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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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기행이라는 놈과 대하고 있자면 그 속에 장황히 펼쳐지는 -오솔길하나, 잠시 앉았던 돌덩이 하나- 그 모든 것이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동시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아도 변함없는 나의 고정불변한 위치에 안타까움이 치밀어 오른다. 무료한 일상에서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픈 욕구를 울컥 솟게 만드는, 시덥잖은 구석에서 드러누워 책장을 넘기는 나에게,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게 싶게 하는, 도발적이지만 유쾌한 매력의 솜덩어리 기행. 그 매력은 나의 모든 정신을 스멀스멀 흡수해 버린다.

<나를 부르는 숲>은 나의 그런 도벽적 충동심을 유발하기에 기가막힌 재치를 지니고 있다. 저기 멀리도 있는 -요즘은 비행기란 문명의 이기로 금방 가기도 한다만- 미국의 애팔래치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이미지를 그리게 만드는, 등산이란, 자연이란 바로 저런거야라는 생각을 명징하게 그리고 유쾌하게 그려내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사실 브라이슨과 떠나는 그 길은 첫걸음부터가 한바탕의 유쾌한 소동이다. 어느날 결심한 산악행. 그 산행을 위해 투덜거리면서도, 직원의 귀찮은 설명을 들어가면서도, 장비를 잔뜩, 푸짐하게도 산다. 그러다 우연히 접하는 숲속의 귀염둥이 곰의 안부.

나무로 도망쳤는데도 따라와서 사람을 죽였다더라, 총을 여러방 맞았는데도 사람한테 돌진하더라. 죽은 척하는건 소용없다더라. 텐트속에 누워 있는데도 곰이 들이 닥친다더라. 특히 요즘의 곰들은 좀더 포악해졌다, 그의 침대 위 엷은 램프에서 눈이 접시만해지며 곰의 안부와 조우하고 있을때, 독자들을 향해 봉긋 솟아 있는 표지의 곰의 얼굴모습은 보고있는 이를 키득거리게 만든다.

이 책의 매력은 그런 유쾌함과 키득거릴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여기에는 일단 숲을 향한, 나도 한번쯤 이 기회에 산과 만남을 가져야겠다는 충동심의 묘한 매력과, 절대 사람을 부추기거나 강요하지않는 소박함이 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잡으며 그들은 등반을 완벽히 끝내는 영웅적인, 초월적인 의지를 지니는 인간일거라 머릿속에 뭉실뭉실 그려냈을게다. 하지만 그 뭉실거리는 이미지는 그들과 대면하는 순간부터 처참하게 뭉그려져 버린다. 빌 브라이슨과 그의 동료 카츠는 아주 평범한, 너무나 평범해, 건너편 인상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이 소박해만 보이는 인물들일 뿐이다. `에이~ 브라이슨과 카츠가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나선다고? 핫 농담하지마~` 특별히 유달은 성격도 아니고 몸이 날쌘것도 아닌 그들. 그들은 모험에 설레는 공포심을 지닌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설레는 공포심을 우리도 공유하게 된다.

너무 힘들어서 `우리 트럭을 타고 바로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 결국 중간지점을 새초롬 빼먹고, 힘들다고 `이봐, 카츠. 우리 식량 어딨어? 설마 커피 걸리는 필터도?` 필수적인 짐을 냉팡냉팡 내동댕이 치는 둘의 익살극, 그리고 우리가 공포와 친근한 만큼 그들도 딱 그만큼 공포를 대하는 모습. 그리고 종종 겪는 좌절.

이것은 영웅심리에 도취되어 `여러분,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절대 여러분이 할 수 없는 대단한 산악을 성공했답니다.`라는 산악인과는 달리 우리의 마음에 너무 와닿게 된다, 심지어 그들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니..

`누가 뭐래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우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다.`며 그들의 행로에 뿌듯한 자신감을 가지는 그들에게서 도전이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전문인이 아닌 우리도 떠날 수 있다는 자신감,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부담을 떠 넘기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우리는 들뜨게 되며 그 붕붕뜬 기분속에서 일순간의 웃음을 벗어난 그 무엇과 대면하게 된다.

우리의 쉼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동행해 주었던 <나를 부르는 숲>은 그 동행의 끝에 남겨두는 `부담`이란 부담스러운 존재가 없어 더욱 솔직하며 담백하다. 빌 브라이슨, 카츠와 떠나는 유쾌한 산행. 그들만의 투덜거림에서 키득거리는 재미를 얻을게다. 그 키득거리는 재미 속에서 푸르른 숲의 상쾌한 뒷맛을 음미할 수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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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1 이외수 장편소설 컬렉션 6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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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각에도 인간이란 족속의 발이 닿는 모든 곳에서 살육과 전쟁이 자행되고 있다. 생존본능을 위한 마지막 수단이 아닌 욕구본능과 짝짜꿍 손잡고 저지르는 동족상잔의 기가막힌 논픽션 드라마. 문득 어떤 영화에서 본 대사가 생각난다. 기계가 인간에게 한 소리다. `인간의 본능은 인간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고 죽이는 괴물같은 구조 속에 얽혀 있는 우리. 우리는 그 구조를 사회라 부르고 있다.

그 사회라는 어쩔수 없는 무대 속에서 상연되는 <괴물>에는 제법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부끄럼없이 마구마구 등장하는 그 인물들을 보고 있자면 관객들 머리 속이 쉴새없이 산만해 진다. 하지만 그 산만한 분위기 속에도, 그 인물들이 서로 얽혀 있음을 서서히 알아차리게 된다면 당황스러워진다. 사회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 살인마에서 경찰, 전직 심리학자까지- 산만해 보이는 분위기 가운데에서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끈을 잇고 있다는 것이다. 그 끈을 따라가다보면 복잡성에 지루함을 느낄때도 있지만 도처에 널려있는 인물의 매듭을 알아보며 즐거움을 느낄때도 있다.

하지만 <괴물>이 뿜어내는 연극의 내용은 크게 놀랄 게 없다. 한 살인마가 등장하고 살인마가 등장하면 당연히 나와야 할 살인마를 뒤 쫓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의 에피소드들. 사실 범인을 잡는 과정을 보면 추리도 아니고, 액션도 아니다. 연애도 아니고 댄스소설도 아니다. 이렇게 어중간해 보이는 구조를 쳐다보는 관객들은 저마다 평이 갈린다.

`너무 멋졌다. 복잡한 가운데 굴러가는 사건의 진행에 찬사를 보낸다.`
`너무 산만했다. 뭘 나타내고자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실패작이다.`

이 유명한 연극의 평은 이렇게 극과 극으로 갈린다.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빈틈없는 이야기의 전개에는 전자의 손을 들어주지만 또한 전체적 분위기를 살피면 후자의 손을 들어 줄법하다. 이렇게 밖에서 서로의 의견에 가타부타 참견하고 있을 때 소설 속에서도 그 시선이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바이오필리아`와 `네크로필리아`. 그 둘은 결코 화해 할래야 할 수 없는 극과 극의 존재다. 그 존재들이 자기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전쟁, 그 전쟁의 뒤안이 바로 <괴물>이 흘러가는 나루터다.

바이오필리아의 눈에서는 당연히 네크로필리아가 괴물로 밖에 보일 수 없을게다. 어떻게 인간으로 저럴 수 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네크로필리아의 시선또한 곱지 않다. 저런 미개한 것들. 죽음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너희 미개인들이야 말로 괴물 그 자체다. 이렇게 괴물 뒤집어 씌우기 작전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작전이 벌어지는 전쟁터는 합의를 보고 있으니, 바로 사회다. 작가는 사람들을 주목한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이토록 미치게 만드는 사회란 괴물을 주목한게다.

소설은 당연히 바이오필리아의 행로를 따랐다. 그리고 네크로필리아에겐 용서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사회란 공간 속에서 이질적 한 존재는 괴물로 치부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괴물> 속의 윤현부만이 유일하게 그 이질적 존재를 포용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사회에서 벗어나 자연에 머무르고 살고 있는, 유일하게 사회에 독립된 인물이었다. 이외수. 그는 우리가 사회를 그저 사회라 부르는 동안 또 다시 그 만의 시선으로 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작가의 눈에 비친 바이오필리아의 승리는 결코 승리로 비춰지지 않았을 터다. 그 괴물 사회를 독식한 또 다른 괴물의 한 모습...

흔히 이외수 작가를 언어의 연금술사라 한다. 나도 그의 연금술법을 익히기 위해 항상 그의 강의에는 노트를 끼고 다닌 기억이 난다. 내가 이렇게 떠들고 있는 사이에도 책 속에서는 그만의 연금술이 쉼 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연금술은 결코 호락하지가 않다. 그동안 이외수급 연금술을 즐겼던 분들에겐, 이제 입문을 벗어나 중급의 단계에 다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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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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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 올라 밖을 한 번, 창가에 기대어 밖을 한 번 무심코 쳐다본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수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나의 시야에 뛰어든다.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람, 뛰어가는 사람, 친구를 보고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사람, 화를 내며 고함치는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이런 사람들의 모습들을 가만히 앉아 쳐다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삶이 애처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들의 소리는 절제된체 보여지는 하나 하나의 행동들, 아련히 멀게만 느껴지는 액자소설 같이, 내 삶에서 보여지는 또 다른 그 들만의 삶. 나의 시야에서 점점이 멀어지는 하나 하나의 삶들, 또 다시 들어오는 다른 하나 하나의 삶들. 모두들 하나같이 아등바등 살아가려는 모습이 딴은 처량하게 비춰지는 때가 있는 거다. 무성영화 같은 무대 속에서 지나가는 인간의 모습들, 그 남겨논 뒤안이 처량하게 보일 때가 있는 거다.

뒷모습. 이처럼 그 뒤란 말을 입안에서 오물거리고 있자면 순수하면서도 쓸쓸한, 그리고 처량한 맛이 살포시 배여 나온다. 나에게서 등을 보이고 있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들만의 담담한 삶의 뒤안처. 오히려 그 담담한 뒷모습에서 더 큰, 숨겨진 외로움이 느껴진다. 되려 매너리즘으로의 퇴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뒤`라는 어감이 주는 감미롭고도 그리운 맛은 한번쯤 자기 자신을, 나아가 인간군상을 다시금 한 번 살펴보게 한다. 저기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 오늘따라 그들의 뒷모습에 애절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여기 이 책. <뒷모습>에서는 인간이 지니는 가식적인 모습을 잠시 떠나, 인간의 뒤안이 가지는 그 순수하면서 꾸밈없는 모습을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한 쪽 면에는 큰 사진이, 다른 면에는 글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은 흑백이라 그 모습이 더욱 좋고 그 자체로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어 더 애절하다. 오히려 컬러사진이 뽐내며 어지러이 자리잡고 있었다면 흑백이 주는 고요하면서도 애절한 맛을 느끼지 못했을 게다.

이제 인간군상의 그 뒷모습에, 모노드라마 같은 흑백의 잔영으로 함빡 빠져들고 있노라면 자연 감상적인 내가 된다. 그 뒷모습이 인간의 모습이고, 또한 나의 모습이기에 나의 감정은 뒤얽히게 된다. 하지만 그 얽힘이 결코 불쾌하진 않다. 오히려 뜻밖의 새로움을 줄 뿐. 누가 이 얽힘에서 쉬이 벗어날턴가? 예부터 얽힌 것은 풀기가 어렵다 했다. 그것이 실이든, 감정이든 말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글이었다. 차라리 사진만 실었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보며 적혀있는 작가의 글은 그 사람이 얼마나 유명하든, 중간에 가끔 인용되어 있는 시 한편이 주는 미감(美感)보다 훨 못했다. 사진을 보며 그 애틋함에 무르젖어, 분위기에 도취되고 있으면 글은 거기에 과감히 찬물을 끼얹는 꼴이었다. 감상적인 내가 아닌 분석적인 내가 되길 강요하는 글. 누구든지 이 책을 보며 사진을 분석적으로 잘 `설명`해 주길 바라진 않을게다. 하지만 <뒷모습>에서의 글은 감정이 거의 배제된 분석적 글이다. 번역의 문제일까? 아니면 동서양 정서의 차이일까...

책은 덮었지만 참으로 아쉬운 나의 마음은 덮이지를 못했다. 아직은 덮히지 못한체 그 끝만이 오기를 바라는 나의 안타까운 마음. 하지만 `뒷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여유로움은 짧으면서도 충분히 사색을 즐길 수 있었기에 안타까운 나의 마음을 조금은 누그러 뜨릴 수 있었다. 과연 나의 뒷모습은 어떠할까?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뒷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커피 한잔과 함께하는 흑백의 사진들. 나의 모습을 조용히 살펴보기에 결코 어색하지 않은 조합이 될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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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 - 20세기 유럽, 야만의 기록
피터 마쓰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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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각에도 이라크에는 전쟁의 물결이 쉼 없이 일렁이고 있다. 쏘고, 터지고, 죽고. 옥석구분도 유분수지, 전쟁에서는 성직자건 도둑이건, 부자건 거지건, 너나 할 것 없이 포탄의 머리 하나에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 잘보여도 소용없고 밑보여도 상관없는, 포탄이 가지는 냉정함은 안타까울 따름. 이 의미 없는 정치논리의 연극무대,그 연극은 공포물 그 자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자인 피터 마쓰가 보스니아사태 때 직접 현장에서 발로 뛰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한 편의 전쟁보고서이다. 겹겹이 덮여져 있는 그 보고서를 펼치면 바로 눈앞에 한 편의 비극이, 한 편의 공포물이 상영된다. 같은 나라 속에서 쏘고, 죽이는 모습. 어제는 어깨동무하며 노래부르던 이들이 오늘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살해, 강간, 고문을 하는 모습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또한, 그 아이러니한 무대 속에 어김없이 조연으로 등장하는 주변의 강대국들. 그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어김없이 정치논리에 의한 연기를 한다. 조금이라도 인정이 섞여 있으면 NG.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골육상잔의 아픔, 주변 국가들의 행위는 그 아픔과 경험을 우리 역시 가지고 있기에 그 현장이 더 비통하고 쓰라리게 비춰진다.

많은 이들이 전쟁의 무서움은 참여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이 없다는데에서 기여한다곤 한다. 그저 위에서 `쏴라. 죽여라.` 하니까 `오냐, 쏘마, 죽이마.`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던 인간의 목숨이 사라지는 총탄보다 못한 곳 전쟁터. 이런 자의식 없는 행동 속에서, 인간생명은 널부러져 있는 총탄 한 발보다 더 귀중할 게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삶의 기로에, 삶의 지옥 저편에 떨어져 있다. 내가 평화를 외치며 총을 내려놓는 순간 바로 죽음을 맞이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저 살기 위해 쏘는 것이다.

전쟁의 진정한 무서움은 바로 지도자에게서 비롯된다. 김일성이 그랬고 히틀러가 그랬고, 부시가 그렇다. 그들이야말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그저 책상에서 턱이나 괴고 앉아 있는 진정한 살육잠재의 표본이다. 한쪽에서는 죽고 한쪽에서는 휴가나 보내는 그림은 언뜻 상상만 하려고 해도 힘에 부친다.

보스니아 사태 때도 매한가지다. 밀로셰비치. 그는 인간이 야수가 될 수 있음을 원 없이 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의 야수성에 몸서리를 치지만 사실 그 자신은 자기가 야수가 된 줄도 모르고 그저 웃고만 있다. 자신은 악이 아니라며, 그저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던 그. 그러면서 뒤로는 사람을 마음껏 능욕하고 살육하라고, 그것이 애국이라 세뇌 시키는 그. 이 치장된 그의 말속에서, 그동안 절망하며 죽어갔던 많은 이들의 의미가 사라진다.

이런 지도자들의 웃음과 현장의 울부짖음이 가지는 아이러니를 <네 이웃을 사랑하라>에서는 잘 드러내준다. 각색되지 않은 사실 그 자체를 내보내는데에서, 우리는 그 자체에 더 경악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리는 살육명령. 복종이 곧 애국이라 세뇌된 군인의 칙살스런 행동들.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지? 주변 나라는 뭘 하는 거야?

이렇게 사실 그 자체를 보여줌으로 해서 우리는, 각색이 제한하는 사고의 폭을 벗어나,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스스로 느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피터 마쓰도 그냥 사실만 전달하겠다 했다. 전쟁반대서도 아니고, 정치비판도 아니고,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만을 전달하고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실 전달로써 할 일을 다하고 떠나는 피터 마쓰를 따를 일이 아니다.

우리의 망각 속에서 사라져갔던 수많은 이들의 울부짖음들. 그 상흔이 체 아물기도 전에 또, 지구편 저기서 다른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깨닫지도 못한사이 세상을 떠나는 그들의 비명에, 이제는 귀기울여야 한다. 더 이상 망각의 수레에 끌려다니는 모습은 우리에게 맞질 않는다. 이제는 생각해보고, 느껴보고, 자기 스스로 각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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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박종대, 모명숙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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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 운명이란게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잘 있던 건물이 허리 아프다며 무너져 내려 사람들이 떼 죽임을 당하고, 잘 날아가던 비행기가 갑자기 땅이 그립다며 곤두박질을 치고, 그런 와중에 요행히도 죽음의 손목을 뿌리치고 살아나오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자행되는 피눈물 나는 연극을 지켜 보고 있으면 정말 운명이란게 있는가 보다 하고 녹슨머리가 낑낑 굴러 간다. 물론, 그것이 운명의 가면을 짓눌러 쓰고 눈치만 요리조리 살피다 담을 뛰어 넘는 우연이란 놈의 소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이든 뭐든 우리에게 시뻘건 눈을 치뜨고 달려와 한 방 먹여 정신이 없게 만드는데에는 우리의 무서운 눈초리를 피할 도리가 없다.

<운명>. 임레 케르테스가 소년기에 실제로 겪기도한, 운명의 펀치 위력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던, 독일 수용소 체험을 개인적 관점에서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하면 그 악명이야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자기가 어디까지 치솟는지도 모를 만큼 폭상하는건 익히 알고 있을게다. 15세 소년이 겪어내야만 하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같은 수용소 생활. 어린 소년이 겪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운명과의 교통사고. 수용소 생활이 너무 힘들어 소년에게 염증이 하나 하나 생길라치면 내 마음은 눅진눅진 내려 앉았고, 소년이 절뚝절뚝 걷지를 못하면 내 생각도 터벅터벅 풀이 죽곤 했다. 그렇게 고생한 소년에게 누구라도 만나면 이런 말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게다. `끔찍했지? 이젠 모두 잊어버려.`

하지만 소년은 그 잊기를 거부한다. 되려 그 지옥 같은 수용소 속에서도 일말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고 말해, 듣는 이의 턱이 내려올 수 있는 한계를 가늠해 보는 시험을 한다. 사실 소년은 그 체험이 자신의 머릿속에 걸어 들어온 이상 결코 내 보낼 수는 없는, 그 누구도 가타부타 참견할 수 없는 자기만의 것이라 여긴 것이며 바로 그 혼란스런 운명과의 한판 경기에서 스스로가 극복했기 때문에 절대 그것을 잊을 필요가 없는, 오히려 극복의 대상으로써 행복감마저 찾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거였다. 그래도 이제 괴물 `운명`을 넉다운 시키고 공주 `자유`를 구출했는데도 하필이면 그 때의 악몽을 간직하려는지 주위사람들이 이해의 손길과 닿지를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소년은 분명히 외친다.`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없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곧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지? 왜 나한테 이런 운명이 찾아 온거야? 아니, 소년은 운명이란게 자신에게 온 것이 아닌 매분 매초가 운명으로 향한 걸음, 자기 자신의 행동 속에서 발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 운명이요, 나 자신을 극복하는 순간이 자유며 그 극복된 운명은 나에게서 싹을 틔운 만큼 악령적인게 아니란 말이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자기가 직접 물주고 거름주며 길러낸 운명의 싹. 비록 잘못 커도 책임은 자기 몫이다. 비록 그 때가 지옥이라도 책임지고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이 곧 운명이다`란 말로써 그 시대가 잊혀지기를 강력히 거부하는 소년, 아니 임레 케르테스는 나 자신이 운명인만큼 자신이 걸어온 나날들을 잊는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며,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자기 스스로가 지워 없애는 거라 말하고 있었다. 흔히 냄비근성이라 안 좋게도 불리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열기. 우리는 지난 날들의 일에 대해서 그냥 어쩔 수 없었다고 넘기곤 하고, 막상 부각되어도 쉽사리 잊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런 처사는 우리자신을 점점 잊어가고 있는 두 눈 멀쩡히 뜨고 자기자신을 소매치기 당해버리는 청맹과니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나치 수용소의 비극만을 나타낸게 아닌 숙명적 운명의 정복론을 과감히 내세운 <운명>. `운명은 없다`고 나타내는 원제로 전세계인의 동정과, 공감과 반성 모두를 얻어낸 <운명>은 `노벨 문학상`이란 대어를 낚기에는 결코 과분하지 않은 너무나 알맞게 드리워진 낚싯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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