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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평점 :
우리는 인간적 차이와 편향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엄밀한 제한 이론으로 외삽(外揷)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 79쪽
나는 아직도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던 숫자 세 개를 기억한다. 마치 노비문서처럼 따라다니던 IQ지수가 그것이다. 전교 1, 2등이었던 동생은 언제나 자신은 머리가 좋지 않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동생도 자신의 IQ를 알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머리가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지능지수(IQ)는 비네 척도를 거쳐 1912년 독일의 심리학자 슈테른에 의해 탄생했다.
하버드 대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다중지능이론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지능을 8가지로 제시하지만 그의 분류법에 따르더라도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언어지능과 논리수학지능이 뛰어난 사람이 좋은 머리가 좋다는 평가를 받고 학교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이것은 인간의 여러 가지 능력 중 일부만을 평가하는 편협한 시각이다. 다른 지능이나 영역에 대한 능력은 대학 입학 시험이나 객관화할 수 있는 각종 시험에서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하물며 피부색과 인종에 따른 능력 차이는 어떤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각인된 인종적, 민족적 편견은 뿌리 깊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던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에서 ‘이 책은 역사적 관점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의 주요 주제, 즉 지능을 하나의 양(量)으로 측정해서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에 대한 반론이다. 잘못된 척도에 대한 비판은 외롭고 지루했으리라. 과학과 이론의 잣대를 들이밀며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잘못되었다고 외쳐야했던 저자의 노력은 한 권의 위대한 저서를 남긴 것이다. 1981년에 나온 이 책은 우생학과 제2차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의 기원을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얼만큼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한 관점에서 출발했는지, 잘못된 실험 결과와 통계의 주관적 조작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것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파악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편견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지적하고 있다.
과학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이성의 시대, 과학적 세계관이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주리라는 장밋빛 전망은 믿어도 좋은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법과 마찬가지로, 정치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규정과 질서와 마찬가지로 과학도 그것을 다루는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얼마든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다양한 문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 두려워졌다.
흑인과 인디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무모한 노력, 머리의 크기가 인간의 지능을 좌우한다는 폴 브로카의 전성시대, 미국의 발명품인 IQ 등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무수한 오류와 잘못된 신념을 바로잡는데 저자는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지켜져야 할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권력자와 정치가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듯이 과학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불합리한 결정과 편견들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확인 하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슬픔으로 가득한 현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백기완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이 다수결은 아니다. 8:1이라고 해서 8이 옳은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모여 의사결정을 할 때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좇는다는 원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조직 내에서 혹은 국가 차원에서 지켜야하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조차 배제한 채 일부의 의견이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침묵하는 다수를 호도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같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면 과학을 앞세운 편견이 판을 치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양성을 부정하며 혁신의 가치를 내세워 희생을 강요하고 기본권을 억압하는 사태는 계속될 것이다.
물론 반대편의 그 사람들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다. 나름의 논리가 있고 진심이 있으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생각을 하는 방법과 태도, 근원적인 바탕은 저마다 다르다. 니콜라스 카는 조금 색다른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인종적 편견이나 피부색, 종교, 출신 고향, 학벌, 국적이 아니라 ‘인터넷’이 놓여 있다.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꾼다는 저자의 주장은 체계적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야기의 큰 틀은 두 가지다. ‘문자’와 ‘인터넷’이다. 문자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펴보는 과정은 마치 인터넷이 얼마큼 우리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지 말해주는 듯하다.
수세기 동안 종이 인쇄물을 통해 이루어지던 개인적인 독서에 갇혀 고립되고 해체되어 있던 우리의 자아는, 부족 마을과 같은 전 지구적인 공동체로 통합되면서 다시 하나가 되고 있다. - 6쪽
구글goole이 구골googol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10의 100제곱. 그 원대한 꿈과 희망이 이제 우주로 손길을 뻗치고 있다. 인터넷에서 하이퍼텍스트를 읽는 패턴 때문에 책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화되고 있다.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지. 하나는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네.’(213쪽)라는 새무엘 존슨의 말은 이를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책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일까. 책을 읽지 않는 이유를 고민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지만 네크워크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완곡한 저자의 비난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비난이 아니라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해도 현실과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지나칠까.
생각한다는 것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행위이다. 오늘 저녁 먹을 메뉴를 고르거나 어떤 핸드폰을 살까 ‘생각’하는 것만이 생각의 전부가 아니다. 생각하며 살자. 나부터. 생각하지 않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작은 다짐을 하게 하는 책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이다. 점점 더 빠르게 인테넷 환경을 숙명처럼 활용해야 하는 세대에게 책은 점점 멀어지고 스마트한 생각을 대신 해주는 폰은 언제나 장기의 일부처럼 손 끝에 매달려 있다.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검색할 때는 책과 같은 문서를 읽을 때와는 아주 다른 형태의 뇌활동을 보여줌을 발견했다. 책을 읽는 이들은 언어, 기억, 시각적 처리 등과 관련된 전전두 부분은 크게 활성화되지 않았다. 반면 숙련된 인터넷 사용자의 경우는 웹 페이지를 보고 검색할 때 이 전전두 부분 전반에 걸쳐 집중적인 활성화를 나타냈다. -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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