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2010년에 출간된 책만을 포함하며,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서양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5위 콘크리트 블론드 - 마이클 코넬리

 

 
 

 

 

 

 

  

잔뜩 기대를 한 미스터리 소설들이 연달아 꽝으로 밝혀졌을 때, 나는 언제나 마이클 코넬리의 책을 집는다. 그의 작품은 부동의 재미 4번 타자이므로. 지금껏 5권을 봤는데, 전부 홈런이었으니 적어도 내게는 10할 타자인 셈이다. <콘크리트 블론드>는 그런 마이클 코넬리의 대표 캐릭터인 해리 보슈가 등장하는 세 번째 이야기다. 아마도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형사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해리 보슈는 1권 <블랙 에코>에 처음 등장하면서 가장 특징적인 세 가지 배경을 공개한다. 먼저 베트남전 참전용사라는 것, 둘째, '인형사'라는 여성 연쇄살인범을 사살하고 그 사건의 판권을 팔아 거금을 손에 넣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 창녀였던 어머니가 길거리에서 살해됐다는 것. 마이클 코넬리는 작품 속에서 언뜻 언급되는 배경 스토리를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가히 장인의 솜씨를 보여주는 작가라 어떤 사소한 설정도 가벼이 지나쳐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해리의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는 이야기가 시리즈 4권 <라스트 코요테>이고, 2권 <블랙 아이스>에서 살짝 언급되는, 보슈의 이복형 미키 할러 변호사가 스핀오프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 등장하는 식이다. 처음부터 전체 밑그림을 그려둔 것인지, 아니면 마구 뿌려놓은 이야깃거리 중에서 되겠다 싶은 걸 골라 쓰는지는 모르겠으나 좌우지간 대단한 재주다. 이중 <콘크리트 블론드>는 '인형사' 사건을 다루고 있다. 몇 년 전, '인형사'를 처치했던 일이 과잉진압 논란에 휩싸이는 바람에 그는 뒤늦게 법정에 서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죽은 '인형사'와 똑같이 여자를 살해한 다음 곱게 화장을 시키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그렇다면 해리는 범인이 아닌 무관한 사람을 사살한 것일까? 해리 보슈 최대의 공적이라 할 '인형사' 사건이 그를 파멸시키려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흔히 스릴러 작가로 불리지만 퍼즐 미스터리 스타일의 트릭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는 마이클 코넬리의 진가를 느껴보시길. 기자 출신다운 문장력도 발군, 빠르게 핵심만 파고드는 스토리 전개 능력에서도 비교할 만한 작가가 없다.

 

4위 붉은 오른손 - 조엘 로저스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무시무시한 공포소설에 가까운 분위기로 출발한다. 보아라. 표지부터 얼마나 무시무시(?)한가를...인적이 뜸한 미국의 시골 도로 삼거리 한복판에서 퍼져버린 자동차를 고쳐보려 애쓰는 의사가 있다. 그의 이름은 해리 리들(riddle, 수수께끼?). 한 시간 가까이 응급실에서 하듯 필사적으로 차를 수술해봤지만 그의 전공은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지, 차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서 결국은 실패. 패잔병이 된 기분으로 터덜터덜 주변의 마을로 걸어가서 도움을 요청하려는데, 평온한 시골 마을이 온통 쑥대밭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사정을 들어보니 두 눈은 빨갛고 귀는 찢어진데다 코르크스크루처럼 다리가 뒤틀린 괴물 같은 생김새의 부랑자가 방금 신혼부부를 살해하고 그들의 자동차를 훔쳐서 이 마을을 쏜살같이 지나쳐 갔단다. 마을 사람들은 리들에게 묻는다. 부랑자가 훔친 차의 진행 방향에 따르면 당신의 자동차가 멎어버린 그 삼거리를 반드시 지나쳤을 텐데, 혹시 보았느냐고. 리들이 지난 한 시간 동안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고 답하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의심한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봐도 자기가 수상하다. 엔진을 고치려고 허둥대다 다쳐 손은 피범벅이 되어 있고, 무더운 여름 뙤약볕에서 사투를 벌였던 탓에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하나의 내가 저지른 일일까? 리들은 그날 아침부터 겪었던 모든 일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차곡차곡 진실의 벽돌을 쌓아올리기 시작한다. 분명 어딘가 한 구석에 잘 설명이 되지 않는, 위화감이 가득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을 찾아야 하는데...마치 <환상특급>을 보는 듯 초현실적이고 섬뜩한 사건들 속에서 한 줄기 논리의 흐름을 좇아 마침내 해답을 밝혀내는 리들의 짜릿한 하룻밤 모험담으로 조금 작위적인 구석도 있지만 정말 탁월한 퍼즐 미스터리다. 판매 의욕을 저하시키는 표지가 아쉽고, 책에 삼거리 부근 지도가 들어 있었다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가히 엄지를 번쩍 치켜들 만한 책이다.

 

3. 탄착점 - 스티븐 헌터

 
 

 

 

 

 

 

  

1990년대에는 작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문적인 지식을 작품 속에 적절히 녹여내 사실성과 완성도를 높인 소설들이 대거 유행했다. 밀리터리 전문가 톰 클랜시의 테크노 스릴러, 변호사 출신 존 그리샴의 법정 스릴러, 법의관 출신 퍼트리샤 콘웰의 법의학 스릴러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의 책은 나왔다 하면 수백만 부가 팔렸다. <탄착점>의 스티븐 헌터 또한 이런 흐름 속에서 거론되는 작가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티븐 헌터의 전공 분야는 무엇일까? 바로 총기와 저격, 저격수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사실성이다. 스티븐 헌터는 위에 언급한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실제 저격수 출신은 아니고, 원래 저명한 영화평론가였다. 하지만 몇 년에 걸친 면밀한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사실감의 저격 액션 스릴러를 완성해냈다. <탄착점>의 이야기 구조는 지극히 단순하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전설적인 스나이퍼가 암살범 누명을 쓰고 쫓기다가 자신을 엿먹인 세력들에게 총 한 자루로 통쾌하게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뻔한 얘기지만 일대일, 혹은 일대다의 다채로운 액션들과 서서히 드러나는 음모의 전모, 결정적 반전이 펼쳐지는 최후의 법정 장면까지 절대 지루하지 않게 잘 풀어냈다. 남자라면 누구나 일격필살, 일발필중의 저격수에 관심이 많을 터, 책을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빵야, 빵야' 소리를 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마크 월버그가 주연했던 <더블 타켓>의 원작으로, 악당 캐릭터의 질감이나 매력 있는 서브 캐릭터, 전체적인 구성까지 영화가 훨씬 부족하다.
 

2위 메인 - 트레바니안

 
 

 

 

 

 

 

 

오랫동안 정체를 숨기고 양질의 미스터리 스릴러 작품들을 발표했던 복면작가 트레바니안의 대표작. 캐나다 몬트리올의 슬럼 지역인 메인 가를 수십 년간 지배하다시피 한 명물 경관 라프왕트가 주인공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독불장군 라프왕트는 정년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매일같이 메인을 누비며 거리의 범죄와 악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탕한다. 입버릇처럼 과학수사, 범죄자 인권 이딴 거는 개에게나 줘버려, 를 외치는 그의 말투에서 독자는 그만의 무지막지한 원칙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뇌물도, 협박도, 총알세례도 통하지 않는 강철의 이미지로 메인을 좌지우지하는 라프왕트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불치병에 걸려 언제 심장이 멎을지 모르는데다, 사랑하는 아내도 먼저 세상을 떠나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원했던 아이는 낳을 기회조차 없었고, 오직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외적인 강인함과 달리 내면의 우울로 점철된 라프왕트의 쓸쓸한 일상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희망을 상실한 메인이라는 도시 자체의 막막한 어둠 또한 목격하게 된다. 생애 마지막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라프왕트가 발견한 범인의 정체 그리고 그 동기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읽는이의 가슴을 저민다.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지난날을 회한하며 오열을 터뜨리는 라프왕트의 모습을 보고도 눈물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 같은 경우 세 번을 봤고, 세 번 볼 때마다 울었다. 딱히 트릭이 있다거나, 미스터리 구조가 탄탄하거나 한 작품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명작이다. 특히 추리소설에 무슨 문학성이 있어, 하고 빈정대는 사람의 면전에 확 들이대고 싶다.

 

1위 유다의 창 - 존 딕슨 카 

 
 

 

 

 

 

 

 

나 같은 부족한 추리소설 애독자가 감히 1위로 꼽는 게 죄송할 만큼의 걸작이다. 2010년, 아니 2000년대에 나온 모든 퍼즐 미스터리를 합친다 해도 첫 손에 꼽힐 영원불멸의 클래식에 손색이 없다. 밀실의 제왕, 존 딕슨 카 밀실 트릭의 정수가 담겨 있으며, 주요 무대가 법정이니만큼 법정 미스터리의 원조 격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고전의 가치는 누구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고전만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는 실소를 감추지 못하는 편인데, 아무래도 출간되고 나서 시간이 한참 흐른 고전은 시대에 뒤떨어진 트릭이나 미스터리 장치 등의 한계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다의 창>은 다르다. 1930년대에 나온 작품이지만 오늘날의 그 어떤 트릭도 범접할 수 없는 통렬한 한 방이 있다. 밀실에서 화살에 찔려 죽은 노인, 그리고 그와 같은 방에 함께 있었던 젊은이. 모든 문과 창문이 남김없이 잠겨 있어 당연히 젊은이가 용의자로 체포되는데, 그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한다. 나는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을 뿐이고, 진짜 범인은 따로 있노라고. 다들 젊은이의 항변을 비웃었지만 명탐정 헨리 메리베일 경은 뜻밖에 그 젊은이를 믿어준다. 메리베일은 이 세상의 모든 문에는 은밀한 빈틈, 즉 '유다의 창'이 있고 진범은 그 '유다의 창'을 이용해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얼른 믿을 수 없겠지만 '유다의 창'은 실제로 모든 문에 존재한다. 그 정체를 알고 나는 숫제 떼굴떼굴 굴렀다. 세상에나,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황홀한 트릭이 있었다니 하면서. 당장 책을 들어 '유다의 창'을 확인해보시길. 그리고 지금 당신의 방 문에도 있는 '유다의 창'을 보고 두 번 세 번 감탄하시라. 보통 딕슨 카의 걸작으로 이 작품과 <세 개의 관>, <구부러진 경첩>을 드는데, 내 기준에서는 이 작품이 첫 번째이고, 2등은 근소한 차이로 <세 개의 관>에게 주고 싶다. <Y의 비극>,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 밖의 어떤 작품과 비교해도 <유다의 창>은 떨어지지 않는다. 가히 역대 베스트 중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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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2-15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다의 창.은 다들 추천하는군요. 얼른 사 봐야 겠어요. 존 딕슨 카가 얼마나 재미있을까. 싶긴 하지만요 ^^a

붉은 오른손.은 평이 하도 좋아서 봤는데 별로

콘크리트 블론드.는 평도 별로였는데.. 마이클 코넬리 작품 아주 재미난거, 재미난거, 별로인거로 나눈다면 별로인거.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코넬리 중 거의 유일하게 재미없었던; 그러니깐, 코넬리는 재미있다.는 저의 편견(?)을 깨 준 작품이었죠. ^^; 그 후에 읽은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라스트 코넬리>는 지금까지 읽은 중의 코넬리 베스트였구요.

탄착점.과 메인.은 보관함에 담겨 있긴 한데, 끌어 올려 봅니다. 특히 탄착점은 제가 신뢰하는 어떤 분의 리스트에서도 보았는데, 여기서 또 만나네요. ^^

jedai2000 2011-02-15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제의 코담배케이스>에서 별 재미를 못 느끼셨다면 <유다의 창>도 비슷하실 텐데^^;;
저도 지금까지 읽은 코넬리 책 중에 <콘크리트 블론드>가 제일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별로인 작품이라 해도 다른 작가에 비하면 그 수준이 월등히 높다고 생각해서 5위로 넣었습니다^^;;

제 생각에 하이드님은 <메인>이 더 취향에 맞으실 듯한데,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군요^^

BRINY 2011-02-16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다의 창' 소개하신 글을 보면, 분명 예전에 어디선가 본듯한데 결말을 생각해낼 수 없으니, 책 사고 싶어지네요. 점점 형편없어지는 기억력이 미스테리 판매량에 일조를 하고 있다니...

jedai2000 2011-02-1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이러다 같은 책을 몇 번씩 사시는 거 아니예요ㅠ.ㅠ? 미스터리 애호가 입장에서는 브라이니님의 건망증을 더 부추기고 싶기도 하네요^^ 한 권이라도 많이 팔려야 더 많이 나올 테니까요^^
 

*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국내에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다 읽었습니다. 
   
  
 
5위. 성녀의 구제

 



 

 

 

 

 

 

'갈릴레오' 유가와 교수 시리즈 제4작. 다른 추리소설가들과 달리 히가시노 게이고는 유독 시리즈 캐릭터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3편 이상의 작품에서 활약한 캐릭터가 작가의 페르소나 가가 형사, 그리고 유가와 교수가 유일하다. 이중 가가는 직업 자체가 실제 사회에서 진짜 범죄를 수사하는 형사다 보니 사건의 배경이나 동기가 좀더 현실적이고, 수사관, 용의자, 사건 관계자의 심리도 공감이 가는 구석이 많다. 또한 간간히 사회 문제도 건드리고. 반면 유가와 교수는 추리소설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만들어보고 싶은 고전적인 명탐정 캐릭터에 가깝다. 다소 괴팍하고 까다로운 성품을 지녔지만 추리력만큼은 초인적인. 그래서 유가와가 다루는 사건도 다소 현실감을 희생하더라도 추리소설 세계에서는 흔히 통용되는 트릭과 논리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성녀의 구제> 역시 다른 건 다 제쳐놓고 트릭이 가장 빼어나다. 전작 <용의자 X의 헌신>의 핵심 트릭이 살인이 일어난 시각을 조작하는 알리바이 공방이었다면, <성녀의 구제>도 마찬가지. 다만 비슷한 알리바이 조작을 전작과 정반대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무릎을 쳤다. 트릭이 하도 기발해 자려고 누웠는데도 푸슬푸슬 웃음이 새어 나오더라. 어떻게 이런 역발상을! 게이고의 특징 중 하나가 <변신> <분신> 등 제목에 많은 내용을 담아내는 것인데, <성녀의 구제>도 과연 그렇다. 책을 다 읽고 '구제'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면 오슬오슬 소름이 돋을 것이다. 누군가 우스개로 한 '석녀의 구제'라는 말도 틀리진 않다^^ 

 

 

4위. 붉은 손가락

 



 

 

 

 

 

 

미소녀 게임이나 피규어에 미쳐 7살 소녀를 유괴하고 살인한 중학생 소년이 있다. 소년의 아버지는 참담한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아들의 장래를 위해 치매로 이성을 잃은 자신의 노모(소년의 할머니)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계획을 세운다. 어차피 노모는 심신미약 상태이므로 범인으로 몰려도 감옥에 갈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필 가가 형사가 사건을 수사하게 된 게 문제다. 범죄와는 인연이 없던 평범한 중년 남자가 형사들 사이에서도 수사가 뛰어나기로 정평 난 가가를 어찌 상대할 수 있겠는가. 기본적으로 범인의 시점과 형사의 시점이 교차하며 서술되는 일종의 도서 추리소설이라 볼 수 있겠다. 이 사건에서 가장 미약해 보이는 인물이 뜻밖에 놀라운 판단력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작위성이 엿보이지만, 가가와 범인 사이의 숨막히는 공방전은 물론 가가가 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단서들이 균형 있게 배분되어 읽는 동안은 그런 약점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가가 형사 시리즈를 읽으면 보통 힘을 빼고 가볍게 쓰는 게이고의 필치와 달리 메시지나 트릭, 완성도 면에서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 작가도 자신을 대표하는 시리즈라고 생각하는 듯.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다른 작가들의 시리즈와 달리 가가 형사 시리즈는 각 권이 철저하게 독립적이라는 데 있다. 다른 작가들의 시리즈는 전작에 나왔던 조연들을 다음 편에도 등장시켜 자연스럽게 전작과의 연결고리를 만든다거나,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속편을 보는 것 같은 익숙함을 내세운다. 하지만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는 그런 게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잠자는 숲>에서 가슴이 터질 듯한 로맨스를 선보였음에도 다음 편에는 그 일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냥 가가는 여전히 독신이다, 한마디 설명으로 땡. 전작의 설정들에 이어서 쉽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유혹을 무시하고 매번 새로운 인물과 사건을 등장시켜 시리즈 중 어느 작품을 읽어도 참신하니 참말로 대단한 수완가가 아닐 수 없다.

 

 

3위. 용의자 X의 헌신

 



 

 

 

 

 

 

나오키상 수상작. 다섯 번이나 물을 먹고 이 작품으로 겨우 수상했다. 또한 후쿠야마 마사히루, 시바사키 코우 등의 올스타 라인업으로 영화화되기도 하는 등 2000년대 게이고의 최대 히트작으로 봐도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교수와 대학 시절부터 그가 유일하게 손꼽던 적수, 즉 수학의 달인 이시가미의 대결 구도로 진행된다. 필자는 바둑을 두는 법을 모르지만 바둑의 고수들은 상대의 앞수를 예측하고 그에 맞게 수를 두면, 상대는 그다음 수를 예상하고 , 그걸 또 앞서 계산하는 등 나중에는 한 판 전체가 머릿속에서 돌아간다고 한다. 두 사람의 대결 또한 그렇다. 라이벌보다 한 수를 더 생각하고, 한 발짝 더 나아가 상대가 마침내 돌을 던지게 만들기 위한 두 사람의 팽팽한 지략 대결이 최대의 재미 포인트. 개인적으로는 게이고의 단골 남자 주인공인 사랑에 목 매어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는 신파형 캐릭터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 당대의 순애 코드와 맞아떨어져 이토록 대성공을 하지 않았나 싶다. 묘사가 별로 없고, 설명보다는 대화가 많은 게이고의 스타일에 따라 걸리는 부분도 없이 술술 잘 읽힌다. 하긴 워낙에 미친 속도감을 자랑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읽다보면 어느새 끝이라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치는 장점들이 많은데, <용의자 X의 헌신>도 재독할수록 참 짜임새가 있고, 곳곳에 복선이나 단서를 교묘하게 잘도 깔아놓았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무엇보다 최고의 장점은 아무래도 범인의 성격에 걸맞는 트릭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추리소설을 보면 얘가 범인인 건 알겠는데, 그간 묘사한 범인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범죄의 양상에 흥이 떨어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하지만 <용의자 X의 헌신>의 범인 이시가미가 공들여 짠 트릭의 목적이나 방법 등은 앞서 묘사된 그의 성격과도 정확하게 일치해 독자로 하여금 이 이야기에 한결 더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2위. 백야행

 




 

 

 

 

 

 

믿을 건 서로밖에 없었던 두 남녀의 사랑과 범죄의 연대기.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일본 사회의 변화상이나 기술 산업의 발전 양상 등이 비교적 세밀하게 그려져 작가의 대표작 중에서는 조금 다른 지점에 위치하는 걸작이다. 직접적인 심리 묘사는 배제하고 대부분 두 남녀 주인공의 행동만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런 표현상의 난제에도 불구하고 두 남녀의 성공에 대한 욕망이나 서로에 대한 질긴 사랑을 미묘하게 독자에게 전달해내는 작가의 테크닉이 발군이다. 내가 이만큼 널 사랑해, 하고 목놓아 외치는 것보다 때로는 말없이 상대의 옷깃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는 장면이 더 깊은 사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백야행>이야말로 바로 그런 작품이 아닐런지. 유년 시절부터 성인이 되서까지 끊임없이 범죄에 몸을 담구는 두 주인공의 인생 항로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일본의 천변만화하는 시대상이 절묘하게 맞물려 한 번 잡으면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책이다. 더구나 이 작품 역시 사랑 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는 한 여인과 그녀를 위해 평생을 음지에 숨은 채 그녀의 비밀스런 욕망을 돕기 위해 애쓰는 신파남이 등장한다. 이쯤되면 뇌를 해부해서 작가의 여성관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 이런 사회파 추리소설에 가까운 얘기 속에서도 게이고의 본격 트릭에 대한 본능이 여전한 것도 이채롭다.

 

 

1위. 악의

        



 

 

 

 

 

 

아직까지는 게이고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싶다.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집에서 목이 졸려 살해당한다.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그의 친구이자 인기 없는 아동문학가. 발견자는 작가답게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한 이번 사건을 충실히 기록하는데, 마침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가 예전 고교 교사 시절의 동료였던 가가인지라 그에게 수기를 전달하며 사건에 참고하라고 한다(가가 형사가 교사를 그만둔 이유가 이 작품에서 설명된다). 수기를 꼼꼼이 읽은 가가는 몇 가지 수상한 점을 발견하는데...진범이 밝혀지는 건 책의 초반부. 진정한 문제는 범인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가, 누군가가 타인의 목숨을 뺏고 그의 모든 성취를 망가뜨리려 획책하는 비열한 악의가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있었다. 단순한 추리 게임 같았던 초기 작풍에서 벗어나, 인간이라는 불가해한 존재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범죄 심리에도 눈을 돌린 현재의 게이고 스타일이 완성된 걸작. 수기와 실제 현장 상황을 비교해가며 진실에 이르는 물리적인 단서들과 수기에서 피어나는 정체 모를 위화감을 차근차근 분석해 범인의 진짜 목적까지 추출해내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균형 있게 조화를 이뤄 일급의 재미를 선사한다. 우리 게이고가 변했어요, 하는 최초의 작품을 보통 <숙명>이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약간은 어설픈 면이 보였던 <숙명>보다는 <악의>가 진정한 게이고 문학의 신호탄이라 생각한다.

 

 

 

이상으로 내가 뽑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베스트 10을 마친다. 일본도 그렇지만 국내에서 또한 추리소설을 잘 모르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폭넓은 사랑을 받는 작가라 사실 굳이 또 한 번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잘하는 거 다 아는데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번이지 잘한다, 잘한다 자꾸 해봐야 역효과만 나는걸. 하지만 모든 작품이 순차적으로 나와 조금씩 성장해가는 작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초기작과 최신작, 대표작과 범작이 무차별로 쏟아져 나와 조금 저평가되는 면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이 작가는 처음부터 완성됐다기보다 꾸준히 쓰면서 탄탄해진 사람이라 확실히 떨어지는 초기작만 보고 이제 더 볼 필요가 없겠구나, 하고 오해하는 독자들도 있다는 게 안타깝다는 말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거장의 필수 조건 중 한 가지를 다작으로 꼽는다. 초기에 반짝하다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작가 생활 후반기에는 집필보다 온갖 가십면에 더 많이 나오는 그런 사람보다는 무조건 쓰면서 느릿느릿이라도 끊임없이 전진하는 작가야말로 나의 우상이라는 얘기다. 언젠가 먼 훗날, 게이고는 에도가와 란포-요코미조 세이시- 마쓰모토 세이초 계보를 잇는 일본 추리소설의 새로운 거장으로 평가받으리라 확신한다. 어쩌면 8부 능선쯤은 이미 넘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보너스.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들을 그 수준에 따라 상중하로 나눠 한 줄로 소개한다. 상품은 취향 때문에 아쉽게 베스트10에 들지는 못했지만 절대 떨어지지 않는 작품, 중품은 재미만큼은 보장하는 작품, 하품은 시간이 남아돌면 읽으시길.

 
<상품>

 
<편지> - 아아, 너무 감동적이야...
<내가 그를 죽였다> -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에 이은 범인찾기 놀이. 용의자가 셋이라 난이도도 세 배.
<방황하는 칼날> - 소년범 문제를 다룬 서스펜스. 게이고 풍미가 남김없이 녹아 있는 수준작.  
<옛날 내가 죽은 집> - 딱 하룻밤 새 벌어지는 그날 밤의 비밀찾기. 오싹한 분위기가 그만이라 게이고의 호러도 보고 싶다. 
<잠자는 숲> - 모든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 최고의 마무리! Sooooooo Romantic!!!
<호숫가 살인사건> - 비뚤어진 부모들의 교육열을 다룬 사회파 터치의 작품. 이런 책을 보면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다른 게 별로 없다.
<도키오> - 게이고판 <백 투 더 퓨처>. 과거에서 만난 미래의 아들. 시간여행의 잔재미와 부자가 힘을 합쳐 모험에 나서는 줄거리가 훈훈한 성장소설. 

 

 
<중품>

 
<탐정 갈릴레오> - 과학 모르면 추리소설도 보지 말라는 소리요!
<예지몽> - 유가와 교수 대단하네, 이런 것도 알고, 하고 박수치는 것 말고 독자가 추리할 여지가 별로 없다.
<방과후> - 데뷔작. 고무줄로 장난치는 전형적인 밀실 트릭.
<유성의 인연> - 하야시라이스만 기억난다. 
<동급생> - 억지스런 기계 트릭이지만 청춘의 분위기만큼은 정말 사랑스럽다. 수준을 떠나 무척 좋아하는 작품.  
<레몬(분신)> - 인간복제를 소재로 다룬 과학 서스펜스. 여운 있는 결말이 좋다.  
<변신> - 뇌과학을 소재로 다룬 과학 서스펜스. 영화판에서 내 사랑, 너의 사랑 아오이 유우가 나왔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 게이고는 단편은 그저 그렇다. 심지어 가가 형사가 나온다 해도.
<교통경찰의 밤> - 그래도 주제가 통일되는 연작 단편집은 좀 나은 편.  
<환야> - 흥미롭지만 <백야행>을 똑같이 한 번 더 쓸 필요는 없었잖아. 
<괴소소설> - 츠츠이 야스타카풍 풍자, 독설 소설집. 게이고는 은근히 이런 장르도 잘 소화한다.
<독소소설> - <괴소소설>과 동문.
<흑소소설> - <독소소설>과 동문.
<아내를 사랑한 여자> - 게이고도 여자를 모른다. 남성적인 작가 게이고가 오묘한 여자의 심리를 그려내기란 좀 어렵지.  
<숙명> -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잘...석궁 갖고 위험하게 노는 것 같던데.
 

 
 
<하품>
 

<회랑정 살인사건> - 굳이 우리나라에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브루투스의 심장> - 로봇을 등장시켜 우수한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은 정녕 아이작 아시모프밖에 없단 말인가. 
<백마산장 살인사건> - 신사숙녀 여러분. 히가시노 게이고 골든 래즈버리 상 위너는 바로 이 작품입니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 - 게이고는 단편은 그저 그렇다. 심지어 가가 형사도 안 나오면 더 그렇겠지. 
<11문자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의 실패작(11문자임).
<아름다운 흉기> - 살인병기로 재탄생한 철인3종 경기 여성 선수. 철인3종 하지말고 그냥 시집이나 가지 그랬어. 
<수상한 사람들> - 수상하게 시시한 단편집.
<사명과 영혼의 경계> - 2000년대 작품 중에서는 드문 졸작. 메디컬 서스펜스와는 맞지 않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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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10-07-31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유성의 인연> 하야시라이스 ㅋㅋㅋㅋㅋ
개인적으로 저도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best 1은 <악의>를 꼽고 싶네요 :)
그러고보니 저도 궁시렁거리면서도 엄청나게 읽어댔군요 ㅎㅎ

하이드 2010-08-0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장의 필수조건이 다작이라니 독특하시네요


jedai2000 2010-08-0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하야시라이스가 어떤 맛인지 넘 궁금하더군요^^ 저도 <악의>야말로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글구 워낙 많은 작품이 쏟아져 나오니 안 볼 수가 없잖아요ㅎㅎ

하이드님...제 생각은 그래요. 반드시 충족해야 할 필수조건이죠. 5권 써서 3권이 좋은 작가보다, 50권 써서 10권이 좋은 작가가 거장이 아닐까 싶은데요^^ 크리스티, 카, 퀸, 세이시, 란포, 세이초, 맥베인, 딕 프랜시스, 웨스트레이크 같이 40권 이상 어느 수준 이상의 저서를 남긴 작가들이 제가 생각하는 거장들이예요. 일반문학 쪽에서 예를 들어 샐린저나 하퍼 리 같은 경우 분명 엄청난 작품을 남겼지만 단 한 권 뿐이라, 한 편의 임팩트는 그만 못해도 좋은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한 다른 작가들이 문학계에 기여한 바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절이나 불의의 사고, 질병 등으로 쓰고 싶어도 못 쓴 작가는 예외입니다만...그런데 그런 작가분들은 불행한 천재 타이틀을 받는 게 맞겠죠. 거장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pjy 2010-08-02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위를 제외하고 일단 다 읽은 거군요~상중하중에서도 이것저것 아는척 할 수 있는데요~
그러고보면 게이노를 나름 꽤 읽었나봐요~

감동적인데 10권밖으로 밀리는 편지~나름 고민되셨던 순위인가봅니다ㅋㅋ

jedai2000 2010-08-03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jy님...제일 고민했던 건 <방황했던 칼날>이었습니다ㅎㅎ <성녀의 구제>와 <방황했던 칼날> 사이에서 장고했죠^^ 근데 제 취향이 트릭을 더 중시하는 파라 <성녀의 구제>를 뽑았단ㄴ^^;;

쥬베이 2011-05-08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제다이님^^ 이런건 제다이님 아니시면 못하는 거죠
[[<11문자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의 실패작(11문자임).]] 여기서 빵터짐ㅋㅋㅋ
모조리 다 제다이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근데,사명과 영혼의 경계는 중간정도는 가지 않을까요
저는 중간으로 할께요 ㅋ)

쯔센 2011-09-19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개인적으로 악의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호숫가의살인사건도 꽤나 재미나게 봤죠 뭔가 납득이 잘가서 정말 오싹했습니다. 사실 별거 아닌 내용인데도. 내 가족이 그것도 자식이 살인을 저지른다면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엄청 오싹하게 봤던. 근데 히가시노 게이코 작품은 거의 드라마로 봤네요;; 책은 별로 안본;;;;

쥬베이 2011-09-24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의>를 아직 못읽었어요...
지금 히가시노 게이고 읽은 책들 따로 정리했는데, 반도 못읽었네요 휴
언제 출간작 다 읽을라나...또 신작 나왔더라고요ㅋㅋㅋ

저는 <동급생>이 무척이나 좋았어요
학원물을 좋아하는지라, 더 애정이 팍팍ㅋㅋ

쥬베이 2011-09-2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오늘 <악의> 읽었습니다^^
역시 1위답더라고요
[우리 게이고가 변했어요, 하는 최초의 작품]이라고 하신 이유를 이해했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가가형사한테는 정이 안가요ㅋㅋㅋ

쥬베이 2012-04-15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저는 3,4,5위가 약간 뒤로 밀려가고,
<동급생>, <도키오>, <새벽 거리에서>가 상위권으로요ㅋㅋ
<사명과 영혼의 경계>에 대한 코멘트 공감100%요!! 얼마전에 다시 읽었는데.
진짜 오글거려서ㅋㅋㅋ
그리고, <프래티나 데이터>인가, 이것도 최악이더라고요
고스트라이터가 쓴 것같은 느낌까지 들었어요

쥬베이 2012-04-1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얼른 컴백하셔서...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잉아이>, <새벽거리에서>, <백은의 잭>, <신참자> 같은 것들요,
제다이님 평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 평가는 보고 싶지 않네요ㅋㅋㅋ

Wondercho 2018-01-10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백야행 보고 감동 받아서 다른 책 빌렸다가 실망하고 다시는 안 읽었는데...! 이렇게 딱딱 상품/중품/하품 나눠서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jedai2000 2018-01-12 01:07   좋아요 0 | URL
이야, 이 글이 언제적 썼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아직도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니 정말 반갑네요.

제가 한 2년간 인터넷에 염증을 느꼈던 시절이 있어서 쥬베이님의 덧글도 지금 처음 보네요. 늦었지만 쥬베이님의 덧글에도 감사드립니다.

한 7년 정도 전에 쓴 글이라 그 뒤에도 게이고 책이 아마 20권은 더 나왔을 거예요. 워낙 많이 나오기도 했고, 스타 작가라 책값도 비싸서ㅠ.ㅠ 다 읽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여기 언급한 작품들 말고 게이고의 새로운 작품들로만 평가를 꼭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일본의 추리소설 열풍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1984년에 350종 출간을 돌파하여 1일 1권 시대를 열었고, 2000년대는 대략 연평균 450종 정도의 추리소설이 나온다고 하니, 가히 추리소설의 '왕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현재 이 추리소설 왕국을 지배하는 왕은 누구일까? 인기와 실력을 두루 갖춘 후보가 여럿이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야말로 최강자가 아닐까 싶다. 1985년 <방과후>로 신인상에 해당하는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고 데뷔한 그는 25년 가까운 작가 생활 동안 70편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써냈으며, 1999년 <비밀>로 추리작가협회상, 2006년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평단에서도 인정을 받았고, <변신> <게임의 이름은 유괴> <호숫가 살인사건> 등 영화화된 작품이 11편, <유성의 인연> <백야행> 등 드라마로 만들어진 작품이 무려 20편일 정도로 베스트셀러 제조기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대 장점은 뭐니뭐니 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토리텔러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 머리를 꾹 누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툭 튀어나오지 싶은데, 말이 70편이지 아무리 소설가라도 그 정도 양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더군다나 그가 창조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대충 막 지어낸 것도 아니다. 일단 집필의 기본이 되는 발상이나 소재를 뽑아내는 능력부터가 탁월하다. 빙의나 시간여행 같은 초현실적인 것에서 노인문제나 청소년범죄 등 당대 일본 사회의 첨예한 이슈까지 한마디로 자유자재. 이렇게 독자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할 만한 소재를 고른 다음, 특유의 현란한 전개와 견고한 구조, 공들인 트릭과 반전으로 책을 다 읽은 독자의 입에서 '졌다'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신본격 작가들의 '언플'로 인해 어느새 트릭의 대명사가 신본격이 됐지만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트릭이 그들에 비해 빠지는 구석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무엇보다 대다수의 신본격 작가들이 아이디어와 창작력이 절정에 달하는 젊은 시절 잠깐 반짝이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면, 게이고는 장년에 이른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완성도 높은 플롯과 트릭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넘사벽'이라는 것이다.

 

물론 게이고의 단점도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문장이 평이하고 묘사가 없다. 이는 타고난 글솜씨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가 한 문장, 한 문장 힘을 줘서 썼다면 지금처럼 많은 작품을 내지는 못했을 듯하다. 예를 들어 그가 묘사하는 파티 장면이 있다고 하자. 다른 작가들 같으면 파티장 내부나 집기의 배치, 참석자들이 입은 옷과 나온 음식을 꼼꼼히 그릴 터. 하지만 게이고는 이런 식이다. "야마다 나오코는 호화찬란한 파티장에 들어섰다. 다른 참석자들이 입은 화려한 드레스와 자신의 초라한 옷이 비교되는 것 같아 괜시리 얼굴이 붉어졌다." 요즘 유행하는 드레스의 경향이나 디자인의 전반적인 흐름 등을 취재하는 데는 시간이 든다. 게이고는 플롯의 핵심도 아닌 걸 취재할 바에야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이야기를 쓰자는 주의인 것이다. 이건 아마도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펑펑 샘솟는 사람만의 어쩔 수 없는 고충(?)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게이고가 1년을 넘게 투자하여 에도시대 배경의 추리소설을 쓴다거나 하는 건 기대하지 말도록 하자. 이공계 출신인 자기가 잘 아는 과학이나 취미인 스포츠 등의 소재만으로도 그럴싸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데 굳이 우리도 하기 싫은 공부를 작가한테까지 강요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작가도 자기의 단점을 모르지는 않는다는 거다. <명탐정의 규칙> 같은 책을 보면 자기도 문장력 없고 깊이 있는 성격 묘사 안 된다는 걸 자조적으로 고백하곤 한다. 나는 게이고의 이런 면모가 좋다. '나 글 못 쓰고 깊이 없어. 하지만 잘하는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끝내주지. 굳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을 봐주면 안 될까?' 아아, 호쾌하도다! 국내 출간된 작품 중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베스트를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잘하는 분야에서 그가 얼마나 '끝내주는지' 알리고 싶어서다.

 

 

            

*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국내에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다 읽었습니다.
 
 
10위. 게임의 이름은 유괴 
  



   

 

 

 

 

 

부자 아버지를 골탕먹이려는 철없는 아가씨와 주어진 모든 일을 게임처럼 처리하는 쿨한 남자 주인공이 손을 잡고 가짜 유괴극을 벌인다. 그러나 한탕에 완전히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찰나 뜻밖의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는데...휴대폰, 이메일, 디지털 카메라 같은 현대적인 문명의 이기를 총동원하고, 혼잡스러운 도심지의 특성을 교묘히 이용해 범죄를 성공시키는 등 세련되고 감각적인 느낌의 도시 추리소설이다. 특히 후반부에 연달아 터지는 반전의 반전의 반전은 읽는이를 혼절 직전까지 몰아갈 테니 안전벨트를 꼭 하시길. 빠른 템포에 엎치락뒤치락하는 전개가 전형적인 히가시노 게이고표라 그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야기 자체도 깔끔한데다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으니 입문용으로는 딱이 아닐까. 유괴라는 범죄는 처음 목표 대상을 점찍고 납치하는 과정도 어렵지만 막상 유괴에 성공해도 인질을 감금하는 장소 구하는 게 문제다. 아무 곳이나 고르면 탈출할 염려도 있고, 옆집의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최고의 난제는 인질의 가족을 만나 돈을 받아내는 것. 돈을 받기 위해 필연적으로 한 번은 그들과 만나야 하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잠복한 경찰에게 걸릴 확률이 99.9퍼센트다. 이렇듯 쉽지 않은 유괴라는 범죄의 뒤엉킨 실타래를 산뜻하게 풀어낸 게이고의 역량에 박수를 보낸다.

 

 

9위. 졸업

 



 

 

 

 

 

 

게이고의 두 번째 작품이자 그의 분신과도 같은 가가 형사가 첫 선을 보인 기념할 만한 작품. 뛰어난 추리력 못지않게 인간적인 성품이 매력적인 가가 교이치로가 대학 졸업반인 단짝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파헤친다는 줄거리다. 나중에 가가는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민완 형사로 활약한다. 당시 게이고는 그때도 이미 추리소설 독자 사이에서 본 거 또 보고, 또 본 거 계속 보고, 라는 말을 들었던 암호나 다잉 메시지, 밀실 등의 고전적인 트릭을 발전시켜 현대에도 통용되는 훌륭한 추리소설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게이고의 말마따나 과연 <졸업>은 그의 초기 스타일인 학원물+물리 트릭의 공식을 아예 극한까지 밀어붙여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는 느낌마저 준다. 작품의 핵심 미스터리는 잠긴 문의 열쇠 트릭과 '설월화'라는 복잡한 일본 다도의 법칙을 이용한 독살 트릭 두 가지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첨단 신소재에 대한 지식에 어두운 사람이라면 맞출 길이 없는데다 좀 황당하다. 그러나 20장 가까운 설명 그림까지 동원하는 두 번째 독살 트릭은 숫제 기가 막힌다. 끝없이 계속되는 그림과 설명이 복잡하기 그지없어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만큼 독자를 속이고야 말겠다는 작가의 집념이 오롯해 추리소설가란 이렇게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구나 하고 묘한 부분에서 감탄하고 말았다.
 

 
8위. 비밀 
  


 

 

 

 

 

 

교통사고로 아내는 죽고 딸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하지만 사고의 충격으로 딸의 영혼과 아내의 그것이 뒤바뀌어버리는데...몸은 딸이라도 마음이 아내의 것이라면 이 사람은 과연 내 아내일까, 딸일까? 남편은 분명히 아내와 같이 살지만 성관계를 할 수도 없다. 딸의 몸에 어찌 추악한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판타지에 가까운 도발적인 설정에 중년 남자의 어쩔 수 없는 윤리적인 딜레마를 담아낸 게이고의 문제작. 빙의라는 초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곳곳에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스터리 요소가 있어 추리소설로도 일급이다. 딸(=아내)은 성장하면서 다시 학교를 다니고 그곳에서 다른 학생의 프러포즈를 받는 등 이미 한 남자의 아내로 시들어버린 과거에 느껴보지 못했던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서서히 늙어가기만 할 뿐인 남편은 아내의 변화를 막을 명분이 없다. 이런 남편의 절절함과 쓸쓸함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어 페이지를 다 덮고도 우울한 느낌이 한참 지속되는 책이다. 가만 보면 게이고의 작품에는 언제나 그가 보는 일관적인 남녀상이 드러난다. 남자는 항상 신파에 가까울 정도의 순애를 보여주는 반면, 여자는 그런 남자를 받아주지 않는가 하면 앞뒤를 재거나, 심지어 이용하기까지 한다. 아무래도 작가는 젊었을 적에 간보는(?) 여자에게 된통 당해본 적이 있는 듯-_-;;

 

 

7위. 명탐정의 규칙

 



 

 

 

 

 

 

추리소설가로서 게이고의 자세를 폄하하는 글을 간혹 보는데, 그럴 때마다 솔직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적어도 추리소설가 게이고의 도전 정신이나 진지함만큼은 다른 모든 것들을 부정하더라도 인정해줘야 할 부분이다. 게이고는 데뷔 초기에는 고전적인 트릭의 현대적인 변용이나 깜짝 반전, 뜻밖의 범인 같은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장치들을 중시했다. 하지만 중기 이후로는 작풍의 변화를 이뤄, 범인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도 시선을 둠으로써 동기 면에서의 의외성도 충분히 이끌어내고 있다. 요컨대 게이고는 끊임없이 고뇌하는 추리소설가라는 거다. 현대의 추리소설이 어디까지 도달했나, 나는 어떤 추리소설을 써야 하는가, 지금까지도 성공스러운 경력을 이뤘지만 뭔가 새로운 걸 추구해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등등. 이런 게이고의 고뇌의 산물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닐까 싶다. <명탐정의 규칙>은 긴다이치 코스케를 연상시키는 명탐정 덴카이치 다이고로가 기존 추리소설들의 온갖 클리쉐 속에서 발버둥치는 일종의 패러디 단편집으로 밀실, 동요살인, 다잉 메시지 등 요란하지만 비현실적이고, 흥미롭지만 진부한 추리소설의 공식들을 갖고 놀며 완전히 산산조각을 내버린다. 동료 추리소설가는 물론 게이고 자신에게도 풍자와 비판의 칼끝을 들이대는 이 작품은 다소 가볍다는 약점이 있지만 기존의 것들을 해체하고, 새롭고 다른 것에 도전해보겠다는 작가의 결기가 느껴져 작가의 팬으로서 무척 좋아한다. 사실 닥치는 대로 망가뜨리는 식의 패러디는 웬만큼 글줄을 쓸 줄 알면 누구나 가능하다. 그러나 <명탐정의 규칙>은 작가가 언급하는 전형적인 추리소설 공식에 따라 나름 내적 완성도가 있는 단편 하나를 완성하고 그 안에서 비난을 하는 식이라 공히 한 수 위라 할 만하다.

 

 

6위.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믿고 보는 가가 형사 시리즈다. 위에 언급한 혁신가로서 게이고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면 좋을 듯. 어느 여자 A의 독살 사건이 벌어진다. 용의자는 그녀를 버린 남자 애인B, 그리고 A의 절친한 친구이자 B와 바람이 난 C여인. 달리 동기와 기회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까지나 범인은 남자B와 여자C 둘 중의 하나. 친구의 애인을 빼앗아가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니 비교적 현실감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이 무엇보다 새롭고 색다른 것은 사건을 수사하는 가가 형사의 모든 행적과 마음속 추리가 꼼꼼하게 그려지다 범인이 밝혀지기 직전에 모든 페이지가 끝나버린다는 것에 있다. 누가, 어떻게 죽였는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생각하기도 귀찮으니 그냥 범인을 빨리 알려주소, 하고 마는 게으른 추리 독자들에게 날리는 게이고 나름의 일침이랄까. 귀중한 단서를 숨기는 것도 없고, 반칙도 없다. 꼼꼼히 생각해보면 누구나 맞출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게이고는 일급 추리소설가라 당연히 쉽지는 않다-_-;;). 이 책을 읽는 동안 모처럼 공책에 B와 C가 수상한 점을 낱낱이 적어보며 내가 가가 형사가 된 듯 추리하는 맛에 흠뻑 젖었다. 옛날 애거서 크리스티 책을 보면서 이랬었는데, 내가 너무 이 맛을 잊고 살았어, 하며 진심으로 흐뭇했다. 게이고가 독자에게 원한 것도 아마 이런 능동적인 자세가 아니었을까. 만약 답을 맞추지 못해도 해설에 힌트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하지만 해설도 몇 번 꼬아놓아서 당연히 쉽지는 않다-_-;;). 처음 나온 단행본은 지금보다 난이도가 쉬웠는데 해설이 없었고, 나중에 나온 문고본은 난이도를 높인 대신 해설을 추가했다고 한다. 국내에 출간된 책은 문고본 판으로 알고 있다.             

 

 

<下>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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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7-3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없이 읽다보니 제목은 베스트 10인데? 아...하편에^^;
좋아하는 작가지만 골라읽다 보니 해당되는 건 일단 10위뿐~ 아주 재미나게 뒷통수를 쳐주었던 책으로 기억합니다^^
게으른 독자인데다가 남자취향이 편협해서 가가형사가 맘에 안드는--;

jedai2000 2010-07-3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ju님...제가 어제 깜박 잊고 <베스트 10>의 상편이라고 쓰지를 않았네요^^ 두 번으로 끊어서 읽는데 지장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런데 정말 가가 형사가 맘에 안 드세요. 이래서 남녀의 시각차가 있는 건가 보네요. 왜 남자가 좋아하는 남자,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르잖아요. 여자도 마찬가지로^^ 제게 가가 형사는 추리소설 탐정 캐릭터 중 최고의 매력남인데^^

쯔센 2011-09-19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비밀은 최악이었는데. 그때 당시 엄청 기대하고 사본. 책 '비밀'은 완전 최악. 영화는 b급. 그래서 한동안 히가시노 게이코 작품은 손도 안댔었는데....

쥬베이 2011-09-24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졸업> 읽으려고, 눈앞에 준비중입니다ㅋㅋㅋ
그전에 제다이님, 평 읽으려고 들어왔어요.
(아, 노블하우스 판 <레몬>은 좀전에 읽었는데,
거기 앞부분에 제다이님 편집자 코멘트 있어서 엄청 반가웠어요^^)

쥬베이 2012-04-15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들 대부분 다 읽고나서
다시 제다이님 글 읽으니 느낌이 팍팍 오네요^^
설명을 어쩜 저리 잘하셨는지ㅋㅋㅋ <게임의 이름은 유괴>도 한번더 읽었어요.
 

*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2009년에 출간된 책만을 포함하며,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서양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 리메이크된 <심플 플랜>은 예전 번역본으로 읽었지만, 2009년판은 읽지 못해 제외합니다.

 

 

5위 네 번째 문 - 폴 알테르 
 


 



 

 

 

 

 

'존 딕슨 카를 너무 많이 읽은 사나이', 폴 알테르의 국내 데뷔작. 프랑스 출신의 이 작가는 영국(혹은 미국)의 추리소설 거장 존 딕슨 카에 깊이 매료되어 카의 전매특허인 밀실, 불가능 범죄만을 다룬 본격 추리소설만 40권 가까이 쓴 걸물이다. 추리소설 황금기라 불리던 1930년대에도 프랑스 작가들은 퍼즐풍의 본격 추리소설은 그다지 다루지 않았거늘, 50년도 더 지난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런 스타일을 고집하고 있다는 게 무척 이채롭다. 이 작가가 어찌나 카를 좋아하는지, 작중 배경도 1950년대 영국, 탐정 역을 맡은 앨런 트위스트(뭔가 상징적인 이름이다) 박사까지 등장인물 전원이 영국인이다.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는 외딴집의 꼭대기층 다락방. 우연히 그 집에 세들어 살게 된 강령술사 부부는 자신들이 유령과 이야기를 나눠보겠다며, 방이 네 개 있는 꼭대기층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완벽한 밀실 상태로 봉인된 네 번째 방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줄거리만 보면 완벽하게 존 딕슨 카가 쓴 소설이다. 강령술과 밀실, 헛다리만 짚는 경찰 그리고 모두의 의표를 찌르는 명탐정의 활약까지.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물리 트릭과 후반부의 메타 픽션 장치 모두 훌륭하다. 폴 알테르가 그토록 동경하던 딕슨 카 역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수작. 전형적인 본격 추리소설의 요소들에 현대성을 가미시켜 모든 추리소설 팬을 만족시킬 수 있을 듯. 여담으로 작년에 존 딕슨 카의 작품이 4편이나 소개되어 카의 팬으로서 무척 행복했다(다 봤는데, 그중 <구부러진 경첩>이 제일 뛰어난 것 같다). 올해도 존 딕슨 카는 물론, 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폴 알테르의 작품을 더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남겨본다.

 

 

4위 폴링 엔젤 - 윌리엄 요르츠버그

 



 

 

 

 

 

 

미키 루크, 로버트 드니로 주연으로 유명한 <엔젤 하트>의 원작 소설. 영화를 못 본지라,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읽었다. 1950년대의 사설 탐정 해리 엔젤이 줄담배를 피우며 술을 홀짝이는 장면이 계속되자, 어느새 내 입가에는 흐뭇하는 미소가 감돈다. 아, 이 책 분위기에 흠뻑 젖을 수 있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로구나. 그러나 해리 엔젤에게 실종된 왕년의 인기 가수를 찾아달라는 의뢰인의 이름은 루이 사이퍼. 앤젤과 사이퍼라...여기서부터 느낌이 심상치 않더니,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온갖 섬찟한 악마 숭배 상징과 부두교 의식이 핏빛으로 책장을 피로 물들이는 오컬트 호러의 냄새도 짙게 풍겨온다. 대체 어떤 결말이 기다릴까 긴장하며 몰입하다 보니, 어느새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있었다. 미국 대중문화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레이먼드 챈들러풍의 하드보일드에, 당대(1970년대) 유행했던 <엑소시스트> <로즈마리의 아기> <오멘> 등의 오컬트가 결합되는 순간 마치 마법과도 같은 화학 작용이 발생하였다. 잠복, 미행, 격투와 추리 등 익숙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매력에 푹 빠져 읽을 독자들도, 악마가 등장하는 악몽 같은 공포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들도 모조리 매료시킬 대단한 작품. 결말의 반전은 지금 보기엔 어느 정도 빤하지만, 이런 류의 반전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출간 당시에는 대단한 화제가 되었을 것 같다(박찬욱 감독의 모 영화와 상당히 비슷한 반전이 아닌가 싶다). 올해 최고의 작품 중 한 편으로 정말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다. 심지어 보너스로 실린 아주 짧은 단편 <짝패>마저도 재미있다.

 

 

3위 두 번째 총성 - 앤소니 버클리 

 



 

 

 

 

 

 

앤소니 버클리는 우리나라에서 지명도가 코넌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에 미치지 못하지만, 추리소설사적으로는 그들 못지않게 중요한 거장이다. 본격 추리소설의 대가들이 활동했던 1930년대에 역시 뛰어난 필력을 과시했으며, 하나의 사건을 놓고 여러 명의 탐정이 각자의 해답을 발표하는 <독초콜릿 사건>이나 탐정이 아닌 살인자의 심리를 강조하는 <살의> 같은 작품들은 기존 추리소설의 클리쉐를 하나하나 타파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가적 면모를 보여준다. 1930년에 발표한 <두 번째 총성>에서도 그는 또 한 번 살인-수사-추리의 순서로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종래의 추리소설을 넘어서려 하는데, 본인이 쓴 작품의 서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마디로 탐정소설은 더 복잡해져야 합니다. 현실에서는 정말 평범한 살인 뒤에도 여러 감정과 극적인 상황, 미묘한 심리와 무모한 행동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이 추구하는 바가 되어야 하지만 진부한 탐정소설 속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면이지요." 아마도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그럴싸한 '추리'뿐 아니라, 그럴싸한 '소설'을 쓰고 싶었던 작가의 출사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과연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사건의 와중에 조금씩 싹트는 주인공들의 로맨스나 영국 시골 마을에서 사건에 휘말린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반응이라 작가의 실험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앤소니 버클리의 메인 탐정, 로저 셰링엄이 살인 연극과 똑같이 벌어진 진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친구를 변호한다. 그 친구는 사상 최악의 보수적인 샌님.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고로 무장한 신여성과 티격태격하다 점차 사랑에 빠지는 추리소설 역사상 최고의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다. 이들의 불꽃 튀기는 사랑 전쟁은 누구나 흠뻑 빠질 만하다. 그러나 주의하시라. 앤소니 버클리는 손꼽히는 '추리소설가'라 결말이 그리 말랑하지만은 않을 테니...

 

 

2위 시인 - 마이클 코넬리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이클 코넬리의 대표작. 그는 LA의 외톨이 경관 해리 보슈 시리즈를 주로 쓰고 있는데, <시인>의 주인공은 신문기자 잭 매커보이다. 사망이나 부고 기사를 주로 다루는 그는 스스로를 '죽음 담당'이라 부르며 그럭저럭 제몫을 해낸다. 하지만 경찰로 일하는 자신의 쌍둥이형 숀의 자살을 통해, 가벼운 마음으로 쓰곤 했던 죽음 기사가 남겨진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를 깨닫고 절망한다. 어느 정도 상처를 극복했을 무렵, 잭은 에드거 앨런 포의 시구를 유서로 써놓고 자살한 형 말고도,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역시 포의 시구절을 남기고 자살한 경관들이 즐비함을 발견한다. 경찰만을 노리는 새로운 연쇄살인범의 출현을 감지한 그는 기자의 본능인 특종과 형의 복수를 위해 사건의 한복판으로 곧장 뛰어든다! 죽음을 가볍게만 여겼던 주인공이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 도입부부터 독자를 빨아들인다. 남의 죽음으로 장사를 했던 지난 날을 후회하며 진지하게 형의 죽음에 맞서는 주인공의 행동 동기는 독자와 주인공의 감정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듯. <양들의 침묵>으로 폭발했던 1990년대 사이코 스릴러의 유행 아래 나온 작품이지만, 내 생각에 그 이상이거나 적어도 비슷한 수준은 가는 것 같다. 사이코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소설이 항상 그렇듯 FBI들의 정교한 수사 방식 묘사도 등장하고, 영화화하기 딱 좋은 잔인한 살해 장면이나 주인공과 여수사관의 안타까운 로맨스, 무엇보다 독자의 주의를 온통 한쪽으로 쏠리게 한 다음 뒷통수를 치는 교묘한 반전 등 모든 게 일류의 솜씨다. 마이클 코넬리는 해리 보슈, 잭 매커보이, 미키 할러 등 자신의 주인공들을 매 작품마다 종횡으로 연결시키는데 명수다. 그러니까 미드로 치면 스핀오프 방식이랄까. 어느 작품에서 좋아했던 해리 보슈가 다른 작품에서는 조연으로 나오고, 이 작품에서 언뜻 언급되었던 사건이 다른 책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는 등 독자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시인>은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장면도 허투루 볼 수 없는 빼어난 스릴러. 거의 완벽에 가깝다.

 

 

1위 차일드44 - 톰 롭 스미스 

 

 

 

 

 

 

 

 

스탈린 시대의 소련을 배경으로 경찰과 유아 연쇄살인범의 대결을 그린다. 아무래도 신인작가 톰 롭 스미스의 굉장한 데뷔작 <차일드44>의 가장 탁월한 점은 철의 장막으로 가려진 당시 소련의 사회 분위기를 손에 잡힐 듯 그려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KGB의 전신인 MGB에서 꽤 큰 신임을 받는 수사관 레오는 스파이로 의심받는 수의사를 체포하면서 최초로 완벽하다고 믿어왔던 이 노동자들의 천국에 의심을 품게 된다. 단지 미국 대사의 개를 치료해줬다는 것만으로 스파이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는 수의사가 억울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신탁이나 다름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상부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자신의 모습이 과연 옳은 걸까. 그러나 레오의 진정한 위기는 사형당한 수의사가 적어낸 동료 스파이 명단에 자신의 아내가 올라 있다는 걸 발견하고 나서부터 시작된다. 아내를 고발하고 살아남아 여태까지 누렸던 안락한 삶을 계속 유지하느냐, 아니면 아내와 함께 모든 걸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느냐. 초반부 레오의 이 도덕적 딜레마는 사회구성원 모두(심지어 가족까지도)가 서로를 감시하며, 한 발만 삐끗하면 곧바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스탈린 치하의 사회상을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줘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44명의 어린이를 살해한 연쇄살인범을 추격하는 레오의 가장 큰 고뇌 역시, 증거 부족이나 범인을 체포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소련의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의 천국. 그곳에는 공식적으로 범죄가 있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회에 범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선동 문구가 거짓이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 지도부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건을 은폐하고 오히려 기존 질서를 해한다는 명목 아래 레오를 처치하려 한다. 국가라는 가장 강대한 적에게 쫓기면서도 진실과 정의를 위해 끝까지 단념하지 않는 레오의 자유 의지는 너무나도 감동적이고, 레오의 열정이 점차 민초들에게 번져 대대적인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대목은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답다. 진실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으로 소설의 핵심 요소인 흥미와 문학성, 두 마리 토끼를 멋지게 잡은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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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0-02-0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럴 수가! <시인>만 읽었네요..ㅜㅜ <차일드44> 흥미롭습니다..^^

카스피 2010-02-0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딕슨 카를 너무 많이 읽은 사나이'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 작가의 작품이 나왔군요.어디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jedai2000 2010-02-02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차일드44> 아마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재미는 <시인>이 더 있었는데, 더 감동적이고 힘있는 작품이라서요...

카스피님...앗, 아닙니다. <존 딕슨 카를 너무 많이 읽은 사나이>는 윌리엄 브리텐(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인가 하는 작가의 작품입니다. 전 그냥 제목만 차용한 거예요^^
 

*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2009년에 출간된 책만을 포함하며,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일본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5위 전설 없는 땅 - 후나도 요이치 




 

 

 

 

 

 

매년 일본에서 출간되는 미스터리를 대상으로 순위를 매기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의 최초 1위작. 열대 우림의 원시적인 생명력이 넘실거리는 남미라는 이국적인 배경 속에서, 욕망으로 꿈틀대는 일군의 거친 사나이들이 거액의 돈과 천연자원을 놓고 격돌한다. 작가 후나도 요이치는 국제 모험소설이라 불리는 이 장르의 장인으로, 국내에 그의 작품은 휴양지로 유명한 필리핀 세부의 참혹한 현실을 다룬 <무지개 골짜기의 5월>이 번역되어 있으며 그 외에 이 작품만 소개되었다. 기둥 줄거리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고전 명작 <7인의 사무라이>와 비슷한데, 7인의 용병(이중 2명이 일본인이다)이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땅을 빼앗으려는 베네수엘라의 자본가 집단에 맞서 콜럼비아 난민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처절한 전쟁이 끝나고 민초들만 살아남아 다시금 삶을 살아가는 마지막 장면 역시 <7인의 사무라이>를 연상시킨다. 결국 역사의 승자는 몇 명의 영웅이 아니라,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어떠한 역경에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삶을 살아나가는 민초들이라는 걸 말하려는 작가의 메시지가 아닐까. 언뜻 보면 기관총과 폭탄이 난무하는 테스토스테론 과다분비 액션활극이라 할 수도 있지만, 30년 넘게 남미와 동남아 등을 누비며 직접 취재를 하고 당대 제3세계의 현실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책 속에 담아내는 후나도 요이치의 작품은 한 편의 인문서로서도 손색이 없으니 말초적인 재미에만 치중하는 여타의 활극과는 분명히 그 궤를 달리한다.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소설을 읽고 싶은 분에게 추천한다.
 
 
4위 죽음의 샘 - 미나가와 히로코 
 
  
  
 

 

 

 

 

 

독일 나치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애인의 군입대로 혼자 아이를 낳아야 하는 마르가레테는 '생명의 샘'이라는 뜻을 가진 레벤스보른 출산원에 입소한다. 당시는 인종주의나 우생학이 극에 달했던 시기라 우월한 아리안의 피를 가진 아이를 낳도록 나치 정부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레벤스보른에서 간호사 일을 하며 자신의 아이를 낳을 준비를 하던 마르가레테는 의사 클라우스 베셀만의 청혼을 받아들여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게 되지만, 동시에 그가 거둬들인 두 양자의 어머니 역할도 해야 한다. 그러나 궁극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클라우스는 점차 광기를 드러내며 그녀와 아이들을 압박하는데...작가는 10년에 달하는 자료조사와 구상 기간을 거쳐 완성했다고 하는데, 과연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나 헤르만 괴링 같은 실제 나치의 지도자들은 물론, 잔학한 생체실험으로 유명한 요제프 맹겔레 박사도 클라우스의 선배로 나오는 등 역사적 고증도 탄탄해 한마디로 묵직한 소설 읽는 맛이 있다. 또한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쓴 '나선형 폐성'이라는 수기를 일본 번역가가 일본어로 옮겼다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어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사실감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나치가 행했던 생체실험과 인종 청소 등을 가감없이 보여줘 전쟁이 힘없는 여자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가에 대한 가슴 아픈 진실을 알리며, 성악을 통해 극한의 미의식을 완성시키려 하는 클라우스의 광기는 미와 추, 예술 지상주의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든다. 일본 번역자 후기를 통해 한 번의 반전을 더 꾀하고 있는데, 분명 흥미로운 건 사실이지만 내내 진지했던 작품에 굳이 그런 기교까지 부릴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은 있다. 뛰어난 문장력과 신비스런 분위기, 생각지도 못했던 추리소설다운 트릭에 뜻밖의 반전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다.
 
 
3위 방해자 -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폭소탄 유머소설가로 자리매김한 오쿠다 히데오가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미스터리 걸작. 두 아이의 엄마로 대형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림에 보태는 평범한 주부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다니는 작은 회사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 당시 유일하게 회사에 남아 있던 남편이 용의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소박한 행복에 서서히 균열이 오기 시작한다. 만약 내 남편이 범인이라면?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손가락질을 받고, 남편은 회사에서 해고되어 집 대출금조차 갚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고민은 나비 효과처럼 작은 실수들이 눈사태처럼 커져 언제든지 한순간에 아찔하게 추락해버릴 수 있는 현대인의 마음속 공포를 놀랍도록 날카롭게 자극한다. 한편 이 방화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는 교통사고로 임신 중인 아내를 잃고 불면증과 신경 쇠약에 시달리는데, 야쿠자와 결탁한 선배 형사를 감시하는 모두가 기피하는 더러운 일을 하다가 우연히 시비를 거는 동네 불량소년을 폭행해 목이 잘릴 판이다. 커다란 금전적 피해나 인명 사고도 없는 자그마한 방화 사건에 얽힌 주인공들의 내일은 이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하며, 누구나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는 우울한 운명의 소용돌이로 가득하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닥친 비극을 통해 현대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같은 해에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과 느낌이 비슷하고, 어느 평범한 주부의 어쩔 수 없는 일탈 행동을 그려 강렬한 독서 체험을 선사하는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도 생각나는 줄거리다. 전 3권으로 출간되어 금전적인 부담이 있지만, 정말이지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박진감 넘치는 책으로 특히 2권 마지막 페이지에서 돋은 오싹한 소름은 지금도 생생하다.

 
2위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 야마구치 마사야 



 

 

 

 

 

  

1989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현재까지 일본 미스터리 사상 최고 걸작 중 한 편이라는 어마어마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 199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가 뽑은 과거 10년간 베스트 1위, 20주년 기념 베스트에서는 2위(1위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도쿄 쇼겐샤 선정 본격 추리소설 100선에서도 당당히 1위를 기록, 타이틀 만으로는 국가대표급 추리소설이라 할 만하다. 최근 미국에서 시체가 되살아나는 믿지 못할 일들이 연속되는 가운데(작품 속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기능한다), 뉴잉글랜드의 거대 장의업자 가문에서 벌어지는 연속 살인사건을 어쩌다 보니 '되살아난 시체'가 된 주인공 그린이 탐정이 되어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되살아난 시체들은 일단 죽었기 때문에 생체 활동이 멎어 서서히 썩어가는 애로사항은 있지만, 살아 있을 때와 동일한 지적 능력과 기억을 가지고 있어 충분히 탐정으로 활약할 수 있다. 보통 대부분의 미스터리는 금전적 동기나 입막음 등을 위해 누군가를 죽인 범인을 찾는 게 핵심적인 요소지만, 이 작품에서는 사람을 죽여도 곧바로 되살아나기 때문에 그런 일반적인 동기가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죽여봐야 얻을 수 있는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죽여야만 할까? 이 점을 치열하게 파고들면 이 복잡한 사건들의 진짜 얼개가 보일 거라는 힌트를 드리고 싶다. 일종의 좀비가 나오는 비현실적인 설정의 작품이지만, 어디까지나 추리소설, 그것도 독자와의 치열한 두뇌싸움과 앞뒤가 딱딱 맞는 논리성으로 충만한 본격 추리소설이다. 무엇보다 주인공 그린 자체가 '살아 있는 시체'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린의 경우를 통해 다른 '살아 있는 시체'의 능력이나 심리, 행동 원리 등을 철저히 분석할 수 있다. 이처럼 작가가 손에 쥔 모든 카드를 철저하게 공개하는 셈이니 어디서도 반칙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는 작은 설정이나 단서들까지 꼼꼼하게 따져가면 당신도 충분히 답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시체가 되살아나는 불가해한 '매직'을 철저한 '로직'으로 풀어내는 본격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1위 내가 죽인 소녀 - 하라 료 



 

 

 

 

 

 

일본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거장 하라 료의 두 번째 작품. 하라 료는 이 장르의 진정한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을 수없이 읽고 충실하게 사숙한 끝에, 챈들러의 페르소나이자 셜록 홈스에 버금가는 영원한 탐정의 아이콘 '필립 말로'를 방불케 하는 사와자키 탐정을 창조했다. 전작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사와자키 탐정은 갈 데 없이 고독하고 황량한 내면을 드러내지만, 내게는 몰래 숨겨두고 있다가 가끔씩 꺼내 보이곤 하는 그의 따스한 품성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질 따름이다. 이번 작품에서 사와자키는 천재소녀 바이올리니스트의 유괴 사건에 휘말려 범인들에게 돈을 건네주고, 소녀를 되찾아오는 어려운 의뢰를 맡게 된다. 범인들이 시키는 대로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다 외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다른 2인조 불량배에게 습격을 받아 돈가방을 뺏기고 기절해버리는 사와자키. 그는 간신히 깨어났지만, 범인들은 원하는 장소에서 돈을 받지 못했으므로 계약은 종료됐다고 고한다. 결국 며칠 뒤 소녀는 시체로 발견되고 사와자키는 엄청난 자괴감에 빠져 절망한다. 내가 제대로 돈가방을 운반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녀가 죽었구나, 하고. 제목의 <내가 죽인 소녀>는 이런 의미다. 사와자키 탐정은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고 소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소녀 유괴 및 살해를 행한 진짜 범인들과 중간에 돈가방을 털어 모든 일을 꼬이게 만든 2인조 불량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별 볼일 없는 의뢰라고 생각했던 일 뒤에 엄청난 음모가 있었다는 플롯과 속도감 넘치는 전개, 여전히 하드보일드의 에센스를 간직한 근사한 문장의 향연이 펼쳐진다. 더구나 끝에는 웬만한 본격 미스터리를 능가하는 트릭과 반전까지 있으니, 읽는 동안 남은 페이지가 아까울 정도였다. 50쪽만 더 읽으면 끝이구나, 아깝다, 하며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 면에서 일본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사건의 배후에 드러난 동기가 결국 일본적인 '폐'를 끼치지 않는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는 게 그 첫째다. 두 번째는 남의 것(특히 서양)을 가져와 일본식으로 아기자기하게 다듬어 때때로 원본보다 오히려 더 나은 걸 내놓는 전형적인 일본 문화가 떠올라서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문체나 분위기 등을 일본이라는 배경 속에 위화감 없이 녹여내고, 챈들러의 작품에는 부족했던 트릭이나 반전 같은 추리소설 장치들은 더욱 강화시킨 모양새가 딱 그렇지 않나.

 
베스트 단편

<고백> 중 '성직자' - 미나토 가나에 

 


              

 

 

 

 

 

2008년 일본 서점계를 휩쓸었던 작품. 판매만큼이나 비평적으로도 호평을 받아 신인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이 작품 한 편으로 그야말로 신데렐라로 부상했다. 어느 중학교에서 벌어진 몇 건의 살인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 각자의 시점에서 정말은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인가를 '고백'하는 형식으로 이뤄진 연작 단편집으로, 작가가 원래 공모전에 출품해 호평받은 첫 번째 단편 '성직자'의 뒷이야기를 이어서 쓴 것이다. 중학생 제자들의 장난으로 소중한 딸을 잃은 여교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복수를 한다는 내용의 단편 '성직자'는 전혀 피칠갑을 하지 않고도 조근조근히 서스펜스의 피치를 올려가다 결말에서 범인인 제자는 물론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까지 어마어마한 공포를 안겨주고 끝이 난다. 연작 단편집이니만큼 뒤에 실린 다른 단편들과 내용도 이어지고, 사실 뒷이야기들도 다 재미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이고, 모골이 송연했던 단편은 역시 '성직자'였기 때문에 <고백>이라는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을 시간이 없는 분들도 이 단편 하나만이라도 꼭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마음에 선정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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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0-01-2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위와 2위, 베스트 단편은 읽었네요^^;;; 선방했다는. '방해자'가 문득 읽고 싶어집니다~

이매지 2010-01-24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죽인 소녀, 살아있는 시체-는 읽으려고 쟁겨둔 책들인데,
전설 없는 땅은 이 참에 보관함에 쏙 넣었어요 :)

jedai2000 2010-01-25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방해자' 재미 보장입니다~ 제가 유독 좋게 본 건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3권을 빛의 속도로 읽었다능ㅎㅎ 회사에서도 몰래 보고 그랬답니다^^

이매지님...'내가 죽인 소녀'는 범행 동기가 심하게 일본적이라는 약점은 있지만, 그거야 일본에서 나온 책이니 당연한 거겠지용. 그 점만 양해해준다면 역대 최고작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전설없는 땅'도 읽는 내내 흥미로우실 겁니다^^

빅마마 2010-01-31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내가죽인 소녀만 읽었네요 전설없는 땅부터 언능 봐야겠습니다~

jedai2000 2010-02-01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빅마마님...부디 즐거운 독서하시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