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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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적 차이와 편향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엄밀한 제한 이론으로 외삽(外揷)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 79 

 

나는 아직도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던 숫자 세 개를 기억한다. 마치 노비문서처럼 따라다니던 IQ지수가 그것이다. 전교 1, 2등이었던 동생은 언제나 자신은 머리가 좋지 않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동생도 자신의 IQ를 알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머리가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지능지수(IQ)는 비네 척도를 거쳐 1912년 독일의 심리학자 슈테른에 의해 탄생했다.

 

하버드 대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다중지능이론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지능을 8가지로 제시하지만 그의 분류법에 따르더라도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언어지능과 논리수학지능이 뛰어난 사람이 좋은 머리가 좋다는 평가를 받고 학교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이것은 인간의 여러 가지 능력 중 일부만을 평가하는 편협한 시각이다. 다른 지능이나 영역에 대한 능력은 대학 입학 시험이나 객관화할 수 있는 각종 시험에서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하물며 피부색과 인종에 따른 능력 차이는 어떤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각인된 인종적, 민족적 편견은 뿌리 깊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던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에서 이 책은 역사적 관점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의 주요 주제, 즉 지능을 하나의 양()으로 측정해서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에 대한 반론이다. 잘못된 척도에 대한 비판은 외롭고 지루했으리라. 과학과 이론의 잣대를 들이밀며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잘못되었다고 외쳐야했던 저자의 노력은 한 권의 위대한 저서를 남긴 것이다. 1981년에 나온 이 책은 우생학과 제2차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의 기원을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얼만큼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한 관점에서 출발했는지, 잘못된 실험 결과와 통계의 주관적 조작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것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파악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편견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지적하고 있다.

 

과학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이성의 시대, 과학적 세계관이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주리라는 장밋빛 전망은 믿어도 좋은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법과 마찬가지로, 정치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규정과 질서와 마찬가지로 과학도 그것을 다루는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얼마든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다양한 문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 두려워졌다.

 

흑인과 인디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무모한 노력, 머리의 크기가 인간의 지능을 좌우한다는 폴 브로카의 전성시대, 미국의 발명품인 IQ 등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무수한 오류와 잘못된 신념을 바로잡는데 저자는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지켜져야 할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권력자와 정치가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듯이 과학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불합리한 결정과 편견들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확인 하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슬픔으로 가득한 현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백기완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이 다수결은 아니다. 8:1이라고 해서 8이 옳은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모여 의사결정을 할 때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좇는다는 원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조직 내에서 혹은 국가 차원에서 지켜야하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조차 배제한 채 일부의 의견이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침묵하는 다수를 호도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같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면 과학을 앞세운 편견이 판을 치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양성을 부정하며 혁신의 가치를 내세워 희생을 강요하고 기본권을 억압하는 사태는 계속될 것이다.

 

물론 반대편의 그 사람들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다. 나름의 논리가 있고 진심이 있으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생각을 하는 방법과 태도, 근원적인 바탕은 저마다 다르다. 니콜라스 카는 조금 색다른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인종적 편견이나 피부색, 종교, 출신 고향, 학벌, 국적이 아니라 인터넷이 놓여 있다.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꾼다는 저자의 주장은 체계적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야기의 큰 틀은 두 가지다. ‘문자인터넷이다. 문자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펴보는 과정은 마치 인터넷이 얼마큼 우리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지 말해주는 듯하다.

 

수세기 동안 종이 인쇄물을 통해 이루어지던 개인적인 독서에 갇혀 고립되고 해체되어 있던 우리의 자아는, 부족 마을과 같은 전 지구적인 공동체로 통합되면서 다시 하나가 되고 있다. - 6

 

구글goole이 구골googol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10100제곱. 그 원대한 꿈과 희망이 이제 우주로 손길을 뻗치고 있다. 인터넷에서 하이퍼텍스트를 읽는 패턴 때문에 책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화되고 있다.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지. 하나는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네.’(213)라는 새무엘 존슨의 말은 이를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책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일까. 책을 읽지 않는 이유를 고민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지만 네크워크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완곡한 저자의 비난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비난이 아니라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해도 현실과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지나칠까.

생각한다는 것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행위이다. 오늘 저녁 먹을 메뉴를 고르거나 어떤 핸드폰을 살까 생각하는 것만이 생각의 전부가 아니다. 생각하며 살자. 나부터. 생각하지 않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작은 다짐을 하게 하는 책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이다. 점점 더 빠르게 인테넷 환경을 숙명처럼 활용해야 하는 세대에게 책은 점점 멀어지고 스마트한 생각을 대신 해주는 폰은 언제나 장기의 일부처럼 손 끝에 매달려 있다.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검색할 때는 책과 같은 문서를 읽을 때와는 아주 다른 형태의 뇌활동을 보여줌을 발견했다. 책을 읽는 이들은 언어, 기억, 시각적 처리 등과 관련된 전전두 부분은 크게 활성화되지 않았다. 반면 숙련된 인터넷 사용자의 경우는 웹 페이지를 보고 검색할 때 이 전전두 부분 전반에 걸쳐 집중적인 활성화를 나타냈다. - 182

 

 

141221-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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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김명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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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론이 수많은 검증을 견뎌내고 수많은 옳은 예측을 했을 때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 된다. 곧 어떤 이론이 대단히 강력한 지지를 받아서 모든 합리적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 제리 A. 코인, 17

 

종교와 과학의 오해 혹은 진실

 

사실(fact)와 진실(truth)은 다르다. 객관성을 기초로 한 사실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지만 진실은 컨텍스트(context)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주관적이다. 예술의 영역에서는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만 과학의 영역에서는 검증 가능한 객관적 사실이 학문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반복 실험이 가능하거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증거가 필요한 과학이 세상의 모든 진실을 드러낼 수는 없다. 정상과학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증거들은 토마스 쿤의 말대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며 과학혁명을 일으켜 왔다. 이론의 합목적성을 달성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연구와 노력은 오늘도 여전히 과학의 발전을 추동하며 인류 문명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여전히 종교와 과학이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인간 이성의 발달과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해 근대 이후의 종교는 중세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의 역할을 규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오래 전에 각자의 영역에 대해 합의가 된 것이 아닌가. 종교가 있든 없든 혹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종교의 순기능과 역기능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도 매일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당대 최고의 과학 출판 에이전트이자 편집자로 평가받는 존 브룩만이 엮은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학과 종교의 갈등에 대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창조론진화론이라는 아주 오래된 갈등으로 구체화된다. ‘창조론은 다시 지적 설계라는 변형된 이론으로 대표된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벌어진 키츠밀러 대 도버 학군 사건은 이 책의 핵심 논쟁에 대한 현실적 충돌이다. 200512월 연방법원 판사 존 E. 존스 판사가 지적 설계를 공교육 기관에서 진화론과 함께 가르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지적 설계는 과학이 아니라는 법적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종교와 과학의 문제를 법으로 제한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더구나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할 수는 없다.

 

어쩌면 진화의 신비는 생명 세계에서 특별하고 신비로워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일상적인 생물학적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의 설명들을 증거를 통해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 닐 슈빈, 123

 

그러면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후 인류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인접 학문 분야의 발달과 오랜 검증을 거쳐 핵심적인 이론으로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랫동안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었던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받아들여야하는 발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누구에게나 쉽게 수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대에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창조론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진화론은 수용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각 분야의 세계적인 과학자 열여섯 명은 한 목소리를 낸다. ‘지적 설계는 과학이 아니다라는 명제에 대해서 말이다. 지적 설계론이 사실인지 아닌지 혹은 진실인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과학이냐 아니냐의 논쟁은 더 이상 불필요할 만큼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과학이 요구하는 어떤 절차적 검증도, 연구도, 논문도 없는 상태로 주장만 난무한 이 이론이 여전히 이슈가 되고 법적 판결을 받아야 할 만큼 심각한 이유는 과학의 대결 때문이 아니라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 때문이다. 생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혹은 진화의 과정에 발생하는, 아직 증거가 없는 빈 구멍들은 지적 설계론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 아직 인간의 과학으로 인류가 쌓은 지식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세계의 빈자리를 모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지적 설계로 메워버릴 수는 없다.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거 등 세계적인 과학자들은 분명하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지적 설계를 허구성을 폭로하고 결국 과학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라는 존재를 숨긴 채 지적 설계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일격을 가한다. 명확하고 논리적인 증거와 그간의 과학적 발견을 통해 지적 설계가 얼마나 무모한 주장인지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이들의 주장을 통해 과학의 역할과 종교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신비가 주는 철학적,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과학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으며 종교는 더더욱 과학의 자리를 탐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과학과 종교로 해결되지 않는 질문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것은 게으르거나 회피한다고 해서 누군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영구적인 논리적 해법이나 사실적 해법이 없는 인간 존재의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 과학은 유독 적합하지 않다. 예컨대, 죽음을 피하고, 외로움을 극복하고, 연인을 찾고, 정의를 확보하는 문제들이 그렇다. 과학은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이래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과학은 오직 이렇게 할 수 있다거나, 이렇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스콧 애트런, 166

 

 

2012011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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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 궁리하는 과학 4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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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전체가 한 단위를 형성하며, 그 단위가 다른 어떤 사람의 단위와도 다르다는 명백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단위를 라 부른다. 과연 그 는 무엇일까? - 148

 

19449월에 쓴 에르빈 슈뢰딩거의 서문이 낯설다. 67년이라는 시간의 간극 때문이 아니라 그간 상전벽해 해버린 과학의 발달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이론 물리학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막막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론적 정의보다 우선 그 의미를 생각하는 버릇 때문에 쉽게 답을 떠올리기 어려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발견하여 파동역학을 수립하고 물질의 파동이론과 양자역학의 한 축을 담당한 공으로 193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말년에 과학철학에 몰두했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생명은 무엇일까. 더구나 생물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가 던지는 호기심은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질문이다. 살아있는 세포의 활동과 역할을 고찰하는 일은 단순히 환원주의 입장에서 원자와 분자 수준의 물질을 탐구하는 일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2500여 년 전부터 철학자들이 했던 고민과 현대 물리학자들의 고민이 근본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다.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으며 인간의 생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그 수많은 질문 중에 하나는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과학자와 철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궁구하게 만든다. ‘DNA 이중 나선 구조를 밝히는 과정을 재미있는 소설처럼 풀어낸 제임스 왓슨의 이중 나선에 소개된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일단 재미가 없다. 과학자들이 극찬하는 고전이면서 많은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책이고 제임스 왓슨 때문에 읽게 됐지만 이중 나선처럼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최재천이나 제임스 왓슨처럼 재미있고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 능력은 그들을 빛나게 한다.

 

이 책은 궁리하는 과학 시리즈 네 번째 책으로 정신과 물질을 함께 묶었다. 두 권을 한 권으로 묶는 데는 분량의 문제 뿐 아니라 내용의 흐름도 고려했을 것이다. 옮긴이 전대호의 말대로 생명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자연스럽게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살펴보는 내용과 연결된다.

 

우선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전체 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전 물리학의 접근 방법에서 시작하여 유전의 매커니즘과 돌연변이, 양자역학적 증거를 살펴 본 후에 질서와 무질서 그리고 엔트로피를 통해 생명의 물리학 법칙들을 점검한다. 생명은 일정한 계통에 따라 순차적으로 개체가 발생하는 기계가 아니다. 20세기 중반까지 밝혀진 과학의 이론에 입각해서 생명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는 슈뢰딩거의 이야기는 전문지식이 없어도 들어볼 만하지만 역시 쉽게 이해되거나 재미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정신과 물질이 이해가 빠르다. 과학이 아니라 철학에 가까운 이야기로 가득한 정신과 물질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논쟁처럼 어디까지 혹은 무엇을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선순위도 달라지고 영역도 분리된다. 정신은 무엇이며 그 정신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은 객관화 될 수 있는 것인지 또 그것이 정신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가만히 들여달 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한 권에 묶여 있어 자연스럽게 두 권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대신 개념적인 용어와 이론들이 들장하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 대상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나열하거나 하나의 현상을 밝히는 책이었다면 고전이 되었을 리가 없다. 모든 고전은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그 질문은 시간을 견뎌내며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고 정답은 없지만 언제나 진지하게 고민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자연은 위대하다. 이 명제 앞에 나약한 인간은 고개를 숙이고 그 신비로움에 대한 경외감에서 종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이 발달하면서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달했으며 지구상에 가장 오만한 생명체가 되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 선악이 없으며 인위가 없다. 돌연변이 조차도 하나의 흐름이며 생명의 신비에 해당한다. 그래서 자연은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슈뢰딩거의 성찰은 생명과 정신과 물질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출발이다. 목적은 없지만 본능적인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의 일부인 생명이란 무엇인지 여전히 탐구 중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만들 뿐이다.” 자연적인 사건은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가치는 찾아볼 수 없으며 특히 의미와 목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은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 226

 

 

20111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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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나선 -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를 발견한 이야기 궁리하는 과학 1
제임스 D.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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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의 전환점이 된 수많은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곰팡이에서 우연히 발견된 페니실린부터 유럽의 근대사를 뒤바꾼 드레퓌스 사건에 이르기까지 지금 우리들 삶의 조건은 숙명을 가장한 우연이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나비효과처럼 결과를 알 수 없는 원인과 결과가 반복되는 원인은 거슬러 또 다른 원인의 결과였을 것이고 결과는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과학적 발견이거나 철학적 성찰이거나 마찬가지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끝없는 열정,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는 집요한 탐구, 전혀 다른 방식의 창조적 상상력, 타인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독창성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건들이 지금 이 순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숱한 씨줄과 날줄이 모여 현재를 만들고 미래의 토대를 마련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과학은 철학에서 출발한다. 모든 것의 기원을 찾고 사물을 바탕을 찾으려는 욕망이 과학자의 자세이다. ‘왜’라는 의문부호를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 과학자의 운명은 아닌지 모르겠다. 군대를 가지 않아 인생에서 가장 명민한 시절을 학문에 몰입할 수도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불과 23세의 나이로 코펜하겐을 거쳐 캠브리지에서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제임스 왓슨 선택받은 조건을 갖춘 과학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일반인들 머릿속에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밝혀 크릭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은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과학적 성취에 대한 실명 소설처럼 읽힌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1953년 4월 25일 <네이처>에 DNA 구조를 밝힌 짧은 논문을 발표하며 생명과학 분야에 놀라운 발자취를 남겼다. 제임스 왓슨은 이 과정을 다룬 『이중나선』은 딱딱한 과학 이론서가 아니다. 과학자들의 연구 과정과 개인적인 일상사가 그대로 드러난 이 책은 흥미진진한 과학사로 읽어도 무방하고 1950년대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한 과학자적 성과로 읽어도 좋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연구 분야에도 불구하고 DNA 구조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끊임없는 토론 과정은 학문을 대하는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만하다. 마지막 부분에서 미국의 폴링과 경쟁하는 장면은 흥미진진한 소설을 보는 재미도 있다. 과학 용어와 상식이 부족하지만 간단한 이론적 설명이나 그림이 삽입되어 있고 지루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아 읽는데 큰 지장은 없다.

짧은 분량의 이 책은 추천사를 쓴 최재천의 말대로 과학자에게 왜 글쓰기가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축적된 연구 성과와 역할로 볼 때 프랜시스 클릭이나 노벨상 공동수상자인 윌킨스에 비해 제임스 왓슨이 더 명성을 떨치게 된 이유는 대중을 상대로 한 쉽고 재미있는 글쓰기 능력 덕분이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의 연구 성과를 좀 더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사회적 관심과 연구 지원 등 다양한 혜택으로 돌아왔고 그것은 또 다시 과학의 발전을 이끌어내는 순환고리의 역할을 해냈다. 과장된 포장이 아니라 1968년에 출간된 이 책이 고전으로 자리잡은 이유를 헤아리며 읽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전달되는 유전정보를 담은 분자들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들의 화학적 특징은 무엇일까. 이러한 생명의 비밀과 신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어 DNA 구조를 발견한 왓슨과 크릭의 이야기는 어떤 SF소설보다도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생존 인물들이 보여주는 과학과 과학자들의 세계 그리고 1950년대 영국과 유럽의 일상까지 읽어낼 수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에 과한 몇 권의 책에서 시작된 책읽기가 종횡무진 계속되겠지만 왓슨의 호기심을 불꽃처럼 타오르게 했다는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로 이끌어준다. 형이상학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질문들만큼이나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관심도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어느 한 분야도 인간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분야가 없고 인류의 생존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하는 분야가 많겠지만 생명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과학을 넘어 철학적 관점으로도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과학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줄 수도 없고,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도 없다. 하지만 무지한 인간에게 아주 작은 앎의 기쁨을 느끼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너와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중나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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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물학 대논쟁 통섭원 총서 2
최재천 지음 / 이음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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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어떤 개별적 존재가 자신이 소속돼 있는 집단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제3자의 입장에서 개별적 존재를 관찰하고 집단 전체를 분석하는 것에 비해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개별자로서의 의미를 타인과의 관계와 집단의 상황에 비추어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객관적으로 설명 가능한 대상인가. 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철학은 이미 수천 년 동안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 과정에서 불가해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종교를 발명했다. 중세를 넘어 ‘근대’ 이후에는 해결의 주도권이 과학에 넘어온 듯하다. 150여 년 전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 인간에 대한 개념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이행만큼이나 충격적인 선언이었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 존재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논의를 추동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며 세계를 이해하는 근본적 진실을 드러냈을까.

전체 > 부분의 합

생명은 설명될 수 없는 존재라는데 동의한다면 인간을 탐구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그런 이유로 인간에 대한 모든 철학과 종교와 과학은 단지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회생물학’을 바라보자.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인 최재천은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있다. 『사회 생물학 대논쟁』은 바로 이러한 논의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책으로 손색이 없다. ‘통섭, 에드워드 윌슨, 진화심리학, 데이비드 버스, 이기적 유전자, 밈, 빈 서판, 털 없는 원숭이……’ 등과 익숙하거나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은 반드시 거쳐야 할 만큼 중요하다.

인간은 유기체다. 세포와 뼈의 결합체가 아니다. 다윈주의적 환원주의가 인간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장대익의 분류대로 다윈주의적 반환원주의, 비다윈주의적 환원주의, 비다윈주의적 반환원주의로 사회생물학이나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가. 사회생물학을 주도한 윌슨의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최재천의 ‘통섭統攝’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이 생물학을 중심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학문간 통합과 다른 개념으로 설득될 수 있는 것인가.

끝없는 의문과 호기심이 책을 읽는 내내 계속되며 『이기적 유전자』, 『털 없는 원숭이』, 『욕망의 진화』, 『오래된 연장통』이 뒤섞여 정리되지 못한 우둔한 머릿속이 조금은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분과학문 영역 사이의 장벽이 만리장성보다 견고한 국내의 학문 풍토에서 학문간 통합을 넘어 ‘컨실리언스’를 이야기하는 것은 학문적 토대의 척박함과 문화적 바탕을 간과한 과욕은 아닌가. 만 16세가 되면 문과와 이과로 나누고 그 벽을 뛰어넘는 일이 과장하자면 성별을 바꾸는 것만큼 힘든 상황에서 최재천의 노력과 인문, 사회학자들의 논쟁은 더할 수 없이 값지고 귀하게 여겨진다.

주목할 만한 글 몇 편

이 한 권의 책은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과 이화여대 통섭원이 공동으로 개최한 심포지엄 “부분과 전체 : 다윈, 사회생물학, 그리고 한국”의 결과물이다. 여덟 명의 무림의 고수가 펼치는 진검 승부가 흥미진진하다. 그 중에서도 이병훈의 ‘한국에서는 사회생물학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 도입과 과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귀한 글이다. 또한 김동광의 ‘한국의 통섭 현상과 사회생물학’은 국내의 ‘통섭 현상’에 나타난 특징과 문제점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어 균형적인 시각을 갖는데 일조하고 있다.

무엇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의 시작은 작은 관심과 호기심이거나 우연한 마주침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딱딱하고 이론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 일반인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며 넓이와 깊이를 한 번에 꿸 수 기회를 제공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인간’이란 존재가 ‘동물’과 구별되는 지점, 세상을 해석하고 원인과 결과를 밝히고 싶은 욕망, 미래의 학문이 지향해야 할 부분에 대한 질문들이 시작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은 끝없는 질문의 연속이다. 모든 독자는 나름의 방식대로 그 답을 구하기 위해 힘을 얻고 또 다른 길을 찾기에 나서는 수고로움을 즐거움으로 치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논쟁은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논쟁을 낳는다. 이 책은 논쟁의 단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논의된 ‘사회생물학’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이며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깊은 고민의 시작이다. 길은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자유로운 사유의 유목,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질문, 나와 너의 관계 양상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방법과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111013-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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