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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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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충청도 시골 외가댁에 며칠씩 놀러가는 일이 큰 행사였다. 그저 평범한 시골이었지만 논과 밭이 있었고, 여름이면 물장난질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개울이 있었다. 뒷동산은 당연히 거기 있었다. 평범한 시골에서 큰 재미가 있는건 아니었지만 도시의 아이들이 느끼기에 충분히 새롭고 신선한 환경이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밤의 화장실이다. 집 뒤켠에서 멀리 떨어진, 그것도 언덕이랄것도 없지만 조금 낮은 지대로 내려가 있었던 화장실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헛간 한쪽에 엉성한 나무조각을 막아 놓은 재래식 화장실의 냄새와 공포 분위기는 상상 이상이다. 혼자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작은 볼일은 물론 마루의 요강을 이용했었다. 7, 80년대 시골 풍경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건 시골의 밤하늘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시골 마당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경외롭다. 쏟아질듯 반짝이는 그 별빛들은 15년쯤 후에 강원도 비무장지대 매복지에서 바라볼 때까지는 마지막이었으니까. 주변에 불빛이 없고 먼지가 없는 맑은 하늘은 별을 관찰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마루의 평상에 누워 했던 그때 생각들이다. 저 별빛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들이 있을까? 하늘밖에는 우주가 있다는데 우주의 끝은 있을까? 우주의 그 끝 밖에는 뭐가 있을까? 총명한 영재였다면 훌륭한 천체 물리학자가 되었겠지만 학교에서 암기식으로 주입되던 지구과학, 생물, 화학, 물리는 나를 완전히 환장하게 만들었었다.

아이들의, 아니 일반인들의 그런 사소한 호기심들을 재밌게(?) 풀어줄 수 있는 책이 있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다. 과학에 문외한이라고 밝힌 저자는 지구의 역사 크기, 우주에 관한 이론들, 인류의 기원과 생명의 신비로 부터 현재와 미래의 인간의 모습에 대한 반성까지 아우르고 있다.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론에 치중하기보다는 과학자들의 에피소드와 과학적 이론의 탄생과정과 정확성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주고 있다. 학교에서도 이런식으로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고 풀어줄 수 있는 방식으로 과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랬다면 나도 과학을 재밌게 공부할 수 있었을텐데라고 핑게를 대본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주와 지구의 역사에서 보면 점으로도 표시될 수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없겠지만 과학적 관점에서 현재 나의 모습을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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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명 이야기 - 반양장
황우석.최재천.김병종 지음 / 효형출판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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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세상에 태어나는 책의 절반만이 사람들에게 읽힌다고 한다. 나머지는 팔리지 않아 폐휴지가 되거나 버려지거나 재활용 될 것이다. 팔린 책의 절반만이 읽힌다고 한다. 사람들이 책을 사서 선물하고 책꽂이에 꽂아두고 도서관에 비치하지만 정작 읽히는 책은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읽힌 책의 절반만이 이해된다고 한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억지로 읽는 학생들부터 의무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는 사람들까지 활자를 읽어내기 했지만 이해하는 것은 그것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해된 내용의 절반만이 내면화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내면화 된 내용의 절반만이 활용된다고 한다. 활용이란 말은 자신의 생활에 적용되거나 남에게 제대로 전달하거나 인생을 바꿀만한 변화가 일어나거나 하는 등의 실천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산술적으로 제작된 책의 6% 내외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 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읽은 책의 12% 내외가 활용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책을 선택해서 읽느냐의 문제는 이 비율을 높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그만큼 독서는 쉽지 않은 선택과 집중, 그리고 노력의 과정이라고 본다. 악서는 없고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고 봐도 될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물론 개인의 성향이나 지적 성숙도 관심 분야에 따라 편중된 독서 형태를 보이기도 하고 잘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 그래서 책의 선택은 더욱 중요하다.

  게다가 출판 상업주의를 어떻게 피해갈 것인가? 쉽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이틀동안 내 시간을 뺏긴 책 <나의 생명 이야기>같은 책이다. 황우석, 최재천 두 사람의 글을 정리하고 김병종의 그림을 넣어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황우석, 최재천 글, 김병종 그림이다. 이미 사회적으로 이름난 두 과학자의 생명에 대한 나름의 견해와 철학이 담긴 책이라고 판단한 내가 잘못일까? 심하게 말하면 신변잡기적 성공기 수필이다. 세 사람 모두 53년 동기생이며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인 동료 교수들이다. 같은 주제로 뭐든 묶어 펴내면 책이 되는가 묻고 싶다.

  스스로 시골 촌놈으로 자처하는 황우석 교수의 소이야기와 눈물어린 성공담은 순수하고 우직한 학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들 마음의 고향인 농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또 게으르고 나태한 자세로 주변 환경을 탓하는 학생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듯하다. 최재천 교수는 동물행태학, 사회동물학자로 많은 강연과 저술 활동으로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가 많은 과학자다. 하지만 후반부에 담긴 그의 사회적 발언들은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대안이 없는 자기 학문분야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예산과 정책의 뒷받침을 요구하는 정부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대안이 없다. 떼써서 될 일인가? 또한 교육과 사회 현상에 대한 시각과 관점이 실망스럽다. 편향되어 있다는 것과 다르다. 다른 시각에서 자신의 주장을 올곧게 펼칠 수 있다면 동의하기 어려워도 이해할 수는 있겠다. 다름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김병종 교수의 좋은 그림들이 책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으나 부분과 전체의 조화에 실패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학의 대중화를 넘어 대중의 과학화에 찬성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종류의 책은 지양(止揚)되어야 마땅하다. 개인적인 성향과 책이 지녀야 할 미덕에 대한 기대가 달라서일까?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책이었다. 표지 뒷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세 분의 좋은 뜻은 이해하겠으나 다시 책으로 만날 일은 없겠다. 요즘 들어 책을 살 때 출판사를 꼼꼼히 살피는 노력을 게을리 한 나의 탓이기도 하다.

 

200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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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 다르지만 같은 길 1
제임스 H. 콘 지음, 정철수 옮김 / 갑인공방(갑인미디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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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겨우 몇 십년전에 일어난 야만적인 미국의 일상사에 대한 고찰이다. 이 책은 두 인물을 통해 과연 미국의 전통과 가치가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보게 하며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종과 종교, 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교묘한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는 이 시대는 과연 그들이 살았던 시대보다 나아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맬컴 X와 마틴 루터 킹의 삶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 남부 중류층에서 태어나 박사 학위를 받고 흑인 교회 목사로 흑인 민권 운동에 투신한 마틴은 비폭력 통합 주의를 표방한다. 반면 빈민가의 상징으로 백인에게 강간당한 외조모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붉은 피부색을 지닌 맬컴은 철저한 폭력적 분리주의를 내세운다. 미국의 자유와 민주적 가치를 믿었던 마틴과 백인들의 차별에 폭력으로 저항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던 맬컴의 가치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보는 ‘아메리칸 드림’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마틴의 통합주의적 입장과는 반대로,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흑인 대중”들의 관점에서 미국을 바라본 맬컴 엑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절대 다수를 위해서 악몽이라는 이미지에 호소하며 미국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묘사했다. (본문 75페이지)

  같은 시기에 미국의 아프리카계 흑인들을 위해 민권 운동을 펼쳤으나 전혀 다른 방법과 이념을 가졌던 두 사람은 미국이라는 가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 개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만을 위한 자유와 민주주의는 백인 우월주의로 나타났으며 이에 대한 극복은 두 사람에게 운명처럼 다가왔고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바탕으로 상호 보완적 관계를 이룬다. 단 한번 만났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암살로 생을 마감한다.

  마틴의 ‘통합주의’ 철학의 핵심은 “사람들은 종종 서로 미워한다. 서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두려워한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잘 모른다.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소통할 수 없다. 서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 72페이지)”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된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백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마틴은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에 비해 맬컴은 북부 빈민가 흑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남북전쟁 후 1870년, 링컨의 수정 헌법 15조에 의해 흑인에게 투표법이 주어졌으나 ‘짐 크로(Jim crow)’법에 의해 ‘분리는 하되 평등은 하다’는 흑인 분리(차별) 주의가 흑인의 90%가 살고 있던 남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정착된다. 20세기 초부터 벌어진 흑인 민권 운동은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법적 투쟁부터 시작해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등으로 촉발된 실생활의 차별적 행위들에 대한 폭넓은 범위의 투쟁이었다. 두 사람은 이 시기의 미국의 참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마틴의 신학이 사랑과 용서 그리고 흑인과 백인이 사랑 넘치는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얘기했다면, 맬컴의 신학은 엄격한 정의와 단호한 처벌 그리고 신이 백인종 전체를 절멸시킬 것이며 그리하여 평화와 선의의 세상을 모든 백인 가운데에 세워주리라는 희망을 강조했다. (본문 266페이지)”

  일라이저 무하마드의 이슬람 종교에 의지해 대중앞에 나선 맬컴은 결국 그와의 결별 이후 마틴의 주장과 흑인들간의 통합과 연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무렵 암살 당한다. 맬컴 암살 이후 마틴은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미국의 절대 가치로 믿었던 자유와 인권을 바탕으로 한 인류애의 가치에 회의를 갖는다. 미국은 “평화를 얘기하면서 전쟁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유색인종과 여성, 어린이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하는 모습은 베트남에서 여실히 목격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됐던 인종주의 정책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 사회를 초토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 388페이지)” 베트남전을 통해 마틴은 “베트남에서 적군 병사 한 명을 죽이는 데 50만 달러를 쓰면서 자국 내의 가난한 시민에게는 단돈 50달러만 쓰는 나라”를 인식하고 미국은 자신의 도덕적 모순에 의해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미국의 이러한 이율 배반적인 모습은 걸프전과 최근의 이라크 침공등을 통해 아직도 변하지 않는 일관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교언영색하는 미국의 참모습이다.

  “어떤 입장에서 흑인 문제를 바라보든, 그러한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죽음의 위협과 마주합니다. 이는 ‘비폭력적인’ 킹 박사나 소위 ‘폭력적인’ 저나 마찬가지입니다” 맬컴의 죽음 이후 비로소 마틴은 자신의 아메리칸 드림에서 급진적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으며, 맬컴이 꾼 악몽의 공포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본문 351페이지)

  이러한 마틴의 변화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도 모른다. 맬컴과 마틴처럼 혁명적인 예언가들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대개 그들이 끊임없이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던 그 힘에 의해 살해당한다. 맬컴 액스는 그가 사랑했고 자기혐오에서 해방시키고자 노력했던 흑인 집단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마틴 킹은 그가 사랑했고 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백인 집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미국은 그때와 많이 다른가? 한반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나라가 되어버린 미국의 가치와 본질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두 민권 운동가의 삶은 시대를 넘어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불평등한 가치를 극복하기 위한 거울이 될 수 있겠다. 늘 그러하듯이 이념이 아닌 순수한 동기와 가치에서 비롯된 헌신적 노력과 행동들이 작은 변화를 만들며 이러한 작은 변화들이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꾼다는 믿음은 나만의 것이 아니길 바란다.



200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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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문답 - 개혁을 꿈꾼 과학사상가 홍대용의 고뇌
홍대용 원저, 김영호.이숙경 지음 / 꿈이있는세상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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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의 임금은 영조와 정조였다. 왕조 중심의 역사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인물에 대해 살펴 볼 때도 임금부터 확인한다. 나만 그런가? 당시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확인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 인물의 생애와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 사건을 찾아내는 일보다 그러한 토대를 제공한 상황이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18세기 조선은 이앙법으로 토지의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증가했으나 백성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고, 중국을 통해 자연 과학적 지식이 조금씩 전파 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랑민이 발생했으며 상업 자본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자본과 권력이 결탁되고 신분 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한다. 예송 논쟁 등 그야말로 쓸데없는 소모적 권련 다툼이 이어지고 정조의 탕평책이라고 하는 개혁은 정약용 일가 등 천주교도에 대한 비교적 관대한 태도로 이어지지만 오히려 정조 사후 신유박해 등 피바람을 몰고 오는 원인이 된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변화와 개혁의 시도는 그 어떤 혁명보다도 어려운 법이다.

담헌 홍대용은 이런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1731년에 태어난 홍대용은 18세기 실학자로 기억된다. 이덕무나 유득공, 박제가처럼 서자 출신도 아니고 노론 집안에서 태어나 출세가 보장된 그의 관심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노나라 공자의 유학이 주희의 성리학으로 굳어지면서 조선 사회는 철저하게 성리학적 이념이 통치의 근간이 된다. 이것은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백성들을 다스리는 이념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 태도와 사상적 근간이 되어 올가미처럼 벗어나기 힘든 것으로 만든다. 성리학에 대한 근본주의적 태도는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진 자들과 권력층의 기득권 옹호를 위한 전가의 보도가 된다.

홍대용의 기본 사상은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그의 사상의 단면을 확인 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의산문답醫山問答>이다. 음직으로 40세가 넘어 관직에 나갈 때까지 홍대용은 치열한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둔 채 세상의 이치와 만물의 원리에 관심을 갖는다. 그가 보인 관심은 당연히 고정된 틀에 사로잡힌 조선 사회의 모순이다.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내고 대안을 제시한 해결사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혁명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만한 인물을 18세기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우리는 누리지 못한다. 동시대 인물인 박지원이 시대를 주유한 ‘유목민’으로 명명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시대를 온몸으로 거스른 실천적 지식인을 찾을 수는 없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살펴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자위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홍대용은 18세기 북학파 혹은 실학파의 대표 주자로 손색이 없는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은 종교에서 이성으로의 변환이다. 인간의 이성이 사물의 기준과 가치 판단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이어진다. 관념론적 세계관으로 이해되지 않는 유물론적 세계관이 펼쳐지는 것이다. 물론 두 세계의 합종연횡은 이후 끊임없는 논쟁과 연구가 지속되지만 그러한 사유가 시작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18세기는 의미 있는 시대였다. 홍대용의 사상적 전환은 중국 방문에서 연유한다. 35세에 6개월간 북경에 다녀온 홍대용은 자연과학에 더욱 지대한 관심과 열의를 갖는다. 그러한 사유의 증거가 바로 이 책 <의산문답>이다.

허자虛字와 실옹實翁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홍대용은 기존의 통념을 명쾌하게 박살낸다. 이미 이름에서 감지하듯이 ‘허자’는 지금까지 가졌던 그릇된 지식과 사물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실옹’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헛된 것들로 가득 찬 ‘허자’와 실재적인 것들로 무장한 ‘실옹’의 대화는 ‘허자’의 깨달음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풍자된다. 우회적이고 애매한 태도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통렬한 방법으로 허자를 꾸짖는 실옹의 목소리는 바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대한 홍대용의 비판의 목소리로 들린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동양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단편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책이 아니라 홍대용이 지니고 있는 사물에 대한 혹은 세계관 자체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과 ‘패더다임의 변환’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하는 책이다. 18세기에 이런 주장과 생각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당시의 현실과 그와 사상적 교류와 친분을 나눈 동시대 인물들에 대한 관심과 비교는 한층 더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이다. 박지원과 정약용은 물론이고 북학파의 저작과 사상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생긴다.

겨우 250여 년 전 급격한 사회 변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홍대용의 사상은 <의源??이라는 저작을 통해 그 단초를 제공한다. 1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와 그 이후 ‘탈근대’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그 변화의 조짐들을 읽어내는 일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짧은 내용에 중간 중간 해설을 덧붙이고 쉬운 말로 번역해 놓은 책이라서 원문과 멀어진 단점이 있고 해설 자체가 일반적이고 평범한 내용의 반복이라서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든다. 중간에 삽입된 해설 때문에 전체 내용의 흐름에 맥이 끊기기도 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기획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출판사의 좋은 기획과 출판 의도가 좀 더 완성도 높은 책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060509-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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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의 세계 살림지식총서 35
이윤성 지음 / 살림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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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일은 무의미하다.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보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인간이 지녀야 하는 기본적 한계 상황인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싶은 것은 단순한 인간의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죽음에 대해 제각기 다른 방식의 해석이 가능하다. 죽음이 원인이 되어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원인을 밝혀내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그것이 비록 죽은 자에게는 부질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일반적인 자연사의 경우 원인은 호기심 차원이거나 질병과 죽음의 관계에서 다루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자살이든 타살이든 사고사일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가령 물에 빠져 죽었을 경우 자살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빠졌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단순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 내는 차원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밝혀내는 일이 ‘법의학’의 임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감상적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상황과 원인의 복합적 결합이 이루어져야 정확한 죽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같다.

법의학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법률의 시행과 적용에 관련된 의학적 또는 과학적 사항을 연구하고 이를 적용하거나 감정하는 의학의 한 분야’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권을 옹호하고 공중의 건강과 안전을 증진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의학’이다. 법의학의 궁극적 의미가 와 닿는다.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구현이 목적이 되는 법의학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는 일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특히 범죄가 발생했을 경우 범인을 찾아내어 반드시 처벌하는 것은 사회정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단순하게 과학적 수사기법과 결합된 의학의 역할이 아니라 인권 존중을 위한 중요한 학문 영역으로 자리잡아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반인의 경우 ‘법의학’의 혜택을 받지 않고 살아야 가장 바람직하다. 행복하게 살다가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꿈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많은 사고와 불행에 마주친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초래한 원인을 밝혀내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더구나 자신의 억울함과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법의학은 범인을 찾기위한 법의학의 역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 법의학은 범죄와 관련된 죽음과 교통사고에 의한 죽음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사람이 자연스럽게 죽지 못한 이 불행한 죽음에 대한 태도는 타살과 뺑소니의 경우 가장 심각하다. 용의자를 찾을 수 없을 때 단서를 제공하는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죽음이 이야기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는 것이 법의학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흔적들이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 법의학은 그 죽은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부검에 대한 일반인들의 부정적인 정서는 쉽게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법의학의 가장 기초 단계인 부검에 동의하지 않는 보호자들 때문에 많은 오해와 중요한 단서들을 놓칠 때가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명백한 증거와 원인이 있을 경우는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어떤 범죄 사건의 경우 사망 시각을 추정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일 수 있다. 특히 훼손된 시신의 경우 신원을 확인하는 일도 법의학의 영역이다.

단순하게 말해질 수 있는 죽음은 없다. 다만 그 수많은 죽음들 속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히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이다. 법의학의 목적이 여기에 있겠지만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여의봉이 아니라 법의학이 필요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을 해본다. 과학 수사와 법의학이 발달해서 미제 사건이 없는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가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냉정한 현실 인식을 위해 보다 발달된 기술과 정확한 의학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어주는 법의학은 우리들 모두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미래 사회가 어떠하든 최소한의 법과 정의만이 적용될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해 보는 것은 나만의 낭만적 사회를 꿈꾸는 헛된 희망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060904-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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