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밥집'이나 '깨끗한 가게'라 이름을 붙인다면 가장 훌륭하다 할 만하지만, '클린'이나 'clean'이나 '청정'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은 대목으로도 참으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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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니다’와 ‘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새해를 맞이합니다. 새롭게 맞이한 해인 만큼 나이는 한 살 더 먹어 서른일곱이 됩니다. 제 나이 서른일곱이란 대단한 숫자가 아니요, 그리 많은 숫자 또한 아닙니다. 서른일곱이라면 서른일곱에 걸맞게 살아가면서 서른일곱에 걸맞게 생각하고 서른일곱에 걸맞게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올바릅니다.

 새해 첫날, 내 글투는 어떠한가 하고 새삼스레 곱씹어 봅니다. 지난날 내 글투가 어떠했는가 가만히 헤아립니다. 1998년에 한글학회에서 주는 ‘한글공로상’을 참 어린 나이에 받기는 했으나, 이때에는 신나게 팔뚝질을 하듯이 운동을 했을 뿐, 참다이 말사랑이나 글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사회가 사회이다 보니 팔뚝질 아니고서는 사람들이 귀나 눈을 열지 않기도 했다지만, 차분하게 말사랑 글사랑을 펼치지 못했어요. 이무렵 제가 쓴 글을 돌아보면 ‘것’을 얼마나 자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것도 그저 지나간 일이 되고 마는 것인지” 같은 글을 곧잘 썼어요. 이제는 이렇게 글을 쓰지 않고 말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 또한 그저 지나간 일이 되고 마는지”처럼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아니면 “이마저 한낱 지나간 일로 삼고 마는지”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해요.

 1998년에 쓴 글을 되짚으니 “먼저 풀어야 한다. 더불어,” 같은 글투도 보입니다. 이 대목도 엉터리입니다. ‘더불어’를 글 맨앞에 외따로 쓸 수 없어요. “이와 더불어”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2007년부터 2009년 첫머리 사이에는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이라는 낱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놓고 오래도록 머리앓이를 했습니다. 이러한 낱말은 한자말 아닌 우리 말로 삼아서 그대로 써야 하지 않겠느냐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낱말을 쓰고 다시 쓰다 보니 어쩐지 저 스스로 초라하지 않느냐 싶더군요. 고작 이런 낱말조차 우리들이 지난날부터 곱게 쓰던 말투를 살피어 새로운 오늘날에 알맞게 담아내지 못한다면 말사랑 글사랑이란 덧없지 않겠느냐 생각했어요. 이러는 동안 ‘자신’이나 ‘자기’라는 낱말이 깃드는 자리를 곰곰이 돌아보았습니다.

 ┌ 자신은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 나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나로서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당신은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그때에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


 적잖은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뿐 아니라 다른 낱말을 옳게 다듬거나 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과 말은 1:1로 맞추어 고치거나 다듬을 수 없는데, 이 낱말이 이런 자리에 쓰이든 저런 자리에 쓰이든 1:1로만 생각해 버릇하거든요. ‘자신’ 한 가지를 다듬을 때에도 마찬가지예요. 맨 처음으로는 ‘나’로 다듬습니다. 글흐름을 살피다 보면 ‘나로서는’처럼 ‘-로서’를 사이에 넣어야 한결 부드럽기도 하고, ‘당신’이나 ‘이녁’이나 ‘그 사람’이라고 넣어야 알맞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때에는’이나 ‘그무렵에는’을 넣어 줍니다. 그야말로 때와 곳에 따라 다듬을 말투가 다릅니다.

 ┌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
 │→ 이름을 소담스레 여기고
 │→ 이름을 대수로이 여기고
 │→ 이름을 알뜰히 여기고
 │→ 이름을 아름다이 여기고
 │→ 이름을 고맙게 여기고
 │→ 이름을 보배로이 여기고
 └ …


 ‘소중(所重)’이라는 한자말을 놓고도 퍽 오래도록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이만 한 한자말 또한 구태여 한자말로 갈라야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 말 운동이라더니 아주 막 나가는군’ 하고 여길까 싶었습니다.

 이태쯤 앞서부터 ‘소중’이라는 낱말은 되도록 안 쓰지만, 서너 해쯤 앞서까지는 이 한자말을 그대로 쓰곤 했습니다. 이제는 이 낱말을 아예 안 써요.

 처음에는 ‘소담스럽다’라는 낱말을 써 보았습니다. 국어사전에 실린 ‘소담스럽다’는 두 가지 뜻풀이가 달립니다. 첫째는 “생김새가 탐스러운 데가 있다”이고 둘째는 “음식이 풍족하여 먹음직한 데가 있다”입니다. 왜 이 낱말 ‘소담스럽다’를 ‘소중하다’와 맞추었느냐 하면, 어느 날 ‘탐(貪)스럽다’라는 외마디 한자말 뜻풀이를 헤아리니, “마음이 몹시 끌리도록 보기에 소담스러운 데가 있다”로 나오더군요. 이 말풀이에 나오는 ‘소담스러운’이라는 낱말이 눈에 확 들어왔고, “소담스럽게 쌓인 눈”이라는 보기글을 곰곰이 생각하니까, “소담스럽다 : 마음이 몹시 끌리도록 좋다”라는 느낌으로 쓸 만한 낱말이구나 싶었어요.

 “소중하다 = 매우 귀중하다”입니다. “귀중하다 = 귀하고 중요하다”입니다. “귀하다 = 아주 보배롭고 소중하다”입니다. “중요하다 = 귀중하고 요긴함”입니다.

 여느 사람들은 ‘소중하다’가 무슨 뜻이요 어떤 쓰임인지 제대로 모릅니다. 그냥저냥 쓰는 낱말입니다. ‘보배롭다’가 토박이말인 줄 모르는 사람도 아주 많아요. 아니, 생각조차 않겠지요. 그래, ‘보배로이’는 ‘소중하게’하고 거의 똑같은 낱말이에요. 이 낱말을 쓰면 ‘소중하게’는 퍽 말끔히 털어낼 만합니다.

 다만, 모든 자리에 ‘보배로이’를 쓰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때에는 ‘보배로이’를 쓰고, 어느 자리에는 ‘소담스레’를 씁니다. 국어사전은 예나 이제나 ‘소담스럽다’ 말풀이를 두 가지로 못박지만, 얼마든지 세 가지 네 가지 말풀이와 쓰임새가 늘어날 만합니다. 우리 스스로 다섯 가지 여섯 가지 말풀이와 쓰임새를 북돋우면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소담스럽다’ 같은 낱말을 더욱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느껴요. 그리고 ‘알뜰히’나 ‘살뜰히’나 ‘알뜰살뜰히’를 쓰면서 ‘소중히’를 털 수 있고, ‘아름다이’나 ‘고이’, 여기에 ‘대수로이’를 쓰면 거의 모든 자리에서 깔끔하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 펼쳐 보이고 있으니까요 (x)
 └ 펼쳐 보이니까요 (o)

 지난 2010년 여름께부터는 ‘있다’라는 말투를 되짚습니다. “하고 있다” 꼴로 쓰는 ‘있다’를 톺아봅니다.

 “보이고 있으니까요”처럼 적는다 해서 이 말투를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거의 모두라 할 만한 이 나라 사람들 누구나 이렇게 말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 말투가 영 낯설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학교교육이라든지 책이나 방송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오던 사람들 ‘말을 담은 글’을 읽으면서 이런 말투를 하나도 찾아보지 못했어요.

 ┌ 바깥말 자리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x)
 └ 바깥말 자리에만 머뭅니다 (o)

 제가 쓴 예전 글을 다시금 읽으며 “하고 있다”나 “-고 있다” 꼴 말투를 살펴봅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우리 말법을 영어 말법에 끼워맞추면서 이런 말투가 자꾸 퍼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람들이 영어를 널리 배우거나 가르치면서 이런 말투를 스스럼없이 쓰는구나 싶습니다.

 우리 말글을 조금 배운 사람은 알 텐데, 우리 말에는 ‘지난날 때매김’이 없습니다. ‘현재진행형’ 또한 없습니다. 영어이든 다른 서양말이든 때매김이 똑부러지게 나뉘고, 현재진행형 말투가 참 잦아요. 서양책을 한국말로 옮기며 현재진행형 말투인 “하고 있다”와 “-고 있다”가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 토박이말로 짓고 있다면 (x)
 └ 토박이말로 짓는다면 (o)


 어찌 보면, 이제는 우리 말글에도 ‘지난날 때매김’을 넣거나 ‘현재진행형’을 달아도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예스러운 말투로 말해야 할 까닭이 없다 여길 수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우리는 우리 이웃하고 우리 말글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넋과 얼을 보듬으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넉넉합니다. 괜시리 서양 말법처럼 우리 말법을 다루어야 하지 않아요.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한글로 글을 쓰면 되고, 일본사람은 일본땅에서 가나로 글을 적으면 돼요. 서양사람은 로마자라 하는 알파벳을 쓰면 되겠지요.

 셈틀을 쓰며 인터넷으로 국어사전을 살필 때에는 국립국어원에 들어갑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창을 보면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다양한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답변은 드리지 않습니다.” 하고 적혔습니다(지난해 첫머리까지만 해도 저는 이 대목에서 “적혀 있습니다”라 글을 썼으나, 이제는 “적혔습니다”라 글을 씁니다). 말글을 다루는 공공기관이자 정부부터 글을 이렇게 써요.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란 무엇이려나요.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말투이고, 이런 글은 어느 나라 글이라 할 만한가요. “표준국어대사전이 어떠한지 여러분 생각을 들려주셔요. 따로 답변하지는 않습니다.”처럼 적어야 할 글이 아닌지요. 그나저나 답변도 안 해 주면서 표준국어대사전이 어떠한가 하고 알려 달라고 적은 모양새가 쓸쓸해 보입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으면 대꾸를 해야 할 텐데, 귀는 있되 입이 없으면 어떡하나요. (4344.1.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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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우리말>에 실을 네 번째 글. 

가. 우리말 생각 ㉣ 우리 겨레 말글


 아저씨는 네 살짜리 아이와 막 태어날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입니다. 둘레 분들은 저처럼 ‘어버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습니다. 다들 ‘부모(父母)’라는 낱말만 쓰셔요. 저도 때에 따라서는 ‘부모’라는 낱말을 쓰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를 아울러 가리키는 우리말”인 ‘어버이’라는 낱말을 한결 좋아합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낱말을 즐겨써요.

 그러고 보니, 저는 ‘즐겨쓰다’라는 낱말을 붙여서 씁니다. 말사랑벗들은 알까 모르겠는데, 동무들이 인터넷을 켤 때면 차림판 한쪽에 ‘즐겨찾기’라는 자리가 있어요. 인터넷이 처음 나오던 때에는 영어로 ‘favorite’이라고 적혔는데, 나중에 이처럼 한글이자 우리말 이름 ‘즐겨찾기’가 붙었어요. 누가 이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참 잘 지었다고 느낍니다. 이 이름은 처음에는 낱말책에 안 실렸지만, 이제는 떳떳하고 당차게 낱말책 올림말이 되었어요.

 인터넷을 켤 때면 늘 이 낱말 ‘즐겨찾기’를 생각합니다. “즐겨서 찾아가는 곳을 한 데에 묶었”을 때에 ‘즐겨찾기’라 하듯이, ‘즐겨-’라는 앞마디를 발판 삼아서 ‘즐겨먹다’나 ‘즐겨쓰다’나 ‘즐겨읽다’나 ‘즐겨보다’ 같은 새 우리말을 지을 수 있어요. ‘애용(愛用)하다’라 하기보다는 ‘즐겨쓰다’라 하면 좋고, ‘애독(愛讀)하다’라 할 때보다는 ‘즐겨읽다’라 하면 나으며, ‘애청(愛聽)하다’라 하지 말고 ‘즐겨보다’라 하면 훨씬 즐겁습니다.

 아저씨가 이 글을 쓰는 내내 네 살짜리 아이는 아빠 무릎에 앉거나 등에 업히거나 옆에 나란히 앉아 책을 펼쳐 놓고 아빠가 함께 읽어 주기를 바랍니다. 아빠 된 몸으로서 글만 쓸 수 없으니, 글 쓰던 손을 멈추어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넘깁니다. 가위 바위 보 하는 그림이 나오면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가위 바위 보” 노래를 불러 주고, 공 차는 모습이 나오면, “공을 차네.” “공을 잡네.” 같은 말을 들려줍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언니가 댕기를 예쁘장하게 맸으면 “댕기를 맸네.” 말하고, 아이는 곧바로 “댕기 맸네.” 하며 따라합니다.

 말사랑벗들은 ‘댕기’라는 낱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 모르겠군요. 으레 ‘리본(ribbon)’이라는 소리만 듣지 않았나 싶어요. 얼마 앞서는,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한테 ‘세모뿔’이라고 가르쳐야 하느냐 ‘삼각뿔’이라 가르쳐야 하느냐를 놓고 머리를 갸웃갸웃했습니다. 우리말로 ‘세모’랑 ‘네모’를 가르치고 싶으나, 아이가 학교에 든다든지 여러 가지 책(수학책)을 익힌다든지 할 때에는 어김없이 ‘세모’나 ‘네모’라는 낱말은 없고 ‘삼각(三角)’과 ‘사각(四角)’이라는 낱말만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와 교과서와 사회를 헤아린다면 우리 아이 또한 ‘삼각’이랑 ‘사각’이라는 낱말로 배워야 할 테지요. 게다가 ‘삼각팬티’라고만 하지 ‘세모속옷’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삼각관계’라 일컫지 ‘세모사이’라 일컫는 사람 또한 없고요.

 길에서도 비슷합니다. 우리 식구는 ‘세거리’와 ‘네거리’와 ‘건널목’과 ‘거님길’ 같은 낱말을 쓰지만, 다른 분들은 ‘삼(三)거리’와 ‘사(四)거리’와 ‘횡단보도(橫斷步道)’와 ‘인도(人道)’라는 낱말을 쓰셔요.

 《건방진 우리말 달인(기초편)》이라는 책을 읽다 보면 “경기 지방 사투리거든(19쪽).”이라는 대목이 나와요. 꽤나 많은 분들은 이처럼 엉터리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데, 말하는 사람이나 책을 내놓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조금도 깨닫지 못해요. 이 말마디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몰라요. 그래서, 어떤 이는 “고통과도 같은 괴로움”이라 말하고, 어떤 분은 “나와 다른 타인”이라 말하기도 하며, “축제가 열리고 개최된다”라 말하는 사람마저 있습니다. “살다가 거주했습니다”라 말하는 사람이라든지 “쉽게 평이하게 쓴다”고 말한다든지 “길을 걸으며 하이킹을 한다”고 말하거나 “배려의 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해요. 말사랑벗들은 이 말이 엉터리인지 아닌지 알겠어요?

 차근차근 짚어 볼게요. 먼저, ‘사투리’는 “어느 한 지방에서 쓰는 말”을 가리킵니다. ‘지방말’이나 ‘지역말’이 ‘사투리’예요. 어떤가요. 이렇게 풀이해 보면 알 만한가요. “경기 지방 사투리”라 적은 글은 “경기 지방 지방말”이라 적은 꼴이에요. “경기 사투리”라 적거나 “경기 지방 말”이라 적거나 “경기도 고장말”이라 적어야 올발라요. ‘고통(苦痛)’은 ‘괴로움’을 가리키는 한자말이에요. 그러니까 “고통과도 같은 괴로움”이란 얼마나 멋없는 말인가요. ‘타인(他人)’이라는 한자말은 ‘남’, 곧 ‘다른 사람’을 일컬어요. “나와 다른 타인”이란 말이 안 되는 말이랍니다. 자, 이제 다른 엉터리 말이 왜 엉터리 말인지는 말사랑벗들이 하나하나 살펴보겠어요?

 손수 낱말책을 뒤적이면서 말뜻을 찬찬히 헤아리다 보면,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푸름이이든, 우리가 주고받거나 펼치는 말글 가운데 옳지 못하거나 어이없거나 알맞지 못한 대목이 지나치게 많은 줄 깨달으리라 생각해요. 우리들은 ‘한겨레’라고는 하지만 정작 한겨레답게 한겨레 말을 하지 못하는 판이에요. 겨레말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겨레글을 옳게 쓰지 못해요. 겨레말이 튼튼하게 자리잡지 못하니까 겨레얼을 한껏 북돋우지 못합니다. 겨레글을 알차게 가꾸지 못하니까 겨레넋을 싱그럽거나 슬기롭게 다스리지 못해요.

 동무들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를 어느 만큼 아는가요.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인 유미리 님이 쓴 책을 읽어 보았나요. 나중에 한번 찾아서 읽어 보셔요. 사기사와 메구무라는 분도 있는데, 이분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일본 국적’인 분인데, 소설을 쓰던 어느 날, 자료를 찾느라 당신 할머니랑 할아버지 발자취를 알아보다가 당신 할머니가 북녘사람임을 알아채고는 깜짝 놀랐답니다. 당신한테 1/4만큼 한겨레 피가 흐르는 줄을 느즈막하게 알았는데, 당신 어버이는 이런 일을 몰랐거나 얘기를 안 했대요. 그러니 이름부터 아예 일본 이름인 ‘사기사와 메구무’였겠지요. 이분이 쓴 소설 가운데 《당신은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라는 작품이 있어요.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아팠어요. 유미리 님이 쓴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를 읽으면서도 가슴이 촉촉했습니다. 이분들, 이른바 ‘재일조선인’이라는 한겨레 문학을 읽다 보면, 남녘에서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일본에 한국사람이 사는 줄 까맣게 모르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대목이 얼핏설핏 나옵니다. 참 그럴까 하고 놀라다가는, 요즈음 사람들 말매무새와 마음밭을 들여다보면 참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는 남녘땅 사람들만 한겨레인 줄 알기 일쑤이고, 북녘땅이나 일본땅이나 중국땅이나 러시아땅에 똑같이 한겨레가 살아가는 줄 생각하지 못하거나 살피지 않기 일쑤예요. 더구나, 이 나라 바깥 한겨레만 제대로 모르는 우리들이 아니라, 이 나라 안쪽인 남녘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한겨레를 제대로 모르기 일쑤예요. 이제 ‘이웃사촌’이라는 낱말은 옛말입니다. ‘이웃’이라는 말조차 쓰기 멋쩍습니다. ‘동무’라든지 ‘벗’이라는 낱말을 쓰면서 사귈 만한 살가운 사람은 얼마나 되려나요. ‘어깨동무’나 ‘씨동무’라 할 만한 사랑스러운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남을 살피기 앞서 나 스스로 내 둘레 사람들한테 ‘이슬떨이’나 ‘길동무’나 ‘너나들이’ 노릇을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말사랑벗님들을 비롯해, 저나 제 둘레 모든 사람들, 곧 우리 한겨레가 어깨동무하면서 즐거이 쓸 우리말이란, 남녘을 비롯해 북녘과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에서 골고루 서로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넋으로 나눌 말입니다. 남녘땅 테두리에서 살핀다면, 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라든지 기자나 법관이나 정치꾼이나 공무원이나 교사 같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저잣거리 장사꾼이랑 시골 농사꾼이랑 바닷가 고기잡이랑 공장 일꾼 누구나하고 사이좋게 나눌 말이 한겨레 우리말입니다.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나 초등학교조차 못 나온 사람하고도 즐거이 나눌 수 있을 때에 아름다운 우리말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하고도 슬기롭게 나눌 만한 말이어야 좋은 우리말입니다. 어린 동생하고도 재미나게 나눌 만한 말일 때에 고운 우리말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겨레가 사이좋게 어깨동무할 ‘한겨레 말삶’을 헤아리면서 차근차근 일구어야 훌륭하면서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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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30] 시골버스

 도시에서 다니는 버스를 가리켜 ‘도시버스’라 하는 사람은 따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영어로 ‘시티버스’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시골에서 다니는 버스를 일컬어 누구나 ‘시골버스’라 이야기합니다. 굳이 영어로 ‘컨트리버스’라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그저 ‘시내버스’입니다. 자그마한 시이든 커다란 시이든 시내버스입니다. 빨리 달리는 버스라면 ‘빠른버스’라 할 만하지만 언제나 ‘급행버스’라는 한자말 이름을 붙입니다. 그나마 영어로 ‘스피드버스’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도시를 둘러볼 때에 ‘도시마실’이라 하면 어쩐지 낯섭니다. 시골에서는 으레 ‘시골마실’이라 합니다. 도시에서는 ‘도시마실’이 아닌 ‘시티투어’라 할 때에 잘 어울리는구나 싶습니다. 도시를 오가는 기차길이니까 ‘철도공사’라는 이름보다는 ‘코레일’이라는 영어 이름이 어울리겠지요. 시골보다는 도시로 커지려 하는 경기도이기에 ‘g bus’라는 이름을 지어서 쓸 테고요. 흙을 가까이하면서 살아갈 때에는 흙내음 물씬 묻어나는 말이요, 아스팔트랑 시멘트하고 살 부비며 지내는 동안에는 아스팔트 빛깔과 시멘트 느낌이 짙게 스미는 말입니다. (4343.12.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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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우리말 생각 ㉢ 말이랑 글이랑


 말사랑벗들은 말과 글이 어떻게 다른가 하고 이야기할 수 있나요. 말은 무엇이고 글은 무엇인지 가를 수 있는가요.

 ‘한글’은 글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우리말’은 말을 가리키는 이름이에요. ‘한글’과 맞물려 ‘한말’이라는 낱말도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곤 합니다. 말사랑벗들은 들어 본 적 있나요?

 말과 글이 다르니 마땅히 이처럼 이야기할 만해요. 이제 신문이든 잡지이든 방송이든 한자를 드러내어 쓰는 일이 없어요. 몇몇 신문사는 종이로 찍혀 나오는 신문에 적는 이름에만 한자를 쓸 뿐, 이제는 99.999% ‘한글만 쓰기’를 하는 이 나라 이 겨레예요. 2%가 아닌 0.001%가 모자라 ‘말과 글이 하나되지’는 못했으나, 2011년을 놓고 보면 거의 빈틈없이 말이랑 글이랑 하나로 모두었답니다.

 말이랑 글이랑 따로 놀던 지난날, 앞서 말했듯이 조선 나라일 때부터 일본한테 짓눌리던 때까지는, 사람들이 입으로 하던 말하고 종이에 적던 글하고 동떨어졌어요. 입으로 나누는 말은 지식인하고든 장사꾼하고든 농사꾼하고든 공장 일꾼하고든 생각을 주고받는 이야기였지만, 종이에 적는 글은 지식인끼리만 주고받는 이야기였어요. 이 때문에 ‘한자 섞어쓰기’가 끊임없이 말썽거리가 되지요. 왜냐하면, 한자를 잘 알거나 한자 지식이 많은 사람한테는 한자를 섞어서 쓰든 안 쓰든 아랑곳할 일이 아니에요. 그러나, 한자 지식이 많은데 이 한자 지식을 뽐낼 수 없으면 아깝다 생각하겠지요. 누구나 손쉽게 쓰는 말로 글을 적는다면, 지식 권위와 권력이 흔들릴 테고요.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학생 논문이나 학문책은 죄다 어려운 한자말에다가 영어로 뒤범벅이랍니다. 지식 권력 울타리를 높여야 밥그릇을 지키거든요.

 말사랑벗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말사랑벗들 할머니나 할아버지, 또는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이모나 이모부, 또는 고모나 고모부가 ‘학교 문턱을 밟아 보지 못한 분’이라 할 때랑 ‘대학교에 대학원에 유학까지 거친 분’이라 할 때랑, 말사랑벗들이 쓰는 말이 어떠한가요. 일곱 살짜리 동생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나하고 나이가 같은 동무랑 이야기를 섞을 때, 나보다 두어 살쯤 위인 언니 오빠 형 누나랑 이야기를 즐길 때에는 어떠한 말을 쓰나요.

 저는 “언어구사능력”이라든지 “많은 버림이 필요하다”라든지 “악취는 가히 살인적”이라든지 “병역의 의무를 시작했다”라든지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이라든지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다”라든지 “세세한 관찰이 이루어져야”라든지 “동네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각적 파노라마로 존재한다”라든지 “차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라든지 “우아한 얘기가 난무한다”라든지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같은 말마디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이런 말마디를 읊는 어른들은 당신 어머니한테도, 당신 아이한테도, 당신 술동무한테도 이런 말마디를 읊으려나요. 우리 말사랑벗들까지 이런 말마디를 읊는다면 얼마나 슬프며 끔찍할까요.

 “말솜씨”라든지 “많이 버려야 한다”라든지 “냄새가 코를 찌른다”라든지 “군대에 들어갔다”라든지 “어떻게 쓸까”라든지 “몹시 고맙다고 말하다”라든지 “찬찬히 살펴보았다”라든지 “동네는 이야기가 넓게 펼쳐지는 곳이다”라든지 “바야흐로 차를 만든다”라든지 “아름다운 얘기가 쏟아진다”라든지 “깊이 생각하게끔 한다”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테고, 이렇게도 말할 줄 알 텐데요.

 예부터 말을 적을 뜻에서 글을 만들었고, 우리가 쓰는 ‘한글’이란 ‘우리말’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말을 담는 한글이 아니라, 조선 나라일 때 나랏님부터 지식인이 쓰던 중국 한문에다가, 일본이 이 나라를 짓눌렀을 때에 스며든 일본 한자말이랑 일본 말투가 뒤섞이고, 여기에 영어가 잔뜩 넘나듭니다. 우리는 말이랑 글을 차분하게 가누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는 셈이고, 여태까지 우리가 쓰는 말이랑 글을 알뜰살뜰 가누는 나날을 맞이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말이란 말재주가 아니라, 내 삶을 일구는 하루하루를 곱게 들려주는 이야기예요. 글이란 글솜씨가 아니라, 내 꿈을 이루는 어제오늘을 예쁘게 나누는 이야기예요. 입으로 읊어 말이고, 손으로 적어 글입니다. 말을 하듯이 글을 쓰고, 글을 쓰듯이 말을 합니다. 말과 글은 동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에요. 입으로 하는 말과 손으로 쓰는 글은 다르지 않습니다. 입으로 말할 때처럼 손으로 글을 써야 아름답고, 손으로 글을 쓰듯 입으로 말할 때에 어여뻐요.

 예부터 말과 글이 하나로 되어야 한다고들 했습니다. 학교에서 국어 수업 때 들었을는지 모르는데, 한문으로 ‘言文一致’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어요. 지난날 지식인한테는 ‘言文一致’인데, 우리 말사랑벗님한테는 ‘말글하나’예요.

 그런데 말글하나란 무엇일까요? 입으로 하는 말과 손으로 쓰는 글이 똑같으면 그만일까요?

 말글하나가 되려면, 먼저 내 말과 내 삶이 하나여야 합니다. 내가 말을 하듯이 내 삶을 꾸려야 말글하나예요. 내가 글을 쓰듯이 내 삶을 일구어야 말글하나입니다.

 나 스스로 몸으로 옮기지 못하는 일을 말로만 들먹이면 말글하나가 아니에요. 내 말투가 제아무리 예쁘장하거나 빈틈이 없거나 맞춤법이랑 띄어쓰기를 잘 맞춘달지라도, 내가 하는 말대로 내가 살아내지 못하면 거짓이랍니다. 입으로는 착한 말을 하면서 정작 착하게 살지 못한다면 거짓이에요. 그런데, 설마, 입으로 나쁜 말을 하며 부러 나쁜 짓을 하지는 않겠지요? 나쁜 말과 나쁜 짓으로 말글하나가 되려는 말사랑벗님이 있으려나요.

 나쁜 말과 나쁜 짓으로 말글하나를 일삼는다면,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멍청이’라 하고, 이러한 삶을 가리켜 ‘바보짓’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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