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위는 절대 무순

11. 베르세르크 -  미우라 켄타로

 

 

   대단히 염세적이며, 끝내주게 화끈한 작품이다. 시대 배경은 가공의 중세 유럽의 왕국이다. 악마들의 표적이 된 가츠는 시시각각 자신을 조여오는 악마들과 생존을 위한 처절한 대결을 펼친다. 작품의 압권은 가츠가 왜 악마들의 표적이 되는지 보여주는 가츠의 지난 이야기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고아였던 소년 가츠는 역시 고아로 이루어진 용병 집단 '매의 단'에 합류하여 단장 그리피스와 우정을 쌓고, 여성 단원 캐스커와 사랑을 나눈다. 눈부시게 비상하던 흰 매 그리피스가 타락한 귀족에 의해  어떻게 몰락하는지, 캐스커와 가츠의 사랑이 어떻게 부서지는지 작품은 충격적으로 묘사한다.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와 더불어 중세인들을 미혹에 빠트렸던 광적인 종교에 대한 비판도 더한다. 거대한 칼을 든 가츠의 액션은 박력 그 자체이다. 중세풍의 그로테스크한 암울함이 작품의 맛을 더하는 걸작이다...

 

 

12. 용 -  무라카미 모토카

 

   흔치 않은 역사를 배경으로 한 대하 드라마이다. 시대 배경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1930-40년대의 아시아이다. 오시코지 재벌가의 도련님 오시코지 류는 기생 코스즈를 사랑한다. 하지만 코스즈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류의 곁을 떠나 그의 숙부에게 시집을 가 버린다. 절망한 류를 보듬어 주는 존재는 오시코지 가의 하녀 타쯔루 테이이다. 훗날 테이는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영화 배우로 대성공을 거두고 감독까지 된다. 한편 전 아시아를 휩쓰는 전쟁의 여파로 류는 중국으로 건너가고,  아시아 평화를 위해 그 나름의 모험을 하게 된다.

요즘 작품 분량(권수)을 늘리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듯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좋다. 격동의 시대였던 1930년대의 아시아(조선인도 비중있게 나옴.)를 배경으로 주인공들의 만남과 이별이 눈물겹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의 실제 인물들도 비중있게 나오며 제 2차 대전에 대해 일본 작가답지 않게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특히 타쯔루 테이가 영화 배우로 성공하는 부분은 아주 세심하게 묘사되었고 흥미진진하다.

 

 

13. 러프 - 아다치 미츠루

 

  스포츠물과 연애물의 거장인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이다. 이번엔 수영이다. 집안의 원수(라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님^^;;)인 두 남녀 고등학생이 티격태격하다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 스포츠 만화이다. 물론 아다치 미츠루의 전매 특허인 삼각 관계도 여전해 잘생긴 수영 천재 남자 대학생이 둘 사이에 끼어들기도 한다. 아다치 미츠루 만화의 특징인 곱씹을수록 맛이 나는 대사와 쿨한 등장 인물들, 특유의 재치와 유머들이 살아 있다. 물론 수영 시합의 박진감 또한 잘 살리고 있다. 제목 '러프'답게 다듬어지지 않은 청춘들이 점차 완성되어 가는 모습이 멋지다. 10년도 전에 읽었던 작품이지만 두 주인공의 상큼한 연애질이 아직도 새롭다. 마무리가 기가 막히는 작품이다...

 

 

14. 출동 119 구조대 - 소다 마사히토

 

  젊고 열정적인 소방관 다이고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일본 만화를 보면 참 놀라운 게 소재가 정말 다양하다. 소방관 만화를 그릴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하지만 소방관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그도 그럴 것이 늘 화재 현장의 위험에 노출되는 강렬한 드라마가 있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돕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다이고는 정말 열정으로 뭉친 청년이다. 거의 사고가 나지 않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최고의 소방관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열혈 청년 다이고는 너무 멋지다. 아다치 미츠루의 쿨한 캐릭터들이 요즘은 인기라지만 역시 남자는 피끓는 열혈 아닌가!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을 열렬히 사랑하며, 화재 현장에 목숨을 거는 열혈 다이고는 멋지다. 특히 특별 소방 부대(특구)에 들어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장면은 남자의 굵은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15. 천재 유교수의 생활 - 야마시타 카즈미

 

 
  장르를 구분하기 힘든 작품이다. 그럼에도 묘한 감동과 재미가 있다. 제목은 우리 나라에서 멋대로 붙인 듯 한데, 경제학 교수 유택이 천재는 아닌 듯 하다. 괴짜라고는 할 수 있겠다. 유택 교수는 최대한 경제적인 삶을 살기 위해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같은 위치에서, 같은 발걸음으로 걷는다. 그의 관심사는 언제나 두 가지에 쏠려 있다. 경제 원리와 인간...유교수는 자신의 가족들을 끊임없이 연구, 관찰하며 인간에 대해 탐구한다. 때때로  패전으로 피폐한 1950년대, 젊은 시절의 유택이 등장하기도 한다. 유교수의 인간 탐구 결과를 담담히 기술하는 듯한 작품으로 극적인 사건과 재미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큰 울림과 감동이 있는 작품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위치를 걷는 유택은 연구를 위해 며칠 방향을 바꾼다. 다시 원래 방향으로 돌아간 첫 날, 웬 할머니가 나와 있다.

'늘 같은 시간에 들리던 구두 소리가 들리지 않아 걱정되서 나와 봤다고...' 삭막한 도시 생활에 윤기를 주는 장면이 아닌가...이 작품에는 이런 감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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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10-25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이 처음에는 잘 나가더니만, 요즘은 조금 핀트가 어긋난 듯한 느낌이 들어요..^^
<베르세르크>는... 쫌 빨리 나왔으면~

jedai2000 2005-10-2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업한지 9개월 됐는데, 지금껏 만화책을 단 한권도 못 봤다면 믿으시겠어요? T.T
<용>도 <베르세르크>도 본 지 한참 됐군요...흑흑
 
불야성
하세 세이슈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요즘은 저희 출판사에서 작업중인 책들을 읽느라 정신이 없지만 집에 와서는 개인적으로 쌓아놓은 책들을 보려고 정신없습니다. 한 80여권 되는 거 같습니다. 어제 읽은 책이 바로 <불야성>입니다. 자정에 시작해 새벽 2시까지 미친듯이 읽어내려갔지요. 더 읽으면 출근에 지장있는데, 머리 속에서는 정지 신호를 계속 보냈지만 멈출 수가 없더군요. 결국 오늘 지하철, 버스를 타고 움직이면서 다 읽었습니다.



제목인 <불야성>은 중국집틱하기도 하고, 룸살롱틱하기도 하네요..ㅋㅋ
사실은 환락의 불로 타오르는 도쿄 가부키쵸를 상징합니다. 주인공은 대만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혼혈아 류젠이(다카하시 겐이치)...



이 사람은 장물 취급을 하는 장물아비(세상에 좋은 아비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장물아비를...함진아비도 있고, 싸울아비도 있는데 말예여..-_-;)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음란한 어머니가 가출하자 거의 고아나 다름없이 되버린 그는 가부키쵸의 대만계 대부 양왜이안의 원조를  받으며 성장하지만, 대만 사회에 편입할 수 있는 상징인 대만어를 배울 기회는 갖지 못합니다.



이 양왜이안이라는 노인은 철저하게 상대를 이용해 먹는 인물로 협잡과 술책의 대가입니다. 그에게 정통 대만 핏줄이 아닌 류젠이는 이용의 대상이지 가족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몰랐던 류젠이는 어릴 때, 양왜이안의 눈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결국 버림받고 맙니다. 고독한 하이에나가 되버린 그는 지옥같은 가부키쵸에서 단지 살아 남기 위해 남을 등쳐먹고, 속이는 위악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류젠이에게는 그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짐덩어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우휴춘...역시 혼혈아인 그는, 고등학교 때 자신을 혼혈아라고 깔보던 학생을 의자로 때려죽인 다혈질의 인간 쓰레기입니다. 류젠이의 보디 가드 노릇을 하던 그는 가부키쵸를 지배하고 있는 상하이 이민자 보스, 유엔천쿠이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자를 살해하고 도피합니다. 어느 날 우휴춘이 다시 돌아오고, 류젠이는 유엔천쿠이의 호출을 받습니다.
"3일안에 그를 데려오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



청천벽력같은 말에 오한이 솓는데, 그에게 위기는 계속 다가옵니다. 유엔천쿠이를 제거하고 싶어하는 북경쪽 보스 쯔이후도 류젠이를 협박합니다. 이 쯔이후는 잔인하기가 아이도 서슴없이 죽일 정도입니다. 가부키쵸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3개의 최대 계파의 보스들인 양왜이안과 유엔천쿠이와 쯔이후에게 모두 표적이 되어버린 그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럴 때 울려퍼지는 우휴춘의 애인이라는 여자의 다급한 전화...



저는 이 애인이 우휴춘을 살려달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도 걸작입니다. 우휴춘이 도박장에서 강탈한 돈을 들고 튄 그녀, 샤오리엔은 우휴춘을 팔테니, 그를 죽여달라고 부탁합니다. -_-;; 도대체 착한 사람, 정상적인 사람은 안나오는 책인가요?



네...안나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 인물들은 가부키쵸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짓과 폭력, 돈과 술책으로 상대를 제거하는데만 눈알이 벌개진 인간 군상들입니다. 주인공이라는 류젠이는 19살때 두 사람을 죽이며, 한 남자를 강간했습니다. 등장하는 살인 청부 업자는 <레옹>처럼 인본주의적이지 않습니다. 칼로 살점을 저미며 흥분하는 변태입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대만계 갱의 총보스는 배신자의 자식을, 배신자의 손으로 죽이게 한 다음 인육을 먹였다는 인물입니다.



이런 인간 백정들같은 야수들 속에서, 혼혈아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혈혈단신이 되버린 류젠이가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이 책의 주된 줄거리입니다.  혼혈아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작가는 류젠이의 입을 통해 차별받는 일본내 혼혈아의 비참한 처지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대만계로부터, 중국계로부터, 일본계로부터 모두 배척받는 류젠이는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는 거죠...



고독한 하이에나 류젠이는 압도적인 적들의 폭력에 대항해 순전히 머리(라기보다는 잔머리)와 계략으로 상대해 나갑니다. 친구도 자신을 형처럼 따르는 동생도,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한 여인도 때에 따라서는 거침없이 배반합니다. 도저히 정이 가는 인물은 아니지만, 차별받고, 천대받고 개처럼 헐떡이며 살아온 그의 지난 날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단 3일동안 펼쳐지는 이야기는 에너지로 가득차 폭발할 듯 합니다. 3일이라는 데드라인이 주는 긴장감과 총격전의 넘치는 박력, 치밀한 암투가 주는 짜릿한 쾌감 등이 정신없이 섞여 돌아가는 불꽃같은 작품입니다. 앞에서는 불처럼 뜨거운 열기가, 뒤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가 드는 그런 정서적인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잔인하고, 섹스 장면으로 도배된 책이지만 싸구려 소설은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의 정글, 가부키쵸의 생태학에 관한 보고서로 보셔야 할 책입니다. 일단 재미면에서는 확실하지만,  지나치게 '쏀' 장면들에 대해서는 조금은 호불호가 갈릴 책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인 하세 세이슈는 홍콩 배우 주성치를 좋아해 주성치의 이름을 거꾸로 써서 일본식으로 읽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주성치식의 쌈마이 정서가 아주 생활화된 사람인가 봅니다..ㅋㅋ 이 책의 속편 <진혼가>도 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 보기는 힘들겠죠..-_-;; 일본 하드보일드 계의 거장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역시 일본은 사회파, 하드보일드가 여전히 추리 소설계를 이끌어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개인적으로 받습니다...



책 상태는 조금 엉망입니다. 오, 탈자도 많고요. 번역은 큰 불편없이 볼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 역주나 고유명사등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 불친절한 책입니다. 아마 번역자가 1차 번역을 끝낸 초교 상태에서 바로 출간된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전문적인(?)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ㅋㅋ)



예를 들어 '리우만'이라는 말과 '후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설명은 커녕 괄호치고 한자로 넣어 주지도 않았습니다. 참고로 '리우만'은 유민- 떠돌아 다니는 사람(대충 이민자로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후젠'은 복건성 사람을 말한답니다.



현대 일본 하드 보일드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박진감 넘치는 책이었습니다. 비슷한 대만 출신 킬러가 나오는 오사와 아리마사의 <독원숭이>가 킬러 독원숭이의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능력을 강조하는 액션 오락물이라면 이 작품은 그보다는 조금 더 리얼하고, 조금 더 숨막힙니다. (<독원숭이>도 대단한 작품입니다.) 독자의 예측을 완벽하게 빗나가는 전개와 충격적인 마무리로 인해 여운도 길게 남습니다.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p.s/ 금성무가 류젠이 역을 맡아 영화화되기도 했답니다.



p.s2/ 류젠이가 좋아하는 노래로 쯔이젠의 '이유스요우'라는 곡이 나오는데, 조선적 출신 록커 최건의 '일무소유'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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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0-2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봐야 하는데 에고 ㅠ.ㅠ

jedai2000 2005-10-25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보세요. 그야말로 죽여주는 작품입니다.
 
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3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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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의 섬>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2003년 영화 <미스틱 리버>의 동명 원작 소설로 유명한 데니스 루헤인의 신작이다. 498페이지의 꽤 두꺼운 분량을 자랑하는 책으로, <식스 센스>에 필적한다는 그 놀랍다는 반전으로 화제가 되었던 책이다.

 

그런데 본인은 운이 없어서일까? 우연한 기회에 반전을 듣고 말았다. T.T 그래서 자연히 책에 대한 관심이 시들어져갔고, 이 책이 작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굴 때에도 그저 방관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올해 생일 선물로 이 책을 받았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집었다가 진지한 마음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게 됐다.

 

제목인 <살인자들의 섬>과는 무관하게 영어 원제는 이다. 셔터라고 여닫는 셔터는 아니고 그냥 섬 이름이 셔터 섬이다. 몇 년 전에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영화가 나왔었다. 최근엔 <마파도>라는 섬이 화제고...본인도 섬을 좋아해 안면도,대부도,월미도,송도(-_-;;)등 갖은 섬을 다녀봤지만 셔터 섬만큼은 가고 싶지 않다... 

 

1954년, 셔터 섬에는 살인을 저지른 정신병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정신 병원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한 여자는 자신의 아들, 딸을 익사시킨 후 그들을 다시 꺼내 식탁에 앉혀 놓고 아침 식사를 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환자들이 모여 있는 셔터 섬에 두 남자가 들어온다.

 

연방 보안관 테디 대니얼스와 척 아울이 그들인데, 셔터 섬에 수용되어 있던 여자 환자 한 명이 도망쳤다는 제보가 들어와 수사를 나온 것이다. 두 사람이 조사해 보니, 그녀는 20명도 넘는 사람에게서 도처에 감시를 받아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투명약이라도 바르지 않고서야...

다만 불가사의하게 실종된 그녀는 <4의 법칙>이라는 기묘한 암호를 남겼을 뿐이다.

 

한편, 테디 대니얼스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셔터 섬에 수감된 정신병자 앤드류 레이디스를 찾아내 죽이려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테디의 수색은 셔터 섬에 갑작스레 찾아온 폭풍으로 정신병자들이 몇 명 탈출해 혼란을 일으키면서 난항에 빠진다. 그 뿐이 아니다.  

 

병자와 간수, 의사, 간호사 할 것 없이 셔터 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며, 알 수 없는 말들을 뇌까린다. 테디는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심지어 파트너마저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과연 셔터 섬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대강의 줄거리였다. 얼핏 봐도 대단히 흥미로운 얼개를 가지고 있다. 작가인 데니스 루헤인은 이 흥미로운 이야기에 폭풍우치는 셔터 섬이라는 흥미로운 배경, 주인공 테디의 심리 묘사나 대화 등에서 보여지는 뛰어난 문장력을 비벼 넣었다.

 

빛나는 보석같은 작품이다. 긴 페이지 내내 독자의 시선을 단연 제압하며, 책을 읽는 외의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데니스 루헤인에게서 제임스 엘로이(,<블랙 다알리아>)같은 거장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작가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애너그램(알파벳 철자를 바꿔치는 장난이랄까..)을 이용한 트릭(?)도 흥미로웠고, 이미 알고 봤지만 반전이 밝혀지는 장면의 긴장감은 폭발할 듯 했다. 다만 반전은 생각보다는 눈치채기 쉬운 것으로 보인다. 요즘 이런 식의 반전을 이용하는 영화, 소설 등이 너무 많이 나와 독자들이 머리를 조금만 굴려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깜짝 놀래키는, 뒤통수치는 반전이 아니다. 주인공이 느껴야 했던 절절한 고독과 상처, 기억들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후벼 판다. 주인공의 고통에 깊게 감정 이입을 해야 할 것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절망, 슬픔, 회한, 연민 등의 진실한 인간의 감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발견의 경험은 고통스럽겠지만, 한번쯤은 해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재미있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책을 찾는 독자라면 주저말고 집어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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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5-10-2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몇년간 읽은 추리소설중 최고로 치는 작품입니다. ^^
근데 리뷰가 '쏟아'지는 군요.

jedai2000 2005-10-2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작품이죠. 이 작가의 작품이 더 나온다네요. 그간 써놨던 걸 모아놓고 있지요. 2차 업뎃이 있을 예정인데, 근데 사진이 다 짤리는군요. 한가할 때 사진 전부 복구하겠습니다.
 
사라진 이틀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 들녘 / 200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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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어린이날 하루만에 다 읽은 책입니다. 모처럼 쉬는 날이지만 애인이 없다보니 놀데,갈데도 없고, 집에서 책이나 읽는 게 낙이지요. 그렇게 흘러가는 거 아니겠습니까...그러다 보면 낙엽지고, 눈내리고, 크리스마스 오고, 한 살 더 먹는 거 아니겠습니까...-_-;;; 갑자기 슬퍼지네요...

<사라진 이틀>을 쓴 작가는 요코야마 히데오라는 1958년생 작가입니다. 이 작품으로 2003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1위를 했다고 합니다. 일본 추리 문학에 정통한 주변분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작품은 주로 본격에 강세가 있다고 합니다. <사라진 이틀>같은 휴머니즘+사회파 작풍은 오히려 흔치 않다고 합니다. 그의 본격 작품이 번역됐으면 좋겠네요...

이 작품은 가지 소이치로라는 기품있고, 선한 눈을 가진 경찰 교관이 자기 아내를 목줄라 죽이면서 시작합니다. 가지의 아내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었지요. 치매 때문에 두 사람 아들의 기일을 잊은 아내는 절규하며 아들을 기억하고 있을 때 죽여달라고 외칩니다. 가지는 어쩔 수 없이 아내를 죽인 거지요.

여기까지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지만 작품의 진짜 재미가 곧 시작됩니다. 가지는 아내를 죽인 죄책감으로 자살을 하고 싶어하는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꼭 1년 뒤에 자살을 하겠다는 거죠. 왜 1년 뒤에만 자살을 할수 있을까?  호기심이 팍팍 생기지 않습니까? ^^;;

원제인  '한오치'란 말은 수사 용어로 범인이 사건의 일부만 자백하는 걸 말한답니다.  아내를 죽인 사실은 숨김없이 말하지만, 사건의 일부에 대해서와 1년뒤에만 자살을 할 수 있다는 이유를 숨기는 가지의 증언이 바로 '한오치'인 것입니다.

작품은 6명의 화자가 번갈아가며 이끌어갑니다. 가지를 최초로 심문한 심문관 시키(당구장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이름입니다..-_-;;), 가지를 기소한 검사, 가지를 취재한 기자, 가지를 판결한 판사, 가지를 변호한 변호사, 형무소에 수감된 가지를 감시하는 교도관이 그들입니다.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가지의 비밀을 파헤치려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 모두는 불가사의한 가지의 기품의 포로가 됩니다.

무엇보다 현직 경찰(가지)이 아내를 목잘라 죽인 사건을 맞아 벌어지는 초반부 검찰청과 경찰청의 암투가 박진감 넘치며 볼만합니다.

또한 화자  6명은 모두 50대를 넘기거나, 50대를 향해가는 중년을 넘긴 노년으로 접어드는 연령대입니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가 멀지 않은 그들이 느끼는 비감(가족으로부터의 소외감, 일만 알고 살아왔지만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잃어버린 젊음 등)이 작품 전면에 애잔하게 물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가지의 비밀이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이겠지요. 이 부분에서 독자들의 호오가 극명하게 갈릴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그 비밀이 간직하고 있는 스케일이 작거든요. 분명히 감동적이고, 슬프긴 한데 한편으로는 '뭐야! 이거였어..'하는 느낌도 듭니다. 신파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고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던 애잔한 정서를 클라이맥스에서 눈물로 확 터트려버릴 수 있게 만드는 좋은 엔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솔직히 조금 울었거든요. 저 개인적으로는 꽤 감동적이면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발언도 하는 좋은 결말이라는 생각입니다만 분명히 시시하다고 느끼실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죽여야만 했던 가지의 비극과 6명의 중년 화자들의 애잔한 인생 이야기에 젖어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가지의 비밀이 밝혀지는 마지막 10페이지는 눈물을 참기 힘드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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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만 가지 죽는 방법 밀리언셀러 클럽 13
로렌스 블록 지음, 김미옥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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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에 절어 사는 무면허 탐정 매트 스커더 시리즈를 창조한 로렌스 블록은 정말 대단한 작가입니다. 영국추리작가협회와 미국추리작가협회에서 수여하는 공로상을 모두 수상한 작가입니다. 국내 출간된 <백정들의 미사>는 미국추리작가협회상 대상 수상작이고요. 뭐 이런 상들이 꼭 작가의 수준을 대변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만큼 인정받는 작가라는 증거는 되겠지요.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의 매트 스커더는 한 창녀의 의뢰를 받습니다. 그녀는 창녀 생활을 이제 그만 때려치고 싶다며, 자신의 포주인 챈스라는 흑인에게 자신이 그만둔다는 사실을 통보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여기나 거기나 창녀가 포주에게 혹사당하고, 위협받는 건 비슷한가 봅니다. 자신 스스로 그만둔다고 말하면 혹시 해꼬지라도 당할까 염려한 나머지 매트에게 부탁한 겁니다.

의외로 선선히 창녀를 그만둬도 좋다고 말하는 챈스. 그러나 며칠 뒤 창녀는 호텔방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합니다. 매트는 챈스를 의심하지만 오히려 챈스는 그에게 창녀를 죽인 범인을 잡아달라고 의뢰합니다.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창녀를 죽인건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는 거죠.

매트는 챈스에 대한 의심을 여전히 간직한 채 창녀 살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 내려 합니다. 전직 경찰 출신의 매트가 손에 쥔건 사립탐정 면허증도 아니요, 누구든 한방에 골로 보낼 수 있는 총도 아닙니다. 단지 술병만을 쥐고 있을 뿐이지요.

전에 읽었던 <백정들의 미사>에서도 반복되지만 이 작품에서도 매트는 끊임없이 신문을 읽습니다. 뉴욕에는 800만명이 살고, 그들 각자는 죽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꼭 800만 가지가 되죠. 800만명의 사람들이 하찮은 이유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혼돈과 죄악으로 가득찬 사건들이 보도되는 신문을 매트는 쉬지않고 읽어댑니다. 벌거벗은 도시 뉴욕의 현실에 절망한 매트가 기댈 것은 술밖에 없는 거구요.

혹자는 말합니다. 신문을 뭐하러 읽냐고...안좋은 일만 가득한 신문은 읽지 않으면 그만아니냐고...매트는 그 말에 동의하지만 신문을 읽는 걸 멈추진 않습니다. 대도시 뉴욕의 현실에 절망하고는 있지만 결코 외면하지는 않는거죠. 그런 면에서 본질적으로 그는 정의로운 인물입니다.

사실 그는 800만 가지의 모든 죽음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매트는 모든 사람들이 인류라는 이름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단 한 사람의  죽음도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게 아닐까 뇌까려 보기도 합니다.

<백정들의 미사>도 여운이 깊이 남는 대단한 수작이지만, 추리적인 측면이나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구성, 복선의 배치 등은 <800만가지 죽는 방법>이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사건이 해결되는 부분의 지적 쾌감도 꽤 큰 편이구요.

여러모로 대가 로렌스 블록의 필력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1982년 작품인데 그해 미국추리작가협회상 수상을 하지 못했더군요. 찾아보니 윌리엄 베이어라는 작가의 <송골매>가 수상의 영광을 안았더군요. <송골매>를 못 봤지만 고개가 약간 갸우뚱해집니다.
'이 정도의 걸작을 제쳤단 말야!'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지막으로 작품 맨 말미 매트 스커더의 금주 모임에서의 단 두 마디 스피치는 미스터리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모든 소설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해지고, 뻐근해지지요. 새로 읽으실 분들의 재미를 위해 밝히지는 않겠지만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그런 결말을 낼 수 있었을까요...로렌스 블록은 정말 대단한 작가이며, 매트 스커더 역시 영원히 독자들의 기억에 남을 인물입니다.

P.S/ 1992년 <백정들의 미사>에서는 매트 스커더는 술을 완전히 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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