에도 핵심적인 문헌이다.

 

1부. 철학과 마르크스주의 -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

1장-마르크스주의를 위한 하나의 철학: 데모크리토스의 노선

 

-“마르크스의 발견의 핵심이 과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수학적 철학이나 물리학적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곤란한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그는 자기비판을 통해 <인식론적 단절>이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경향적인 것이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마르크스가 헤겔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다.(19)

 

-당시 나는 프랑스에서 내가 1948년 이래 당원으로 있던 프랑스 공산당에 개입하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내겐 선택가능성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에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내게 남아 있던 개입의 길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순수한 이론, 즉 철학을 통한 개입이 그것입니다.(27) 나는 <자본> 속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될 만한 것을 탐구하는 데 전념했습니다.(30) 당은 이제는 나를 추방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었던 나의 개입이 마르크스에 의거하고 있었고, 나는 하나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마르크스 해석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가 <불가침의 聖父인 사상가>가 되어 당 내부에서 나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데리다가 지적하고 있는, 알튀세르에게서의 당의 문제: "그에게 있어서 할 수 없었던 것이 한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당을 떠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의 투쟁이 당 내부에 있다고 간주했습니다. 반면 저는 당원이 아니었고 그래서 저는 당 밖에 있는 알튀세르를 또한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있었고 저는 아니었습니다. 차이를 아시겠지요? 그것은 무시될 수 없습니다."

 

-내 생각에 <진정한> 유물론, 마르크스주의에 가장 적합한 유물론은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노선에 서 있는 우발적 유물론입니다.(33) 우리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상상적> 철학(레이몽 아롱)을 만들어 냈습니다. 즉,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에 문자대로 엄격하게 매달린다면 그의 저작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철학 말입니다.(36) 어떤 것이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철학, 철학사에 속하는 하나의 철학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이용했던 개념적 발견들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하나의 철학일 것입니다.(37) 그가 탐구한 것은 <비철학>, 그 이론적 헤게모니 기능이 철학의 새로운 존재 형태들에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소멸할 <비철학>입니다.(38) 이처럼, <자본>이라는 과학적-비판적-정치적 저작을 씀으로써 그는 자신이 결코 쓰지 않은 철학을 실천한 것입니다... 현재 과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하나의 철학을 가공해 내는 것입니다.(39)

 

-이 유물론[우발적 유물론]은 주체(신이든 프롤레타리아트이든)의 유물론이 아니라, 지정할 수 있는 목적이 업이 자기발전의 질서를 지배하는 (주체없는) 과정의 유물론입니다.(40) 의 철학, 의 철학은 기원 등등에 대한 모든 고전적인 질문들을 척결합니다. 이 철학은 우리가 그 속에 <던져져> 있는 세계의, 그리고 세계의 의미의, 일종의 선험적 우연성을 복원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집니다... 이렇게 세계는 우리에게 하나의 <증여>입니다.(42)

 

-여기서 내 의도는 철학사에서 인정받지 못한 유물론적 전통 하나가 존재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데모크리토스-에피쿠로스-마키아벨리-홉스-루소-마르크스-하이데거의 전통입니다... 그것은 통상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것으로 돌려지던 유물론, 즉 합리주의 전통의 모든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 즉 합리주의 전통의 모든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 다시 말해 관념론의 위장된 형태인 저 유물론을 포함하여 유물론으로 인정받던 유물론들에까지 대립하는 마주침의 유물론, 우성의 유물론, 요컨대 우발성의 유물론입니다.(43) 모든 형태에 대해 무가 우선하며, 현존에 대해 부재가 우선합니다.(44)

 

*데리다가 대담에서 지적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중요성: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하이데거는 금세기의 회피할 수 없는 유일한(the) 위대한 사상가입니다. 유일한 위대한 적수이자 또한 동시에 일종의 매우 중요한 동맹자 또는 잠재적인 후원자로서 말입니다(알튀세르의 전저작은 이러한 징후에 따라 읽혀져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것을 <세계는 일어나는 것 전체이다>(<세계는 우리에게 떨어져내리는 것 전체이다>)라고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훌륭한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세계에는 예고 없이 <우리에게 떨어져 내리는> 사례들․상황들․사물들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례들, 즉 서로 전적으로 구별되는 개별적 개체들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테제가 바로 명목론의 기본 테제입니다... 나는 명목론이 유물론의 대기실이었을 뿐 아니라 유물론 그 자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49)

 

 

 

 

 

 

 

 

-세계는 전적으로 개별적이고 유일고유한 사물들고 구성되어 있고, 사물들은 제각기 고유한 명칭고 속성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여기> 있는 것, 이것은 단지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뿐이지 명명할 수는 없습니다. 말은 이미 추상이기 때문입니다. 말에 대한 몸짓의 우위, 기호에 대한 물질적 흔적의 우위가 뜻하는 바를 말을 사용하지 앟고서 말해야, 즉 가리켜야 합니다.(50) 마르크스도 엥겔스도 유일고유하고 우발적이며 예견 불가능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의미의 역사의 이론에도, 정치적 실천의 이론에도 접근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역사의 이론, 현재 속의 정치적 실천의 이론에 대해 유일하게 사고한 사람은 마키아벨리입니다.(51)


2장-철학-이데올로기-정치

-내 생각에 철학이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으로서 성립한 것은 수학이라는 최초의 과학이 성립한 시기입니다... 철학은 과학에서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어떤 것, 즉 철학에 불가결한 합리적 추상화의 모델을 끌어왔습니다... 요컨대 순수한 합리적 담론, 그 모델이 과학들 속에 있는 합리적 담론이 미리 존재하지 않고서는 철학이 등장할 수 없었습니다.(54)

 

-모든 철학은 자신의 대립물이라는 유령을 안고 있습니다. 관념론은 유물론이라는 유령을, 유물론은 관념론이라는 유령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의 목적 중의 하나는 이론적 전투를 개시하는 것입니다... 

 

05. 11. 21.

 

P.S. 데리다의 대담에 대한 정리, 그리고 데리다의 알튀세르 비판의 요점 등은 따로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그 자리는 공간이지만 시간의 좌표를 갖고 있다. 기약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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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TV 등 언론에서는 노언 촘스키가 영미의 시사지들이 인터넷 투표를 통해서 선정한 '세계의 지성' 중 '최고의 지성인'으로 뽑혔다고 보도했다. 약 2만명이 참가한 투표에서 약 5000표를 획득, 2500표를 얻은 움베르토 에코를 더블 스코어로 따돌렸다고. 주로 영어권 네티즌이 참여한 것이므로 영미쪽 지식인들이 대거 선정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프랑스쪽 지식인들은 톱10 안에 한 명도 들지 못했다). 어제 귀가길에 문화일보에서 이 '톱10'에 대한 기사를 읽었는데, '대중문화'의 산물이기도 한 이런 투표 자체에 별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동시대 지식인들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를 가늠하는 데는 유익한 지표인 듯싶어서 소개하고 몇 자 덧붙인다(내가 흥미를 느낀 건 생물학자들의 부상이었다).

1위 노엄 촘스키(미국). 직업은 언어학자로 돼 있지만, 정치비평가, 문명비평가 정도로 더 잘 알려져야 마땅한 사람이고, 주로 하는 일은 '미국 비판'이다. 네오콘 잡지의 한 편집장은 촘스키와 하워드 진을 가리켜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대중이 보기엔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물론 비판의 테마와 강도와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촘스키의 인지도가 높은 것은, 내가 보기에, 가장 쉽게 글을 쓰기 때문이다(그의 언어학 책이 쉽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가 프랑스의 현학적인 지식인들에 대해서 못마땅해 한 것은 당연한다(푸코 등을 읽다가 좌절한 사람들에게 촘스키는 희망이다). 대중들이 읽을 글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쓰라는 것. 그가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꼽힌 만큼 그의 '전략'은 유효해 보인다.   

  

촘스키의 책들은 국내에 '너무 많이' 소개돼 있다(국내엔 촘스키의 제자들도 여럿 된다). 수준 이하의 번역들도 많다고 하지만, '어렵지 않은' 책들이기 때문인 듯. 그의 전기로는 <촘스키, 끝없는 도전>(그린비, 1999)와 <촘스키>(시공사, 1999)가 같은 해에 나왔다(나는 전자를 읽고 후자를 사두었다). 바쁘신 분들은 <30분에 읽는 촘스키>(랜덤하우스중앙, 2004) 정도를 읽어주시면 되겠다. 책의 역자이자 전문번역가인 강주헌씨는 요즘 부쩍 촘스키에 빠져 있는 듯한데, 가장 최근에 나온 촘스키 책도 그가 번역한 <지식인의 책무>(황소걸음, 2005)이다. 물론 책은 제목에서부터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한마당, 1999)를 떠올리게 한다. 대중적 인지도에다 사회적 책무에 대한 강조에 있어서 촘스키는 우리 시대의, 미패권주의 시대의 '사르트르'이다(사르트르적 의미의 지식인이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을 뜻한다).

2위 움베르토 에코(이탈리아). 직업은 문학비평가로 돼 있지만, 기본적으론 기호학자이고 게다가 소설가이다. 아마 러시아에서 이런 류의 투표를 했다면, 촘스키를 거뜬히 따돌렸을지도 모른다. 정치비평서들이 일부 '전문서'로 소개돼 있는 촘스키와는 달리 에코의 경우는 소설과 문학비평서, 중세미학연구서 등이 시리즈로 번역/소개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러시아보다 국내에 더 많은 '에코'가 나와 있다(그의 '조이스'론이 소개되지 않은 게 아쉽지만). 거의 '에코 천국'이라고 할 만큼.  

 

 

 

 

 

  

 

 

 

국내의 에코 전문출판사로는 열린책들과 새물결을 들 수 있는데, <움베르토 에코 평전>(2004)는 열린책들에서 나왔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에코 붐'을 만들어낸 건 물론 그의 첫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초판은 1986)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에코 자신이 쓴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열린책들)와 이윤기 선생의 번역을 교정해준 것으로 잘 알려진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읽기>(미토, 2004)가 부수적인 참고문헌이 된다. 개정판도 갖고 있지만 내가 읽은 건 <장미의 이름> 초판이며, 작년에 러시아어본도 구해왔기 때문에 나중에 개정판으로 한번 더 읽어볼 생각인다(<푸코의 진자> <전날밤> <바우돌리노> 등의 다른 소설들은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언급만 하도록 한다). 모두가 알 만한 사실은 <장미의 이름>이 장 자크 아노에 의해서 영화화됐다는 것(숀 코너리와 크리스천 슬레이터 주연). 그리고 대부분이 모를 만한 사실은 <장미의 이름>이 다른 역자에 의해서도 번역됐었다는 것. <장미의 이름으로>(우신사, 1986). 프랑코 모레티의 표현을 빌면 번역 또한 '도살장'이어서 살아남는 번역은 몇 안된다.   

 

자신의 최초 전공이기도 했던 중세미학에 관한 책으론 <중세의 미와 예술>(열린책들, 1998), 기호학자로서 명망을 얻은 책으로 <기호학과 현대예술>(열린책들, 1998)이 국내엔 소개돼 있다(<기호학과 현대예술>은 불어본의 번역이고, 영어본 번역은 <기호학이론>(문학과지성사)이다. 이 국역본보다는 영어본이 훨씬 읽기 쉽다). 기호학자로서의 출세작 <기호학 이론>의 속편에 해당하는 <칸트와 오리너구리>(열린책들, 2005)에 대해서는 한번 소개한바 있으므로 생략하고, 대신에 추천할 만한 것은 에코가 공저한 <논리와 추리의 기호학>(인간사랑, 1994). 역자가 에코의 제자이다. 에코 기호학에 관한 국내 연구서로는 박상진 교수의 <에코 기호학 비판>(열린책들, 2003)이 유일하지 않나 싶고,  김성도 교수의 <하이퍼미디어 시대의 인문학>(생각의나무, 2003)에는 에코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좀 특이한 책으론 에코의 축구광적인 면모를 기호학과 엮은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이제이북스, 2003)가 있다.  

 

에코는 잡지에 기고하는 짤막한 에세이로도 유명한데, 국내엔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열린책들, 1995)으로 또 흥행몰이를 했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열린책들, 1999)은 그 책의 개정증보판이다. 이후에도 물론 열린책들에서는 그의 에세이집들을 꾸준히 내고 있으나 내가 사거나 읽지 않았으므로 언급을 자제하겠다. 에코의 에세이들에 비교적 일찍부터 눈길을 준 출판사가 새물결이고,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1993)을 시작으로 댓 권을 연이어 출간했었다. 얼마전에 그 책들이 재출간됐다(일부는 독일어판의 번역이다). 이 정도면 에코는 촘스키 뺨치는 지성인이다.  

3위는 리처드 도킨스(영국). 아마도 우리 시대의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일 듯하지만, 도킨스가 그래도 3위에 오를 줄은 미처 몰랐다. 영국에서의 대중적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도킨스에 관해서는 여러 번 소개한 바 있지만, 이 자리에서 다시 간단하게 훑어보기로 한다. 

국내에 제일 처음 소개된 도킨스의 책은 <이기적인 유전자>(두산동아, 1992)이고, 그의 책으로 내가 제일 처음 읽은 책이다. 물론 그때 도킨스란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막연하게 '이타적 행위'라는 게 모종의 심리적/도착적 만족감을 주는 '이기적 행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는데, 늘 그렇듯이 서점을 두리번 거리던 차에 <이기적인 유전자>란 책이 눈에 띄었고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유레카!'(우리식 버전으론 '심봤다!') 이후에 원서의 개정판을 옮긴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1993)이 출간됐고, 절친한 친구는 나의 권유에 따라 그 책을 읽고서 '유레카!'를 복창했다(그는 한동안 나만큼 도킨스를 욹어먹고 다녔다). 지금의 <이기적 유전자>(2002)는 보다 세련된 장정을 하고 있는바(표지의 진화과정을 보여준다), 이름하여 '고전100선'이요, 대학생/청소년 필독서이다.     

이후 도킨스의 주저라고 할 만한 책으론 <눈먼시계공>(민음사, 1994)과 10년만에 재간된 <눈먼 시계공>(사이언스북스, 2004)이 있다. 작년에 나온 <확장된 표현형>(을유문화사)은 내가 원서까지 사둔 책이지만 아직 읽지 않았으므로 감동을 적기는 어렵지만, 하여간에 다른 책들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최신간인 <악마의 사도>는 이전에 소개한바 있듯이 주로 칼럼모음집인데, '인간' 도킨스의 체취를 가장 강하게 내뿜는다. 도킨스 다이제스트를 원하는 독자라면 <도킨스와 이기적 유전자>(이제이북스, 2002)를 보셔도 좋겠다(다이제스트라 감질이 나겠지만). 

세계석학 30인과의 대담집 <미래는 어떻게 오는가>(가야넷, 2000)에는 촘스키와 에코는 물론 도킨스와의 대담도 실려 있다(지젝도 들어가 있다!). 내가 감히 사두지 못한 <사이언스북>(사이언스북스, 2002)에도 도킨스는 (당연히) 공저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내 기억에 존 브로크맨이 편집한 <제3의 문화>(대영사, 1996)에서도 도킨스를 읽을 수 있다. 그의 호적수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와의 비교는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몸과마음, 2002)를 참조할 수 있다.

4위 바츨라프 하벨(체코). 이 리스트에 들어 있는 유일한 동유럽 지식인. 직업은 극작가이자 정치인으로 돼 있는데, 대통령을 역임한바 있으니 저명한 인사이지만 국내에는 별로 연고가 없는 듯하다.  

뒤져보면 하벨의 책으론 <대통령의 꿈>(들꽃세상, 1992)이 처음 소개됐었고, '하벨 대통령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사상'이란 부제의 <프라하의 여름>(고려원, 1994)과 드라마 <청중>(예니, 2000)이 소개돼 있는 정도. 동구권 희곡모음집인 <탱고 外>(현대미학사, 1994)에도 <도시 재개발 계획>이라는 하벨의 작품이 들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지역적 편향성 때문에 러시아/동구권 지식인들에 대한 소개/이해는 턱없이 부족한 편. 멋쩍은 김에 하벨의 나라 체코에 대한 안내서 두 권 정도만을 적어두기로 하자. 체코 문학 전공자인 김규진 교수의 <체코 문화>(한국외대출판부, 2000), 그리고 체코 여행 가이드북 <체코>(휘슬러, 2005).

5위 크리스토퍼 히친스(영국). 직업은 정치평론가라고 돼 있는데, 톱10의 지식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소한 인물이다. 나의 견문이 짧은 것인가 하고 검색해 보았더니, 국내에 소개된 건 <키신저재판>(아침이슬, 2001) 달랑 한 권이다. 하면, 나의 '무식'을 탓할 수는 없는 것. 도서관에서 다른 책들을 검색해 보니까 <선교사의 입장: 마더 테레사의 이데올로기>(1995)란 책이 있고, 에드워드 사이드와 공저한 <희생자를 탓하기: 사이비 학문과 팔레스타인문제>(1988), 아담 바르토스란 이와 공저한 <국제 영토: UN, 1945-95>(1994)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아마도 영국의 영향력 있는 정치평론가인 모양(우리의 경우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두 권의 책이 더 출간되어 추가해놓는다.  

6위 폴 크루그먼(미국). 내가 이름을 아는 몇 안되는 현역 경제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최근엔 反부시 진영의 대표적인 논객이며(뉴욕타임즈에 칼럼을 쓴다) 해마다 노벨경제학상 후보에 오르고 있다고(*결국 2008년에 수상했다). 촘스키와 함께 MIT에 몸담고 있고, 1953년생이니까 나이도 비교적 젊다.  

그의 책으론 <경제학의 향연>(부키, 1997)이 유일하게 내가 갖고 있는 책이다(*화제작 <미래를 말하다>도 소장하게 됐다). 그가 공저처럼 돼 있는 <복잡계 경제학2>(평범사, 1998)도 갖고 있었지만 지난번에 책정리를 하면서 <복잡계 경제학1>과 함께 쓰레기장으로 갔다. 아마도 그 책의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 <자기 조직의 경제(Self-organizing Economy)>(부키, 2002)일 것이다. 제목만으로도 대충 내용을 짐작하게 하는데, '복잡계 경제학 개척자'로도 평가된다는 크루그먼은 이 책에서 "복잡계 경제학의 사고방식과 모델을 다"룬다고. "그는 '불안정으로부터의 질서(order from instability)'와 '불규칙한 성장으로부터의 질서(order from random growth)'라는 자기 조직화의 두 원리가 어떻게 도시의 형성과 기술 집중 및 경기 순환 등 제반의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자기조직계'에 대한 책들이 한동안 붐을 탄 적이 있는데,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카오스: 현대 과학의 대혁명>(동문사, 1993)이 발단이었다(물론 얀치의 <자기조직하는 우주> 같은 신과학 천문학서도 있었다). 이어서 <복잡성 과학이란 무엇인가>(까치, 1997) 등이 나왔고, <복잡계란 무엇인가>, <왜 복잡계 경제학인가> 같은 일본서들이 번역/소개됐다. '복잡계 경제학'에서 크루그먼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이름은 '수확체증의 법칙'을 주창했던 브라이언 아서인데, 크루그먼은 이를 더 발전시킨 공로가 있는 듯. 이 '자기조직화'는 문학/예술에서도 많이 나오는 테마이며, 들뢰즈를 읽다가도 종종 마주치는 용어이다. 그러니 나중에 좀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하는 크루그먼의 나머지 책들이다.  

7위는 위르겐 하버마스(독일). 작년 10월에 데리다가 타계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하버마스와 함께 이 명단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연로한 세계철학계의 원로이지만 하버마스는 언제나 '막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막내였으며(물론 그의 제자들이 2세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1세대 학자들의 파워와 명망에 미치지 못한다) 20세기 독일철학의 막내이다.  

독일 관념론의 적자를 자처하는 독일의 '괴물' 철학자 비토리오 회슬레(<객관적 관념론과 그 근거짓기>(에코리브르)가 지난 여름에 출간됐었다. 회슬레는 방한강연을 가진바 있으며 그때의 인연으로 한국여성과 결혼했다)가 꼽은바, (거명 당시에 생존하고 있던) 20세기 최고의 독일 철학자는 바이스체커, 가다머, 칼-오토 아펠, 하버마스 4인이었다(거기서도 하버마스는 가장 '젊은' 철학자였다).   

 

 

하버마스의 책들은 국내에 '충분히' 번역/소개돼 있다. 물론 질과는 무관하게. 예컨대,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린 <인식과 관심>(고려원, 1996)은 오역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책이며, 따라서 '대중들'은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프랑스의 난다긴다하는 철학자들을 '신보수주의' 철학자로 몰아세우며 그의 '거장적' 면모를 부각시킨 책이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문예출판사, 1994)이다(이 또한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들이 있다). 기억에 그의 교수자격취득논문인 <공론장의 구조변동>(나남, 2001)부터 <소통행위이론1>(의암, 1995, 이건 2권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대표적인 '부실'번역 사례이다)를 거쳐서 <사실성과 타당성>(나남, 2000)에 이르는 주저들은 대부분 국역본을 갖고 있다. 작년만 하더라도 <의사소통의 철학>(민음사)와 대담 <테러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하버마스에 대한 국내 연구만 해도 (상대적으로) 차고 넘친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8위 아마티아 센(인도). 경제학자. 인도 출신으로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센의 책들은 수상에 힘입어 바로 출간된 바 있다. <불평등의 재검토>(한울, 1999), <윤리학과 경제학>(한울, 1999)이 그것이다. '경제학의 테레사 수녀'라고도 불린다니까 그걸로도 그의 학문적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그런데도 케임브리지대의 교수이다!).  

센의 신간은 <자유로서의 발전>(세종연구원, 2001)이며, 소개에 따르면 "아마티아 센은 이 책에서 개인을 단순히 분배된 혜택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능동적인 행위자로 보고 논의를 진행한다. 그리고 국가, 시장, 법 체계, 정당, 언론, 이익단체 등을 포함하는 일련의 사회적 장치들이 개인의 실질적인 자유를 충족시키고 보장하는 데 얼마나 공헌하는가 하는 일관된 관점으로 중국과 인도, 유럽과 미국 등 세계의 다양한 나라들을 검토한다. 이 책은 개인의 자유 속에 정치 참여와 경제 발전 그리고 사회진보의 능력이 어떻게 놓여 있는가라는 물음에 지표를 제시하며, 발전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알려진 바이지만, <국부론>의 저자이자 동시에 <도덕감정론>의 저자인 아담 스미스는 도덕철학 교수였으며, 경제학의 두 축은 윤리학과 경제(공)학이다. 센은 거기서 잊혀지거나 간과되고 있는 윤리학의 전통을 경제학에서 다시 되살리고자 애쓰고 있는 것. 이를 테면 '아담 스미스 구하기'이다. 그리고 그게 '나라 구하기'이다, 경제기술자들아! 

9위는 역시나 도킨스의 경우처럼 나를 놀라게 했는데, 미국의 생물/지리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이다. 사실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지만 다이아몬드가 대중적인 인기만큼이나 지식인으로서 대우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흥미롭다. 다이아몬드에 대해서는 여러 번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군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요컨대, '다이아몬드의 모든 책'이며, 그의 최신간 <붕괴: 어떻게 한 나라가 망하는가>가 빠른 시일 안에 번역되기를 기대한다(*<문명의 붕괴>로 번역되었다). 

10위는 인도 출신의 소설가 살만 루시디. 문제작 <악마의 시>로 1989년 이란정부(호메이니)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더욱 유명해진 작가. 그런 연유로 노벨상을 타기는 힘들겠지만(이번에 터기 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는 파묵이 논란 끝에 수상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전해지지만), 아마도 루시디는 노벨상 수상작가보다 더 유명한 작가일 것이다(루시디의 문학에 대해서는 언젠가 박노자가 한 칼럼에서 비판적인 의견을 제기한바 있다). 그의 작품으론 <악마의 시>(문학세계사, 2001), <무어의 마지막 한숨>(문학세계사, 1996)가 번역돼 있고 <하룬과 이야기바다>(달리, 2005)도 올해 나왔다. 좀 오래된 번역으론 <한밤의 아이들>(하서출판사, 1989)과 <악마의 수치>(청림출판, 1989) 등이 있다(*이젠 '루슈디'로 소개되고 있다).  

 

05. 10. 18.

P.S. 이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17위, 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총재가 19위에 올라 있다고. 울포위츠를 선정 리스트에 올린 시사'잡지'들의 양식이 좀 의심스럽긴 하다(하긴 '은행' 눈치도 봐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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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버마스 이야기 (1)
    from to be immortal 2007-06-29 16:15 
    ...
  2. 하민혁의 생각
    from haawoo's me2DAY 2009-10-01 23:19 
    #하우R_ '세계의 지성' 톱10l로쟈의 저공비행 http://is.gd/3Qu5I 이 분, 보면 볼수록 정말 대단하다
 
 
주니다 2005-10-18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가 1등 먹었다는 소식을 접하니 얼마전 조선일보에서 봤었던 '책조차 안 읽는 한국의 보수들'이란 기막힌 칼럼이 떠오르는군요.
http://www.chosun.com/editorials/news/200510/200510100417.html
그나저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도 결코 만만한 책이 아니더군요. ㅠ.ㅠ
5장 '~사랑의 이데올로기'와 관련해서 좀 더 읽어줘야 할 책/논문이 있다면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딸기 2005-10-18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반적으로, 논쟁적인 스타일의 사람들-매스컴에 많이 등장해서 인지도가 높은 사람들이 뽑힐 수 밖에 없는 조사였습니다만, 몇몇 인물들은 저도 꽤 재미나게 책을 읽었던 사람들이기에 결과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습니다 ^^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경우는 그야말로 '논란'이 많지요. 저는 '키신저 재판'을 꽤 재미있게 읽었답니다(책 자체의 밀도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촘스키 책에도 히친스가 종종 언급되곤 했어요. 이라크전에 찬성했다는 얘기 듣고 저도 좀 의아해 했었습니다. 히친스는 영국 출신이긴 하지만 20년 넘게 미국에서 활동했으니, '미국 지식인'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겁니다. 히친스가 이라크전 지지선언, '나는 왜 좌파가 아닌가' 선언 등등을 내놨을 때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심지어 책 한권 달랑 읽은 저조차도 그 심정이 이해가 가더라니까요. :)

호랑녀 2005-10-1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 한 권, 아는 사람 세 명...ㅜㅜ
내가 얼마나 얕은지, 지성과는 얼마나 거리가 머~~~ㄴ 사람인지 알게 하누만요 ㅜㅜ

로쟈 2005-10-18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니다님/ 라캉의 성공식은 사실 굉장히 난해합니다. 조금 가닥을 잡으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아시겠지만,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란 책에 모아놓은 논문들이 수준높은 해제들입니다. 같이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마이어스의 요약보다 더 용이하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겠네요(핑크의 글 정도가 만만할 수 있지만).

딸기님 혹은 딸기우유님/ 히친스의 책을 읽어보셨군요.^^ 저겐 좀 생소한 이름이기에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는데, 네오콘들이 그렇듯이 히친스도 국제문제에 있어서는 '과도한' 책임감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하긴 '넘들'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지식인의 조건이긴 하죠. 좌파이건 우파이건.

호랑녀님/ 상당히 '대중적인' 리스트와 거리가 머시다면, '비대중적'(=귀족적)이신 거 아닌가요?..

yoonta 2005-10-19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르게--------->위르겐...
인식과 관심이 그렇게 오역투성이였군녀..어쩐지 죽어라고 안읽히더니만..-_-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도 안읽히는건 마찬가지..
리차드 도킨스나..제럿 다이아몬드등이 올라온건 좀 의외군요..생물학자들이 이렇게 인기가 많다니..상대적으로 호킹같은 물리학자가 없는것도 그렇고...

프랑스 지식인들이 한명도 안보이는것도..좀 그렇네요..뭐 유명한 분덜은 대부분 타계하긴 했지만..

비로그인 2005-10-19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촘스키가 푸코 등을 평한 글을 읽은 적이 있던데 촘스키는 거의 푸코 등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상식에 기대어서 그들을 격하시키고만 있던데..쩝. 그리고 도킨스의 그 무지막지한 과학주의도 토마스 쿤에게 공감하고 있는 저에게는 부담스럽더군요. 생명의 존엄이 단지 DNA의 연속성에 인한다는 논지에도 전혀 동의할 수 없고요.(그렇다면 "왜" DNA가 보존되어야 하는지? 더 나아가 그렇다면 우리는 DNA의 연속성이라는 유일의 가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지?)... 회슬레를 언급하셨던데 정말 회슬레가 "괴물 철학자"인가요? 인식론 상대주의의 윤리적 귀결을 비판하면서 독일 관념론의 부활을 외치던데, 그 당위성에는 공감하지만 그게 실제로 가능할지는 좀....흠.... 비트겐슈타인 이후로 철학은 끝났다고 믿고 있는지라....

주니다 2005-10-1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라캉의 성공식은 인내심을 갖고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번역상태가 어떤지요? 제 허리상태는 별로 안좋습니다만. 흐흐흐

2005-10-19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0-19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오타는 수정했습니다. 생물학자들의 부상은 의외이지만 당연한 현상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호킹의 경우는 물론 <시간의 역사> 같은 '대중적인' 책도 있지만, 아무래도 생물학보다는 접근하기 어렵지요.

구스님/ 가다머가 '회슬레'를 칭찬하면서 서양철학사의 보기 드문 천재라고 부른 적이 있지요(둘은 교양철학 방송 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한 적이 있고, 국내에도 방영된바 있습니다). <헤겔의 체계> 같은 대저를 20대에 툭툭 써놓는 걸로 보아 ('천재성' 여부는 제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괴물'로서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군요. '비트겐슈타인 이후'라는 '초기 비트겐슈타인'에 국한된 것 아닐까요? 비트겐슈타인 전공 철학자들이 아직도 많은 걸 보면, 엔드게임(Endgame)은 당분간 더 지속될 거 같습니다.

주니다님/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사놓고 아직 안 읽었지만 번역에 대해서 지적하는 의견은 아직 못 봤습니다. 그보다는 '허리상태'에 더 신경쓰심이.^^

이네파벨님/ 별로 간추리진 못했습니다(제가 좀 수다스럽죠). 퍼가시는 건 언제라도 무방합니다. 다만, 오타나 착오 같은 게 창피할 따름...

비로그인 2005-10-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슬레가 정말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임에는 동감하지만 과연 그의 철학적 시도가 성공할 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스럽네요.-------

스티븐 제이 굴드가 살아 있었다면 리처드 도킨스를 누를 수 있었을까요? 요즘은 정말 사회생물학의 인기가 치솟더군요. 다니엘 데넷 같은 철학자가 주목 받는 것도 그런 흐름에 서 있는 것 같고요.(물론 다니엘 데넷은 사회생물학의 주된 흐름에 비판적이지만요.)

로쟈 2005-10-1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넷은 <확장된 표현형> 개정판에 서문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도킨스와는 절친한 사이인 듯하고. 개인적으론 데넷의 다른 책들도 그렇지만 <다윈의 위험한 사상> 같은 책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게 유감입니다.

yoonta 2005-10-19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가 푸코를 어떻게 비판했는지는 모르겠는데..푸코와 촘스키는 '정치'를 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지요..비교적 전통적인 무정부주의에 기반한 촘스키의 정치는 주로 미디어에 대한 비판을 통해 대중들에게 '새로운 정치'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방식인 반면 푸코는 '이론적 개입'을 통한 새로운 정치를 추구한 사람이죠..때문에 촘스키가 푸코를 정말로 이해했느냐 안했느냐는 중요한것이 아니게 됩니다..촘스키가 푸코를 비판했다면 아마도 그런 입장에서 했을 것이고요..이론적 비판이 아니란 거죠..

딸기 2005-10-19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 글을 제 홈페이지에 퍼가도 될까요?

로쟈 2005-10-2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물론입니다. 근데, 오타나 다 수정됐는지 모르겠네요. 머리도 감을 걸 그랬나...

딸기 2005-10-2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으로 보니 상당히 미인이신데요 ^^

2005-10-21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5-10-25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런 말을 한다고 기분 좋아하실 것 같지 않은데... 흐흐.

니브리티 2005-10-2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로쟈님 미인이시죠..^^;;

로쟈 2005-10-25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그런 식의 반응들을 보이시면 '전환'할 수도 있습니다!?..

쿠자누스 2005-11-02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위에 올라온 '세계의 지성' 가운데 '하바마스'와 통화를 했었지요.
[그의 제자라는] "송두율 교수의 구속에 항의하는 탄원서를 한국정부에 보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라는 질문에 "그의 전화를 며칠 전 받았다. 탄원서 쓴 일 없고
쓸 생각도 없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참 비정하더군요.
코소보 전쟁 때는 이 침략 전쟁이 "정당하다"고 말해서 놀란 적이 있는데
여하튼 권력에 순종하는 기질이 보입니다.
이 사람 책애서 건질 게 무언지 참 궁금합니다.

쿠자누스 2005-10-3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위 바츨라프 하벨(체코)도 코소보 전쟁이 '인권 회복을 위한' 전쟁이라고
환호를 했으니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겠고

5위 크리스토퍼 히친스(영국)는 치밀한 고증을 통해서
키신저를 국제 전범재판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주목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문제만 걸리면 '돌아버리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아요.

911 테러를 네오콘의 Insider job이라는 분석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반 유태주의자들이라고 비방하니까요.

또 1위 촘스키는 911이 '미국의 중동 정책에 대한 저항'이라고 했으니
히친스와 비교하면 오십보 백보겠지요.

그 유명하다는 사상가 지식인들이 다 무언지 회의가 갑니다.

로쟈 2005-10-3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자누스님의 '회의'에 공감합니다. 제가 공감하지 않는 것은 '그 유명하다는 사상가 지식인들'에 대한 쿠자누스님의 (애초의)'기대'입니다(지금은 안 갖고 계시겠지만). 지식인들은 성인군자가 아니며 무오류적이지도 않습니다. 단지 대중보다 우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하여 남의 일에 간섭할 따름이며, 그러한 간섭이 간혹 여론을 환기시키고(호도할 때도 있지만) 사고를 자극할 뿐이겠지요(때로 사고를 치기도 합니다.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고). 영미 네티즌들이 뽑은 리스트와는 다른, 쿠자누스님의 대안적인 리스트를(가능하다면) 기대해봅니다...

yoonta 2005-11-0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가 911테러를 insider job이라고 하지 못하는데에는 저도 불만이 있습니다..그렇다라고 주장하지는 못할지라도..최소한 문제제기는 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촘스키처럼 명망있는 지식인이 911테러에 대한 음모론적 접근을 한다는건 지극히 조심스러워야 될 일인 것도 사실이지요..때문에 기존에 알려진 사실들..언론에 보도된 사실들만을 기초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나갈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그런 부분에서의 역할만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고 보는것 같고요..때문에 물론 911테러의 내부공모론 같은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내면 네오콘에 대한 결정적 타격이 될수있긴 하지만 테러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정보기관에 의해 통제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함부로 그것을 발설할수는 없겠죠..그것을 두고 촘스키의 한계라고 말하는 것도 문제인것 같습니다..유태인문제와 관련해서 촘스키는 같은 유태계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할정도로 급진적인 주장을 많이 해온 사람입니다..히친스와 같은 부류와는 분명 다르죠..

네오 2005-11-01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크루그먼은 지금 MIT가 아니라 프린스턴의 재직중입니다....

로쟈 2005-11-01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제가 참조한 건 알라딘의 저자 소개라서. 어쨌든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쿠자누스 2005-11-02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한 인간의 사상의 크기는 그가 떠맡은 고통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인류사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과두 권력의 유희(테러, 전쟁)에
휘말려 희생되는 먼 나라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 그 사람들이 어떤 발언을 하는지 유심히 살펴 봅니다.

저는 대안의 서양 현대 사상가로 라이프니츠
http://www.utm.edu/research/iep/l/leib-met.htm

쉴러
http://www.theatredatabase.com/18th_century/friedrich_schiller_001.html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영향을 받아 미국 독립전쟁을 성사시킨, 벤자민 프랭클린을 정점으로 삼은 유럽-미국 지식인 써클의 후세대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의, 보이지 않는 대영 제국의 보이지 않는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비법을 전수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지요.

쿠자누스 2005-11-0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 Insider job 이론은 세계 최고 수준의 독립 저널리스트들/자발적 사설 탐정들에 의해서 세계화하는 추세에 들어섰다고 봅니다. 인류 역사 이래, 인터넷 강국이라는 한국은 열외지만, 이만한 연구 공동체가 지구상에 존재한 일이 있었을까요 ? 인류의 미래가 걸린 일에 이름도 없는 수많은 지성인들이 발벗고 나서는 판에, 촘스키나 히친스가 딴 소리를 하는 게 너무나 한심했지요. 국제정치의 수많은 공식버전을 처참하도록 찢어놓는 그들의 무시무시한 내공이, 그날의 가상 현실앞에 맥을 못추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 촘스키의 문제는 그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의 인식 반경이 정말로 그 정도라면 그에게 불행이고 그런 게 아니라면 그를 신뢰했던 사람들의 불행이라 생각합니다.

yoonta 2005-11-02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11의 내부자공모론이 수많은 독립저널리스트 혹은 탐정들에 의해 제기되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저도 911사건 초기부터 내부공모쪽으로 의심했었죠. 국내에 간행된 몇권의 책들 그리고 웹에서 접한 글들을 읽어보고 그 심증을 굳히기도 했습니다. (타플리의 책은 아직 못봤네요) 독립저널리스트들중 일부 예컨데 이리유카바 최같은 분은 촘스키도 그가 이야기하는 그림자정부의 관련인물로 보기도 하죠..그런 관점에서는 촘스키조차도 911사건을 공모한 그룹의 일원으로 보일수도 있더군요..

그런데 이처럼 심증이 가기는 하지만 확증이 없는 상태에서 촘스키같은 분이 (그 역시 '내부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심증'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울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예를들어 케네디대통령 암살사건같은 경우 역시..수많은 음모론이 '세계화'되기는 했죠..그러나 그 결정적인 팩트를 알수없는 상황에서 그 가설들을 주장하는 것은 촘스키가 보기에는 뭔가 불충분해 보이고 그런 상태에서 그것을 문제제기하는 것은 대단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그런 점에서 올리버 스톤감독같은 분은 용기있는 분이죠) 저는 아직 촘스키가 911과 관련되어 어떤 언급을 했는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다만 그의 입장은 미국의 잘못된 중동정책이 테러를 불러왔다하는 점만 지적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쿠자누스님이 지적하신 insider job을 비록 촘스키가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저는 위와같은 정도만의 정치적 해석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봅니다..

'팩트'를 발굴해 내는 일은 아직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주어도 될것 같네요...좀더 시일이 지나 그 발굴된 '사실들'이 좀더 풍부해지고 그리고나서도 촘스키가 올리버 스톤감독같은 발언을 하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그의 '한계'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죠.

그러나 아직은 그런 평가를 하기에는 좀 이르다고 봅니다.

쿠자누스 2005-11-09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FACT를 발굴하는 것, 그것이 그의 직업 아닌가요 ?
insider job 이론가들의 Fact를 찾는 방법론, 문제제기 능력(http://peacemaking.co.kr/news_view.php?no=1348)을 촘스키 같은 석학이 보여주지 않는다는 게 좀 이상합니다. 그의 발언은 권력이 바라는 최대치의 발언이라 봅니다. 최근까지의 연구 성과를 보면, 911도 검사의 기소가 가능한 단계로 가는 듯 합니다. 문제는 미국 내부의 정치지형이겠지요. 케네디 암살 사건이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는 것도 거기 관련된 세력이 미국 권력의 한 축에 버티고 있기 때문인데 지금 체니/럼스펠드 주변 인물들이 기소되는 걸 보면 예측 못할 일이 벌어질 것 같기도 합니다. 성공한 쿠테타의 장본인들이 사형선고 받는 거, 불가능하다면 미국엔 미래가 없겠지요.

로쟈 2005-11-02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의 논쟁에 대해서는 '구경'만 하겠습니다. 한가지, "한 인간의 사상의 크기는 그가 떠맡은 고통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쿠자누스님의 말씀은 음미해볼 만하지만, '환원적'이라는 의구심도 갖게 됩니다. 말씀하신 고통은 자신의 고통인가요, 아니면 타인의 고통인가요? 고통의 주체, 혹은 인칭의 문제 자체가 굉장히 복잡한 것 같습니다. 더불어, 자신이 감당하는 고통을 다시 감당해야 하는 '언어'의 문제도 걸려 있습니다. 사상의 언어적 구성물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큰 고통은 자신의 고통을 언어로, 사상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 드러나는 것 아닐까요?

'먼 나라 사람들의 고통'(먼 나라!)에 대한 감수성은 치하할 만하지만, 그 고통에 끼여드는 게 아니라 거기에 대해 '발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요? 그 고통은 그 '발언'으로 감싸지고 구제되는 성격의 고통인가요?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어디까지 발언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런 물음들을 저로선 갖게 됩니다. 데리다의 얘기지만, 테러란 '죽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죽어가게 내버려두는 것'까지도 포괄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은 무한책임입니다. '테러/전쟁', '먼 나라' 등의 표현은 문제와 책임을 국지화시키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도 듭니다. 요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쿠자누스님의 고견을 앞으로도 경청하겠습니다...

yoonta 2005-11-0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는 그렇다고 치고..쿠자누스님께서 대안의 사상가로 추천하신 두 인물..라이프니츠와 쉴러는 어떤 점에서 추천하시는 건가요? 라이프니츠같은 경우..들뢰즈가 연구하기도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만..

혹시 헤르메스주의나 신비주의의 계보와 관련된 것이 이유는 아닌가요? 쿠자누스님의 닉네임에서도 왠지 그럴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하얀재 2005-11-0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자누스님은 말 곳곳에서 도덕원리주의자의 혐의를 풍깁니다. 송두율교수가 하버마스의 제자라지만 탄원서를 안 써주었고 또 써줄 생각도 없다는 그의 말에서 꼭 하버마스가 비정한 사람이라는 결론이(그것도 도덕적 결론이죠) 도출되지 않습니다.

또한 코소보 전쟁이 정당하다는 그의 주장에서 권력에 순종한다는 도덕적 판단을 이끌어내는 님의 말도 그러려니 합니다만 그 결기가 보기에 안타깝군요. 이하 제 시간이 아까워 생략합니다.

그리고 로쟈님의 '겸손'도 보기에 느끼하군요. 남의 감수성에 대해 '치하'하기에 앞서 먼저 님부터 표현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해주셨음 합니다. 어렵게 갈 거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을 돌리는 것은 결국엔 자기오만, 지적 거드름 없인 나오기 힘든 자세입니다.

로쟈 2005-11-02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변태님/ 제가 '겸손'하다는 얘기는 오랜만에 듣는군요(적어도 이 서재에서만큼은 그닥 겸손하게 행세하지 않았는지라). 그런데, 다른 대목에서라면 몰라도 제 댓글에서 ('겸손'에 가려진) '자기오만'과 '지적 거드름'을 알아보셨다는 건 놀랍습니다. 저는 님이 '도덕원리주의자'의 혐의가 풍긴다고 한 쿠자누스님의 견해에 대해 '환원적'(마찬가지로 모든 사안을 몇 가지 도덕적 원칙으로 환원하는 것이죠)이지 않은가라는 의구심을 제기했고, 사안은 생각보다 복잡한 듯하다는 의견을 보탰습니다. 어떤 표현이 부정확했는지(그래서 느끼했는지) '분명하게' 지적해주시면 좋겠습니다(어렵게 갈 거 없이요). 혹 시간이 나신다면...

yoonta 2005-11-02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변태님이 로쟈님을 아직 잘 모르시나봐요..^^

쿠자누스 2005-11-07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변태님: 비정하다는 느낌 뿐만이 아니었지요. 단순한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질문에 마치 무언가에 압박을 받는 듯한 긴장되고 톤이 높은 음성, 게다가 마지막엔 누구도 자기에게 탄원서를 부탁한 일이 없다는, 불필요한 얘기까지 덧붙이는 그에게서‚ 좀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제 느낌으론, 그가 송 교수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아서 그런 답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지요]

나토는 지난 90년대 10년 가까이 서구 매스컴과 공모하여 그들의 침략전쟁을 ‘인도주의적 개입’ ‘도덕적 ACTION’으로 위장하고 유고 연방을 산산 조각내고는 반식민지로 만들었지요. 하버마스는 나토의 여론 조작에 말려 들었으니 스스로 파산 선고를 한 셈이지요.

쿠자누스 2005-11-05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 쿠자누스는 Nikolaus von Kues 이름을 도용한 것이고요 신비주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라이프니츠, 쉴러 두 사람을 제가 꼽은 이유는, 우선 그들의 삶과 저작이 너무나 흥미롭고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는 반면에 현대에 들어와 거의 잊혀졌기 때문이지요. 두 사람 모두 병사했다고 전해지지만 대영제국이 암살했다는 게 저의 가설입니다.

쿠자누스 2005-11-03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보내 주신 질문, 제가 답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네요. 그 답을 구하는 데에 같이 생각해 볼 만한 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아래에 소개합니다. '세계의 지성인'이 되는 자격조건에 대한 해설입니다.


Such a person, guided by the humanist ideal. has the duty
to pursue his own self-development,
and to do his utmost to develop all his latent capacities
for the benefit of all mankind.

That also includes the development of his emotions
away from infantile egocentricism and
toward the true intercourse with human reason.

Such a person must no longer force himself to do
what reason decrees, but
his actions must come into harmony with his sense of joy.

The individual who passionately accomplishes
that which is necessary
has, as Schiller says, a beutiful soul.

로쟈 2005-11-03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통에 대한 감수성 하면 제게 바로 떠오르는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실러(쉴러) 또한 그는 직접 인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레비나스의 자기 윤리학의 거점을 마련한 것도 이 작품에 대한 (어린시절의)독서를 통해서였습니다. 제 생각에 쿠자누스님의 윤리학에 라이프니츠 이상으로 중요하며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윤리학에 대한 글을 쓰는 건 아주 오래된 숙제이기도 한데...(제가 워낙에 핑계가 많은 '학생'이라서...)

yoonta 2005-11-0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콜라우스 쿠자누스(Cusanus, Nicolaus) 이사람과 Nikolaus von Kues 이사람은 같은 사람 아닌가요? 쿠자누스가 Kues혹은 Cues출신이라서..Nikolaus von Kues 이렇게도 부르는걸로 아는데...어쨋든 제가 말씀드리는 분이 그분이라면..쿠자누스는 르네쌍스시대를 이끈 신비주의의 대가죠..신과 우주를 수와 비례로 설명하려고 하였고 신과 우주의 무한성을 주장하여 부정신학을 주창하기도 한 사람이죠..그러한 신비주의사상은 케플러나 뉴튼같은 과학자에게도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알고있습니다...더불어 르네쌍스에도 큰 영향을 주어..범신론으로도 해석되는 르네쌍스 자연주의와도 연결되는 인물이죠..결과적으로 라이프니츠나 스피노자에도 큰 영향을 주고요..특히 라이프니츠는 그의 단자론 철학에서 보여지는 신비주의의 영향을 쿠자누스에게서 받았다고 볼수도 있고요..쉴러는 잘 모르겠지만.. 쿠자누스나 라이프니츠 더불어 같은 독일지식인이고..괴테와 같이 르네쌍스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일종의 독일 신비주의 사상가들의 계보혹은 유사성 같은게 보인다는 점에서 여쭈어 본 것인데요...좀 다른 시각이신것 같군요..

대영제국에 의해 라이프니츠나 쉴러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는 첨 듣는 이야기네요..현대에 와서 쉴러나 라이프니츠가 잊혀진게 당시 대영제국의 의도때문이라고 보시는 것 같은데..그러한 라이프니츠와 쉴러를 암살해야만 했던 당시 대영제국의 음모?가 오늘날의 세계와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쿠자누스 2005-11-0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도스토예프스키도 쉴러를 읽었군요. 그의 윤리학도 흥미롭겠네요.

Yoonta님: 전 처음에 그 두 가지 이름에 많이 헷갈렸지요.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몰라서 더 공부해보아야 겠네요. 저는 그들을 플라톤 학파의 대표 주자로 봅니다. ‘대영 제국의 암살'이라는 가설의 근거로는....

1. 라이프니츠는 러시아 황제의 고문이기도 했고 말년에는 영국 왕실의 재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유럽 최고의 외교관이었는데 그의 장례식이 썰렁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가 영국 재상이 되는 걸 결사 반대하던 세력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닐까요? 그들이 바로, 미적분의 원조가 (돌팔이) 뉴튼이라 우기고 라이프니츠를 표절범으로 매도하는 사기극을 꾸몄지요. 유럽/러시아/중국의 문화 과학 교류, 유라시아 산업화를 추진한 그를 대영제국이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2. 쉴러는 영국의 제국경영전략을 꿰뚫어보고 미국 독립 전쟁에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기에 또 미국이 독립한 후에는 '유럽의 미국화'라는 음모를 꾸몄기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을 거라 봅니다. 쉴러의 사상을 음악으로 표현한 모차르트도 오스트리아에서 개혁파가 제거될 때 주검도 없이 사라졌지요. [영화/연극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를 '정치적 무뇌아'로 각색한 (대영제국의) 치졸한 엽기극이었구요.]

대영 제국은 지금도 지구 영토의 상당 부분과 금융, 에너지/지하자원 시장은 물론 의식산업까지 장악하고 있으니 그들의 촉수로부터 우리는 하루도 자유로울 날이 없을 겁니다.

로쟈 2005-11-04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자누스님식의 '음모론'이군요. 그러고 보니, 부시도 대영제국의 푸들인가요?

쿠자누스 2005-11-08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대통령 가운데 암살된 4 사람의 공통점은 '미국의 영국화/ 재식민화'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평양에서 출간된 어느 책에는 그들이 '인민을 배반'했기때문에 불행한 죽음을 자초했다고 써있더군요.] 부시 가족 3대는 친영파의 '원조'라고나 할까요. 부시 조부는 히틀러에게 흘러가는 월가의 비자금을 관리하던 일이 들통나 국가 반역죄로 옥살이를 했지요.

새들처럼 2005-11-0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이아몬드의 <붕괴>가 <문명의 붕괴>로 번역돼 나왔네요.

로쟈 2005-11-08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이미 몇자 적었습니다.^^

sayonara 2006-04-2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많이 읽을지언정 다양하게 읽지 못하는 제 자신이 초라하네요.
에코와 크루그먼에만 심취했었던 편협함이란... 한편으론 앞으로 읽을 책이 많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하고... ^_^

로쟈 2006-04-2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에 오랫만에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에코만 해도 워낙 박식하고 폭넓은 사람인지라 '편협함'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요. 에코를 다 따라 읽으면서 편협해지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sayonara 2006-04-27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엄청난 위로를... *^o^*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책을 대출하기 위해서 반납할 책을 고르다가 데이비드 호크스의 <이데올로기>(동문선, 2003)을 빼들었다. 예전에 한번 대출했다가 지젝에 관련된 절이 오역으로 범벅이 돼 있길래 반납하고 원본을 복사해두었던 책인데, 혹 앞부분은 낫지 않을까 싶어서 지난달에 다시 대출한 바 있다. 지젝에 관한 오역이 어느 정도냐면, 이미 2002년에 번역이 나온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혹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목적>으로 옮기는 식이다. 아직 번역/출간되진 않았지만, 헤겔, 셸링 등을 다룬 (도서출판b의 근간목록으론)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알라딘 제목으론 <부정태와 함께 체류하기>)를 <소극적으로 지체하기>로 옮기는 식이다. 역자가 헤겔 철학 등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를 다룬 장에서 난데없이 '디외르디 루카치'란 표기가 튀어나온다(역시나 사단은 루카치이다). "모스크바로부터 후퇴: 디외르디 루카치"(119쪽)란 절제목에서인데, 원서에는 "THE RETREAT FROM MOSCOW: GEORG LUKACS"로 돼 있음에도 말이다. 사실 'Georg'는 독일식 표기이며, 그가 헝가리 출신비평가이지만, 우리는 흔히 '게오르그(게오르크) 루카치'라고 불러왔다. 그게 말이 안되진 않는 것이 그가 자신의 주저들을 대부분 독어로 쓴 데다가 헤겔-마르크스 사상의 계승자로서 그의 정신적인 조국 또한 '독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헝가리어로 표기된 그의 이름은 'György Lukács'이며, 이 경우 '지외르지' 혹은 '죄르지'로 발음하는 걸로 안다. 이런 경우 나로선 '게오르그 루카치'나 '지외르지 루카치'나 모두 무방하다고 본다. 그가 헝가리인이기 때문에 '게오르그'라고 부르는 것은 '틀렸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인데, 그런 '티내기'는 폼나는 루카치 연구서를 내는 식의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헝가리에서 현실정치가로도 활동했던 루카치는 '지외르지 루카치'로 독일 문예비평가이자 미학이론가로서의 루카치는 '게오르그 루카치'로 불러주는 게 어떨까 싶다. 

하여간에 그런 정도가 내가 아는 상식인데, '디외르디'라는 건 어떻게 가능한 건지 모를 일이다(루카치의 이름을 러시아어로 옮길 경우 '연음d'로 표기하는데, 그 경우에도 발음은 '죄르지' 정도이다). 'Georg'를 굳이 '디외르디'라고 옮겼으므로 이 경우는 'Lukacs'를 '루칵스'라고 옮기는 것과는 사정이 좀 다르다. 여기에 개입돼 있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과도한 지식'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물론 어느 경우든 상식을 넘어선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역자의 과도한 지식은 '원주'에서 인용 도서명을 표기하는 데에서도 발휘된다. 가령, 니체의 <도덕의 계보>의 경우, 원서에는 영역본 'On the Genealogy of Morals'이 사용되고 있는데, 역자는 굳이 'Genealogie de Moral'이라고 독어 원서명을 병기해준다. 그리고는 '도덕 계통학'이라고 옮긴다. 물론 '계보(학)'을 '계통학'이라고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영역본 제목 대신에 원저명을 표기한 걸로 보아 '계통학'은 역자 나름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어쩌면 새로운 니체 연구서라도 나올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코믹하다.

푸코의 책 <사물의 질서: 인문과학의 고고학>의 경우에는 희한하게도 부제만을 불어로 표기했는데, 알다시피 <사물의 질서>는 영역본의 제목이고, 불어본의 원제가 <말과 사물>이다. 역자 나름의 원칙을 지키자면, 이 또한 불어본 제목으로 고쳐주었어야 했다. 물론 '원칙'이랄 것도 없는 것이 푸코의 영역본 제목들을 전부 불어로 병기해주면서 역자는 보드리야르를 비롯한 다른 저자들의 영역본 제목들은 그대로 놔두었다(아직 보드리야르는 못 읽으셨던 모양이다). 사정이 이러하면, 경의를 표해야 할 대상이 역자의 '노력'인지 '박식'인지 헷갈린다.

 

 

 

 

번역서들의 경우 책의 체제, 곧 제목이나 각주, 참고문헌 번역만을 둘러보더라도 그 수준을 어림짐직해볼 수 있다. 최근에 재번역돼 나온 마단 사럽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조형교육)의 경우도 그러한데, 증보판을 옮긴 이 책의 초판 번역본이 <데리다와 푸꼬,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인간사랑, 1991)이다. 제목에 '후기구조주의' 대신에 '데리다와 푸꼬'가 들어간 것은 제일 처음 나오는 '라캉'을 (임의로) 제외하고 번역했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바보 같은' 책을 무릅쓴 건 역자의 '과도한' 사명감이나 과시욕 때문인지 모를 일이지만, 아쉽게도 그걸 뒷받침할 만한 수준높은 번역은 못 되었다).

저자인 사럽은 <알기 쉬운 자끄 라깡>(백의, 1994)를 낸바 있는 나름대로 라캉 전문가이다. 그리고 그의 책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원제에는 '입문(Introduction)'이란 말이 들어가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지만,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적절한 입문서이다. 170쪽쯤 되던 초판에 30여 쪽을 덧붙여 증보판을 내면서 사럽은 프랑스 페미니스트들과 리오타르 등에 관한 장을 보강했다고 한다. 입문서로 개정증보판을 내는 걸 보면 영어권에서 그만큼 반응이 좋다는 얘기도 된다. 그런 사례로 내가 아는 건 리처드 커니의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 1997)인데, 여러 번 지적한 바 있지만, 이 조악한 국역본 대신에 원저 개정판에 대한 새 번역본이 빨리 나왔으면 싶다.   

거기까지는 좋다. 나는 서점에서 신간을 매만지며 잠시 지갑에도 손이 갔었는데, 웬걸 갑자기 '영혼'이 눈에 띈 것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영혼의 현상학>이라고 옮겨놓은 것. 영역본 'Phenomenology of Spirit'를 그렇게 옮긴 것인데, 'spirit'에 그런 뜻이 없는 건 아니므로 역자에게 분격할 일은 아니겠다. 하지만, 인문서를 번역하면서 '정신현상학'이란 책 제목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 좀 심하게 딱한 일이다. 혹 역자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대개 우리는 저마다 쓸데없는 신념들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그 신념이 대다수 헤겔 전공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한 것인지는 지극히 의문스럽다. 게다가 마르크스-루카치의 용어 '사물화(reification)'를 '구체화'로 옮긴 걸 보면, 사정은 '오만'보다는 '무지'쪽이다.  

 

 

 

 

이미 지난번에도 주장한 바 있지만, 이런 사소한 실수들로 굳이 애써서 창피를 당할 일은 무어란 말인가? 조금만 주의하면 되고, 조그만 상식을 존중하면 될 일 아닌가? 들뢰즈와 관련한 책들에 요즘 붙드려 있다가 보니 두해 전에 사둔 <들뢰즈 철학과 영미문학 읽기>(동인, 2003)도 들추게 됐는데, "들뢰즈를 통해 나는 어떻게 영미문학을 다시 좋아하게 되었는가?"란 서론을 띄엄띄엄 읽으면서 나는 영미문학자들이 싫어졌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를 '피에르 클로소위스키'라고 새로운 위스키(?)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어색한데, 두어 페이지 넘기면 '크로소위스키'로 진화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다시 '클로소브스키'로도 돌아오는바, 도대체 '다중-필자'가 이 서론을 쓴 것인지 아니면 '분열증자'가 쓴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영미문학의 우수성'에 대해서(국역본 <디알로그>의 제2장은 '영미문학의 탁월함에 대하여'이다) 예찬하는 들뢰즈에 잔뜩 고무되어 있다고는 쳐도 같은 책에서 표기의 일관성 같은 기본적인 건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또, '마조히즘'이란 말을 낳은 오스트리아의 작가 '자허 마조흐(Sacher-Masoch)'는 왜 '사커 마조크'로 계속 표기되는 것일까? 그리고 영국식 경험론(empiricism)에 짝이 되는 '이성주의(rationailsm)'는 관례에 따라 '합리론'이라고 표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표기상의 '문제들'이 내용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다음의 인용문은 보여준다. 들뢰즈에게서 흄의 철학이 갖는 의의를 설명하는 대목인데, 필자는 <경험론과 주체성> 영역본 역자의 해설을 이렇게 요약/인용하고 있다(바운다스는 <의미의 논리>의 영역자이기도 한데, 최근에 나온 <들뢰즈 맑스주의>의 추천사를 쓰고 있기도 하다. 역자에 따르면, 그의 아내가 한국 여성이라고):

"<경험주의와 주체성>의 영어 번역판 서문에서 콘스탄틴 바운다스는 들뢰즈가 흄의 경험주의 철학을 통해 모든 종류의 초월철학에 대항하였고, 흄의 차이의 경험주의적 원리, 즉 모든 관계의 외재성 이론을 통해 소수자 담론을 구성해으며, 병렬적 나열물의 문제틀을 수립하였고, 초월의 장에 바로 주체적인 동격자들을 부여하는 모든 이론들의 미해결의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입론하는 오류에 반대했다고 말한다." 이 정도면 들뢰즈보다 읽기 어려운 난해한 문장이다(참고로, '주체적인 동격자'란 'subjective coordinates'의 번역인데, 내 생각에 그건 '주체가 형성되는 좌표(계)' 정도의 뜻이다).    

책에 실린 모든 논문들이 다 정신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서론만큼은 정신없다. '꼼꼼함'이란 학자로서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다. 그건 들뢰즈적인 다양체의 논리, 리좀의 논리, 도주/탈주의 논리를 따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꼼꼼함'의 시작은 고유명사의 표기부터 정확하고 일관되게 해주는 것이다. 그건 책이 신뢰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05. 10. 11. 

 

 

 

 

P.S. '루칵스'란 표기로 애초에 이런 글을 쓰게 만든 역자의 또다른 책 <들루즈건축>(접힘과펼침)을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도서관에 책이 들어왔을 때 대출예약을 해둔 것인데, 그간에 장기대출중이었다. 짐작에 별로 기대할 게 없는 책이지만, '들뢰즈와 건축철학'이란 주제에 관해서는 어떤 얘기들이 오고가는지 잠시 귀동냥이라도 해보기 위해서 빌려온 것인데, 예상대로 도로 반납할 책이다(그냥 원서를 읽는 게 빠르겠다).

한번 지적한 적이 있는데, 저자 '라흐망(Rajchman)'은 '라이크만'이라고 표기하는 게 옳다(르페브르님이 직접 저자에게 확인한 것이다). 책의 서문은 (역시나 르페브르님이 번역한 바 있는)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썼는데, 이 번역서에선 '파울 비리리오'로 표기돼 있다(후주에서는 또 '비릴리오'). 라캉의 스승인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끌레랭부(Clerambault)'의 바른 표기는 '클레랑보'이다. '헤르메스' 연작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미셸 세르(Michel Serres)'를 '미셸 세리스'로 표기한 걸로 보아 역자는 프랑스어나 철학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하다 못해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도 '르 코르부지에'로 표기했는데, '건축철학계'에선 둘다 쓰이는 것인지? '뒤샹(M. Duchamp)'은 어인 일로 '듀상'이라 읽으며, '베르그송(베르그손)'은 어쩌다 '베르크송'이 되는지? 프랑스 시인 '랭보(Rimbaud)'를 '링부'로 읽고, 독일 철학자 '프레게(Frege)'를 '프레헤'로 읽으며, 미국 철학자 '퍼트남(H. Putman)'을 '푸트남'으로 읽게 되면, 역자와 공유할 수 있는 '상식'이 무엇인지 알길이 없다.

요컨대, 책은 '비커뮤니케이션'을 온전하게 실행하고 있는, 그래서 들뢰즈가 경탄해 할 만한 '예술작품'이다. 아티스틱한 형태 외에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않으므로. 그러니 시작부터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거스르는 직조기의 북의 속도가 흐르는 시간의 속도를 시사하듯 존 라흐망은 새로운 철학자다."(8쪽)라는 문장이 무슨 뜻인가를 묻는 일은 부질없다. 이건 '새로운 종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릴리오 서문의 마지막 문장 "Such are the unanswered questions that press urgently upon us."(9쪽, 이 번역서엔 원서의 쪽수도 병기돼 있다!)이 "이미 해결된 물음은 우리를 향해 화살을 돌리고 있다"라고 전혀 엉뚱하게 번역돼 있다 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 일이다. 잘못은 세상을 만만하게 본 우리에게 있을 뿐이다.

역자는 책의 발행인이기도 한데, 대학원 시절 "라흐망의 현대 건축에의 들루즈 철학 응용"에 필을 받아서 "이 책이 우리말로 옮겨져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다리다 지쳐 직접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잘못은 제때 책을 번역하지 않은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이내 후회하였"다고 한다(책이 '끝내' 나온 걸 보면 후회가 부족했던 모양). "매끄럽지 못한 옮김과 오역의 가능성에 평생 느끼게 될 죄책감을 생각하면 식은 땀이 흐릅니다"라고 역자답지 않게 써놓았는데, 이 무슨 자학인 것일까? 애초에 문제는 그의 소견이었던 듯하다. "오역과 곡해가 난무할지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저의 소견"이라고 밝혀놓았는데, '오역과 곡해가 난무'하고 있으니 소원은 성취한 셈이겠다. 그러나 충고하자면, '이런 번역은 없는 게 낫다'. 

우리사회에 건축학 전공자가 기여할 분야는 많으며 따로 식은 땀을 흘리면서까지 '건축이론계'를 염려하실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이 책은 들루즈적 건축 담론의 시발로서 우리 건축이론계에 조금이나마 논의의 원인제공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입니다."라는 역자의 '바램'은 역자만의 것으로 되돌려줌이 맞겠다. 그나마 역자나 독자 모두에게 다행인 것은 지난 11월에 나온 책이 벌써 절판된 것. 때로 '없는 책들'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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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브리티 2005-10-1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서문에 굳이 아내가 한국여성이라고 따위의 시덥잖은 얘기를 왜 쓰는지 모르겠네요. 옛날에 대학 다닐 때 한 교수가 한국근대사를 강의했는데, 한 학기 내내 '이양선'과 이양선에 탄 선원의 족보--선원 제임스는 어디에서 살았는데, 아내는 누구고 무슨 일을 했으며 따위--만 강의하다 종쳤던 적이 있습니다...--;;

로쟈 2005-10-1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하게 옮기면, "한국어판을 위해 특별히 추천의 글을 써준 콘스탄틴 바운다스와 그의 한국인 아내, 그리고 스티브 라이트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들뢰즈 맑스주의>, 30쪽)입니다. 제 생각엔 역자가 바운다스 부부와 안면이 있는 듯하고, 사적인 고마움이야 표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니브리티 2005-10-11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확하게 옮기는 게 중요하죠..^^;; 기왕 말난 김에 창비의 원어에 가까운 인명/지명 표기의 원칙 때문에 가끔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봤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로쟈님의 견해는 기왕에 불리던 이름들(비록 잘못 불려진 것이라 해도)에 지나치게 큰 잘못이 없는 한 그대로 가자...인 것 같은데요. 저야 로쟈님의 견해를 존중하지만..--;;

로쟈 2005-10-1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비의 표기'원칙'에 대해선 불편해 하는 쪽입니다(물론 그것도 나름의 '체계'이긴 하죠). '원음'주의라는 건 요컨대,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이니깐요. 거기서 원음주의란 건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비민주적'입니다. 소위 '현지인'이나 '전문가'만 알 수 있기 때문에(언제부턴가 백낙청 교수의 전공인 '로렌스'가 '로런스'로 바뀌어 있더군요). 게다가 외국어 표기는 외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인을 위한 것입니다(흔히 그렇게 발음하면 외국인이(!) 못알아듣는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게 걱정할 일이라면 세상은 파라다이스죠. 우리끼리 알아먹으면 됩니다).

제 의견은, 언어마나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철자 표기를 원칙으로 하되 발음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나마 다수의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체계입니다. 가령, 러시아어 표기의 경우, 경음체계(똘스또이), 격음체계(톨스토이) 두 가지가 상용되는데(일관성만 지켜주면 됩니다), '똘스또이'라고 해야 러시아인들이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입니다(정말로 못 알아 듣습니다. 강세가 '또'에 있기 때문에 '딸스또이'라고 해야 합니다). 문제는 남들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