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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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내가 물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라는 환상적이고 도발적인 문장으로써 그 거대한 문을 화려히 연다. 하지만 써커스 같은 현란한 분위기로 치장된 그 말은 자칫 현실에서는 있을 법 하지 않은 그저 허무맹랑스럽게만 보일 위험이 있다. 그렇게 요리에는 위험해 보이는 재료에도 불구하고 폴 오스터의 구수한 입담에 버무려지게 되니 나 자신도 푹 매료되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를 않는, 아주 적당한 맛으로 간이 맞추어 진다. `물위를 걷는다.` 이제는 바로 다음 문장에 서서히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다.

<공중 곡예사>는 월트란 한 아이가 예후디란 사부를 만나 공중을 나는 법을 익히고 그 뒤의 파란만장한 삶을, 판타지 같은 비현실적 소재를 아주 현실적으로, 너무 현실적이라 마치 공중으로 나는게 실제 가능한거라 느껴지게끔 그려낸 작품이다. 슈퍼맨처럼 훨훨 나는게 아닌, 조금만이라도 떠오르기 위해 온갖 고통을 감내하는 월트의 모습은 마치 누구라도 연습하면 가능할것 처럼, 전혀 유치하지도 불가해하지도 않게 보이는 멋지고 교묘한 모습이었다.

이런 환상적 분위기 속에서 월트와 예후디 사부가 함께 그려내는 그 굴곡있는 삶을 보고 있자면 저자가 말한 `그러나 나는 아무 대가도 없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으며, 원하는 것이 크면 클수록 그에 따르는 대가도 더 크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란 말을 실감나게 해준다. 언제나 우연으로써 삶의 전환기를 맞닥들이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이지만 사실은 그게 우연을 가장한 세상의 마땅한 법칙이란 것을.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토해 낼 줄 알아야 한다는, 공짜란 없다는 법. 이제 그 물위를 걷는다는 것도 처음처럼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온갖 굴곡있는 삶 - 공중곡예사에서부터 마피아의 실력있는 똘마니에 이르기까지 - 을 힘들게 달려왔던 월트도 마침내는 시간의 위력에 무릎을 꿇으며 말년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다 마침 자신의 재능을 사부가 발견한것처럼 그 자신도 한 아이의 재능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그래, 이제 제2의 월트가 탄생하는 거야.` 하지만 `이제는 예후디 사부 같은 사람도 없고 또 나처럼 멍청하고 완고하게 고통을 감내하는 아이도 없다.`는 생각이 든 순간 자조하며 자신의 설레이는 마음을 한숨으로 누그러 뜨려 버린다. 그랬다. 월트도 이제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멍청한 짓으로 간주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월트는 정말이지 그게 안타까운 것이다. 변치않을 것만 같던 시공간의 급속한 발전은 인간정신을 잃어버린지도 모른체 앞만 보며 달려 왔고 정신을 몽땅 잃어버린 이제는 그 누구도 대가를 치루면서까지 자기것을 희생하려 하질 않는다. 그저 요행을 바라며 천재일우만을 언제 오시나 목 빠져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월트의 뼈를 깎는 고통을 통한 자기 발전에는 그저 냉냉한 시선을 보낼 뿐이다. 모두들 자기를 조금씩 조금씩 증발시킨다면 하늘을 나는 위업조차도 누구나가 달성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만 속속들이 갇혀 있는 모습이 누구보다 못내 안타까운 월트.

`당신은 자신이기를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출발점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자기자신이기를 멈추기보다는 남들도 자신처럼이기를 바라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향한 월트의 소리없는 외침. 우리 곁을 휑하니 지나쳐 저 멀리 솟구친 <공중 곡예사>는 스피디하고 흥미스런 그 질주의 마지막에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파장을 일으켜 놓는다. 이제 그 파장에 고통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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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의 부리 -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
조너던 와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추천 / 이끌리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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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진화론. 아직까지도 특정 종교와의 지루한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서로 가타부타 참견만으로 언성을 높이고 있다. 누가 옳든 그르든, 언제 그 논쟁이 끝나든 간에 서로의 사상이 담긴 하나의 이론으로 보는 것이 다원주의 사회의 도리인듯 하고 그것이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히지 않는 유일한 방편 일 것이라 본다. 물론 결국에는 한쪽은 승리의 미소를, 한쪽은 패배의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결과야 어떻든 간에 그런 생각의 기류에 편승하고 보니 나는 그 쪽, 진화에 눈길이 간다.

갈라파고스 군도. 그 옛날 다윈이 <종의 기원>을 펴낼 수 있게끔 모체가 되었던 그 곳. 이제 그 곳은 다윈이 아닌 그의 추종자들이 못다한 다윈의 연구를 되물림 받아 이뤄내고 있는 장소로 변모했고, 그 성과들은 다윈이 대만족의 미소를 지을만큼 확고한 것들이다. 특히나 이 <핀치의 부리>는 그 중에서도 대단한 것으로, 그랜트란 성을 가진 한 부부가 근 20년을 이 섬에 거의 눌러 살다 싶이 하며 `핀치`라는 새 하나로만 연구를 한, 결코 범상치 않은 보고서 일기다.

거의 20년이라는 세월을 무인도인 그 좁은 섬에서 짓눌려 지낼 수 있을까? 그것도 연구라는 하나의 열정만으로. 집안에서 편히 앉아 담배나 뻐끔뻐끔 피며(사실 담배는 안핀다.) 한가로이 책장이나 넘기고 있는 나에게는 경악 그 자체다. 이제 조용히 그 분들의 성과에 깊이 머리 조아리며 탐독을 준비한다.

우리는 사실, 어릴 때 배워서라도 갈라파고스 군도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리고 각 섬마다의 생물들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막연한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을 뿐, 실제로 그 섬에서는 무엇이 일어나며 무엇이 어떻게 변하는지는 정말 궁금한 미스테리 일 수 밖에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가볼 수가 없으니. 하지만 드디어 <핀치의 부리>에서 우리의 그 궁금의 갈증을 말끔히, 아주 깨끗이 해소해 줄 지식의 냉수를 마련했다. 자, 모두 자기의 잔을 준비하시라.

1mm의 부리의 길이 변화만으로도 전체 생물의 장래가 달리고 몇 g의 체중차이로도 자연이라는 생태에서는 밀고 밀리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울 수 밖에 없다. 사실 나처럼 일반적인 지식만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믿기 힘든 광경이라고 토로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고 그 사실은 그랜트 부부가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 거짓없는 자연의 연극. 편한 집에서 두다리 쭉 뻗고 관람 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지적 갈망에 또 하나의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지적 갈망의 향유. 그 매력적인 잔치인 <핀치의 부리>.

<핀치의 부리>에서는 알 듯 모를 듯, 쉬울 듯 어려운 진화에 대해, 그저 이론 전개가 아닌, 실제 관찰과 연구의 결과로써 유추를 하는 방식이라, 과학쪽에는 별반 지식이 없는 나에게도 큰 무리없이 다가왔다. 오히려 실제 현장에 와 있는 듯한 생동감에 들떠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비록 진화에 대한 완벽한 이해의 체계는 갖추지를 못했지만 실제의 관찰과 연구를 통한 그 과정에 나름의 틀을 확고히 세울 수 있었던것은 크나큰 수확이었다.

이제 그 크나큰 진화란 이론에 그저 멍하니 겁만 쥐어먹고 있던 분들에게도 그 문이 활짝 열렸다. 우리는 그 문을 열게끔 이제껏 노력해온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당당히 걸어들어가기만 하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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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의 검은 고양이
아라이 만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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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크 사티. 이 이름자를 듣고서 `아, 그 사람`하고 떠오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게다. 나 역시 `이단의 예술가 에리크 사티를 위한 헌시`라고 쓰여진 책 표지를 보고서도 허구 속 인물인 줄만 알았지 실존하였던 작곡가였으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엄연히 실존인물이었고 나름의 삶을 지녔던 한 인간이었다. 이런 나에게 역자는 대부분의 사람이 나처럼 느낄 것이라 말 하지만 그의 음악만큼은 생소하지 않으리라 장담한다. 즉, 결코 낯설지 않은 인물이란 말일터다. 사실일까?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이런 생면부지의 사람과 첫 대면을 해야 한다는 데에서는, 사교성을 떠나 낯설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들어본적도 없는 그와의 첫 만남을 위해 시간을 빼내야 하는 수고를 들여야 하는지 의구심이 드는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책속에서 은은히 풍겨져 나오는 인생의 음악소리에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귀기울이게 되었고 차츰 그 음악에 참여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에리크 사티. 프랑스 옹플뢰르 출신의 작곡가로 비록 살아 생전에는 그의 음악이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사후 사람들의 귀를 아주 놀랬켰다던 소박해 보이면서도 대단한 인물이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건조히 표현되는 그는 <에펠탑의 검은 고양이>에서 철저히 살아 숨쉬는 한 인간으로써 거듭난다. 그 인물의 환경과 주변 인물들, 내면심리 등이 아주 매끄럽게 진행되는 데에서 그는 더욱 돋보이며 사실적으로 나타나게된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는데에는 한 편의 인간드라마를 볼 때의 편안한 감정으로 대하여도 무리없는, 아니 그 자체가 이 음악의 드라마를 즐기는데 더할나위 없이 적당한 자세가 되어 버린다.

이런 <에펠탑의 검은 고양이>에는 한 여자를 놓고 갈등하는 모습에서부터 진정한 예술가로써의 고뇌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의, 진정한 인간다운 모습이 크로키처럼 신속히, 그리고 날카롭게 그려진다. 아티스트의 모습에서 그로테스크한 내면의 모습까지, 과감히 생략되면서도 부각되는 그 드라마 속에서 독자는 결코 혼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그저 그런 모습을 부담없이 즐기면 되는 것이다. 가끔 술집에서 열리는 파티장면은 마치 여기가 바로 그 무대인 마냥 생동감으로 넘치는, 나도 그 속에 참여하고 있다는 즐거운 착각에 빠뜨린다. 에리크 사티, 그 인생의 음악은 이런식으로 그로테스크하고 우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자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활기찬 것이었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 음악으로 태어나 음악으로 사라진, 이름만 들어도 주옥같은 음악가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에리크 사티`처럼 낯설기 그지 없는 자에게 다가가보는 것도, 첫 만남의 설레임과 더불어 기대감을 갖기에 충만한 것이었다. 그 누구들처럼 성공하여 만나기도 전에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 아닌, 생전에 빛을 발하지 못해 불우한 인생의 전조등을 비추는, `에리크 사티`같은 인물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에펠탑의 검은 고양이>. 작품전반에 나직히 깔리는 그 희뿌연 인생의 음악에 조용히 귀기울게 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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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 납치사건 1
김진명 지음 / 해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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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김진명`다운, 그가 썼다는 풍이 짙게 배이는 소설이었다. 그의 소설이 계속 두드려 맞으며 비판받아 온 고질적 문제인 변화없는 패턴과 구성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크나큰 이슈가 될법한 사건하나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추리와 탐험, 바로 김진명표 소설의 변함없는 설계도다. 하지만 그런 변화없는 설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이 여전히 명성을 유지하는 까닭은 바로 재미다. 일단 잡으면 놓기 힘들게 만드는 그 재미의 마력, 실로 벗어나기 힘든 김진명의 주문이다.

<황태자비 납치사건> 역시 재미하나는 보장 받는다. 우리 한민족의 깊은 저변의, 꺼내고 싶지 않은 자존심인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배경으로 그 내면의 일본 행적을 쫓아가 찾아낸다는, 소재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 재미의 극을 추구한다는 김진명표 향료가 가미 되어버렸으니 그 재미의 맛은 얼마나 진할 것인가.

하지만 그런 큰 재미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첫맛은 향기로워도 끝맛이 없다는것, 즉 재미 외에 남는게 없다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며 애국심이 솟아 났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부작용, 그릇된 애국심의 발로다.

몇몇 김진명씨의 작품과 더불어 <황태자비 납치사건>도 한, 일 감정을 지그시 부추기는 경향이 있는 작품이다. `이제는 일본을 그냥 한 나라로써 존경을 해 줘야지.`하고 있던 나조차 명성황후 시해 부분에 즈음하여 혐일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실로 당황스러웠다. 다른 사람들도 아마 별반 차이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이 책의 소재인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이 백번 머리 조아려도 시원찮은 판이다. 오히려 떳떳한 일본이니 한국은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소설이 지니는 극단적인 진행은 자칫 독자들에게 일본은 복수의 대상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 줄 수도 있다. 일본 새 교과서가 지니는 은근한 전쟁부추김과 한국 정복의 은근한 아쉬움은 이 소설의 극단적 진행과 정도의 차이와 방향만 조금 다를 뿐, 서로가 적개심을 가지게 한다는 데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은근한 저변의 자존심을 건드려 일으키는 민족주의적 애국심은 실로 위험하다는 것은 이제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비 납치 사건>은 한일감정을 교묘히 이용해 버렸고 특히, 저연령층에게 일본에 대한 나쁜 인식만을 심어줄 수 있는 안타까운 부작용을 뚜렷이 지니고 있다. 흥미를 위한 장치라고만 하기에는, 민족의 감정을 너무나 자극한다.

하지만 읽고난 후, 이런 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역시 흥미진진했다는 느낌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억측스런 추리와 진행이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전체의 흥미 면에는 기여하는 바가 없었을 뿐더러 그저 별 생각을 지니지 않으면 참으로 흥미로울 수 밖에 없는게 또한 사실이다. 재미하나 만으로는 만점도 모자라는 판이다. 하지만 민족의 자존심을 이용해 반일감정을 일으킬 수도 있는 등의 부작용을 고려한다면 딱 절반의 점수가 나을 듯 하다. 흥미와 부작용의 팽팽한 힘겨루기 상태. 판단은 독자의 몫.

잠깐의 자투리 시간이 날 때 즐겨 보시라. 너무나 흥미진진한 그 추리소설 같은 진행에 푹 매료 될것이다. 하지만 재미외에는 크게 건지지를 말라. 그것이 이 책을 즐기는 가장 알맞은 법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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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 박정희
최상천 지음 / 사람나라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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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에게 박정희만큼 유명하면서 또 그 만큼 덜 알려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토록 추대를 받는 인물이라면 그의 성장배경, 환경, 행적들이 꽤 알려질만도한데 우리의 대부분은 `박정희`하면 막연히 `카리스마 넘치는 독재자`, `경제 부흥의 아버지` 정도로 밖에는 떠오르질 않으니, 어디 수피즘이라도 신봉하는지 어떻게 이런 식으로 베일에 감쳐줘 있는 것일까?

그 사실은 꽉 막혔던 언론과 지식의 자유화가 꾸준히 추진된 여기에 이르러서야 그 나체가 살포시 드러난다. 이제까지는 언론통제라는 강력한 커튼 뒤에 몸 사리고 있던 박정희,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이제 그 커튼은 삭아 문드러졌다. 이제는 당신의 알몸을 감출데가 없소이다.

그 막막하던 커튼이 삭아내리며 우리의 코를 자극하는 `친일파`라는 냄새는 충격적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예사 친일이 아닌 아주 골수 친일의 자극적인 냄새. 하지만 솔직히 이 시대 군중들의 친일파에 대한 강도높은 적개심과 비난은 명분이 없다. 그저 해방된 편안한 시대에 태어나서 `이런 매국노들!` 하고 외치는 모습들. 하지만 실제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자기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어찌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아무렴.

그런데 내가 갑자기 친일파 동정론의 색채를 띄는 까닭은? 그 만큼 대놓고 그들을 비난할 것은 아니란 의미에서다. 물론 잘한짓도 아니지만 인간에게는 두려움이라는 본능이 있다. 그 본능에 굴복해 버린 인간에게는 미워도 용서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무서워서 친일했어요` 하는데 뭐라하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잘 봐주려 해도 `인간 박정희`의 친일은 정도가 심했다. 특히나 <알몸 박정희>를 보고 있자면 심히 심장이 부담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알몸 박정희>는 박정희를 드러낸다는 공로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참고로서의 가치만 지닐 뿐, 사실명제로서의 가치는 지니기 힘들다. 아니, 지닐 수가 없다. 바로 객관력 상실이 문제다. 저자의 박정희를 싫어하는 마음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타도 박정희`의 전제 마음이 모든 독자들에게도 있을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이런 자세는 독자들에게 반감만을 일으킬 뿐. 이런 효과는 저자도 원하는 바가 아니였을터인데..

그리고 군데군데 비판가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망언마저 나온다. 그중, `일본을 보면 꼭 단세포동물을 보는 듯하다. 달랑 빨간 동그라미만 그려놓은 국기..... 밀어내기 밖에 없는 스모, 우르르 몰려다니고 줄줄이 따라다니는 꼬봉 근성, 소설이나 영화 하나로 전 국민이 울음바다가 되는 풍경, 보들보들하지만 어김없는 기계적인 태도, 모든 것이 단순성의 극치다.` 란 부분은 정말이지 저자의 단순성의 극치다. 이건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지 결코 사실이라 볼 수 없다.

이런 부분들은 참으로 아쉬웠다. 좀더 객관력과 공정성을 지녔다면 누구에게나 무난히 권할만한 책이 되었겠지만 객관력을 상실한 저자의 `나홀로 흥분 모드`는 차마 아무에게나 같이하자고 하기에는 거북하다.

박정희, 젊은 층에는 부정적 면이 많이 부각된다. 하지만 실제 그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에게는 정치야 인물이야 어떻던 `식량`이라는 궁극적 생존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영웅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양측의 조화로운 시선을 수용하기에는 <알몸 박정희>, 너무 한곳으로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런 한곳으로만의 집중을 강요하기에는.....시대가 너무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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